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빚을 청산하고(공룡능선)

2010.02.16 12:33

범의거사 조회 수:10236

 


                     묵은 빚을 청산하고

                      


  1979년 여름 처음으로 대청봉에 오른 후로 설악산에 갈 때마다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는 것이 있었다.

  ‘공룡능선을 한 번 타봐야 하는데...’

   그랬다. 관광 차원에서 외설악을 갔다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설악산에 제일 높은 대청봉을 오른다 해도 설악산의 진면목을 보았다고 할 수 없기에 공룡능선을 종주하기 전까지는 마치 설악산에 대하여 무슨 빚을 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30여 년의 세월이 지난 2007년 5월 19일. 마침내 묵은 빚을 청산하려고 길을 나섰다. 법원도서관 산악회원 중 열성분자 11명과 가이드를 맡은 충주산악회의 최성록씨와 함께.

  오색, 대청봉

   2007. 5. 19. 아침 8시 10분.  대절한 관광버스로 대법원을 출발하여 양평, 홍천, 인제를 거쳐 한계령을 넘어 오색에 도착하는 4시간여 동안 대부분 깊은 잠에 떨어졌다. 그 험하다는 공룡능선을 간다는 생각에 나처럼 간밤에 잠을 설친 모양이다.
   한계령도 그렇고 오색도 작년 7월의 폭우로 인한 수해현장을 아직 완전히 복구하지 못한 상태로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한 달도 안 돼 곧 장마철이 시작될 텐데 저렇게 공사가  지지부진해서야 다시 수해를 입는 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오색에서 황태해장국으로 점심을 먹고 1시 30분 등산을 시작했다. 그동안 받아왔던 국립공원 입장료 1,600원을 올해부터 안 받는다. 산악국립공원의 경우 가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길을 내고, 험한 경사에는 계단을 설치하고, 계단 설치조차 불가능한 곳에는 밧줄을 매달고,.. 이런 시설물이 있기에 산행을 안전하게 할 수 있다.


   이런 시설들을 계속 보수하고... 이래 저래 유지비가 많이 드는데, 입장료를 왜 폐지한 걸까? 대신 주차장, 대피소, 야영장 등의 시설이용료를 인상하였다고 하는데 그걸로 될까? 만일 세금으로 보전해야 한다면 눈 가리고 아옹하는 선심행정의 표본 아닐까? 입장료를 징수하는 게 수익자부담의 원칙상 맞지 않을까?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오색의 남설악매표소에서 대청봉까지의 거리는 5km이다. 입구--->제1쉼터--->설악폭포--->제2쉼터--->대청봉의 각 구간이 대략 1.2~1.3km 정도 되기 때문에 각 구간을 1시간(쉬는 시간 포함)에 주파하면 총 4시간 걸린다.


   구름이 몰려왔다 물러가는 날씨가 되풀이되면서 후덥지근하여 땀이 많이 났으나, 일행 중 어느 하나 낙오되는 사람 없이 잘 걸어 출발한 지 정확히 4시간만인 오후 5시 30분에 대청봉에 도착했다. 지난 해 9월에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오르느라 5시간 걸렸던 기억이 새롭다.

    마지막 구간에서 잠시 빗방울이 뿌려 비옷을 입는 소동을 벌였고, 계속 비가 오면 내일 공룡능선 못 가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였지만 이내 그쳤기 때문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대청봉 정상(1,708m)에서는 운무로 인해 주위의 경치가 잘 안 보였다. 가끔 바람이 불어 그 구름이 걷힌 곳으로 살짝 드러나는 산봉우리들이 신비한 자태를 연출하곤 했다. 정상정복(?)의 기념사진을 찍고 서둘러 중청대피소로 향했다.    

중청대피소

   중청대피소는 대청봉에서 600m 아래 정확히는 대청봉과 중청봉 사이의 안부(鞍部)에 있다. 최대 120명(종전에는 150명을 수용했는데, 이용자의 편의를 위하여 2007. 5. 16.부터 120명으로 줄였다)을 수용하는 이 대피소는 인터넷 (http://seorak.knps.or.kr/divide.aspx?menu=001&submenu=005) (전화 : 033-672-1708)으로 미리 예약을 하여야 숙박할 수 있다.

    예약은 이용예정일 보름 전부터 받는다. 1인당 4인까지(예약자 포함) 예약이 가능하다. 사용료는 1인당 7,000원이고, 담요 1장에 1,000원씩 내고 빌릴 수 있다. 사용자가 적을 때는 여러 장 빌릴 수 있으나, 대개 이용자가 많기 때문에 1장밖에 빌리지 못한다.

    매점이 있어 생수, 햇반, 컵라면, 과자, 초콜렛, 비옷 등을 살 수 있다.

   대피소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저녁 준비를 하였다. 대피소 안에 취사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나, 그리 넓지 않기 때문에 건물 밖에 있는 평상에서 취사를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땀이 식은데다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바람이 불자 오싹 한기가 덮쳐온다. 가져온 옷을 있는 대로 몇 겹 입고 나니 견딜 만하다.

   그 사이 충주산악회(회장 김석칠) 팀 5명이 한계령 쪽으로부터 도착하였다. 우리의 산행에 맞추어 김석칠 회장이 팀을 이끌고 온 것이다. 김석칠 회장은 경복고등학교 선배로서 내가 충주지원장 시절부터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이이다. 충주산악회 멤버들은 전문가나 다름없어서 그 중 대장은 남미의 최고봉인 아콩카구아산(6,960m)을 등정한 경력이 있을 정도이다.


   이들이 지고 온 배낭이 하나같이 집채만해서 놀랬는데, 순수 아마추어들인 우리를 염려해서 쌀, 고기, 야채, 라면, 생수 등 식품을 넉넉하게 준비해 온 것이었다. 우리도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했는데, 이 팀 덕분에 산행 내내 풍족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이번 공룡능선 종주를 큰 어려움 없이 마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피소의 지하 1층에 마련된 숙소는 목조 2층 침상으로 되어 있다. 1인당 배정된 공간이 50여cm 정도여서 큰 불편 없이 잘 수 있다. 온풍기 4대로 난방을 하기 때문에 실내는 따뜻하다. 침낭을 가져온 사람들도 있었으나, 담요를 덮고 자도 충분하다. 포세식(거품으로 배설물을 씻어내는 방식)의 화장실도 깨끗하다.


   이 높은 곳에 있는 산장의 시설이 이 정도로 훌륭할 줄은 미처 몰랐다. 우리나라도 확실히 선진국 대열로 들어서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아쉬운 게 있다면 양치질과 세수를 할 만한 물이 없다는 것인데, 그야말로 욕심일 뿐 해발 1,700여 미터가 되는 곳에서 식수를 제공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것이다.


   밤 9시가 되자 관리소측에서 실내전등불을 일제히 껐다.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기 위하여 이미 소등 전부터 잠자리에 든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보통 밤 12시가 넘어야 잠자리에 들던 나는 한동안 잠이 안 와 뒤척여야 했다.  

일출

  2007년 5월 20일. 새벽 4시가 되면서 주위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진다. 일출을 보기에는 아직 이른데도 성미 급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덕분에 잠은 깼지만 담요 속에서 한동안 더 뒹굴다가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4시 40분에 대피소를 나섰다. 일출을 보러 다시 대청봉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날씨는 맑은데 바람이 차다.

   일출시각은 5시 11분. 동해바다 위에 낮게 깔린 구름의 색이 벌겋게 되더니 그 위로 해가 솟아오른다. “참으로 멋있다, 장관이다.” 이런 말 외에는 달리 그 광경을 표현할 길이 없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려면 3대에 걸쳐서 덕을 쌓아야 한다고 하는데, 설악산 대청봉에서 일출을 보려면 얼마나 덕을 쌓아야 할까. 아무튼 누구의 덕인지는 몰라도 첫 번째 시도에서 일출을 보게 되었으니 감개가 무량할 따름이다. 그 햇살을 받으면서 기마자세를 취하고 정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그리고 천지신명께 빌었다. 오늘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 달라고.    

희운각대피소

   일출을 보고 다시 중청대피소로 내려오니 충주산악회 팀이 아침밥을 해 놓았다. 이 팀은 대청봉 일출을 전에도 이미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굳이 안 봐도 된다고 하면서 우리를 위해 아침 준비를 한 것이다. 그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맙다. 덕분에 따뜻한 밥과 국으로 때아닌 호사를 하였다.  

   식사를 마친 후 아침 6시 40분, 마침내 공룡능선 정복의 대장정에 올랐다. 중청의 레이다기지를 옆으로 끼고 돌아 소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전날 저녁과 아침을 든든히 먹었고, 잠도 편하게 충분히 잔 덕분이다.


   길가에는 진달래가 피어 있고, 철쭉도 꽃봉오리가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있다. 4월까지 눈이 있는 설악산이고 보면 이제야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중청대피소에서 600m 떨어진 소청에 도착하여 봉정암과 희운각으로 가는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서 희운각 쪽으로 접어들었다. 희운각까지는 1.3km. 작년 가을 이곳에서 봉정암 쪽으로 가면서 ‘나는 언제나 저 길로 해서 공룡능선을 가 보나’ 했던 바로 그 길이다.

 

   희운각으로 내려가는 길은 생각보다 가파르고 계단도 많다. 한눈을 팔다가는 엉덩방아를 찧기 딱 좋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팀의 홍일점인 윤성혜 과장이 미끄러지다 바위에 스치는 바람에 오른팔이 까져 피가 난다. 평소에 유머가 풍부하여 내색을 안 해 그렇지 많이 아픈 모양이다.  

   출발한 지 1시간 30분 걸려 희운각(喜雲閣)대피소에 도착하였다. 이 대피소는 수용인원이 70명에 불과하다. 인터넷이나 전화로는 예약이 안 되고 선착순으로 마감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숙박하려면 일찍 도착하여야 한다.

    그런데 대개 도착해서 자리가 있냐고 물어보면 이미 다 찼다는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려야 하는 것이 예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만큼 원성이 많은 곳이다. 구름(雲)은 즐거울지(喜) 모르나 등산객은 즐겁지 못한 곳인 셈이다.

    그래도 이곳은 계곡에 물이 많아 세수도 할 수 있고, 식수도 보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곳에서 숨을 돌리면서 결정을 해야 했다. 공룡능선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천불동계곡으로 내려갈 것인지를. 평소 산행을 즐기는 산악인인 백중석 과장이 의외로 먼저 천불동계곡을 택한다. 자꾸 다리에 쥐가 난다는 것이다.

   소청에서 희운각으로 내려오다가 엉덩방아를 찧은 윤성혜 과장이 머뭇거리다가 역시 천불동계곡을 택한다. 까진 오른팔을 자꾸 만지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충주산악회 팀에서 2명이 천불동계곡을 택하고, 이들 4명을 인솔할 사람이 또 한 명 나선다. 결국 모두 5명이 천불동계곡을 택하고 나머지는 본래 예정했던 대로 공룡능선을 택하였다.    

공룡능선

   오전 8시 40분 희운각대피소를 출발하였다. 이곳에서 마등령까지의 5.1km를 공룡능선이라고 부른다. 숲 속으로 난 길을 따라 얼마 안 가서 곧 무너미고개에 다다른다. 표지판이 보이는 쪽으로 직진하면 공룡능선길이고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면 천불동계곡이다. 여기서 천불동으로 가는 5명과 작별을 하는데, 왠지 비장한 생각이 든다.

   ‘드디어 공룡능선으로 접어드는구나. 이제는 죽으나 사나 오직 한 길인데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이곳으로 오기 며칠 전 구암선사(畏友 조완영)로부터 다리와 무릎에 뜸을 뜨는 법을 배워 5일 동안 뜸을 뜬 효과가 있을까. 무릎에 케토톱을 붙이고 보호대를 둘렀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내가 만일 낙오하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

   온갖 상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내놓고 말은 안 해도 평소 내가 무릎이 안 좋다는 것을 알고 있는 김석칠 회장과 서두원 과장도 걱정스런 눈치이다. 그래서 김석칠 회장은 내 앞에서 길을 안내하고, 서두원 과장은 내 뒤에서 따라오며 밧줄을 타야 하는 경우에는 등산지팡이를 받아주었다. 이후의 산행에 두 사람의 도움이 컸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무너미고개를 지나 평탄한 능선길을 한동안 가다가 첫 번째 고비를 맞는다. 희운각으로부터 1.1km 떨어진 신선대(1,120m)의 옆구리로 오르는 급경사의 오르막길이다. 그동안 내린 비로 미끄럽기까지 하다. 길게 늘어진 밧줄을 잡고 한발 한발 움직여 겨우 올라섰다. 이제 겨우 맛보기에 불과한데 벌써 등에서 진땀이 흐른다.


   나중에 조의연판사가 이곳을 오르면서 천불동계곡이 아닌 공룡능선을 택한 것을 후회하였다는 말을 하여 웃었다. 사실 설악산은 관광차 외설악에 와본 것 외에는 등산을 해본 적이 없다는 그가 첫 등산을 공룡능선 종주로 택한 것은 대단한 용기이자 모험이었다.
     

    이후부터 이어지는 등산로는 계속하여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다. 평탄하고 푹신한 흙길을 걷는 일은 거의 없다.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리는 봉우리를 넘고 또 넘는다. 공룡능선이 왜 그런 이름을 얻었는지 알 만하다. 공룡의 등처럼 험하고 높은 봉우리들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같이 뾰족한 바위로 된 岩峰들이다. 그 봉우리들을 넘기 위하여 철계단을 오르내리는가 하면, 계단조차 설치할 수 없는 곳에서는 밧줄에 매달려야 한다.

   크고 작은 것을 합하여 10여 개의 봉우리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노라면 천당과 지옥을 왕래하는 기분이다. 공룡능선이 내설악과 외설악을 경계 짓는 능선이기 때문에 봉우리마다 그 정상에서 바라보는 내설악과 외설악의 비경은 그야말로 감탄 또 감탄이다.


   진행방향 왼쪽으로는 가야동 계곡과 용아장성능선이 펼쳐지고 오른쪽으로는 천불동계곡과 천화대 그리고 그 뒤의 화채봉능선이 동행한다. 뒤를 돌아보면 지나온 대청봉이 나를 두고 어디 가냐고 손짓을 한다.

   천화대(天花臺)는  하늘에 바위꽃이 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연화대(蓮花臺)라고도 부른다. 범봉을 중심으로 한 능선으로 암벽등반가들이 즐겨 찾지만 일반인은 접근이 어렵다.


   화채봉능선은 대청봉으로부터 북동쪽으로 바로 뻗어 내려오는데, 공룡능선에서 바라보는 화채봉(1,320m)은 학이 좌우로 양 날개를 펼친 채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영락없이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千年鶴)에 나오는 선학봉을 닮았다. 현재 화채봉능선은 안식년의 시행으로 등반이 금지되어 있다.


   바람 따라 오락가락하는 흰 구름 속에 이 모든 것들이 서로의 자태를 뽑낸다. 이쯤에서 그 옛날 어느 묵객(墨客)의 흉내를 내 본다.

  산이 하 높으니 두견이 낮에 울고
  계곡이 하 깊으니 인적을 헤리로다.
  백운이 내 벗이라 오락가락 하노매라.

   봉우리가 하도 많다 보니 일일이 이름을 짓기가 어려웠나 보다. 공룡능선의 대표격인 1275봉(그냥 높이가 1275m라서 그렇게 이름지은 모양이다. 참으로 멋대가리 없는 이름이다)의 밑에 이르자 저 봉우리만 넘으면 공롱능선의 반을 온 것이 된다고 김석칠 회장이 전한다.

   그런데 이 봉우리를 넘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거대한 바위덩어리 사이로 난 좁은 등산로를 따라 손발을 다 동원하여 기기도 하고, 밧줄에 매달리기도 하면서 온 힘을 다해 오르고 내려야 한다. 밑에서 보면 저길 어떻게 올라가나 하고 기가 질리고, 올라가서 보면 저길 어떻게 내려가나 하고 다시 기가 질린다.


   도중에 반대방향에서 오는 사람을 만나면 자연스레 인사를 하게 된다.

“조심해서 가세요!”

   그렇다, 그 사람도 나도 온 길을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저 조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1275봉을 지나 다음 봉우리로 가기 전의 안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그동안에도 짬짬이 쉬면서 왔지만 이 봉우리를 넘으면서는 하도 힘이 들었는지라 20여 분을 쉬면서 기를 회복했다. 무릎에 에어파스를 뿌리니 한결 시원하다.

    이곳에 세워진 이정표가 이제까지 온 거리가 3km이고(신선대에서 1275봉까지가 1.9km이다), 앞으로 2.1km만 더 가면 마등령에 도착한다고 알려준다.
  
   1275봉을 넘으면 쉬워질까 했던 기대는 이내 산산조각이 나고 또다시 가파른 암봉을 넘느라 땀을 흘려야 한다. 저 봉우리만 넘으면 마등령이 나타날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한 봉우리를 넘으면 기다리는 것은 마등령이 아니라 또 다른 봉우리이다.

  그러기를 몇 번, 나한봉(1,276m)에 올라서니 드디어 마등령이 보인다. 아직도 갈 길이 먼데 마치 다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여유를 갖고 뒤돌아보니 이를 악물고 지나온 1275봉과 그 봉우리의 등산로를 따라 기어오르는 사람들이 보인다.
  “히유~ 내가 저길 어떻게 넘어왔지?”
분명 내가 얼마 전에 지나온 길이건만 거길 넘어왔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나한봉을 지났다고 해서 길이 순탄해지는 것은 아니다. 명색이 공룡능선 아닌가. 이제까지 없던 너덜길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커다란 바위였을 터인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풍화작용으로 잘게 쪼개져 수많은 돌을 깔아놓은 것처럼 된 산비탈길이다.


   김석칠 회장의 설명에 의하면,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너덜길에서는 산사태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산사태라는 것이 비를 잔뜩 머금은 흙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것이고 보면, 너덜길이야 비가 오는 즉시 밑으로 흘러내릴 테니 산사태가 날 리가 없을 것이다.


   너덜길에서 잠시 숨을 돌리는데 김영록 과장이 배낭에서 먹거리를 주섬주섬 꺼낸다. 입에 한 개 넣으니 감칠맛이 난다. 더 먹고 싶었지만 곧 점심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참고 일어났다.

마등령

   마침내 마등령 안부 쉼터에 도착했다. 시계바늘이 오후 1시 10분을 가리키고 있다. 희운각에서부터 4시간 40분 걸린 것이다. 드디어 해냈다고 모두 환희에 찬 얼굴이다. 산에 다녀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격 어린 표정에는 스스로를 대견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누가 시킨다고 할 것인가. 고난의 여정이지만 내가 좋아서 선택한 길이기에 힘이 들어도 즐거운 것이다.


   특히 조의연 판사는 처음 신선대를 통과하는 오르막길에서는 괜히 왔다고 후회했는데, 막상 주파를 하고 나니까 너무 뿌듯하다고 입이 벌어진다.

   다음달에 정년퇴직하는 배의철 심의관은 옛날에 이미 공룡능선을 다녀오신 사모님한테 그동안 주눅이 들었었는데, 이젠 집에 가서 큰소리를 칠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하신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충주산악회 팀이 점심으로 끓여 놓은 라면이 말 그대로 꿀맛이다. 아침에 먹다 남은 것을 싸온 밥을 넣어서 김치를 곁들여 먹으니 더욱 일품이다. 충주산악회 팀에 또 다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비선대

   마등령 안부 쉼터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오후 2시 20분에 비선대를 향해 출발하였다. 마등령 안부에서 정상까지 잠깐 야트막한 오르막이 있을 뿐 그 후로는 비선대까지 3.7km 내리막길이다.


   1998년 사법연수원 교수 시절 백담사 쪽에서 올라와 내려가 본 경험이 있는데다가 그 험한 공룡능선을 넘어왔는데 그까짓 내리막길이야 쉽게 내려가겠지 하였는데 막상 접어드니 그게 아니다. 내리막길 3.7km가 2시간 걸린다고 등산지도에 표시되어 있을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공룡능선을 넘느라 다리가 풀릴 대로 풀린 상태 아닌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내리막의 연속이야말로 진작부터 아파 오기 시작한 내 무릎에는 고문 그 자체였다.

   내리막길 오른쪽으로 보이는 공룡능선과 화채봉의 모습이 아스라하다.
“와~ 우리가 저 암봉들을 넘어온 거란 말이지.”
   너나 할 것 없이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러나 아무리 감탄한들 무엇하랴. 그런다고 끊어질 듯 아픈 무릎이 안 아파지나...


   내리막길 왼쪽에 있는 세존봉의 밑을 지나면서 까마득한 절벽을 등반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그만 다리가 더 풀려버렸다.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데,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기를 기어올라간단 말인가. 거미인간이라도 되나? 한발만 삐끗하면 천애의 낭떠러지로 떨어져 황천길로 갈 텐데...

    법과대학 다닐 때 산악반에 가입하여 암벽등반의 경험이 있다는 송봉준 판사가 막상 해 보면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니라고 한다.  

  
   끝이 없는 내리막길에서 다들 힘들고 지겨워하는데 유독 배의철 심의관만은 펄펄 나신다. 환갑이 넘은 양반이 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다리도 안 아프시단다. 휘적휘적 앞으로 가시더니만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금강굴이 나와도 못 본 척 그대로 지나쳐 겨우겨우 비선대에 도착하니 오후 5시 50분이다. 지도상의 2시간 거리를 3시간 30분 걸려 온 것이다. 계곡물에 손을 담가보지도 못하고 서둘러 설악동 소공원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6시 40분.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던 충주산악회 팀은 갈 길이 바쁘다고 아쉽게도 이미 충주를 향해 떠났고, 천불동계곡으로 내려온 백중석, 윤성혜 두 과장이 반갑게 맞이한다. 어떠했냐고 묻는 윤성혜 과장에게

  
“힘이 너무 들어 두 번 가라면 못 간다. 그러나 한 번은 반드시 가볼 만한 곳이다. 언제고 기회가 되면 꼭 가보라”

고 했더니, 자기는 대청봉 일출을 본 것만으로도 이번 산행에 큰 의미가 있다고 화답한다.


   이렇게 해서 30여 년 묵은 빚을 청산하는 14시간짜리 산행이 막을 내렸다. 남은 여정은 척산온천에 가서 지친 몸을 달래고 저녁식사 후 서울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끝으로, 최성록씨를 포함한 충주산악회 팀과, 빈틈없이 산행준비를 하고 산행기간 동안 사진을 찍느라 애쓴 법원도서관 산악회장 송봉준 판사, 총무 박재송 계장과 궂은 일을 도맡아 한 원종삼 계장, 권순일 계장, 박진홍 실무관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전한다. (끝)  

** 산행거리(총 16.3km)의 정리 :
   오색--(5km)-->대청봉--(600m)-->중청대피소--(600m)-->소청삼거리--(1.3km)-->희운각대피소--(1.1km)-->신선대--(1.9km)-->1275봉--(2.1km)-->마등령--(3.7km)-->비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