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금강산(2)

2010.02.16 12:10

범의거사 조회 수:10627


금강산2.jpg



 


2004. 10. 10.

배멀미, 추모비, 제물


   6시 30분에 깨워달라고 모닝콜을 부탁하고 잤건만 아무런 기별이 없어(못 들었을까?) 내쳐 자다가 불길한 예감에 눈을 뜨니 창밖이 훤하다. 7시 10분이다. 세수를 후딱 하고 호텔 1층 식당으로 내려갔더니 일행의 대부분이 이미 아침식사를 마쳤다.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아침을 때우고(평소에 아침을 생식으로 대체하여 온 터라 그래도 큰 지장은 없다) 짐을 싸서 정해진 시간에 간신히 로비로 내려갈 수 있었다.
   어제 밤에 금강산의 밤이 짧다고 외쳤던  某부장님만 유독 간밤에 배멀미를 해서 어지럽다고 하신다. 다들 같은 배를 탔어도 멀쩡하건만, 당신께선 2층 배를 타서 그러시다는 통에 한바탕 웃었다. 그러자  仁宰대사께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배멀미인지 등멀미인지 알 수 있나?”

   아침 7시 50분 호텔을 나서 다시 온정리 위락단지로 갔다. 만물상에 오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등산로가 좁아 밀리기 때문에 가능한 한 일찍 가려고 서두른 것이다. 하지만 정작 위락단지 주차장에 도착하니 만물상을 향해 차가 떠나려면 다소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북한측으로부터 올라가도 좋다는 연락이 와야 하는 모양이다.  
   그 사이에 인근에 있는 현대그룹 정몽헌  前회장의 추모비를 보러 갔다. 자연석 화강암에 도올 김용옥이 추모사를 쓴 커대한 비석이 금강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공과를 떠나 남북교류협력사업에 바친 그의 열정을 생각하니 숙연해진다. 훗날 통일이 되면 고인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내려질까...

   금강산은 한 달에 비가 40일 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가 많은 곳이다. 어제는 참으로 날씨가 좋았으나, 오후부터 내일은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돌아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맑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일행들이 나에게 축하인사를 건넨다.
   까닭인즉, 어제 밤부터  對馬島主가 만일 오늘 비가 올 양이면 나를 제물로 하여 산신령께 제사를 지내겠다고 호언하였기 때문이다(많은 분들이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으흐흑!). 나는 제물로 쓰이기에는 살이 너무 없으니 오동통한 이호원 부장님을 제물로 쓰는 게 산신령의 기호에 맞지 않겠냐고 해보았지만, 소청이 기각된 터였다. 정 모자라면  二村선생(이형하부장)을 제물로 추가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여러분이 만물상을 무사히 구경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이 한 몸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고 서약했는데, 맑은 날씨 덕분에 겨우 삶을 연장하게 되었다. 아무튼 이제부터는 제2의 인생을 사는 셈이다.

   위락단지에서 만물상 방향으로 얼마 안 가면 오른쪽으로 온천이 하나 보인다. 어제 밤에 우리가 목욕을 했던 금강산온천이 아니고, 북한 주민을 위한 온천이다. 아마도 옛날부터 내려온 본래의 금강산온천이 아닌가 싶다. 그 외양만 놓고 비교할 때 어제의 온천이 대궐이라면 오늘의 온천은 초가집이다. 너무나 초라한 모습에 가슴이 아리다. 분명 북한 땅에 있는 번듯한 온천에는 남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데, 정작 북한 주민들은 온천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데나 겨우 출입할 수 있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반면 문화회관에서 교예공연을 하는 단원들의 숙소는 숲속에 번듯하게 자리 잡고 있어 좋은 대조를 이룬다.

만물상 코스


   만물상은 금강송이 도열해 있는 솔밭과 거기에 이어지는 맑은 계곡인 한하계(寒霞溪)를 지나 온정령(해발 857m) 고갯길을 통해 접근한다. 이 고갯길은 106굽이로 총 연장이 60리(24km)에 달하는데, 이 고개를 넘어가면 아직은 우리가 갈 수 없는 내금강이다. 차가 다닐 수 있게 길을 확장하는 데 일제시대에 8년 걸려 6km 공사하고 만 것을 6.25 사변 때 북한군이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두 달 만에 나머지 18km를 완성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만, 차가 다닐 수 있다고 하여 대관령이나 한계령처럼 훤하게 뚫린 것은 아니고, 차 두 대가 겨우 교행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굽이굽이 고갯길을 오르다 보면 금강산 호랑이나 곰 등을 볼 수 있다는 조장의 말에 모두 귀가 솔깃했는데, 길옆에다 호랑이나 곰 같은 동물들의 像들을 만들어 놓은 것임을 이내 깨우치고 맥이 빠졌다.  

   25분만에 77구비(12km 지점)를 도니 만상정이 있는 주차장이 나타난다. 산행의 출발점(해발 660m)이다. 우리 일행을 태운 차가 1착이다. 어제 구룡연 코스에서처럼 화장실을 다녀오고, 북한측 안내원으로부터 코스 설명을 듣고 8시 45분, 산행의 첫발을 내디뎠다.  

   만물상 코스는 구룡연 코스와는 달리 등산로의 경사가 급하다. 물론 길이 잘 정비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힘이 든다. 연로하신 분들이 오르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특이하게도 만물상의 계곡에는 구룡연의 계곡과는 달리 물이 없는 것도 이 경사 급함과 관련이 있지 않을는지... 아무튼 어제의 산행이 유람이라면 오늘의 산행은 말 그대로 등산이다.  
   그나저나 만물상이 어떤 곳인가. “금강산 찾아가자 1만2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라는 노랫말의 무대가 바로 이곳 아닌가. 등산로의 초입부터 입이 벌어진다. 우선 계곡 사이로 보이는 遠景이 넋을 잃게 한다. 한 장이라도 더 사진에 담으려고 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다. 이러다간 정상에 못 올라가지...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金剛全圖)를 떠올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금강산1.jpg

[금강전도(金剛全圖)]



삼선암, 망양대


   만물상의 여러 명소 중 처음 나타나는 곳은 신선 세 명이 돌이 되었다는 삼선암(三仙巖)이다.30여 미터 높이의 바위봉우리 세 개가 나란히 있다. 각각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으로 불린다. 같은 이름으로 단양팔경에 속하는 바위들은 10여 년 전 폭우에 소실되었는데, 이 곳의 삼선암은 여전히 자태를 뽐내며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삼선암을 지나면 곧 귀면암을 만날 수 있는데, 하산길에 보기로 하고 그냥 통과했다. 조장이 천선대와 망양대의 갈림길에 10시까지는 도착해야 하고, 거기서 양자 중 택일하여 하나만 보고 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심 천선대를 보겠다고 작정하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등산로의 경사는 더 급해지고, 돌계단이 수도 없이 나타났지만, 개의치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해서 갈림길에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9시 15분이다. 이 쯤 되면 둘 다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샘솟게 마련이다.  二村선생, 仁宰대사와 함께 망양대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몇 번 되풀이되고, 마지막으로 가파른 돌계단을 지나자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인다. 갈림길에서 30분만에 능선 위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눈앞에 나타나는 望洋臺.
해발 1,340m의 천연 전망대이다. 제1,제2,제3 망양대가 인접하여 이어지는데, 어디서나 동쪽으로 동해바다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상등봉에서 뻗어나온 기암괴석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멀리 천선대도 보인다.
   갑제1호증(증명사진)을 찍고 있노라니 이태운, 김진권, 이호원 등 밤새 술실력을 자랑하셨던 분들이 속속 도착하신다. 참으로 강철 체력이다. 토요일 오후마다 청계산을 오르내리면서 다진 것이리라. 원장님은 아마도 망양대 오르기를 포기하고 천선대로 가신 듯하다.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자 망양대가 갑자기 비좁아진다. 북한산의 백운대처럼 말이다. 뒤에 온 사람들을 위하여 자리를 내줘야 할 판이다.  先入先出의 원리가 여기서도 적용된다.  

천선대


   부지런을 떤 보람이 있어 망양대에서 내려와 다시 천선대로 향하는데 아직 10시 25분밖에 안 되었다. 시간관계상 하나밖에 보지 못한다고 했던 정영실 조장이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할까. 우리 일행이 비록 모두가 50대이지만, 그 대부분이 산악인 뺨치는 등산도사들이라는 사실을 그니가 알 리 없다.
   천선대로 올라가는 길이야말로 이번 산행의 최대 난관이다. 경사도 7-80도 정도의 철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발밑을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남한의 내노라 하는 산들을 거의 다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급경사의 철계단이 많은 곳은 처음이다. 그래서일까 중간 중간에 쉬면서 경치구경을 할 수 있게 공간을 마련해 놓은 곳이 있다.  

   天仙臺(해발 936m), 말 그대로 이 곳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하늘의 선녀들이 내려와 놀다 간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상에서 보면 주위를 둘러싼 五仙峰(우의, 무애, 천주, 천진, 천녀)의 경치뿐만 아니라 외금강 일대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온정령의 꼬불꼬불한 고갯길도 보인다. 여기야말로 금강산 1만2천봉의 진수를 볼 수 있는 바로 그곳이다.  
   전후좌우, 발 아래, 머리 위로 눈길을 돌릴 때마다 “아!, 아!” 하는 소리만 나온다. 어쩌면 그렇게도 기암괴석들이 많을까. 울산바위만 빼놓고는 조선 8도의 명품 바위들을 다 모아놓았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다. 주위의 경치를 디지털카메라에 열심히 담고 있던  仁宰대사께서 한 마디 촌평을 한다.  
   “어제 구룡연 코스를 오르면서는 설악산보다 조금 낫다는 생각을 했는데, 오늘 여기 와보니 설악산을 이곳에 비교한다는 것은 애당초 말이 안 된다”

   천선대는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이 다르다. 가능한 한 많은 곳을 보여주려는 등산로 설치자의 배려일까? 아니면 가파른 철계단에서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교차하다가 추락사고가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일까? 아무래도 좋다. 덕분에 천선대의 뒤편 경치도 감상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온정령 고갯길을 내려다보면서 천선대의 뒷면 산록을 끼고 돌다 다시 전면으로 나서면 돌문이 앞을 가로 막는다. 금강산 5대 돌문 중의 하나인 하늘문(天一門)이다. 그 문을 통과하는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단풍의 항연, 전혀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다. 단풍의 색깔이 어쩌면 그리도 고울 수 있을까. 금강산의 가을 이름이 풍악산(楓嶽山)인 이유를 알 만하다.

망장천


   계속 감탄사를 연발하며 천선대를 내려오는데, 그 중턱에 일단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망장천이다. 삼록수와 마찬가지로 한 모금 마시면 10년 젊어진다는 샘이다. 지팡이를 짚고 올라왔다가 그 물을 마시면 10년 젊어지기 때문에 지팡이를 잊고 내려간다 해서  忘杖泉이란다.
   어제 삼록수를 두 컵이나 마셨는데도 어머니 뱃속으로 안 들어갔으니, 오늘은 세 컵을 마셔야겠다고 내심 생각하고 줄을 섰으나, 이게 웬 일! 10분이 지나고 20분이 되어도 줄이 줄어들지 않는다. 바위에 박힌 수도꼭지에서 물이 졸졸 나오는데, 그 양이 많지 않은 모양이다. 거기에다 한 모금씩 마시고 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물병을 들이대고 물을 받고 있으니 줄이 줄어들 리가 없다. 젊어지겠다는 욕심을 모를 바 아니나, 이럴 때일수록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예의가 아쉬운 대목이다. 같이 기다리던  二村선생이 결국 약수 마시를 포기하고 그냥 내려가 버리고, 仁宰대사도 이내 그 뒤를 따른다. 뒤늦게 오신 이태운, 김진권 두 부장님마저 이어서 내려가시니 나도 할 수 없이 기다림을 포기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재촉했다.

토끼와 거북이, 귀면암


   시간에 여유가 있는지라 만물상 계곡을 내려갈 때는 처음 올라올 때와는 달리 주위의 바위들을 유심히 살펴볼 수 있었다. 마침 조장을 만나 그니의 설명을 들을 수 있어 다행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냥 바위로만 보이던 것들이 그니의 설명을 듣고 나면 생동하는 동물상으로 변하고, 삿갓을 쓴 선비상으로 둔갑한다. 토끼와 거북이의 동화를 연상케 하는 바위의 모습은 정말로 두 짐승을 빼닮았다. 앞서 가는 거북이와 뒤따르는 토끼.  
   선녀를 놓친 나뭇꾼이 홧김에 도끼로 내려찍은 자국이 선명한 절부암(折斧巖)도 보인다. 조물주가 7일 동안 천지창조를 하면서 그 중 하루를 통째로 할애하여 금강산을 만들었다는 구스타프 국왕(스웨덴)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것 같다. 스웨덴에서 머나먼 한국 땅의 금강산까지 찾아온 그의 열정에 찬사를 보낸다.  

   언제 또 올지 기약이 없는지라 만물상의 기암괴석을 보고 또 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 새 삼선암이 다시 나타난다. 주등산로를 벗어나 삼선암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돌계단을 오르자 귀면암(鬼面巖)이 시야에 들어온다. 귀신의 얼굴을 한 바위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지만 설명을 듣고 보아도 이제까지 보아온 다른 바위들과는 달리 바로 “정말 그렇네!”하는 감탄사가 튀어나오지 않는다. 이제까지 奇岩을 하도 많이 보아서 감각이 무뎌진 탓인가...
   귀면암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시설해 놓고 온정리 위락단지 사진관에서 사진사가 출장 나와 있는 것이 오히려 시선을 끈다. 여기서 사진을 찍으면 2시간 후에 위락단지 사진관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어제 오늘 연이어서 등산을 한 까닭인지 이젠 다리가 제법 아프다. 아무리 절경이라 하여도 역시 몸이 따라 주어야 제대로 구경을 할 수 있는 법이다. 배도 고프다. ‘금강산도 食後景’이르는데.. 주자창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오르니 스르르 눈이 감긴다.  
   금강산 유람 여정이 서서히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다. 누군가 정영실 조장한테 노래를 청하자 일행 중 한 분이 먼저 부르면 하겠다고 한다. 모두들 명가수로 명성이 자자한 오세빈 부장님을 연호하였지만, 오늘따라 吾不關焉이시다. 조장의 노래는 결국 삼일포를 갔다 오다가 들을 수 있었다. 명창이었다.

고성항횟집, 삼일포


   온천에 들러 목욕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오후에 삼일포 관광 일정이 잡혀 있는지라 해금강호텔에서 겨우 땀에 젖은 옷만 갈아입고 인근에 있는 고성항횟집으로 갔다. 현대아산 측에서 운영하는 이 식당은 총 240석의 좌석이 있는 음식점답게 규모가 꽤나 큰 횟집이다. 그런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니 손님이 별로 없다.  
   동해의 북한측 청정수역에서 잡아온 활어로 만든 것이라 생선회가 매우 싱싱하다. 아침부터 서둘렀고 등산을 한 뒤라 시장하기도 했지만 음식이 정갈하고 맛있어 그야말로 포식을 했다(1인당 20-30불).

   점심 식사 후 오후 2시에 이번 旅程의 마지막 관광지인 삼일포로 향했다. 고성항횟집에서 삼일포는 자동차로 15분 거리이다. 도중에 마을을 지나지만 주민들을 보기 힘들다. 관광버스가 지나가는 시간에는 군인들이 주민들의 이동을 통제한다고 한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학교에는 일요일이어서인지 학생들은 보이지 않고, 깨진 채 방치되어 있는 유리창이 눈에 거슬린다.  
   조장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리자 온정리로 향해 가는 일단의 차량행렬이 보인다. 20여 대의 관광버스가 꼬리를 물고 달리고 있다. 2박3일(금강산 안에서만) 일정으로 금강산을 찾는 관광객을 싣고 오는 버스들이란다. 그 버스들이 떼를 지어 질주하는 모습 또한 멋진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다.  

   삼일포는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름난 호수이다. 본래는 바닷가의 포구(浦口)였는데, 언제부터인가 둑으로 막히고 민물호수로 되었다. 호수 둘레의 총 길이는 8km이고, 수심은 9-13m이다. 잉어, 붕어, 황어 등이 많이 살고 있어 봄부터 가을까지는 낚시가 가능하고, 겨울에 수면이 얼면 스케이트장으로 이용된다고 한다.  

   관광버스에서 내려 작은 동산을 오르면 제일 먼저 연화대(蓮花臺)가 나온다. 이 곳에 세워진 정자인 연화각(蓮花閣)에서 내려다보면 삼일포가 한 눈에 들어온다. 강릉에 있는 경포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는데, 주위에 너저분한 상점들이 없이 깨끗하게 정돈된 모습이 보기에 좋다.  
   옛날 어느 왕(신라의 화랑이라는 說도 있다)이 하루만 머물다 가려고 왔는데, 빼어난 경치에 반하여 사흘 동안 머무는 바람에 三日浦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말이 결코 虛言은 아닌 듯싶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그 모습을 일컬어 ‘숙녀가 아름답게 단장한 것 같다’고 했다. 우리네 같으면 각종 음식점, 술집, 러브호텔이 호반을 따라 줄지어 들어서 결국은 명소의 풍광을 다 버려놓을 테지만 삼일포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훗날 통일이 되더라도 이 모습을 길이길이 간직하여야 할 텐데....

   연화대에서 버스를 타고 호숫가로 내려왔다. 단풍관이라는 삼일포의 유일한 2층짜리 휴게소가 있는데, 각종 기념품과 음식들을 판다. 그 중 동동주가 주당들의 입맛을 당기게 한다. 점심 먹으며 분명 반주를 곁들였건만...  
   금강산 관광길 중 구룡연 코스는 ‘유람’하고, 만물상 코스는 ‘등산’한다면 삼일포 코스는 ‘관광’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거기에 걸맞게 단풍관 옆 공터에는 ‘등산로’가 아닌 ‘관광로’를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 앞에서 그 동안 우리 일행을 안내하면서 불편하지 않게 보살펴 준 정영실 조장과 함께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다. 승리의 V자를 그리며...  

   단풍관을 나와 호숫가를 따라 난 길을 걷다가 길 밑으로 내려가 손으로 찍어 물맛을 보았다. 정말로 민물인지 확인하려고... 知天命의 나이가 되어도 호기심이 발동하면 여전히 童心을 벗어나지 못한다. 1988년 여름에 미국의 五大湖에 갔다가 호수가 하도 커서 혹시 바다가 아닐까 하여 역시 손으로 찍어 물맛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호수의 서쪽을 반 바퀴 돌아 다시 작은 동산으로 올라갔다. 장군대이다. 정자(충성각. 장군대나 충성각이라는 이름은 다 김일성, 김정숙과 연관된 것이다)가 하나 보이고 그 앞에 북한 안내원이 기다리고 있다. 햇볕에 그을려서인지 얼굴색이 구릿빛인 건장한 안내원이다. 가슴에는 역시 김일성배지를 달고 있다.
   안내원의 설명을 듣기에 앞서 이번 여행의 동반자들 중 남자들만 모여서 호수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다. 어느 새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는데, 한양에서 온 50대 사나이 9명이 그 빛을 받으며 삼일포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것이다.  

   안내원의 설명은 삼일포의 유래부터 시작하여 호수 위에 보이는 섬들에 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호수 한 가운데 있는 섬은 마치 소가 누워 있는 것처럼 생겼다 하여 와우도(臥牛島)라고 하는데, 소나무가 많다 하여 일명 송도(松島)로도 불린단다. 그래서인지 송이가 많이 나온다며, 이 다음에 다시 오거들랑 배타고 가서 송이를 캐보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 송이 캤다간 아마도 벌금을 엄청나게 물겠지...
   그 뒤로 보이는 작은 섬 위에 있는 정자는 사선정(四仙亭), 보나마나 네 명의 신선이 살았겠지 했더니 신선이 아니라 화랑이 놀던 곳이란다. 그 옆의 섬은 신선들이 춤추던 무선대(舞仙臺)와 ‘述郞徒 南石行’이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 단서암(丹書巖)이란다. ‘述郞徒 南石行(술랑도남석행)’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논의가 분분한데, 평소에는 물 속에 잠겨서 안 보인단다.
   설명을 끝낸 안내원이 노래를 한 곡조 부른다. 곡명은 어제 목란관에서도 들었던 ‘심장에 남는 사람’.  
이어서,  
   “금강산을 꿈에서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다시 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라는 시 한 구절을 들려주며 덧붙이는 말,
   “선생님들, 다음에 꼭 한 번 더 오십시오.”  

   구경을 마치고 버스 타는 곳으로 내려오니 작은 트럭에 음료수를 싣고 온 차가 눈에 띈다.  
   “천원! 천원!”  
분명 북한사람으로 보이건만, 아이스박스에 넣어 시원한 생수, 음료수를 병당 천원에 팔고 있다. 삼일포 관광객이 관광을 마칠 시각이면 와서 판다고 한다. 돈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귀환


   오후4시 35분, 북한측 출입 사무소에서 出境절차를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금강산 안에서의 1박2일이 꿈만 같다. 언제 통일이 될지 감감하기만 한 상황에서 금강산을 왔다 가다니... 휴전선을 다시 넘어 남쪽으로 내려 온 후 무릎을 꼬집어보지만, 정녕 꿈이 아니라 생시이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에도 돌이켜 보면 여전히 한 마당의 어지러운 꿈을 꾼 것 같다.  
   화진포에서 서울로 오는 길로 들어서자 그야말로 남한 땅임을 실감한다. 가을 정취를 즐기러 동해안과 설악산 일대를 찾았다가 서울로 돌아가는 차들로 도로가 주차장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굴러가는 것은 자전거와 달구지가 거의 전부인 북녘 땅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 차량의 숫자로 남북한의 국력을 비교한다면 무리일까...  
새벽 1시가 되어서야 서초동에 도착했다.(끝)  

(追) 모든 일정을 세심하게 기획하고 차질 없이 집행하신 山友會총무 이호원부장님께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우리 일행과 동행하며 여러 가지로 편의를 보아 주신 현대아산의 윤만준 고문님께도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