直指人心 見性成佛(황악산 직지사)

2010.02.16 12:01

범의거사 조회 수:7278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Ⅰ 

    2003년의 가을이 아쉬움의 저편 언덕으로 거의 다 건너간 11월 1일(土) 오후 1시 25분, 김천행 새마을호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배석판사 시절엔 부장 잘 만나는 것이 커다란 福 중의 하나인데, 어쩌다 잘못된 인연으로 부장을 잘못 만나 夜勤이 일상사가 되어버린 우리 部의 김정원 판사, 최종길 판사, 이준영 예비판사, 그리고 이준영 판사의 남편, 이렇게 모두 다섯의 가을나그네가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선 것이다.

   불평 한 마디 없이 열심히 일만 하는 그들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뿐이다. 이번 여행길에 그 미안함의 일부분만이라도 덜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후 4시 좀 지나서 김천역에 내렸다. 이번 직지사 留宿과 황악산 등반의 일정을 마련해 준 대구지검 김천지청의 신문식 부장검사가 마중을 나왔다.

   토요일인데도 가족이 있는 서울에 안 가고 기꺼이 안내를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작년에 대전에서 같이 근무한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그 인정이 가슴에 따뜻하게 와 닿는다.


  그런데 신 부장검사 옆에 서 있는 저 인물은 또 누구인가? 사법연수원 훈장 시절 가르쳤던 제자(우남준)가 검사가 되어 김천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내가 온다니까 함께 나왔다는 것이다. 졸업 후에도 옛 훈장을 잊지 않고 있는 그 情이 또한 고맙기만 하다.

   두 검사가 승용차를 가지고 온 덕분에 직지사까지 쉽게 이동했다. 김천역에서 절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 절 마당에서 차를 내리니 직지사 연수원장님(法日)이 반갑게 맞는다.
   정해진 숙소로 가는 길에 만삭이 된 임신부를 닮은 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다. 이름하여 受胎木, 본래의 이름이야 따로 있겠지만 절에서는 그냥 그렇게 부른단다. 아무튼 참으로 희귀하게도 생겼다. 

   山寺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숙소에 배낭을 벗어놓고 절집 구경을 나섰다. 불교 조계종 제8교구 本寺인 直指寺는 신라 눌지왕 2년(418)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지은 절이다. 그 이름을 '直指'라 한 것은 "直指人心 見性成佛"(사람의 마음을 참되게 깨우치면 부처에 이른다)이라는 禪宗의 가르침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一說에는, 아도화상이 一善郡(지금의 선산) 냉산(冷山)에 도리사(挑李寺)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좋은 터가 있다고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지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고려시대 능여화상(能如和尙)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尺)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런가 하면, 직지사가 자리한 황악산(黃岳山) 의 '黃'자는 靑, 黃, 赤, 白, 黑의 五色 중에서도 중앙색을 상징하는 글자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직지사는 海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으로 불린다고도 한다.

   한편, 후삼국시대에 팔공산싸움에서 견훤에게 크게 패하고 겨우 목숨만을 건져 퇴각하던 王建이 이 절에 이르러 능여화상으로부터 밤새 짚신 2천 켤레를 만들면 큰 일을 이룰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부하들과 짚신을 만들었는데, 훗날 그 예언대로 삼국통일을 이루자 능여화상을 國師로 받들었고, 자연스레 직지사의 寺勢가 번창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 중기 사명대사가 머리를 깎고 출가한 사찰이라는 이유로 임진왜란 당시 왜병들에 의하여 대부분의 전각들이 불살라지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후 몇 차례 재건을 하였지만 현재와 같이 번창을 한 것은 1960년대 이후이다. 그래서 직지사의 전각들에서는 아쉽게도 고풍스러움을 느끼기가 어렵다.

   역사가 어떠하든간에 멀리 漢陽에서 온 嘗秋客에게는 우선 한창 절정을 이룬 단풍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그리도 곱고 예쁘게 물이 들었는지... 그 단풍보다 더 예쁜 紅一點 이준영판사의 입에서는 연신 탄성이 터져 나온다.

   直指寺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비로전(천불전), 응진전, 관음전, 약사전, 극락전, 설법전, 명월당, 만덕전, 청풍료, 남월료, 제하당, 사명각 등 전각들이 즐비하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신 회주 綠園스님에 의해 주로 개보수 내지 신축되었다. 스님의 법명인 綠園이 春園과 그 뜻이 일맥상통함을 아는 이 얼마나 될는지.....


  대웅전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드리 赤松과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 잎은 다 떨어지고 노란 감만 주렁주렁 달려 마치 감꽃이 만개한 것처럼 보이는 감나무, 수령을 짐작키 어려울 정도로 고풍스런 느티나무들이 古刹의 면모를 느끼게 한다. 대웅전에서 비로전으로 가는 20m쯤 되는 단풍나무 숲길과 주변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그래서 관광객이 제일 많이 모이는 곳이다.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저녁공양(송이버섯 장아찌는 정말 일품이었다)을 마친 후, 그 중 비로전(毘盧殿)에 들어가 부처님 앞에 꿇어앉았다. 이 곳은 千佛의 부처님을 모신 곳이라 하여 千佛殿이라고도 불린다.
   고려 태조 때 능여화상에 의해 처음 세워진 비로전은 임진왜란 때 兵禍를 면한 3동의 건물 중 하나이다. 그 안의 천불상은 과거, 현재, 미래의 三千佛 중 現劫 千佛을 모신 것이다. 불상의 재료는 경주 남산의 특산물인 옥돌을 사용하였고, 금물을 입혀놓은 모습들이 사방의 모든 부처님을 모셔놓은 듯하다.


   천불전 내에는 비로자나불 뒤로 서 있는 모습의 벌거벗은 童子像이 하나 서 있는데, 참배자가 법당에 들어가 참배할 때 첫눈에 이 동자상을 보면 옥동자를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 나와 함께 참배한 李판사한테 보았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그 전설이 맞기를 빈다.  

   비로전에서 계곡을 건너면 千佛禪院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스님들이 참선하는 곳이기 때문에 일반인 출입금지구역이다. 선원 뒤로는 멀리 황악산의 능선이 보인다. 절 가운데를 흐르는 계곡에 의해 예불공간과 참선공간이 자연스레 나뉘는 게 이채롭다. 
   
                            Ⅱ 

   山寺의 밤은 일찍 찾아온다. 속세와는 달리 9시만 되면 이미 한밤중이다. 深山幽谷의 물소리만이 귓가를 맴돌고 하늘의 별만이 시선을 끌 뿐 인적은 진작 끊긴다.


   山寺에서 밤을 보내는 것을 처음 체험하는 세 판사는 산과 계곡과 별이 자아내는 분위기에 더하여 요사채의 잘 갖춰진 시설에 다소 흥분된 모습이다. 방마다 수세식 화장실과 냉온수가 나오는 샤워장이 딸리고, 방바닥과 벽은 황토로 되어 있고, 보일러로 난방을 하는 요사채, 이제는 山寺에서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모습이다.

   깊은 산속에 있어 찾아가기 어렵고, 가더라도 현대인이 묵기에는 시설이 불편하여 외면당하던 과거의 그런 모습이 아니다. 그만큼 불교가 大衆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쉽게 잠이 들려나.... 반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음을 깨우쳐보려(直指人心) 하지만 잡념만이 머리 속을 횡행한다. 見性成佛은커녕 마구니에게 항복당할 판이다. 이 곳에 온 것만으로도 극락세계에 반쯤 발을 들여놓은 것이라는 연수원장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잠을 청한다.  

   2003년 11월 2일(日) 새벽 3시 30분.


   아침 예불을 위하여 대웅전으로 발길을 향한다. 고개를 드니 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진다. 젊은 스님 한 분이 범종을 친 후 木魚를 두드린다. 사바세계의 중생들에게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도천사터에서 옮겨온 2기의 삼층석탑(보물 제606호)이 대웅전 밖에서 희미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그 사이를 지나 팔작지붕의 대웅전 안으로 들어선다. 조선 후기 불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세 폭의 후불탱화(보물 제670호)가 시선을 끈다. 대웅전 안에는 이미 많은 스님과 신도들이 예불을 올리고 있다. 그 한 옆에 방석을 펴고 부처님께 절을 올린다.

   "부처님, 경호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대입 수능시험을 며칠 앞둔 고3짜리 아들을 둔 아비의 기도는 당연히 그 아들에 관한 것이 어느 것보다도 우선한다. 평소 같으면 國泰民安을 기원하였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순위가 밀린다. 어쩌랴, 사바세계의 어린 중생인 것을.


   예불을 마친 스님과 다른 신도들이 모두 나간 후에도 한 동안 혼자 대웅전에 머물며 절을 하고 또 한다. 경호의 대학입시 합격과 오늘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하여 달라고 빌고 또 빌면서...

   한 시간여 만에 숙소로 돌아왔는데, 일행들은 곤한 잠에 떨어져 있는지 들락날락하며 문을 여닫는 소리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어느 방에서 누군가 코고는 소리가 나는 것 외에는 四圍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그렇게 밤이 깊어간다. 

                                Ⅲ

   최종길판사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예불하고 와서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것이 그만 깊은 잠에 빠졌던 모양이다.
   아침 6시 30분, 주위가 환해지고 있다. 아침 공양 후 연수원장님 방에서 녹차 한 잔을 대접받았다. 山寺에서, 그것도 이른 아침에 마시는 차 한 잔의 향은 하루 종일 입안을 맴돌며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융숭한 환대에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산행을 시작한 시각은 아침 8시. 본래 예정보다 30분이 지체되었다. 그나마 첫 출발지점을 잘못 선택하는 바람에 10여 분 올라갔다 되돌아오느라 다시 30분을 까먹었다.


  그래도 간밤에 잘 자고 아침도 배불리 잘 먹어서인지 모두 컨디션이 좋아 보인다. 특히 김정원판사는 어제 저녁에 감기기운이 있었는데, 밤 사이 싹 가셨다며 환한 얼굴이다.  

   옛날에는 학이 많이 찾아왔다 하여 황학산(黃鶴山)이라고도 불리는 황악산은 서남쪽으로 이어지는 삼도봉(三道峰 : 1,177 m), 민주지산(珉周之山 : 1,242 m)과 함께 소백산맥의 허리 부분에 솟아 있는 산이다.
   직지사 옆 계곡을 따라 난 등산로는 운수암에 이르기까지 포장도로인지라 수월하게 갈 수 있다. 사이사이에 명적암, 중암, 백련암으로 빠지는 샛길이 나오지만 그 때마다 그 곳은 등산로가 아님을 알리는 푯말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헷갈릴 염려가 없다.

   출발지에서 황악산의 主峰인 비로봉 정상까지는 4.7km이다. 정상의 고도가 1,111m라니까 李판사가 처음엔 기가 질리는 표정이다. 이제까지 최고로 높이 올라간 곳이 북한산(836m)이란다.

   출발지의 고도가 높고 바위산이 아닌 흙산이며 정상까지 두 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다는 식으로 안심케 하는데, 정말 안심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래도 남편(유경진 변호사)이 동행하니까 덜 힘들 거라고 짐작해 본다. 그나저나 柳변호사가 새로 산 등산화가 말썽을 피우지 말아야 하는데....

   1시간 늦게 출발한 지라 시간을 벌어야겠기에 쉬지 않고 내달아 단숨에 운수암 밑 삼거리까지 다다랐다. 걸린 시간은 30분.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벌써 땀이 흥건하다. 아직은 이른 시각인지 등산객들은 띄엄띄엄 보인다.        


   여기서부터 능선이 나올 때까지는 웬만한 큰 산이면 다 있는 이른바 '깔딱고개'이다. 나무에 가려 하늘도 잘 안 보이고 산록(山麓)이라 바람도 안 부는 오르막길을 오르고 또 오르는 일만 남았다. 대부분 흙길이어서 다행이고, 조금만 험하다 싶으면 계단이 나타나 초보자도 별 어려움은 없다. 오직 인내심만이 요구될 뿐이다.

   그렇게 30분을 오르자 드디어 능선이 나타난다. 속리산까지 내려온 백두대간이 추풍령과 궤방령을 지나 운수봉을 거쳐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바로 그 능선이다. 능선의 안부(鞍部 : 산마루가 말안장처럼 잘록한 부분)에는 쉬어가라고 벤치가 놓여 있다. '김천시청에서 황악산에 투자를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남서쪽 비로봉으로 향하는 능선길에 일단 접어드니까 좌우에서 바람이 간간이 불어와 땀을 식혀준다. 11월 초의 날씨치고는 화창하다 못해 오히려 더운 편이다. 능선 역시 계속 흙길인 게 마음에 든다. 등산화를 통해서 쿠션이 느껴진다.


   모르는 사이 백운봉을 지나고(안부에서 20분 거리) 멀리 비로봉으로 여겨지는 봉우리가 보인다. 그런데, 이게 비로봉인가 하고 올라가 보면 저 멀리 더 높은 봉우리가 보이고, 다시 그게 비로봉인가 하고 올라가 보면 또 저 멀리 높은 봉우리가 보인다.

   "어, 또 아니네!"를 되풀이하다 보면 맥이 빠진다. 황악산이 워낙 밋밋한 肉山이다 보니 정상이 우뚝 서 있지를 않아, 초행길의 나그네에게는 이 봉우리가 그 봉우리이고 그 봉우리가 이 봉우리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기를 1시간 남짓, 드디어 진짜 비로봉 밑에 도착했다. 헬기장이 있고 그 옆으로 넓지는 않지만 억새밭(2,000평 정도)이 펼쳐져 있어 기념사진 찍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능선에 올라서면서부터 나무마다 낙엽이 다 떨어져 썰렁했는데, 정상 부근에 이런 억새밭이 있어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게 할 줄이야. 산은 끝까지 오르고 볼 일이다. 세 판사들에게 기회가 되면 영남 알프스 사자평이나 명성산의 억새밭 평원을 꼭 가보라고 권한다.

   억새밭 한가운데로 마치 밭고랑처럼 패인 산길을 따라 150m 가량 올라가면 비로봉 정상이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일부임에도 정상은 밋밋하기 그지없다. 정상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어 정상임을 알 수 있지 그마저 없다면 "여기가 정상인가?" 할 정도이다.

   서쪽 산록으로 한달 쯤 전에 전투기가 추락하였다는데, 별로 험할 것도 없는 이 곳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황악산을 소개하는 글에는 정상에 서면 북쪽으로는 속리산이, 동쪽으로는 금오산이, 남서쪽으로는 삼도봉과 민주지산이 각각 보인다고 되어 있는데, 그만한 식별력을 갖추지 못한 아마추어 山客의 눈에는 그저 '사방이 온통 산'이다.  


   표지석 옆에 성황당을 흉내 낸 돌무더기가 하나 쌓여 있어 거기에 돌을 하나 정성스레 얹어 놓는다. 나는 확실히 唯一神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산신령님, 경호에게 지혜를 주시옵고, 오늘 남은 산행 무사히 마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물로 목을 축이고 귤로 비타민을 공급한 후 下山 준비를 했다.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데 불과하지만 서울 가는 기차시각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을 수 없다. 올라온 길과는 반대쪽의 형제봉과 신선봉을 거쳐 내려갈까도 생각했는데, 마침 그 쪽에서 올라온 분이 길도 험하고 시간도 더 걸린다고 하여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기로 했다.


   배낭도 가벼워지고 땀도 식힌 터라 하산길은 한결 쉽다. 그래도 무릎보호대를 하고 지팡이를 짚는 것은 생략할 수 없다. 명색이 1,000m가 넘는 산 아닌가.
   올라갈 때와는 달리 이젠 등산로에 사람들이 제법 붐빈다. 벌써 정상에 갔다가 돌아가는 우리 일행을 보고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수고하십니다."
   "조심해 가세요."  


등산로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흔히 주고받는 인사이다. 비록 生面不知의 사람들이지만 서로서로 걱정을 해주는 그 마음 씀씀이는 산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정경이다. 그런가 하면,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습니까?"
   "다 왔어요. 10분만 가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비록 30분을 더 가야 할지라도 10분으로 줄여서 말함으로써 지친 다리에 희망을 불어넣어 준다.  

   올라갈 때와는 달리 한 번도 안 쉬고 내려갔더니 1시간 40여분만에 절마당에 도착했다. 申 부장검사가 벌써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절 입구의 파크호텔로 안내한다. 찜질방과 사우나시설이 되어 있어 샤워를 할 수 있는 곳이다. 계속되는 세심한 배려에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다.


   샤워를 마치고 근처의 '산중고을식당'이라는 곳으로 갔다. 김천지원과 김천지청에서 단골로 이용하는 곳이란다. 상다리가 휘어지게 산중 고을의 음식이 나왔지만 다 먹지 못하고 일어서야 했다. 갈 길이 먼 것이다.


   다시 김천역까지 태워다 준 신 부장검사에게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서울행 새마을호 열차에 올랐다. 창가에 비치는 따스한 햇살에 스르르 눈이 감긴다. 꿈속에서나 直指人心 見性成佛을 하여볼까....(2003.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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