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간(2)(예외4--하롱베이와 앙코르와트)

2010.02.16 12:04

범의거사 조회 수:10590

                                      

           자연의 신비, 인간의 도전(2)

                        2

   캄보디아 씨엠립  

   하노이를 떠난 후 2시간만에 캄보디아의 씨엠립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의 예천이나 사천공항만한 크기의 자그마한 공항이다. 여기서 캄보디아 입국을 위한 비자를 받는다. 비자를 받느라 대기중인 사람들 중에는 가끔 서양 사람들이 보이긴 하지만 역시 한국인이 제일 많다. 작년에 모로코에서도 느낀 것인데, 한국인의 발길이 참으로 세계의 곳곳을 누비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1시간 정도 걸려 비자를 받고 공항문을 나서자 롯데관광 표지판을 단 버스가 미끄러져온다. 이번에는 아시아자동차에서 만든 35인승 버스다. 곳곳에서 "자랑스런 한국인"의 기상을 떨치고 있는 모습이 고맙기만 하다.  

   공항에서 시내의 호텔까지는 버스로 30여 분 거리이다. 차창에 어리는 평화로운 들판 풍경이 낯설지 않다. 총면적 18만㎢의 캄보디아는 70%가 산이라는 이야기에 일순간 놀랐는데, 그 산의 높이가 해발 50m 이하라는 말에 웃음이 난다. 기실 대분분 평야지대이다. 인구는 1,200만 명이고, 공식화폐는 리알(1달러=2,500리알)이다. 관광지에서는 달러가 통용되기 때문에 현지화폐를 쓸 일이 거의 없다.

   캄보디아 왕국의 국왕은 노르돔 시아누크(82세)이다. 론놀장군이 쿠데타로 집권하여 친미군사정권을 세웠을 때는 북한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인물이다. 당시 세계 어느 나라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는데 유독 김일성이 그에게 망명처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서로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현재 총리는 훈센인데, 그는 죽은 사람으로는 박정희를, 살아있는 사람으로는 전두환을 제일 존경한다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전두환이 대통령직을 마친 후 개인 자격으로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 훈센총리가 너무나 융숭한 칙사대접을 하여 사람들 입에 회자(膾炙)되었다고 한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서 북서쪽으로 약 315Km 떨어진 씨엠립은 근처에 앙코르와트를 비롯한 고대왕국의 유적들이 발견됨에 따라 유명해진 도시이다. 인구는 10만 명. 관광객들을 위한 호텔들이 즐비한데(한 곳에 몰려 있다), 지금도 계속 짓고 있다. 이 호텔들은 대부분 1급으로서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시설이 좋다. 반면 호텔을 제외한 시내의 일반 주거지는 상당히 낙후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도로에는 중안선이 없고, 시내 전체에 신호등이 2개 있는데, 그 중 한 개는 고장이 나 한 개만 작동중이다. 이 작동중인 신호등 주위에는 교통순경이 득실거린다. 거리에 대중교통이 없고, 관광객을 위한 오토바이택시(오토바이 뒤에 인력거를 매단 모습)와 관광버스, 그리고 드물게 자가용 승용차나 트럭이 다니는 곳에 교통순경이 몰려 있는 이유는 신호위반자들로부터 올릴 수 있는 부수입 때문이라는 말을 믿어야 하나....

   "캄보디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평양랭면" 등의 한글 간판이 걸려 있는 거리를 지나 압사라 앙코르 호텔(Apsara Ankor Hotel)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지상 4층의 이 호텔은 실내장식이 목조로 되어 있어 고풍스런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곳에는 건물을 4층까지만 지을 수 있다. 더 높이 지으려면 기초공사를 위해 그만큼 지하로 땅을 파야 하는데, 그러면 땅이 울려 앙코르와트 등이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호텔에서 나와 민속공연을 깃들인 저녁을 먹으러 갔다. 서울의 삼원가든이나 코리아하우스 같은 대형음식점인데, 음식은 뷔페식으로 전통요리가 즐비하게 진열되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식사 중에 압사라공연이 시작되었다.  
   "압사라"는  천상의 무희라는 뜻이다. 뼈가 없는 듯한 소녀들(곡마단의 소녀들을 연상케 한다)이 몸에 온갖 장식을 하고 나와 무대에서 춤을 추거나, 느릿한 동작으로 무용하듯 움직이는데, 워낙 템포가 느려 다소 지루한 느낌을 주었다.

2003년 12월 27일

   앙코르톰

   어제 저녁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덕분에 아침에 가뿐히 일어났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경치가 맑고 깨끗하다. 이곳 역시 건기인지라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호텔의 뷔페식 아침식사는 베트남과 비슷하다. 여기서도 역시 쌀국수가 인기다. 농익은 바나나는 입안에서 절로 녹는다. 우리와는 달리 덜 익은 것을 따다가 익힐 필요 없이 잘 익은 것을 따다 바로 식탁에 올리니 맛이 좋을 수밖에 없다.

   앙코르와트로 대표되는 유적지들이 모여 있는 앙코르지역은 씨엠립에서 차로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이 지역으로 들어가려면 일률적으로 1인당 입장료 20불(1일분이므로 나왔다 당일에 다시 들어갈 때는 안 낸다)을 내야 한다. 아마도 전세계에서 단체할인도, 경로우대도, 청소년 할인도 없는 오직 정액요금을 받는 유일한 관광지가 아닐는지.... 유네스코에서 그렇게 정했단다. 다만 캄보디아 사람들은 무료이다. 하긴 그들더러 그 큰(?) 돈을 내고 들어가라면 자기네 것인데도 많은 캄보디아인들은 이 위대한 유적을 영영 구경 못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흔히 한 마디로 앙코르와트라고 하지만 앙코르와트는 앙코르지역에서 발견된 100여개의 사원 중 하나일 뿐이다. 다만 이것이 제일 크고 불가사의한 점이 많아 이 곳의 유적들을 대표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곳을 하루에 관광하려면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 그래서 통상 잡는 일정이 오전에는 앙코르와트 이외의 것을 둘러보고 오후에 앙코르와트를 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나중에 밝힌다.

   아침 8시 호텔을 떠난 버스가 일행을 제일 먼저 내려 놓은 곳은 앙코르톰의 남문 앞이다. 앙코르톰은 가로 세로 각 3Km의 성곽도시로 앙코르왕조(9~15세기)의 마지막 수도였다. 내부에는 바이욘 사원, 바푸온 사원, 코끼리테라스, 문둥왕 테라스 등이 있는데, 대부분 앙코르왕조의 광개토대왕격인 자야바르만 7세(1181년-1219년) 때 조성된 것이다. 따라서 시기적으로 앙코르와트가 건립된 후이다. 죄인과 개는 앙코르톰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도시 외곽에는 당시 100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니 당시 앙코르왕조가 얼마나 번성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의 인구가 100만이었고, 전성기 로마의 인구는 50만에 불과했다.  

   자야바르만 7세는 정통후계자가 아닌 방계였다. 때문에 그는 정치적으로 기존의 계급제도를 인정하는 힌두교보다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직접 정치를 하는 과정에서 대승불교를 들여오고 스스로를 관세음보살로 자칭하면서 불교를 권장함과 아울러 빈민구제 시설들을 확충하였다. 그는 앙코르 톰을 건설하고, 바이욘 사원, 프레아칸, 닉뽀안, 타 프롬 등 많은 사원을 세웠다. 또 1200년대 초 앙코르 왕국을 괴롭혔던 베트남의 참파국을 복속시켰고, 태국 북부 지역도 다스렸으며 라오스의 브양트얀 부근에서도 그의 비문이 발견될 정도로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왕코르왕조는 왕위 계승 때마다 내분이 일어나는 바람에 대제국을 면면히 이어가지 못했다. 실력으로 왕위를 쟁취한 왕들은 경쟁하듯 새로운 도성과 사원을 건축하였는데, 그 유적들이 지금 나그네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앙코르 톰 성곽(높이 8m)의 바깥쪽으로는 4면을 빙 둘러 폭 20m, 총길이 12Km의 해자가 있는데, 그 당시에는 그 곳에 악어를 길렀다고 한다.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성곽에는 조선시대의 한양성처럼 동서남북의 4대문을 만들었고, 각 문에서 해자를 건너 밖으로 나가는 다리 위에는 머리가 7개 달린 뱀신(사신. 蛇神 --부처의 수호신이다)인 '나가'를 돌로 좌우에 만들어 놓았는데, 한 쪽은 54명의  선신(善神)이 다른 한 쪽은 54명의  악신(惡神. 아수라)이 각기 몸통을 붙들고 있다. 그 신들도 물론 돌로 만들었다.  

   아무튼 이 지역의 유적들은 모두 돌로 만든 것이지, 목재 기타 다른 재료를 사용한 것은 없다. 더구나 그 돌들이 이곳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40Km 떨어진 꿀렌산에서 운반해온 것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건기에는코끼리가, 우기에는 배가 주요 운반수단이었다고 하나, 결국 사람 손이 제일 중요하였을 테니 당시의 백성들의 고초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대원군이 경복궁 하나 짓는데도 원성이 자자하여 그의 실각의 한 원인이 되었는데, 온 도시 전체를, 그 많은 사원들을 모두 돌로 지을 때 동원된 민초들의 삶이 어떠했을까?  
   그런데 그렇게 백성을 혹사한 전제군주가 있었던 나라일수록 오늘날 그 후손들이 그 남겨진 유적 덕분에 쉽게 돈을 번다는 게 아이러니이다. 이집트,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중국의 유적들이 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왕이 최고의 군자여야 했던 조선시대에 지어진 궁궐들은  인본주의의 산물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앙코르톰의 사대문 중 가장 발 보존되어 있는 남문은 높이가 25m이다. 윗부분은 동서남북의 4면으로 높이 3m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이 문을 지나 드디어 '신들의 세계'로 들어가 1500m 쯤 가면 거대한 관세음보살상의 머리를 새겨놓은 바이욘 사원을 만나게 된다.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돌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사원에는 주위 54개 부락을 상징하는 54개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고, 벽면에는 크메르인, 중국인, 베트남인들의 당시 전쟁하는 모습, 농사짓는 모습, 투견이나 투계(鬪鷄)를 하는 모습 등 생활상이 부조되어 있다. 지하에는 에메랄드불상이 묻혀 있다고 하는데, 구전되는 이야기일 뿐 확인된 것은 없다.  

   서두른 탓에 이제 겨우 오전 10시이다. 벌써 다리가 아파오는데 말이다.
   바이욘사원을 나와 그 옆의 바푸온사원으로 이동했다. 이 사원은 건물 뒤편에서 커다란 나무가 자랄 정도로 심하게 손상되어 현재 복원을 위한 해체작업이 진행 중이다. 프랑스인들이 그 일을 맡고 있는데, 완성까지는 앞으로 60년 정도 걸릴 거라고 한다.
  
   바푸온 사원의 옆에 있는 노점에서 밀짚모자와 팔찌를 샀다. 밀짚모자는 2개에 1불, 팔찌는 3개에 1불이다. 밀짚모자는 거북이와 말썽이가 해를 가리기 위해 필요하지만, 팔찌는 그 노점상이 딱해서 사준 것인데, 뜻밖에도 여행이 끝날 때까지 두 아이가 열심히 차고 다녔고, 기념품으로 한국에까지 가지고 왔다. 이 노점상도 그렇지만 앙코르톰 안에는 잘린 다리를 이끌고 다니며 물건을 팔거나 구걸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랜 내전의 상흔이라고 한다.  

   바푸온사원에서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길을 따라 이동하자 숲속에서 또 하나의 사원이 나온다. 힌두교 사원인 피미야나카스 사원이다. 소마공주가 매일 밤 남자를 바꿔가면서 거주했다는 천상의 궁전이다(또는 국왕이 매일 소마공주와 밤을 지내야 했으며, 하루라도 거르면 재앙이 닥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제껏 매일 밤 여자를 바꿔가며 향락을 즐겼다는 이야기는 수없이 들었어도 그 반대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처음 듣는다. 캄보디아는 확실히 여자가 대접받는 나라인가 보다.
   이 사원 역시 규모가 엄청난데, 아쉽게도 붕괴 위험 때문에 올라가지를 못하고 그 앞에 마련된 공터에서 바라보는 데 그쳤다.  

   공터에는 의자들이 있어 다리를 쉴 수 있었고, 마침 그 옆 노점에서 야자수 열매를 2개에 1불씩에 팔아 아이들과 함께 빨대를 꽂고 목을 축일 수 있었다. 식구들과 달리 동남아 여행이 처음인 나로서는 처음 맛보는 것이었으나, 다소 달착지근하여 많이는 못 마셨다. 그리고 야자수 열매가 코코아의 원료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는데, 집사람으로부터 여태 그것도 몰랐냐는 핀잔을 들었다.

   잠시 쉬면서 기력을 충전한 것은 앙코르톰의 중심에 있는 코끼리테라스를 둘러보기 위함이다. 율브리너(Yul Brynner)와 데보라 커(Deborah Kerr)가 주연한 영화 "왕과 나(The King and I)"의 촬영지인 이 곳은 왕이 사열을 하던 곳이다. 사열대로 쌓은 돌단에는 코끼리의 부조가 열을 지어 있다. "에라원"이라 불리는 이 코끼들은 코가 3개인 것이 특징이다.  
   코끼리테라스 앞에는 공원이 조성되기 전의 여의도광장만한 넓은 광장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주위로 숲이 울창한 밀림 속에 이런 광장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 코끼리테라스 옆에는 문둥왕상(독사와 싸우다 독사의 피가 묻어 문둥병에 걸려 죽은 왕의 동상. 문둥병에 성기가 떨어져 아랫도리가 밋밋하다)이 있고, 그 밑으로는 '악신의 계곡'이 있다. 이곳은 좌우의 높은 벽 사이로 계곡 같은 미로를 내서 사람들이 그 곳을 지나면 죄를 씻는다고 한다. 다른 곳과는 달리 여기는 벽에 조각을 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코끼리테라스 앞 광장에 대기중인 아시아자동차 버스를 타고 '승리의 문'(동문 옆에 만든 또 하나의 문이다. 동문은 '죽음의 문'이라고 하여 통행하지 않는다)을 통해 앙코르톰을 벗어났다.
   문을 나오면서 보니 자동차와 문 사이의 틈이 주먹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다. 마치 아시아자동차에서 이 문에 맞추어 버스를 제작한 것으로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이다. 서울의 백화점에서 운영하던 35인승 셔틀버스들이 운행이 중지되자(재래시장 상인들의 보호를 위하여 운행정지가 합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졌던 기억이 새롭다. 자유경쟁을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국가에서는 이례적인 결정이다) 동남아로 수출되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절묘하게도 이보다 더 큰 버스는 문을 통과할 수 없는 바람에 이곳에서는 관광버스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니 세상사 정말 새옹지마이다. 일본차에는 그런 차가 없어 일본인 관광객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이 버스를 이용하는데, 기분 나쁘다고 아시아자동차의 마크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벤츠마크를 달고 다닌다. 참으로 속 좁은 일본인들답다.  

   타프롬사원

   앙코르톰에서 나오자마자 사람들이 우~ 몰려간 곳은 다름 아닌 화장실이다. 앙코르톰에는 화장실이 없기 때문이다. 숲속에 자리잡은 이 화장실은 의외로 깨끗하다. 앙코르와트를 포함하여 이곳 유적지 안에 있는 유일한 화장실이다.  

   오전 관광의 종착지는 타프롬 사원이다. 자야바르만 7세가 자신의 어머니를 위하여 지은 사원이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는 18명의 고승, 740명의 관리, 615명의 무희, 2,202명의 인부, 79,365명의 관리인이 거주하였고, 3,140개의 인근 부락이 이 곳에 예속되었다고 하니, 자야바르만 7세의 효심이 너무 지나쳤던 것 같다.  
   입구에서 사원건물까지 난 비포장길은 적토에 가까운 황토흙이 먼지를 날리는데, 길 한쪽 옆에서 일단의 악사들이 관광객을 위한 음악을 연주한다. 앗, 그런데 이게 웬 음악? 아리랑의 선율이 은은히 울려 퍼진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이곳을 오는지 알 만하다. 수고비로 그들 앞에 놓인 그릇에 1불을 놓고 왔다.  


   이 사원의 건물로 들어서자 가이드가 주의를 준다. 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고, 문이 워낙 많아 자기를 놓치면 미아가 된다고 한다.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영화 "툼레이더(Tomb Raider)"를 찍을 만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사원은 이러한 것보다는 이 곳에서 자생하는 명주솜나무(스폰나무)들로 더 유명하다. 크기가 어마어마한 이 나무들은 뿌리가 사원의 담을 덮어버린 것이 있는가 하면 사원 안의 건물을 통째로 감싸고 있는 나무도 있다.
   베어내자니 그 과정에서 담장이나 건물이 허물어질 것 같고, 그냥 두자니 종국에는 담장이나 건물이 허물어질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궁리 끝에 성장억제제를 주사하고 있다고 한다. "살지도 죽지도 못한다(not live, not die)"는 말이 딱 어울린다.

   재미있는 것은 이 나무의 뿌리에 관광객들의 소행으로 보이는 각국 말로 된 낙서가 지저분한데, 으레 있을 법한 한국어 낙서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한다며 가이드가 웃는다.  

   사원 안에 있는 여러 탑 중 '한풀이탑'이라고 불리는 돌탑 안에 들어가면 공명현상을 체험할 수 있다. 한이 많은 사람이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치면 탑 안 전체에 소리가 울린다.

   타프롬사원을 나서면서 시계를 보니 11시가 좀 넘었다. 가이드가 점심을 먹으러 간다고 한다. 아니 아직 12시도 안 되었는데....
   캄보디아 사람들은 아침 7시부터 11시까지 일하고 다시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일하며,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4시간 동안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잔다고 한다. 덕분에 관광객도 낮잠을 자는 나라가 바로 캄보디아이다. 열대지방의 더운 기온 탓에 생겨난 문화이다. 그리고 주5일 근무이다. 이는 근로자의 복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일이 많지 않아 바쁠 게 없는 때문이 아닐까.

   앙코르와트

   현지문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낮잠을 자고 오후 3시에 다시 앙코르와트로 출발했다. 이번 캄보디아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앙코르와트를 하필 오후 늦은 시각에 찾는 이유는 이 사원의 정면이 서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후에 접근을 해야 태양을 등지게 되어 덜 덥고, 아울러 사진도 선명하게 찍을 수 있는 것이다.  

   세계 7대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앙코르와트('앙코르'는 도시,'와트'는 사원이라는 뜻이다) 유적은 1858년 프랑스인 앙리 모어가 처음 발견하였다. 12세기 초에 수르야바르만 2세가 건립한 이래 캄보디아의 서북부 밀림 속에서 700여 년 동안 그 모습을 감춘 채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곳을 찾는 세계의 관광객들 중 제일 많이 오는 사람들은 프랑스인이고, 다음이 일본인, 그리고 세 번째가 한국인이라고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맨 한국인이어서 제일 많을 줄 알았는데, 한국인은 건기에 집중적으로 오기 때문에 그렇단다.

   동서로 1,500m 남북으로 1,300m나 되는 이 거대한 석조사원은 그 규모가 우선 혀를 내두르게 한다. 앙코르톰처럼 주위에 해자(앙코르톰과는 달리 외침 대비보다는 수로의 구실을 한다)가 있는데, 그 폭이 무려 200m(앙코르톰의 10배)이다. 그 해자 이쪽에서 보아야 앙코르와트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정면에서 보면 돌탑이 3개 보이고, 측면에서 보면 5개가 보이며, 앞에 있는 연못 속에 비치는 탑까지 합하면 10개가 보인다.  

   해자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참배도로를 따라 서쪽의 정면으로 접근하자 5개의 문이 나타난다. 중앙문은 왕이, 그 좌우의 문은 귀족들이, 그리고 다시 그 옆의 좌우 끝에 있는 문은 평민들이 출입하던 곳이다.
   중앙문 옆에는 머리가 7개 달린 뱀신인 "나가"상이 완벽하게 복원되어 있고, 그 나가상 옆에 나무가 한 그루 서있는데, 다름아닌 팜나무이다. 잎사귀 가장자리가 톱니처럼 날카로운 게 예사롭지 않다 했더니 킬링필드로 유명한 폴포트정권이 지식인들을 학살할 때 그 잎사귀로 목을 베었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들으며 중앙문으로 눈을 돌리면 내전 당시의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보인다. 백성들을 굶주림으로 내몬 이념 갈등의 상흔이다.

   앙코르와트는 불교사원이 아니라 힌두교사원이다. 1층에는 힌두교의 시바신(파괴와 상상의 신)을, 2층에는 브라마신(천지창조의 신)을, 3층에는 비슈누신(태양신)을 모셨는데, 수르야바르만 2세는 자신을 힌두교의 최고신인 비슈누신과 일체화하여 자기의 묘로 사용하려고 이 사원을 건립하였다고 하니 그 야망이 놀랍고도 허망하다. 신의 영역에 인간이 도전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 왕이 과연 신이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고, 그가 간 후 900년이 지난 지금 멀리 동방에서 온 한 여행자가 불경스럽게도 그가 출입하던 문을 통해 이 사원으로 들어간다.
   안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자 끝이 안 보이는 회랑이 이어진다.  
   회랑의 동서남북 벽에는 모두 바이욘사원처럼 크메르인의 생활을 담은 정교한 조각이 계속된다. 전쟁이나 왕의 행군 등 속세에서의 생활만이 아니라 죽어서 가는 사후세계의 모습들도 조각되어 있다. 천당과 지옥으로 가는 갈림길에는 '야마'(염라대왕)가 앉아서 판정을 내리고 있다. 지옥에는 채찍질, 혀빼기, 불과 바늘로 고문하는 장면 등이 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흥미를 끈다.  
   회랑의 천장은 그 안에 있었을 보물을 찾는답시고 후세인들이 뜯어내는 바람에 훼손되었는데, 부분적으로 시멘트로 복원한 곳도 있다. 보물을 찾아서가 아니라 박쥐똥으로 벽이 부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니 유적 훼손에는 사람, 동물이 따로 없다. 스페인의 세비야에 있는 스페인광장의 건물을 자기 똥으로 부식시키는 비둘기나 이곳의 박쥐나 조상이 같은 모양이다.

   남쪽 회랑으로 돌아가 2층을 거쳐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섰다. 오후 관광을 위해 호텔을 나설 때 가이드가 여자들도 반드시 바지를 입고 나오라고 한 말의 의미를 알겠다. 계단의 경사도가 무려 72도이다. 일행 중 할머니들은 지레 겁을 먹고 기권하신다. 계단의 폭은 또 왜 그리도 좁은지. 네 발로 기어 올라가면서 차마 아래는 내려다보지 못하겠다. 굽이 높은 신을 신었던 사람들은 아예 맨발로 오른다. 비슈누신의 영역으로 승천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진땀을 흘린 끝에 겨우겨우 다 올라가자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중앙탑. 그 높이가 무려 65미터나 되는데, 그 무게가 15톤이라니! 65미터면 20층 건물보다 높은데, 타워크레인이 있었을리 만무한 그 옛날에니 어떻게 저 크고 무거운 돌을 올렸을까? 앙코르와트의 불가사의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중앙탑은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중앙탑의 내부로 들어가자 뜻밖에도 석조불상이 하나 조성되어 있고 참배객이 줄을 잇는다. 이 사원이 만들어진 후 힌두교에서 불교로 개종(앞에서 보았듯이 앙코르와트보다 나중에 세워진 바이욘사원은 불교사원이다)한 후세의 왕이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힌두교사원의 불상-스페인에서 보았던 이슬람사원의 예수상처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중앙탑을 가운데 두고 3층의 바닥을 4분하여 깊게 팠다. 그 곳에 물을 받아 두었다가 왕이 이곳에 행차하면 비슈만신을 참배하기에 앞서 목욕을 했다고 한다.  

   3층의 회랑에서 바깥쪽을 보면 앙코르와트의 주위가 한 눈에 들어온다. 평야지대에 우뚝 솟아 있으니 시야를 가릴 게 없다. 서쪽으로 서서히 기울어가는 석양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기 십상이다.  

   그나저나 올라올 때는 앞만 보고 기어서 왔기 때문에 무서움이 덜했지만 내려갈 때는 어쩐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쇠줄을 만들어 놓아 그걸 잡고 내려가게 만들었는데, 그게 한 줄이라 사람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그 쇠줄을 잡으면 그나마 덜 무섭기는 하겠지만 기다리다 날이 샐 판이다.
   우왕좌왕하는 일행을 가이드가 한 쪽으로 이끈다. 그를 따라 가보니 서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경사가 한결 덜하다. 그 옛날 왕이 오르던 계단이다.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얼른 그리로 내려왔는데, 알고 보니 보수공사가 진행중이라 일반인 출입금지구역이다. 어째 사람들이 적다 했더니만... 쉽게 내려오긴 했지만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앙코르와트에서 나와 기다리던 버스에 올라탔다. 10여 분 거리의 프놈바켄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이다. 무려 해발 60m의 이 언덕은 인근에서 제일 높은 곳이다. 여기서 보는 일몰이 말 그대로 장관이란다.
   아, 그런데... 먼지가 풀풀 나는 언덕을 오르자 5층의 피라미드형 사원이 나타나고, 그 사원을 올라가려면 다시 급경사의 계단! 서둘러 헐레벌떡 올라갔지만 이미 석양은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고 없었다. 앙코르톰 서쪽의 바라이호수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쉬움을 달래려고 내려갈 때는 코끼리를 탔다. 1인당 10불(팁은 2인당 1불).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산길을 코끼리등에서 흔들거리며 내려왔다.

   씨엠립으로 돌아와 2주일 전에 문을 연 깔끔한 중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아이들은 호텔의 야외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2003년 12월 28일

   바라이 호수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호텔 뷔페식당에서 쌀국수를 다시 한번 배불리 먹고 9시에 길을 나섰다. 이번 여행의 좋은 점 중에 하나가 일정이 느긋하다는 것이다. 작년 스페인 여행 때 새벽별 보기 운동을 하다가 감기몸살에 고생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40여 분 걸려 도착한 곳은 바라이호수. 고대 크메르인들은 앙코르톰을 건설하면서 물을 확보하기 위하여 동쪽과 서쪽에 각각 2Km X 7Km 규모의 직사각형 인공저수지를 만들었다. 그게 바로 바라이호수이다. 그 중 동쪽의 것은 매몰되어 평지가 되었고 현재는 북서쪽의 것만 남아 있다.
   호수의 선착장에서 통통배를 타는데, "머리 조심하세요" 하는 말이 들린다. 통통배 운전사의 조수인 어린 아이가 우리 일행이 한 사람 한 사람 탈 때마다 한국말로 주의를 주는 것이다.
   그 배를 타고 저수지 한가운데 있는 섬으로 갔다. 무능한 장군의 유배지이자 악어훈련장이었다고 한다. 거기에도 허물어진 사원(웨스트 메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새로 지은 절도 있는데, 보살로 보이는 할머니가 혼자 지키는 거의 무당집 수준이다.

   섬 안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그림엽서와 과일을 파는 노점이 있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이들이 많이 있어 궁금했는데, 이내 궁금증이 풀렸다. 또 다른 통통배를 타고 온 한국관광객의 가이드가 아이들을 모아 놓고 노래를 시키자 줄줄이 노래가 이어지는데.... 맙소사, 놀랍게도 그 노래가 산토끼, 학교종, 송아지, 아리랑 등 우리의 동요나 민요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의 발음이다. 우리의 귀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한국어 발음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노래의 대가는 물론 돈이었으나, 10여 명의 아이들 전부에게 준 캄보디아 돈을 달러로 환산하면 모두 합쳐 고작 2불도 안 된다. 그래도 그들은 너무나 감사해 했다. 5-60년대에 미국인이나 일본인들을 보고 한국의 어린이들도 그랬겠지.... 입맛이 씁쓸하다.

   오전 10시 30분. 바라이호수에서 돌아오는 길에 재래식 시장이 있어 잠시 들렀다. 식료품과 과일, 그리고 각종 잡화를 팔고 있다. 꼬리를 입에 물고 있는 돼지머리가 웃음을 자아내고, 뱀을 토막쳐서 팔고 있는 아낙네의 손놀림에서는 삶의 치열함을 실감한다.  
   캄보디아의 농촌지역에는 뱀이 많아 집을 지어도 땅바닥에서 일정 높이 위에 지으며, 기둥은 4각형으로 만들어 뱀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뱀이 식품으로서 인기가 높다니 아니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시장이 있는 큰 길가에서는 고추를 내놓은 채 맨발로 뛰어다니다 관광객을 보면 손을 흔드는 어린 아이들에게서는 캄보디아의 빈곤을 보는 듯하다. 저들의 몸은 때와 먼지로 뒤덮였을망정 영혼만은 순수하지 않을는지....

   오전 11시 호텔로 돌아와 수영을 했다. 조금 전의 그 아이들은 씻을 물이 없어 온몸에 땟국이 흐르는데 이 호텔의 수심이 2m가 넘는 야외수영장은 물이 넘쳐난다. 30여 분 동안 말썽이와 둘이서 수영장을 독점해서 놀았다. 빨리 헤엄치기 시합을 하였지만 말썽이한테 번번히 졌다. 10代와 50代, 떠오르는 해와 지는 해의 차이이다.

   톤레삽 호수  

   점심식사 후 마지막 관광지인 톤레삽호수로 갔다. 씨엠립 시가지를 통과하여 씨엠립강을 따라 남쪽으로 15Km 정도 가야 하는데, 시가지를 벗어나면 비포장도로이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가 풀풀 나는 그 길가에는 바나나껍질로 지붕과 벽을 만든 초가집들이 즐비하다. 돈이 있는 집은 펌프를 묻어 지하수를 길어 올려 사용하지만, 대부분의 집들은 독자적인 펌프가 없고 마을 공동의 펌프를 사용한다. 그 공동의 펌프를 자기 집 앞에 유치한 사람은 그 중에서도 그나마 형편이 나은 사람이다. 고작 한두 평 정도 될까 말까 하는 집 안에는 여러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산다. 마루 밑에는 돼지나 개가 잠이 들어 있고...  

   물이 호수로 흘러드는 씨엠립강 하류의 선착장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각종 여행사의 한글간판이 어지럽다. 그 옆을 지나 10인-12인 정도 타는 통통배에 올라탔다. 운전조수는 역시 10세 남짓의 어린 아이다. 그러나 배를 다루는 솜씨가 능숙하기 짝이 없다.  

   호수를 만나려면 그 배를 타고 30여 분 수로를 따라 내려가야 하는데, 수로의 양쪽에는 수상가옥이 즐비하다. 조그만 나룻배에 판자로 집을 지어 물 위에서 사는 것이다. 가라앉지 않는 것이 용하다 싶은 이 가옥의 TV안테나가 눈길을 끈다.

   수로의 물은 완전히 흙탕물 그 자체인데, 이 물로 밥하고, 목욕하고, 빨래하고, 일체의 생활을 다 영위한다. 심지어 그 자리에서 대소변도 해결하고, 어떤 집은 돼지도 키운다. 그런데 전염병이 없다는 것이 신기하다. 이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는 가장 심각한 것은 기생충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면서 '사람의 삶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생각케 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삶의 만족도를 조사하면 그들이 우리보다 더 높을 거라고.  

   수상가옥이 많다 보니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수상학교가 있고, 교회도 있다. 노를 젓는 나룻배에 옷이나 식료품 등을 싣고 다니며 수상가옥 주민들에게 파는 장사꾼들도 있다. 수상가옥 마을의 중심가에 있는 관광객 상대 상점(기념품을 파는 곳으로 역시 배위에 있다)에 올라가자 악어양식장도 있다. 상점 주인의 아들이 구렁이를 꺼내 목에 둘러 보인다.  

   톤레삽호수에는 약 850종의 물고기가 산다. 그 중 18종이 식용으로 연간 10만 톤 정도 잡힌다. 특징적인 물고기로는 giant fish로 불리는 2-7m 짜리 물고기, 민물돌고래, 민물복어, 한 마리에 4- 6kg 정도 되는 민물새우, 등이 있다. 민물새우는 한 마리에 우리 돈으로 30-40만 원 정도 나간다고 한다.
   상점에서 그 민물새우의 새끼를 쪄서 관광객들한테 서비스로 제공하는데, 맛이 쫄깃쫄깃하고 고소하다. 톤레삽호수 물로 끓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소 찜찜하였지만...  

   수상마을을 지나 더 나아가자 일순간 열리는 넓고 넓은 바다, 아니 톤레삽호수가 광대하게 펼쳐진다. 수평선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서는 바다이어야 하는데, 분명 호수란다. 우기에는 메콩강의 강물이 역류하여 乾期의 3배가 된다고 하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 그 호수를 가로질러 6시간 가면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 닿는다고 한다.

   킬링필드(Killing Field) 위령탑

   씨엠립으로 돌아가는 길에 와트마이('새로운 사원'이라는 뜻) 사원에 들렀다. 공산 폴포트정권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1990년대에 복원된 불교사원이다. 내가 '뻥끗'(화장실의 캄보디아 말)이 어디냐고 묻자 이곳 승려들이 영어로 그 위치를 가르쳐주었는데, 말썽이는 그것이 신기한 모양이다.  

   공산 폴포트정권은 캄보디아 전국에서 250만 명의 지식인을 학살했다. 그들이 정한 지식인의 기준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 외국서적을 들고 다니는 사람, 안경 쓴 사람, 펜을 오래 잡아 엄지와 검지에 굳은살이 박힌 사람 등이었다고 한다.  

   와트마이 사원에서도 폴포트의 공산정권에 협력하기를 거부하던 승려들은 모두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 사원의 위령탑에는 인근에서 살해된 800구의 유골이 보관되어 있다. 백성은 굶주려 개돼지 같은 생활을 하게 하면서 이념을 내세워 양민을 학살하는 것이 공산주의의 실체인가..... 마르크스가 그런 것을 원하지는 않았을텐데... 아무튼 그의 원죄가 너무 크다.

   씨엠립으로 돌아와 오후 5시에 캄보디아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식으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음식점의 규모가 꽤나 크다. 땅값이 싸서인가?
   돼지갈비가 메뉴로 나왔는데, 이곳에서는 돼지고기가 제일 비싸다고 한다. 캄보디아인 종업원들이 한국말을 능숙하게 구사한다. 이것도 돈의 위력이리라.  

   저녁식사 후 공항으로 이동하여 7시 45분 발 하노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노이 공항에서 다시 대한항공으로 갈아타고 새벽 1시에 출발하여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한국시간으로 아침 6시 50분. 서울에서 하노이로 갈 때는 4시간 30분 걸리는데, 하노이에서 서울로 올 때는 3시간 50분 걸린다. 바람의 방향 때문이다. 4박6일의 일정이 그렇게 막을 내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