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금강산(1)

2010.02.16 12:09

범의거사 조회 수:15215


                                아, 금강산!

                               
 


   “아, 금강산!” 


   그랬다. 비록 금강산의 극히 일부분일망정, 그리고 1박2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적어도 내 눈길이 닿았던 금강산의 모습은 “아, 금강산!” 그 자체였다. 그 많은 시인, 묵객(墨客)들이 왜 그리도 찬양해 마지않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기에 금강산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에게는 ‘꿈에 금강산을 보는 것은 고통’이라는 말이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니다.  

 

금강산.jpg

 

   김동건 서울고등법원장님의 제의로 금강산 관광의 이야기가 오고 가던 끝에, 2004년 10월 9일(노는 토요일), 10일(일요일)을 이용하여 다녀오기로 최종 결정이 났고, 참가자의 면면은 평소 산을 좋아해 산행을 즐겨하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렇게 해서 2004년 10월 8일 일과가 끝난 후인 오후 6시 15분 서초동에서 대기중이던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8일 밤 11시에 대진(화진포 북쪽)의 금강산콘도에 도착하여 밤 12시 넘어 잠자리에 들었건만, 9일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는 것이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바닷가 백사장에 바싹 붙여 지은 콘도의 새벽공기가 상쾌하기도 했지만, 날이 밝으면 휴전선을 넘어가 북쪽 땅을 밟아본다는 설렘에 피곤함을 모르겠다. 내 마음이 그래서 그렇게 보이는 것인가, 일행 모두의 얼굴이 상기된 표정이다.  

  해장국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1층 로비로 가자 組長이 기다리고 있다. 금강산 여행을 개별적으로 할 경우에는 일정한 사람 수대로 班과 組를 정해 組長의 인솔하에 단체로 움직인다. 우리 일행처럼 아예 처음부터 단체로 온 경우에는 그 사람들끼리 組를 편성한다. 組長은 현대아산의 직원이다. 우리를 인솔할 組長은 정영실양이다. 20대의 젊은 여성으로 미모가 뛰어난데다 화술도 능란하여 여행 내내 인기를 끌었다.  

금강산 관광증.jpg

   조장이 나눠주는 금강산관광증(ID카드)을 받아 목에 걸고 7시 30분에 콘도를 나섰다. 어제 타고 온 관광버스가 그대로 북한 땅으로 간단다. 조장이 차안에서 미리 수거한 휴대폰을 고성 통일전망대 근처에 위치한 

출입사무소(정식명칭은 ‘동해선남북출입사무소’이다. 북한은 우리가 정식으로 인정하는 국가가 아닌 까닭에 ‘출입국’이 아니라 단순히 ‘출입’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에 단체로 맡기고 신원 확인 등 간단한 出境(?)절차를 밟은 후(8시 5분) 민통선 안으로 들어갔다. 

 
   꼬불꼬불 산골길을 달려가는 버스 앞에 먼저 나타난 것은 검은 철책선, 돌멩이가 규칙적으로 꿰여 있는 이 철책선이야말로 한반도 분단의 상징물이 아닐 수 없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듯 철책선이 없어지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길 기원하면서 그 철책선을 넘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정확히 8시 22분, 휴전선을 통과하였다. 싱겁게도 정작 휴전선상에는 휴전선임을 알리는 그 어떤 표시판도 없다. 조장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길가에 단지 작은 철판이 녹이 슨 채 세워져 있을 뿐이다. 설명을 듣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휴전선의 모습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는 북한 땅이건만 어젯밤 콘도에서, 아니 그 전에 금강산 관광에 참가하기로 결정하였던 때부터 느꼈던 설렘이 정작 휴전선을 통과하면서는 덤덤함으로 바뀌는 게 신기하다. 외국여행을 할 때 접하는 이색적인 풍광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일까.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를 앞에서 선도하는 지프차가 북한의 헌병차라는 것을 버스 앞 유리창을 통해 보고서야 비로소 북한 땅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휴전선을 넘은 차가 5분 정도 달려가다가 멈춰 선다. 버스 앞문이 열리고 북한군인 두 명이 올라온다. 검문을 하려는 모양이다. 군인들의 검문 하면 거수경례와 함께 “잠시 검문하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를 떠올리게 마련인데, 북한군인들은 말 한 마디 없는 굳은 표정이어서 어색하기만 하다. 버스 안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역시 말없이 내려간다.  
   검문하는 사이 바깥을 내다보니 근처에서 철길(동해북부선) 공사를 하고 있다. 일제시대 때 놓인 철길이 6.25 사변을 맞아 끊어진 것을 다시 연결하는 공사이다. 중장비를 동원한 남한은 이미 공사가 끝난 지 오래인데, 북한은 인력으로 하는 까닭에 공사가 늦어지고 있다. 레일이나 침목 등 공사재료들은 모두 남한에서 제공한다고 한다. 그래도 내년에는 기차로 금강산 여행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휴전선에서 북쪽으로는 철책선이 없이 그냥 길이 거의 일직선으로 뚫려 있다. 동서를 가로 지르는 철책선이 없는 대신 남북으로 난 길의 양 옆으로 초록색 철조망이 세워져 있다. 그 철조망은 금강산까지 계속 이어진다. 남쪽에서 온 차량들이 길을 벗어나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북쪽 주민들이 길 안으로 들어와 남쪽 관광객과 접촉하는 것을 막는 2중 효과가 있다.  
   철조망 바깥쪽으로는 약 100m 간격으로 경비병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서 있다. 혹시나 발생할지도 모를 철조망 월담사고를 막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관광버스 안에서 바깥 쪽 경치를 촬영하지 못하게 함이란다. 때문에 그들의 시력은 모두 2.0 이라고 하니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무튼 절대로 바깥경치를 사진 찍지 말라고 조장이 신신당부한다. 바깥경치래야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휴전선을 경계로 남북한 산의 모습이 확연하게 달라지는데, 북한의 산들은 나무가 거의 없다. 땔감으로 베다 땐 때문이 아닐는지)의 연속인데...  

   휴전선을 넘은 지 20여 분, 드디어 외금강의 자락이 보이고, 그와 동시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좌우로 눈에 들어온다. 농로를 가는 소달구지의 풍경은 60년대 우리네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광활한 옥수수밭은 추수가 끝났는지 다소 황량하다. 온통 회색 기와지붕으로 된 주택들은 하나같이 크기가 똑같은 게 한 눈에도 일률적으로 지은 집들임을 알겠다. 빈부의 차이를 안 두려니 당연히 집도 똑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공산주의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광경이다.
   그런데 규모는 그렇다 하더라도 집들을 칠하지 않고 모두 회색(기와나 시멘트) 그대로 둔 이유는 금강산의 멋진 자연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란다. 그들이 금강산에 거는 기대가 남다름을 알 수 있을 듯하다. 마을을 가까이서 지나는데 커다란 돌에 새긴 붉은 글씨가 언뜻 눈에 띈다.

 

자력갱생, 강성대국”.

 


해금강호텔

 


   오전 9시, 해금강호텔에 도착했다. 고성항 바다 위에 세워진 수상호텔이다(객실 160실). 가져간 짐을 다 들고 호텔 옆의 북한측 출입사무소와 세관이 있는 건물로 갔다. 이 건물의 외벽에는

 

“금강산 관광객들을 동포애의 심정으로 환영한다”

 

는 붉은 글씨가 씌어 있다. 이왕 환영할 거면 “.....환영합니다”라고 쓰면 안 되나.  

   출입사무소와 세관에서의  入境절차는 간단했다. 금강산관광증상의 사진을 확인하고, 엑스레이로 짐검사를 하는 게 전부이다. 긴장감 같은 것은 느낄 수 없었다.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이자,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어마어마한 무력을 갖춘 군대가 총부리를 마주한 채 대치하고 있는 지역에 들어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이는 그 뒤의 유람일정 내내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로 현대아산의 租借地인 치외법권 지대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금강산 관광지역에서 운행되는 차량들은 현대아산에서 자체적으로 번호판을 교부할 정도이다.

   짐을 호텔에 내려놓고, 등산배낭만 챙겨 버스를 타고 온정리 위락단지로 이동했다. 금강산 관광은 현재 4개의 코스(만물상, 구룡연, 삼일포, 해금강)가 개설되어 있는데, 모든 관광의 첫 출발지가 온정리 위락단지이다. 이곳에는 온정각휴게소를 중심으로 하여 문화회관, 호텔, 병원, 온천, 음식점, 야영장 등 편의시설이 밀집되어 있다.  

   금강산 관광에 필요한 모든 차량과 편의시설에 기름을 공급하기 위해 최초로 세워진 ‘금강산연유공급소’(북한에서는 주유소를 燃油供給所라고 부른다)를 지나 온정리로 가는 도중에는 남북으로 길게 일련의 바위들이 보이는데, 그 중 1,000여명이 앉을 수 있다는 커다란 바위에 “천출명장 김정일장군”이라는글귀가 새겨져 있다.  
   북한에서는 하늘이 낳았다는 ‘天出’의 의미로 새겨놓은 것인데,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참가했던 사람 중 하나가 천민출신이라는 뜻의 ‘賤出’이 아니냐고 했다가 이산가족 상봉행사 자체를 무산시킬 뻔했던 바로 그 글귀이다. 야간작업으로만 완성했다는 이 글귀는 바위 속 2m 깊이까지 파서 새긴 것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이곳만이 아니고 금강산 중에서도  名所이다 싶은 곳으로 눈에 잘 띄는 곳에는 거의 예외 없이 김일성, 김정숙(김정일의  生母, 김정일을 찬양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북한 전체로 보면 그런 글귀가 새겨진 바위나 기념비가 4만여 곳에 달한다고 한다.

금강산3.jpg

 

구룡연 코스


   아침 10시, 온정각 휴게소 앞 공터를 출발한 버스가  金剛松(금강산 미인송. 춘양목)이 좌우로 빽빽이 들어찬 산길(창터솔밭)을 한 동안 달리다 남한의 조계종에서 돈을 대 복원공사를 하고 있다는 神溪寺터(신계사는 근대불교의 거봉인 효봉스님이 판사를 사직하고 출가한 절이다)를 지나 구룡연 유람코스의 출발지인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기에 앞서 조장이 도착 第一聲을 발한다.  
   “화장실부터 다녀오세요”
3시간 30분 걸리는 산행코스에 화장실이 없다는 것이다. 중간에 실례하다가 걸리면 엄청난 벌금이 기다린다는 경고가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얼른 볼 일을 마치고 등산로 쪽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등산로가 시작되는 지점에 대형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그곳에 핸드마이크를 든 북한 안내원이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등산에 앞서 구룡연 코스의 명소들을 차례로 소개하는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북한소식을 전하는 프로그램을 볼 때면 북한 아나운서의 억양이 참으로 특이하다고 생각했고 심지어는 假聲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여기 안내원의 억양도 마찬가지이다. 나중에 보니 음식점이나 면세점의 종업원들 억양도 비슷하여 비로소 ‘북한 사람의 억양이 본래 그렇구나’ 했다.  

수림대, 앙지대, 삼록수


   10시 25분, 드디어 금강산의 첫 산행이 시작되었다. 초입에 있는 목란다리를 건너 북한식당 목란관을 지나자 수림대가 나타난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고개를 들어도 하늘이 거의 안 보인다. 이 곳을 지나면 대머리에 머리카락이 난다고 하는 소리에 일행 중 이주흥, 이호원 두 부장님의 얼굴이 환하게 피나 했으나, 그러기까지 3년이 걸린다는 소리에 그만 맥이 빠지는 모습이다. 그래도 두 분은 일부러 등산모자를 벗고 가는 것으로 보아 기대가 큰 모양이다. 아침 10시의 시간대는 하루 중 나무가 피톤치드를 가장 왕성하게 분비하는 때이므로 굳이 ‘빛나리’가 아니더라도 일행 모두가 삼림욕을 잘해 컨디션이 좋아질 것이고, 따라서 늘 산행을 쉽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구룡연 계곡에 놓여있는 총 8개의 다리 중 두 번째 다리인 앙지다리를 건너면 앙지대가 나타난다. 전후좌우를 다 둘러보아도 온통 하늘로 치솟은 바위가 둘러싸고 있는 곳이다. 그 지형대로라면  仰地臺가 아니라  仰天臺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하늘을 보려면 고개를 들어야 하니까 말이다. 아니면 仰岩臺는 어떨까?  
   이곳에도 예쁘장한 북한 안내원이 마이크를 들고 관광객을 모은다. 잠시 쉬면서 앙지대에 관한 설명을 듣고 가란다. 주위의 바위 모양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저건 코끼리, 저건 도마뱀... 하는데 알 듯 말 듯하다.  
   멋진 풍경을 사진에 담으려 하자, 안내원이 자기는 안 나오게 하란다. 그래도 찍다 보니 얼굴이 나왔다.

   앙지대를 벗어나 금수다리(세 번째 다리)를 지나자 삼록수(蔘鹿水) 약수터가 보인다. 약수터라고 하여 땅에서 샘물이 솟는 것은 아니고 계곡물이 바위 사이로 흘러내리는 곳이다. 그런데 그 물이 예사물이 아니고 산삼과 녹용이 녹아 있는 물이라 하여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이다(김일성 作名).
   이 물을 마시면 한 모금에 10년씩 젊어진다고 한다. 두 모금이면 20년. 그 이상은 마시면 안 된다. 더 마시면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북한 안내원의 말). 나는 처음엔 두 모금만 마셔 20년 전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내친 김에 두 모금이 아니라 두 컵을 마셨건만 아직 어머니 뱃속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약수로 물배를 채우고 위로 더 올라가자 만경다리(네 번째 다리)를 건너기 전에 노점상이 눈에 띈다. 진열해 놓은 물건들은 빵, 과자, 음료수, 기념품 등이다. 우리네 유원지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노점상을 연상하면 된다. 물만으로 배를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경주 황남빵 같이 생긴 빵이 6개 들어 있는 봉지를 손에 들었다. 가격은 한 봉지에 2달러. 여기 오기 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어 “잔돈 주시나요?” 하면서 20불짜리 지폐를 내미는데, “당연히 드리지 왜 안 드립네까?”하면서 1불짜리 18장을 내준다. 순간 바보 같은 질문을 한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빵맛은 남한 제과점에서 사먹는 거나 별 차이가 없다.

금강문, 옥류담, 연주담


   만경다리를 건너 다시 구룡연계곡의 오른쪽으로 들어섰다. 이렇게 구룡연계곡은 다리를 건너 좌우를 왔다 갔다 하면서 위로 올라간다. 이 때 나타나는 것이 금강문이다. 바위 틈 사이로길이 나 있어 천연의 문이 된 셈이다.
   금강산 5대 돌문(8개라고도 하는데 확인이 안 된다) 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나머지 4개 중 하나는 만물상에 있는 하늘문이고, 나머지 3개는 무엇인지 아직 모른다. 멀지 않은 장래에 그 나머지를 다 통과해볼 때가 오길 기대하여 본다.  
   유홍준씨는 이 문만을 사진에 담아보려고 수차례 시도했다가 번번히 실패하고 결국 어린아이가 문에서 나오는 장면을 사진에 담았는데, 이름하여 ‘금강산이 애 낳는 사진’이라고 한다던가...

   아무튼 이 문을 지나 금문교(다섯 번째 다리. 흔들다리이다. 출렁임이 심하여 노인들은 건너기가 쉽지 않다)를 통과하여 한 굽이를 돌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마치 새로운 仙界가 열리는 기분이다. 단풍도 본격적으로 제 색깔을 드러내지만, 무엇보다도 구슬이 녹아 있는 듯한 맑디맑은 물이 시선을 끌고 그 위로 펼쳐지는 계곡의 모습이 한 폭의 산수화 그 자체이다. 마치 내가 신선이 된 기분이다. 금강산 최고의 명소 중 하나인 옥류동(玉流洞) 계곡이다.  

   옥류동 계곡 중에서도 명물인 옥류담(폭이 58m, 깊이가 6m, 넓이가 630㎡인 연못이다)주위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무대바위 위에 앉은 북한 안내원 아가씨들(이번엔 두 명이다)이 또 부른다.  
   “선생님들, 가까이 와서 제 설명 들으십시오.”
남한, 아니 세계의 그 많은 관광지 어디에서 이처럼 명소마다 안내원 아가씨가 별도로 배치되어 자세한 설명을 해주던가... 참으로 특이한 경험이다. 그 아가씨가 설명 끝에 들려주던 싯귀가 상기도 귓가를 맴돈다.

  “높이 솟은 세존봉은 동남으로 안아 있고
   부르기 좋은 옥녀봉은 서북으로 반겨 섰는데
   앞에 솟은 천화대야 뒤에 있는 소옥녀야
   뾰족하거든 곱지나 말거나
   험준하거든 기특하지나 말았으면

   한 가운데 희맑게 내려두른
   숫돌 같은 한 장의 바위는 옥소반 같고
   그 위로 흐르는 물은 구슬이 굴리는 듯
   그 앞에 담긴 물은 넓거든 깊지나 말거나
    깊거든 맑지나 말았으면”

특히 마지막 구절인 ‘넓거든 깊지나 말거나 깊거든 맑지나 말았으면’은 필경 옥류담을 두고 한 말인 듯한데, 김진권 부장님 내외의 심금을 울리는 모양이다. 두 분이 몇 번을 되뇌인다.

   옥류담을 지나 다시 다리(옥류다리, 여섯 번째 다리. 이 다리부터는 이름이 생각 안 나 유홍준씨의 답사기를 보니 이름이 나온다. 이젠 나도 두뇌의 기억용량이 한계점에 다다랐다)를 건너 계곡의 오른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련주담”이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진 돌비석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눈을 계곡의 아래를 돌리면 비취빛 물웅덩이 두 개가 이어져 있는 게 보인다.  
   옛날에 선녀들이 지상에 내려와 구슬을 가지고 놀다가 두 개를 떨어뜨렸는데, 그것들이 그대로 못이 되어 이어져 있다는 설명을 듣고 나서야 이름의 뜻을 알겠다. 한자로 쓰면  “聯珠潭”. 북한에서는 안내판에 한자를 병기하지 않는데다가 같은 우리말을 쓰면서도 두음법칙이 통하지 않아 의미 파악에 시간이 걸리는 것을 어쩌랴.

   남한에서 온 관광객들을 위해서 정비한 것인지, 아니면 본래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구룡연 코스의 등산로는 시종일관 참으로 잘 정비되어 있다. 이는 다음 날 가본 만물상 코스도 마찬가지이다. 흙길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돌길도 자연석을 평평하게 다듬어서 깔아놓았기 때문에 적어도 돌부리에 발이 채일 염려는 안 해도 된다. 그리고 경사가 진 곳은 계단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나이가 든 사람들도 걷기에 큰 어려움이 없다. 문제는 볼 것은 많고 주어진 시간은 짧아 강행군을 해야 하는데, 체력이 얼마나 뒷받침해줄 수 있느냐일 따름이다.

   연주담 부근부터는 단풍의 색이 더욱 진해져 그 자체만으로도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단풍나무의 새빨간 색이 서울 나그네의 시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끝없이 이어지는 기암괴석의 회색빛 연봉들(세존봉의 天花臺), 그 위의 파란 하늘이 단풍과 어울려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 모습을 그대로 전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百聞이 不如一見인 걸 어쩌랴.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되거들랑 꼭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그 기회도 그냥 주어지길 기다리지 말고 이왕이면 적극적으로 만들라고 권한다. 육로여행의 금강산길이 열린 후로는 3-4개월 전에 미리 예약을 해야 갈 수 있다는 것을 덧붙인다.

구룡대, 상팔담, 구룡폭포

 

   산행을 시작한 지 1시간 20분이 지난 11시 45분, 연담교(이름이 정확하지 않다. 일곱 번째 다리)를 건너자 구룡폭포를 볼 수 있는 관폭정으로 가는 길과 상팔담을 볼 수 있는 구룡대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관폭정은 5분 거리, 구룡대는 30분 거리에 있다. 여기까지는 잘 올라온 사람들도 구룡대 가는 길이 경사가 매우 급하기 때문에 관폭정으로 발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일행과 함께 당연히 후자를 택했다. 언제 또 온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예서 말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더구나 명색이 산을 좋아하는 사람임을 자처하는 마당에...

   구룡연의 마지막 여덟 번째 다리(이게 연담교인가?)를 건너 구룡대로 가는 길로 접어들자 이내 철계단이 나온다. 위를 쳐다보니 경사가 정말 장난 아니게 심하다. 이것만 올라가면 되나 싶으면 또 계단이 나오고, 이젠 다 왔겠지 싶으면 또 계단이 나타나길 되풀이한다(모두 14개이다). 사실 등산로에 있는 철계단은 끊어진 등산로를 이어주는 꼭 필요한 존재이긴 하지만, 막상 타고 올라가는 순간만큼은 진땀을 흘리게 마련이다.  
   “아이고 다리야”를 수없이 되뇌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일순간 시야가 탁 트인다. 구룡대(九龍臺)에 도착한 것이다. 관폭정 갈림길에서 30분 걸린다는 곳을 20분 만에 도착했으니,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등에서는 시냇물이 흐른다.
   구룡대에서는 전후좌우로 세존봉(천화대), 옥녀봉, 관음연봉, 나아가 비로봉까지 금강산의 주요 봉우리들이 거의 다 보인다. “참으로 장관이네!”를 연발하다 발 아래로 눈을 돌리면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절벽 밑으로 상팔담(上八潭)의 절경에 눈이 부신다.  

   상팔담은 구룡폭포의 위(上)에 있는 여덟 개(八)의 연못(潭)이라는 뜻이다. 마치 크고 작은 그릇 여덟 개를 이어놓고 초록색 물을 담아 놓은 듯하다. 단풍으로 물든 암봉 하나를 끼고 돌면서 물굽이가 생기고, 그 물굽이 중간중간에 암반이 파여 연못이 생긴 것이다. 누가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닐진대, 실로 자연의 섭리가 오묘하기만 하다.  
   그 중 네 번째 연못이 바로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에 나오는 곳이라고 한다. 이왕 옷을 감추고 선녀와 살 요량이었다면 사슴의 말에 따라 아이를 셋 낳을 때까지 기다릴 것이지 어쩌자고 도중에 옷을 내주었단 말인가. 아무튼 지금도 달밤이면 선녀가 목욕하러 내려올 것만 같다. 애틋한 전설을 간직한 상팔담의 맑은 물은 오늘도 노래하며 흐르고 있다.
   상팔담 주변의 경치가 아무리 아름다운들 한없이 바라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며칠이고 머무르면서 신선놀음을 할 수 있는 한량이 아닌 바에야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산할 수밖에 없다. 한양에 돌아가거들랑 주위 사람들에게 내 눈을 들여다보라고 해야겠다. 거기에 刻印되어 있을 상팔담을 감상해보라고 말이다.

   다리의 힘이 풀려 철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는데, 김동건 원장님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오신다. 본래 관폭정에서 구룡폭포를 보는 것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對馬島主 이인재 부장님이 상팔담을 안 보면 평생 후회할 거라고 하는 통에 뒤늦게 올라오신단다. 그러고 보니 포기한 줄 알았던 이호원부장님의 사모님도 역시 땀을 뻘뻘 흘리시며 올라오신다. 의지의 한국인의 자랑스런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구룡대를 다녀왔다 해서 구룡폭포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소 지친 발걸음이지만, 발길이 자연스레 관폭정으로 향한다. 관폭정은 말 그대로 폭포(瀑)를 볼(觀) 수 있는 정자이다. 시멘트로 된 난간이 금강산의 비경과 영 안 아울리기는 하지만, 그 난간에 서면 구룡폭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상팔담을 지나온 물이 150m의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그 물이 떨어지는 곳에 바위가 움푹 패여 만들어진 연못(水深 13m)에는 금강산의 수호신인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으니, 구룡폭포(九龍瀑布)이고 구룡연(九龍淵)이다. 이제까지 연못에는 “담”이라는 말을 썼는데, 왜 여기만 “연”일까? 누구한테 물어보나....  
   그 옛날 조선의 3대 폭포 중 하나(나머지 둘은 송악산 박연폭포와 설악산 대승폭포)로 꼽혔다는 이 폭포는 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한데, 그만 그 옆 바위에 “彌勒佛”이라고 새겨놓은 엄청나게 큰 글씨(폭 3.6m, 높이 19m)가 눈을 찌푸리게 한다. 1919년에 김규진이라는 사람이 쓴 글씨를 석공이 새긴 것이라는데, 제 딴에는 정성을 들여 쓰고 새겼을지 모르나, 중생이 진정 도탄에 빠졌을 때 구원하러 오실 미륵부처님을 욕보일 따름이다.

목란관


   구룡연 코스의 볼거리를 다 보고 등산로 초입의 목란관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오후 1시 50분이다. 목란관은 북한에서 운영하는 식당이다. 옥상에 마련된 자리에는 파라솔이 여럿 설치되어 있는데, 파라솔에 온통 포카리스웨트 광고가 새겨진 게 이채롭다. 목란(산목련)은 현재 북한의 國花라고 한다.
   이 식당에는 본래 1시 30분에 올 테니 점심 준비를 해달라고 예약했었는데 그보다 20분이 늦었다. 처음에는 왕복 3-4시간짜리 등산을 하다보면(그것도 단체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그게 서울에서의 생활에 익숙한 우리의 오산임을 깨다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미리 주문했던 음식들(평양냉면, 산채비빔밥, 추어탕. 요금은 각 10불)이 다른 사람들한테 팔려나가고 하나도 없었다. 엎친 데 덮친다고 전기가 끊겨(오후 2시면 전기공급이 끊긴다고 한다) 가마솥에 불을 때서 밥을 새로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 밥이 나오기까지(그나마 산채비빔밥 한 가지) 무려 1시간 10분을 속절없이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에 여종업원들이 미안했던지 서울에서 온 “선생님”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자청한다. 제목은 “심장에 남는 사람”. 오래 보아도 기억이 희미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잠깐 만나도 심장 속에 남는 사람이 있다는 내용이다. 북한식 사랑노래가 아닐는지... 이 노래는 나중에 삼일포 관광 때도 북한 안내원이 들려주었다. 그걸로 보아 아마도 북한에서 요새 유행하는 노래인 모양이다. 그나저나 ‘가슴’ 속에 남는 사람이 아니라 ‘심장’ 속에 남는 사람이라니 왠지 섬뜻한 느낌이 든다.
   밥을 기다리다 목이 컬컬하여 일행이 맥주를 주문하자 용성맥주라는 상표가 붙은 북한 맥주를 가져온다. 총 일행 16명 중 나처럼 술을 전혀 안 마시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10여 명이 고작 8병을 마시고 추가로 3병을 주문하니, 여종업원이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한 마디 한다.  
   “선생님들,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십네까? 물배 차지 않았습네까?”

교예공연, 온천, 금강원, 야시장

 

   산행을 마치고 해금강호텔로 돌아와 잠시 숨을 돌리며 옷을 갈아입고 온정리 위락단지로 다시 갔다. 오후 4시 30분부터 시작되는 교예공연을 보기 위해서다. 공연이 열리는 곳은 문화회관이다. 교예공연은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우리네의 서커스공연을 연상하면 된다.
   다만, 우리의 서커스단은 순수 민간 공연단체인 데 비하여 북한의 교예단은 정부에서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단체인 것이 다르다. 그래서 단원들은 특별대우를 받으며, 그 중 최고의 기량을 지녀 인민배우로 선정이 되면 장관급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실제로 다음 날 만물상 가는 길에서 본 교예단원들의 숙소는 여느 주민들의 집과는 달리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1시간 30분여에 걸친 공연은 그야말로 가지가지의 묘기대행진이었다(관람료 25불). 사회자가 소개하는 내용을 들으니 각종 국제 서커스대회에서 상을 탄 것들이 대부분이다.
   맨 마지막 순서가 공중에서 그네를 타는 것인데, 마치 체조선수가 마루운동을 공중에서 하는 것 같아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여자 단원이 공중 곡예 도중 두 번 그물망으로 추락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운 탄성을 지르게 하였다. 다만 나중에 곰곰 반추해보니 관중들을 위한 서비스로 일부러 떨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장 바깥에서 공연실황을 녹화한 테이프를 20불에 팔길래 하나 사들고 나왔다. 서울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서...

   교예공연을 보고 나오자 오후 6시 30분이다. 이미 해는 지고 주위가 깜깜하다. 문화회관과 마찬가지로 위락단지 안에 있는 금강산온천으로 갔다. 현대아산에서 건설한 온천장이서 그런지 내부시설이 서울에 있는 특급호텔의 사우나 수준으로 깨끗하고 훌륭하다(입장료 12불). 온천수는 지하 203m에서 뿜어 올리는데, 온도는 40℃이고, 주성분은 무색무취한 중탄산나트륨이다. 근래에 인근에서 50℃의 새로운 온천맥을 발견하여 조만간 온천장을 하나 더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온천장 안에는 온탕, 냉탕, 샤워장이 골고루 구비되어 있고, 문을 열고 나가면 노천에도 역시 온탕, 냉탕이 마련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그 중 온탕에는 옥류탕, 연주탕 등의 이름이 붙어 있어, 옥류담, 연주담을 연상시킨다. 다음 날 산신제의 제물로 바쳐질지도 모르는 슬픈 운명이라 정성들여 몸을 씻었다.  

   온천장 옆에는 금강산호텔이 있다. 본래 북한에서 외국인 전용 호텔로 운영하던 것을 근래 현대아산에서 운영권을 넘겨받아 리모델링하여 올해 7월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으나, 일견하여 괜찮은 호텔로 보였다. 경영진을 제외한 종업원은 전부 북한사람들이라고 한다.  
   이 호텔의 부속건물에 있는 금강원이라는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북한 요리사가 직접 요리를 하고, 북한 ‘봉사원’(종업원을 이렇게 부른다)이 서비스를 하는 순수 북한식 음식점이다(1인당 25불). 음식은 만두, 흑돼지구이, 자연산 송이, 금강산냉면, 섭죽(홍합죽)이 코스요리로 나오고, 개성고려인삼주로 반주를 곁들였다. 일행 중에 북한소주를 찾는 사람이 있었지만 없다고 한다. 흑돼지구이가 특이하고 맛도 좋았다. 비계가 거의 없고 고소하다. 금강산냉면은 감자녹말로 만들었는데, 특별히 맛이 있는 줄은 모르겠다.
   식사 도중에 현대아산의 김윤규 사장이 그 곳에 식사하러 왔다가 합석하는 통에 그로부터 금강산 관광사업에 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들은 내용을 다 옮길 수는 없으나, 오랫동안 대치상태에 있는 남북간의 교류를 위하여 큰일을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온정각 휴게소 앞으로 다시 왔다. 밤 10시까지 열리는 夜市場을 보기 위해서다. 不夜城을 이룬 야시장에는 펩시콜라의 광고가 새겨진 파라솔이 즐비하게 놓여 있고, 우리 일행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일단의 관광객들이 노래방기계를 틀어놓고 춤과 노래를 즐기고 있었다. 이날 저녁에 금강산에 와 있는 관광객이 약 4,000 명에 이른다니 북적거릴 만도 하다.
   노랑저고리 붉은 치마의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북한측 여자 봉사원들이 북한소주와 함께 생선구이, 전복 등을 팔고 있다. 가격은 대개 1불에서 3불 사이이다.
  
   저녁 먹으면서 이미 반주를 곁들인 데다, 주거니 받거니, 권커니 자커니 오고가는 술잔에 다들 얼큰해진 표정이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일어나려 하지 않는다. 오늘 하루밖에 주어지지 않은 금강산의 깊어가는 밤이 그만큼 아쉬운 걸까... 그런데 일행 중 부부동반으로 오신  某부장님(차마 그 이름을 밝히지는 못하겠다)이 이런 분위기를 일거에 몰아내는  一聲을 날리며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신다.  
   “금강산의 밤은 짧습니다!”
참고로 김동건 원장님(따님 동반)과 이주흥, 이호원, 김진권 세 분 부장님은 부부동반으로 오셨음을 부기한다.

   해금강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 11시가 넘었다. 호텔 프런트에서만 유일하게 가능한 전화(1분 통화에 5불 또는 6,000원)로 서울에 안부를 전한 후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의 일정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해상에 떠있는 호텔이지만 침대가 흔들리지 않고 의외로 잠자리가 안락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몇몇 분은 호텔 안에서 술을 한 잔 더 하셨다고 한다. 그분들의 체력에 감탄할 따름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