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고 또 빌면(설악산 : 오색--대청봉--백담사)

2010.02.16 12:31

범의거사 조회 수:11057

 


               빌고 또 빌면     

                           

沃峰禪師님,

가을이 오는 길목입니다. 한동안 안부 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소생은 뜻밖에 도서관장으로 발령을 받아 경황없는 나날을 보내다가 지난 주말에 모처럼 설악산을 다녀왔습니다. 지난 6월부터 벼르던 산행이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계속 미뤄 오던 것을 마침내 실행에 옮긴 것이지요.
  금요일(9월 1일) 퇴근 후에 차를 몰고 양평, 홍천, 인제, 미시령, 속초를 거쳐 오색에 도착하니 밤 12시가 넘더군요. 한계령이 지난 7월의 집중호우로 길이 망가져 통행이 불가능한지라(올 연말이나 되어야 복구가 끝난답니다) 돌아가는 바람에 늦어진 것입니다.

  이런저런 상념으로 뒤척이느라 잠을 제대로 못 이루다 겨우 눈을 붙였는가 싶었는데, 휴대전화기의 모닝콜 소리가 잠을 깨우더군요. 오색에 식당은 많았지만 이른 아침(6시 30분)부터 문을 연 곳이 없어 그냥 물로 배를 채우고 산행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름 휴가철이 끝나고 가을 단풍철이 시작되기 전의 시기인지라 아마도 식당들도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모양입니다. 오색에 있는 유일한 호텔로 아침식사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던 그린야드호텔마저 장마 피해를 복구하느라 역시 문을 닫은 상태였습니다.  

  오색에서 대청봉을 오르는 등산로(총 5km)는 찾는 이가 적어 호젓하더군요. 계곡을 따라 난 길이 아니어서인지 장마 피해도 거의 없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갈 줄 모르는 다람쥐만이 한양 나그네를 반가이 맞아 주었습니다. 처서(處暑)도 지났고 명색이 9월의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경사가 심한 오르막을 걸어도 숨은 가쁠지언정 덥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초콜렛만 가지고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역부족이었기에, 도중에 만난 어느 친절한 등산객으로부터 건네 받은 오이가 참으로 一味였습니다. 평소에 높은 산에 오를 때는 이것저것 준비를 많이 하였는데, 이번에는 무엇에 홀렸는지 대충 길을 나선 것이 후회되었지요.

  나이 때문일까요, 아니면 굶주림 때문일까요, 등산로 중간쯤에 위치한 설악폭포를 지나 대청봉 정상(해발 1,708m)에 도착하였을 때는 당초 예정했던 시간보다 많이 지체되어 시계바늘이 이미 11시를 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일이 되려고 날씨가 정말 화창하여 주위의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은 물론이거니와 멀리 속초시와 동해바다까지 모두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대청봉은 이번에 3번째로 등정한 것인데, 정상에서 동해바다를 보기는 처음입니다. 천지신명께 감사할 일이었지요.   
   정상에는 오색만이 아니라 천불동이나 백담사 쪽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있어 제법 붐볐습니다.

  선사님,

  금강산도 食後景이라고 했나요? 배고픈데 장사 없다고, 대청봉의 경치가 아무리 빼어난들 주린 배를 채우는 일이 급했답니다. 서둘러 하산을 하여 중청을 거쳐 소청에 있는 대피소로 갔습니다. 지도상으로는 금방 도착할 것 같은데, 왜 그리도 멀게만 느껴지는지요. 백담사에서 봉정암을 거쳐 소청, 중청을 지나 대청으로 오르는 길을 1979년 여름에 친구와 둘이서 다녀간 후 27 년만에 그 반대방향으로 다시 밟게 되어 당연히 감회가 새로웠는데, 그 감회를 즐기기에는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소청의 대피소는 중청의 그것보다 규모는 훨씬 작아도 後者와는 달리 햇반, 봉지라면, 감자떡, 김치 등을 팔았습니다. 물론 각종 음료와 술도 있지요. 햇반에 더하여 컵라면이 아닌 정식라면을 김치를 곁들여 먹는 즐거움이 무엇보다도 컸습니다. 이 대피소는 국립공원관리사무소가 아닌 민간인이 운영하는 까닭에 이처럼 간이식당의 역할을 충분히 하는 듯하였습니다. 이용자의 입장에서 보면 서비스업종은 역시 민영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였습니다.

   배가 부르니까 경치가 비로소 제대로 보였습니다. 화창한 날씨와 설악산의 기암괴석과 계곡들이 빚어내는 빼어난 절경에 새삼 감탄하며 봉정암으로 향했습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구해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5대 적멸보궁 중 하나인 봉정암은 27년 전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담한 암자가 아니라 규모가 꽤나 큰 사찰이었습니다. 경내가 이미 내방객들로 가득하건만 수렴동계곡 쪽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올라오더이다.

   해발 1,224m나 되는 곳에 이런 거대한 절이 있다는 것 자체가 佛力인가요? 644년(신랑 선덕여왕 13년)에 봉황의 안내를 받아 이곳에 절터를 잡은 자장율사의 功力이 실로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부처님의 뇌에서 나온 사리를 모신 5층석탑(‘불뇌보탑’, ‘불뇌사리탑’ 등으로 불리더이다)은 붕괴를 막기 위해서인지 사방에 지지대를 설치하였더군요. 다른 탑들과는 달리 특이하게 기단이 없어 마치 바위 속에서 솟아난 것처럼 보이는 이 탑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시달린 탓인지 지붕돌의 가장자리가 뭉툭해져 있었습니다. 탑 안에 계실 부처님께 오체투지(五體投地)로 큰절을 올리며 평소 마음속에 간직하여 온 소원을 빌고 또 빌었습니다. 이루어질까요?
  
  선사님,

  오후 1시 50분, 봉정암을 떠나 백담사를 향해 발을 내디뎠습니다. 소청 대피소와 봉정암에서 여유자작하게 시간을 보낸 이유는 소청 대피소에서 만난 등산객이 백담사에서 그곳까지 2시간 30분만에 올라왔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백담사로 내려가는 여정은 훨씬 수월할 테니 시간이 넉넉하겠구나 하였지요. 그런데 이게 크나큰 오산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대청봉에서 백담사까지 총 12.9km인데, 대청봉에서 봉정암까지는 2.2km밖에 안 되므로 조금만 생각해도 갈 길이 멀다(10.7km)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어찌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까요. 이번 산행은 확실히 나사가 풀린 게 분명합니다.  

  봉정암에서 급경사 내리막길을 겨우 지나 쌍폭이 있는 구곡담계곡에 도착하니 맙소사 길들이 엉망이었습니다. 7월 15, 16일 이틀간에 내린 집중호우로 계곡을 따라 난 등산로가 곳곳이 망가졌더군요. 특히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은 성한 게 드물 정도였습니다. 도대체 비가 얼마나 왔길래 이 정도일까 싶었습니다. 철제다리들이 엿가락처럼 휘어지거나 아예 전부 끊어진 게 수두룩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다리를 통나무로 응급복구하여 놓았더군요. 단지 등산객들을 위한 것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봉정암을 찾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지라 서둘러 복구한 것이 아닌가 혼자 추측하여 보았습니다. 그래서 비가 다시 온다면 영락없이 떠내려갈 것 같습니다.

  그런 험한 길을 참으로 많은 아줌마들이 계속 올라오더군요. 물론 간혹 아저씨들도 있었지요. 경상도 사투리가 심하기에 어디서 오냐고 물었더니 대구, 마산에서 단체로 오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내친김에 경상도에도 좋은 절이 많은데 어찌하여 이 힘든 곳을 찾아 오냐고 하니 봉정암 부처님이 용하다는 소문이 나서 그런다고 하더이다. 해는 점점 기울어져 가건만 절에서 자고 갈 요량인지 여유가    만만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아줌마공화국이다”(수정헌법 제1조^^)라는 구호가 새삼 떠올랐답니다.    

  선사님,

  구곡담계곡은 왜 그리도 긴가요. 야속하게도 무릎은 아파 오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더군요. 중간에 맑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용아장성(龍牙長城)능선의 험준한 바위들을 바라보며 열을 식히기도 하였지만 이내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전과는 달리 오후의 햇살은 아직도 따갑더이다.

  수렴동대피소를 지나 힘들게 영시암에 도착하였을 때는 어느새 5시가 넘었습니다. 사법연수원 교수 시절 영시암을 거쳐 마등령으로 올라갔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제부터 백담사까지는 금방이려니 하였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다시 1시간 30분을 더 가야 한다는 영시암 보살의 말에 그만 맥이 탁 풀렸습니다. 백담사에서 용대리(백담매표소)로 출발하는 버스가 6시에 끊어지는데...

  뛰다시피 서둘러 출발했건만, 수렴동  계곡 중간에 길을 잃어 잠시 헤맨 것까지 더하여 백담사에 도착하였을 때는 6시 25분. 이미 마지막 버스가 떠난 후였습니다. 혹시 차편이 없나 하고 절의 종무소에 가서 알아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절에서 묶는 신도들을 태우고 자장면을 먹으러 나가는 마이크로버스에는 자리가 없다고 안 태워 주고, 짐을 싣고 왔다가 돌아가는 트럭의 화물칸에는 사람을 태울 수 없다고 역시 안 태워 주더이다.

  궁리 끝에 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 전화하여 방법을 물었더니 걸어오라고 하더군요. 백담사에서 용대리까지 백담계곡을 걸어가려면 1시간 30분이 걸리는지라 걸어가다 보면 날이 어두워질 판인데 그냥 걸어오라는 국립공원관리사무소 직원의 무뚝뚝한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대청봉 쪽에서는 계속하여 사람들이 내려오는 판인데...

  그렇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하던가요, 114를 이용하여 원통의 콜택시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용대리에 있는 국립공원관리사무소 백담매표소에서 택시출입을 막아 애를 태웠지요.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이나 깨지 말 것이지... 택시를 통과시켜 달라고 통사정하여 겨우 탈 수 있었습니다. 요금은 3만원입니다. 정원을 초과하여 5명이 타는데도 불평 한 마디 안 하고 요금을 더 달라고 하지도 않는 택시운전사의 친절이 돋보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12시간에 걸친 설악산 횡단(오색→대청봉→백담사)의 막을 내렸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다음에 다시 도전할 기회가 생기면 준비를 철저히 할 생각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6. 9. 9. 범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