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雨는 섞어치고(백두산)

2010.02.16 12:28

범의거사 조회 수:9679

 


               風雨는 섞어치고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들 중 산을 즐겨 찾는 사람들이 작년 가을에 금강산을 다녀오면서 내년에는 백두산을 가 보자고 한 것이 6월의 정기 산행 모임 때 다시 話頭로 떠올랐고, 그것이 구체화되어 이런저런 준비 끝에 마침내 8월 12일(금)부터 15일(월)까지 광복절 연휴기간을 이용하여 3박4일의 백두산 등정에 나서게 되었다.
    모두가 바쁜 처지들인지라 12일 하루만 휴가를 내면 된다는 게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일정이었고, 광복 60주년이 되는 해에 민족의 영산을 오른다는 자긍심 또한 뒤따랐다.

2005. 8. 12.

  처음 밟아보는 중국 땅


  낮 12시 45분 인천공항에서 중국 심양으로 가는 중국남방항공 소속 CZ682 비행기(에어버스)가 이륙하였다. 국적기보다 10만원이 싼 데다 출발시각이 적절하여 이 항공편을 선택했는데, 승객의 대부분이 한국인이다. 그래서일까 승무원들은 모두 중국인이지만 기내방송에서 중국어, 영어 다음에 한국어 방송을 한다.
   국적기가 아닌 외국 항공사의 비행기를 탔는데 한국어로 안내방송을 듣는 것은 처음 겪는 일이다. 나의 견문이 그만큼 짧은 것인가, 아니면 신장된 우리의 국력을 반영하는 것인가... 잠깐의 의문으로 남겨둔다.

    1시간 35분간의 짧은 비행 후에 심양공항에 도착하였다. 시차가 한국보다 1시간 늦어 현지 시각으로 오후 1시 20분이다. 공항 청사의 외벽에 심양의 위도가 동경 123도 북위 41도임을 알리는 표시가 되어 있는 게 특이하다.
   미국이나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의 모로코까지 가보았건만, 바로 옆에 있는 중국 땅에 발을 내딛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지라, 정체 모를 설렘이 다가온다. 말로만 듣던 “대륙”이라는 데가 과연 어떤 곳일까.

  공항을 빠져 나와 심양 시내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조선족 3대(할아버지의 고향은 진주란다)인 현지 가이드 하청해씨의 설명이 시작된다.
   만주의 중심도시인 심양(審陽, 중국 발음은 센양)은 인구가 무려 720만 명이다. 중국 5대 도시 중 하나이다. 옛날 이름은 봉천(奉天). 압록강까지는 버스로 3시간 걸린다. 여름의 날씨는 서울과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반팔차림인데도 후덥지근하다. 하지만 겨울은 훨씬 춥다고 한다.  

   도심을 향하여 쭉 뻗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에 우선 차창 밖으로 산이 보이지 않는 게 신기하다. 말 그대로 만주벌판인가.
   도심으로 들어서니 이번에는 고층건물이 즐비하다. 그런데도 그게 모자라는지 온통 공사판이다. 짓고 또 짓고... 중국의 현주소란다. 일견해서 활력이 넘치는 모습이다.
    그러면 지금 한국에선? 생각과 눈을 길거리로 얼른 돌린다. 간판에 씌어진 글자만이 간자체의 漢字일 뿐 서울에서 보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게 신기하다. 歐美나 아프리카의 도시와는 너무나 다른 반면, 우리와는 어쩜 그리도 비슷한지...

  심양고궁(審陽故宮)과 북릉공원(北陵公園)

    현지식이라고 하지만 입맛에 거슬리는 것이 없는 점심식사를 한 후 버스를 타고 심양고궁(審陽故宮)으로 갔다.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세우고 도읍지로 정한 곳이 바로 심양이고, 그 심양에다 1625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2대 淸太宗이 1636년에 완성한 궁궐이 바로 이곳이다.
   3대 청세조(순치제) 때 북경을 점령하고 천도(1644년)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통치를 한 것이다. 병자호란 후 인질로 잡혀왔던 소현세자는 어디에서 살았으려나.
 
      궁궐 안에는 100여개의 건물(합쳐서 400칸)이 있어 자칫 일행을 놓치면 미로찾기를 해야 할 판이지만, 전체규모(60,000㎡)는 서울의 경복궁(344,000㎡)보다 훨씬 작다. 
   훗날 중원을 장악하기 전까지는 변방의 ‘오랑캐국가’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 당시로서는 적절한 규모였으리라. 청태종이 즉위식을 한 곳이라는 8각형의 전각(大政殿)도 자그마할 뿐이다.
   각종 전각에는 堂號가 씌어져 있는데, 한자와 만주글을 병기하고 있다. 만주글은 아랍글자처럼 꼬불꼬불한데, 세로쓰기를 하는 것이 이채롭다. 중원을 호령하던 만주인의 말과 글이 이제는 지구상에서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궁에서 나와 北陵공원으로 갔다. 본래의 명칭은 昭陵인데, 1927년 공원으로 바뀌면서 도시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릉공원으로 불린다.
   청태종이 죽자 청세조에 의해 1643년부터 8년간에 걸쳐 조성된 이곳에는 청태종의 묘가 안치되어 있는데, 공원 넓이가 무려 450,000㎡에 이른다. 그래서 공원 정문을 들어서면 무덤 앞 전각까지 가는 차가 대기하고 있다(걸어가면 20분 정도 걸린다). 아마도 마차 대용으로 개발된 것으로 보이는 전기배터리차인데, 그 차의 이름이 재미있다. 이름하여 “代步車”. ‘걸어가는 것을 대신하는 車’라는 뜻이리라.
   숲과 호수가 어우러져 심양대학교 학생들의 데이트 장소로 유명한 이 넓은 공원을 천천히 산책을 하면서 구경하는 것이 더 좋겠지만, 우리 일행은 시간에 쫓겨 냉큼 그 차에 올라탔다.

    3층짜리 寧恩門을 지나 寧恩殿 뒤로 돌아가니 청태종의 무덤이 나타난다. 우리에게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안겨 준 바로 그 인물이다.
    인생의 무상함을 대변하려는 듯 그의 무덤은 대머리인 데다가 봉분 한 복판에는 큰 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있고, 주위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아무려면 중국 당국에서 능 관리를 이렇게 무성의하게 할까 싶어 연유를 물으니, 가이드 曰, 만주족의 전통이라고 한다. 그네들은 무덤의 풀을 깎으면 기가 빠져나간다고 생각한단다. 같은 이유로 나무도 일부러 심은 것이다. 영화 속에서 보던 청나라 사람들의 머리 모습을 어찌 그리도 닮았는지 웃음이 절로 난다.          

   능 구경을 하고 나오는데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니 웬 비? 이제 겨우 여행일정을 시작하는 마당인데... 공항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심양 안의 韓人村이라 할 서탑거리를 차를 탄 채 둘러보았다. 네온싸인의 불빛이 휘황찬란한 이곳이 심양 시내의 최대 번화가란다. 조선족 상인들의 경제력을 대변하는 것이다.

  연길(延吉)로

   공항에 도착할 무렵부터 하늘에서 이따금 번쩍이던 번갯불이 급기야 천둥과 호우를 몰고 왔다. ‘꽤나 후덥지근하더니만 시원하게 쏟아지네’ 하기에 앞서 걱정이 밀려온다. 연길행 비행기가 안 뜨면 어쩐다. 중국의 국내선은 떠야 뜨는 거라는데...
   우리의 일정을 총괄하는 세일여행사의 김창원 이사가 여기 저기 알아보더니 안심하란다. 북경행, 장가계행 비행기들은 취소되거나 연발하고 있는데, 연길행만은 예정대로 떠난다고 한다. 결국 예정시각인 오후 7시 40분보다 40분 늦은 8시 20분에 우리 일행을 태운 중국남방항공 CZ6601 편이 심양공항을 이륙하였다.

  심양은 중원에서 보면 북쪽의 변방인데 웬 남방항공인가 했더니, 남방항공에서 북방항공을 인수했다고 한다. 비행기는 뜻밖으로 훌륭하다. 심양에서 연길까지 1시간 거리인지라 프로펠라 비행기 쯤 다니려나 했는데, 그게 아니다. 서울에서 제주를 왕복하는 비행기를 연상시킨다. 중국의 국내선은 형편없다고 하는 소리는 다 옛날이야기인 듯하다.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는 중국의 모습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과연 언제까지 그들 앞에서 우쭐할 수 있을까.              

   연길에 도착하자 공항에 마중 나온 가이드 신장원씨의 인도로 곧바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모아산장”이라는 상호가 붙은 한식집이다.
   늦은 시각인데 종업원들이 입구에 도열하여 “어서 오세요”하고 반갑게 맞이한다. 홀에 들어서자 차려진 음식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산해진미가 따로 없다. 정신없이 먹고 나니 배가 부를 대로 부르다. 여행에 나서면 과식하는 버릇을 언제나 고치려나.

  이제는 호텔에 가서 자는 일만 남았다. 유원규부장님이 MBA는 좋겠다고 놀린다.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married but available"의 약자란다. 당신은 사모님을 모시고 와서 "married & best available" 아닌가? 그렇게 중국에서의 첫날밤이 깊어간다.
  
2005. 8. 13.

  연길(延吉)


   새벽 5시, 대우호텔의 모닝콜이 연길의 날이 밝았음을 알린다. 비록 IMF 외환위기 때 공중분해되어 버리긴 하였으나 대우그룹은 참으로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세계 곳곳에 진출한 기업임이 틀림없다.
   내가 공산권 국가로는 처음 간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첫날밤을 묵은 게 바로 대우호텔인데, 중국에서도 첫날밤을 대우호텔에서 보냈으니 묘한 인연이다. 지금 운영자가 대우그룹은 아닐 테지만 호텔은 깨끗하고 조용하다.
    
   짐을 꾸려 호텔방을 나서면서 팁으로 천 원짜리 한 장을 놓고 나왔다. 중국에서 처음 쓰는 돈이 한국 돈이라니...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이후 돌아갈 때까지 무슨 물건을 사든, 팁을 주든 다 한국 돈으로 지불하면 되었다.
   중국 돈 1위안에 한국 돈 150원, 미화 1달러에 한화 1,100원으로 계산하여 지불하면 된다. 상점마다 아예 한국 돈으로 값을 부르든가, 아니면 위안화로 먼저 말하고 다시 한국 돈으로 환산하여 부른다. 이는 심지어 심양의 공항 면세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에서 처음 출발 준비를 할 때 세일여행사 측에서 1,000원짜리로 2만 원 정도 가져가라고 한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침 식사 장소로 정해진 곳은 “전주비빔밥집”이다. 메뉴는 된장찌개. 다소 싱거운 듯하였으나 아침 식사로 손색이 없다. 사진에서 보듯 상호가 한글로 씌어 있다.
    한인촌에 있는 식당이어서가 아니다. 연길은 길림성의 연변조선족자치주(6개 시 2개 현으로 되어 있다)의 중심도시이다. 인구 36만 명 중 55%가 조선족이라고 한다. 그들은 한국말을 공용어로 사용한다. 따라서 한글 간판이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
    물론 한자로 된 간판이 없는 것은 아니나, 시내에 걸려 있는 대부분의 간판을 보면 한글을 먼저 쓰고 이어서 한자를 부기하는 형식이다. TV를 켜면 KBS, MBC, SBS가 모두 실시간으로 나온다. 위성으로 중계되는 것이다.
 
    하루 빨리 남북통일이 되어 육로를 통해 자유롭게 만주땅을 오갈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만주지역이 한반도의 경제권으로 흡수된다면 어찌 될까. 비록 형식상의 국경선은 압록강일지 모르나 사실상의 국경선은 그 옛날 고구려가 만주를 호령하던 시절로 돌아가지 않을까...
    이는 결코 허황된 생각이 아닐 것이다. 작금에 중국에서 소위 東北工程을 추진하는 것도 결국 그런 사태가 발생할 것이 두려워 미리 손을 쓰는 것이 아닐는지.  

   식사를 마치고 나와 시계를 보니 아침 6시가 조금 지났다. 이른 시각인데도 식당 맞은편의 제법 넓은 개천가에 노천시장이 열려 사람들이 북적인다. 구경삼아 잠깐 둘러보니 각종 야채가 주된 상품이다. 흘러간 한국노래를 담은 CD나 카세트테이프를 좌판에 놓고 파는 사람도 있다.
   상품의 질을 떠나 파는 사람 사는 사람 모두의 부지런함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들의 바로 그러한 근면성이 조선족 자치주의 번영을 가져온 원동력이 된 것이 아닐는지...
   개천 건너편에는 공원이 하나 있는데, 그 시각에 문을 연 것만도 대단하건만, 유모차를 끌고 산책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열린 입이 닫히지 않았다.    

  연길의 시가지는 우리나라 중소도시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특이한 것은 신호등에 앞으로 몇 초 후에 신호가 바뀔지 숫자가 표시된다는 것(참으로 유용한 아이디어 같다)과, 독일제 폴크스바겐 차가 많다는 것이다. 중국 자동차 시장에 일찌감치 진출한 덕을 톡톡히 보는 모양이다.
   여러 나라 제품의 각종 차가 경쟁하는 곳들 중에서 중국처럼 독일차가 강세를 보이는 곳은 독일 본토를 제외하고는 없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의 현대와 기아에서 만든 차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다.  

  연길에서 가장 성업 중인 곳이 노래방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에는 다소 씁쓸하다. 차를 타고 지나면서 보니 정말로 노래방이 많다. 한자어로는 거창하게 “練歌廳”이다.
   한국과는 달리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곳이 아니라 술도 마시고 온갖 ‘써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 써비스가 어디까지를 말하는지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서울에 가서 한 달만 일하면 이곳에서 2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그렇게 해서 번 돈이 이곳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덩달아 유흥가가 번성한다는 것이다. 손님 중에 관광객은 적고 대부분 이곳 주민들이라고 한다. 본래 옛부터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 민족 아니던가.  

  이곳에서도 미셀위가 위력을 떨치는 것이야말로 재미있다. 
골프가 대중화된 단계는 아직 아니지만, 사진에서 보듯 실내골프연습장(室內高尔夫練球場)이 있는데, 그 간판에 미셀위의 사진(오른쪽)이 보인다. 그녀가 확실히 세계적인 스타가 된 모양이다.    

  연길도 심양과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공사판이 벌어져 건물들을 짓고 있다. 그런데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아파트를 분양할 때 우리처럼 내부 인테리어를 다 해서 언제든지 들어가 살 수 있는 완벽한 상태로 입주자에게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골조만 지어주고 인테리어는 입주자가 직접 해야 한다고 한다. 그 비용이 아파트 값에 버금간다니 여기 건설업자들은 쉽게 돈을 버는 셈이라고나 할까.
   하긴 새 아파트의 멀쩡한 내부를 다 뜯어고치고 새로 인테리어를 하는 바람에 돈을 이중으로 낭비하는 일은 없어 좋을지 모르겠다.      

  이도백하(二道白河)로

  오전 7시, 연길 시가지를 완전히 벗어난 버스가 드디어 백두산을 행하여 길을 잡는다. 백두산의 바로 밑에 있는 작은 마을인 이도백하까지 4시간 30분 걸린다.
   차창에 어리는 풍경은 심양 주변과 영 다르다. 지평선이 보이는 평야지대가 아니라 야산과 들판이 교차하며 어울리는 고원지대이다. 야산의 꼭대기까지 밭으로 일궈 옥수수와 콩, 그리고 해바라기를 심었다.

   넓은 땅덩어리를 자랑하는 중국에서 그렇게 산꼭대기까지 경작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인지... 인구에 비해 경작지가 협소하기 그지없는 우리나라에서도 야산은 야산인 채로 있는데 말이다.
   13억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수출을 위해서일까? 아무튼 그 농사를 대부분 인력으로 한다니 쉬운 일이 아닐 성싶다.  

  고원지대의 중간중간에 몇 십호 정도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지붕이 붉은 색 일색이어서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띈다. 시골의 집들은 하나같이 벽돌로 된 벽에 붉은 기와를 올린 형태이다.    
  연길을 벗어나면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하염없이 온다. 올해 유난히 많이 온다고 한다. 백두산에만 안 오면 되는데...

   오전 8시 30분, 왕복 2차선의 길옆에 있는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오고가는 차들이 별로 없는 시골의 휴게소인지라 백두산 가는 관광객들이나 들를 만한 곳이다.
   명색이 ‘관광휴게소’라고 간판을 내걸긴 했지만, 이렇다 할 상품이 눈에 띄는 것은 아니다. 찐 옥수수가 1,000원에 3개, 백두산 등산로가 그려진 손수건이 한 장에 1,000원, 길림성을 중심으로 하여 요녕성과 흑룡강성의 일부가 나와 있는 교통지도가 한 장에 1,000원, 생수가 한 병에 1,000원...
   웬만한 것은 그저 1,000원이다(나중에 안 일이지만 손수건이나 지도는 500원에 깎아서 살 수 있다. 으흑...). 찐 옥수수는 맛이 그럴싸하다. 강원도 옥수수랑 별반 다를 게 없다.  

  1,000원을 주고 지도를 사서 본 다음에야 연길이 평안북도 위쪽이 아니라 함경북도의 바로 위 북간도 지방에 있다는 것, 동해바다가 지척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따라서 백두산은 연길의 남서쪽에 있다. 진작에 지리공부를 좀 더 할 것을...
   그나저나 그 지도상에 북한이 “朝鮮”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동해가 “日本海”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기분을 상하게 한다.

   이 ‘관광휴게소’에 딸린 화장실이 가관이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곳의 전통적인 화장실 모습이란다.
   푸세식의 이 화장실은 대소변기가 따로 구별되어 있지 않은데, 화장실 안으로 들어서면 낮은 칸막이가 2개 나타난다. 따라서 3명이 동시에 일을 볼 수 있다. 칸막이는 변기 위에 앉으면 옆 사람의 얼굴이 보일 정도로 낮다. 화장지를 주고 받기에는 편리하겠다.
   더 큰 문제는 정면에 문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3명이 큰 일을 보고 있을 때 화장실에 들어간다면 그 3명을 한 눈에 다 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큰 볼 일이건 작은 볼 일이건 여자들은 어쩌나...
   그나마 남녀 화장실을 나누어 놓은 것만도 다행이다. 나중에 백두산 등정 후 연길로 돌아가는 길에 꿀 파는 곳에서 들른 화장실은 그나마 좌우를 구분하는 칸막이조차 없었다.

  오전 11시 美人松(잎이 나무의 윗부분에만 남아 있는 소나무로 이도백하지역에 3,000그루 정도 있다고 한다) 지대를 지나 이도백하에 도착하였다. 백두산 아래 첫 동네이다.
    비가 여전히 내린다. 아침을 5시 30분에 먹은지라 배가 고프다. 민생고 해결을 위해 먼저 “고려식당(高麗飯店)”이라는 간판이 붙은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한식과 중식을 섞은 이른바 퓨전요리로 배를 불렸다. 백두산에서 많이 난다는 목이버섯의 맛이 특이하고, 상추쌈의 맛이 특히 좋았다. 된장에 절인 깻잎도 담백하여 좋았다. 이 식당의 화장실은 깨끗하고 칸막이도 제대로 된 수세식이어서 TV에 소개되기도 했단다.    

   이 식당의 출입문 앞에서 장뇌삼을 판다. 25년생 한 뿌리에 3만원, 15년생은 2만원이다. 식당에 들어갈 때부터 밥 다 먹고 나와서까지 중년의 남자가 계속 따라다니며 사라고 졸라댄다. 진짜 장뇌삼임을 증명하기 위해 꽃이 핀 채로 화분에 하나 담아 놓은 것도 있다.
   아무도 안 사니까 매우 선심을 쓰는 표정을 지으며 1만원에 15년생을 두 뿌리 준다고 한다. 순간적으로 여자분들이 마음이 동하는 눈치였는데, 가이드한테 사도 되냐고 물으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모르겠다고 얼굴을 돌린다.
   눈치가 이상하여 그냥 차에 오르자 가이드가 그제서야 안 사길 잘했다고 한다. 상인들 면전에서는 그들의 입장을 생각해 차마 말을 못했지만 전부 가짜라고 한다. 그런 장뇌삼은 1만원에 40뿌리도 살 수 있다고 한다. 백두산에 있는 동안 장뇌삼을 살 생각은 아예 말라고 당부한다.  
      
天池 가는 길

  12시 백두산 山門에 도착했다. 백두산을 오르는 제1관문이다. 통과하려면 입장권을 끊어야 한다. 버스에서 내려 문을 통과한 후에 다시 버스에 오른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는 셈인데, 걸어가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10여 분 올라가자 오른쪽으로 지하삼림(谷底森林)지대로 가는 입구가 나타난다. 땅 밑에도 삼림이 있다는 곳이다. 숲이 워낙 우거져 앞에 가는 사람이 그 곳에서 방귀를 꾸면 냄새가 흩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뒷사람이 고스란히 그 냄새를 맡아야 한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면서부터 교통체증이 심하여 버스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질 못한다. 30분 가량 그렇게 거북이걸음을 하다가 급기야 한 사람 두 사람 내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대부분 내려서 걷기 시작한다. 버스 안에 갑갑하게 갇혀 있기보다 공기 좋은 바깥에 내려서 걷는 게 오히려 더 빠르기 때문이다.

   천문봉과 장백폭포로 가는 길이 갈리는 지점에 주차장이 있는데, 여기서 차들이 이리저리 얽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김창원이사가 교통정리를 하여 겨우 이 지점을 빠져 나와 다시 버스에 올라 장백폭포 아래에 있는 마지막 주차장까지 갈 수 있었다. 백두산 전문가답게 그의 수완이 보통이 아니다.  

   마지막 주차장에서 내리면 이제부터는 두 다리만 믿어야 한다. 주차장 주변에 형성된 상가에서는 막걸리도 파는데, 안주로 천지에서 잡힌다는 산천어를 한 접시에 3만원 받는다고 써 붙여 놓았다.
    상가지역을 지나 위로 오르면 왼쪽으로 바위지대에 물이 흐르는데 그 위로 더운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노천온천지대이다. 그 온도가 무려 83℃이다. 그래서 주변에 온천장을 볼 수 있다. 그 물에 익힌 달걀이라 하여 판으로 놓고 팔기도 한다(1,000원에 3개).  

  이 온천지대를 통과하면 다시 매표소가 나타난다. 산문을 통과할 때 분명 입장료를 냈건만 장백폭포를 보고 싶으면 또 돈을 내란다. 제2관문인 셈이다. 아까 낸 돈은 말하자면 백두산 입장료일 뿐이다.
   고속도로도 아닌 왕복 2차선의 일반도로에서도 통행료를 받는 나라이니 핑계가 없어 돈을 못 받는다는 말이 맞다. 아무튼 구실만 붙일 수 있으면 돈을 받는다. 이처럼 돈을 밝히는 나라가 공산주의국가라는 것이 믿기지를 않는다.

장백폭포  
  
  매표소를 지나 오른쪽으로 다리를 건너면서부터 장백폭포에서 내려온 물이 흐르는 계곡을 만난다. 하얀 포말을 지으며 소리내어 흐르는 급류이다. 때로는 계곡을 따라, 때로는 평지를, 때로는 산길을 오르다 보면 한 순간 거대한 폭포를 마주하게 된다. 바로 장백폭포이다. 시간은 흘러 어느 덧 오후 1시 30분.

   중국 사람들은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부르는 까닭에 이 폭포도 장백폭포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장백산을 백두산이라고 부르니 이 폭포도 백두폭포라고 불러야 한다고 김이사가 다소 씨니컬하게 말한다.
   만주의 주인이었던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고 그 상태에서 우리의 역사가 이어져 내려왔다면(중간에 왕조는 바뀔망정) 두 말 할 것도 없이 ‘백두폭포’이리라.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높이 68m의 거대한 물줄기가 연출하는 장관을 보기를 기대하였건만,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비, 그 비를 만들어 내는 구름이 야속하게도 폭포를 가리고 있다. 바람이 구름을 잠시 밀어낸 틈을 타서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폭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장백폭포에서 천지까지는 다시 1시간을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올라가기에 앞서 제3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천지를 보려면 또 입장료를 내야 하는 것이다. 돈, 돈, 돈... 이제 여기만 통과하면 더 이상 안 내겠지 하였지만, 그게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매표소를 지나면 곧바로 계단이 시작된다. 무려 900여개에 이르는 살인적인 계단이다. 정확히 몇 개인지 셀까 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오르다 보면 숨이 차서 헐떡일텐데 무슨 힘과 정신에 그것을 다 세랴.
   경사가 거의 70도는 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중간부터는 동굴형태를 띠는 까닭에 후덥지근하기까지 하여 더욱 힘들다.
   그런데도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 계단을 오르려면 앞 사람 엉덩이만 보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구름과 안개로 인하여 한 치 앞을 분간키 어려운 악천후이건만 올해 들어 오늘 사람이 최고로 많이 몰렸다고 한다.
    광복 60주년을 맞이하여 민족의 영산을 찾는 사람이 우리만이 아닌 모양이다. 그러면 중국인들은 여기를 오를 때 무슨 생각을 할까?    

天池

   계단을 다 오르고 나면 그 후부터는 거의 평지나 다름없다. 화산암이 깔린 돌길 아니면 초원길이다. 때로는 달문을 통과한 천지물이 장백폭포를 향해 흘러가는 시내를 만나기도 한다. 물의 색깔은 비가 많이 온 탓인지 흙탕물 비슷하다.
   짙은 구름 속에 놓인 길을 가야 하므로 자칫 길을 잃기 쉽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리고 앞사람을 쫓아가야 한다. 그러다 마지막에 얕은 둔덕을 하나 넘자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2005. 8. 13. 14:30.

   드디어 천지에 도착했다. 너무나 야속한 구름이 점점 더 짙어가지만, 그래서 저 물 건너 있을 장군봉(2,744m. 백두산의 최고봉이다. 북한에서는 근래에 해발고도를 다시 측량하여 2,749m로 표시한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치졸하기 짝이 없는 일본인들이 將軍峰을 兵士峰으로 깎아내려 불렀다)을 전혀 볼 수가 없지만, 도대체 그 크기가 얼마만한지(면적 9.17㎢, 둘레 14.4km), 그 수심이 얼마나 깊은지(최고 384m, 평균 213.3m)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마침내 천지에 도달하였다는 기쁨에 가슴이 울렁인다.

 

 
     그 물은 왜 그리도 차며, 그 파도소리는 왜 그리도 시원한가. 안경에 서리는 물방울은 빗물인가 눈물인가. 로밍하여 가지고 간 휴대폰으로 서울의 집사람에게 전화를 하여 천지에 도착하였음을 알린다.          

    “天池”라는 붉은 글씨가 쓰인 표지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데, 웬 젊은이가 다가오더니 돈을 내란다. 3장 찍는데 1,000원! 표지석 값이다. 왕서방의 장삿속에 그만 혀를 내두르고 만다. 대동강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도 이만은 못하였으리라. 그 표지석 옆에서 사진을 찍다 보면 파도가 밀려와 아랫도리를 적시게 된다. 그 파도를 피해 순간적으로 사진을 찍는 일이 생각 밖으로 어렵다.

    해발고도(2,257m)가 높은데다 비바람이 몰아쳐 손이 곱을 정도로 춥다. 반팔 옷에 비옷만 걸친 것이 후회스럽다. 두툼한 긴팔티셔츠를 속에 받쳐 입을 것을... 추위에 떨망정 떠나기가 싫어 물가를 맴돌고 있노라니, 김이사가 이젠 내려가야 한다고 길을 재촉한다. 생수병 가득히 천지물을 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발길을 돌린다.

   앞에 가는 이호원 부장님의 뒤를 따라 몇 발짝 못 갔는데, 갑자기 중국말을 쓰는 꾸냥 일단이 몰려와 길을 비켜주고 나니 이부장님이 안 보인다. ‘그 사이에 벌써 멀리 가신 모양이네’ 하면서 부지런히 발길을 옮기는데 아무리 가도 보이지를 않는다.
   ‘이 양반이 축지법을 쓰시나?’ 장백폭포에 가면 만나려니 했건만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인다. 내가 이렇게 뒤쳐졌단 말인가, 다소 이상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도리가 없는지라 쉬지 않고 주차장까지 내려왔는데, 일행이 여전히 아무도 안 보인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기다리고 있는 버스에 올라 젖은 옷을 갈아입고 혹시나 싶어 도로 한 300미터 쯤 올라가자 그제서야 일행이 나타난다. 천지 바로 밑에 길옆에 있는 간이매점에서 농심 사발면을 하나씩 먹고 오는 길이란다. 짙은 구름 속에 서둘러 내려오다 그만 내가 일행을 놓친 것이다. 다들 미안해하였지만 笑而不答心自閑이었다. 나는 본래 라면, 특히 사발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장백산국제관광호텔

   오후 5시, 지친 몸을 이끌고 호텔에 도착했다. 마지막 주차장 밑에 나란히 있는 대우호텔과 장백산국제관광호텔이다. 백두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호텔인 셈이다.   
   대우호텔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고, 장백산국제관광호텔은 조총련계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곳이다. 객실 사정으로 인하여 이주흥, 유원규 두 부장님만 대우호텔에 여장을 풀고 나머지 일행은 장백산국제관광호텔을 숙소로 정했다.

장백산호텔 안에 대중온천탕이 있다. 83℃의 노천온천수를 끌어들여 탕을 만든 것이다. 끌어오는 동안에 식었는지 물이 뜨겁지 않다. 건물 밖으로 자그마한 노천탕도 만들어 놓았다. 성분은 유황온천이다. 산행 후의 피로를 풀려면 좀 더 뜨겁고 안락하면 좋으련만 시설이 낡아(우리나라의 장급 온천장 수준) 오래 있을 생각이 안 든다.  

 
    장백산호텔 마당에는 “장백산에 오르지 않으면 평생 유감이다(不登長白山終生遺憾)”라는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1988. 8. 1. 등소평이 이곳에 투숙하고 남긴 말이라고 한다. 

  
   저녁 6시 30분, 뷔페식으로 마련된 식사를 마치고 로비에서 호텔측이 제공한 차를 한 잔 마신 후 곧바로 객실로 올라갔다. 다음 날 일출을 보려면 새벽 2시 30분에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인재 부장님이 왔으면 분명 나나 이호원부장님을 祭物로 하여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했을 텐데...  
   객실에서 TV를 켜 국내 소식을 알아볼까 하다가 그만둔다. 여기까지 와서 도청이 어떻고, 아시아나 조종사 파업이 어떻고... 하는 즐겁지도 않은 뉴스를 굳이 볼 필요는 없다.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거기에 비례하여 백두산의 밤이 깊어간다. 山深水深客愁深이런가.    

2005. 8. 14.

  꿈은 사라지고


  새벽 2시30분임을 알리는 전화벨소리(모닝콜)에 눈을 떴다. 전기장판의 온도를 최고등급으로 해 놓고 잔 덕분인지 몸이 개운하다. 이곳은 한 여름에도 추워서 침대 위에 전기장판을 깔아놓는다. 따스한 이불 속에서 나오기가 싫었지만, 백두산의 일출을 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일출을 보고나서 다시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비옷만 챙겨 로비로 나갔더니 일행이 금새 다 모였다. 바깥에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다. 김이사에게 일출을 볼 수 있겠냐고 물으니 가봐야 안다고 한다. 하긴 하루에도 날씨가 백두 번(102회) 변한다 하여 백두산이라고 한다는 우스개소리마저 하는 마당이니 그 누가 알랴.          

  그나저나 일출을 보는 장소인 天文峰(2,670m)으로 우리를 데려갈 짚차가 오지를 않는다. 돈벌이도 좋지만 운전사들이 아직 자는 모양이다. 결국 예정보다 30여분 늦은 새벽 3시 26분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일본의 미쓰비시에서 만든 짚차(파제로. 현대 갤로퍼의 元祖이다) 3대에 나누어 탔는데, 차 성능이 좋아보였다.

 
   천문봉을 가려면 일단 산문 쪽으로 내려가다가 중간 삼거리에서 갈라져 다시 올라가야 한다. 그 시작 지점에 사진과 같은 문이 하나 세워져 있다. 천문봉은 본래 일출보다는 낮에 천지를 쉽게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니, 그 문에 “天池”라는 글씨를 써둔들 이상할 게 없다.
   이 문은 그런 안내판의 기능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기능을 한다. 다름 아닌 입장료 징수처이다. 그런데 워낙 이른 새벽, 그것도 비가 오는 판국이라 그런지 돈 받는 사람이 없다.
“중국에 공짜도 있네!”

    깜깜한 높은 산길을 잘도 달리는 운전사의 날랜 솜씨 덕분에 새벽 3시 48분 천문봉 주차장에 도착했다. 짚차에 설치된 온도계가 바깥 기온이 14℃임을 알려준다.
   차에서 내리니 아직 칠흑같이 어둡다. 해가 안 떠서인가 보슬비를 내리고 있는 구름 때문인가 가늠할 길이 없다. 정상까지는 다시 걸어서 10분 거리다. ‘정상에 다다르면 저 비가 그치고 해가 쨍하고 떠오르겠지’ 하는 소박한 희망을 가슴에 품고 미끄러운 길을 겨우겨우 올라갔건만...
 
  천문봉(천지 주변에는 16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9개는 북한쪽에, 7개는 중국쪽에 있다. 천문봉은 중국쪽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다) 정상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는 것은 장관을 연출하며 떠오르는 태양이 아니라 천둥번개였다. 갑자기 굵어진 빗줄기가 사정없이 쏟아진다.
   저쪽이 동쪽이어서 그 쪽에서 해가 떠오르고, 저 아래 쪽에는 천지가 있다며 가리키는 김이사의 손가락을 따라 눈을 돌리지만, 보이는 것은 그 손가락뿐이다. 五里霧中은 고사하고 ‘한치雲中’이라고 함이 더 적절한 표현이리라.
 
  옛사람을 흉내내 시를 한 수 읊어본다.
 
  天池를 보고자꼬 허위허위 왔건마는
  風雨만 섞어치고 하늘못은 간 데 없네
  오호라, 指向處所가 그곳인가 하여라.

  일출을 보며 천지를 감상한다는 야무진 꿈이 빗방울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김이사의 제의로 애국가를 부르고 “대한민국만세!” 삼창을 한 후 서둘러 호텔로 돌아왔다. 이불 속은 여전히 따뜻하다.

小天池

   잠깐 눈을 붙였다가 아침 6시에 다시 일어나 호텔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한 후 6시 50분에 여장을 꾸려 길을 나섰다. 이번 백두산 등정의 주된 목표인 야생화트레킹을 시작한 것이다.
   김이사의 계획에 따르면 용문봉까지 올라가 천지를 보고(세번째 시도이다) 협곡을 건너 돌아내려오는 일정으로 예상 시간은 5-6시간. 오고가는 길에 야생화를 많이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남들이 잘 안 가는 숨겨진 비경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이를 위해 이도백하에 사는 백두산 트레킹 전문가(물론 조선족이다)를 가이드로 모셔 왔단다. 이름은 “안의허”. 그냥 이어서 부르다 보면 “아녀”가 된다고 웃는다.  

  출발지는 호텔 맞은편의 소천지입구이다. 웬일로 아직도 매표소가 닫혀 있다. 두 번째 공짜! 무심한 하늘에서는 비록 가늘어지긴 하였으나 상기도 빗방울이 오락가락한다.
    매표소를 지나 계곡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자 작은 연못이 하나 나타난다. 시멘트로 만든 표지석에 “銀環湖”라고 씌어 있다. ‘은빛의 띠를 두른 호수’라는 뜻이려니 하면서 이 작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연못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은 너무 과장이 심하지 않나 하고 혼자 생각해본다. 그런가 하면 매표소 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長白湖”라고 쓴 철제 표지판도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작은 연못이 소천지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고 따라서 유심히 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연못 옆에 있는 약사왕(藥事王) 동상에 눈길이 갔다. 까만 얼굴의 생김새나 노랗고 붉은 색의 옷을 입혀놓은 것으로 보아 불교의 약사여래불은 아니고 필시 도교나 토속신앙의 대상일 텐데, 이곳에다 하필이면 병을 고치는 약사왕을 만들어 놓은 이유가 뭘까. 그 앞에서 기도를 하면 만병이 다 치유되는 것일까.

   연못을 지나면 곧바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등산을 하다 보면 늘 만나는 깔딱고개인 셈이다.
   우거진 나무숲 속에 나 있는 좁은 등산로가 그 동안 내린 비로 제법 미끄럽다. 어제 추위에 떤 경험이 있어 오늘은 긴팔 옷을 입고 그 위에 비옷까지 걸쳤더니 얼마 안 가 땀이 등을 적신다. 바깥에서는 빗물이, 안에서는 땀이 협공하는 형국이다. 오늘도 꽤나 힘든 일정이 되겠군.
 
   그나저나 소천지는 어디 있는 거야? 내가 투덜대는 소리를 들었는지, 옆에서 걷고 있던 고영한 부장이 한 마디 한다.
“어, 민부장, 소천지 아까 지나 왔잖아?”
   아니 내가 언제 소천지를 지나왔단 말인가. 아까 본 것 연못은 은환호, 장백호 이런 이름의 연못 아닌가.
“바로 그 장백호라고 씌어 있는 표지판의 내용에 소천지로도 불린다고 되어 있었어.”
맙소사. 내용을 유심히 볼 걸...

   나중에 하산길에 그 표지판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진에서 보듯이 한문으로 설명을 하여 놓았는데, 그 대충의 내용인즉,
    ‘소천지, 은환호, 東浩라고도 불린다. 타원형의 둘레 260m, 담수면적 5,380㎡, 수심 10m로 호수물이 1년 내내 마르지 않으며, 맑은 녹색으로 주변에 밀림이 우거지고 100가지 풀이 자란다. 경색이 장관으로 모양이 천지를 닮았다’는 것이다.
     결국 입구에는 ‘小天池’, 안으로 들어서면 ‘長白湖’, 그리고 물가까지 가면 ‘銀環湖’, 이렇게 세 가지 이름을 모두 써 놓은 셈이다. 누가 그랬던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용문봉(龍門峰)

    깔딱고개를 벗어나자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인다. 더 이상 나무들이 자라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해발고도가 꽤나 높은 모양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초원지대와 저 멀리 보이는 협곡의 절벽들, 백두산에 와서 처음으로 대하는 장면이다. 빗줄기가 다소 가늘어지고 구름이 비켜가고 있기에 가능해진 모습이다. 고영한 부장의 우산을 받쳐 쓰고 그 안에서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사진 속 인물들의 복장이 눈길을 끄는데, 이주흥부장님 부부(사진의 왼쪽)는 마치 중세 영화에 나오는 수도사 같다. 天路歷程이라도 하는 것일까. 산행이라면 入神의 경지에 다다른 분들인지라 비옷은 물론 배낭이 젖는 것을 막는 가리개에 이르기까지 가장 완벽한 장비를 구비하셨다. 물을 쏟아 붓듯 비가 온다 해도 걱정이 없을 것 같다.  

   소천지를 출발 한 지 1시간쯤 지났다. 김이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왼쪽의 깎아지른 협곡에는 장백폭포가, 오른쪽에는 옥벽폭포가 한 눈에 보인다. 두 폭포를 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란다. 억수같이 퍼붓는 빗줄기만 아니면 멋진 사진을 한 장 남기련만...

   너덜길도 지나고, 풀밭길도 지나고, 빗물을 잔뜩 머금은 늪지대도 지나는 동안 구름나그네의 등산화 안이 한강수가 되어 버렸다. 비바람이 불어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데다 딴에는 방수가 된다고 생각하고 가져온 옷마저 안까지 젖어 축축한 것이 여간 거추장스러운 게 아니다.
    그런 판국에 등산화마저 그러니 걷기가 꽤나 힘들다. 벗어서 물을 뺄까 하다가 곧 다시 가득 찰 거라고 생각하니 괜한 수고만 할 뿐이라 그만두었다. 雨中登山을 위한 필수장비로 방수가 완벽하게 되는 비옷과 등산화의 필요성을 절감해야 했다.    

    지친 다리를 이끌고 오르기를 두 시간, 앞장 서 가던 김이사가 천지가 보인다고 소리친다. 부리나케 다가가 그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자 장군봉과 그 밑의 파란 물빛 천지 일부가 눈에 들어온다. 하늘을 뒤덮은 구름이 이동하다가 잠깐 비킨 사이에 천지가 부끄러운 듯 살며시 자태를 드러냈다.   
     습관적으로 얼핏 시계를 보니 8시 45분. 불과 5분 동안에 지나지 않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장군봉과 천지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은 쏟아지는 비 때문에 불가능하다. 비가 참으로 지겹게 온다.    

     오전 9시 10분, 마침내 용문봉 정상(2,595m)에 도착했다. 소천지로부터 2시간 20분 걸린 셈이다. 천문봉 정상보다는 주위가 환하였지만 분명 발아래 있을 천지는 여전히 안 보인다. 간혹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나마 보일 듯 말 듯 하긴 하지만, 그걸 가지고 천지를 보았다고 한다면 그건 단지 보고 싶은 마음의 다른 표현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여러 부장님들이 힘들게 싸가지고 온 초콜렛, 과자, 커피 등으로 체력을 보충하고 등산화의 물도 빼고 하며 추위를 무릅쓰고 35분 동안 정상에 머물면서 혹시나 날이 개지 않을까 기대하여 보았지만, 그럴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백두산은 스무 번 올라야 한 번 천지를 볼 수 있다는데 초행길에 바로 보려고 하니 지나친 욕심이런가... 백두산 호랑이로 불렸던 김종서 장군의 기상을 마음속에 그려보며 만세삼창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냐
어떻다 인각화상(麟閣畵像)을 누가 먼저 하리요

  ‘사운드 오브 뮤직’과 ‘요세미티’

     오전 9시 45분, 예정대로라면 용문봉 정상에서 협곡을 왼쪽으로 돌아 내려가야 하지만, 하늘을 덮은 구름과 몰아치는 비바람으로 인하여 결국 올라온 길로 도로 내려가기로 했다.
    다행히 빗줄기는 가늘어졌지만 갑자기 더욱 짙어진 구름에 베테랑가이드 안의현씨마저 잠시 길을 잃을 지경이다. 앞사람을 놓치지 말라고 계속 당부한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내리뫼길을 재촉하는데, 이게 웬 일인가, 앞 사람이 보이고 그 앞사람이 보이고 이어서 그 앞의 초원이 보이고 협곡이 보인다. 하늘이 개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용문봉 정상으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갈 길이 바쁘고, 체력도 소진되고, 무엇보다도 되돌아갔을 때 정상의 하늘이 어떨지 알 수 없는 노릇이기에 아쉬운 발걸음을 재촉하는 수밖에 없다.

   하늘이 갠 후의 초원지대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의 배경 그 자체이다. 곳곳에 피어 있는 들꽃들도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모두들 감탄사를 연발하며 기념사진 촬영하기에 바쁘다. 안의현씨의 입에서 꽃이름들이 술술 나온다. 들을 때는 신기해했는데,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라 지금은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옥벽폭포를 타고 내려온 물이 흐르는 계곡에 손을 담가보았다. 수정같이 맑은 물이 얼음처럼 차다. 물속에서 10초를 견디지 못하겠다.
     저 물은 흘러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깊은 산 산모퉁이에 작은 물방울이 하나 떨어져, 그 물방울이 모이고 모여 내를 이루고, 그 냇물이 모여서 큰 강을 이루니, 그렇게 흐르고 흘러 넓은 바다로 가리라. 마치 우리네 인생이 그러하듯이...

      초원지대를 한창 내려오다 오른쪽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이어지는 지점에 다다르면 저 멀리 아래로 장백폭포에서 내려온 물이 여인네 가르마 같은 모습으로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거대한 협곡의 가운데를 관통하여 물이 흐르는 것이다. 마치 미국의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온 듯한 착각을 하게 한다. 협곡 안에 구름이 떠다닐 정도이니 그 높이가 실로 굉장함을 알 수 있다.
     대자연이 연출해내는 이 절경을 나의 무딘 筆舌로는 다 그려내기가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이에게 말하고 싶다.

“직접 가서 보라고”
  
     이리저리 눈길을 돌리고 계속 감탄사를 연발하며 내려오는데, 유원규 부장님이 혼자 부지런히 걷고 계신다. 사모님은 저만치 뒤에 오시는데... 호텔에다 꿀항아리를 숨겨두고 온 것도 아닐진대 어찌 혼자 가시냐고 물으니, 산만 만나면 “낑낑대고 올라갔다가 후딱 내려가는 버릇이 도졌다”고 하시며 미소를 지으신다.
    그 미소에 숨겨진 깊은 뜻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MBA와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 건가? 사모님이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듣고는 당신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라고 하신다. 이 또한 무슨 소리인지...

    하산을 끝내고 호텔에 도착하니 11시 30분이다. 서둘러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겨 나왔다. 호텔 아래쪽에 있는 장백산 식당으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었다. 식당 앞에 주차되어 있는 버스의 앞 유리창에 “전교조팀”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그들은 무엇을 보고 갈까...
    시장이 반찬이라고 정신없이 밥을 먹고 나니 배가 너무 부르다. 이젠 돌아갈 일만 남았으니 그런들 어떠랴.

  다시 연길, 심양으로

    12시 50분, 백두산을 뒤로 하고 연길을 향해 출발했다. 이따금 비가 뿌리기도 했지만 어제와는 달리 전반적으로 날이 개어 차창에 어리는 풍경들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카메라의 셔터를 부지런히 눌러 그 풍경들을 사진으로 남긴다.
 
   도중에 백두산에서 자라는 피나무를 이용한 꿀을 파는 곳을 들렀으나, 쇼핑은 애당초 여자들의 몫인지라 남자들은 먼발치에서 잡담을 하며 구경만 했다. 이곳의 화장실이 놀라자빠질 만하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자다 깨다 하니 연길이다. 버스가 시내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외곽의 만수대기념관 앞에 선다. 북한 ‘인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토산품 상점이다. 건물 전면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예쁜 ‘안내원동무’가 못 찍게 한다. 할 수 없이 떠나면서 차창을 통해 건물 2층의 일부만 카메라에 담았다.

     기념관 안에는 마치 그림을 그린 듯한 자수들이 판매용으로 전시되어 있는데,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주제로 한 것도 있다. 북한에서도 이제는 기독교가 용인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오로지 돈 때문인가? 모를 일이다. 그런가 하면 1년 내내 꽃이 핀다는 ‘김정일화’를 수놓은 것도 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안내원 아가씨는 무엇보다도 우황청심환의 판매에 열을 올린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파는 ‘우황청심환’에는 사향이 안 들어 있는 데 비하여 이곳에서 파는 ‘우황청심원’에는 진짜 사향이 들어 있단다. 가격은 10알짜리 한 상자에 12만원(110불)이다. 그 밖에 상황버섯도 판다. 200그램 한 봉지에 역시 12만원이다. 금강산에서도 그랬듯이 북한 상점에서도 우리 돈이 그대로 통용된다.    
        
     연길 시내 ‘류경호텔’에 있는 북한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소의 위(양)로 만든 불고기, 북어찜, 명태알찜 등의 요리가 나왔는데, 전반적으로 맵고 짜다. 기다리면 북한 여자들이 펼치는 춤과 공연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시간이 없어 그냥 나왔다. 심양행 비행기를 타기 전에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발 맛사지. 별도의 요금(7,000원에 불과하지만)을 내야 한다면 모를까 처음에 여행사에 지불한 여행경비(1인당 113만원)에 이미 그 비용이 포함되어 있는지라 마다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나는 2003년 겨울에 베트남의 하노이에 갔다가 한 번 해 본 경험도 있다.

     우리 일행이 간 곳은 “大宇足道”라는 간판이 붙은 규모가 방대한 곳이다. 아니 대우그룹에서 발맛사지 업소까지 차렸단 말인가 했더니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곳에서까지 상호에 ‘大宇’를 붙이는 것을 보면 과거 대우그룹의 명성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것 같다. 그런 그룹의 총수였던 김우중씨는 지금 영어의 생활을 하고 있다. 역시 덧없기 짝이 없는 게 인생이다.  

      한 방에 3명씩 들어가 침대에 누우면 10대 후반 내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맛사지사가 들어와 어깨와 등을 주물러준 다음 발을 씻기고 정성스레 맛사지를 해준다. 손님이 남자이면 여자 맛사지사가 하고, 손님이 여자이면 남자 맛사지사가 한다. 그래야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고 한다.
     맛사지 하는 동안 보라고 TV를 켜서 채널을 한국방송에 맞추어 주지만 몰려오는 피로에 그만 잠이 들고 만다. 맛사지를 끝내고 나오는데 사모님들이 볼멘소리를 한다. 오늘따라 여자 손님이 많이 몰려 남자 맛사지사가 모자라 여자 맛사지사가 맛사지를 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공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남자 맛자지사를 구하기가 힘들어진다고 한다.

     맛사지를 받고 나와 곧바로 공항으로 이동했다. 밤 9시 20분에 심양으로 가는 비행기가 떠난다. 중국남방항공 CZ6602 편이 정시에 출발한다. 1시간의 비행 끝에 심양에 내려 샹그릴라 호텔에 투숙하니 밤 11시 30분이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이지만, 침대에 눕자마자 잠에 떨어진다.

2005. 8. 15.

  귀국


    아침 5시 30분, 기상을 알리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정말 강행군이다. 커튼을 제치고 창밖을 보니 날이 훤하게 밝아온다. 뷔페식 식당에 내려가니 음식이 다양한데, 입이 깔깔하여 간단히 요기만 하고 짐을 챙겨 나왔다. 버스가 떠나기 전에 잠깐이나마 길거리를 구경하려는 심산이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아직은 거리가 한산하다. 지난밤에는 몰랐는데 우리가 투숙했던 샹그릴라 호텔의 앞이 바로 번화가이다. “新世界百貨”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와 처음에는 신세계백화점이 진출한 줄로 알았다. 그런데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그렇지는 않고 그냥 중국백화점으로 심양에서는 물건 값이 가장 비싼 곳이라고 한다.

      공항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첫날 못 보았던 새로운 건물을 하나 발견했다. 삼성에서 시공한 “來美安” 아파트가 그것이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중국 대륙에다 물건만 파는 줄 알았더니 아파트건설시장에도 진출하여 있음을 뒤늦게 알았다. 삼성 같은 대기업만 진출한 것이 아니고 중소 아파트업체도 진출하여 성황리에 아파트를 짓고 있다고 한다. 자랑스런 한국인들이 아닐 수 없다.  

      공항에 도착하여 시간이 남아 기념품이나 살까 하고 면세점을 돌아봤는데, 이렇다 할 것이 눈에 안 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말과 한국돈으로 물건을 살 수 있다는 것이 단지 놀라울 따름이다.

    아침 9시, 서울발 중국남방항공 CZ681편이 정시에 떠난다. 1시간 35분 후면 인천공항이다.

글을 마치며

     3박 4일간의 여행길에 同苦同樂한 분들의 건강과 행복을 빈다. 아울러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을 위하여 세심한 배려를 해 준 세일여행사의 김창원이사님 이하 관계자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끝으로 백두산 등정에 관심을 가지고 이 글을 읽는 분들을 위해 한 마디 덧붙인다.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하였지만, 백두산은 날씨 변화가 엄청 심하다. 기후 관계상 등산이 6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사이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데, 당연히 비가 많이 오는 때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대비를 철저하게 하여야 한다. 완전 방수가 되는 비옷, 배낭과 등산화가 꼭 필요하다. 그리고 정상에 오르면 날씨가 매우 춥기 때문에 두툼한 긴팔 옷을 준비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한편, 트레킹을 할 요량이면 반드시 전문가이드가 필요하다. 구름이 짙으면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