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넘나들고(터키)

2018.11.18 20:30

범의거사 조회 수:3300

      

                  동서고금을 넘나들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2018.10.19. 터키 행 대한항공 비행기에 올랐다. 국토가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는 나라, 1950년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우리를 도와준 나라, 2002년 월드컵 축구경기 3,4위전에서 우리와 맞붙은 나라, 조상이 고구려와 가까웠던 돌궐족으로 우리와 같은 알타이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 에르도안이 대통령이 된 후 미국과 대립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경제면에서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알려진 나라... 이런 등등이 이스탄불로 가는 비행기 속 촌부의 이 나라에 관한 지식의 편린이었다.

 

      아시아의 동쪽 끝에 살면서 무려 8,000km나 떨어진 서쪽 끝에 있는 나라에 관하여 관심을 기울일 만한 특별한 인연이 그동안 있었던 것도 아니니 촌부가 이 나라를 잘 알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 나라를 찾아 꼬박 11시간 반 동안 비행기를 타야 하는 여정에 나선 것이다. 하기야 시간과 돈을 들여 해외여행을 가는 마당에 하고많은 나라 중 잘 아는 곳을 갈 일은 아니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생긴 여유 있는 시간에 터키를 가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더구나 터키 화폐인 리라의 가치가 폭락하여 적은 돈으로 멋진 여행을 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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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지 시각 10월 19일 오후 7시 15분에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Atatürk) 공항에 도착하였다. 시차가 서울보다 6시간 느리다. 터키의 위도가 우리나라와 비슷하여 이곳도 이미 밤중이다. 공항이 생각 밖으로 커 처음에는 의아했는데, 이스탄불의 인구가 1,700만 명이나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금방 이해가 되었다. 더구나 유럽의 각지와 아프리카를 오가는 비행기들이 뜨고 내린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 공항도 좁아 앞으로 열흘 후면 신공항이 일부 개장하는데 최종 완공되면(2028년) 세계 최대 규모의 공항이 될 것이라고 한다(여의도 면적의 24배). 역시 세상은 넓다.
             
     공항에서 나와 대기 중이던 하나투어여행사 전용 버스(Wifi가 구비된 이 버스를 마지막 일정이 끝날 때까지 타게 된다)에 올라 공항 부근에 있는 호텔(Steigenberger Airport Hotel)로 이동했다. 이 호텔은 별 다섯 개의 17층짜리 현대식 호텔인데, 그 별을 부여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안내데스크와 엘리베이터의 협소함에 놀랐다. 그나저나 이번 여행 일정 내내 5성급 호텔에 투숙하는 행운을 누렸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리라화의 가치가 폭락한 덕분이다. 이미 밤이 깊은지라 얼른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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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igenberger Airport 호텔]


2018. 10. 20.(이스탄불. 베이파자르, 아야스)

 

     6시간의 시차로 인하여 잠을 설치다가 새벽 5시 40분에 일어났다. 전날 현지 한국인 가이드 소피아(한국명 김완선)가 6시 30분에 아침식사를 하고 7시 40분에 호텔을 떠난다고 미리 고지하였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이날은 그래도 나은 편에 속하고, 다음날부터는 새벽 4시 기상, 5시 식사, 6시 출발의 고된 일정을 감내해야 한다. 국토면적이 한반도 전체의 3.5배(동서 길이 1,600㎞, 남북 길이 550㎞, 면적 755,688㎢)에 달할 정도로 넓은 터키를 일주일만에 일주하여야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바야흐로 별보기 운동의 시작이다.     
      호텔의 뷔페식 아침식사는 풍성하고 맛도 괜찮았다. 음식에 향식료를 많이 넣으면 어쩌나 했는데 기우였다. 특히 벌집 채로 내놓은 꿀이 좋았다. 터키의 꿀이 값싸고 질이 좋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꿀맛에 반해 이후 내내 가는 곳마다 빵에 꿀을 발라 먹었다. 

 

      터키 여행 첫날인 이날의 일정은 이스탄불의 구시가지 일부를 둘러보고, 소금호수, 베이파자르를 거쳐 아야스까지 가는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되는 보스포러스(Bosporus) 해협의 양쪽에 걸쳐 있는 이스탄불(Istanbul)은 그 지리적 위치와 2000년이 훨씬 넘는 역사에 걸맞게 예로부터 동서양 문화의 교류지 역할을 하여 왔다.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수도였던 이곳은 지금도 도시 곳곳에 과거 번영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역사의 현장일 뿐만 아니라, 1,700만 명이 살아가고 있는 현대도시로서의 면모를 아울러 갖추고 있다. 이렇듯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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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기 중이던 버스를 타고 이스탄불의 구시가지로 이동하여 처음 도착한 곳이 이스탄불 대학교 앞의 광장이다. 1453년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이스탄불(당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설립한 국립대학교인 이스탄불 대학교는 터키 최고(最古, 最高), 최대의 대학이다. 토요일인데다 아침 8시 반의 이른 시각이어서 그런지 출입하는 학생은 많지 않았다. 이 유서 깊은 대학의 교정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했지만, 아쉽게도 출입증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마치 궁전 같은 정문을 정면에서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스탄불 대학교 앞 광장에서 지척에 있는 골목길로 들어서면 대학교 앞답게 서점들이 줄이어 있는 거리가 나온다. 관광안내서에는 고서점거리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팔고 있는 책들의 대부분이 새 책들이다. 터키어를 모르는지라 무슨 내용을 다룬 책들인지는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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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대학교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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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거리]

 

     서점거리를 벗어나자 유명한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 터키어로는 Kapalı Çarşı)가 나왔다. 바자르(bazaar)는 지붕이 있는 시장이란 뜻이다. 우리의 재래시장에 지붕이 씌워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오전 7시에 문을 여는데, 토요일의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아직 사람들이 붐비지는 않았다.
     현재 그랜드 바자르가 있는 장소는 동로마시대부터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후 오스만제국이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서 1455-1461에 걸쳐 경제 진흥의 목적으로 이곳에 두 개의 주 아케이드를 만들었다. 이후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보다 더 많은 장소가 필요하였고, 그 결과 주 아케이드의 바깥부분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었다. 지진,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던 이곳은 몇 번에 걸친 복구 끝에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18개의 출입구와 4천 개 이상의 상점들이 들어서 있어 세계의 가장 큰 바자르 중 하나로 손꼽히며, 이스탄불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되었다.
     4천 개 이상의 상점이 있지만 취급품목이 그만큼 다양한 것은 아니고, 양탄자, 금은세공품을 비롯한 각종 공예품, 각종 씨앗, 가죽제품 등을 주로 취급한다. 가격은 한국 물가를 기준으로 하면 저렴한 편인데, 흥정하기에 달렸다. 촌부는 터키 로고가 새겨진 모자 하나를 20리라(4,000원)에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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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바자르의 7번 출입구와 내부 모습]

 

    그랜드 바자르 구경을 마치고 버스에 올라 신시가지에 있는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ςe Saray)으로 이동하였다.  이스탄불의 역사적인 유적은 거의 구시가지에 있는데, 돌마바흐체 궁전은 유달리 신시가지에 있다.

 

   ‘정원으로 가득찬 곳’이란 뜻의 돌마바흐체는 마르마라(Marmara)해의 해변을 매립하여 세운 오스만제국의 왕궁이다. 본래 작은 정자와 목제 건축물이 있는 잘 가꾼 정원이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그래서 돌마바흐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오스만제국의 세력이 급격히 약해지는 시점에서, 이를 만회하고자 서구화를 추진하고 국력 신장을 도모하던 압둘메지드 1세가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해 초호화판으로 이 왕궁을 건립하였다. 50만 금화(현재 돈 5억불 상당)에 맞먹는 기금으로 건립된 이 궁전은 1856년에 완공되었는데, 궁전의 내부 장식과 방들을 꾸미기 위해 총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막대한 건축비 지출로 인하여 그러잖아도 어려웠던 왕실 재정을 더욱 악화시켜 오스만제국의 멸망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시대 말기에 대원군이 무리를 해서 경복궁을 재건한 우리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1923년 오스만제국을 끝내고 오늘날의 터키공화국을 건국하여 터키의 국부로 칭송받는 아타튀르크(우리에게 흔히 ‘케말파샤’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가 이곳에서 집무하다가 숨을 거두었다(1938.11.10.)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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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마바흐체 궁전 정문]

 

    남쪽에 있는 궁전 정문을 통과하면 먼저 각종 나무와 잔디밭이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 나온다. 그 중앙의 커다란 연못과 연못 속에 세워진 조각이 눈길을 끄는데, 오스만제국의 전통적인 궁궐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 정원은 또한 미르마라해와 바로 접해 있다.   
    정원을 지나 궁전의 본관 건물로 들어섰다. 3층의 좌우 대칭구조(오스만제국이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어 한쪽은 아시아를, 다른 한쪽은 유럽을 상징한다)로 지어진 본관의 내부에는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 280개의 꽃병, 156개의 다양한 시계, 36개의 샹들리에, 58개의 크리스탈 촛대, 560점 이상의 그림, 손으로 직접 짠 대형 양탄자 등이 전시되어 있다. 중앙홀의 가장 큰 샹들리에(750개의 등이 달려 있다)는 무게가 무려 4.5톤으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 무거운 것이 160년이 넘는 동안 떨어지지 않고 36m 높이의 천장에 걸려 있는 게 용하다. 내부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그 화려한 모습들을 눈으로만 잠시 감상할 수 있는 게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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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마바흐체 궁전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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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마바흐체 궁전의 본관]

 

     본관을 한 바퀴 돌아 동쪽으로 난 출구로 나왔더니 마르마라해가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궁전과 그 바다 사이에 웅장한 모습의 석조 문이 하나 있다. 외국의 국가원수와 같은 귀빈이 이 궁전을 방문할 경우에는 배를 타고 와 그 문으로 들어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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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마라해와 연결되는 돌마바흐체 궁전의 문]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나오자 점심때가 되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타마라(Tamara)라는 식당으로 갔다. 4층짜리 식당인데 전체가 관광객들로 붐빈다. 한국인과 중국인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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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mara 식당]

 

     점심 메뉴는 쉬쉬 케밥(shish kebab). 말로만 듣던 터키의 케밥을 처음 대하였다. 케밥은 잘게 썬 고기 조각을 구워 먹는 터키식 요리이다. 주로 양고기로 만들지만 쇠고기나 닭고기로 만들기도 하며 채소를 더해 함께 조리하기도 하는데, 그 종류가 수십 가지에 이른다. 11세기 오스만제국 시절에 터키 전역에 전파되어 대중적인 요리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케밥을 먹을 때에는 필라프(pilaf, 터키식 볶음밥)를 곁들이는 것이 보통이다.

 

    이 날 기대를 갖고 대한 케밥은 실망이었다. 식당이 워낙 많은 사람으로 붐벼서인지 한참을 기다려서 나온 꼬치구이 닭고기가 식어서 딱딱하게 굳어 맛이 없었다. 함께 나온 난(naan)으로 애꿎은 배를 채웠다. 난(naan)은 본래 인도음식이지만 터키에서도 많이 먹는 듯, 이후의 식당에서도 여러 차례 난을 먹었다.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 싫든 좋든 이후의 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 케밥을 계속 먹게 된다. 터키에 온 이상 도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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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쉬케밥]

 

     점심 식사 후 시내를 관통하여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넜다. 동서를 넘나드는 이번 여정에서 전날 유럽에 첫 발을 내딘 발걸음이 이날 아시아로 넘어가는 것이다. 터키의 대부분(전체 면적의 97%)을 차지하는 아시아쪽 터키가 위치한 곳이 아나톨리아(Anatolia, 터키어로는 Anadolu) 반도이다. 아나톨리아는 '해가 뜨는 곳', '동방'이라는 뜻이다. 이런 명칭을 처음 사용한 고대 그리스인들이 볼 때 이곳은 말 그대로 해가 뜨는 동방이었던것이다.   

   이스탄불이 세계적인 국제도시로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보스포러스 해협의 존재이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이 해협은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고 있다. 길이 약 30km, 폭은 넓은 곳이 3,500m, 좁은 곳이 700m로 물 흐름이 세차서 여기저기에서 소용돌이가 친다. 좌우 양쪽 해안에 고대 유적지, 전통적인 터키 마을, 울창한 숲 등이 이어져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는 이 해협은 중세까지만 해도 지중해와 흑해 간의 거의 모든 상거래가 이루어진 통로였다. 국제무역에 있어 이 해협의 중요성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매년 38,000여 척의 배들이 이 곳을 통과하고 있다.

 

   해협을 건너는 보스포러스대교는 현수교로 왕복 6차선이다. 야경이 특히 아름다운 이 다리는 앞으로 터키를 한 바퀴 돌고 와서 그 모습을 제대로 보게 된다. 이스탄불은 교통체증이 워낙 심하여 차창에 어리는 거리 모습을 유심히 볼 수 있었는데, 땅을 조금만 파도 로마 유적지 나와 개발에 제한을 받는 유럽 쪽의 구시가지와는 달리 새롭게 개발된 아시아 쪽의 신시가지에는 고층건물이 즐비했다.  도시 하나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다니... 글자 그대로 국제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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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포러스 대교]  

 

     이스탄불을 완전히 벗어나자 길 좌우로 황량한 산하가 펼쳐졌다. 한 없이 이어지는 산악지대에 나무가 거의 자라지 않는 게 특이한데, 이런 풍경은 그 후에도 여러 번 접하게 된다. 목적지인 베이파자르까지 5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면서 터키가 생각 밖으로 큰 나라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반도 전체 면적의 3.5배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그 넓은 땅에 사는 인구가 8,000만 명이라니... 혜택 받은 나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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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파자르(Beypazar)는 이스탄불에서 동남쪽으로 약 350km(앙카라에서 100km)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이다. 10월 하순의 짧아진 낮으로 인해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날이 어두워져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농촌 지역에 위치한 작은 도시인 이곳은 본래 오스만제국의 전통가옥(2층의 베란다가 튀어난 모습)들이 밀집되어 있는 거리를 볼 수 있어 관광객들이 찾는 곳인데, 이미 어둠이 짙게 내린 탓에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제대로 된 모습은 후에 안탈리아에서 보게 된다). 그 대신 비록 규모가 작긴 하나 전통시장이 조성되어 있어 그 골목을 걸으며 터키의 소박하게 묵은 시골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은 농촌도시답게 상징이 당근이어서 도시 한 복판에 커다란 당근 모양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시장골목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가게가 보는 데서 생 당근을 갈아 즉석 쥬스를 만들어 팔았다. 그만큼 맛이 신선한데 그 가격이 놀랍게도 한 병(200ml)에 2리라(=400원)이다. 너무 저렴한 가격에 한동안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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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 조형물이 세워진 베이파자르의 거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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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파자르의 전통시장 골목]

 

     베이파자르에서 30분 걸려 아야스(Ayas. 베이파자르에서 40km)에 도착하니 밤이 한참 깊었다. 호텔(Prestige Thermal Hotel)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해결하고 방으로 올라가니 피로가 몰려온다. 저층의 콘도식 호텔인 이곳은 명색이 5성급 호텔임에도 욕실에 비누만 있고 샴푸와 로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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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tige Thermal 호텔]

 

2018. 10. 21.(소금호수, 카파도키아)

 

     이날부터 당분간은 새벽 4시 기상이다. 전날 고된 일정을 보냈는데도 의외로 아침 컨디션이 괜찮다. 그동안 헬스클럽에 다니면서 꾸준히 체력단련을 한 덕분인 것 같다. 전날 이스탄불의 호텔 식당에 차려졌던 음식들에는 못 미치지만, 새벽 5시에 뷔페식으로 아침을 제공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는 생각을 하며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마쳤다. 아직 해가 뜨려면 한참 남은 이른 시각인 6시에 호텔을 출발했다. 전날 밤늦게 들어와 잠깐 눈 붙이고 다음 날 새벽에 떠나는 바람에 하룻밤 묵은 호텔이 어떻게 생겼는지 살펴볼 시간도 없었다.

 

     아야스의 호텔을 출발하여 한 시간 가량 가자 앙카라(Ankara) 가 차창 너머로 보인다. 명색이 터키의 수도인데도 이렇다하게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 만한 것이 없어, 갈 길이 바쁜 터키일주 여행에서는 일정에 넣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가이드 소피아의 설명이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도 앙카라의 외곽을 돌아 곧바로 카파토키아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이 때부터 간밤에 모자랐던 잠을 차 안에서 보충하며 꿈속을 헤매다가 도착을 알리는 가이드 소피아의 목소리에 눈을 뜨니 소금호수 앞 주차장이다. 언뜻 시계를 보니 오전 8시 20분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소금호수라는 투즈호수(Lake Tuz)는 터키인들이 소비하는 소금의 70%를 채취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채취한 소금에서 광물질들을 분리 추출해 화장품과 무기질 영양소 등을 만들어 상품화도 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호수로 들어가는 입구의 상가에서 그런 상품들을 팔고 있었는데, 시료로 내놓은 소금을 손에 문질러 보니 미끈미끈하다. 소금에 기름기가 있는 것이다. 점원이 한국말로 “여드름 없어져요~ 굳은 살 없어져요~ 주근깨 없어져요~” 라고 소리치며 손님을 끈다. 이후 들르는 쇼핑센터마다 점원들이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곳을 보게 되는데, 그만큼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리라. 같은 알타이어 계통의 말이라 터키인들이 한국말을 배우기가 쉽다는 것도 한 몫 하는 것은 아닌지...
   
     상가를 지나 호수로 들어서자 핑크빛 호수가 수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게 펼쳐진다. 이른 시각이라 실제 소금 채취하는 모습은 볼 수 없다. 군데군데 소금물이 질퍽하긴 했지만 호수바닥을 걷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유심히 보면 바닥에 하얀 소금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홍학도 산다는데 이른 아침에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대신 집사람이 홍학 모습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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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호수]

 

    소금호수에서 나와 다시 드넓은 광야와 산악지대를 2시간 여 달려 터키 여행의 대표적인 명소인 카파도키아(Cappadocia. Kapadokya)에 도착하였다. 카파도키아는 앙카라에서 동남쪽으로 300Km 가량 떨어진 터키 중동부지방의 고원지대로서, 버섯 모양의 바위로 유명한 괴레메(Göreme)계곡뿐만 아니라 데린구유(Derinkuyu), 네브세히르(Nevsehir), 위르귑(ürgüp), 아바노스(Avanos) 등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이 그 안에 들어 있다. 카파도키아는 본래 이곳에 있던 고대왕국의 이름이었다.  

 

    카파도키아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데린구유(Derinkuyu)이다. 버섯모양의 기암괴석과 더불어 카파도키아를 경이롭게 하는 것이 바로 최대 3만 명까지 수용이 가능한 지하도시이다. 고대 히타이트왕국 시대(BC 18-13세기)에 처음 형성되기 시작한 이 지하도시가 본격적으로 확장된 것은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들어와 교육기관과 교회, 포도주 저장고 등을 축조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현재 작은 규모의 마을부터 거대한 도시에 이르기까지 40여 개에 달하는 거주지가 발굴되었으나, 일반인에게는 그 중 소수만 공개되고 있다.

 

     '깊은 우물'이라는 뜻인 데린구유는 1965년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는데, 실제로 관람할 수 있는 구역은 총 면적의 10%에 지나지 않는다. 미로처럼 얽혀있는 좁은 통로 곳곳은 무너져 내린 곳도 많은데, 놀랍게도 내부의 환기시설이 아직도 잘 작동하고 있다. 데린구유는 깊이가 55m에 달하는 11층으로 이루어졌다. 지하 1층과 2층에는 마구간과 포도주 압착기, 돌로 만든 긴 탁자가 놓여 있는 식당, 교실이 위치하고 있고, 3, 4층에는 거주지와 교회, 병기고가 있다. 현재 4층까지만 개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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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린구유의 개념도 및 내부 모습]

 

     데린구유를 돌아보고 나와 버스로 30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점심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탄디레비(Tandirevi)라는 식당인데, 겉모습만 보면 마치 무슨 궁전 건물 같다. 실내에 들어가면 얼핏 보아도 한번에 100 명 이상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이곳에서 카파도키아의 명물인 항아리 케밥을 맛보았다.
     항아리 케밥은 통항아리에 케밥을 넣고 섭씨 80°로 3시간 가열하여 만든다. 직원이 항아리를 손님들 식탁에 가져와 보는 데서 뚜껑 부분을 깬 다음, 안에 들어 있는 케밥을 꺼내 나누어 준다. 항아리 케밥은 맛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런 방식이 특이하여 유명해졌다. 촌부는 처음에는 항아리가 한 사람 앞에 하나씩 나오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우리 일행 27명이 먹을 케밥을 한 항아리에 담아 왔다. 그렇다고 항아리가 그렇게 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배하면 사람마다 맛을 보는 정도이다. 대신 구운 고기나 야채 같은 다른 음식들이 뷔페식으로 진열되어 있어 각자 가져다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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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ndirevi 식당과 항아리 케밥]
 

     점심식사 후 카파토키아의 명물인 버섯모양 바위들이 즐비한 괴레메(Göreme) 계곡을 파노라마로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지프로 계곡 사파리 투어를 한다. 전망대의 뒤편으로는 후술하는 오르타히사르(Ortahisar) 성채가 가까이 있다.
     괴레메(Göreme) 계곡으로 들어서면 마치 지구가 아닌 다른 외계의 별나라에 들어온 것 같다. 드넓은 계곡에 갖가지 버섯 모양의 기암괴석들이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한다. 수백만 년 전 활화산이었던 에르지예스산(Erciyes Dagi, 3916m)과 하산산(Hasan Dagi, 3268m)이 분출한 용암으로 인해 형성된 이 곳(해발고도 1,000-1,300m)의 지형은 오랜 세월을 거쳐 풍화, 침식 작용을 일으켜 부드럽고 쉽게 깎이는 응회암지대로 바뀌게 되었다. 이 응회암을 깎고 굴을 파서 만든 거주 공간은 외부에 쉽게 노출되지 않아 종교 탄압 시기에 기독교인들의 훌륭한 피난처가 되었다.
     응회암은 암석이라고는 하나 쉽게 깎이는 탓에 거주공간이 좁다고 생각될 경우 주변의 바위를 더 파내기만 하면 되었고, 그 속의 집은 여름에는 더위로부터, 그리고 겨울에는 한파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사람들은 이곳에 자신들의 거주 공간 외에 교회와 수도원도 만들었다(현재도 동굴수도원이 360여 개 흩어져 있다). 이곳에 있는 교회의 벽면은 온통 성서 속 장면을 그린 성화로 장식되어 있다. 가히 비잔틴 예술의 보고라고 할 만하다. 현재 총면적 약 96㎢의 계곡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고, 1985년 세계유산(복합)으로도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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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레메 계곡 전망대와 그곳에서 바라본 괴레메계곡 전경]

 

     사파리 투어는 전망대에서 지프를 타고 계곡으로 들어가 2시간 동안 구석구석을 누비는 것이다. 계곡 안을 워낙 험하게 달리기 때문에(탑승자에게 스릴을 맛보게 해 주려고 일부러 그렇게 운전한다) 예전에 이곳에 왔다가 이 투어를 하고는 토하고 병원신세를 졌던 집사람은 이번에는 투어에 참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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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파리투어 도중에 중간의 세 곳 정류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주위를 둘러보기도 하고, 전원이 모여 샴페인을 터뜨리기도 했다(샴페인과 식탁, 술잔 등은 사파리 투어 운전기사들이 준비해 왔다). 세 곳 정류장 중 오르타히사르(Ortahisar) 성채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80m 높이의 이 성채는 후술하는 우치사르(Uçhisar) 성채와 외관이 비슷한데, 우치사르 성채와는 달리 지금은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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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타히사르 성채]
 
      사파리 투어에서 또 하나 주목을 끈 곳은 커다란 바위 하나에 통째로 만들어진 동굴교회였다. 제법 규모가 큰 내부로 들어서면 벽면과 천장에 그려진 프레스코 성화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이 교회가 있는 바위의 정상에는 터키 국기가 정상에 세워져 있다. 터키인들은 국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여 웬만한 곳에는 국기를 건다. 심지어 나중에 이동 중에 발견했는데, 도로변의 노점상도 국기를 것 곳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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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교회와 내부의 제단과 성화가 그려진 천장]

 

     사파리투어를 마치고 로즈밸리(Rose Valley)로 이동했다. 이 역시 괴레메계곡의 일부이다. 토양이 붉어 장밋빛을 띤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려 계곡 쪽으로 가려는데 그 입구에 한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일분 즉석 사진’을 찍어 준다는 것이다. 이번 터키 여행에서 발견한 것 중 하나가 가는 곳마다 웬만하면 한글 간판이나 광고판, 태극기 문양을 넣은 상품, 몇 마디라도 한국말을 쓰는 상점직원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한국인이 많이 찾는다는 이야기도 되고 터키인들이 한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나중에 일주를 끝내고 이스탄불에 돌아갔을 때는 길거리에서 웬 젊은 남녀 한 쌍이 나를 보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여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가이드 소피아의 말에 의하면 요사이 길에서 한국 사람을 보면 그렇게 인사를 하고 호감을 표하는 터키인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K-팝을 비롯한 한류의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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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밸리(Rose Valley)는 정말 산이며 계곡이 온통 붉은 색이다. 같은 응회암지대인데도 이곳만 유독 붉은 색을 띄는 이유를 이방인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사파리투어에 참여 안 하고 이곳으로 와 먼저 둘러본 후 기다리고 있던 집사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계곡을 조금 내려가 보았다. 트레킹 코스가 여러 갈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며칠 머물며 트레킹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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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밸리]

 

     로즈밸리를 벗어나 인근의 양탄자 전문 쇼핑센터를 잠시 들렀다가 데프란트 계곡을 거쳐 파샤바 계곡으로 갔다. 데프란트 계곡에도 올린 머리를 한 귀부인의 모습을 한 바위, 두 마리의 오리가 입맞춤을 하고 있는 모습의 바위,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놓은 듯한 모습의 바위 등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특히 영락없는 낙타모습의 낙타바위가 특히 유명하다. 영화 스타워즈를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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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바위]

 

     파샤바(Paşabağ) 계곡은 카파도키아의 상징인 버섯바위가 가장 전형적으로 발달한 곳이다. ‘수도사의 골짜기’라고도 불린다. 그 동화 같은 모습으로 인해 만화영화 ‘개구장이 스머프’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마침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 무렵이어서 분위기가 더욱 환상적이었다. 아무리 자연의 조화라지만 어찌 이리도 절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단 말인가. 보면 볼수록 입이 벌어졌다. 이곳은 카파도키아에서도 꼭 들러야 하는 유명한 곳이라 늦은 시각인데도 관광객들로 붐볐고, 그 중에는 낙타를 타고 바위 사이를 유람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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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샤바 계곡에서 지는 해를 뒤로 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위르귑(Ürgüp)에 있는 호텔(Dinler Hotel)로 가 여장을 풀었다. 리조트호텔로 시설이 여러 모로 훌륭했다. 다만 실내온도가 낮은 듯 다소 쌀쌀한 느낌이었다. 창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서니 어둠이 깔려가고 있는 도시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평화롭기 그지없는 전원도시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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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귑의 Dinler호텔과 도시 전경]

 

     호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벨리댄스(belly dance)를 보러 갔다. 벨리댄스는 서(西)아시아에서 아프리카 북안에 걸쳐 있는 이슬람문화권 여성들이 추는 배꼽춤의 서구식 명칭이다. 터키어로는 ‘오리안탈 단스’(Oryantal dans, ‘동방의 춤’이라는 뜻)라고 한다.  
     이 춤은 허리를 빠르게 흔드는 동작이 특징이다. 몸통(belly)과 허리를 흔들거나 비트는 춤은 사막지대에 사는 민족에게 특히 두드러진다고 하지만, 매혹적인 여성이 몸을 가리기 위한 최소한의 얇은 옷을 몸에 걸치고 추는 벨리댄스는 오히려 도시에서 발달하였다. 전통악기에 의한 반주음악에 맞추어 가슴, 하리, 엉덩이를 빠르게 돌리는 선정적인 이 춤은 이스탄불과 같은 대도시나 관광객이 많은 도시의 밤을 수놓는 관광 프로그램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본래 오스만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술탄(=오스만제국의 황제)을 위하여 하렘(Harem. 왕궁에서 남성의 출입이 금지된 여성들만의 공간)에 있는 여자들이 이 춤을 추었다고 한다. 술탄이 왕비를 간택할 때는 하렘에 가서 그곳의 여자들에게 벨리댄스를 추게 하고, 그 중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골랐다고 한다. 그런데 술탄이 선택한 여자라도 술탄의 모친이 동의해야만 왕비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시절에도 치맛바람이 드셌던 모양이다.

 

     저녁 8시 넘어 도착한 벨리댄스 공연장은 이미 만원이었다. 여행사에서 미리 예약을 하지 않았다면 못 볼 뻔했다. 공연장에서는 간단한 과자, 땅콩, 과일 등이 제공되고, 술은 무제한으로 나온다. 애주가들에게는 이것만으로도 가 볼만한 요인이 아닐까. 프로그램은 대략 1시간 30분 정도 진행되었는데, 전반부에 남녀 여러 명의 무용수가 나와 어울려 추는 춤은 다소 지루했다. 후반부에 여자 무용수가 혼자 나와 이름 그대로의 벨리 댄스를 출 때는 섹시함을 강조하듯 허리를 현란하게 돌리는 모습이 감탄을 자아냈다. 춤을 참으로 열정적으로 추었다. 공연장을 나설 때는 밤이 깊어 이미 10시가 넘었다. 참으로 많은 일정을 소화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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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댄스]


2018. 10. 22.(카파도키아. 오브룩한, 안탈리아)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났다. 카파도키아의 또 다른 명물인 열기구를 타러 가기 위해서이다. 해가 뜨기도 전에 열기구를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가면 매우 춥다고 하여, 겨울 내의를 입고 그 위에 다시 겉옷을 여러 겹으로 끼어 입었더니 몸이 둔탁할 정도였다. 그래도 추위에 떠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가능한 한 많이 입으라고 집사람이 자꾸 권한다. 예전에 타본 경험이 있는 집사람은 호텔에서 쉬기로 했다.

 

   열기구 타는 곳에 6시 20분 쯤 도착하였는데, 이미 여기저기서 열기구를 부상케 하기 위하여 가스를 주입하고 있었다. 열기구의 구조는 간단하다. 안에 버스 70대가 들어갈 정도로 부피가 큰 풍선과 그 풍선에 가스를 집어넣는 장비, 그리고 풍선에 매단 바구니(탑승객들이 타는 곳. 정원 20명)가 전부이다. 그런데 이 열기구 하나의 값이 억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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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를 주입 중인 열기구]
 
     마침내 6시 35분경에 우리 일행이 탄 열기구가 부상(浮上)을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떠오른 열기구들이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는다. 보통 150개가 뜬다고 한다(그 중 하나는 한국인이 운영한다). 열기구 하나에 20명씩 타니까 3,000명이 동시에 카파도키아의 하늘을 나는 것이다. 사실 열기구가 이처럼 매일 뜨는 것은 아니다. 날씨가 좋아야 한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강하게 불면 못 뜬다. 그 확률이 대략 반반이라고 한다. 결국 멀리 카파도키아까지 힘들여 가도 명물인 열기구를 못 탈 확률이 50%는 된다는 것이다. 이 날은 다행히 날씨가 맑고 바람도 거의 안 불어 열기구가 뜨기에 딱 좋았다. 누군가 우리 일행 중에 3대에 걸쳐 공덕을 쌓은 사람이 있는 모양이라고 해서 함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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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상을 시작한 열기구]

 

      카파도키아의 비경을 만들어 낸 에르지예스산에서 마침내 해가 떠오르는 가운데, 어제 여기 저기 다니며 보았던 괴뢰메 계곡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또 다른 감흥이다. 참으로 절묘하게 생긴 바위들의 천국이다. 송이버섯 모양의 바위는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남자의 성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물주가 일부러 만들어도 저 많은 각종 바위들을 일일이 다 만들지는 못했을 것 같다. 

    아침 7시 반의 이른 시각, 그것도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 이 계곡에서 결혼사진을 찍는 젊은 한 쌍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지 그들에게 지금 추위가 대수이랴. 열기구 아래 보이는 괴레메 계곡의 풍경에 감탄사를 연발하는 가운데 금방 1시간이 지나가 하강해야 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감히 말하고 싶다. 터키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꼭 카파도키아를 가고, 가거든 열기구를 반드시 타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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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기구 탑승을 마치고 아침 8시 반에 호텔로 돌아와 늦은 식사를 했다. 아침이 늦어진 만큼 이 날은 점심, 저녁도 순차적으로 늦어졌다.  아침식사  후 먼저 우치사르(Uçhisar)로 이동했다.

   비둘기 계곡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는 우치사르는 과거 온통 응회암으로 뒤덮여 있었던 곳으로, 부식작용으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기묘한 바위산이 만들어졌다. 이런 기묘한 바위들에 수없이 뚫려 있는 구멍들을 볼 수 있는데, 바로 비둘기 집이다. 이 집들의 주인인 비둘기들은 이곳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에겐 귀한 손님이었다. 성화를 그리기 위한 재료인 알을 제공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은 비둘기 알에서 염료를 얻어 동굴교회의 성화를 채색하였다.
     최근에는 성채의 지하 100m 지점에서 비밀터널이 발견되었는데, 전시에 대비하여 물을 공급하던 곳으로 알려졌다. 현재 우치사르의 성채에는 호텔과 레스토랑들이 들어서 있어 찾는 이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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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사르 성채와 주변의 구멍 뚫린 바위]

 

    우치사르를 둘러본 후 보석 전문 쇼핑센터에 들렀다가 안탈리아(Antalya)로 향했다. 지중해안의 휴양도시 안탈리아는 카파도키아에서 차를 타고 남서쪽으로 8시간 가야 도달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도중에 오브룩한(Obruk Han)과 콘야(Konya)를 지난다.

       오브룩한(Obruk Han)은 13세기경 낙타를 이용한 대상(隊商)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콘스탄티노플로 오가던 때 그들이 도중에 머물렀던 숙소이다. 지금은 건물의 외곽만 남아 있어 숙소로 사용할 수 없지만, 외곽의 모양만으로도 당시의 커다란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축조 당시 주변의 기독교 교회를 부수어 그 돌을 섞어 만들었기 때문에, 벽에서 기독교 교회의 모양이 새겨진 벽돌들을 볼 수 있다. 오브룩한의 바로 옆에는 이곳에서 쓸 물을 공급이라도 할 듯 넓고 깊은 담수호가 있다. 이 호수는 고대에 운석이 떨어진 곳에 물이 고여 생겼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거대한 싱크홀에 지하수가 채워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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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룩한과 담수호]

 

     오브룩한을 벗어나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아침이 늦어진 까닭에 점심도 오후 2시 반이 되어서야 먹을 수 있었다. 식사장소는 얄라피나르(Yalapinar)라는 식당인데 지붕의 모습이 특이하였다. 메뉴는 닭고기 철판볶음. 터키는 이슬람종교로 인해 돼지고기를 안 먹는 까닭에 가는 곳마다 닭고기를 실컷 먹었다. 집사람은 오랫동안 버스를 타다 보니 멀미를 하여 식사를 제대로 못하였다. 내가 준비하여온 약도 있었지만, 일행 중 한 분이 멀미의 특효약(노보민시럽)이라며 건네준다. 함께 여행하는 동료애라고 할까. 고맙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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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lapinar 식당]

 

     식사 후 안탈리아로 가는 길에 콘야(Konya)를 지났다. 콘야는 과거 11세기 셀주크제국의 수도였으며, 지금도 터키의 중요 도시 중 하나이다. 앙카라에서 남쪽으로 250Km가 떨어져 있다. 콘야 지방은 광활한 평야지대이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밀로 터키 전체의 수요를 충당할 수 있다고 하니 가히 터키의 곡창이라 할 만하다. 지평선이 끝없이 보이는 차창에 어리는 풍경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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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야의 지평선]

 

     평야지대를 한참 지나고 나면 터키의 남부를 동서로 길게 뻗은 토로스산맥(Toros Dağlari)을 넘게 된다. 최고 고도가 거의 4,000m에 달할 만큼 높은 산맥이라 이곳을 넘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길은 매우 잘 닦여 있지만 높은 산맥을 넘는 고갯길이다 보니 좌우로 꼬불꼬불의 연속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의 풍경은 수시로 바뀌는데 토양 탓인지 이곳도 나무가 거의 없는 황량한 바위산이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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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로스산맥을 넘는 고갯길]

 

      토로스 산맥을 다 넘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직 갈 길이 먼데 말이다. 지금 그리로 가고 있는 안탈리아는 어떤 곳일까. ‘헴가림도 하도 할사’이다. 송강(松江)은 사미인곡(思美人曲)에서 일모수죽(日暮修竹)에 헴가림을 하였지만, 멀리 동방에서 온 나그네는 일모도원(日暮途遠)에 헴가림을 하고 있다. 
 
     지중해변의 휴양도시 안탈리아의 외곽에 있는 호탤(Grand Ring Hotel)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한참 깊었다(밤 8시 30분). 늦은 시각이었는데 호텔 레스토랑에 뷔페식 음식이 그 때까지 남아 있었다. 지중해의 파도소리가 들리는 리조트 호텔이라 야외 수영장 등 여러 부대시설이 있지만, 그것을 이용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한밤중에 도착하여 새벽에 떠나는 일정의 연속이다 보니 5성급 호텔을 거의 잠자는 데만 이용할 수밖에 없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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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 Ring 호텔]


2018. 10. 23.(안탈리아. 파묵칼레)

 

     이날도 새벽 4시 기상, 5시 식사, 6시 출발이다. 안탈리아를 바다와 육지에서 감상하는 날이다. 먼저 유람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 도시 전경과 절벽 위의 집들을 구경한 후, 배에서 내려 오스만제국 당시의 가옥형태가 남아 있는 구시가지를 도보로 둘러보는 것이다.
    안탈리아는 터키 남서부에 있는 항구이자 터키 최대의 휴양도시이다. 인구는 46만 명. BC 150년 페르가몬의 왕 안탈루스 2세가 건설하였는데, 사도 바울이 첫 기독교 전도 여행에 나서려고 배를 탔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중해변에 있으면서 산으로 둘러싸인 이 도시는 기후가 좋아 프로축구팀들이 전지훈련을 위해 자주 찾는다고 한다.
 
  호텔을 나서서 곧바로 유람선 타는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찻길에서 절벽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어둠이 가시지 않은 선착장에는 해적선 모양의 유람선들만 유령처럼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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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장의 유람선들]

 

   잠시 기다렸다 유람선에 올라 바다로 나갔다. 선착장에 배들이 많이 정박해 있는데도 바닷물은 맑고 깨끗하다. 처음에는 어두워 어슴푸레한 윤곽만 보이던 주위의 모습이 떠오르는 해에 맞추어 서서히 또렷하게 드러난다. 도시를 감싸고 있는 산들, 절벽 위의 로마시대 성(城)과 그림 같은 카페들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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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도주, 차, 과자 등을 무료로 주는 유람선을 1시간가량 타며 망중한을 즐겼다. 유람선 선원이 정식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사진을 찍어 주길래 서비스가 좋다고 생각했더니, 배를 타고 있는 동안에 그 사진을 접시에 출력하여 두었다가 하선할 즈음에 하나당 4유로를 받고 팔았다. 기막힌 상술이다. 대부분 기념으로 한 두 개씩 샀다. 

 

     배에서 내려 구시가지로 출발하려는데 선착장에 있던 한 무리의 개들이 따라나선다. 가이드 소피아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는 마치 안내견처럼 관광객을 졸졸 따라다니는 개들이 많다고 한다. 아마도 관광객들이 던져 주는 먹이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정말 이 개들은 나중에 안탈리아를 떠날 때까지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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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탈리아의 안내견(?)]

 

     선착장에서 구시가지는 바로 연결된다. 오스만제국 가옥의 특징은 2층의 베란다가 마치 툭 불거진 이마처럼 튀어나와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마주보고 있는 집이 동시에 튀어나오면 서로 닿을 수 있기 때문에 번갈아가며 나와 있다. 이 오스만 가옥이 밀집해 있는 구시가지는 그 가옥형태 말고도 골목길의 거리 자체가 예뻐서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갖가지 물건을 파는 상점, 카페, 레스토랑, 호텔 등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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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제국 가옥의 거리]

 

      구시가지의 끝부분에 다다르자 하드리아누스의 문(Hadrian's Gate)이 나왔다. BC 130년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이 도시를 방문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장식용의 대리석 아치로 만들어 로마시대의 영광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이 문은 과거에는 성벽의 출입구 역할을 했고, 지금은 구시가지로 들어가고 나가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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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누스의 문]

 

      하드리아누스의 문 앞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고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골목길을 좀 더 지나면 안탈리아의 명물이자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블리탑((Yivli Minare)이 나온다. '틈이 있다'는 뜻을 지닌 이 탑은 꼭대기가 푸른빛이 감돈다. 13세기 셀주크제국의 술탄이었던 알라에딘 케이바트가 세운 것으로 본래 이슬람사원(모스크)에 딸린 첨탑(미나레)이었는데, 지금은 이슬람사원은 없어지고 높이 38m의 이 첨탑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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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블리탑]

 

    이블리탑을 끝으로 안탈리아 구시가지 관광을 마치고 올림포스산으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를 타러 걸어가는 중에 이제껏 세계의 어느 도시에서도 보지 못하였던 것을 보았다. 다름 아니라 고양이집이다. 안탈리아에는 앞서 이야기한 개들만이 아니고 길거리에 주인 없는 고양이들이 참으로 많이 돌아다닌다. 그러다 이들 개와 고양이가 만나면 무슨 원수지간처럼 으르렁댄다. 그런데 시정부에서 이 많은 고양이들을 단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을 위해 집단거주지를 만들어 주었다. 더구나 그 집단거주지가 외진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심 한복판 큰길가에 있는 것이 이방인의 눈에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게다가 그 집들에는 각기 집 이름을 붙여놓았고, 거주지 가운데에는 길거리 동물을 도와달라는 입간판까지 세워놓았으니 무슨 말을 더하랴. 말 그대로 고양이들의 천국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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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73.jpg    [고양이 집단 거주지와 길거리동물을 도와달라는 입간판]

 

     올림포스산!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땅이다. 촌부는 이제껏 올림포스산은 당연히 그리스에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가이드 소피아가 처음에 올림포스산에 간다고 했을 때는 잘못 들었나 했다. 도대체 이곳에 어떻게 올림포스산이 있다는 것일까. 네이버에 들어가 두산백과사전의 설명을 찾아보았다. 아래에 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다.

 

     높이 2,917m. 북부 그리스의 테살리아 지방과 마케도니아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1년 중 9개월 동안 산정이 눈에 덮여 있다. 이 산과 이어지는 일련의 산들이 북동쪽으로부터의 침입을 막았다. 동쪽으로 살로니카만(灣)을 내려다보고 정상부가 몇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으며, 과거에는 오르기가 어려웠지만, 지금은 남쪽 기슭의 라리사에서 자동차로 산허리까지 올라갈 수 있다. 구름이 오가는 산정에 제우스를 비롯한 이른바 ‘올림포스의 12신’, 즉 제우스와 그 아내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레스 ·디오니소스 ·데메테르 ·헤파이스토스 ·헤르메스 ·포세이돈 등이 살고 있다고 그리스신화는 전하고 있다.
     키프로스섬을 비롯하여 그리스에는 이 밖에도 올림포스산이라고 불리는 산이 여러 개 있었는데, 이는 ‘올림포스’가 그리스어(語)로 단순히 ‘높은 산’을 뜻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하는 학자도 있다. 그리스인(人)은 최고의 신 제우스가 하늘에 가장 가까운 높은 산에 지은 황금 궁전에 산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산정을 답사하여 ‘제우스의 황금궁전’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면, 더 높은 ‘고산’이 신들의 주거지일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런 식으로 고산은 자꾸만 바뀌어 마침내 그리스의 북부에 있는 최고의 산이 진정한 올림포스가 된 것이다. 그리스인이 각지로 이주함에 따라서 다른 곳의 산에도 같은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결국, (1)안탈리아 인근의 올림포스산은 그리스 북부의 현 올림포스산보다 먼저 올림포스산으로 불렸는데, 그 후 이보다 높은 현 올림포스산이 발견되어 그곳이 새로이 진정한 올림포스산으로 명명되었고, 그럼에도 이곳의 산도 그냥 여전히 올림포스산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거나, (2)아니면 현 올림포스산이 올림포스산으로 명명된 후에 이곳으로 이주한 그리스인들이 이 산에 같은 이름을 붙여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셈이 된다.    
     아무렴 어떠랴, 본래 신화라는 것이 허구이고, 이 지역의 사람들이 이곳 올림포스산이 그리스신화 속의 신들이 살던 산이라고 믿고 있으면 그 믿음을 굳이 부정하려 들 이유가 없다.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이다.

 

     아무튼 버스로 산 중턱(해발 720m)까지 가 80인승 케이블카를 타고 구름을 뚫고 올라 10분 만에 해발 2,365m의 정상에 도달하였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정상에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주위의 광활한 자연과 지중해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은 패러글라이딩의 명소로도 소문난 곳이라더니 정말 여러 사람들이 패러글라이딩을 즐기고 있었다. 지난 해 여름 알프스의 몽블랑에서 패러글라이딩을 즐겼던 기억이 새롭다. 또한 이곳에서는 관광객들이 점프샷을 많이 찍고 우리 일행들도 그 중 가장 멋진 사진을 고르는 경연대회를 하였는데, 계면쩍게도 촌부가 찍힌 사진이 3인 공동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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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포스산의 케이블카. 패러글라이딩.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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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포스 산 정상에서의 점프]

 

      올림포스산을 내려가는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동안 전망대 찻집에서 가이드 소피아가 따끈한 살렙 차(Salep Tea)를 한 잔 사 주어 마셨다. 이 차는 ‘Orchis Mascula’라고 불리는 난의 뿌리를 씻어 말린 후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더운 물에 타서 마시는 것이다. 오스만제국 시절의 전통적인 겨울철 뜨거운 음료로, 기침이나 감기 치료에 도움을 주고 면역력을 강화시켜 주는 효과가 있어 술탄들이 즐겨 마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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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렙]

 

      그런데 소피아가 사 준 이 좋은 차를 마시고 촌부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마실 때 우유 맛이 나긴 했지만 생전 처음 마셔보는 것이라 본래 그런 맛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분말로 된 살렙의 가루를 먹기 좋으라고 우유에 타서 준 것이다(살렙을 맹물에 타면 맛이 없기 때문에 통상 우유나 꿀물에 타서 마신다고 한다). 유당분해효소의 결핍으로 우유만 마시면 설사를 하는 촌부의 사정을 소피아가 알 리 없으니, 벙어리 냉가슴으로 그냥 그녀의 호의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람이 속도 모르고 또 살렙차를 내민다(집사람은 예전에 이미 타본데다 계속된 멀미로 컨디션이 안 좋아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산 위에서 이미 한 잔 마셨는데 속이 안 좋다고 하니까 이내 알아차리고 팔을 거두어들였다. 우유를 못 마시는 체질 때문에 해외여행에서 이처럼 곤혹을 치르는 일이 가끔 있다.
 
     이제 이날의 최종 목적지 파묵칼레까지 3시간 차를 타고 이동하는 일만 남았다. 도중에 오후 1시 무렵 식당(Kuleli Kebab)에 들러 점심식사를 했다. 메뉴는 피데(pide)와 닭갈비구이. 피데는 납작하게 만든 밀가루 반죽을 화덕에 구워낸 빵이다. 말하자면 터키식 피자인데, 이것이 피자의 기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향료를 안 써서 음식이 먹을 만했다. 다만 닭갈비구이는 너무 태운 게 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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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leli Kebab 식당]   

 

      안탈리아에서 파묵칼레로 가는 길도 토로스 산맥의 산악지대를 지나게 된다. 차창에 비치는 산들의 풍경은 콘야에서 안탈리아로 갈 때처럼 나무가 안 자라는 곳이 많아 황량하다. 그렇다고 이 산들이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지역답게 곳곳에 지열발전소가 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터키인들의 국기 사랑이 극진하여 거의 집이나 가게라고 할 수조차 없는 원두막 비슷한 노점에 세워놓은 국기가 눈길을 끌었다.

 

터키79.jpg   [파묵칼레 가는 길의 차창에 어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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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 노점에 세워진 터키 국기]

 

      오후 5시가 다 되어 파묵칼레(Pamukkale)에 도착하였다.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와 노천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기이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유서 깊은 고대도시 유적이 어우러진 파묵칼레는 터키어로 ‘목화의 성(城)’이라는 뜻으로 경사면을 흐르는 온천수가 빚어낸 장관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석회성분을 다량 함유한 온천수가 오랜 세월 바위 위를 흐르면서 그 표면을 탄산칼슘 결정체로 뒤덮어 마치 하얀 목화로 만든 성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차를 내려 매표소를 지나면 언덕 위쪽으로 로마시대 유적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길을 따라가다 성곽의 아치형 성곽 밑으로 난 남문을 통과하면 일견 폐허처럼 보이는 히에라폴리스와 마주하게 된다. 고대 로마유적의 위 하늘에서 떠다니는 21세기 패러글라이딩 낙하산들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안으로 더 들어가 언덕 아래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하얀 석회암지대에서 푸르게 빛나는 노천온천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두 지역을 걸어서 다 돌아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여 전동카트를 타고 먼저 히에라폴리스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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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에라폴리스로 들어가는 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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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에라폴리스 전경]

 

     히에라폴리스(Hierapolis)는 BC 190년에 페르가몬 왕국의 유메네스 2세에 의해 처음 건립된 고대도시이다. BC 130년에 이곳을 정복한 로마인은 이 도시를 ‘성스러운 도시(히에라폴리스)’라고 불렀다. 수질뿐만 아니라 풍광까지 아름다운 온천지대이다 보니 목욕문화가 발달했던 로마 시대의 2-3세기에 가장 번성했다.
     이곳의 온천수는 섭씨 35도로 류머티즘, 피부병, 심장병 등에 효과가 있어 치료와 휴식을 위해 그리스, 로마,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로마 시대에는 여러 황제와 고관들이 이곳을 찾았는데 하얀 결정체가 대지의 경사면을 온통 뒤덮은 장관을 감상하면서 심신의 치료를 겸할 수 있는 최고의 휴양지였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도 온천욕을 하러 이곳에 왔었다고 하며, 그녀가 안토니우스와 함께 목욕을 했다는 온천욕장이 복원되어 있다.

 

     히에라폴리스는 한때 인구가 15만 명에 이르는 큰 도시였으나 전쟁으로 인해 11세기 이후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1354년 이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대지진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진 이 도시를 1887년 독일 고고학자 카를프만이 발견한 후 발굴이 시작되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원형극장, 공동묘지, 신전, 온천욕장 등이 부분적으로 발굴, 복원되어 넓게 흩어져 있다. 지금도 복원작업이 계속 진행 중이다. 특히 15,000석 규모의 원형극장은 거의 본래 모습을 되찾은 듯하다. 그 옛날에 이런 거대한 야외극장을 지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대리석 기둥으로 채워진 옛 온천욕장은 현대에도 고스란히 재현돼 있다.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유적을 동시에 갖춘 이곳은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복합)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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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극장]

 

     1,000여 개의 석관이 남아 있는 공동묘지는 터키에서 가장 큰 규모인데 온천욕장 근처에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 석관들이 치료와 휴양을 위해 몰려들었던 병자들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공동묘지로 들어가는 돌문을 지나면 여기저기 놓인 석관들을 볼 수 있다. 그 관의 크기가 커서 놀랍다. 귀족이나 부호의 묘인가, 아니면 가족묘인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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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로 들어가는 문과 석관들]
 

     공동묘지 인근에 히에라폴리스의 중심가가 있다. 서울의 명동거리쯤에 해당하려는지 모르겠다. 북쪽의 아치형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번화한 거리가 펼쳐진다. 건물은 비록 없어졌지만 즐비하게 늘어선 돌기둥들이 옛날의 번화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하였다.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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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에라폴리스의 중심가]

 

     시간이 없어 온천장에는 들어가 보지 못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노천온천지대로 옮겼다. 파묵칼레는 사실 하얀 온천지대 하나만으로도 독특한 풍광을 연출하여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는 곳이다. 생긴 모습은 흡사 계단식 다랭이논을 닮았다. 석회를 머금은 물이 흘러내리면서 석회가 침전되어 층을 이루었고 층마다 웅덩이가 생겨 물이 고여 있는데, 그 물이 푸른색을 띠고 있어 더 신비롭다. 그런가 하면 소금가루를 겹겹이 쌓아놓은 듯 하얀 석회층이 경사진 비탈의 한 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설국 같은 분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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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온천]  

 

     신을 벗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표면이 미끄러워 조심해야 한다. 배수로처럼 골을 파서 물이 모여 흐르는 곳에 걸터앉아 발을 담그니 따뜻한 물의 온기가 전달되어 온다. 뜨겁지는 않다.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서 웅덩이진 곳으로 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붐빈다. 하나같이 신기한 표정이다. 이곳의 하얀 석회봉을 가까이에서 제대로 감상하려면 미끄러운 비탈길을 더 내려가야 하는데,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지고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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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묵칼레를 벗어나 라이커스 리버(Lycus River) 리조트 호텔에 도착하니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렸다. 그래도 다른 날보다는 일찍 도착한 편이라 피로가 쌓인 집사람은 스파에서 마사지를 받고 왔다. 촌부는 수영을 할까 하고 실내 수영장에 가 보았으나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가 썩 내키지 않아 그만두었다. 호텔 식당은 규모가 매우 크고 뷔페음식도 다양했다. 그런데 이것저것 골고루 갖추고 있는 5성급 호텔에서 방의 전자식 카드키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아 애를 먹이는 것은 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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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cus River 호텔]        

 

2018. 10. 24.(쉬린제, 에페소, 아이발릭)

 

   이동거리가 500km에 달하는 날이다. 다른 날에 비해 30분 늦다지만 여전히 이른 새벽인 4시 30분에 일어났다. 5시 30분 아침식사, 6시 30분 출발의 전형적인 패턴은 그대로이다. 호텔 마당에 서니 호텔 지붕위로 아직 지지 않은 보름달이 걸려 있다.

  
     면(綿) 제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쇼핑센터를 들러 에페소로 향했다. 차창 주위의 풍광은 이제껏 보아 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에페소(Ephesos)까지는 3시간 가까이 걸렸다. 에페소의 로마 유적지를 둘러보기에 앞서 인근의 쉬린제(Sirince)에 있는 그리스마을을 먼저 찾았다.
     이곳은 현재의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기 전에 그리스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아직도 그리스 양식의 가옥들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여느 관광지와는 달리 찾는 이가 많지 않다. 그래서 산간에 살고 있는 평범한 터키 주민들의 모습을 그냥 푸근하게 볼 수 있다. 이번 일정 중에서 유일한 힐링장소라고나 할까. 조용하고 한적한 산골 마을이지만 갖가지 과실주를 맛볼 수 있는 점이 이채롭다. Rumali Mahzen이라는 상호가 붙은 레스토랑에 들어서니 체리, 사과, 블루베리, 멜론, 석류, 복숭아로 만든 과실주를 맛보라고 차례로 갖다 준다. 애주가들은 놓치면 안 될 곳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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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린제의 그리스 마을]
 
     쉬린제에서 에페소로 돌아가는 길에 점심식사를 했다. 잔디밭과 과수원이 있는 한적한 식당이다(Oasis Park Restaurant). 메뉴는 양갈비 구이. 양고기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고 향식료를 쓰지 않아 먹을 만했다. 다만 너무 익혀 일부 탄 부위가 있는 게 흠이다. 식사 후에 후식으로 수제 요구르트인 아이란(ayran)이 나왔다. 터키에서는 갈증을 해소하고 숙면에도 도움이 되는 인기 있는 요구르트라고 하는데, 유제품과 친하지 않는 촌부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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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sis Park 식당]
 

      점심식사를 마치고 가죽제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쇼핑센터를 들렀다. 다른 쇼핑센터에서도 그랬지만 이곳 직원들의 유창한 한국말 솜씨는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패션쇼는 이제껏 언론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접했는데, 이곳에서 여러 모델들이 갖가지 가죽옷을 입고 펼치는 패션쇼를 난생 처음 보았다. 터키가 양가죽으로 만든 옷이 특히 유명하다는 것을 이곳에서 알았다. 다만 가죽옷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촌부에게는 별나라 이야기이다.

 

      에페소(Ephesos)는 당초 BC 11세기 말에 그리스인들이 식민도시로 건설한 곳으로, BC 6세기부터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BC 334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해방되었다. BC 2세기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아시아 속주의 수도로서 지중해 동부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전성기를 누렸다. 이처럼 헬레니즘 문화와 그 뒤를 이은 로마 문화가 번성하여 중요한 건축물이 수없이 세워졌다. 특히 여신 아르테미스를 모신 신전은 한때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웅장하였다고 한다. 에페소는 또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한 곳으로도 유명하지만, AD 431년에 종교회의가 열려 성모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라 인정한 것이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역사를 지닌 에페소는 그 후 약탈과 지진 등으로 폐허로 변하였고, 현재는 원형극장,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신전, 셀수스 도서관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에페소의 유적지 안으로 들어서서 여기저기 파헤쳐진 유적지를 처음 대하였을 때는 다소 황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더하여 갑자기 소나기가 장대처럼 내리는 통에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가면서 점점 탄성이 흘러나왔다. 하드리아수스 신전, 트라야우스의 우물 등 줄지어 늘어서 있는 석조 유물들을 보면서 전성기에는 얼마나 화려했을까를 상상해 보았다. 온갖 용도로 사용된 갖가지 유물들 중에는 대변기가 나란히 있는 수세식 공중화장실도 있고, 심지어 유곽의 터와 유곽을 출입하려면 발 크기가 이 정도 이상이어야 한다며 바닥의 석판에 발을 새겨 놓은 것(인류 최초의 광고라고 한다)까지 있어 웃음을 자아냈다. 미성년자 출입금지의 의미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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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의 중심거리]

 

터키99-1.jpg    [하드리아누스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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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야누스의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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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세식 공중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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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곽과 유곽 출입자의 발 크기를 재보는 곳]

 

      에페소의 유적 중 백미는 셀수스 도서관(Celsus Library)과 원형극장이다. 셀수스 도서관은 전면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규모를 추측할 수 있다. 이 도서관은 AD 135년 아퀼라(Aquila)가 그의 아버지인 로마의 아시아 속주 총독 셀수스 폴레마이아누스(Celsus Polemaeanus)를 기리기 위하여 셀수스의 무덤 위에 지은 것이다. 도서관에는 세 개의 문이 있고, 그 문 옆에 각가 지혜, 운명, 학문,미덕을 상징하는 여성상이 조각되어 있다. 높은 초석 위에 세워진 이 건축물은 넓은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지하의 터널로 맞은편에 있는 유곽과 연결된다. 이 도서관은 한때 1만 2,000여 권의 두루마리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도바울이 이 도서관에서 2년간 전도활동을 하며 강론을 펼쳤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도서관의 설립시기에 비추어 볼 때 신빙성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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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100-1.jpg      [셀수스 도서관의 전면]

 

     야외 원형극장(Efes Theatre)은 무려 25,000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크다. 이 극장은 헬레니즘 시대에 처음 만들어졌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그 후 AD 1-2세기경에 지은 것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AD 34-41) 때 로마식 극장으로 재건을 처음 시작하여, 네로 황제(AD 54-68)를 거쳐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AD 193-211) 때 극장의 3층이 완성되었다. 3층 구조의 이 원형극장의 각 층은 22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곳의 실내 정면은 총 높이가 18미터에 달하는데, 각종 부조와 원주, 창으로 장식되어 있고, 무대에서 관중석 끝까지 목소리가 전달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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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극장]

 

     에페소의 유적을 둘러보고 나오는 출구에서 집사람과 엇갈려 기다리는 동안에 부근 기념품점에서 8유로를 주고 에페소 로고가 새겨진 모자(해트 형태)를 하나 사서 쓰고 나왔는데, 정작 집사람은 먼저 나가서 역시 기념품점에서 20리라(=4유로)를 주고 내 모자(캡 형태)를 하나 사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양이 다르긴 했지만 촌부가 산 모자의 반값이었다. 촌부가 바가지를 쓴 것이다.    

 

     에페소에서 이날의 최종 목적지인 아이발릭(Ayvalik)까지는 3시간 넘게 가야 한다. 전처럼 산길을 가고 평야지대를 통과하기도 하지만, 해변으로 난 길을 갈 때 처음으로 에게해를 대하였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의 도시국가가 번창했던 그리스문명보다도 앞서서 이 바다를 중심으로 세계 최초의 해양문명이 발달하였다는 것을 학창시절 세계사 시간에 배운 기억만 있을 뿐인데, 막상 그 바다를 대하니 그 문명이 과연 어떠했을지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타임머신이라도 있으면 타고 과거로 돌아가 보련만. 다음날 트로이를 가면 어떨는지.

 

     달리는 버스의 차창에 어둠이 깔리더니 순식간에 깜깜해진 하늘에 보름달이 떠올랐다. 슈퍼문(Super Moon)에 가까울 정도로 크고 둥글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슈퍼문을 대하다니 길조이런가. 호텔에 도착하거든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호텔에 도착하였을 때는 구름이 잔뜩 끼어 볼 수가 없었고, 다음날 새벽에야 구름 사이로 잠깐 볼 수 있었다.

   밤 8시 30분에 도착한 아이발릭의 호텔(Hattusa Vacation Club Thermal Kazdaglari)은 방에 취사용의 전기레인지와 식기들이 비치되어 있는 전형적인 리조트호텔이다. 늦은 시각이라 호텔 식당의 음식들이 다 식어 있었다. 커피나 차도 마실 수가 없었다. 아침에만 제공한다고 한다.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올라갔다. 피로가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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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발릭의 Hattusa Vacation 호텔 위로 뜬 슈퍼문]

      
2018. 10. 25.(트로이. 이스탄불)

 

     트로이를 거쳐 이번 터키 일주여행의 출발지였던 이스탄불로 마침내 돌아가는 날이다. 아침 기상시각이 새벽 5시 30분으로 늦춰졌다. 여전히 이른 시각이지만 4시에 일어날 때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6시 30분에 식사를 하고 7시 30분에 호텔을 출발했다. 어제 밤늦게 도착하여 몰랐는데, 아침에 보니 아이발릭이 에게해변의 휴양지임을 알겠다.

 

     왼쪽으로 여명이 깃든 에게해를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이다산(Ida Mountain. 해발 1,767m)의 꼬불꼬불한 산길을 넘는다. 에게해와 마르마라해가 보여 풍광이 뛰어난 이다산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성소이다.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가 탄생한 산이고, 산정(山頂)에서 헤라와 결혼한 산이다. 옛날 이 산마루 중 하나에 제우스의 사당(祠堂)이 있었고, 최고봉인 가르가루스봉에서는 신들이 트로이전쟁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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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속의 에게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2004년에 헐리우드에서 만든 영화 ‘트로이’를 보면서 가다가 오전 9시가 조금 넘어 신화 같은 역사 속의 도시 트로이에 도착했다. 아니 트로이 유적지에 도착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트로이(Troy)는 에게해에서 내륙으로 6km 정도 떨어져 있고,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있는 평야를 내려다보는 히사를리크 언덕 위에 있다. 지정학적으로 바다와 너무 근접한 것도 아니고 너무 먼 것도 아닌 적당한 위치였다. 그래서 바다로부터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동시에 바다를 이용한 교역을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이곳에서 일찍이 문명이 발달할 수 있었다.  
   BC 4000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여러 문명이 거쳐 간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호메로스(Homeros)의 서사시 ‘일리아드’로만 기억되고 있던 트로이는, 독일의 백만장자이자 고고학자였던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1890)의 발굴로 그 실체가 세상에 알려졌다. 

 

     독일에서 목사 아들로 태어난 하인리히 슐리만은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일리아드> 이야기를 듣고 언제고 트로이를 찾아내겠다는 마음을 늘 지녔다. 그는 훗날 자수성가하여 백만장자가 되자 트로이를 찾아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1870년에 발굴에 들어가 1871년에 마침내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3년에 걸친 발굴로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견하였다. 이 유물들은 슐리만이 독일로 가져와 그의 사후에 베를린의 국립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1945년 독일로 진주한 소련이 탈취하여 지금은 러시아의 푸시킨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래서 터키, 그리스, 독일, 러시아 사이에 지금도 그 유물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초기 발굴에서 슐리만은 자신이 발견한 9개 층에 달하는 유적 중 두 번째 층이 트로이 유적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후 트로이 유적은 여섯 번째 층인 것으로 밝혀졌다. 발굴을 통해 밝혀진 트로이성은 일리아드에 나와 있듯이 견고하고 튼튼한 성이었다. 비록 규모가 작기는 하였지만 그 당시의 무기체계로는 쉽게 공략 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것이다. 이곳은 199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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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유적지]

 

     여기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트로이의 목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본다. 


     트로이목마는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에서 그리스군이 트로이의 성 밖에 만들어 둔 큰 목마이다. 전쟁은 두 나라 사이의 비슷한 전투력과 트로이의 강력한 요새로 인해 쉽게 끝나지 않고 10년간 계속되었다. 그러자 그리스군은 마치 선물로 주는 듯 큰 목마를 성문 앞에 두고 트로이를 떠나는 것처럼 가장한다.

   트로이 사람들은 그리스군이 목마를 두고 간 이유를 알기 위해 점술사를 불러 물어본다. 점술사로부터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으면 그리스에 재앙이 임하고 성 밖에 방치해 두면 트로이에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풀이를 듣고, 트로이 사람들은 성문을 열고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는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그리스군의 지략가 오디세우스의 작전이었다. 큰 목마 안에 그들의 군사를 숨겨 두고 점술사를 매수하여 난공불락의 트로이 성벽을 넘고자 하는 전술이었던 것이다.

   트로이 사람들이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고 승전의 축제를 벌이고 곤히 잠든 사이에 목마 속에 숨어 있던 그리스 군사들이 나와 성문을 열었고, 떠난 척했던 그리스군이 돌아와 마침내 트로이를 점령하게 된다(한때 창궐했던 컴퓨터 바이러스 중에 ‘트로이목마 바이러스’가 있는데 바로 이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마치 무슨 선물이라도 되는 듯이 보이는 메일을 열어보는 순간 그곳에 숨겨놓은 바이러스가 컴퓨터를 감염시켰다). 


     트로이의 목마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3년 전에 만들어져 현재 유적지 앞 광장에 놓여 있다. 내부가 3층으로 되어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데, 미적(美的)인 측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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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목마]

 

     트로이를 둘러본 후 1시간 거리의 랍세키(Lapseki)로 향했다. 이곳에서 카페리를 타고 다르다넬스(Dardanelles)해협을 건너 다시 유럽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에게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는 다르나넬스해협은 길이 60km. 너비 1∼6km. 평균수심 약 54m(가장 깊은 곳은 약 90m)로 예로부터 흑해 연안의 식민도시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요로(要路)였다. 15세기 이후 터키가 항행권을 독점하였으나, 1841년 런던조약에 따라 이 해협은 모든 나라의 상선(商船)에 개방되었다.
     터키공화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23년 완공을 목표로 현재 다르다넬스해협을 건너는 현수교(전장 3.7Km로 세계 최장이다)를 건설 중인데(공사비 4조원), 그 공사를 한국의 SK건설과 대림산업 컨소시엄이 맡아 시공하고 있다. SK건설은 이미 보스포러스해협 해저터널(2016. 12. 개통)과 보스포러스해협 제3대교(2016. 8. 개통)를 건설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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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넬스 해협. 바다 건너가 갈리폴리(겔리볼루) 반도]

 

     여기서 잠시 시계바늘을 제1차 세계대전 당시로 돌려본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제국이 독일과 동맹을 맺고 영국,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자 다르다넬스해협을 통과하여 흑해와 지중해를 오가는 흑해항로가 폐쇄되고 말았다. 이 길이 끊기면서 러시아는 외부에서 물자를 들여올 수 없어 순수 자력으로 전쟁을 치뤄야 하는 상태가 되었고, 영국과 프랑스도 러시아에서 식량을 들여올 수 없게 되어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은 다르다넬스해협을 점령하여 흑해항로를 다시 뚫어야 했다. 결국 연합국은 다르나넬스해협을 점령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오스만제국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를 연합군이 상륙하려고 했던 갈리폴리(Gallipoli. 터키어로는 겔리볼루 Gelibolu) 반도의 이름을 따라 보통 ‘갈리폴리 전투’라고 부르는데, 터키에서는 갈리폴리 반도가 속한 차낙칼레주의 이름을 따 ‘차낙칼레 전투(Çanakkale savaşı)’라고 부른다.

     당시 이곳 차낙칼레에 주둔하고 있던 오스만제국 군대의 사령관은 독일군의 잔더스 장군이었지만, 오스만제국의 무스타파 케말 대령(그가 바로 훗날의 아타튀르크이다)이 참모장 격으로 오스만 육군을 잘 이끌었기 때문에 그가 사실상 사령관이나 다를 바 없었다. 치열하게 벌어지는 전투 중에 케말 대령은 장병들을 모아놓고 비장하게 말한다. 임진왜란 당시 명량해전에 임했던 이순신장군의 필사즉생(必死卽生)의 자세를 케말이 마치 알고 있었던 듯하다. 나라가 국난에 처했을 때 지도자가 모르지기 지녀야 할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무너지면 오스만제국이 무너지고, 우리가 노예가 되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제군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오늘은 살아남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는 개죽음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죽음이 조국을 지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며 그대들 이름은 남을 것이다. 여기에서 무너지면 나 역시 제군들과 함께 시체로 뒹굴고 있을 것이다."

 

     영국군, 호주군, 뉴질랜드군으로 구성된 영연방군은 계속하여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감행하였으나 엄청난 희생자를 내고 실패로 돌아갔다. 지리한 소모전 끝에 연합군은 결국 1916년 1월 작전실패를 인정하고 퇴각을 결정했다. 8개월 넘게 끈 이 전투로 연합군은 총병력 57만 가운데 30만 명이 전사, 또는 부상당했고, 오스만군 또한 32만 명의 병력 중에서 2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전투 중에 오스만 육군의 제57연대는 포탄과 총알이 바닥이 난 상태에서 싸우다 전원 전사하였다. 훗날 아타튀르크는 이 57연대 전원의 용기어린 활약이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며 이 연대를 재건하지 않고 영원한 명예부대로 헌사하였다.

 

     차낙칼레 전투는 터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구국의 전투였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 요르단, 이집트의 해외 영토를 모두 잃어버렸지만,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본토까지 잃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전쟁영웅이 된 케말은 그 후 장군으로 진급( '케말 파샤')하여 세력을 키운 다음 1923년 혁명을 일으켜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고 공화정을 탄생시킨다. 그는 그렇게 새로 탄생한 터키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지금도 터키의 국부로 칭송받고 있다. 그에게 주어진 이름 아타튀르크는 바로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차낙칼레 전투에 영연방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호주와 뉴질랜드군은 전사자만 1만 명에 달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이 전투의 발발일인 4월 25일을 추모일로 정하여 전사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1934년 추모일에 갈리폴리를 처음으로 찾은 영연방 국민들 앞에서 아타튀르크는 아래와 같은 감동적인 연설을 한다.

 

"피를 흘린 영웅들이여, 목숨을 바친 영웅들이여.
그대들은 이제 친구의 국토에 묻혀 있다.
그러니 고이 잠들라.
여기 우리의 땅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잠든 조니들(영연방군을 지칭)과 메흐멧들(터키군을 지칭)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머나먼 나라에서 아들을 떠나보낸 어머니들이여!
눈물을 닦아라.
그대의 아들들은 우리의 가슴에 안겨 평온히 안식을 취하였다.
이 땅에서 목숨을 잃은 그들은 이제 우리 모두의 아들이 되었다."

 

  세인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2015년 터키에서 '갈리폴리 상륙작전'( 터키어: Son Mektup)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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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리폴리 상륙작전 영화 포스터]

 

     랍세키에서 카페리를 타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맞은편의 겔리볼루(=갈리폴리)로 갔다. 40분 정도 걸렸다. 눈이 부시도록 새파란 바다가 지난 날의 그 치열했던 전투를 기억하고 있을까? 카페리 선상에 바라본 겔리볼루는 평온하기 그지없다. 쪽빛 바다, 평화로운 도시, 흰 구름이 떠도는 하늘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겔리볼루에서 하선했다. 이스탄불에서 200km 떨어진 이곳은 중세 이래 상업 중심지로 발전하여 곡류시장으로 알려진 곳이며, 곡류 외에도 피혁·치즈 등을 수출한다. 로마시대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고, 현재 이스탄불을 오가는 정기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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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넬스해협을 오가는 카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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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리에서 바라본 겔리볼루]

 

     오전 11시 30분 경 배에서 내려 부둣가의 식당(Gelibolu Balik Restaurant)으로 가 점심식사를 했다. 메뉴는 고등어 케밥. 고등어가 비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 먹을 만했다. 고등어와 빵이 만나니 색다른 맛이다. 아무튼 이번 여행 중에 정말 갖가지 케밥을 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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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리볼루 부둣가의 Gelibolu Balik 식당]

 

     점심식사 후 이스탄불로 향했다. 4시간 넘게 걸리는 여정인데, 차창에 어리는 마르마라해의 푸른 바다 경치가 무료함을 달래 주었다. 마치 짙푸른 잉크를 뿌려놓은 듯한 바다와 그 위의 흰 구름이 적당히 떠 있는 또 다른 푸른색의 하늘이 동방나그네를 하염없는 상념에 젖어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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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마라해]

 

     남쪽에서 이스탄불로 접근하면서 보니까 이스탄불이 참으로 큰 도시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그에 걸맞게 교통체증도 무척 심하다. 오랜 시간 차를 타다 보니 집사람은 또 멀미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오후 5시 이스탄불의 히포드롬(Hippodrome) 광장에 도착했다. 본래 이곳은 AD 203년 로마의 황제 세비루스(Severus)에 의해 지어진 검투경기장이었는데,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Byzantium) 으로 옮겨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이름을 바꾼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곳의 검투경기를 금지하고 그 대신 말이 끄는 전차경주장으로 바꾸었다. 당시 450m×130m 넓이에 10만 명 정도 수용이 가능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532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국정 전횡에 대한 불만으로 ‘니카의 난’이 일어나자 폭도들을 진압하고 처형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콘스탄티노플이 약탈당하면서 경기장 남쪽에 있던 청동기마상도 약탈당하여 현재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성당의 2층 전면에 놓여 있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이 약탈당한 이후에는 더 이상 전차경주장으로 사용되지 않고 버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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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드롬 광장과 오벨리스크]

 

    지금은 이스탄불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으로 변신한 히포드롬 광장에는 유서 깊은 기둥이 3개 있다. 광장 북쪽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서기 39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에 따라 이집트 룩소르의 카르낙 신전에서 가져왔다(BC 1490년경에 30m 높이로 만들어졌는데, 일부 훼손되어 현재는 26m만 남아 있다). 이 오벨리스크의 기단에는 경기를 관전하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오벨리스크 건립에 관한 비문도 남아 있다. 광장 남쪽에도 오벨리스크 모양의 탑(Orme Stun이라고 불린다. 높이 32m)이 하나 있는데, 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인 4세기에 처음 세워졌다가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파괴된 것을 현대에 복원한 것이다. 본래 표면이 청동판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 역시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약탈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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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rme Stun]

 

     광장 한가운데는 큰 뱀 세 마리가 서로 엉켜 있는 청동기둥(높이 8m)이 서 있다. BC 479년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그리스인들이 제작한 전승기념비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에 따라 그리스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왔다. 본래 세 개의 뱀 머리가 황금으로 된 가마솥(직경 3m)을 떠받들고 있는 형상이었는데, 가마솥은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약탈당하였고, 지금은 짧은 '뱀 모양 기둥'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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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 모양의 청동기둥]
 
   광장 북쪽 끝에는 19세기 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오스만제국의 술탄 압둘 하미드에게 선물한 분수대가 있다. 오리엔탈 특급 열차를 이용하여 운반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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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히포드롬 광장에서 바로 옆의 블루 모스크(Sultan Ahmed Mosque)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스만제국의 제14대 술탄 아흐메드 1세가 1609년에 짓기 시작하여 1616년에 완공한 이슬람사원이다. 중앙 돔의 직경 33m, 높이 43m에 다다르는 이 사원은 규모면에서 터키 최대의 모스크로, 바로 맞은편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의 양식을 모방, 발전시켜 지었다. 이스탄불이 아시아와 유럽,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지리적, 문화적으로 부딪히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곳이다. 이 사원은 건물의 벽과 기둥이 푸른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본명인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Sultan Ahmed Mosque)보다 블루 모스크(Blue Mosque)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술탄 아흐메드 1세는 일부러 성 소피아 성당의 바로 맞은편에 이 모스크를 지으라고 명했다. 그는 오스만제국의 건축가들이 로마제국의 건축가들에 필적할 만한 솜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길 원했다. 비록 결과적으로 이 모스크의 돔이 성  소피아 성당의 돔만큼 크게 되지는 않았지만, 오스만제국이 지은 가장 장려한 건축물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이곳에서는 최대 1만 명 이상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통상 수백 명의 회교도들이 매일 이곳에서 하루 다섯 차례씩 기도를 한다. 여성의 경우 안으로 들어가려면 모스크에서 제공하는 치마와 머리를 가리는 옷을 입어야 한다. 기도를 하러 들어가는 이슬람교도들은 먼저 발을 씻고 들어가는데 비하여, 관광객들은 그냥 들어가도 되나 대신 신발을 벗어 비치되어 있는 비닐봉투에 넣어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관광객들로 붐벼 줄을 서서 들어갔는데, 마침 보수공사가 행하여지고 있어 내부 전체를 둘러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내부의 장엄한 모습에 저절로 경건해졌다.

    대리석으로 된 설교단은 모스크 안 어느 곳에서도 이맘(모스크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자)의 말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돔의 200개가 넘는 조그만 창이 스테인드글래스로 장식되어 있어, 이를 통해 들어오는 아름다운 햇살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이 모스크는 여섯 개의 첨탑(미나레)과 여러 개의 돔으로 이스탄불의 하늘을 당당히 빛내고 있는데, 이 사원에 여섯 개의 첨탑이 세워진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당초 술탄 아흐메드 1세는 황금으로 된 첨탑을 하나 세우라고 명하였는데, 건축가가 황금을 뜻하는 ‘altin’을 여섯을 뜻하는 ‘alti’로 잘못 알아듣고 여섯 개의 첨탑을 세운 것이다. 건축가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여섯 개의 첨탑이 술탄 아흐메드 1세의 마음에 쏙 드는 바람에 첨탑과 건축가가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이 사원은 오늘날 터키에서 유일하게 여섯 개의 첨탑을 가지고 있음을 자랑하고 있다. 이처럼 생각지도 않은 데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역사가 아닐는지.

 

   터키에는 블르모스크 외에도 첨탑이 여섯 개인 이슬람사원이 두 곳 더 있다. 아시아 쪽 이스탄불에 있는 에르도안대통령의 참르자 모스크와 터키 남부의 아다나라는 도시에 있는 사반지모스크가 그것이다. 특히 전자는 2016년에 헌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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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모스크의 외관과 내부]

 

     블루모스크에서 나오니 어느새 오후 6시가 다 되었다. 터키에 와서 처음으로 한식으로 식사를 하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려정’이라는 한식당으로 갔다. 메뉴는 닭개장. 오랜만에 대하는 한식이라 밥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웠다. 이스탄불에는 한식당이 4-5 곳 있다고 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큰 도시에서 중식당이나 일식당을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내가 수박 겉핥기의 주마간산 여행을 하는 까닭에 못 본 것인가 싶어 가이드 소피아에게 물어보니 실제로 그렇다고 한다. 돼지고기를 안 먹고, 생선도 즐기지 않기 때문이 아닐는지. 혼자만의 추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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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당]

 

      저녁식사 후 이스탄불의 야경을 보러 신시가지로 갔다. 1800년대에 처음 도입되어 터키의 노스탈직 트램이라고 불리는 전차가 지금도 다니고 있는 탁심거리로 가니 사람들로 넘쳐났다. 서울의 명동쯤에 해당하는 곳이다. 탁심거리 대로변에는 갖가지 명품점들이 많지만, 대로에서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뒷골목에 시장이 형성되어 물건을 저렴한 가격으로 파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구경하다 보니 주어진 한 시간의 자유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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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심거리]

 

     탁심거리를 벗어나 튀넬(Tünel)을 타러 갔다. 튀넬은 이스탄불에 있는 다양한 교통수단 중 하나이다. 런던 지하철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지하철(1875년 개통)인 튀넬은 구시가지의 카라쾨이(Karaköy)에서 신시가지의 베이욜루(Beyoğlu)까지 573m의 짧은 거리를 1분 30초 동안 달린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거리를 운행하는 것이다. 16m짜리 빨간 소형 전동칸 2칸으로 연결된 튀넬은 한 번에 170명을 수송할 수 있다.
     당초 이 튀넬을 건설하게 된 것은 콘스탄티노플의 지형적 특성 때문이었다. 19세기 후반에 페라(Pera, 현 베이욜루)와 갈라타(Galata, 현 카라쾨이) 지구는 콘스탄티노플의 금융 및 상업 중심지였는데, 두 지구가 큰 언덕(경사 24도)으로 분리되어  오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프랑스 기술자 유진 앙리 가방드(Eugène-Henri Gavand)가 언덕을 오르내리는 지하철도를 생각해 내고 건설한 것이 바로 이 튀넬이다. 그러나 각종 교통수단이 발달한 지금은 튀넬은  운송수단이라기 보다는 관광상품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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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넬]

 

     튀넬에서 내려 다음으로 간 곳은 보스포러스해협 유럽쪽 해안의 선착장이다. 이미 밤 9시가 다 되어가는 때라 다른 날 같았으면 호텔에 투숙하여 쉬었을 텐데, 다음 날 모든 일정을 끝내고 터키를 떠나 귀국길에 오를 예정이었기 때문에 다소 무리가 되더라도 야간 유람선을 전세 내어 타기로 한 것이다.  
     대략 한 시간 동안 유람선을 타고 보스포러스해협을 오르내리며 양안으로 보이는 이스탄불의 야경을 감상했다.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밤의 이스탄불에서도 압권은 돌마바흐체 궁전과 보스포러스대교이다. 오스만제국의 술탄이 돌마바흐체 궁전을 바닷가에 지을 만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다리 전체에 야간 조명등이 켜진 보스포러스대교의 밤 보습은 가히 예술적이다. 현수교의 진수를 보여 주는 듯하다. 그 위로 보름달까지 뜨니 더욱 환상적이다. 우리 일행 중에 올해 환갑을 맞아 홀로 터키 여행길에 나선 분이 계셨는데, 가이드 소피아가 준비하여 온 케이크와 샴페인으로 유람선 안에서 함께 축하를 해 주었다. 아마도 그 분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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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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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마바흐체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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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포러스대교]

 

     유람선의 아시아 쪽 선착장에서 내리니 어느 새 밤 10시가 넘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한 가지 일정이 남았다. 보스포러스 해저를 관통하는 열차를 타고 유럽 쪽으로 다시 건너가는 것이다. 이 해저철도는 2013년에 개통되었다. 해저철도를 달리는 전동차는 한국의 현대로템이 440량을 수주하여 그 가운데 300량을 터키의 현대유로템 공장에서 생산하였다고 한다. 차량 안에 그 사실을 알리는 현대로템의 로고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전동차는 특이하게도 차량과 차량 사이에 칸막이가 없어 직선선로를 지날 때는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이 보인다. 차 안에 선반이 없는 것 또한 특이하다. 밤이 깊은 시각인데도 열차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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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포러스 해저철도의 전동차 내부]

 

     이스탄불에는 해저철도가 지나는 터널 외에 2016년 12월에 개통된 자동차전용 해저터널이 있다. 이 터널은 한국의 SK건설이 시공한 것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최초의 자동차 전용 해저터널이다. 해저터널 구간만 5.4km, 육지 접속도로까지 포함하면 총연장이 14.6km에 달하는 복층터널이다. 총 사업비 12억 4,000만 달러(1조 4,700억원)가 투입돼 터키 국책사업으로 추진됐다. 해저터널 구간은 최고수심이 110m에 달하고 모래∙자갈∙점토가 뒤섞인 무른 지반인데다 고대 유물∙유적 보호해야 하는 등 난공사이었는데도  SK건설이 4년만에 성공적으로 완성하였다. 1950년 한국동란이 발발했을 때 군대를 파병하여 우리를 도와주었던 나라에 지금은 오히려 우리가 그들의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대한민국이 자랑스럽고, 공사 현장에서 땀을 흘렸을 기업인들의 노고가 고마울 따름이다. 

 

     이스탄불, 아니 터키에서의 마지막 밤을 알차게 보내긴 했지만, 하도 여러 곳을 쏘다녀 거의 밤 11시가 되어 호텔(Tüyap Palas Hotel)에 도착했을 때는 몸이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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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üyap Palas 호텔] 

 

2018. 10. 26.(이스탄불. 귀국) 

 

     터키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전날처럼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났다. 6시 30분에 아침식사를 하고 7시 40분 호텔을 나섰다. 이른 아침의 보스포러스해협은 파도가 심하게 치고 있었다. 호텔이 외곽에 있는데다 이스탄불의 악명 높은 교통체증으로 인해 구시가지에 있는 예레바탄 지하궁전(Yerebatan Sarayı. Yerebatan Basilica Cistern)까지 가는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도중에 터키 특산품인 블랙커민시드오일(Black Cumin Seed Oil. 항염, 항암작용이 뛰어나다고 한다), 장미오일 같은 건강식품이나 화장품을 판매하는 잡화점을 들른 시간을 고려하더라도 이스탄불의 교통체증이 확실히 심각하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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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개념도]

 

     성 소피아 성당 인근에 있는 예레바탄 지하궁전(Yerebatan Sarayı)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건설을 시작하여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완성되었다. 궁전으로 불리지만 실제 용도는 지하 저수지였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이스탄불은 안정적인 물 공급이 중요했다. 그래서 도시 곳곳에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를 많이 만들었는데, 예레바탄 지하궁전은 그 중의 하나이다. 건설에만 무려 7,000여 명의 노예가 동원되었다고 하는 이 저수지는 길이 143m, 폭 65m, 높이 9m에 달하며, 최대 8만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엄청나다. 저수지의 물은 이스탄불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흑해 지역의 베오그라드 숲에서 끌어왔다고 한다.
     저수지로 사용된 이곳이 지하궁전이라 불리게 된 것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기둥들 때문이다. 저수지 천장을 지탱하고 있는 아름다운 기둥 336개는 각지의 신전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각기 다른 다양한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들이 지하에 빽빽하게 늘어선 모습이 신비로운 궁전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댄 브라운의 소설  '인페르노'에는 예레바탄 궁전에 물이 가득찬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이 소설을 기초로 만든 영화도 마찬가지) , 촌부가 찾은 이 궁전은 물이 없고 바닥이 그대로 드러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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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바탄 지하궁전]

 

   이곳은 1885년에 보수공사를 하여 조명과 음향 시설을 설치하고 관람객을 위한 보도를 조성하였다. 보수공사 당시 바닥에 쌓인 진흙을 파내던 중 저수지의 가장 안쪽에서 기둥 받침대로 추정되는 ‘메두사의 머리’ 조각품이 두 개 발견되었다. 어디에서 가져온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메두사의 머리 하나는 옆으로, 하나는 거꾸로 놓여 있는데, 그 이유는 메두사의 눈과 마주치면 돌이 되어 버린다는 전설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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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의 머리]

 

           예레바탄 지하궁전에서 나와 인근의 성 소피아 성당(Ayasofya. Hagia Sophia Museum)으로 갔다. 성 소피아 성당은 언뜻 보면 이스탄불에 산재해 있는 여느 모스크와 비슷해 보인다. 현재 정식 명칭은 소피아 박물관이지만 이곳은 본래 성당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정하고 기독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새로운 수도에 걸맞는 큰 성당을 지을 것을 명하여 360년 처음 지었다. 그러나 이 때 지은 성당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래서 다시 지은 성당마저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명에 따라 532년-537년에 세번째로 다시 크게 지은 것이 지금의 성당이다.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완공된 성당을 보고

"예루살렘의 대성전을 지은 솔로몬이여, 짐은 그대를 능가했노라!"

라고 말했다고 한다.

절대 권력을 휘두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다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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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피아 성당]

 

     본당의 넓이가 75m X 70m, 중앙 돔의 천장 높이가 56.7m, 돔의 지름이 32.4m이고, 40개의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성 소피아성당은 1520년 스페인의 세비야 성당(Seville Cathedral)이 완성되기 전까지 약 1,00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고,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이 성당의 운명도 부침을 거듭했다. 1453년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후 이 곳은 이슬람사원, 즉 모스크로 그 용도가 바뀌면서 성당 주위에 첨탑(미나렛)이 세워지고, 성당 안의 성화가 그려진 벽은 회칠로 덮이고 그 위에 이슬람교 코란의 금문자와 문양들로 채워졌다. 그 회칠 속으로 성모마리아의 모자이크가 모두 사라졌다. 1931년까지 그렇게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다 1945년 소피아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재개장되었고, 복원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두꺼운 회칠이 벗겨지고 성모마리아를 비롯한 비잔틴시대의 화려한 흔적들이 다시 드러났다.

 

     세계적인 관광명소답게 관람인파가 엄청났다. 정문 앞의 의장대가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한참 줄을 섰다가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곳도 맞은편에 있는 블루 모스크와 마찬가지로 보수공사 중이어서 내부를 전부 볼 수는 없었다. 비록 주마간산(走馬看山)이었을망정 성당 안의 곳곳에서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공존하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음을 실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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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피아 성당의 내부]
 

     성 소피아 성당을 나서자 점심때가 되었다. 걸어서 인근에 있는 식당(Blue Restaurant & Cafe)으로 갔다. 메뉴는 아다나 케밥. 터키 중남부 아다나(Adana) 출신 요리사가 만들기 시작했다는 케밥으로 매운 양념을 한 다진 고기로 만들었다. 일단 먹을 만했는데, 사실 그동안 케밥을 하도 먹어 뭐가 뭔지 구별이 잘 안 되었다. 이 식당 바로 옆의 가게의 유리창에 “전화카드는 여기에 판매”라는 한글 안내문이 씌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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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피아 성당 부근의 blue 식당]
 
     점심식사 후 이스탄불에서의 마지막 볼거리이자 동시에 터키에서의 마지막 볼거리인 톱카프 궁전(Topkapi Palace) 으로 이동했다. 성 소피아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이슬람 문화의 진수를 보여 주는 톱카프 궁전은 1453년 오스만제국의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후 제국의 위상에 걸맞는 궁전을 지을 것을 명하여 1467년에 완공한 것이다.  건립취지에 맞게 마르마라해, 보스포러스 해협, 골든 혼(Golden Horn. 금각만金角灣)이 모두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톱카프는 ‘대포 문’을 뜻하는데 과거 궁전 입구 양쪽에 두 대의 대포가 놓여 있던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톱카프 궁전은 왕족의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술탄과 중신들이 국가 정치를 논의하던 장소였다. 당시 궁전에 거주하는 시종과 군사(예니체리. 예니체리는 기독교계의 어린 10대 소년들을 징집하여 이슬람으로 개종시켜 만든 오스만제국 최정예군이다), 관료의 수만 5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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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카프 궁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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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 입구]

 

     궁전 내부는 4개의 정원과 부속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 정원에는 회의실, 알현실, 교회, 도서관 등이 들어서 있고, 술탄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전시실도 갖추어져 있다. 제1정원이 가장 넓고 내부로 들어갈수록 점차 규모가 작아진다. 정문인 황제의 문으로 입장하면 제1정원이 나온다. 정원 왼쪽에 보이는 ‘성 이레네 성당(Hagia Irene)’은 기독교 교리와 관련하여 제2회 세계공의회 즉 381년 제1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린 곳이다. 전술한 ‘니카의 난’(532년)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오스만제국 시대에는 창고로 사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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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레네 성당]

 

     제1정원을 지나면 다시 문이 하나 나온다. ‘경의(敬意)의 문’이라고 불리는 문이다. 메흐메트 2세가 문을 만들고 슐레이만이 두 개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톱카프 궁전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이다. 평민들은 이 문 안으로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이 문을 지나면 나오는 제2정원에는 술탄이 대신들과 국사를 논의하던 건물과 하렘(Harem)이 나온다.

     하렘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남성의 출입이 금지된 여성들만의 공간이었다. 술탄과 거세한 환관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 미로처럼 복잡한 내부 통로로 이어진 하렘에는 약 400개 방이 있었다고 한다. 하렘의 모든 창에는 철창이 달려 있는데, 이는 외부의 침입과 여성 노예의 탈출을 막기 위한 것이다. 

      제2정원 내 오른쪽에는 굴뚝이 늘어선 건물이 있다. 요리사 수백 명이 음식을 준비하던 주방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도자기 전시실로 사용된다. 전시된 도자기 수가 무려 1만 2천여 점이나 된다. 이곳은 관람객이 적었다.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들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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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敬意)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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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제3정원에 위치한 ‘보물관’에는 술탄이 사용하던 왕좌, 갑옷과 투구, 무기 등 호화로운 보석으로 장식된 물건들이 가득하다. 황금과 에메랄드,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톱카프의 단검’이 유명하다. 제3정원에는 미술관도 있는데, 모세의 지팡이, 다윗의 칼, 마호메트의 검을 볼 수 있다. 모세의 지팡이가 전시되어 있는 유리관 앞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렸다. 카메라에 담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제4정원은 술탄과 그가 선택한 특정 인물들만 제한적으로 출입할 수 있었던 곳이다. 정원 중 가장 작지만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무엇보다도 이곳에서는 보스포러스 해협, 마르마라 해, 골든 혼(Golden Horn. 금각만 金角灣)을 조망할 수 있어 이곳이 명당임을 실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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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정원에서 바라본 마르마라해]

 

      톱카프 궁전을 둘러보고 나오니 오후 4시 반이다. 아직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시간(밤 9시 20분 출발)에 맞추기 위해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러 이동했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시미트(Simit)를 파는 손수레를 발견하고 몇 개 샀다. 터키인들의 국민 간식이라고 할 수 있는 시미트는 가운데 구멍이 뚫린 둥그런 빵이다. 표면에 참깨를 촘촘하게 뿌린다. 식당에 거의 도착할 무렵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길을 지나던 젊은 터키인 남녀가 웃는 얼굴로 공손하게 인사를 해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공항으로 이동하는 동안 차창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서산으로 저무는 해와 함께 터키 일주 여행이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追記1)  (1) 이번 여행을 가능케 해 준 대한항공과 하나투어여행사의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일정 내내 상세한 설명과 세심한 배려를 해 준 가이드 소피아님께 이 자리를 빌려 깊이 감사드린다. (끝)

 

                (2) 이 글의 배경음악은 터키행진곡이다.  모차르트가 1778년 여름 파리에서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제11번의 제3악장으로, 그가 작곡한 소나타 중 가장 유명한 곡이다.  모차르트 자신은 이 악장에 단지 ‘터키풍(alla turca)’이라고만 기입하였는데, 그 리듬과 성격이 행진곡풍이어서 ‘터키 행진곡’으로 불린다.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으로 18세기경부터 유럽 각지에 오스만제국의  군악대 메흐테르가 등장하였고, 그것이 음악 분야에  영향을 미쳐 18~19세기에 유럽에서 터키풍을 도입한 곡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모차르트의 이 곡이다.

 

  (追記2)  성소피아 성당이 현재의 박물관에서 다시 모스크로 바뀔지에 관한 언론 기사를 인용한다.

 

 [연합뉴스 2020. 7. 3. ]

 

다시 모스크 되나성소피아의 기구한 운명

 

(이스탄불=연합뉴스) 김승욱 특파원 =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노라"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에서 성소피아 대성당의 헌당식이 거행된 5371227일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능가한다며 외친 말이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 이곳만은 누구도 손을 대서는 안 된다."

 

916년이 흐른 1453529일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성소피아에 들어선 후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메흐메트 2세는 당시 관례대로 사흘간 약탈을 허락했지만, 성소피아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나머지 이 성당만은 손을 대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대신 메흐메트 2세는 약 900년간 기독교 정교회의 총본산이었던 성소피아를 모스크(이슬람 사원)로 개조했다. 비잔티움 예술의 결정체인 성화와 모자이크를 회칠로 덮고 그 위에 '아라베스크'라고 하는 기하학적인 이슬람 문양을 그렸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오스만 제국의 황실 모스크로 사용되던 성소피아는 약 500년 뒤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다시 한번 옷을 갈아입게 된다.

공화국 수립 이후 미국과 유럽의 학자들은 성소피아 복원작업에 착수하면서 회벽 아래 감춰진 비잔티움 예술의 정수가 다시 빛을 보게 됐다.

그러나 회칠을 제거하다 성화와 모자이크가 훼손되는 일이 발생했고, 회벽에 그린 아라베스크 문양도 500년 된 이슬람 문화재인 만큼 이슬람 신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이에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國父)로 불린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1934년 성소피아를 두 종교가 공존하는 박물관으로 변경하고 성소피아에서 일체의 종교 행위를 금지했다. 이후 성소피아 박물관은 이스탄불을 상징하는 랜드마크이자, 연간 약 400만명이 방문하는 터키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됐다.

 

그러나 성소피아의 기구한 운명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슬람을 '타도해야 할 구시대의 잔재'로 여긴 아타튀르크는 세속주의를 건국이념으로 삼았다.

아타튀르크는 성소피아 박물관 개관식 날 신발을 벗지 않고 입장했다. 이는 강력한 세속주의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인식됐다. 성소피아가 모스크일 때는 신발을 벗어야만 입장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이슬람주의를 표방하는 정의개발당(AKP)의 집권이 이어지면서 터키의 세속주의는 점차 퇴색했다. 더구나 2016년 군부의 쿠데타 시도 이후 터키 사회의 보수적 분위기가 커지면서 성소피아를 박물관에서 다시 모스크로 되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도 "성소피아를 모스크로 바꾸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며, 그것은 비정상적인 의견이 아니다"라며 보수 이슬람 층의 의견에 찬성한다는 뜻을 밝혔다.

 

터키 정치 분석서인 '에르도안의 제국' 저자이자 미국 싱크탱크 워싱턴연구소의 중동정책연구소 국장인 소네르 차압타이는 성소피아 논란에 대해 "단순히 건물에 대한 논쟁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차압타이 국장은 "아타튀르크는 터키의 세속화를 강조하기 위해 성소피아를 박물관으로 변경했다""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 에르도안은 정확히 그 반대를 하려 한다"라고 강조했다.

 

터키 정부가 실제로 성소피아를 모스크로 환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강한 반대 여론이 제기됐다.

정교회의 수장인 바르톨로메오스 1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겸 세계총대주교는 "박물관으로서 성소피아는 민족과 문화의 평화로운 공존과 대화, 기독교와 이슬람 간 상호이해와 연대를 의미하는 상징이자 장소였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성소피아가 모스크로 전환될 경우 전 세계 수백만 명의 기독교인이 이슬람에 반감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웃 국가이자 역사적 '앙숙'인 그리스는 성소피아를 모스크로 변경하려는 움직임을 강하게 비판했다.

니코스 덴디아스 그리스 외무장관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터키에 깊은 상처를 줄 일을 하지 않기 바란다""성소피아는 많은 일을 견뎌왔고 결국 제 위치로 돌아올 것이지만, 터키는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국무부도 성소피아의 박물관 지위를 유지할 것을 촉구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성명을 내고 "성소피아는 종교와 전통, 역사의 다양성을 존중하겠다는 약속의 모범 사례"라며 "모든 사람이 성소피아에 접근 가능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성소피아의 지위 변경은 이 놀라운 문화유산이 서로 다른 종교와 전통, 문화를 연결하는 다리로서 인류에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저해할 것으로 보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성소피아 인근 상인과 여행업계를 중심으로 현실적인 우려도 제기된다.

이스탄불 최대의 관광 명소인 성소피아가 박물관이 아닌 모스크로 변경될 경우 이곳을 찾는 관광객의 발길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터키 정부는 성소피아가 모스크로 변경되더라도 관광객에게 개방할 것이라는 입장이나, 현재보다는 접근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실제로 성소피아 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블루 모스크)는 현재도 예배 장소로 사용되는 까닭에 관광객은 정해진 시간에만 입장할 수 있으며, 여성은 반바지·반소매 착용이 금지되며 머리카락을 가리는 스카프를 착용해야 한다.

 

이처럼 논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최고행정법원은 2(현지시간) 성소피아의 지위와 관련한 최종 결정을 2주 안에 내릴 것이라고 밝혔다.

터키 현지서는 성소피아의 모스크 전환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터키 최대 일간 휘리예트를 비롯한 현지 언론들은 최고행정법원이 2016년 쿠데타 발발 4주년인 715일에 성소피아의 모스크 전환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1500년의 세월을 견디며 주인이 바뀔 때마다 옷을 갈아입어야 했던 성소피아가 다시 한번 운명의 전환점을 맞이할지 주목된다.

 

[출처 : https://www.yna.co.kr/view/AKR20200703000800108?input=1195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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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20. 7. 13.)

 

(카이로=이세형 특파원)  세계유산 ‘아야 소피아모스크로 바뀐다

 

터키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기도 한 아야 소피아’(성 소피아)가 박물관에서 이슬람 사원(모스크)으로 바뀐다.

 

10AP통신과 알자지라방송 등에 따르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이날 최고행정법원이 아야 소피아의 지위를 박물관으로 정한 1934년 내각회의 결정을 취소한다고 밝힌 직후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바꾸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아야 소피아는 터키, 나아가 중동과 동유럽 역사의 변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아이콘으로 여겨져 왔다. 비잔틴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537년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에 대성당으로 만든 이후 916년간 정교회의 본부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1453년 이슬람교를 믿는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아야 소피아는 모스크로 개조됐다. 1차 세계대전 뒤 오스만제국이 붕괴하고, 터키 초대 대통령이 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케말 파샤)는 세속주의를 강조하며 1934년 아야 소피아를 종교시설이 아닌 박물관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앞서 모스크로 운영될 때 회벽으로 덧칠됐던 모자이크 성화가 이때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번에 모스크로 바꿔도 다시 회벽을 칠하지는 않을 것으로 전해졌다.

 

터키 안팎에서는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바꾸기로 한 배경으로 에르도안 대통령의 보수 이슬람주의 성향을 꼽는 이가 많다. 20033월부터 20148월까지 총리로, 20148월부터 대통령으로 재임 중인 에르도안은 현대판 술탄으로 불릴 만큼 이슬람주의를 강조해 왔고, 이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됐다.

 

하지만 정교회 신자가 많은 유럽국가들은 일제히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터키와 역사적으로 갈등이 많았고, 정교회 신자가 다수인 그리스는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가 직접 나서 “(터키의) 결정을 강력히 비판한다. 이번 결정은 터키와 그리스의 관계뿐 아니라 유럽연합(EU), 유네스코, 그리고 국제사회 전체와의 관계에 영향을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키릴 러시아정교 총대주교는 아야 소피아가 지금처럼 중립적인 지위로 유지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근 터키의 친()러시아 외교와 중동지역 내 영향력 확대로 불편한 관계인 미국도 터키의 결정이 실망스럽다고 밝혔다.

 

(출처)

https://www.donga.com/news/People/article/all/20200713/101934722/1?ref=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