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었는가 들켰는가(숨은벽능선)

2010.02.16 12:35

범의거사 조회 수:10503

 


             숨었는가 들켰는가                         

 

                     
   
예년보다 일찍 찾아온 더위로 때 이르게 하늘을 원망할 즈음, 6월 20일부터 장마가 시작되어 더위가 한풀 꺾였다. 더위를 쫓아준 비가 한없이 고마워야 하건만 마냥 그럴 만한 사정이 못 되었으니, 진작부터 잡아 놓은 23일의 등산계획 때문이었다.


   ‘숨은벽능선’
 

   서울법대 다닐 때 산악반 활동을 하였던 도서관산악회장 송봉준 판사 덕분에 북한산에 그런 능선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오랫동안 자연휴식년제에 묶여 있었던 터라 호젓하면서도 멋진 코스라는 말에 진작부터 귀가 솔깃하여 기다려 오던 등산이었다. 그런데 장마라니...야속하게도 금요일(6월 22일)까지 계속 뿌리는 빗방울이 애간장을 태우게 하였다.  


2007. 6. 23.(토)

   도서관산악회에서 산에 가면 오던 비도 안 온다는 박재송 계장의 말을 천지신명께서 뒷받침이라도 하시려나 보다. 주말의 서울 아침은 구름만 다소 끼었을 뿐이다. 남녘에는 비가 오지만 서울․경기 지방은 다음날인 일요일에나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아침 8시 10분 법원도서관을 출발한 차가 서울의 서부권 부도심으로 한창 건설 중인 은평뉴타운 지역을 지나자 북한산성 입구가 나오고, 거기에서 다시 의정부쪽으로 좀 더 진행하니 길 오른쪽에 사기막골로 들어가는 입구임을 알리는 작은 입간판이 보였다. 길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놓치기 쉬운 간판이다.
   비포장도로를 따라 북한산의 품안으로 5분 정도 들어가자 널찍한 공터가 나온다. 아마도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되기 전에는 이곳에 매표소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주변 곳곳에 점치는 집들, 기도하는 집들이 있는 게 특이하다. 북한산 정기를 받아 이른바 기도발이 잘 듣는 곳일까.

   이곳에 주차를 하고 9시 15분 산행을 시작하였다. 이번 산행에는 황윤구 국장도 참가하고, 오경미 판사, 윤성혜 과장 외에 여직원이 4명 더 참가하여 성황이다. 다만 정년퇴임을 며칠 안 남겨 놓은 배의철 심의관이 집안 일로 참가하지 못한 게 내내 아쉽다. 그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았고, 이번이 함께 하는 마지막 산행이 될 텐데...

  산행을 시작하여 능선에 올라서기까지 40여분 동안의 산길은 푹신한 흙길인데다 경사도 완만하여 힘들 게 없다. 게다가 울창한 숲속으로 난 길이라 햇빛을 굳이 피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전날까지 내린 비 덕분에 길에서 먼지도 안 난다. 유달리 많은 밤나무가 내뿜는 밤꽃향기와 군데군데 길 옆에 피어 있는 나리꽃이 산객들을 맞이할 뿐, 우리 일행 말고는 올라가는 사람도 없고 내려오는 사람도 없다. 자연휴식년제가 2006년 1월부터 풀린 사실이 아직 덜 알려진 때문일까?
벌써부터 감탄사가 나온다.

“허 그것 참, 북한산에 이렇게 호젓한 등산로가 있다니.”

   단위면적당 탐방객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될 만큼 찾는 이가 많은 북한산, 그래서 주말에 이 산을 오르려면 앞에 가는 사람 엉덩이밖에 안 보인다는 북한산... 나도 이 산만큼은 그래도 웬만큼 안다고 자부했는데, 그게 다 허황된 망상이었을 줄이야. 배움에는 끝이 없다.

   아무리 숲속의 나무그늘로만 걸었다고 하지만 바로 전날이 夏至였지 않은가, 쏟아지는 땀이 얼굴을 적시고 등에서는 내를 이룬다. 출발해서 한 시간여 만에 나타난 능선길에 오르자 시원한 바람이 제일 먼저 반긴다. 숨은벽능선이 시작은 되었으나 ‘숨은벽’은 말 그대로 아직 숨어 있다.  

   일단 능선 위로 올라서면 그 다음부터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수시로 경사진 바윗길(이를 ‘슬랩’이라고 한다)을 지나야 한다. 안전을 위해 우회로를 만들어 놓았지만, 대개는 바닥이 닳아버리지만 않았으면 등산화를 신고 충분히 통과할 수 있다. 더구나 네 발을 사용한다면 별 어려움이 없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뒤돌아보며 아래로 펼쳐지는 경치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것은 어느 산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숨은벽능선에서 내려다 보이는 경치가 더욱 일품인 것은 다른 코스들과는 달리 아파트촌이 안 보여 좋다는 것이다. 그냥 푸르른 산하가 보일 따름이다. 사실 산에 올라가서 아파트촌 구경하는 것처럼 맥 빠지는 일도 없다.

   출발한 지 2시간 10분 남짓 지나자 제법 큰 바위가 앞을 막는다. 그 위에 올라가면 널찍한 휴식공간이 있다는데, 이 슬랩을 그냥 바로 올라가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산악회장의 권유에 따라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우회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돌아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내리막 경사가 급할 뿐만 아니라 오르막에서는 밧줄을 잡아야 한다. 5분 정도 땀을 흘리며 씨름하다 널찍한 바위 위로 올라서자 일순간 탁 트이는 전망이라니!   흔히 숨은벽 전망대라고 부르는 이곳(해발 555m)에 서면 숨은벽이 마침내 전면 코앞에서 웅장한 자태를 제대로 드러낸다.

   왼쪽으로 인수봉(810m), 오른쪽으로 백운대(836m)를 두고 그 사이로 하늘을 향해 대포처럼 곧추 서 있는 숨은벽, 이제는 “들킨벽”이 되어 버린 이 암벽과 주위 산세가 함께 어울려 연출하는 풍경은 실로 장관이다(숨은벽능선의 최고봉은 높이가 해발 768m).
   구름이 오락가락하며 정상부위를 수줍은 듯 살짝 드러냈다 가렸다 하는 것은 처음 이곳을 찾는 산객에게 신비함을 더 느끼게 하기 위한 산신령의 연출이련가. 인수봉의 아래로 뻗어 내린 설교벽능선, 백운대의 아래로 뻗어 내린 염초봉능선이 손에 잡힐 듯 빚어내는 경치는 천하명승으로 손꼽을 만하다. 숨은벽을 중심으로 설교벽능선과 염초봉능선이 좌청룡 우백호로 호위하는 모습이다. 북한산에 이런 비경이 숨어 있었다니! 마치 설악산 공룡능선의 한 부분을 옮겨 놓은 듯하다.

     숨은벽 전망대에서 지나온 방향으로 10여m 아래를 내려다 보면 구멍 2개가 뚫린 커다란 얼굴모양의 바위가 눈에 들어 온다. 이른바 ‘해골바위’다. 그 옆을 통과해 올라 왔건만, 옆이나 가까이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그대로 지나쳐 온 것이다. 그 뒤로 노고산이 아스라이 보인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검색하여 본 결과, ‘숨은벽’이라는 이름은 이 큰 암벽이 인수봉과 백운대 사이에 숨어 있어서 북한산의 밖에서는 물론 백운대에서조차 잘 보이지 않아 그렇게 불렸다고 하는데, 1970년 백경호 등의 산악인이 이 벽을 오르는 7개 코스를 개발하고 ‘숨은벽코스’라고 이름 지으면서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땀을 충분히 식히고 목을 축인 후 다시 등정길에 나섰다. 산악회장이 출발에 앞서 숨은벽 능선의 정상 좌우로 보이는 V자형 안부를 가리키면서, 그 중 왼쪽 안부(인수봉과 숨은벽능선 정상 사이)를 넘어갈 예정이라고 일러주는데, “히유~ 저길 어떻게 넘지”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리 험한 산이라도 길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지난 번 공룡능선 등정 때 새삼 깨달은지라 새삼 도전의식을 드높이면서 호기있게 출발했다.  

   여기부터는 호젓한 소나무숲길이 나오는가 하면 오른쪽으로 천애의 낭떠러지인 바윗길도 나온다. 그 위에서 사진을 찍으려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애써 웃는 얼굴을 하지만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계곡 건너편 염초봉능선 북쪽사면의 암벽들 틈틈이 하얀 꽃들을 뒤집어 쓴 모습의 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산딸나무’라고 오경미판사가 가르쳐 준다. 대법원청사 앞의 조경수에도 있다고 하는데 이제껏 몰랐으니 할 말이 없다. 내 비록 장님은 아니지만, 아는 만큼만 보이는 것을 어쩌랴. ‘산아들나무’는 혹시 없으려나.

   이젠 구름도 다 걷히고 백운대의 태극기가 보일 만큼 하늘이 맑아졌는데, 멋진 경치를 구경할 수 있는 곳은 여기가 마지막이라고 하는 통에 고개를 부지런히 돌리면서 주위경개를 보고 또 보고, 감탄하고 또 감탄하면서 10여 분 가다 보니 숨은벽 암릉등반 출발지점에 닿는다. 50m나 되는 대슬랩이 바로 눈앞에서 위용을 자랑한다. 이미 여러 사람이 그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나도 올라가 보고 싶었지만 마음뿐,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나온 사람이 장비를 갖춘 사람들만 올라가게 해 준다. 전문산악인이 아니면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어느 덧 시계바늘은 12시를 넘어가고 있다.

   당초 예정대로라면 여기서 왼쪽으로 숨은벽을 우회하여야 하는데,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나온 사람이 그 쪽은 길이 없으니 오른쪽으로 우회하라고 한다. 시키는 대로 방향을 틀어 계곡을 향하여 가파른 경사길로 150m 정도 내려가자 ‘밤골매표소 2.6km, 백운대 0.6km’라고 쓰인 안내판이 나온다. 숨은벽과 염초봉능선 사이의 밤골계곡이다.

    여기서 아까 본 오른쪽 V자 안부(숨은벽능선 정상과 백운대 사이의 안부)까지는 돌로 된 너덜길에다 경사가 급하여 숨을 깔딱거리게 만든다. 산에 가면 어디선가는 한번은 나타나게 마련인 깔딱고개인 것이다. 다행히 중간에 대동샘이라는 약수터가 있어 쉬면서 시원하게 목을 축일 수 있다. 물맛이 좋고, 장마철이라 그런지 수량도 풍부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30분 정도 오르면 깔딱고개의 끝 지점에 다다르는데, 여기서 두 갈래로 길이 갈린다. 왼쪽은 그냥 안부를 타고 넘어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호랑이굴을 지나 백운대로 오르는 길이다. 두 길 모두 밧줄이 매여 있다. 우리는 왼쪽을 택하였는데, 밧줄이 있다고는 하나 3-4m 되는 직벽을 오르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언제고 다시 기회가 되면 호랑이굴로 해서 백운대로 올라가 보아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지만, 글쎄 그게 언제일는지...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V자 안부를 넘어서면 갑지기 시야가 트이면서 저 멀리 상계동의 아파트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보다는 바로 왼쪽에 손에 잡힐 듯 있는 거대한 바위덩어리에 시선이 꽂혀 좀처럼 눈을 뗄 수 없다. 다름 아닌  인수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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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벽등반의 메카인 이 거대한 바위봉우리에는 오늘도 예외 없이 산악인들이 오르고, 내리고 있다. 나는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건만 저네들은 어찌 저리도 잘 오르고 내릴까. 저네들은 저 암벽에 매달려 과연 어떤 희열을 느낄까. 저네들이 보기에는 우리 같은 도보족 등산객은 등산이라는 말조차 꺼내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잠시 혼자만의 상념에 젖어본다.

   백운대를 끼고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잠시 내려가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배낭 가득 싸 가지고 온 음식들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위문을 거쳐 북한산성 쪽으로 하산길을 잡았다. 이 길은 늘 다니던 길이라 별다른 특징이나 감회가 없다. 백운대 정상에는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아 올라가기를 단념하였다. 당초에는 하산길에 염초봉과 원효봉을 순차로 올라갈 계획이었으나, 길을 잘못 들어 잠시 헤매는 바람에 이도저도 다 포기하고 곧바로 내려갔다. 숨은벽의 장관이 당분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듯하다.(총 소요시간 5시간)(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