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의 세월이 흐르고(북악산)

2010.02.16 12:32

범의거사 조회 수:10551

 


        39년의 세월의 세월이 흐르고

            

 
   6년 전인 2001년 6월에 서울 성곽 탐방길에 나섰던 일이 있다. 그때 서울 과학고등학교 뒤의 명륜동에서 출발하여 와룡공원에 이르렀다가 길이 막히는 바람에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기억이 새롭다.

  명륜동이 끝나고 삼청동이 시작될 즈음에서 뜻밖에도 군부대가 나타나 탐방객의 길을 막는다. 아마도 그 아래 어딘가에 있을 청와대를 경비하기 위해서이리라. 그 옛날 경복궁을 지키기 위해서도 그랬을까.... 덕분에 자하문까지 가보겠다던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통일이라도 되기 전에는 이쪽의 개방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성곽과 군부대 사이에 튼튼한 철조망을 치고 경계를 엄히 서는 대신, 지금까지와 같은 정도의 길을 내어 民草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게 하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성곽 바깥으로 나가는 암문을 만들고 그 밑으로 길을 내든지.... 쯧, 혼자만의 생각이다.

   통일이 되기 전에는 가보기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하였던 그 길이 6년 후인 2007. 4. 1. 뚫렸다. 그래서 6년 전에 남겨 두었던 그 길을 가보기로 했다. 법원도서관의 국과장, 심의관들과 함께.



   2007. 5. 12. 토요일 아침 9시,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 부근 버스 정류장에서 02번 초록색 마을버스에 올라탈 즈음 하늘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비가 계속 올 것인가 말 것인가...? 전날 오후부터 이날 아침 7시까지 들은 일기예보상으로는 오전 중에 비가 계속 오다가 오후 늦게나 갠다는데...

   버스를 타고 감사원을 지나 꼬불꼬불 산골길로 올라가 성균관대학교 후문 앞에 다다라 차에서 내리기까지는 약 10분 정도 걸린다. 여기서 계속 길을 따라 200m 정도 걸어 올라가면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터널이 나온다. 이 터널은 근래에 뚫은 것으로서 성곽의 밑으로 낸 것이므로 원래대로라면 그 성격이 암문(暗門)에 해당하지만, 자동차가 왕복 2차선으로 다닐 정도이니 암문(暗門)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튼 이 터널의 우측길을 따라 터널 위로 10여 미터 올라가면 성곽을 만나게 되는데, 그곳에 서울성곽을 설명하는 게시판이 세워져 있다. 이 게시판의 오른쪽은 와룡공원으로 여기서 명륜동 쪽으로 이어지는 성곽길이 이제까지 개방되어 온 부분이다. 반면 게시판의 왼쪽으로 난 길로 3m 정도 올라가면 성곽의 일부를 헐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만들어 놓았는데, 이를 통해 밖으로 나서면 바로 그곳에 서울 성곽 지도를 그려놓은 안내판이 또 설치되어 있다. 이 지점부터 왼쪽으로 난 길이 바로 1968. 1. 21. 북한 무장공비(김신조 등 31명)의 청와대 습격사건 후 폐쇄되었다가 2006년 4월 숙정문 부근이 일부 개방되고, 이어서 올해 39년 만에 전부 개방된 서울성곽길이다.

  성곽의 바깥으로 난 길을 따라 400미터 정도 올라가 나무계단을 타고 성곽 안으로 들어오면 말바위쉼터가 나온다. 이름으로 보아서는 근처 어디에 말의 모양을 한 바위가 있을 법한데 아무리 둘러봐도 안 보인다(이는 창의문 쪽에 있는 ‘돌고래쉼터’도 마찬가지이다). 여하튼 이곳에서 주민등록증 등으로 신분 확인을 하면 목에 걸 수 있게 만든 출입증을 준다. 이 출입증을 받은 사람만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1시간 단위로 150명씩 안내인을 따라 입장할 수 있는데, 100명은 인터넷으로 사전예약을 받고, 50명은 현장에서 즉석 접수한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계속 방송한 탓인지 이 날은 현장 접수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사전 예약하고 온 사람 역시 100명에 훨씬 못 미친다.            
   하늘이 잔뜩 흐리기만 할 뿐 비가 올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되면 날이 맑아 더운 것보다 오히려 더 좋다. 제발 산행이 끝날 때까지 그러기를....

  출발에 앞서 안내인이 주의를 준다. 창의문(자하문)까지 4.3km 구간 중 화장실이 없다는 것, 물이 나오는 곳도 없다는 것, 군부대시설을 향하여 사진을 찍지 말라는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말바위쉼터부터는 성곽의 안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간다. 이 길은 평평한 자연석이나 보도블록 등으로 정비되어 있어 걷기가 편하다. 경사도 급하지 않다. 때문에 굳이 등산화를 신을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푹신한 운동화를 신는 편이 더 나을 듯하다. 길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길의 한 쪽으로는 철책이 설치되어 있으며, 그 철책을 넘는 사람이 있을까 봐 일정 간격으로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성곽의 바깥쪽에도 성곽을 따라 길이 나 있지만 이는 군사용이기 때문에 일반인은 통행이 불가능하다. 그 바깥 길을 따라 휴전선의 철책을 연상케 하는 철책이 다시 2중으로 설치되어 있다. 결국 북악산을 전부 개방한 것이 아니라 북악산의 성곽길만, 그것도 한 쪽만 개방한 셈이다. 통일이 되기 전에는 그 이상은 바라기 어려울 것이다. 후일 이게 잘못된 생각임이 판명된다면 더욱 좋겠지만...

   말바위쉼터에서 숙정문까지는 20분이 채 안 걸린다(이 탐방길은 대부분의 구간이 15분 내지 20분 걸린다). 숙정문(肅靖門)은 서울성곽에 낸 사대문(四大門)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1396년(태조 5년)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四小門)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는데, 건립 당시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숙정문이라는 이름이 처음 문헌에 등장하는 것이 1523년(중종 18년)이라 하니 아마도 그 무렵에 이름이 바뀐 것이 아닐까...

  6개월이면 강산이 변하는 작금의 현실은 차치하고 옛말대로 하더라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39년의 세월이면 강산이 적지않이 변하였을 것이다. 39년 전의 성곽길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숙정문의 문루가 복원된 것이 1976년의 일이고 보면 북악산의 성곽에도 분명 크고 작은 변화의 물결이 지나갔으리라. 그 사이 그 성곽에 의하여 보호되는 청와대의 주인은 여섯 번 바뀌었다.

   사대문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좀 더 살펴 보자. 아래는 조선일보 2005. 9. 10.자에 실린 조용헌님의 글이다.

  “4대문의 명칭은 모두 음양오행에다 근거를 두고 있다. 동대문을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한 이유는 동쪽이 봄을 상징하는 까닭이다. 봄은 생명이 움트는 목(木)의 계절이므로 어질 인(仁)으로 생각하였다. 팔자에 목이 많은 사람은 인정이 있다. 서쪽은 계절적으로는 서리 내리는 가을이요, 금(金)을 상징한다. 금은 의리를 뜻한다. 금이 많은 사람은 의리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서대문을 돈의문(敦義門)이라 하였다. 남쪽은 여름이요 화(火)를 의미한다. 화는 사물을 밝게 비추므로 투명하고 예의가 바르다. 화(火)가 많은 사람은 자기가 먼저 술값을 낸다. 그래서 남대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고 하였다. 북쪽은 겨울이요 수(水)를 가리킨다. 물은 고요하므로 지(智)를 뜻한다. 물이 많은 사람은 지혜가 있다. 따라서 이런 원칙에 따른다면 북대문의 이름은 ‘지’(智) 자가 들어가는 이름이 들어가야 맞지만, 실제 이름은 숙정문이다. ‘숙정’(肅靖)의 뜻을 풀어보면 ‘엄숙하게 다스린다’, 또는 ‘엄숙하고 고요하다’는 의미이다.
  왜 북대문에다가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풍수원리에서 볼 때 북대문 자리는 주산인 백악산(白岳山)의 동쪽 맥이 내려오는 곳이다. 경복궁의 좌청룡에 해당한다. 1413년 풍수학생 최양선(崔揚善)이 문을 내면 왼팔의 기운을 손상시킨다고 주장하여 북대문이 폐쇄되기도 하였다. 될 수 있으면 손을 대지 말고 조용하게 보존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북쪽은 물이 들어오는 방향이다. 물은 성적인 에너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물이 많다’는 것은 섹스에너지가 풍부하다는 함축이 들어 있다. 따라서 북쪽 문을 열어 놓으면 서울의 여자들이 음란해진다고 보았다. 엄숙한 통제가 필요한 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뭄이 들었을 때는 예외적으로 북대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았다고 한다. 물은 유입하고 불은 차단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위 글을 보아도 북대문에 ‘지’(智)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안 붙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다 보니 이런 글이 눈에 띈다.

“한양의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에는 '지(智)'자를 넣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사대문의 이름을 정할 때 대문 이름에 지혜로움을 의미하는 '지(智)'가 들어가면 백성이 지혜로워져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지(智)'자 대신에 '청(淸)'자를 넣었다고 합니다.”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3&dir_id=1306&eid=PYqkCtkL/uMrEyfiRBIrkCKtYD/u/2xX&qb=vPfBpLmu)


   그러나, 백성을 중시하는 人本思想이 강했던 조선의 위정자들이 과연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더구나 숙종 때 인왕산과 북한산 비봉을 연결하는 산성인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쌓으면서 1715년(숙종 41년)에 세운 성문의 이름을 홍지문(弘智門)이라고 지은 것을 보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아무튼 현재로서는 더 이상 정확한 이유를 알 길이 없다.

   그나저나 유학에서 중시하는 인간의 다섯 가지 도리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중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상징하는 건축물은 이로써 늦게나마 한양 도성에 구비되었는데, 방위상으로는 중앙에 위치하고 토(土)를 상징하면서 신(信)을 의미하는 건축물은 어디에 있을까? 종로 네거리의 보신각(普信閣)이 바로 그것이다. 새벽(寅時 : 오전 4시경)에 33번, 저녁(酉時 : 오후 10시경)에 28번 종을 쳐서 도성에 시간을 알리던 종이 현재의 자리에 처음 걸린 것은 1413년(태종 13년)인데, 그 종루의 이름을 보신각(普信閣)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895년(고종 32년) 고종이 ‘普信閣’이라는 현판을 하사한 이후부터이다. 결국 한양 도성에 五行이 다 갖추어지기까지는 500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숙정문은 뒤늦게 개방한 것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사람들이 문루에 올라갈 수 있다. 문루에서 보면 북쪽으로 삼청각이 손에 잡힐 듯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위로 북악스카이웨이에 있는 팔각정도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북쪽으로부터 음기(陰氣)가 성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숙정문을 폐쇄하였는데, 현대에 와서는 그 문 밑으로 터널(삼청터널)이 뚫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지고, 그 터널 바로 옆에 한 때 우리나라 최대의 요정이었던 삼청각이 자리잡았으니 이 무슨 조화인가. 요정이야말로 음기의 집합체인즉, 그 음기가 터널을 통해 시내로 퍼졌을 것을 생각하면 역사의 흐름이라는 게 아이러니의 연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뒤늦게 터널을 도로 폐쇄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면, 삼청각을 요정에서 일반 음식점으로 바꿔 버린 서울시 당국의 내심에는 풍기문란을 조금이라도 막아보자는 의도가 깔려 있지 않았을까. 나 혼자만의 상념이다.      

   숙정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곳이 촛대바위 쉼터이다. 여기는 말 그대로 쉼터인지라 가지고 온 과일이나 음료수를 먹고 마실 수 있다. 광화문 일대를 중심으로 한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도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안내인이 촛대바위라고 가리키는 곳에는 바위 덩어리가 있기는 하나 도대체 왜 촛대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는 아무리 살펴봐도 가늠할 수 없다. 바위 밑으로 내려가 아래에서 보면 달리 보일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철책을 넘어야 하는 것으로 불가능하다. 이 바위 꼭대기에 일제시대에 간악한 일본인들이 산의 정기를 끊으려고 박아 놓은 쇠말뚝을 뽑은 자리에는 지석(誌石)이 하나 놓여 있다.      

   촛대마루에서 곡장(曲墻)은 가까운 거리이다. 곡장은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성곽 중 일부를 자연지세에 맞추어 돌출시킨 것이다. 성곽의 일부가 돌출된 곳인데다, 대개는 지대가 높은 곳에 곡장을 설치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보는 전경이 일품이다. 특히 북악산의 정상을 향하여 뻗어있는 성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데, 규모가 작을 뿐이지 만리장성에 못지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말바위쉼터로부터 내내 북서쪽을 향하여 오던 길이 곡장을 지나면서부터는 남서쪽으로 바뀐다. 성곽의 안쪽을 따라 10분 정도 가다 보면 길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청풍암문(淸風暗門)을 통해 성곽 밖으로 이어진다. 성곽에 있는 암문은 쉽게 말하면 개구멍이다. 거대한 문루가 있는 성문이 아니라 성곽 밑으로 사람들이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낸 구멍인 것이다. 

   여기서부터 청운대까지는 성곽 밖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게 되는데, 성벽의 모습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성벽의 모습을 잘 보라고 탐방코스를 일부러 밖으로 낸 배려의 소산일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 문화재 관리 당국의 안목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성곽 밖에서 성벽을 유심히 관찰하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메주 덩어리만한 크기의 자연석을 쌓아놓은 부분(처음 축조했을 때의 모습), 장방형의 돌을 기본으로 하면서 사이사이에 잔돌을 끼워 넣은 부분(세종 때 보수한 부분), 석재를 정사각형(=2자x2자)으로 다듬어 규칙적으로 쌓아 놓은 부분(숙종 때 개축한 부분)으로 구별됨을 알 수 있다.  

   성곽 위로 놓인 나무계단을 타고 다시 성곽 안으로 들어와 북악산 정상 근처에 다다르면 청운대(靑雲臺, 293m)가 나온다. 푸른 구름이 맴도는 곳인지는 모르겠으나, 전망이 좋아 시내 풍경이 잘 보인다. 거창한 이름에 걸맞게 무슨 특별한 시설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경치구경 좋도록 공간이 마련된 공터일 뿐이다. 아쉽게도 날씨가 흐린 탓에 남산은 구름 속에 희미한 모습을 하고 있다. 경복궁의 바로 뒤편 산중턱에는 경복궁을 화재로부터 지켜준다는 상서로운 해태바위가 보인다.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보면 촛대바위도 보이지만, 촛대의 모양은 여전히 발견하지 못하겠다. 심미안이 부족해서 그렇다면 할 말이 없다.

   청운대에서 쉬는 사이에 안내인이 먼저 가버렸다. 말만 안내인이지 유적이나 명소에 관한 설명을 제대로 하지도 않아 실망했는데, 인솔자 역할마저 포기한 모양이다. 정작 다른 팀을 끌고 올라온 안내인이 설명하는 것을 귀동냥했다.

  “한양 도성은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음양오행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남대문인 숭례문의 글자가 세로로 쓰여 있는데, 그 이유는 남쪽은 양기가 충만한 곳인데 남쪽 관악산이 그 형상이 불의 모양을 하고 있고 화기가 강해 도성에 화재의 위험이 있으므로 이에 맞대응하는 뜻에서 숭례문이란 글자를 세로로 적었다고 합니다. 경복궁의 방향이 남산의 정면에서 서쪽으로 약간 틀어져 있는데, 이것도 화기가 정면으로 다가오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도성의 다른 대문들은 모두 세 글자인데 동대문인 ‘흥인지문’만은 네 글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도성의 동쪽 산인 낙산의 고도가 가장 낮기 때문에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기운은 빠져나가고 악한 기운이 들어오기 쉬운지라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닮은 ‘갈지’(之) 자를 추가했다고 합니다.”
  
   명색이 안내인이면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이 정도의 설명은 해주어야 하건만, 우리 안내인은 어디로 갔는지 원.... 자유롭게 보고 느끼고 즐기라는 건가? 결국 이후부터 종점까지는 안내인 없이 자유롭게 이동했다.

   청운대 주위의 성벽에는 축조 당시의 공사 구역과 책임자, 공사 일시 등을 기재하여 놓은 것이 있어 눈길을 끈다. 요새 말로 하면 ‘공사실명제’를 실시한 셈이다. 그런데 그곳에다 어떤 철딱서니 없는 사람이 자기 이름을 낙서해 놓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물전을 망신시키는 꼴뚜기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청운대에서 북악산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서는 수백 년 된 토종소나무의 군락도 볼 수 있다. 다소 과장된 표현을 한다면, 힘차게 위로 솟은 가지에서 배달민족의 힘찬 기상을 엿볼 수 있다.
   그 중 한 그루가 소위 1•21 사태 소나무이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러 온 무장공비들과 우리 군경이 총격전을 벌일 당시 애꿎은 이 나무가 무려 15발의 총알을 맞은 것이다. 지금도 그 총탄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전율케 한다.

   북악산의 정상은 해발 342m이다. 서울을 동서남북으로 감싸고 있는 산들의 높이가 인왕산 338m, 남산 262m, 낙산 125m이니 북쪽의 북악산이 제일 높은 셈이다. 이 4개의 산을 잇는 한양성곽의 총 길이는 18.6km인데, 평지에 있는 성곽들은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다 헐리고 산에만 10.3km가 남아 있다.

   북악산(北岳山)의 정상임을 알리는 표석에는 “白岳山 海拔 342m”라고 씌어 있다. 백악산은 북악산의 옛 이름이다. 표석의 생김새나 풍화 정도로 보아 그 옛날에 세운 것도 아니고 근래에 세운 것임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굳이 이름을 白岳山이라고 표기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날씨만 좋으면 고개를 돌릴 때마다 북한산, 인왕산, 남산이 손에 잡힐 듯 보이련만 여전히 찌푸린 날씨 탓에 희미한 윤곽만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날씨가 좋았다면 대신 이때쯤이면 땀깨나 흘렸을 터이니 세상만사가 다 내 구미에만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리라.

   북악산 정상에서 창의문까지는 오로지 급경사의 내리막길이다. 그것도 876개의 계단으로 되어 있다. 나처럼 무릎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최악의 코스이다. 중간에 돌고래쉼터가 있지만 쉬지 않고 내려갔다. 계단이 거의 끝날 무렵에서 출입증을 반납하고 바로 창의문으로 갔다. 문루를 개방하여 놓았기 때문에 그곳에서 한숨 돌리면서 시계를 보니 아직 12시가 채 안 되었다. 쉬엄쉬엄 걸었는데도 2시간이 안 걸린 것이다.

   점심 식사를 하기에는 다소 이른 시각인지라 인근의 환기미술관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성곽과 성문과 궁궐과 푸른 산, 그리고 그것들을 그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에 익숙한 아마추어의 눈에는 현대의 추상미술은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그 어색함을 창의문 옆 “자하손만두” 집의 一味인 만두전골이 풀어주었다. 그동안 잔뜩 흐렸던 하늘에서 드디어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이다. 우리 일행 중 분명 누군가가 큰 덕을 쌓은 모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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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 11. 1. 북악산의 북쪽이 52년만에 개방되었다. 1968년 김신조 사건 이후 굳게 닫혔던 곳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역마살이 낀 나그네가 이를 모른 체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2020. 12. 5. 그 곳을 다녀왔다. 담허와 예산대형이 동행했다. 새로 개방된 지역을 한 바퀴 도는데 대략 2시간정도 걸렸다. 
   경사진 곳에는 계단을 설치하고, 평지에는 야자매트를 깔았다. 따라서 굳이 등산화를 안 신어도 쉽게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길이 편하다. 그래서일까, 겨울이 시작되어 날씨가 쌀쌀한데도 찾는 사람이 많았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후로는 산에 가면 젊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날 또한 마찬가지였다. 군데군데 놓인 벤치에서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개방한 지 한 달만에 서울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자리를 잡은 듯하다. 바람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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