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 이 강산에(불곡산)

2010.02.16 12:40

범의거사 조회 수:10541

 

 

             이 나라 이 강산에

                            

    
4월에 예봉산-운길산을 다녀온 후 법원도서관산악회의 등산이 이런 저런 사정으로 미뤄지다 고심 끝에 잡은 날짜가 7월 5일(토)이다. 6월 중순부터 시작된 장마기간이라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비가 오면 안 가면 된다는 심정으로 택일한 게 이 날이다. 장마라고 하지만 올해는 해가 쨍쨍 빛나는 날이 더 많아 소위 “마른장마”가 계속되는지라 내심 그것을 기대한 것도 사실이다.


    한 동안 비가 안 오더니 7월의 첫 주에 들어서서 하필이면 이번 주말에는 비가 올 거라고 주초부터 기상청에서 일기예보를 하는지라, 산악회장 송봉준판사가 애꿎게 주중 내내 애를 태워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해서 두고 보자고만 했다. 일기예보가 다 맞는 게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인데다, 특히 요즘 들어 부쩍 오보(誤報)가 많아진 터라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았다.


    등산예정일 전날인 금요일(7월 4일) 오후에도 송판사가 ‘내일 흐리고 한 때 비가 온다는데 등산을 연기하는 게 어떠냐’고 하는 것을, “나는 그 예보 안 믿는다. 정말로 비가 오면 그 때 가서 다른 방도를 찾으면 된다”며 그냥 예정대로 하자고 했다. 이런 심사에는 심의관들과 국과장만 참가하는 등산이니 융통성을 발휘할 여지가 많다는 것도 한 몫을 했다.

  2008년 7월 5일(토)

    아침 8시 서초동 대법원에서 모여 양주에 있는 불곡산으로 가는 길에 쳐다 본 하늘에는 구름이 끼었을 뿐 비가 올 기미는 없다. 오히려 간혹 햇살이 쨍하고 비친다. 적어도 날씨가 흐리다는 일기예보는 맞을지 몰라도 한 때 비가 온다는 예보는 또 오보로 그칠 확률이 높다. 기상청 관계자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솔직히 오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3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양주시청 앞 3거리에서 좌회전하여 350번 지방도로 접어들어 10여분 가면 왼쪽으로 양주시 백석읍 방성3리 대교아파트가 나오고, 오른쪽 길가 버스정류장 옆에 등산로 입구가 있다(등산로입구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서초동에서 이곳까지 걸리는 시간은 승용차로 1시간 정도이다.

    9시 40분에 산행을 시작했다. 양주의 진산(眞山)이라는 불곡산(佛谷山: 일명 불국산<佛國山>)은 가장 높은 상봉의 해발고도가 468m에 불과한데다 도봉산이 가까이 있어 등산객의 주목을 별로 끌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 탓일까 토요일인데도 등산객이 별로 없다. 산행을 시작하면 출발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등산객들을 위한 음료수를 파는 작은 가게가 하나 나오는데, 탄산음료는 있어도 생수는 팔지 않는다.

 

 

     가게 앞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물을 얼마든지 받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수도꼭지를 잠그고 생수를 팔면 탄산음료보다 더 잘 팔릴 텐데... 이건 약아빠진 서울사람의 봉이 김선달식의 사고방식이려나.  

    10분쯤 걸었을까, 빗방울이 떨어진다. “아뿔싸, 일기예보가 맞으려나 보다” 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그 빗방울이 자취를 감춘다. 다소 과장한다면 열 방울쯤 맞았을까... 능선에 올라서기까지의 오르막길은 거의 산책로 수준이다. 산에 가면 만나는 그 흔한 깔딱고개가 아니다.
    산행 시작 30분 만에 능선에 도착했다. 능선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있다. 아무리 산책로 수준이라지만 때가 때인 만큼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잠시 식히고 남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 순간까지만 해도 “송판사가 3시간이면 충분히 산행을 마칠 수 있다고 하더니, 정말로 오늘 등산은 산책 수준이네” 하는 자만심에 사로 잡혀 있었는데...

    콧노래를 부르며 능선길을 걷기 10여 분, 눈앞에 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거대한 암벽(슬랩)을 대하자 숨이 탁 막혔다. 밧줄 하나에 의지해서 거의 수직에 가까운 암벽을 30m 올라가야 한다. 아니면 돌아가야 한다. 어쩔거나... 그 앞에 세워져 있는 위험표지판이 기를 죽인다.
    지난밤에 과음하셨다는 최진영 국장님은 일찌감치 돌아가는 길을 택하신다. 마침 다른 팀의 등산객 두 명이 그 밧줄을 잡고 앞서서 성큼성큼 올라간다. 거기에 용기를 얻었는지, 오경미판사가 자기가 앞장서겠다며 과감하게 그 밧줄을 잡는다. 모두들 손에 땀을 쥐고 쳐다보고 있는데 의외로 쉽게 올라간다. 막판에 다소 힘들어 하긴 했어도 암벽의 정상에 올라선 모습은 ‘여자 해병대, 아니 여자 람보’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나도... 지난 5월 17일에 다친 후 아직도 구부릴 때마다 통증을 느끼는 두 개의 손가락을 파스로 동여매고 도전했다. 이 밧줄을 놓치면 모든 게 끝장이라고 생각하니 손가락에 통증을 느낄 겨를도 없다. 생존본능이라는 게 다 그런 모양이다. 그래도 막상 암벽의 정상에 올라서니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진다.

    문제는 홍진호판사. 제주도가 고향이라 한라산에서 단련한 체력이 강할 줄 알았건만... 중간까지는 잘 올라갔는데 막판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도로 내려갔다. 암벽은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기가 더 힘들다고 했던가, 겨우겨우 다 내려갔을 때는 바지의 엉덩이부분이 찢어지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윤성혜 과장이 덩달아 겁을 먹고 포기하고 만다. 이만석 과장과 송판사는 가볍게 올라가고.

    그렇게 암벽을 통과하고 나면 불곡산의 정상인 상봉까지는 대부분 암릉길이다. 바위를 넘거나 바위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가야 한다. 제일 먼저 나타난 바위 봉우리(암봉)에서 땀을 식히며 경치구경을 하는 동안 우회로를 택한 세 사람이 올라와 그들과 합류하여 임꺽정봉(445m)으로 갔다. 양주가 본래 임꺽정의 고향이니, 그의 이름을 딴 산봉우리 하나 없을쏜가.

  “이 나라 이 강산에 이 몸이 태어나, 삼베옷 나물죽으로 이어온 목숨, 기구하여라 고단한 세월, 타고난 굴레는 벗을 길이 없어라...”

    언젠가 SBS방송국에서 창사 6주년 특집극으로 만든 임꺽정 드라마의 주제곡(장사익 노래)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가 이 봉우리를 오르고 내리며 힘을 길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임꺽정봉에서 한발 내려서면 420봉이다. 이곳에서 불곡산 정상쪽으로 주능선을 따라 직진하는 대신 오른쪽으로 난 지능선(支稜線)으로 접어들었다. 내려갔다 다시 올라와야 하는데도 이 길을 택한 것은 이곳에 불곡산의 진기한 바위들이 다 모여 있기 때문이다. 공기돌바위, 코끼리바위, 악어바위, 복주머니바위 등이 계속 이어진다.
   그 중 공기돌 바위는 경사면에 둥근 공기돌 모양의 바위가 올려져 있는데도 아래로 굴러 떨어지지 않고 있어 흥미롭다. 유구한 세월이 흘러 언제고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날, 그 밑을 지나다가 날벼락을 맞는 등산객이 없으면 좋으련만...  

    코끼리바위는 유심히 관찰해야 코끼리 머리 형상임을 알 수 있다.  코끼리 바위를 지나면 다시 암벽이 나타난다. 암벽 저편에 신선대가 있고, 그 아래로 더 내려가면 악어바위가 있다. 여기서 다시 홍판사와 최국장님은 포기를 하고 주저앉는다. 최국장님은 여전히 작취미성(昨醉未醒)인 모양이다.

    아무튼 두 분을 뒤로 하고 암벽을 내려가 신선대를 옆으로 돌아 내려가니 커다란 바위 직벽에 악어 한 마리가 기어오르고 있었다.
    아마존에서 놀던 놈인가, 아프리카에서 놀던 놈인가, 어찌하여 제 고향을 등지고 먼먼 이곳에 와서 한양 나그네의 발길을 유혹하고 있단 말인가. 생김새도 그렇거니와 특히 그 등의 악어무늬는 정말 악어를 똑 닮았다. 누가 일부러 조각을 한 것도 아닐진대, 자연의 조화가 신비롭기만 한다.
    그 악어를 배경으로 한 명씩 돌아가며 사진을 찍는데, 윤과장의 뇌쇄적인 포즈에 감탄을 거듭하느라 다들 그만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주간지 표지로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러다 정말로 전업하면 안 되는데...
    
     복주머니바위까지는 가지 않고 되돌아서서 신선대로 올라섰더니 주위 경치가 장관이다. 이름이 말해 주듯 신선이 놀았을 만하다. 그렇지만 경치에 취해 발을 헛디디면 생명을 보장하지 못한다. 신선이야 날 수라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중생들은 그저 조심할 수밖에.
    다시 하늘이 꾸물거리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듯하여 서둘러 주능선길로 돌아갔다. 여전히 한두 방울 떨어지면서 공연히 산사람들 겁만 주는 날씨이다.
  
    주능선길로 돌아오니 이젠 제법 등산객이 많아졌다. 몇 십 명 단체로 온 팀도 있다. 그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전진하는데, 또 다시 앞을 가로막는 암벽과 밧줄! 상투봉을 오르는 길목이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덜 험해 보여서 그런지 포기하는 사람 없이 다 도전하여 성공한다. “안 되면 되게 하라!” 까지는 안 되어도 세상만사가 미리 겁먹고 포기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상투봉(440m)은 그 이름의 유래를 알 길이 없다. 혹시나 싶어 주위를 둘러봐도 상투처럼 생긴 바위는 눈에 띄지 않는다. 땀을 식히느라 잠시 쉬는데 최국장님께서 준비해 오신 간식을 내 놓으신다. 당신의 사모님이 직접 만드셨다는 수수전병! 이날 산행의 백미였다. 그 꿀맛은 오래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즉석에서 다음 산행 때부터는 당신의 사모님을 초청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이건 너무 속 보이는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뺄 수는 없다.^^).  

    이 봉우리를 넘으면 길이 편해지려나 싶으면 또 바위덩어리의 봉우리가 나온다. 밧줄을 잡아야 하기도 하고, 바위와 바위 사이를 건너뛰기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암릉길이고... 마지막으로 밧줄을 잡고 낑낑 대고 오르니 마침내 정상인 상봉(468m)이다. 시계바늘은 어느덧 오후 1시 10분을 가리키고 있다. 출발해서 3시간 30분 걸린 셈이다.

    해발 468m의 산을 오르는데 해발 1708m의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는 것보다 더 힘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국립공원인 산과 그렇지 않은 산의 차이이리라.   불곡산에는 국립공원인 설악산이라면 당연히 설치하였을 철제나 목제 계단이 없는 것이다. 인공구조물로 고작 있는 것이라고는 군데군데 매 놓은 밧줄밖에 없으니, 두 발만으로 오를 수 있는 설악산과 네 발을 다 동원하여야 오를 수 있는 불곡산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양주시가 부자동네가 되어 불곡산을 시립공원으로 지정하고 험지마다 계단을 설치할 날을 기대하여 본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산에 오르는 묘미가 반감되려나.

    정상에서 양주시청 쪽으로 내려가는 능선길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이다. 이 길은 암릉길이 아니라 푹신한 흙길이고 경사도 완만하여 그야말로 미음완보(微吟緩步)할 수 있다.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벤치가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등산로에 벤치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은 곧 산책로 수준이라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우거진 송림숲의 솔향기를 맡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후 2시 30분, 산을 다 내려오니까 이제 정말로 비가 오기 시작한다.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이다. 우리 일행 중에 분명 평소에 덕을 많이 쌓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누구일까.(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