나를 만나는 길---5월의 산사(山寺)

 
     틱낫한 스님의 명상마을 풀럼 빌리지를 조명한 영화 나를 만나는 길(Walk With Me)을 보았다. 명상을 통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찾아가는 모습이 감동적인 영화였다.
     풀럼 빌리지는 아닐지라도 촌부에게는 고요한 산사가 곧 평화와 행복의 처소이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그곳으로 발길을 돌린다. 5월에 찾은 산사들은 푸르름 그 자체였다.

 

화엄사, 금정암, 연기암, 구층암, 천은사

 

     오래전부터 덕은(德隱) 대사와 함께 가보자고 벼르던 화엄사를 2022. 5. 13. 마침내 찾았다. 대사와 친분이 두터운 주지 덕문스님이 반가이 맞아주셨다.

 

Screenshot 2023-05-18 at 15.48.45.JPG[화엄사 전경]

 

     화엄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의 본사로서 국보(5)와 보물(8) 등 많은 문화재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각황전(覺皇殿. 국보 제67)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데, 대웅전과 함께 화엄사의 주된 법당 역할을 한다.

    각황전의 구조는 정면 7, 측면 5칸의 다포식 중층건물로, 현존하는 중층불전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내부 공간은 층의 구분 없이 통층(通層)으로 되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안에는 장육존상(丈六尊像)의 석가모니불을 본존불(本尊佛)로 하고, 협시불(脇侍佛)로 좌우에 아미타불과 다보불 등 세 여래(三如來)와 보현보살, 문수보살, 관음보살, 지적보살(知積菩薩) 등 네 보살(四菩薩)을 봉안하였다.

 

     각황전 앞에는 넓은 마당이 있고, 그 중앙에는 6.4m 높이의 석등(국보 제12)이 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우리나라 석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image01.jpg[각황전과 석등]

 

    각황전은 본래 통일신라시대 건립되었다. 그 당시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다. 석가모니불의 몸이 16척의 키에 황금색 피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고 하고, 생존 시와 똑같은 모습과 크기로 만든 불상을 장육존상(丈六尊像)이라고 한다. 그래서 장육전(丈六殿)은 장육존상(丈六尊像)의 석가모니불을 모신 법당이라는 의미이다.

 

     이 장육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702(숙종 28) 중건되었다. 중건 후 숙종 임금이 친필로 쓴 각황전(覺皇殿)이라는 편액을 내려 그때부터 각황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러면 숙종 임금은 왜 석가모니불을 모신 법당에 하필이면 각황전이라는 친필 편액을 하사한 것일까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화엄사의 주지 계파(桂波) 스님이 임진왜란 때 불탄 장육전을 새로 지으려고 했지만 돈이 없었다. 하루는 스님이 중건을 서원하는 기도를 밤새 하고 있었는데 비몽사몽간에 문수보살이 나타나 말했다.

 

    계파여, 큰 불사를 성취하려면 그 불사와 인연 있는 진실한 화주승(化主僧)을 선발해서 그 화주승이 복 있는 시주(施主)를 만나야 하느니라. 물을 담은 항아리와 밀가루를 담은 항아리를 준비하고, 먼저 물 항아리에 손을 담근 다음에 밀가루를 담은 항아리에 손을 넣어서 밀가루가 손에 묻지 않은 승려가 장육전 중건의 인연이 있는 진실한 화주승이니라.

 

     계파선사는 화엄사 스님들에게 문수보살의 계시를 전하였고, 화엄사 산내 스님들 천여 명이 응시했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공양간의 공양주 스님이 시험에 통과하였다. 계파선사를 비롯한 화엄사의 스님들은 그 공양주 스님에게 장육전을 중건하는 화주승의 중책을 맡겼다.

    그런데 공양주 스님은 출가하여 승려가 된 후, 수행방법의 하나로 오직 공양간에서 대중공양만 지었을 뿐, 시주를 받는 일에는 아는 게 전혀 없어 걱정이 태산이었다. 공양주 스님은 할 수 없이 문수보살께 지혜를 구하는 백일기도를 하였고, 그 기도가 끝나는 날 밤 꿈에 문수보살이 다시 나타나 말했다.

 

    “너는 내일 아침 길을 나서서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부탁해라. 그 사람이 장육전을 짓게 해 줄 것이다.

 

     스님은 다음 날 아침 일찍 길을 나섰고, 한참 가다 보니 저쪽에서 한 사람이 걸어왔다. 그런데 막상 그 사람은 가끔 절에 와서 밥을 얻어먹는 거지 노파였다. 스님은 난감해하면서도 문수보살의 계시에 따라 거지 노파에게 큰절을 한 후, 지난밤 꿈의 문수보살 이야기를 하고 시주를 부탁하였다가진 것 없던 거지 노파 역시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내가 죽어서 돈 많은 사람으로 태어나 그 돈을 시주하겠습니다.

 

고 하고는 섬진강에 투신하였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스님이 말릴 새도 없었다. 이 거지 노파는 실은 경주 명문가의 딸이었는데, 집안이 역모의 누명을 쓰고 멸문지화를 당해 신분을 숨기고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스님은 거지 노파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에 화엄사를 떠나 속죄의 기도를 하며 정처 없이 유랑을 하였다그로부터 6년 뒤 스님이 한양의 궁궐 근처를 지날 때였다.

    궁궐 밖으로 나들이를 나온 숙종 임금의 어린 공주가 스님을 보자마자 달려가 안기며 손바닥을 펴 보이는 것이었다. 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한 손을 꼭 쥔 채 한 번도 펴지 않았는데 스님을 보자 손바닥을 편 것이다. 그리고 그 손바닥에는 놀랍게도 장육전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섬진강에 뛰어든 거지 노파가 공주로 환생한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숙종 임금은 감격해서 장육전을 지을 수 있도록 시주금을 하사하고 각황전이라는 이름까지 내려 주었다. 그 의미는 임금으로 하여금 윤회의 깨달음을 얻게 한 전당이라는 것이다. 숙종 임금 25년의 일이다.

(일설에는, 어린 공주는 숙종 임금이 아니라 동시대 중국의 황제 강희제의 딸이며, 강희제가 시주금을 하사한 이야기를 들은 숙종 임금이 자신도 시주에 동참하면서 황제를 깨닫게 한 전당이라는 의미로 각황전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화엄사에서 하룻밤을 지낸 곳은 본사에서 산 위로 좀 더 올라간 곳에 있는 금정암(金井庵)이다. 암자치고는 규모가 제법 큰 이 암자에는 귀빈용으로 만든 숙소가 있다(별도의 침실에는 침대도 있다). 법당 중 3층 탑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극락보전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주지인 연공스님은 덕문스님의 상좌이다.

     한밤중이 되도록 쉽게 잠을 못 이루어 절 마당으로 나서자, 암자 위로 뜬 보름달이 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구름 사이로 잠깐 얼굴을 내민 그 모습이 실로 뇌쇄적이다.

 

머리를 들어 산 위의 달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고향을 생각한다

(擧頭望山月 低頭思故鄕. 거두망산월 저두사고향)

 

라고 했던가.

비록 촌부가 이태백은 아닐지라도 그 시정(詩情)만큼은 공감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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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03.jpg[금정암의 이모저모]

 

     금정암에서 밤을 보낸 후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금정암 위로 나 있는 길을 걸었다. 내원암, 미타암을 지나 청계암까지 계곡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물소리 새소리를 벗 삼아 홀로 걷는 길이 호젓하기 그지없다.

     비록 포장도로이긴 했지만 탓할 일이 아니다. 무념무상으로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인데 아무렴 어떠랴. 거창하게 물아일체(物我一體)까지 들먹이지는 않더라도 지리산의 대자연 품속에 나 홀로 안겨 하나가 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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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엄사의 산내 암자]

 

 

     포행에서 돌아와 아침 공양을 마친 후, 연공스님의 안내로 스님의 SUV 차를 타고 연기암으로 갔다. 화엄사의 산내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다. 금정암에서 차로 10분 거리이다.

 

Screenshot 2023-05-18 at 15.49.26.JPG[연기암 전경]

 

     이 암자에는 특이하게도 라마교(티벳불교)의 상징인 마니차(윤장대)가 있다. 어떤 연유로 마니차가 이곳에 설치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섬진강의 아름다운 풍경에 눈길이 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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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암의 마니차]

 

     이 암자의 전각 중 가장 절다운 모습과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절집은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관음전이다. 그 고풍스런 모습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안에 들어가 삼배를 올렸다

     반면에 이 절에 조성한 문수보살상(높이가 13m)은 너무 커서 왠지 부조화한 느낌이다.

 

image06.jpg[연기암 관음전]

 

     연기암에서 내려와 구층암으로 갔다. 화엄사 큰 절에서 300m 정도 떨어져 있다. 화엄사를 찾으면 꼭 가보아야 할 곳으로 꼽히는 암자이다. 이유는 두 가지. 요사채 건물의 모과나무 기둥을 보는 것과 녹차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층암의 요사채 건물의 기둥은 일반적인 가공된 목재가 아닌, 자연 그대로의 모과나무를 사용하였다. 우리나라 옛 건축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건물이다. 350년 된 이 모과나무 기둥은 나무의 결과 옹이까지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image07.jpg[모과나무 기둥의 요사채]

 

      구층암(九層庵)에는 9층이 아닌 3층의 석탑이 있다.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인 10세기 무렵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이다.

      주지 덕제스님 말씀에 의하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구층탑이 어디 있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암자 이름과 탑이 불일치하기 때문일까?

     아니다. 삼층석탑은 그냥 삼층으로 만든 석탑일 뿐이고, 구층암은 암자의 이름일 뿐이다. 둘을 억지로 연관지으려니까 이상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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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층암 삼층석탑]

 

      구층암 주위에는 대나무 숲이 우거지고 야생의 차나무가 무성하다. 주지 스님이 대나무 그늘 아래서 이슬을 맞고 자란 차의 새순을 따 직접 죽로차를 만드신다. 말 그대로 수제차이다. 스님이 따라 주시는 차의 맛이 기막히다.

 

      경내에 그 차를 만드는 곳이 있어 가보니 외국인들이 여럿 차 만드는 실습을 하고 있었다. 용케도 알고 찾아온 사람들이다. 독일, 벨기에, 오스트리아.. 등등 국적도 다양하다.

      화엄사에서 소요되는 차를 이곳에서 공급하는지라 말사 주지인 당신께서 본사 주지인 덕문스님께 큰소리를 칠 수 있다며 웃으신다(두 분은 사형사제 사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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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09.jpg[구층암의 차를 만드는 곳과 차를 보관하는 항아리를 들어 보이시는 주지 스님]

 

    구층암에서 나와 천은사(泉隱寺)로 갔다. 구례에서 노고단 성삼재로 올라가는 861번 지방도 옆에 있다. 화엄사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다.

    절 옆으로 맑은 물이 흐르는 풍광이 아름다운 천은사는 화엄사의 말사이기는 하나, 화엄사,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의 3대 사찰로 일컬어질 정도로 역사가 깊고 유명하다. 역사적으로는 본래 천은사가 본사였다고 한다.

    현재 경내에는 20여 동의 건물이 있는데, 그중 주 법당인 극락보전은 조선 중기 이후의 대표적 사찰 건물로 손꼽힌다.

 

image10.jpg[천은사 극락보전]

 

     천은사는 신라 흥덕왕 3(828)에 덕운선사가 창건했다. 당시 이름은 감로사(甘露寺)였다. 그 후 전란 등으로 중창을 거듭하면서, 조선 숙종 때 천은사로 바뀌었다. 이처럼 화엄사나 천은사 모두 숙종 임금과 시절 인연이 깊은 것은 무슨 연유일까.

     이 절의 이름이 바뀐 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1679(숙종 5)에 단유선사(袒裕禪師)가 절을 크게 중수했는데, 그 무렵 절의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무서움에 떨게 하였다. 이에 한 스님이 용기를 내 잡아 죽이자 그 이후로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泉隱寺)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처럼 절 이름을 바꾸고 가람을 크게 중창은 했으나, 절에는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하는 등 불상사가 끊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던 이무기가 죽은 탓이라 하였다.

 

     그 얼마 뒤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절에 들렀다가 이런 사연을 들었다. 이에 이광사는 마치 물이 흘러 떨어질 듯한 필체(水體)智異山 泉隱寺라는 글씨를 써 주면서 이 글씨를 현판으로 일주문에 걸면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사람들이 의아해하면서도 그대로 따랐더니 신기하게도 그 후로는 불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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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사 일주문의 글씨]

 

     천은사는 절 앞에 있는 저수지(=천은저수지)도 관광명소이다. 저수지를 따라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한 바퀴 도는데 3-40분 정도 걸린다.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찻집이 있어, 그곳에서 차를 한 잔 마신 후 연공스님의 차로 구례역으로 향했다.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끝까지 수고를 해 주신 스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image11.jpg[천은저수지]

 

반룡사

 

     화엄사를 다녀온 1주일 후 2022. 5. 20. 경산의 반룡사(盤龍寺)를 찾았다. 대구고등법원에 근무하던 시절인 1989년의 한여름에 팔공산 기기암을 갔다가 그곳에서 하안거를 보내시던 혜해스님을 처음 만났다. 그때 스님 덕분에 처음으로 말차(抹茶=가루차)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소식을 모른 채 오랜 세월이 지나다 몇 년 전에 우연찮게 스님이 반룡사 주지로 계신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반룡사를 몇 번 찾았다. 올해도 그 연장선상이다. 불법(佛法)으로 맺어진 인연이 계속됨에 이따금 놀라곤 한다.

 

image12.jpg[혜해스님과 함께]

 

     혜해스님은 언제나 특유의 밝은 웃음으로 사람을 반기신다. 당신이 텃밭에서 직접 재배하신 각종 신선한 야채로 밥상을 차려 내놓는다. 10년이 넘는 도라지로 담근 술도 빠지지 않는다. 이럴 때는 술을 못 하는 게 아쉽다.

 

     은해사의 말사인 반룡사는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주석한 곳이다. 원효대사와 사랑을 나눈 요석공주가 설총을 임신한 채 원효대사를 만나기 위하여 원효대사의 고향집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원효대사의 고향인 불지촌에서 설총을 출산하였다. 막상 아기를 낳았지만 혼자 키우기 어려웠던 요석공주는 어렵게 수소문하여 반룡사로 원효대사를 찾아갔다.

     이때 신라의 무열왕 내외가 몰래 경주에서 반룡사까지 와서 딸 요석공주와 손자 설총을 만났다고 한다. 무열왕 내외는 반룡사의 뒷산(=반룡산)에 있는 오솔길을 넘어왔고, 이로부터 그 길이 왕재길로 불리게 되었다. 이 길은 당시 경주와 경산을 잇는 지름길이었다.

 

image14.jpg[왕재길]

 

     이처럼 유서 깊은 반룡사는 오랜 새월이 흐르는 동안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그런 절을 혜해스님이 직접 흙과 돌을 나르고 가다듬어 반듯하게 정비하셨다. 그 과정에서 어깨가 빠질 정도였다. 자금은 누각 주위에서 보는 낙조(落照)가 일품이다.

 

image13.jpg[반룡사의 낙조]

 

      반룡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새벽에 왕재길을 따라 뒷산을 올랐다. 스님이 기껏 힘들여 정비해 놓은 길인데 찾는 이가 거의 없다. 잡풀로 길이 덮일 지경의 길이지만, 아직도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설총, 무열왕 내외의 입김이 서려 있는 듯했다.

      원효대사 시절로부터  1,30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길을 걷고 있는 나는 누구를 만나러 가고 있는 것인가. 원효대사인가, 요석공주인가, 설총인가. 아니면 나 자신인가.

 

백흥암

 

      반룡사까지 간 김에 영천에 있는 백흥암을 찾았다. 한때 금남(禁男)의 집으로 유명했고, 이창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길 위에서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절이다. 역시 은해사의 말사이다.

 

     촌부가 백흥암을 찾은 이유는 이곳에 영운스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스님은 당신께서 가지산 석남사의 주지로 계실 때 처음 인연을 맺었다. 1999년 가을에 그 당시 사법연수원 교수였던 촌부가 다른 교수들과 영남알프스 등산을 위해 석남사에서 1박을 했는데, 스님이 말차(抹茶)를 타주시고, 산행 중에 먹을 떡을 챙겨주시는 등 참으로 세심하게 살펴주셔서 감사했다.

 

    그런데 그 후 오랫동안 소식을 몰라 궁금하던 차에 이창재 감독의 위 영화가 책으로 나왔고, 그 책에서 영운스님이 백흥암에 선원장으로 계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백흥암을 찾아가 15년 만에 스님을 재회한 이래 매년 한두 번은 찾아뵈었다.

     한번은 한여름 8월에 찾아뵈었다가 심마니가 전날 영월에서 캐온 산삼 두 뿌리를 주셔서 즉석에서 먹은 일도 있다.

 

image15.jpg[백흥암]

 

      언제나 그렇듯이 이날도 스님이 반가이 맞아주신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따로 점심 공양을 하였는데 손수 이것저것 챙겨주셨다. 이어서 스님 방에서 예의 말차를 타주셨다. 석남사 때부터 맛본 일품차이다. 이번에는 커피와 아이스크림까지 내놓으신다.

      고희(古稀)를 넘기신 분답지 않게 해맑은 웃음을 웃으시는 모습이 보기 좋다. 오래 수행하신 분만이 풍길 수 있는 여유라고 할까. 흔히 말하는 곱게 늙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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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17.jpg[영운스님과 말차]

 

송광사, 불일암, 향일암, 선암사

 

      5월 한 달, 나를 만나러 다닌 산사 기행을 며칠 연장하여 63-4일 선암사, 향일암, 불일암, 송광사를 다녀오는 것으로 마감했다. 선암사, 향일암은 2년 전 여름에, 불일암, 송광사는 3년 전 여름에도 다녀왔던 곳이다.

 

     선암사는 태고종 종정 지허스님이 연락이 안 되어(편찮으시다는 소문만 들었다) 절만 둘러보았다. 대신 절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었다. 규모와 분위기가 태고종의 총본산다웠다.

     이곳저곳 둘러보다 물 마시는 곳이 있어 비치된 바가지로 시원하게 들이켰는데, 고개를 든 순간 보이는 안내문에는 계곡물을 그냥 끌어온 것이니 마시지 말라고 씌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원효대사가 된 기분이다.

      그래, 대사는 하물며 해골바가지의 물도 마셨는데, 조계산 깊은 산속 계곡물이 어떠랴. 나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리를 새삼 깨우친다.

 

image23.jpg[선암사 일주문]

 

     향일암에서 1박 했다. 낙조와 일출이 아름다운 곳이다. 다만 이날은 해무(海霧)가 끼어 일출이 2년 전만 못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름답다. 주지 지인 스님이 여전히 반갑게 맞아주셨는데, 곧 임기를 마치고 떠나신다는 게 아쉽다. 어디로 가시든 건승하시길 빈다.

 

image24.jpg[향일암의 일출]

 

     송광사에서 산내암자인 불일암으로 올라가는 길의 대나무숲은 가히 예술이다. 5월의 색이라고 할까, 그 아름다움을 필설로 표현하기 힘들다. 적어도 이 숲길에서는 대나무와 촌부가 하나가 된다. 불어오는 산들바람은 또 어찌나 부드럽던지...

     법정스님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불일암(佛日庵)에는 법정스님의 맏상좌인 덕조스님이 계신다. 스님과는 성북동 길상사 시절부터 맺은 인연이 깊다. 불임암은 말 그대로 절간 같은 절이다. 덕조스님의 상좌는 하안거하러 선방으로 가고 스님 혼자 계신다. 공양주보살도 없다. 그래도 스님이 손수 만들어 주신 비빔국수의 맛이 일품이다. 당신께서 텃밭에서 키우시는 무공해 무농약의 채소를 사용하였기에, 말 그대로 자연의 맛이고 천연의 맛이다.

 

    반소사음수(飯疏食飮水)하고

   곡굉이침지(曲肱而枕之)라도

    낙역재기중(樂亦在其中)

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 베고 누웠어도 그 안에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탐진치(貪瞋癡)에서 벗어나 그 즐거움을 아는 것이야말로 나를 만나는 길이 아닐까.

 

image19.jpg[불일암 가는 길의 대나무숲]

 

20220604_133056 (3).jpg[법정스님의 사리를 모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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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20.jpg[덕조스님과 함께 하는 비빔국수 공양]

 

     송광사는 승보사찰답게 거찰이다. 주마간산으로 둘러보는데도 한참 걸린다. 그런데, 봄부터 계속되는 가뭄에 절을 관통하는 계곡에 흐르는 물이 적어 특유의 멋진 풍경을 볼 수 없는 게 아쉽다.

      대웅전에서 참배하고 관음전 뒤에 있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부도를 찾았다. 오랜 세월 풍상에 시달린 흔적이 역력하다. 이곳에서 맞은편 산을 바라보면 코끼리 얼굴의 형상을 하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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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22.jpg[송광사 일주문과 보조국사의 부도]

 

     여기서 보조국사의 핵심 사상인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돈오(頓悟)는 중생의 본성은 본래 깨끗해서 부처와 조금도 다를 바 없으므로 문득 깨우쳐 부처가 된다는 뜻이다. 점수(漸修)는 그렇게 깨우쳤다 하더라도 번뇌가 쉽게 없어지지 않으니 늘 꾸준히 수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얼음의 본성이 물인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열을 받아 녹아야 비로소 물이 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 얼음의 본성이 물인 줄 아는 것이 돈오(頓悟)이고, 얼음을 녹이는 것을 점수로 본 것이다. 요컨대 먼저 본성을 알아 깨우치고 행하라는 것이다.

 

     그나저나 필부 주제에 내 마음이 부처인 것을 언제나 깨우칠 것인가. 나를 만나는 여정은 끝나가는데, 그 나의 본성은 여전히 오리무중 속에 있으니 어찌할거나. ()

Various Artists_Loss Of Love (Love Theme From Sunflower) (해바라기 1970).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