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5대 高峰에 오르다(계방산)

2010.02.16 12:25

범의거사 조회 수:10809

 


              마침내 5대 高峰에 오르다  

 

   태어난 곳이 시골(여주)이라 어릴 적부터 산(비록 마을 뒷동산이긴 하지만)에 올라가 논 때가 많았고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부모님 따라 산에 간 적이 있긴 하지만, 내 자유의지로 땀흘려 가며 힘들여 큰 산에 오른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인 1974년 여름 덕유산 향적봉(1,614m)이 처음 아니었나 싶다. 
 
  그 후 사법연수생 시절인 1979년 여름에 설악산 대청봉(1,708m)을 올랐고,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시절인 1983년 가을 한라산 백록담(1,950m)을 정복한 후, 1997년 여름에 지리산 천왕봉(1,915m)에 足跡을 남겼다. 그로부터 다시 8년이 지난 2005년 2월 드디어 계방산(1,577m) 등정을 함으로써 31년 만에 남한의 5대 高峰을 다 오르게 되었다.    


    계방산(桂芳山)

  평소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조차도 대개는 “그게 어디 있는 산이지?” 하며 묻는 산이다. 남한에서 다섯번째로 높은 산이건만 그런 대접을 받는 이유는 국립공원도 도립공원도 아닌 평범한 산인 까닭인지 모른다. 더구나 등산길에 기암괴석이 늘어선 岩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름난 古刹이 있는 것도 아니니 世人의 관심을 못 끄는 것이 아닐는지...
 
   그 산의 기슭에 있는 방아다리 약수나, 심지어 이 산의 7부 능선을 넘는 고개인 雲頭嶺(이 고개의 마루에서 남쪽의 평창과 북쪽의 홍천으로 갈린다)은 알지언정 계방산이라는 이름은 그만큼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옛부터 산삼이 많이 나 심마니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나 역시 운두령은 진작부터 넘나들었으면서도 계방산의 존재를 안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이처럼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오대산의 명성에 가려 이름값을 못하지만, 그렇다고 오는 사람 내치거나 가는 사람 붙들지 않으며 오늘도 의연히 서 있는 산이 바로 계방산이다.  

  2005. 2. 27.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서둘러 畏友 이병찬 상무(신한생명) 집으로 갔다. 작년 4월에 오대산 상원사에서 같이 一泊하고 계방산 등정에 나섰다가 불조심 기간에 걸려 등반이 금지되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 서울(문정동)을 출발한 것이 오전 6시 45분.
  지난 해 등반길에는 山行道伴인 충주의 김석칠 비뇨기과원장도 동행했었는데, 지난 연말에 집안에 不意의 우환을 겪은 후유증으로 이번에는 아쉽게도 동행하지 못했다. 하루 빨리 같이 산행을 즐길 날이 오길 빈다.

  대동강 물도 녹는다는 雨水가 지났지만 아직은 겨울이라고 하여야 할 계절 탓일까,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의 고속도로는 중부나 영동이나 모두 뻥 뚫려 있다. 민족사관고등학교 앞의 소사휴게소에 들러 따끈한 우동으로 아침식사를 한 후, 속사인터체인지에서 영동고속도로를 벗어나자 이내 계방산(운두령)으로 가는 31번 국도 도로표지판이 나타난다.

  이제는 찾는 이가 거의 없는 듯한 이승복기념관이 눈 속에 덮여 있는 것을 보며 길을 재촉하자 곧 노동리(평창군 용평면)의 아랫삼거리가 보인다. 운두령 고갯길이 시작되는 곳이자 계방산 산행의 종착지(운두령 정상에서 출발하는 경우) 혹은 출발지(逆코스를 택하여 이곳에서 출발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가 되는 곳이다. 때문에 주위에는 음식점과 숙박시설, 주차장 등이 정비되어 있다.


     구름도 쉬어 넘는 고개, 해동청 보라매도 쉬어 넘는 고개 운두령은 정상이 해발 1,089m이다. 한 때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에서 차로 넘는 고개 중 가장 높았던 곳이다(현재는 해발 1,330m의 만항재, 1,268m의 두문동재 등 더 높은 곳들이 있다).
 
      그런 고개를 넘으려니 길이 꼬불꼬불할 수밖에 없다. 남한의 유명한 고개들이 대개 백두대간의 동서를 연결하는 데 비하여 이 고개는 남북을 연결하는 것이 이채롭다.
      예전에 충주지원장 시절 눈이 많이 온 한 겨울에 설악산을 다녀오면서 이 고개를 넘다가, 무심코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자동차가 360도 회전하는 바람에 염라대왕 면전까지 갔다 올 뻔했던 기억이 새롭다.        

   고갯마루에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오전 8시 50분. 서울에서 2시간 남짓 걸린 셈이다. 등산객들을 위하여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주차장에는 벌써 차들이 10여 대 주차되어 있다. 일찍 일어난 새가 모이를 먹는다고 하던가, 잠시 후면 차를 댈 곳이 없어지리라.


  배낭을 정비하고, 아이젠을 착용하고, 등산안내도로 지형을 익히고 첫발을 내디딘 게 9시 10분이다.
  등산로의 처음에 나오는 나무계단이 가파르긴 하지만, 여기만 올라가면 길이 금방 평탄해진다. 더구나 겨우 내 쌓인 눈으로 다져진 덕분에 푹신푹신하여 걷기도 좋다. 그 눈이 없다면 돌길을 걷느라 힘이 들텐데...
   도중에 아이젠의 한 쪽이 자꾸 벗겨져 애를 먹었지만, 비상용으로 준비한 끈으로 아이젠과 등산화를 한 데 묶으니까 더 이상 속을 썩이지 않는다.

   약간의 오르막내리막이 있지만 높은 산의 등산로치고는 山客들을 편하게 해주는 길을 따라 걷기 1시간, 첫 이정표를 만난다. 이제까지 온 거리가 2.0km이고 앞으로 정상까지 갈 길은 1.9km 남았단다. 그러면 총 3.9km라는 이야기인데....
    

  이 이정표를 지나고 나면 이제까지와는 달리 길이 가팔라진다. 드디어 땀이 등을 적시기 시작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길 40여분,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고 북서풍의 매서운 바람이 옷깃을 스친다. 눈이라도 내린다면 말 그대로 ‘北風寒雪’일 것 같다. 1,492m봉에 도착한 것이다.
    북쪽으로 펼쳐지는 산들의 파노라마 속에 설악산 대청봉의 雄姿가 눈길을 끈다. 유난히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1,492m봉에서는 계방산의 정상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그저 밋밋해 보이는 정상부분을 누군가는 ‘펑퍼짐하게 엎드린 산촌 누렁개 형국’으로 표현했는데, 딱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곳에 서 있는 이정표가 재미있다. 이제까지 온 거리 2.9km, 앞으로 갈 길 0.9km! 그렇다면 운두령부터 정상까지 총 3.8km라는 이야기인데, 아까 본 3.9km는 뭔가?
   도대체 100m가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 안타깝게도 이정표가 세워질 정도의 소위 ‘名山’에 가면 자주 겪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오류이다. 하루빨리 정비되길 기대하여 본다.  

   11시 20분, 계방산의 정상에 도착했다. 2시간 10분 걸린 셈이다. 추운 날씨에도 사람들이 붐빈다. 누구라 할 것도 없이 한 사람 한 사람 얹어 놓기 시작한 돌들이 쌓여 세워졌을 돌탑이 하나 세워져 있다. 다른 때와는 달리 거기에 돌을 하나 더 얹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왜일까? 돌탑보다는 주위의 풍광에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몇 년을 두고 벼르고 벼른 끝에 올라 온 산인 까닭에 경치 하나하나가 새롭다.

  북쪽으로 설악산의 峻峰들을 바라보다가 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오대산(1,563m)과 황병산(1,407m), 그리고 거기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삼양대관령목장의 고원지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어서 발왕산(1,458m)의 용평스키장 레인보우코스가 눈길을 끈다. 다시 서쪽을 보면 흥정산(1,278m)의 보광피닉스 스키장도 보인다.    

   눈 덮인 산들이 연출하는 멋진 장관에 한동안 넋을 잃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 서울에다 전화를 하니 집사람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아니 벌써 올라갔냐’고 묻는다. 마땅히 같이 왔어야 할 ‘김조과’ 원장한테도 전화를 해 함께 못 온 아쉬움을 전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산에 가면 이상무의 꼼꼼함에 혀를 내두른다. 마나님이 미국에 가서 없는데도 배낭 속에서 꺼내 놓은 점심거리가 보통이 아니다.
   컵라면, 김치, 보온병에 넣은 뜨거운 물, 샌드위치, 오렌지, 봉지(티백)녹차, 초콜렛.... 찹쌀떡만 싸 가지고 온 나를 부끄럽게 한다.
   이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지경인데, 평택에서 왔다는 등산객 한 분이 옆에서 김밥을 건네준다. 겨울 산행은 기운이 있어야 하는데, 밥을 먹어야 기운을 낸단다. 산사나이들의 인정이 바로 이런 것 아닐는지...       
  점심을 포식한 후 12시 10분에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정상에서 남쪽 능선을 따라 곧장 아랫삼거리로 내려가면 5.2km이고, 동쪽으로 朱木群落地를 거쳐 윗삼거리로 내려가 아랫삼거리로 가면 5.7km라고 이정표에 나와 있다.
   일단의 등산객이 後者가 편하다고 그리로 향하는데, 우리는 아무래도 거리도 짧고, 동서 양편의 경치도 구경할 수 있는 쪽이 나을 것 같아 前者를 택했다.  

  하지만 이 길이 보통 험한 게 아니다. 계속 능선만 따라 내려가는데, 오르막내리막의 경사가 가파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눈이 많아 발이 빠지는가 하면 중간중간의 양지바른 곳에는 반대로 눈이 녹아 여간 미끄러운 게 아니다. 잘은 몰라도 後者를 택하는 것이 걷기에는 편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아무래도 하산길이라 운두령에서 정상까지 올라갈 때보다 시간이 덜 걸려 오후 2시에 아랫삼거리에 도착하긴 했지만, 무릎의 통증이 제법 심하다.  엉덩이썰매를 탈 요량으로 무릎보호대를 하지 않아 더 그런 모양이다. 정작 엉덩이썰매는 타지도 못했다. 태백산과는 달리 이곳 하산길은 등산로가 좁거나, 경사가 너무 급하거나(아니면 아예 평평하다) 하여 엉덩이썰매를 타기에 적절하지가 않다. 
    
 
  무릎에 통증을 느끼면서도 다소 서둘러 하산한 이유는 오후 2시경에 아랫삼거리에서 운두령의 정상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등산코스가 原點回歸形이 아닌 이상 출발지와 종착지가 다를 수밖에 없고, 이 때 출발지에 차를 세워 둔 경우에는 종착지에서 출발지까지 이동하는 교통수단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계방산은 다행히 아랫삼거리에서 운두령 정상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버스시간에 맞추어 서둘러 왔건만 不知何歲月이다.

  인근의 가게에 들어가 물어보니 본래 2시 車이지만 30분 정도는 기다려야 할 거라고 한다. 그것도 꼭 온다는 보장은 없단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어찌하랴.
   아랫삼거리의 길가에는 각종 산악회에서 대절하여 타고 온 관광버스가 줄을 서 있건만(나중에 안 일인데, 계방산이 봄부터 가을까지는 개점휴업상태이나, 겨울만 되면 雪山 등반의 코스로 전국의 산악회에서 태백산 다음으로 꼽는 게 계방산이라고 한다) 그 버스들이 운두령 정상으로 갈 리는 없다. 하나같이 운두령에 등산객을 내려주고 이곳으로 와 하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로 등산객이 많다면 겨울철 성수기만이라도 셔틀버스를 운행할 법한데, 지방자치단체의 머리와 손길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손님이 없다면서도 시내에서만 빈둥거리는 그 많은 택시들은 다 뭐란 말인가.

  이상무가 하이재킹이라도 해보려고 길에 서서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손을 들어보지만 야속하게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하긴 나부터도 안 태워줄 거다. 누군 줄 알고 태워주나” 하면서 이상무가 미소를 짓는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도 낯선 사람을 차에 태워 주기가 겁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버스가 안 오면 어쩌나 하는 막연한 불안감 속에 30여 분을 기다리니 마침내 버스가 온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안내판을 보니 진부에서 홍천 가는 버스인데, 차 안에는 손님이 고작 3-4명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버스가 제대로 다닐 리 없다.
  서울로 돌아와 인터넷에서(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94&article_id=0000000352§ion_id=103&menu_id=103)  검색하여 본즉, 본래 이 버스가 아랫삼거리를 통과하는 시각이 오후 2시 30분과 5시 20분이란다. 그러면 그 곳에 살고 있는 가게 주인들의 말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아침과는 달리 귀경길은 고속도로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갈 때 2시간 걸린 길이 올 때는 4시간 걸렸으니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