貴陀庵의 南道記(강진,해남,보성,순천)

2010.02.16 12:08

貴陀道士 조회 수:6757


       귀타암(貴陀庵)의 남도기(南道記)

 

 

      1997년의 가을(11월)과 1999년의 겨울(2월)의 두 번에 걸쳐 한반도의 남쪽 끝 해남땅을 밟은 일이 있다. 그리고 그 때의 소감을 적은 글이 바로 “南道紀行”(이 싸이트의 11번)과 “번뇌는 별빛이라”(이 싸이트의 28번)이다.

      그로부터 5년의 세월이 또 흘러 이번에는 여름에 그 땅을 다시 밟았다. 과거의 두 번에 걸친 여행 때와는 달리 보성과 순천이 추가되었다는 게 다르다. 동반자도 또한 다르다. 그렇지만 남도는 언제 누구랑 가보아도 정겨운 우리 땅이다. 구비구비 조상의 얼이 서리고, 지금도 풍성한 인심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삼세번을 좋아하는 배달민족의 자손답게 세 번째 南道記를 쓸까 하다가 아무래도 바닥난 재고가 드러날 게 뻔하여 道伴이었던 美人堂 金暎賢 예비판사의 글로 대신하기로 하였다. 20년이 넘는 나이 차이가 말해주듯 글의 구석구석에 신선함이 배어 있어 읽다보면 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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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판부 전체가 사건 속에 파묻혀 지내느라 봄철 휴가를 못가고 있다가, 머리도 식힐 겸 1박2일의 짧은 여행이라도 하자고 의견이 일치되어 남도길에 나선 것이 6월 22일이다. 그 날이 공교롭게도 이미 봄은 지나고 여름에 도달한 夏至 다음 날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의 첫발은 가슴을 설레게 하기 마련이다.

   서울고등법원 민사20부에 배속되어 민일영 부장님(貴陀庵主)과 강승준(童子僧), 김성수(彌勒佛) 두 배석판사님을 뵌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문화생활을 지향하는 재판부에 걸맞게 대학로에 ‘관객모독’이라는 연극을 보러 갔었다.

   연극을 보기 전에 나의 애장품 1호인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사진을 찍었는데, 김성수 판사님께서 평상시의 준수한 외모 뒤에 감추어진 뜻밖의(?) 고고한 이미지를 선보였다.

   사진을 보면, 그윽한 눈매에 편안한 미소, 건강한 고수머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용할 듯한 넉넉한 얼굴이 나타난다. 부장님께서 말씀하셨다. ‘완전히 은진미륵이네...’.

 

   그 말씀이 우리 귀타암 식구들의 남도여행 시발점이 되리라고는 그 때는 생각도 못했다.

   관촉사(논산)

   귀타암의 식구들을 태우고 남도를 향해 아침 9시 30분 서초동을 출발한 차가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논산의 관촉사이다.


   나는 5살 때쯤 관촉사 근처에서 살았다. 그 시절 관촉사는 우리 집 놀이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내 기억 속에서의 관촉사는 곳곳에 수목이 우거진 넓고 멋있는 사찰로서, 진입로에도 돌하루방 비슷한 석조물이 여러 개 있는 웅장한 절이었는데, 이번에 가서 보니 관촉사는 정말 너무나도 수수한 절이었다.

 

    진입로 부근의 논밭이 버려진 듯 제멋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는 계단과 그 주변 수목들마저 제대로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김성수 판사님의 표정이 매우 슬퍼 보였다.


   “형님 계신 곳이 너무 누추하네요...”  
 

하지만, 김성수 판사님께서 댁으로 형님을 모셔갈 수는 없으니 어찌하랴... 김성수 판사님께서는 무거운 발걸음을 차마 떼지 못하셨다.

   너무 수수한 나머지 실망스럽기까지 한 경내와 다르게, 고려 광종 때 조성되었다는 은진미륵(정식 명칭은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거대한 자태(높이가 18m이다)를 뽐내고 있었다.

   우리가 은진미륵을 둘러보고 있는 사이 한 보살님께서 다가오셨다. 부탁을 드리지도 않았건만 친절하게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들려 주셨다. 그 중 기억에 남은 이야기를 하나 소개한다.  

   예전에(기억이 가물가물하여 정확히 언제라고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북쪽 오랑캐가 쳐들어 와, 어느 강(역시 어느 강인지 기억이 안 난다) 기슭에 이르렀다. 그 때 어느 스님이 승복을 종아리까지 걷더니 그 강을 건너갔다. 오랑캐 장수가 그것을 보고 군사를 이끌고 그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는데, 강물이 깊기도 할 뿐만 아니라 갑자기 물이 늘어나 결국 오랑캐 군사들이 대거 수장되었다. 나중에 오랑캐 장수가 그 스님을 잡아 들여 칼을 휘둘러 그 스님의 갓을 베었더니 그 스님은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그와 동시에 은진미륵의 모자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실제로 은진미륵을 자세히 보면, 모자의 오른쪽 귀퉁이가 부서져 있고, 그것을 쇠징으로 박아 이어 놓은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은진미륵은 오랑캐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그 동생인 김성수 판사님 또한 대한민국의 주요 사건들을 처리하고 계시니 형제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무위사(강진)

   광주에서 호남고속도로를 벗어난 후 해남을 향해 달리다 보면 도중에 영암이 나타나고 그곳에는 평지에 돌출한 유명한 月出山이 눈에 들어온다. 한 눈에도 멋진 모습이다.

   모든 분야에 조예가 깊으신 부장님께서는 전통한옥 배흘림기둥 맞배지붕의 白眉를 보여 주시기 위해 월출산 무위사(無爲寺)를 여행 코스에 넣으셨다.

   다이어트部답게 부장님을 제외한 세 판사가 우향우 자세를 취하면, 자연스럽게 배흘림기둥이 된다.^^ 배흘림기둥에 관한 설명은 이로써 충분하며 그보다 더 긴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향후 귀타암 식구들을 만났을 때 배흘림기둥을 실제로 손으로 느껴 보고 싶다며 더듬어 보면 안 된다.^^

   맞배지붕은 한글 ‘ㅅ’자와 같이 지붕을 얹은 것이다. 여기에서 기교를 부린 것이 팔작지붕인데, 팔작지붕은 맞배지붕의 중간을 ‘八’자처럼 벌린 것으로 궁궐이나 사찰 건축에서 주로 사용한 양식이라 한다.

   배흘림기둥 맞배지붕으로 지어진 무위사 극락보전(極樂寶殿)은 국보 13호이다. 이를 보고 김성수 판사님께서 한 말씀 하신다.  


   “우리 형님은 보물인데, 저 건물은 국보라니... 우리 형님도 국보로 지정되어야 마땅하거늘...”(은진미륵은 보물 218호이다).  

   월남사지

   무위사에 나와 인근의 월남사지로 가는 길에 태평양화학에서 운영하는 차밭을 보았다. 나중에 녹우당에 들렀을 때 해남윤씨 종손으로부터, 당신이 태평양화학 회장에게 “회장님 같으신 분이 우리 차를 보급하는 일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하였는데, 태평양화학 회장이 이에 뜻을 같이 하기로 하여 차밭과 농장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같은 시기에 시작한 해남윤씨 종손댁 뒷산자락의 차밭에서보다 태평양화학의 차밭의 수확량이 훨씬 많다고 하니, 이 또한 자본주의의 효율성을 입증하는 것인가... 그런데 차맛은 과연 어디의 것이 좋을까?  

   월남사지는 그야말로 탑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옛 절터였다. 주변은 민가가 몇 채 있을 뿐인 매우 한가한 마을이었다. 월남사의 실제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다 보니, 어느 절보다도 고고하고 멋졌을 모습이 떠오른다. 심령술사를 해볼까나...  

   다산초당

   어느 덧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지고 있다. 월남사지를 벗어나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향하는 발길이 바쁘다.  


   茶山이 정약용 선생을 지칭하는 말인 것은 알았지만, 당신이 산 속으로 유배되었다는 사실은 몰랐었다.

   그야말로 산 속에 초가집을 짓고(최근에 기와를 얹어 복원하였기 때문에 현재는 '草堂'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사람을 가둬 두었으니 다산께서는 정말 심심하셨을 듯하다.
   당신께서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목민심서 등 수많은 저서를 남기신 데 그 심심함이 一助를 하지 않았으려나... 유배를 간 것만도 고통스러운데, 공부를 하시다니 정말 대단한 분이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키가 무척 큰 나무들로 둘러 싸여 있었다. 그 길이 지금은 수목원에라도 간 것마냥 호젓하고 아늑하지만, 귀양살이하던 다산께는 얼마다 회한이 깃든 길이었을까...

   그런데, 산 속에 초당이 한 채 덩그러니 있었다면 또 모르겠으나, 초당만도 두 채(東菴과 西菴)이고 그 사이에는 연못까지 구비하였으니 이 정도면 나름대로 여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더욱이 초당 뒤편에는 약수터도 있으니 말이다. 초당 오른편에는 후세에세워진 정자인 天一閣도 있다. 이름하여 하늘 아래 하나뿐인 정자란 뜻인가?  

   초당 뒤편 바위에는 ‘丁石’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선생의 친필이란다. 그 글씨를 보며 우리 귀타암 식구들은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책이 새까맣게 될 정도로 들여다보아야 했던 ‘OO의 定石’이라는 수학교재 씨리즈를 떠올렸다.


   날씨가 맑으면 남해바다가 보일 듯한 천일각 위에서 달력사진을 촬영하였다. 달력사진답게 약간의 오버가 필요하였으나, 외모와 끼가 받쳐 주지 못할 바에야 얌전하게 찍기로 하였다.  

   일지암(해남)

   서울고등법원 민사 24부 임정수 판사님으로부터 神技에 가까운 기술로 차 대접을 받고 난 후 깊은 감명을 받아, 우리 귀타암에서도 점심 식사 후 내가 방주(차를 대접하는 이를 말한다. ‘방주’라고도 하고, ‘차주’라고도 하는데, 개인적으로 열 번도 더 읽은 무협지 ‘영웅문'의 홍칠공이 생각나 '방주'라는 호칭이 더 맘에 든다)가 되어 티타임(Tea Time)을 갖고 있다.

 

   그 때 부장님으로부터 당대의 지식인들(김정희, 정약용 등)과 차를 마시면서 교류를 쌓은 艸衣禪師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차를 사랑하는 우리 귀타암의 발걸음이 초의선사의 부도가 모셔져 있는 해남 대흥사로 향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 모른다.

   강진에서 해남땅으로 접어들 때부터 이미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대흥사 경내를 둘러보는 일은 내일로 미루고, 일단 숙소인 일지암(一枝庵)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대흥사를 지나 일지암으로 가는 길이 심상치 않다. 기본적으로 자갈로 된 비포장도로이고 움푹 패인 곳이 많으며, 전날 온 비가 아직 마르기 전이어서 헛바퀴만 돌다가 차 밑부분이 긁히기 일쑤였고, 길 폭 또한 그랜저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만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愛馬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부장님과 나는 차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기로 하였다.


   우리 귀타암의 에너자이저 부장님께서는 몇 년 전 큰 고뇌를 안고 그 길을 오르신 기억을 떠올리셨는지 기운이 좀 없어 보이셨다. 하지만, 이번 길은 귀타암 식구들의 신바람 나는 외출길이어서인지 금새 다시 기운을 차리셨다.

   부장님의 ‘이제 다 왔다'는 말씀을 열 번도 더 들으며 혹시나 혹시나 하면서 믿었건만, 결코 가까운 길이 아니었다. 그래도 보람은 있었으니, 시야가 탁 트인 산기슭에 자리 잡은 일지암은 정말 멋진 암자였다.

   창문을 열면 앞집이 보이는 도시와는 달리 일지암을 등지고 서면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은 자연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7시가 넘어서야 명은당보살님이 만들어 주신 성대한 저녁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주지 如然스님은 조계종 총무원의 기획실장을 맡으신 까닭에 주로 서울에 가 계신다).


   반찬은 일지암 주변에서 재배한 여러 채소가 주된 것이었는데, 한 때는 고기반찬이 없으면 밥을 먹지 않던 나도 가득 담긴 밥 한 그릇을 후딱 먹어 치웠다. 보살님께서는 엄마가 담아주시는 밥처럼, 밥을 고봉으로 담아 주셨다(밥이 밥그릇 위에 봉우리처럼 볼록하게 담겨 있었다).


   다들 다이어트를 하고 있기에 귀타암에서는 가위바위보 ‘먹기 게임’이 끊이질 않는데, 결국 가위바위보까지 해 가면서 남은 반찬도 다 먹었다(이긴 사람이 아니라 진 사람이 더 먹어야 한다. 일종의 ‘음식형벌’이다).
   그러고 나니 벌써 밤이다. 해가 저물어 가는 산 속 암자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저녁식사를 하는 것도 여느 고급 식당 부럽지 않은 호강이었다.

   재래식 화장실은 스물을 훌쩍 넘어 서른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에도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래도 초저녁에 볼 일을 보지 못하면, 새벽에 모두들 주무실 때 민폐를 끼칠 수가 있기 때문에 일찌감치 다녀왔다.

    벌써 어둑어둑해진 터라 등불에 비춰지는 나방의 움직임은 독수리 크기의 그림자를 휙휙~~ 그리고 있었고, 나무로 얹은 발판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보살님이 방주가 되어 일지암에서 재배한 차 맛을 보여 주셨다. 떡차와 우전(雨前)을 차례로 실컷 맛본 것은 좋았으나 화장실이 걱정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변이 마려운 것을 꾹꾹 참으며 누가 화장실에 가면 같이 가야지 하고 있었는데, 부장님 曰,


    “이 주변이 다 화장실이야.”
라고 하셨다.
그래도 숙녀(?)가 아무데서나 볼 일을 볼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부장님을 따라 화장실에 다녀왔다.^^

 

   산속은 해가 지면 곧 밤이다. 저녁밥을 한 그릇 가득 먹었음에도 왠지 시장하다. 김 판사님은 목도 컬컬하신 듯하다. 귀타암 식구들이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동시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깊은 산속 암자에 유희기구나 곡차(穀茶)가 있을 턱이 없다. 결국 우리의 호프이신 강 판사님과 김 판사님께서 다시 死地로 향하게 되었다. 비도 부슬부슬 오고, 길도 안 좋은데, 우리 판사님들은 참 용감하시다(아니면, 무모하시다^^).  


   한 시간 쯤 지났을까 강 판사님이 ‘에구구구, 죽다 살아 돌아왔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들어오셨다.

   강 판사님은 그 와중에서도 콜레스테롤 덩어리인 소세지를 사 오셨다. 방 안은 손님이 왔다고 불을 지핀 덕분에 후끈후끈하였고, 방문을 열면 온갖 곤충들이 대기하고 있으니 진퇴양난이었으나, 땀으로 목욕을 하면서도 새벽 3시 가까이까지 유희를 즐겼다. 그 재미를 어찌 筆舌로 다 표현하랴!^^

   일지암에서 내가 잠자리로 삼은 草堂(대나무 잎으로 지붕을 이었다)은 아무나 재워 주는 곳이 아니라고 한다. 그야말로 특별한 손님에게만 1년에 한두 번 제공한다고 한다.


   초당의 방문을 여니, 한두 사람이 편안히 잘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된 정사각형 방이 보였다. 그 곳에 누워 있으면 바람 소리, 물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산 속에서 혼자 자다니... 좀 무서울 만도 하였지만, 나는 피곤했는지 금방 잠이 들어 버렸다.


   부장님께서는 ‘이준영 판사가 이곳에서 묵으며 산의 정기를 받아야 하는데...’라고 말씀하셨다. 前배석판사의 2세 계획까지 걱정하시는 부장님의 마음 쓰심에 또 한번 감복하였다.

   아침잠이 많아 매일 아침이 전쟁인 나도 일지암에서는 일찍 기상하였다. 초당 뒤에 있는 三段 약수터(?)에서 물을 마신 후, 부장님께서 가르쳐 주신 건강(?) 체조를 배웠다.

   산과 태양의 기운을 들이마시는 운동이라는데, 부장님과 세 판사가 마주보고 서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지긋이 눈을 감고 팔을 쭉 뻗어 원을 그리는 동작을 하려니 좀 민망하였다. 그래서 김 판사님 뒤로 돌아가 숨듯이(^^) 섰다.

   대흥사

   원래 난 아침식사는 우유와 생식으로 대신하는데, 일지암에서는 아침식사까지 정말 거하게 먹었다. 이후 일정 때문에 점심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는데, 아침이라도 잘 먹었으니 다행이다. 그 후 愛馬를 타고 대흥사로 다시 내려갔다.

   대흥사 성보박물관에 갔다. 박물관에서 본 것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초의선사의 茶器와 서산대사의 금란가사이다.

    나는 서산대사의 금란가사가 무척 화려할 줄 알았는데, 금도 세월의 힘을 거스를 수는 없었는지 금으로 만들었다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낡아 있었다.


   대흥사 ‘무량수각(无量壽閣)’의 현판(추사 김정희의 친필이다)과 ‘천불전(千佛殿)’의 창살무늬를 실제로 보았다. 하지만 아직은 본 만큼 느낄 뿐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보면, 무위사의 ‘늙은 개’(매우 영리하여, 여행객의 길잡이가 되어 준다고 한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침 천불전 앞에 누렁이 한 마리가 낮잠을 즐기고 있길래, 우리도 천불전 앞 누렁이의 사진을 찍었다(위 늙은 개와 누렁이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은 물론이다).  

   녹우당

   綠雨堂은 해남윤씨 종가에서 관리하는 곳이다. 녹우당 초입에 있는 멋들어진 아름드리 은행나무 둘레를 내 두 팔로 재 보았다. 다섯 번 남짓하였다. 그렇게 큰 나무에는 신성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던데, 소원을 빌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해남윤씨 유물전시관에는, 명문집안인 해남윤씨 명사들의 서화 및 골동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유명한 윤두서 초상화도 직접 보았다. 신기하게도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아도 초상화 속의 윤두서 翁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미인의 기준은 '古今'을 막론하는 것인가...^^  

   일지암의 명은당보살님이 미리 연락을 해준 덕분에 해남윤씨 종가집에 들어가 녹차와 다식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난생 처음 송화다식을 먹어 보았는데, 무엇보다도 달지 않아 좋았다. 호두를 박아 넣은 곶감도 있었는데 너무 맛있었다. 하나하나에 宗婦의 솜씨가 배어 있었다.


   요즘 세상에 종가가 유지된다는 것은 종손의 큰 희생(본인들은 희생보다도 명예라고 자랑스러워할 수도 있겠지만)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대 후반인 종손(尹亨植 翁)의 얼굴이 그렇게 여유로워 보일 수 없었다.

   내가  아직 未婚임을 알고는 너무 탐난다고 하시던 종부의 말씀이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녹차해수탕(보성)

   본래 계획했던 일정대로라면 강진의 고려청자 도요지와 김영랑 시인의 생가를 둘러보아야 하는데, 아침에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도저히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보성으로 직행하였다.  

   보성에서의 첫 기착지는 율포리 바닷가의 녹차해수탕. 예전에 대천에서 해수탕에 한 번 들어가 봤었는데, 개운하고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여유 있게 즐길 수 있었는데, 이번 녹차해수탕은 일정상 딱 30분만에 모든 것을 해결하고 나와야 했다.  


   나는 물이 바뀌면 피부에 붉은 기가 돌기 때문에, 집을 떠나면 되도록 샤워만 간단히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명한 녹차해수탕이기도 하고, 귀타암 식구들 전부가 목욕을 하기로 했고, 그 무엇보다도 전날이 단오였는데도 머리를 감지 못했기 때문에 목욕탕으로 향했다.

   그런데 나만 여탕으로 가야 했다. 세 분은 같이 가 심심하지 않으시겠다고 생각하니 많이 부러웠다. 물은 역시 매우 좋았다. 전날 일지암에서 제대로 씻지 못하여 다소 남루하였던 귀타암 식구들 모두 뽀송뽀송한 얼굴로 변신했다.  

   보성 차밭

   ‘여름향기’라는 드라마가 있다. 한 남자(송승헌)가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고, 그 남자는 그 여인의 심장을 이식받은 제3의 여인(손예진)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다소 비현실적인 스토리의 드라마이다. 그 드라마에 차밭이 많이 등장한다. 또, ‘가을동화’에서도 자전거를 타고 차밭 사이를 지나가는 준서(송승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촬영 장소인 보성 차밭에 갔다. 율포리 바닷가에서 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보성 차밭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에는 엄청 높은 삼나무가 양쪽으로 쭉 늘어서 있는데, 이 또한 보기 드물게 멋있는 광경이다.

   내가 친한 친구에게 선물한 선인장이 있는데, 그 별명이 ‘몽실이’다. 몽실이는 그 어감 자체로 나를 행복하게 한다. 그런데 보성차밭에 가서 차나무들을 보고 처음 드는 느낌이 ‘참 몽실몽실하다’라는 것이었다. 그 느낌은 나밖에 모르는 느낌일까?

 

    그럼, 더 대중적인 표현으로 말해 보자. 차밭은 녹색 순대 같다. 긴 녹색 창자가 돌돌 말려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이다. 갑자기 슈렉이 생각난다. 에구구, 난 역시 문학과는 거리가 멀다. 이럴 때 멋들어진 표현을 쓸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 난 커피를 좋아한다. 특히 카페오레(cafe au lait)의 원뜻 그대로 ‘우유에 넣은 커피’를 좋아한다.

   그런데 올해 귀타암으로 온 뒤에는 百害無益한 커피보다는 百益無害한 녹차, 그것도 ‘우전(雨前)’ 아니면 적어도 ‘세작(細雀)’ 정도의 고급 녹차를 즐겨 마시게 되었다. 이제는 시중에서 판매하는 웬만한 차로는 입맛을 만족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입만 고급이 된 것이다.


    보성차밭을 둘러보다가 눈에 확 띄는 것이 있었으니, 녹차 소프트 아이스크림이다. 진한 녹차 맛이 배어 있어서 정말 맛있었다. 서울에서도 맛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녹차밭도 실컷 구경하고, 우전을 두 통이나 시중가보다 훨씬 싼 가격에 구입하였으니 정말 성공적인 쇼핑이었다. 다만, 시간이 없어 녹돈(綠豚) 맛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오, 綠豚!!

   낙안읍성(순천)

   나는 지금까지 ‘城’은 적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하여 축조하는 것인 만큼, 한 면이 강이나 바다라든지, 산(하다못해 구릉이라도 말이다) 속에 협곡을 끼고 있는 지형에 위치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낙안읍성은 전혀 방어를 위한 성으로 보이지 않았다(사실은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방어를 위하여 흙으로 쌓은 성이라고 한다). 낙안읍성은 평평한 땅 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성루가 그렇게 웅장하지도 않다.  

   우리가 보성차밭에서 낙안읍성으로 출발한 시각은 거의 4시 반이 다 되어서였다. 때문에 낙안읍성으로 가는 목적 중의 하나가 동동주와 파전으로 식도락을 즐기는 일이었다.

   이번 여행이 서울에서 출발하여 논산, 강진, 해남, 보성, 순천을 아우르는 대장정이다보니 배석판사님들께서 번갈아 가며 운전을 하셔야 했는데, 김성수 판사님께서 낙안읍성까지는 반드시 본인이 운전을 하겠다고 하셨다. 그 내심에는 동동주를 맘껏 드시려는 계산이 숨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부장님께서는 선암사 주지이신 지허스님과의 약속시간이 이미 지나버렸고, 공양시간과 겹쳐 지허스님께 누를 끼치게 될 것을 우려하여 동동주와 파전을 생략하시려 하는 기색을 보이셨고, 술 고프신 김성수 판사님과 배고픈 나는 매우 낙담을 하여야 했다.

    이를 어여삐 여기신 부장님께서 동동주와 파전을 먹고 가자고 하셨고, 부장님께서 동동주 한 병과 파전 한 장을 시켜 놓고 화장실에 가느라 잠시 자리를 비우신 사이, 우리는 재빨리 추가주문을 하였다.^^  

   낙안읍성 내의 사또가 직무를 보는 곳, 즉 동헌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관광객들로 하여금 곤장을 치는 모습을 사진 찍을 수 있도록 모형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는 누가 때리고 누가 맞을 것인지를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강승준 판사님이 김성수 판사님의 볼기를 때리고, 내가 부장님의 볼기를 때리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음... 그 동안의 부장님의 은혜에 보답하기는커녕 볼기를 치다니... 극구 거부의 의사를 보였으나, 부장님께서는 이미 형틀에 눕고 계셨다.

   각 구타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두었으나, 하늘도 노하셨는지 강판사님의 구타장면만이 현상되었을 뿐 나의 구타장면은 현상되지 아니하였다. 역시 우리 사회에는 정의가 살아 있다.^^

   성문 밖 공터로 나오는데 각종 나물과 채소 등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보였다. 김성수 판사님께서 차 속에서 드실 땅콩을 샀다. 난 그저 그 옆에 있기만 했을 뿐인데, 땅콩 파는 아주머니가 한 말씀 하신다.  


   “아줌마, 고구마 줄기도 좀 사 가지.”
 

아니, 아줌마라니! 낙안읍성에 대한 인상이 대번에 나빠지는 순간이었다.

   선암사

   주지스님이신 지허스님을 뵈었다. 선암사는 임권택 감독의 작품 ‘아제아제 바라아제’와 최신 개봉작 ‘동승’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나는 불교신도도 아니고, 등산을 즐기는 편도 아니기 때문에, 사찰에 가 본 경험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암사는 내가 가본 사찰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사찰인 듯싶다. 다시 한 번 찾아 가 천천히 둘러보고 싶은 곳이다.  

   당초 약속했던 시간보다 훨씬 늦게 도착하였건만, 송구스럽게도 지허스님께서 손수 덖으신(차를 볶는 작업을 ‘덖는다’고 한다) 전통 야생차를 맛보게 해 주셨다. 그것도 도를 닦는 선방인 칠전선원에서 말이다.


   또한 우리의 전통 야생차를 키우시는 뒷마당도 구경시켜 주셨다.

   보성 차밭에서는 차나무만 남기고 잡초들은 솎아낼 뿐만 아니라, 차나무가 벌레 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모종을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잡초가 자라면 자라는 대로 일체의 관리를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둔다고 하신다. 그런데 벌레들은 잡초를 갉아먹을 뿐 찻잎은 갉아먹지 않는다고 하니, 스님 말씀대로 ‘共生'의 의미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 야생차의 맛은 정말 구수하고 진하다. 지허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 차의 경우 그 복잡한 일본식 茶道라는 것이 필요 없다고 하신다.

   물을 끓인 후 6-70도 정도로 식혀야 하고, 몇 번을 우려먹는 등의 번잡하고 어려운 다도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냥 물을 끓여 찻잎을 넣고 우러나면 마시면 된다고 하신다. 그리고 차를 아홉 번 덖었으면 차를 아홉 번 우려먹을 수 있다고 한다.

   지허스님으로부터 두 통의 차와 책(김영사에서 출판한 ‘지허스님의 차’라는 책이다. 친히 서명까지 해 주셨다)을 선물로 받았으니, 이번 여행에서 얻는 수익이 너무 크다.  

   집으로

   선암사를 나설 때는 이미 저녁 7시가 넘었고, 머나먼 귀경길을 생각하니 인근의 송광사를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예전에 사법시험 공부를 할 때, 계획을 세워 두고 힘에 부쳐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무렵 이런 말을 들었다.

   “계획을 세우고 이를 100% 실천하는 사람은 본받을 사람이 못 된다”.

그렇다, 발전적인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분량보다 더 많은 양을 계획하고 기대하기 마련이다. 우리 귀타암은 이번 남도순례여정 중 ‘강진도요지’, ‘김영랑 생가’ 그리고 ‘송광사’를 제외한 모든 일정을 소화하였으니, 그야말로 모범적이라 자부할 수 있다.  

   이번 대장정의 최고 수훈자는 이 모든 일정을 손수 마련하고, 숙소와 곳곳의 명사들을 섭외하여 우리 귀타암의 여행길을 인적으로나, 물적으로나 풍요롭게 한 부장님이시다.

   그리고 강승준 판사님은 이번에 best driver임을 또 한번 입증하셨다. 도대체 모르는 것이 없고, 매사 꼼꼼하고 서두르는 법이 없는 강판사님은 우리 귀타암의 무사귀환을 가능하게 한 멋진 분이시다.      또한 씨알이 고른 우리 귀타암에서(서울고등법원 민사 12부 부장님의 말씀이다) 유일하게 모델과 같은 체격을 보유한 우리 부의 호프이자 든든한 버팀목인 김성수 판사님 또한 감사드릴 분이시다.

    그 사이에서 편안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던 난 역시 人福 많고, 일생이 곧 호강인 행복한 사람이다.  

   서울에 도착한 시간이 밤 12시가 넘었으니, 1박 3일의 여행이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지 않을는지... (끝)(2004.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