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것도 잊고 가는 것도 잊는다

       (忘坐忘行)

 

    ‘히말라야를 한 번도 안 가 본 사람은 많아도 히말라야를 한 번만 간 사람은 드물다’는 말이 있다. 그 뜻인즉, 처음 가기가 어렵지 일단 발을 한 번 들여 놓으면 또 가게 되는 것이 바로 히말라야라는 것이다,

   그랬다. 촌부 역시 외계인들의 이야기로만 치부했던 히말라야 트레킹을 2014년 1월에 처음 시작한 이후 눈에 선하게 어리는 설산의 장엄한 풍광을 못 잊어 찾고 또 찾았다. 그렇게 해서 이번에 다섯 번째로 히말라야를 찾았다. 행선지는 랑탕 계곡으로 최종 목적지는 체르코리(해발 4,984m)였다.
      
   사실 작년에 에베레스트 트레킹 때 고산증으로 큰 고생을 한 후로는 히말라야는 더 이상 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올 봄에는 남미의 파타고니아를 가려고 지난 겨우내 헬스클럽에서 근력과 지구력을 키우는 운동을 했다.

   그런데 그 파타고니아 트레킹이 성원 미달로 취소되는 바람에 대안으로 다시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올리게 되었고, 히말라야의 3대 트레킹 지역(안나푸르나, 에베레스트, 랑탕) 중 하나 남은 랑탕을 자연스레 택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작년과 달리 혜초여행사의 기성상품을 이용하였는데, 안나푸르나 트레킹에서 처음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그 후 에베레스트 트레킹 등 국내외 산행을 여러 번 함께 한 오강원님이 동행하였다.

   그 밖에 서울에서 온 남자 두 명, 울산에서 온 세 명(부부와 남자 한 명), 여수에서 온 부부가 합류하여 총 아홉 명이 도반으로 참가하였고, 여기에 인솔자 김진우씨를 포함하여 열 명이 아흐레 동안 함께 지내게 되었다.
 
   서울에서 온 도반 중에는 경복고등학교 5년 선배로 사법연수원 동기인 변진장 변호사님이 있었다. 가까운 사이임에도 피차 바쁜 일상을 보내다 보니 한동안 소식을 몰랐는데, 네팔공항에서 마주치고는 서로 놀라면서 반가워했다.

   그런데 이 분은 다른 도반들과 달리 히말라야 트레킹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촌부를 포함하여 다른 여덟 명은 전부 히말라야 트레킹 유경험자들이다). 평소 워낙 강건한 분이라 일정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짐작되었지만, 그래도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고산증을 잘 견딜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그러나 이는 완전히 기우였으니, 말 그대로 천하장사였고, 트레킹 내내 촌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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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탕 트레킹 개념도]

 
인천공항-->카트만두-->샤브루베시(Shyabrubesi)
 
   2018. 4. 30. 오후 2시 대한항공편으로 인천공항을 이륙했다. 대한항공은 인천공항에서 새로 개장한 제2터미널에서 비행기가 출발한다. 공항버스를 타면 제1터미널에서 족히 30분은 더 가야 도착한다. 그런 줄 모르고 종전처럼 집을 나섰다가 하마터면 낭패를 볼 뻔했다. 유의할 일이다.

   목하 대한항공은 조현민 전무의 물컵 투척 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져 회사가 뒤숭숭하지만, 비행기만큼은 거의 정시에 출발하였고, 승무원들은 변함없이 친절했다. 7시간 걸리는 비행시간도 정확히 지켰다. 우리 사회의 성숙한 한 단면이 아닐는지.
 
   1년 만에 다시 찾은 카트만두 공항 또한 큰 변화가 없었으나, 전보다 정돈된 모습이었다. 야크 앤 예티(Yak & Yetti) 호텔로 가는 차창에 비친 시내 모습도 예전 그대로였는데, 다만 근래 비가 자주 왔다고 하더니 공기가 다소 깨끗해진 듯하였다.

   야크 앤 예티 호텔은 풍광도 좋고 시설도 괜찮은 데 비해 뷔페식 저녁은 4성급 호텔에 어울리지 않게 실망스러웠다. 차라리 종전처럼 시내의 한국식당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는 게 나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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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크 앤 예티 호텔]   

 

    5. 1.
   아침 6시에 모닝콜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그 전에 잠이 깼다. 서울보다 3시간 15분 늦은 시차에 적응되지 않은 탓이다. 이는 오강원님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동안은 그럴 것인데, 익숙해질 때쯤이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니 어쩔거나. 해외에서의 시차 적응은 참으로 풀기 어려운 숙제이다.

 

   오전 8시에 대기 중이던 사륜구동 지프차에 올랐다. 이 날의 목적지인 샤브루베시까지 7시간 정도 타고 가야 한다. 젊은 운전사의 곡예를 보는 듯한 현란한 운전솜씨에 감탄하며(카트만두에서의 운전은 거의 대부분 곡예에 가깝다) 카트만두 시내를 벗어나 얼마 안 가면 산길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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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륜구동 지프차]

 

    구글지도를 보면 샤브루베시까지의 이 길이 차례로 트리슐리 하이웨이 --> 트리슐리-둔체 하이웨이--> 파상라무 하이웨이로 표시되어 있는데, 결코 ‘하이웨이’가 아니다.

   아니 산 높은 곳에 길이 나 있으니 하이(High) 웨이(Way)인 것은 맞다고 해야 할까. 아울러 카트만두에서 샤브루베시를 가는(더 나아가 티벳으로 연결되는) 간선도로라는 점에서도 하이웨이가 맞긴 맞는 셈이다. 단지 우리가 생각하는 한국의 고속도로 같은 하이웨이가 아닐 따름이다. 

 

    아무튼 이 하이웨이의 초입에서 벌써 높이가 1,800m 쯤 되는 고개를 넘어야 한다. 그런데 이 고갯길이 가관이다.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가 수시로 교차하는데(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이고 포장도로는 어쩌다 나타난다), 비가 내려서인지 비포장도로는 말 그대로 진흙탕이다. 차가 빠지기라도 하면 영락없이 오도 가도 못할 판인데, 이리 저리 뒤뚱거리면서 용케도 벗어났다. 젊은 운전사의 운전솜씨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오전 11시에 트리슐리에 도착하여 짐부(Jimbu)라는 상호가 붙은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정원이 아름다운 이 식당의 메뉴는 네팔 고유의 음식인 달밧이다.

   현지인들은 손으로 먹는 음식이지만 외국인들에게는 숟갈과 포크가 제공된다. 전에는 달밧 특유의 진한 향으로 인해 먹기가 거북했었는데, 이번에는 먹을 만했다. 외국인을 위한 개량식이 아닌지 모르겠다. 옆 자리에 앉은 프랑스인들도 잘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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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부 식당의 전면과 정원]

  

   나중에 트레킹 도중에도 그랬는데, 랑탕 지역에 트레킹을 하러 오는 외국인들 중에 프랑스인이 유난히 많은 게 이채롭다. 안나푸르나나 에베레스트에서는 보지 못한 현상이다. 이 지역이 프랑스와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점심식사 후 다시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이번에는 고도가 더 올라가 2,040m 높이의 고개를 또 하나 넘어야 한다. 그런데 이 길 또한 장난이 아니다. 물구덩이를 빠져 나오면 진흙탕이 기다리고 있고, 이를 애써 통과하고 나면 먼지가 풀풀 나는 돌길이 기다리는 식이다. ‘오프로드 레이싱(off-road racing)'이 따로 없다.

 

   돌길 중 한 곳에서는 차가 하도 흔들리고 거의 기다 시피 천천히 가는 통에 차에서 내려 걸어가기도 했다. 아무튼 차가 굴러가는 게 용하다 싶은 길이 이어진다. 인도의 마힌드라 자동차 회사에서 지프차 하나는 튼튼하게 만들었다고 감탄을 하였다. 최신식 전자장치로 무장한 차라면 아마도 몇 분 못 가서 서 버렸을 것 같다.

    이 길을 대중교통인 버스들도 오가고 짐을 잔뜩 실은 트럭들도 오가는데, 하나같이 차체에 녹이 슬 정도로 오래되어 굴러가는 게 정말 신기하다. 마치 1960년대의 우리나라 모습을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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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퉁불퉁한 돌길. 이런 길이 하이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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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2.040m 고갯마루]

 

    한편, 이 길에서 특이한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검문소가 수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티벳으로 가는 국경이 가깝기 때문이라고 한다. 검문소는 바람이라도 불면 금방 넘어갈 듯한 허름하기 짝이 없는 가건물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 검문소를 검경 합동으로 운영하면 좋으련만, 길게는 100여 미터, 짧게는 2-30미터 간격을 두고 경찰과 군인이 따로따로 검문을 한다. 기분이 내키면 그냥 보내 주지만, 어떤 때는 배낭 속까지 다 뒤진다. 참으로 피곤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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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문소]

 

    높은 산의 허리를 감싸고 돌고 돌아 마침내 대관령 아흔아홉 구비는 명함도 못 내밀 내리막길을 통과하여 샤브루베시에 도착했다.

   숙소인 라사 호텔(Lhasa Hotel. 히말라야에서는 트레커들을 위한 숙소인 로지의 이름에 호텔을 사용하는 곳이 많다. 이곳도 마찬가지이다)에 짐을 풀고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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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브루베시로 가는 아흔아홉 구비 고갯길]

  
   샤브루베시(Shyabrubesi)는 티벳 말로 ‘함께 모여 춤추고 노는(샤브루) 평지(베시)’라는 뜻이다. 이곳은 그 이름만큼이나 애환이 서린 곳이다.

 

    티벳이 1950년 중국의 침략을 받아 그 지배하에 놓이게 되자 많은 티벳 사람들이 탄압을 피해 험준한 히말라야를 넘고 넘어 네팔 땅으로 들어섰고, 마침내 해발 1,460m의 샤브루베시에 도착하였다. 비록 그다지 넓지 않은 평지이지만 그들에게는 마음껏 춤추고 놀 수 있는 평화의 땅이었다. 그야말로 ‘샤브루 베시’였던 것이다.

 

   네팔은 전체 인구의 80%가 힌두교도이고 불교도는 10%에 불과한데, 이곳 샤브루베시는 물론이거니와 향후 트레킹 과정에서 지나는 라마호텔과 랑탕, 그리고 강진곰파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 주민들 대부분이 불교도(티벳불교인 라마교)임은 그들이 바로 티벳에서 넘어온 사람들임을 역설적으로 말해 준다. 물론 이들 티벳계 사람들만 사는 것은  아니고,  주민 중에는 타망족이나 쉐르파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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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브루베시와 로지 Lhasa Hotel]

 
   샤브루베시는 랑탕지역 트레킹의 출발지에 해당하는 곳이라 상점들도 제법 많다. 그래서 랑탕 로고가 새겨진 모자를 하나 살까 하고 돌아다녀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이는 나중에 카트만두나 박타푸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저녁에 식사를 하면서 도반들이 각자 자기소개를 했다. 아홉 명 중 네 명이 60대이다. 노익장의 과시인가, 아니면 분수를 모르는 만용인가.

   메뉴는 돼지 수육과 된장국, 김치 등으로 구성된 한식이다. 대동한 네팔인 요리사들이 조리한 것이다.  이번 여정에서 처음 대하는 한식이라 맛있게 먹었는데. 이후의 산행 중에는 계속  한식을 먹게 된다. 


   그리고 이날 밤부터는 침낭에서 자야 한다. 여행사에서 준비해 준(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미리 부탁했다) 물주머니에 뜨거운 물을 채워 끌어안고 자니까 잠자리가 포근했다.

   네팔의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하여 수력발전만 제대로 하면 전기를 풍족하게 쓸 수 있고, 그러면 로지들도 난방을 손쉽게 할 수 있으련만, 현재의 네팔에서는 요원한 이야기이다.

   히말라야 트레킹의 가장 큰 애로사항인 밤 추위 문제가 해결되어 트레커들이 보다 편하게 설산을 즐길 수 있는 때가 언젠가는 오리라고 기대하여 본다.     

    

샤브루베시(Shyabrubesi) --> 라마호텔(Lama Hotel)
 
    5. 2.
   여전히 시차 적응이 안 된 탓에 예정된 모닝콜 시각보다 한 시간 일찍 5시에 일어났다. 가볍게 몸을 풀고 짐정리를 했다.

   침낭 정리를 위해 전에는 침낭을 먼저 반으로 접고 다시 반을 접은 후 둥그렇게 말아서 주머니에 넣느라 매번 용을 썼는데, 오강원님이 그러지 말고 그냥 주머니에 구겨 넣으면 된다고 가르쳐 주어 그대로 하니까 훨씬 쉬웠다. 생활의 지혜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는 법이다.

 

   미역국백반으로 아침을 먹고 7시 30분에 출발했다. 랑탕 트레킹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랑탕 지역은 국립공원이라 입장료를 내고 입산허가도 밟아야 한다.

   현지 가이드 보하라씨가 그런 절차를 밟은 후 구름다리로 계곡을 건너자 바로 구(舊) 샤브루베시로 들어섰다. 이곳은 말하자면 샤브루베시의 구시가지인 셈이다. 지난 밤에 묵은 로지가 있는 신시가지에 비해 훨씬 낙후되어 있다.

   세계 어디를 가나 신·구 시가지로 나뉘는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공통된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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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샤브루베시]

 

   구 샤브루베시를 벗어나면 곧바로 계곡(랑탕 콜라. 콜라<Khola>는 ‘강’이라는 뜻인데, 히말라야에서는 물이 흐르는 계곡을 흔히 콜라라고 부른다)이 나온다. 이 계곡이 바로 랑탕계곡으로 멀리 강진곰파까지 이어진다. 우리의 트레킹도 이 계곡을 따라 강진곰파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이 랑탕계곡은 수량이 풍부하다. 마치 여름철의 설악산계곡 같다. 다만 설악산 계곡과 달리 물이 맑지를 않고 탁하다. 석회암지대를 흘러 내려오기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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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탕계곡 초입]

 

    계곡으로 접어들어 10여 분 정도 오르자 멀리 설산이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라우리 비나이크이다. 라우리는 지팡이를 뜻하고 비나이크는 신(神)의 이름(시바신의 자식)이다.

   비나이크가 이 산에 오르다 힘이 들어 지팡이를 짚고 올랐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참으로 인간적인 신(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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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원님과 함께.  멀리 라우리 비나이크가 보인다]

 

    위도가 낮은 이곳은 초여름 날씨라 낮에는 더워 반팔을 입을 정도이다. 그러나 공해가 없는 청정지역이라 햇볕이 강해 반팔보다는 얇은 긴팔 옷을 입는 게 안전하다. 서양인들은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걷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우리에겐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다. 

 

   해발 2,000m 정도에 도달하자 랑탕계곡의 명물인 랄리구라스(Laliguras)가 보이기 시작한다. 네팔의 국화(國花)이기도 한 이 꽃은 붉은 색, 흰 색, 분홍색의 세 가지 꽃이 핀다. 네팔의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그 어느 곳보다도 이곳 랑탕계곡이 군락지로 유명하다. 그래서 천상의 화원이라고 부를 정도이다.

   다만 아직은 군데군데 보일 뿐이고, 군락지는 다음날 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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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의 붉은 색 랄리구라스]

  
   계곡의 경치가 특별히 좋다 싶은 곳에 이르러 사진을 찍으려 하는데, 갑자기 산에서 돌이 굴러 떨어진다. 고개를 돌려보니 원숭이가 잽싸게 몸을 숨긴다. 네팔인 가이드 말이 원숭이들이 자기 구역을 침범당했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돌을 굴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 이곳의 토박이인 원숭이들의 눈에는 우리가 외계에서 온 침략군으로 비칠 것이다. 이런 원숭이들은 그 후에도 자주 보게 된다. 안나푸르나나 에베레스트 지역 트레킹 때는 겪지 못한 일이다. 그만큼 이 지역이 아직은 인간들의 때가 덜 탔다는 반증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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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에게 봉변을 당한 곳]

 

    사실 이곳에서도 세계 각지에서 온 많은 트레커들을 만났지만(심지어 말레이시아에서 온 한 젊은 여자를 만났는데, 히말라야 트레킹 중 동남아인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숫자가 안나푸르나나 에베레스트 지역에 비하면 현저히 적다.

    전술하였듯이 하루 종일 자동차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할 만큼 접근성이 떨어지는 데다, 그나마 이름만 대면 알 만한 8,000m 급의 유명한 산이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호젓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말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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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탕계곡의 한 로지. 불어, 이태리어, 영어로 환영인사말을 써놓고, 네팔식, 인도식, 중국식, 유럽대륙식, 한국식, 이스라엘식, 일본식의 각종 음식을 판다는 안내판을 걸어 놓았다] 

  
    이곳에서는 이처럼 원숭이로부터 생각지도 않은 환영(?)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석청(石淸)도 제대로 보게 된다. 벌들이 바위절벽에 꿀을 보관하는 벌집을 지어 놓은 것이다.

    한 때 이 히말라야 석청이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어 고가에 팔리곤 했는데, 지금은 수입이 금지되어 있다. 그래도 어떤 경로로 들어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1Kg에 150만 원 정도에 거래된다고 한다. 일반꿀이 인삼이라면 석청은 산삼이라고 하니 그런 가격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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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절벽에 있는 석청]      

 
   오전 11시 30분 밤부(Bamboo. 해발 1,960m)에 도착하여 비빔밥으로 점심식사를 하면서 숨을 고른 후 처음으로 단체사진을 찍고 다시 출발했다.

 

   오전에는 날이 맑았는데, 오후에는 구름이 많이 끼었다. 그래도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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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반들과 함께. 양쪽 끝은 현지 가이드와 보조가이드]

 

    정확히 3년 전인 2015. 4. 25. 네팔에서 커다란 지진이 일어나 8,5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당시 수도 카트만두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이곳 랑탕 지역도 지진을 피하지 못했다. 지진으로 인한 산사태로 마을이 통째로 파묻혀 폐허가 된 곳도 있다. 강진곰파에 도달하기 까지 그런 피해 현장을 여러 곳에서 보았다. 3년이 지나도록 복구할 엄두를 못 내는 곳도 있다. 가슴 아픈 일이다.


   지진으로 인한 산사태로 피해를 입은 것은 주민들만이 아니었다. 트레킹하러 이곳을 찾았던 외국인들도 불의의 참변을 당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랑탕의 계곡을 따라 산길을 오르다 보면 그런 피해자들을 기리는 글이 붙어 있는 곳을 보게 된다.

    그렇게 사망한 이스라엘인과 이탈리아인에 관한 추모의 글을 가까이에서 접하면서 인명(人命)이 재천(在天)이라는 말을 새삼 떠올렸다. 그런 지진이 또 일어난다면, 그리고 그 현장에 내가 있다면 촌부인들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 참화를 피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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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지진 때 사망한 이스라엘인을 추모하는 글]

 
   총 13km를 걸어 오후 4시 20분 이날의 목적지 라마호텔(Lama Hotel. 해발 2,410m)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는 멀리 랑탕리룽(Langtang Lirung. 해발 7,227m)과 랑탕 2봉(해발 6,596m)이 보이는데, 라마호텔은 호텔 이름이 아니라 지명이다. 티벳에서 넘어온 라마승들이 묵어간 곳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지 않았을까 혼자 추측하여 본다. 


   저녁식사 때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지라 로지 밑의 계곡으로 내려갔다. 탁족(濯足)을 해 볼 심산이었다. 그 동안의 경험에 의하면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산행의 피로가 싹 가신다.

   그러나 계곡물에 발을 채 10초도 담그지 못했다. 만년설이 녹은 얼음물이 어찌나 차가운지 등골까지 시렸기 때문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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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탕계곡의 탁족]

 

    라마호텔의 로지(Friendly Guesthouse)는 랑탕 트레킹 지역, 아니 이제까지 내가 히말라야에서 묵었던 로지들 전체 중에서 최악이다.

 

    이곳에서는 와이파이가 안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휴대폰 충전조차 안 된다. 충전용 보조배터리를 준비하여 오지 않아 순간 당황했는데, 다행히 변진장 변호사님이 배터리를 빌려 주어 위기를 벗어났다. 만사는 불여튼튼이라 했던가,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보조 배터리를 꼭 챙길 일이다.
   방은 베니어판으로 구분하여 꾸며 놓았기 때문에 옆방의 숨소리까지 들린다. 마당에 설치되어 있는 호스에서 나오는 물로 양치질도 하고 세수도 해야 한다. 그것도 나오다 말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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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호텔의 로지 Friendly Guesthouse]

 

   유일한 위안은 저녁식사로 나온 닭백숙이 그나마 먹을 만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말로 ‘오빠, 언니’ 하면서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어린 여종업원의 애교가 한 몫 한다.

   내일 모레면 70을 바라보게 될 변진장 변호사님한테도 ‘오빠, 오빠’ 하면서 부르길래, 그 분은 오빠가 아니라 할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었더니 그 다음부터는 “할아버지~” 하면서 따라다녀 도반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로지까지 가는 동안에는 더웠는데, 해가 지는 저녁이 되니까 쌀쌀하다. 전날처럼 물주머니에 뜨거운 물을 채워 침낭 속에 넣은 외에 핫팩(hot pack)을 배와 등에 붙이고 잠을 청했다. 로지 옆의 계곡 물소리가 밤새 자장가처럼 들렸다.  
     
라마호텔(Lama Hotel) --> 랑탕(Lang Tang)
 
   5.3.
   아침 5시 모닝콜에 맞춰 일어났다. 랑탕까지 12km를 9시간에 걸쳐 걷는 날이다. 북어국 백반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7시에 출발했다.

 

   그런데 아침부터 날이 꾸물거린다. 결국 몇 발 못 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는 이슬비라서 걷는 데 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설산이 구름에 가려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랑탕리룽과 랑탕 2봉은 물론 간첸포(Ganchenpo. 해발 6,387m)까지 볼 수 있는데 말이다.

    이 비는 그렇게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며 내렸다. 덕분에 덤으로 중세 유럽의 영화 속 같은 비경이 자주 나타나 눈을 즐겁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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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와 구름 속의 트레커들]

 
   랑탕까지 계곡을 따라 길이 나 있는데, 해발 3,000m까지는 계속 밀림이다. 기둥에 이끼를 머금은 거대한 나무들이 즐비하다.

   굽이치고 몰아치며 곳곳에 검푸른 못을 형성하고 흐르는 계곡물은 계속 바라보노라면 그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 꼭 뉴질랜드 밀포드의 밀림 속을 걷는 기분이다.

   계곡이나 길의 양 옆으로 랄리구라스가 나타나는 빈도도 잦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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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지대]

 

    해발 2,769m에 있는 작은 로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배낭을 벗었다. ‘리버사이드(River Side)’라는 로지 이름에 걸맞게 마당 앞으로 계곡이 펼쳐져 있다.

   이곳은 물이 유장하게 흘러간다. 백두산 천지보다 높은 곳을 유유히 흐르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아 동방나그네의 넋을 잃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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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탕계곡의 선경]

 

이쯤 되면 남명(南冥) 선생을 흉내내지 않을 수 없다.
 
   히말라야 랑탕계곡 예 듣고 이제 보니
   랄리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어라
   아이야 무릉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밀림이 서서히 줄어들다 해발 3,200m 정도 되면 관목지대로 변한다. 이곳에 소주, 막걸리와 감자전을 판다는 한글 광고판이 붙은 허름한 가게가 하나 있다. 반가운 마음에 들렀다 갈까 하다가 갈 길이 멀어 아쉬움을 남기고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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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소주, 감자전을 파는 가게]

 

    이 가게를 지나면 곧 랄리구라스의 군락지가 펼쳐진다. 시기가 다소 지나 많이 지긴 했지만, 여전히 말 그대로 꽃의 향연이다. 4월 초의 전성기 때 왔으면 정말 아름다웠을 것 같다. 계곡의 이쪽저쪽, 혹은 초원지대에 잔뜩 모여 자태를 한껏 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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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리구라스 군락지]


   그 군락지를 벗어난 지점에서 프랑스인 한 가족을 만났다. 엄마 아빠가 딸 둘을 데리고 체르코리를 올랐다가 내려가는 일이라고 한다.  놀랍게도 딸들의 나이는 9살, 11살. 어린 나이에도 지친 기색이 없다. 정말 대단한 가족이다.

   체르코리 정상의 모습이 정말 멋지다면서 나더러 꼭 오전 10시 전에 올라가라고 당부를 한다. 10시가 넘으면 구름이 끼어 제대로 못 본다는 것이다. 그러마고 했지만, 정작 이틀 뒤에 체르코리에 오를 때는 10시가 넘어 도착하는 바람에 그들 말대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남은 여정에 행운이 깃들기를 서로 빌며 헤어졌다. 비록 짧은 만남이긴 하지만, 히말라야 같은 고산 트레킹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국제적인 교감의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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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 트레커 가족과 함께]

 
    낮 12시  점심식사를 위해 들른 로지(Summit Guesthouse)는 먼저 온 사람들로 만원이다. 대부분 서양인들이다. 비가 오니까 다들 로지 안으로 몰려든 모양이다. 전술한 것처럼 프랑스인이 제일 많고, 미국, 호주, 이탈리아, 스페인 등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렇게 세계 각지에서 트레커들이 몰려오는데, 흥미롭게도 포터는 물론 요리사까지 대동하여 오는 것은 한국인들뿐이다.

    처음에는 서양인들은 단독이나, 아니면 많아야 서너 명씩 다니기 때문에 요리사를 대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꼭 그런 이유는 아닌 듯하다. 그동안 적어도 내가 유심히 관찰한 바로는 그들은 그룹을 지어서 다닐 경우에도 요리사를 대동하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로지의 식당에서 마주친 그들은 우리가 밥과 국에 김치 등 반찬을 늘어놓고 먹는 것을 보면 신기한 듯 바라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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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에 모인 트레커들. 왼쪽부터 이태리인, 호주인, 미국인, 오강원님, 그리고 촌부]

 

   네팔의 값싼 노동력 덕분에 큰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닌데 그들은 왜 요리사를 대동하지 않는 것일까? 추측건대 아마도 로지의 식당에서 제공하는 음식이 그들의 평소 먹는 것과 별로 다를 게 없기 때문인 것 같다.

    피자, 스파게티, 카레라이스, 비프스테이크... 그들로서는 굳이 음식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밥과 국과 김치를 먹어야 힘을 내는 우리와는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서양음식에도 익숙해진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단독이나 서너 명씩 다니면서 로지의 음식을 잘 먹고 다니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들도 정작 식당에서 우리를 만나면 무척 반가워한다. 김치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날 우리의 요리사가 준비한 점심 메뉴는 오뚜기 카레였다. 물론 김치가 동반했다.
  
   오후 4시가 넘어 랑탕(Lang Tang. 해발 3,430m)에 도착했다. 랑탕의 로지(Sunrise Guesthouse)는 최상급이다. 랑탕도 네팔 지진 때 산사태로 많은 집들이 매몰되고 부서지는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 로지는 그 후 새로 지은 것이다.

    방에는 이불도 있고, 공동화장실의 변기는 좌식이다. 샤워실도 있다. 그러나 고산증 염려 때문에 샤워는 하지 않았다. 가이드도 적극 만류했다.

    변진장 변호사님처럼 체력이 강한 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워를 했고, 고산증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따라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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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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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탕의 로지 Sunrise Guesthouse]

 

   저녁식사로 나온 닭볶음탕도 맛이 괜찮았다. 나는 본래 육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한 동안 아예 전혀 안 먹은 적도 있다), 체르코리 등정을 생각해 체력을 비축해야 했기에 마다 않고 먹었다.

 

    이곳 로지에서는 와이파이 쿠폰을 판다. 1기가바이트용이 10불이다. 그리고 이 쿠폰을 사면 다음 숙소인 강진곰파의 로지에서도 계속 사용할 수 있다.

 

   라마호텔에서처럼 뜨거운 물주머니, 등과 배의 핫팩에 의존하여 잠을 청했다. 지난 해 에베레스트에서는 그렇게 해도 추웠는데, 이번에는 그 때와는 달리 계절이 5월인지라 추위를 그다지 느끼지 않고 잘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바로 고산증을 덜 겪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그러고 보면 히말라야를 언제 가는 것이 좋으냐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추위와 고산증에 강하다면 12월부터 3월까지가 정답이다. 사실 그 때 가야  '눈의 나라'  히말라야답게 눈길을 걷고 설산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추위와 고산증에 약하다면 4~5월 또는 10~11월에 가는 게 좋다. 그 대신 겨울 만큼의 정취는 기대하기 어렵다. 해발 5,000m 넘게 올라가도 눈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돌아갈 것을 각오해야 한다.  꿩 먹고 알 먹는 일은 세상사에 없다.    
     
랑탕(Lang Tang) --> 강진곰파(Kangjin Gompa)
 
   5.4.
   이 날은 오전 3시간에 7.5km를 걸어 강진곰파까지만 가면 되는 날이다. 때문에 다른 날과 달리 여유가 있어 아침 9시에 출발했다.

    전날 종일 비가 오락가락한 덕분인지 구름이 전부 걷혀 하늘이 화창하게 갰다. 랑탕 지역의 설산들이 비로소 전면과 좌우로 선명하게 보인다. 랑탕리룽과 간첸포뿐만 아니라 다음날 올라가야 할 체르코리도 마침내 눈에 들어온다.

    한국의 봄날을 연상케 하는 날씨에 걷기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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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탕리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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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첸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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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코리]

 

    랑탕을 벗어나면 이내 길 중앙에 사각형 돌을 이용하여 마치 길의 중앙분리대처럼 담을 길게 쌓아놓은 곳을 지나게 된다. 그런데 그 돌들이 그냥 돌이 아니라 라마교 경전을 새긴 것이다. 이 돌들을 ‘마니석’이라고 부른다. 청동으로 만든 원통에 경전을 새긴 것을 ‘마니차’라고 부르는 것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 길을 갈 때는 담의 왼쪽으로 가야 한다. 이곳 사람들은 오른쪽 길은 망자(亡者)의 길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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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석]

 

   마니석 지역을 지나면 평탄한 초원지대 마을인 문두(Mundu)에 도착하는데, 이곳에서는 눈에 익숙한 풍경을 볼 수 있다.

   바람을 막기 위해 제주도처럼 돌담을 야트막하게 쌓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집 대문간에 긴 장대를 올려놓아 주인의 출타 여부를 표시한다. 제주도민과 교류를 해 온 것도 아닐진데, 삶이 모습이 어떻게 그리도 유사한지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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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집을 닮은 대문간]

 

   이제는 고도가 높아 길에서 나무는 더 이상 보기 어렵다. 대신 주위의 설산을 감상하며 걷다 보니 어느 새 강진곰파이다(해발 3,870m).

   이곳도 전술한 지진 때 거의 폐허가 되었는데, 복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새로 지은 건물들로 마을의 모습을 일신하였다. 아직 지진 전만큼 다 복구된 것은 아니지만, 빵집이 들어설 정도로 마을이 번듯하다.

    랑탕 지역에서 마지막 로지가 있는 곳인지라 주위의 고산들을 오르는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까닭에 다른 곳보다 서둘러 지진피해 복구작업을 한 듯하다.

 

   우리가 이틀 묵은 로지(Nurling Guesthouse)도 정갈하였다. 방에서 창문을 열면 바로 설산이 눈앞에 펼쳐지는 멋진 광경을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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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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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곰파의 로지 Nurling Guesthouse]

 
   점심식사를 마친 후 로지 앞의 강진리(Kangjin Ri. 해발 4,400m)를 올라갔다 왔다(3시간 30분 소요). 다음날 체르코리 등정을 위한 고소적응훈련이었는데, 일행 중 반 정도만 참여하였다.

   체르코리(Cherko Ri)나 강진리(Kangjin Ri)의 ‘리(Ri)’는 네팔 말로 산봉우리(Peak)를 뜻한다.

 

   강진리를 올라가는 도중에는 그늘 하나 없이 해가 쨍쨍 내리쬐었지만, 바람이 불어 덥지 않았다. 정상은 고도가 해발 4,400m나 되다 보니 오히려 한기를 느꼈다. 정상에는 라마교를 상징하는 룽따가 펄럭이고 있었다. 

   화창한 날씨 덕분인가, 아니면 히말라야를 여러 번 온 덕분인가 해발 4,400m의 고지를 올랐는데도 약간의 두통 외에는 고산증 증세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정상에서는 랑탕리룽과 킴슝(Kimshung. 해발 6,074m)이 지척에 보이는데, 오후라 구름이 끼어 선명하지가 않았다. 대신 랑탕리룽 중턱에 있는 호수의 초록색 물이 또렷하게 보였다. 꿩 대신 닭이다. 히말라야에서 고산 중턱의 호수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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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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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탕리룽의 호수]

  

   강진리에서는 산 아래의 강진곰파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파란색 지붕들이 파란 하늘과 잘 어울렸다. 마침 마을에서 결혼식이 열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춤추고 노는 풍경이 보였다. 이곳에서는 결혼잔치를 보통 사흘 동안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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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곰파의 결혼잔치]

 
   강진리에서 내려와 로지로 돌아왔더니 다소 출출하다. 때맞춰 일행이 땅콩, 멸치, 과자 등을 간식거리로 내놓아 적지 않이 먹었다. 그런데 이게 탈이었다.

   3시간 반 걸려 해발 4,400m까지 올라갔다 왔으면 일단 먼저 쉬면서 숨고르기를 했어야 했는데, 배부터 채우다 보니 속이 더부룩하다. 그리고 울렁거린다. 아차 싶어 드러누워 쉬었으나 이미 늦었다. 저녁식사로 나온 된장국과 잡채를 먹는 둥 마는 둥 해야 했다.

   이 울렁거림은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져 애를 먹었다. 고지대에서는 항상 컨디션 조절에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을...

 

   다음날은 새벽에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제는 고도가 높은지라 밤에는 기온이 급강하한다. 두터운 겨울 내복을 입고 그 위에 트레이닝복과 패딩을 겹쳐 입은 다음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뜨거운 물주머니와 핫팩에 의존하여 잠을 청했다.
 
강진곰파(Kangjin Gompa) --> 체르코리(Cherko Ri)
 
   5.5.
   마침내 이번 트레킹의 최종 목적지인 체르코리를 등정하는 날이다.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났다. 머리가 아프고, 전날보다는 덜해도 여전히 속이 울렁거린다. 비아그라를 한 알 먹었는데, 이내 토하고 말았다.

    아침 식사로 준비된 마늘 수프도 먹을 수가 없었다. 수프 한 그릇이 큰 열량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늘 수프는 주로 고산증 완화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여행사에서 준비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빈 속에 그냥 출발하기로 했다.

    네팔인 가이드 보하라씨로부터 점심식사용으로 샌드위치, 과일, 달걀 등이 들어 있는 봉투를 하나씩 받아 배낭에 넣었다.  
 
   새벽 4시 40분, 헤드랜턴을 착용하고 로지를 출발했다. 설산 위에 떠서 아직 지고 있지 않은 달이 가히 매혹적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의 설산 위로 햇빛이 비치고 날이 밝아온다. 아침에 해가 뜰 때 설산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붉은 색에서 시작하여 황금빛으로 변했다가 본연의 흰 색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신비롭기만 하다.

   지난 해 여름 알프스의 마터호른에서는 작정하고 그 일출모습만 지켜본 적이 있지만, 이 날은 그럴 형편이 아니어서 걸으며 눈에 보이는 대로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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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과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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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의 일출 모습]

 

   체르코리까지의 등산로는 멀고 험하기만 하다. 무려 8시간을 올라가야 한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경사가 급한 곳도 있고, 너덜길도 있고, 마지막은 눈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공기가 희박하여(저지대의 반 정도밖에 안 된다) 조금만 걸어도 금방 숨이 차다. 그야말로 고행의 길이다.

    동행한 오강원님의 아이디어로 포터에게 배낭을 맡긴 덕에(별도의 수고비를 주었다) 그나마 힘을 절약할 수 있었다.

   일행 중에는 나누어 받은 점심을 별 어려움 없이 다 먹는 분도 있었지만, 나는 물과 초콜렛에만 의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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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코리 오르는 길]

 
  오전 10시 전에 정상에 도달하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걷다 보면 쉴 생각을 못하는데, 정작 너무 힘들어 주저앉아 쉬다 보면 이제는 주위 풍광에 반해서 걷는 것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가다 쉬다’를 되풀이하면서 한 번 쉬면 한참만에야 일어나 다시 걷는데,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온 청년들은 처음에는 한참 뒤에 따라오더니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어느새 앞서 간다. 우리 뒤를 따라오던 한국인 여자 한 분도 또 그랬다.  각자 자기 갈 길을 가는 것이니 먼저 간들 어떠랴.

    그래서 일찍이 조선시대 중기의 문인인 송익필(宋翼弼)이 갈파하지 않았던가.
 
山行忘坐坐忘行(산행망좌좌망행)
歇馬松陰聽水聲(헐마송음청수성)
後我幾人先我去(후아기인선아거)
各歸其止又何爭(각귀기지우하쟁)
 
산을 가다보면 쉬는 것을 잊게 되고 쉬다보면 걷기를 잊게 된다
소나무 그늘 아래 말을 세우고 물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내 뒤에 오던 몇 사람이 나를 앞서 가누나
각자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니 내 어찌 다투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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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망행]

 

    힘든 길이지만, 그래도 주위의 멋진 경치가 영양가 넘치는 비타민이 되어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아무 데고 앉으면 다 전망대(View Point)이다. 그 경치를 감상할 때는 고산증도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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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코리 주위의 설산 풍경]

 

   그렇게 얼마를 올랐을까, 마침내 정상이 보이는데, 정작 이제부터는 눈길이다. 눈이 많이 쌓여 아이젠을 착용하였음에도 미끄럽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한 발짝 떼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사투(死鬪)라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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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코리 정상의 모습과 둔 덮인 오르막길]

 

   눈길을 1시간 올라 정상에 도착했을 때는 출발 후 이미 8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오전 10시 전에 도착하여야 정상에서 360도 돌아가며 파노라마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는데, 오후 1시가 다 된 마당이다 보니 그런 경치 감상은 진즉에 물 건너갔다.

    대신 온통 구름 속에 파묻힌 정상에는 룽따만이 펄럭이고, 바로 코앞에 보인다는 간첸포는 도대체 어느 쪽에 있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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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코리 정상]

 

   겨울내복에 겨울등산용 거위털파커를 입었음에도 세찬 바람에 한기가 몸속을 파고든다. 경치를 볼 수 없으니 등정기념 사진을 찍는 일 외에는 할 게 없다.

   이럴 거면 무엇 하러 그 고생을 하며 올라왔지? 순간적으로 드는 회의감이다. 그러나 이내 해발 4,984m 산 정상을 등정하였다는 뿌듯함이 그 회의감을 덮어버린다. 이제껏 다닌 고산트레킹 중 가장 높이 오른 것이다.

 

    ‘왜 산을 오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무수히 많지만, 촌부는 말한다. 힘들인 후의 성취감을 맛보기 위해서라고. 그리고 히말라야의 설산풍경은 직접 실제로 보기 전에는 그 진정한 맛을 알 수 없다고,
 
   강진곰파까지 내려가는 하산길도 4시간 걸린다. 그동안 먹은 게 별로 없으니 힘이 달리고, 거기에 급경사길, 눈길, 너덜길을 걸으니 무릎도 아프고...
   산을 내려가면서 뒤를 돌아보고는 '내가 아침에 이런 힘든 길을 올라간 게 맞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올라갈 때는 오로지 정상에 도달하여야 한다는 일념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하산길에서는 올라갈 때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는 것이다.

 

    8시간 걸을 때는 힘은 들어도 지루하지 않더니, 4시간 걸을 때는 오히려 지루하다. 본 경치를 다시 보니 신비함이 떨어진 탓이리라. 그만큼 한계효용이 체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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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길]

 
   강진곰파의 로지로 돌아오니 오후 6시가 다 되어 간다. 13시간 걸려 해발 3,870m에서 출발하여 4,984m까지 올라갔다 돌아오는 여정을 완주한 것이다. 아홉 명 일행 중 한 명의 낙오도 없이 말이다. 모두들 마침내 해냈다는 뿌듯한 표정이다.
 
   저녁식사로 염소갈비와 수육이 나왔는데, 식욕이 회복되지 않은 한양 촌자는 몇 점 먹다가 말았다. 대신 숭늉에 밥을 조금 말아 먹는 것으로 속을 달랬다.

 

   이제 다음날이면 헬기로 카트만두로 돌아간다. 체르코리에서 내려오며 이번에 5,000m 가까이 올랐으니 이번 산행을 마지막으로 히말라야를 졸업해야겠다고 마음먹은지라, 히말라야 산속에서의 마지막이 될 밤을 보내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쉽게 잠이 들지 않는 가운데 강진곰파의 밤이 깊어갔다.
 
하산 후
 
   5. 6.
   하산하는 날이다. 평소보다 늦게 아침 7시에 일어났다. 아침식사도 당연히 8시로 늦춰졌다. 오강원님이 로지 근처의 빵집에서 사온 빵과 마늘수프로 요기를 했다. 다른 고산증 증세는 거의 사라졌는데, 식욕은 여전히 안 돈다.

 

   로지 바로 옆으로 보이는 랑탕리룽이 하얗게 빛을 발하는 게 꼭 작별인사를 하는 듯하다. 향후에 히말라야를 다시 찾아올지 기약이 없어, 강진곰파 주위의 하얀 설산들을 하나하나 다시 눈에 담았다.

   문명의 이기(利器)가 부족하여 생활이 다소 불편하다는 것을 빼면 이곳 사람들은 무슨 걱정거리가 있을까. 지진이 또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제일 크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 대신 우리처럼 전쟁의 위험은 걱정 안 해도 되지 않을까. 또한 치열한 생존경쟁에서도 벗어나 있지 않을까.

   마을의 처녀 총각이 결혼한다고 온 동네 사람이 모여 사흘씩 잔치를 벌이는 일을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있을까.

   이래저래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   

 

   아침 9시 헬기를 타는 곳으로 이동했다. 헬기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로지 근처의 초원지대 평탄한 곳에서 헬기가 뜨고 내린다.

   헬기는 6인승이다. 한국에서도 잊을 만하면 헬기 추락사고가 나는데, 하물며 이곳에서는 안전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 헬기를 못 탄다. 목숨은 하늘에 맡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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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곰파의 헬기]

 

   카트만두에서 강진곰파까지 올 때 꼬박 4일 걸렸는데, 헬기를 타니까 고작 25분 만에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카트만두에서 강진곰파까지 간 길을 역순으로 되돌아갔다면 꽤나 지루하고 다리도 아팠을 텐데, 이렇게 순식간에 이동을 하니 다소 허망한 느낌도 든다. 아무튼 비행기가 현존 문명 최고의 이기(利器)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카트만두에 도착한 이후 귀국까지의 일정(보드나트 사원 관람, 나갈콧으로 이동하여 숙박, 다음날<5/7> 박타푸르 관광, 타멜거리 자유쇼핑 등)은 생략한다.
 
    2014. 1. 처음 푼힐 전망대를 오르는 것으로 시작하여 다섯 번째로 찾은 히말라야, 이 장엄한 눈의 나라는 한양 산객에게 과연 어떤 존재일까.

   사투(死鬪)에 가까운 고생을 하면서도 촌부는 왜 이 설산제국을 못 잊고 자꾸 오르는 것일까. 이번에는 체르코리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다시는 안 오겠다고 속으로 다짐했지만 과연 그럴까.

   산속에서 山行忘坐坐忘行(산행망좌좌망행)을 한다면 다 마친 후에는 하산망고재고행(下山忘苦再苦行. 산에서 내려오고 나면 고생했던 것을 잊고 다시 그 길에 나선다)을 그리지 않을까.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본래 반복의 연속이 아닐는지.

 

(후기)


   트레킹을 끝내고 도반 몇 분이 소감을 단체 카톡방에 올렸다. 양해하여 주실 것으로 믿고 그 일부씩을 이곳에 인용한다.


“정말 힘든 고행이었고, 많은 가르침을 가져다 준 아름다운 동행이었다. (중략) 히말라야여! (내 나이 96세 되는 2045년에 다시 올 테니) 그 때까지 못된 사람들의 플라스틱 쓰레기에 숨 막혀 죽지 말고 지둘려 주시오.(변*장)

 

“처음엔 너무 (힘들고) 미안해서 ‘트레킹 끝이야’라고 다시는 안 간다고 했는데, 우리가 다니지 않음 그들(네팔인들)의 직업이, 삶이 더 척박해진다고 하더라고요. 또 몸 만들어서 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요?”(김*심)

 

“숨쉬며 살아가는 생의 긴 시간이 중요한지, 한 순간일지리라도 내 의지와 내 생각대로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서 하는 고생인데 다들 너무 열심히 하셨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윤*옥)

 

“우리는 왜 히말라야에 갔을까...(중략) 깊숙한 악수보다 천진한 모습들이 좋았습니다.”(고*)

 

“자기 몫의 산행은 자기가 해야 합니다. 아무도 자기를 대신해 주지 않으며, 누가 대신 가 줄 수도 없고, 나를 업어다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일어서서 가야 합니다. 한 발 한 발 걸어서 올라가야 합니다. 인생길 또한 그러합니다.”(박*두)

 

“산은 산으로 이어지는 것, 인생도 삶은 삶으로 다시 이어지는 것,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지, 정상에 오르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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