貴陀庵의 화려한 외출(북한산의 봄)

2010.02.16 12:06

범의거사 조회 수:12453

 

       귀타암(貴陀庵)의 화려한 외출

 

 

   한 여름처럼 더웠다가는 언제 그랬냐 싶게 늦가을처럼 쌀쌀하고, 때 아닌 장대비가 오는가 싶으면 이내 계속되는 가뭄에 개울물이 말라버리는 등, 그야말로 미친 년 널뛰듯 하는 날씨가 이어지는 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년과 달리 황사가 심하지 않아 서울의 하늘 치고는 맑은 모습을 보이는 날이 많다는 것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펴보려고 계방산(1,577m)을 찾았지만 5월 15일까지는 빈번한 산불로 인하여 入山을 금지하는 통에 헛걸음친 게 보름 전(2004. 4. 11.)의 일이다.

   남한에서 5번째로 높은 산으로 몇 번을 두고 벼르다 큰 맘 먹고 나선 길이 그 모양이어서 허망했지만, 그 바람에 예정에 없던 오대산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갔다 오는 길에 계곡에 상기도 쌓여 있던 눈(雪)을 보고 눈(眼)을 의심하였다가, 그 밑을 흐르는 계곡물의 소름끼치는 차가움에서 강원도의 높은 산 깊은 계곡에는 봄이 늦게 온다는 것을 실감하였었다.

   하긴 상원사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동안 따스한 온돌방의 고마움을 피부로 느꼈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오대산에서 헤매느라 더 심해졌던 무릎 통증이 어느 정도 가시고, 법원 뒷산의 新綠이 제법 자태를 뽐내가는 4월 28일 오후, 서울고등법원 춘계 체육대회의 일환으로 북한산을 찾았다.

 

   비록 이제는 시내 한 복판이나 다름없는 곳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청계산과는 달리 산세의 웅장함이 만만치 않은 북한산을 법관만 120명이 넘는 대식구인 서울고등법원에서 단체로 등반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매사에 빈틈이 없으신 김동건 원장님이 코스를 정하셨는지라 마음 놓고 따라나섰다.

   각 재판부별로 알아서 편한 대로 구기동에 모인 후 등반을 시작하면서 언뜻 시계를 보니 오후 2시가 채 안 되었다. 어제까지 비가 와 걱정을 했는데, 오늘은 맑게 갠 하늘이 화창하기만 하다. 다행히 길도 미끄럽지 않아 錦上添花이다. 하늘의 먼지를 쓸어내고 길의 먼지를 잠재울 정도의 비만 온 것은 오늘의 등산을 축복하기 위함이 아닐까? 이를 일컬어 天佑神助라고 한다면 너무 거창한 표현이런가.

   국립공원 매표소를 지나 산행을 시작한 지 30분만에 갈림길에 섰다. 오른 쪽으로 올라가면 대남문과 문수봉을 거쳐 승가봉을 지나 비봉으로 이어지는 오늘의 主등산로(A코스)이고, 왼쪽으로 가면 승가사를 지나 바로 비봉으로 연결되는 곁가지등산로(B코스)이다. 몇몇 팀이 벌써 도착하여 이리 갈까 저리 갈까 說往說來 하는 모습이 보인다.

   올해 2월에 새로 모인 우리의 자랑스런 貴陀庵(민사 20부)의 식구들, 童子僧(강승준 판사), 은진미륵(김성수 판사), 美人堂(김영현 판사)은 어디로 갈 것인가? 庵主(凡衣居士)와 美人堂은 진작부터 A코스를 택하기로 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으나, 童子僧과 은진미륵의 거취가 관심거리이다.

    은진미륵이 미소만 지으며 태도표명을 유보하고 있는 사이에 童子僧이 B코스의 손을 든다. 평소 산을 오르는 것에 대하여 심한 거부감을 표명하여 온 그대로이다. 이제까지 해발 500미터 이상 되는 곳은 올라가본 일이 없단다.  

   은진미륵도 童子僧의 편에 설 듯하여 자칫 貴陀庵이 첫 외출에서 분열의 위기에 직면할 상황이다. 도리 없이 庵主가 나서서 사나이가 산에 왔으면 당당하게 주등산로를 택할 것이지 쩨쩨하게 B코스가 뭐냐고 손을 잡아끈다.

     그래도 망설이는 童子僧에게 美人堂이 결정적인 미끼를 던진다. A코스를 가면 SK사건 판결을 써주겠다고 한다. 평소 여자에 약한 童子僧, 美人堂의 유혹에 그만 넘어가 고난의 길로 들어섰으니....

   시내에서 보던 신록과는 또 다른 모습의 푸르름이 주위를 덮은 북한산의 봄 경치는 실로 장관이다. 왼쪽으로 문수봉과 오른쪽으로 보현봉을 두고 그 사이에 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는 길의 양옆에서 연두색 나뭇잎과 이제야 피기 시작한 진달래꽃이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한다. 그 풍광에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한 발 한 발 옮기다보니 저 멀리 大南門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에는 연실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고 묻던 童子僧이 이젠 아무 말 없이 저 앞에서 휘적휘적 잘도 걷는다. 정작 은진미륵이 땀을 흘리며 힘들어한다. 그도 그럴 것이 82Kg의 거구를 움직이려니 힘이 안 들겠는가.  

   그에 비하면 100Kg의 인간산맥 호두까기인형(이효두 판사)이 물찬 돼지처럼 날라 다니는 것은 不可思議에 가깝다. 경상도 사나이답게 마나님에게 짐을 꾸리게 하여 지고 온 은진미륵의 배낭에서 오이가 나오자, 올라갔던 길을 되돌아 내려와 그 오이를 받아다 자기 部長인 紅魚선생(이재홍 부장)께 드린다며 다시 뛰어올라가는 그 정성이 눈물겹다.

    그가 발걸음을 뗄 때마다 지축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낀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그 방의 만년소녀(정승원 판사)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지금 한 재판부 전체가 A코스를 택하여 올라가고 있는 것은 민사 20부뿐이다. 원장님이 童子僧과 나란히 걸으시다가 힘들지 않냐고 물으신다. 당연히 힘들다는 대답에 “부장 잘못 만나 고생한다”고 하신다. 앗, 庵主더러 들으라는 말씀인가?

   구기동에서 출발하여 1시간 30분 남짓, 드디어 오늘 산행의 반환점인 大南門에 도착했다. 북한산성에는 모두 12개의 성문이 있고, 그 중에서도 네 개의 큰 문이 있으니 그 남쪽문이 바로 대남문이다. 한양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당연히 북쪽이지만, 어디까지나 북한산성을 기준으로 동서남북을 정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대남문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성터인데, 남한산성과는 달리 북한산성의 성터에는 유물이 남아 있지 않다. 분명 많은 殿閣이 있었을 텐데, 다 어디로 갔을까? 依舊한 것은 山川일 뿐 人傑도 건물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쇠락의 길을 걷기 마련이다.

   저 멀리 보이는 백운대를 배경으로 美人堂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너무 멀어서인가 백운대가 사진에는 보일 듯 말 듯 희미한데, 50대의 庵主가 20대의 美人堂 못지않게 젊어 보임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대남문에서 성곽길을 따라 문수봉 정상(716m)을 거쳐 승가봉으로 직접 가는 능선길이 지름길인데다 주위 경치를 넓게 조망할 수 있어 좋지만, 경사가 심한 바윗길인지라 위험하기 때문에 산록(山麓)을 끼고 도는 길을 택했다. 이 길은 청수동暗門에 도달하기까지는 평지의 산책일이나 다름없다. 간혹 응달에는 어제 내린 비로 길이 젖어 있는 곳도 있으나 경사가 없으니 미끄러질 염려는 없다.  


   동서남북의 대문이 城의 정식 출입문이라면 暗門은 이를테면 성곽에 낸 비상구이다. 북한산성에는 여러 개의 암문이 있는데, 백운대 밑의 위문, 우이동 도선사를 오른쪽으로 끼고 산을 오르다 보면 나오는 용암문, 그리고 바로 이 청수동암문이 그 중 널리 알려져 있다.

   구기동에서 대남문을 거쳐 청수동암문에 이르기까지의 등산로는 나도 오늘이 초행길이지만, 청수동암문부터 비봉으로 이어지는 길은 2001년에 두 번 온 적이 있는지라 낯이 익다. 청수동암문에서 비봉능선을 만나기까지 문수봉의 옆구리를 돌아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심하다. 도리 없이 무릎보호대를 꺼내 찰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팡이도 짚고.... 수술까지 했건만 오른쪽 무릎이 산의 내리막길만 만나면 통증을 전해온다.  

   그나저나 분명 대남문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때는 같이 있었는데, 童子僧이 통 안 보인다. 이미 저 앞으로 내달은 모양이다. 산에 오르는 것은 질색이라고 엄살을 떨더니만 막상 올라오니까 누구보다도 앞서 가는 폼이 다람쥐 뺨친다. 은진미륵과 美人堂 모두 童子僧을 “다람쥐 강”으로 부르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다. 나중에 본인은 辯疎하기를,  

“어차피 온 길로 되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간 바에야 선두 대열에 끼어 걷는 것이 덜 힘들거든요”

그런 경지까지 이미 터득한 마당이라면 산을 멀리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닐는지...

   비봉능선에 관하여는 3년 전에 썼던 글을 옮겨본다.  

  “문수봉의 산록을 벗어나면 남서쪽으로 바야흐로 비봉능선이 시작된다. 이제는 오른쪽으로는 구파발, 그리고 더 멀리는 일산시가지와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왼쪽으로는 세검동과 북악산, 그리고 더 멀리는 남산이 보인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비바람에 의해 기기묘묘하게 형성된 크고 작은 岩峰, 암벽, 암석들이 저마다의 특색을 자랑하고 있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그 길을 따라 승가봉을 지나 40여분 가면 나타나는 사모바위. 크기가 집채만한데 생김새가 네모반듯하여 사모바위로 이름지어진 듯하다. 놓여있는 위치를 보면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 같으나, 아마도 저 자세로 천년의 세월을 견뎌오지 않았을까 싶다.”  

   "사모바위 그 자체로도 충분한 구경거리가 될 명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바로 이 사모바위가 위치한 곳이 바로 비봉능선의 白眉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주위의 지형이 산 위의 능선답지 않게 평평하여 충분히 쉬어갈 수 있는 이 곳은 북한산의 全景을 한 눈에 바로 조망할 수 있는 제일 좋은 곳이다.

    북한산의 등산로로 가장 많이 찾는 우이동→백운대 또는 북한산성→백운대 코스는 북한산의 일면만 볼 수 있는 데 비하여, 이 사모바위에서 보면 북한산의 북쪽부터 남쪽까지 펼쳐지는 능선과 그 요처마다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인수봉(810m), 백운대(836m), 만경대(국망봉, 800m), 원효봉(604m), 노적봉(716m), 문수봉(727m), 보현봉(714m) 등을 모두 한 눈에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모바위를 지나 비봉에 이르기까지는 역시 편안한 길이 이어진다.  

“북한산 하면 왠지 험한 등산로만 연상했는데, 알고 보니 이런 편한 길도 있네요.”

美人堂의 촌평이다.  


   그렇다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험타 하더라’이다. 너무나 좋은 날씨, 잠시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경치, 거기에다 걷기에 아주 편한 등산로, 참으로 환상적인 산행이 아닐 수 없다. 곳곳에서 갑제1호증(사진)을 남기는데, 식구들을 팽개치고 혼자 앞서 가버린 ‘다람쥐 강’의 모습은 담을 길이 없다.  


   북한산은 연평균 탐방객이 500만 명에 이르고 있어 단위면적당 탐방객(64,000명/㎢)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립공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늘은 평일(수요일)의 오후이어서 그런지, 오고 가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비봉(560m)에 도착하니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거대한 암궤 밑에서 다람쥐 강이 기다리고 있다. 암궤 위에서는 ‘영원한 대위’(김대휘 부장)와 민사 18부가 자랑하는 미녀 최서은 판사가 힘들게 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예상대로 다람쥐 강이 완강하게 저항하였으나, 그 저항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함께 정상정복에 나섰다.

   여기까지 와서 국보 3호인 순수비를 안 보고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번에도 美人堂의 솔선수범이 그의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마침 위에서 원장님이 보시고 어서 오라고 격려를 하신다.  

   두 손 두 발을 동원하여 네 발 달린 짐승이 되어 엉금엉금 기어오르자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수비. 진흥왕 16년(서기 555년)에 세워진 본래의 것은 파손의 우려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그 본래의 자리에는 모형이 서 있다(높이 1.54m). 그래서 비석에 “新羅眞興王巡狩碑遺址”라고 씌어 있다.


  고개를 돌려 다람쥐 강의 얼굴을 보니 하얗게 질려 있다.
  원장님이

  “부장 잘못 만난 업보야.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언제 올라와 보겠나. 오늘 집에 가서 자랑하고 아이들 데리고 다시 한 번 와 봐.”

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는데, 여기 와보지도 않아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롱다리 김하늘 판사는 머리가 하늘에 닿아 있고, 美人堂이 주위의 경치를 내려다보면서 탄성을 질러도 귀에 안 들리는 모양이다.  


   그래도 다람쥐 강이 들어간 갑제1호증(사진)을 남길 수 있어 훗날의 증표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원장님과 함께 갑제2호증도 남겼는데, 인화하여 놓고 보니 원장님은 岩上坐佛의 모습 그 자체이다.

   올라갈 때는 앞만 보고 가니까 그나마 덜한데, 내려갈 때는 저 밑의 절벽이 한 눈에 들어오는지라 공포심이 倍加된다. 그래도 비록 “에구구...”소리를 계속 낼망정 美人堂과 은진미륵은 물론이거니와 ‘다람쥐 강’도 잘만 내려간다. 본인은 지금도 여전히 부인하지만, 이로써 산행의 두려움에 관한 그의 엄살이 여실히 증명되었다.  


   암궤에서 다 내려오니까 기다리고 있던 정진호 판사가 한 마디 한다. 옆에 안내판이 있는데, 거기에 씌어진 바에 의하면 1999년 이후 이 곳에서 10명이 추락사하였고, 15명이 다쳤다나.

   “아이쿠, 그런 줄 알았다면 죽어도 안 올라갔을 텐데.”

다람쥐 강의 말이다.
그런데 그 안내판은 어디에 있지...?

   비봉에서 금선사쪽으로 하산하여 이북5도청 앞을 지나 구기동의 처음 출발지로 되돌아왔다. 총소요시간은 대략 4시간 30분.

   저녁식사 장소로 예약된 음식점(구산회관)으로 들어가니 벌써 대부분의 판사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 B코스를 택한 사람들은 논외로 치고 A코스를 택한 사람들 중에서는 우리 일행이 제일 뒤에 처졌던 모양이다.

   원장님이 민사20부는 유일하게 전원이 A코스를 주파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봉 정상에 올라가서 진흥왕순수비를 보고 왔다고 치켜세우신다.  

   식사가 시작되고 술잔이 돌아가며 분위기가 익어가자 그 동안 貴陀庵의 식구들과 같이 앉아 있던 다람쥐 강이 자리를 옮긴다. 가는 곳은 만년소녀를 위시한 女판사들이 모여 있는 곳. 그리로 가자마자 인기를 독차지한다. 이어서 다음으로 간 곳은 여자 예비판사들이 있는 곳, 역시 좌중을 휘여 잡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美人堂이 한 마디 한다.

“저는 평소에 강판사님이 저한테만 미인이라고 칭찬하고 잘해 주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에요. 모든 女판사들한테 다 그렇게 대하네요. 실망했어요.”

다람쥐 강의 본 모습이 “제비 강”임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그 말을 들은 다람쥐 강의 항변,

“억울해요. 나는 女판사들이 좋아서 그리로 간 것이 아니라 술을 피해서 피난 간 거예요. 나는 ‘제비 강(姜)’이 아니라 ‘편안할 강(康)’이예요.”

그러나 항변의 보람도 없이 이 날 제비 강은 집에 갈 때까지 美人堂의 보복 폭탄공세에 시달려야 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