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그것이 있었기에(예외1-포르투갈, 모로코)

2010.02.16 11:58

범의거사 조회 수:11691

 


                거기 그것이 있었기에(1) 
 

   
   1992년 미국 서부 여행을 다녀 온 후 꼭 10년 만에 비행기를 탔다. 실로 오랜만일망정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 고맙다. 당초 12월 11일에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여행사의 사정으로 차일피일하다가 任午年의 해가 저물어 가는 12월 28일에야 간신히 쮜리히행 대한항공에 몸을 실었다.


   가족 중에서 거북이(경호)만 남겨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1년밖에 남지 않은 대학입시 준비 때문에 도리가 없었다. 자기는 대학에 들어간 후 배낭여행을 실컷 갈 테니 걱정말고 다녀오란다. 그래 거북이는 더 이상 품안의 자식이 아니다. 어느 샌가 훌쩍 커버렸다. 
  

1. 대륙을 가로질러 

  
   2002. 12. 28. 오후 1시.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잡은 항로는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 1987년 연수차 독일에 갈 때는 앵커리지를 거쳐 북극을 지나 빙빙 돌아서 갔는데, 중국과 러시아의 하늘이 열리면서 직항로가 개설된 것이다.

   비행기 안에 설치된 모니터에서 현재 지나고 있는 위치를 지도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채롭다. NWYSE001.GIF거기에 더하여 기내식으로 비빔밥을, 그것도 고추장과 함께 주는 것이 10년 만에 해외여행 비행기를 타는 촌자의 눈에는 신기할 뿐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중국 북경 근처는 경지정리가 잘 된 모습이었는데, 몽고 땅으로 접어들면서는 온통 산악지대이다. 그 산들을 뒤덮고 있는 흰 눈에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에 다시 평원이 펼쳐진다. 시베리아의 광대한 동토가 끝을 모르게 이어진다. 참으로 넓다. 저 넓은 땅에 개발의 삽질이 시작되는 날, 러시아는 다시금 옛날의 부귀영화를 되찾으리라.

   우랄산맥을 넘는 것으로 아시아대륙은 끝나고 이어서 북유럽으로 향하던 비행기가 남쪽으로 기수를 돌리자 독일 땅으로 들어서는가 싶더니 이내 스위스의 하늘이다. 쮜리히에 도착한 시각은 현지시각으로 오후 5시 30분. 인천공항에서 12시간 30분 걸려 도착한 것이다. 서울보다 위도가 높은 까닭에 쮜리히는 벌써 깜깜한 한밤중이다.
   리스본(포르투갈) 행 비행기를 갈아타기까지 2시간 동안 공항 안을 배회하였다. 주위에서 모두 알아듣기 어려운 외국어로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드디어 한국이 아닌 낯선 외국 땅에 발을 딛고 있음을 실감한다. 약간의 설렘과 걱정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2. 과거의 영광은 어디에 

   쮜리히에서 포르투갈항공을 이용하여 오후 8시 45분 리스보아(Lisboa. 영어로는 Lisbon)에 도착했다. 소요시간은 1시간 40분. 공항을 나서는데 출구에 "사이다(Saida)"라고 씌어 있다. 그럼 입구는 "콜라(Cola)"인가? 안내인한테 짓궂게 물어보니 웃으면서 "엔트라다(Entrada)"란다.

  (1) 유럽대륙의 끝---까보 다 로까(Cabo da Roca)

   2002. 12. 29.


   기상시간임을 알리는 전화벨소리(morning call)가 울리지도 않았는데 눈이 떠졌다. 창 밖은 아직 캄캄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집사람도 벌써 잠이 깬 듯 이리 저리 뒤척이고 있다. 서울보다 9시간이 늦은 시차에 모두 적응이 안 된 탓이다. 침대 위에서 한동안 뒹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바야흐로 머나 먼 탐방길이 시작되는 첫 날 아닌가.

   호텔(Altis Park Hotel)에서 제공하는 부페식 아침식사(소위 continental breakfast)를 한 후 9시에 대기중인 벤쯔 버스에 올랐다. 본래 8시 30분 출발 예정이었는데 꼬르도바까지 2,200km의 버스길 대장정이 시작부터 늦어진다 했더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곳에서는 버스의 무리한 운행을 막기 위하여 전날 마지막 운행과 다음날 첫 운행 사이에 9시간의 휴식이 필요한데, 어제 공항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그 휴식시간의 확보를 위하여 출발이 늦어졌다는 것이다. 무리 정도가 아니라 아예 혹사를 당하다 브레이크나 핸들의 고장으로 대형 참사를 일으키는 우리의 관광버스와는 대조적이 아닐 수 없다.

   첫 목적지 '까보 다 로까'로 가는 동안에 이번 장정에 마드리드까지 길라잡이로 동행한 양상혁씨의 포르투갈에 관한 설명이 이어진다. NWYSE002.GIF  
    "포르토"(항구)와 "칼레"(조용한)의 합성어인 국명이 말해주듯 조용한 나라인 포르투갈은 면적이 9.2만㎢이고 인구는 1,000만 명. 인구의 절반 가량인 500만 명이 해외에 나가 있고, 그 사람들이 벌어오는 돈이 이 나라 경제의 큰 버팀목 역할을 한다.  


   포르투갈의 3대 음식은 빵, 포르토와인, 비카커피이다.
   이 나라의 "빠옹"이 우리 말 빵의 어원일 정도이니 빵은 더 설명할 것도 없다. 타바크, 메리야스, 따봉 등도 모두 포르투갈말에서 유래한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일본말 "아리가또"(ありがと : 고맙습니다)의 어원이 포르투갈말의 "오브리가도"란다. 15세기 대항해시대에 이곳 사람들이 일본열도에 상륙하여 전해준 말인 것이다.


   포르토와인은 무엇보다도 알콜 농도가 20도라는 데서 유명하다. 그만큼 여느 포도주보다 독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포르토와인보다 더 독한 것이 비카커피이다. 흔히 이탈리아의 에스프레소커피를 진한 커피의 대명사로 꼽는데, 비카커피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이 커피는 커피원두에 뜨거운 수증기를 통과시켜 나오는 액체를 그냥 마시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 커피에 비하여 농도가 5-6배에 이른다. 일반 커피조차 입에 안 대는 나로서는 그런 커피를 마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데,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그 커피를 마셔본 집사람이 의외로 맛이 좋다고 하여 놀랐다.


   인구 200만 명이 사는 리스보아의 거리는 조용한 나라의 수도답게 적막하기 그지없다. 일요일 아침 9시는 이 나라에서는 아직 이른 새벽이다. 한국, 일본, 대만의 관광객이 아니고서야 이처럼 된 새벽(?)에 나다닐 사람이 없단다. 마침 버스가 골프장 옆을 지나가는데 유심히 보니 잔디 위에 사람이 과연 아무도 없다. 10시 전에는 개장을 안 한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까보 다 로까'('로까 곶'이라는 뜻)는 바다가 아름답다는 것보다는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이라는 이유로 더 유명해진 곳이다. 마치 해남의 땅끝마을처럼...
   여기서도 일요일의 이른 아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불원천리 찾아온 사람들이라곤 우리 일행을 빼면 바로 뒤따라온 대만 관광객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NWYSE003.GIF초콜릿 '자유시간'의 TV 광고에서 하얀 등대를 뒤로하고 바다가 보이는 절벽 위에서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외치는 장면, 그 광고 속의 장소가 바로 이 곳이다.


   말썽이는 차라리 제주도의 바닷가가 더 아름답다고 투덜댔지만, 그래도 140m 절벽 위의 하얀 등대와 바다의 모습이 볼 만하다.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대서양을 건너면 바로 미국의 뉴욕이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우 거세지만 그리 춥지는 않다.   '


   절벽 위에 세워 놓은 기념비에는 노벨상을 받은 시인 까몽이스(Camoes)가 썼다는
    "이곳은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이라는 싯귀가 새겨져 있는데,
   말썽이 왈,
    "이 정도 시라면 나도 쓰겠다."


   이 곳의 작은 관광안내소에서는 유럽의 제일 서쪽 끝에 왔다는 고풍스런 증명서를 발급해준다. 말썽이가 5유로(약 6,000원)를 내니까 방문객의 이름과 날짜를 써준다.

   까보 다 로까를 떠나 리스보아로 가는 길의 '까스까이스'해변은 드라이브코스로 유명한데, 모래언덕(해안사구. 海岸砂丘)이 발달해 있다. 충남 태안의 신두리지구에서 본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개발붐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 언덕들이 망가질 일은 없을 듯하다. 우리처럼 굳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지 않아도 될 성싶었다.


   그 해변을 달리는 차안에서 포르투갈의 민속음악인 파두(Fado)가 때마침 흘러나온다. 배를 타고 고기잡이하러 나간 남편을 그리는 여인의 애닯은 노래이다. 마치 "어머님은 된장국 끓여 밥상 위에 올려놓고, 고기 잡는 아버지를 밤새워 기다리신다"는 우리의 가요를 연상케 한다.

   왼쪽의 초원과 오른쪽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난 한적한 길을 따라 한 동안 달리다 보면 왼쪽으로 갑자기 별장지대가 나타난다. 부(
富)를 상징하는 분홍색 지붕과 노란색(또는 흰색) 벽으로 그림같이 지어진 집들, 그리고 그 집들이 차지하고 있는 넓은 정원, 포르투갈 사람뿐만 아니라 유럽의 부자들이 그 별장들의 주인이란다.

   그 중에는 지난 해 월드컵을 계기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유명한 축구선수 루이스 피구(Figo)의 것도 있어 말썽이를 흥분시킨다. 말썽이는 나중에 마드리드에서 그의 유니폼을 일부러 구입할 정도로 피구의 열성팬이다(피구는 현재 스페인 팀인 '레알 마드리드' 소속이다).


   별장촌의 맞은 켠 바닷가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가운데 큰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곳으로 파도가 밀려와 흰 거품을 내뿜으며 소용돌이치고 있다. 이름하여 '지옥의 입'이다. 그리로 빠지면 말 그대로 지옥행이 보장될 듯하다. 그것을 막기 위함일까 콘트리트 난간이 크고 튼튼하기 짝이 없다.

   (2)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의 영광---리스보아(Lisboa : 리스본)

   서울 시간으로 치면 한참 잠을 잘 시각이어서인지 몰려오는 잠을 못 이겨 꾸벅꾸벅 졸다 보니 리스보아이다. 이제 겨우 오전 11시 30분이다. 흐유∼ 오늘 하루가 꽤나 길 것 같다.


   까보 다 로까에서 까스까이스해변을 따라 남행하다 떼주江(Rio Tejo)을 끼고 리스보아로 진입한 까닭에 버스가 처음 닿은 곳은 '벨렝지구'이다. 이 곳이야말로 15-16세기 포르투갈이 연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의 영광을 대변하는 곳이다.


   항해왕 '엥리케'왕자를 중심으로 하여 그들은 아프리카로, 인도로, 남미로 항로를 개척하고 식민지를 건설하여 NWYSE004.GIF 귀금속, 향신료 등을 이 곳 리스보아로 실어 날랐던 것이다. '바스톨로뮤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 그리고 멀리 일본에까지 진출한 때가 바로 포르투갈 역사의 전성기였다.


   한 발 늦게 바다로 진출한 스페인과 남미에서 영토(식민지) 분쟁을 일으키자 로마의 교황이 중재하여 남미를 동서로 반분하여 동쪽은 포르투갈이 서쪽은 스페인이 차지하게 되었으니, 남미 대륙 중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된 연유이다. 그 과거의 영광이 빛 바랜 채 남아 있다.

   떼주강의 하구, 곧 대서양과 접하는 곳에 세워져 있는 것이 '벨렝탑'(Torre de Belem)이다. 그 옛날 인도, 브라질 등으로 떠나는 배들이 통관절차를 밟던 곳이란다. 그 모양이 마치 드레스자락을 늘어뜨린 귀부인을 닮았다 하여 '떼주강의 귀부인'이라고도 불린다.
   1층은 19세기 초까지 밀물 때는 물이 차고 썰물 때는 물이 빠지는 수중감옥으로 사용되었고, 2층에는 포대가 설치되어 있고, 3층 전망대는 본래 왕족의 거실이었다.
   3층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라는데, 시간이 없어 들어가 보지는 않고 밖에서 기념사진만 찍는 것으로 만족했다.

   벨렝탑에서 강 상류 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서는 커다란 범선(帆船) 모습을 한 '발견의 탑'(Padrao dos Descobrimentos)이 위용을 뽐낸다. NWYSE005.GIF 대항해시대의 선구자 엥리케왕자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1960년에 세운 것이다.
   뱃머리에는 엥리케왕자를 비롯하여 선원, 천문학자, 지리학자, 선교사 등을 조각해 놓았다.


   이 탑은 탑 자체보다도 그 앞의 광장 바닥에 새겨져 있는 세계지도가 더 인상적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발견한 세계 각 지역의 발견연도가 씌어 있어 그들의 찬란했던 과거를 짐작케 한다. 유심히 살펴보니 우리나라는 연도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중국과 일본의 것은 씌어 있건만...

   발견의 탑에서 다시 상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4월25일 다리'(Ponte 25 de Abril)가 보인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금문교의 설계자가 역시 설계하여 그것과 모양이 비슷한 현수교이다. 길이 2,278m의 이 다리는 건설 당시에는 '살라자르 다리'라고 불리었는데, 1974. 4, 25, '살라자르'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무혈혁명(無血革命)을 기념하여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다리가 2층 구조로 되어 있어 위로는 버스 등이 다니고 아래로는 기차가 다닌다.

    발견의 탑 광장에서 먼 발치로 제로니모스 수도원을 바라보며 버스에 올라 떼주강변을 따라 가다가 구(舊) 시가지로 들어섰다. NWYSE006.GIF리스보아 최대의 광장이자 유럽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꼬메르시우(Comercio) 광장, 번화가인 바이샤(Baixa) 지구, 로시우(Rossio) 광장 등 볼거리가 많았지만 바쁜 일정 탓에 주마간장(走車看場)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대신 그 모든 리스보아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곳, 신(新_) 시가지에 위치한 에두아르두7세 (Parque Eduardo Ⅶ) 공원에서 차를 내렸다.
   저 멀리 떼주강까지 보이는 이 공원은 1902년 영국의 에드워드 7세가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것인데, 겨울인데도 파란 잔디가 인상적이며, 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좌우 양편의 모자이크 형식으로 되어 있는 길은 지진이 발생하였을 때 완충역을 한다고 한다(구체적인 원리는 모르겠다).
   1755년 리스보아를 거의 폐허화시키다시피 한 대지진을 겪은 이곳 사람들은 그 지진 때 길거리에 나동그라진 돌덩이들을 모아 만든 현대조각을 이 정원에 꾸며놓았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포르투갈식 점심을 먹은 다음, 오후 1시 45분에 리스보아의 남동쪽에 있는 '바스코 다 가마 다리'를 건너 스페인의 세비야를 향해 길을 떠났다. 1998년 건립된 이 다리는 그 길이가 무려 16km.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다리이다.


   여기서 스페인과의 국경까지 가는 길은 가도가도 끝이 없는 평원이다. 그리고 그 평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코르크나무숲이다. 전세계 코르크의 60%를 생산한다니 그 규모를 알 만하다.
   12-13년마다 나무의 밑둥 껍질을 벗겨 코르크를 만드는데, 껍질을 벗긴 나무에는 알파벳으로 흰 글자를 써 놓아 언제 벗긴 것인지를 구별한다. 나무에 호스를 박아 고로쇠물을 채취하는 우리들이나, 껍질을 벗겨 코르크를 만드는 그들이나,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웬쑤'가 아닐 수 없으리라.

   평원이 끝나고 산이 나타나기에 직감으로 스페인과의 국경이 가까왔음을 느낀다. 세계지도를 보면 포르투갈은 초록색, 스페인은 황토색 내지 갈색으로 칠해져 있으니까 말이다.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국경은 국경이라고 하니까 국경인 줄 알 따름이다. 일체의 검문도 없고, 여권 검색도 없다. 돈도 똑같이 '유로화'를 사용한다. "유럽은 하나"인 것이다. 대신 코르크나무 숲이 올리브농장으로 바뀐 것을 보고 스페인에 온 것을 알게 된다.

   오후 5시에 국경을 통과하여 모로코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인 스페인의 세비야에 도착하여 여장을 푼 것은 밤이 한참 깊어진 오후 9시였다. 이따금 재채기가 나는 것은 무슨 징조일까....

3. 세빌리아의 이발사---세비야

   2002. 12. 30.

   대장정의 둘째날이다. 본래 예정보다 1시간이 늦은 아침 7시에 모닝콜의 전화벨이 울리도록 되어 있었지만 어제처럼 오늘도 일찍 눈이 떠진다. 아침식사를 하고 짐을 꾸려 9시에 라모티야 호텔(Hotel La Motilla)을 나섰다. 모로코로 건너가기에 앞서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롯시니 작곡), "카르멘"(비제 작곡)의 무대인 세비야(Sevilla) 시내를 둘러보기 위한 것이다.

   푸르고 맑은 하늘, 찬란한 태양, 코발트색 바다, 기타와 플라멩꼬의 음률이 흐르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을 대표하는 세비야(영어식 발음으로는 '세빌리아')는 스페인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인구 80만명)로, 옛날 회교도와 기독교도가 공방전을 무수히 벌였던 곳이다.


   711년 아랍인들의 이베리아반도 진주 이후 세비야는 1248년 기독교인들에 의해 다시 탈환될 때까지 500년이 넘는 세월을 회교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1492년 이 곳을 출발한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세비야는 16-17세기에 중남미와의 교역의 중심지로서 황금기를 누렸으니, 신대륙의 많은 금과 은이 이 곳을 통해 들어와 한때 '황금의 도시'로 불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당연히 당시에는 스페인 최대의 도시였다. 마젤란의 세계일주가 시작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


   또한 세비야는 엑스포와도 인연이 깊어 1929년 스페인어권 국가들의 엑스포가 열렸고, 1992년에는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 출항 500주년을 기념해서 세계 엑스포가 다시 열렸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도시인 까닭에 그와 관련된 유적들이 시내 곳곳에 산재해 있다.

   라모티야 호텔이 있는 시외곽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콜럼부스거리의 양쪽에 늘어선 가로수인 오렌지나무에 누런 오렌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사람들이 따먹지 않나 의아해했는데, 양상혁씨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들은 식용이 아닌 관상용 오렌지란다.NWYSE007.GIF 그런가 하면 아랍에서 유입된 종려나무(야자수)들도 보인다.

   버스가 처음 정차한 곳은 세비야의 도심을 관통하는 '과달끼비르江(Guadalquivir : 아랍어로 '과달'은 크다는 뜻이고 '끼비르'는 강이라는 뜻이니 결국 '한강'인 셈이다)의 강변에 있는 '황금의 탑'(Torre del Oro)이다.


   이 탑은 1220년 아랍인들이 세운 것으로서, 도시를 둘러싸고 있던 성의 일부였다. 신대륙에서 대서양을 건너온 선박들이 과달끼비르강을 통해 세비야로 들어올 때 이를 검문하고 물품을 통관시키기 위해 세운 것이다(강 건너편에 은색 탑을 하나 더 세워 두 탑을 쇠줄로 연결함으로써 배를 통제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탑 위가 황금색의 모자이크타일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황금의 탑'이라 불리며, 지금은 해양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NWYSE008.GIF

   황금의 탑에서 과달끼비르강을 오른쪽으로 하고 더 가면 마리아 루이사(Maria Luisa) 공원이 나온다. 1893년 몸반세公의 부인 '마리아 루이사'가 자기 소유의 '산 델모' 궁전 정원의 1/2을 市에 기증하여 생긴 공원이다.
   플라타너스 나무들로 빽빽한 이 공원은 바닥의 흙이 샛노란 것이 특징인데, 이 흙을 퍼다 투우장에 깐다고 한다.


   공원 안에는 1929년 개최되었던 엑스포에 참가한 아메리카지역 국가들의 전시관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어 아메리카광장이라고 불리며, 온 몸이 흰색인 비둘기들이 떼를 지어 노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마침 예의 오렌지나무에 관상용 오렌지가 주렁주렁 열려 있어 하나를 따서 자세히 보니까 과연 먹기는 곤란해 보였다. 군침을 흘리던 말썽이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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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아 루이사 공원 바로 옆에는 스페인광장이 있다. 1929년 엑스포 때 건설된 것으로서, 양쪽 끝에 두 개의 탑이 있는 반원형건물(엑스포 본관건물)이 특히 눈에 들어오는데, 스페인 50개 도시의 지도와 문장, 그리고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들이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그런데 그 건물 안으로 발을 옮겨 2층으로 올라가는 순간 회랑에 가득한 비둘기 똥, 깨진 유리창, 갈라지고 부서진 타일, 겹겹으로 쳐진 거미줄로 인하여 중세영화에 나오는 마녀의 성을 보는 듯했다(스타워즈 에피소드Ⅱ를 괜히 여기서 찍은 게 아님을 알겠다).
   광장 입구 난간의 타일들이 깨져 그 속의 철근이 다 드러나고, 마당은 마차를 끄는 말똥으로 지저분하기 짝이 없고, 연못의 물은 썩어 푸르딩딩하던 것이 여기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전국에 널려 있는 많은 스페인 광장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꼽힌다는 이 광장의 이런 모습이야말로 과거 찬란했던 스페인 문화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스러져가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청명한 가을하늘을 연상케 하는 저 하늘이 차라리 눈이 시리게 푸르지나 말 것이지...

   스페인광장에서 다시 버스에 올라 알까사르와 성당이 있는 구시가지로 가는 길가에 오페라 카르멘의 여주인공 '카르멘'이 근무하였던 담배공장이 있는데, 현재는 세비야 법과대학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여주인공 카르멘은 과달끼비르江의 강변에 작은 동상으로 서 있으면서 오고가는 관광객을 바라보고 있다.

   아랍인들이 세비야를 지배하던 시절에 세워진 왕궁인 '알까사르'(Alcazar)를 옆으로 끼고 돌며 구시가지의 '산타 끄루스 거리'(Barrio de Santa Cruz)로 들어섰다.
   과거 아랍인과 함께 건너온 유태인들의 거주지였던 이 곳은 골목이 매우 좁다. 집들을 붙여서 지은 것은 날씨가 더워서 그늘을 만들기 위함이기도 했고, 상호 감시하기에도 용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집은 한옥의 나무대문을 빼닮은 문을 해달은 곳도 있고, 안에는 마당이 있어 우리의 전통가옥 구조를 연상케 한다.


   이 곳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은 아랍인들이 이베리아반도에서 쫓겨날 때 함께 축출당해 전세계로 퍼지게 되었는데, 이 때의 유태인 추방이야말로 스페인 역사상 최대의 실수라고 꼽힌다고 한다. 유태인들의 머리와 그들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산타 끄루스 거리를 벗어나면 바로 '세비야 성당'(Catedral)이다. 알까사르와 마주하고 있기도 하다. 15세기에 이슬람교도를 몰아내고 NWYSE010.GIF기독교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회교사원을 부수고 그 자리에 지은 것인데, 폭 116m, 내부 길이 75m로 세계에서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과 런던의 '세인트 폴 성당' 다음으로 큰 성당이다. 양식은 고딕식이다.


   건축양식이 로마네스크식에서 고딕식으로 넘어가면서 기둥을 이용하여 지붕을 떠받치게 됨에 따라 벽에 공간이 생기자 그 곳에 창을 내고 유리를 끼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큰 유리를 만들 만한 기술이 모자란 까닭에 작은 유리들을 납으로 잇고 나니 모양이 흉했다. 그래서 거기에 여러 색으로 칠을 하였으니 그게 바로 스테인드글래스의 탄생이다. 세비야 성당은 오래 되어 깨진 스테인드글래스를 곳곳에서 보수하고 있었다.

   성당 안에는 '무리요'(Murillo)의 그림이 곳곳에 걸려 있는데, 스페인의 유명한 성당 치고 이 화가의 그림이 없는 곳이 없다고 한다. 그 밖에 고야(Goya)의 그림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아기예수상이 있는데, 그 형상이 곱슬머리에 갈색피부를 지녀 전형적인 아랍인의 모습이다.
   또한 성당 안에는 콜럼부스의 관이 있는데, 스페인에 있었던 네 개의 기독교 왕국(까스띠야, 아라곤, 레온, 나바라)의 군주들이 관을 메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그 군주들의 구두가 반질반질하다. 구두를 만지면 다시 세비야에 돌아온다는 속설 때문이다. 콜럼부스 시신의 진위 여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세비야 성당에는 세비야의 상징물인 '히랄다탑'(La Giralda)이 붙어 있다(사방 14m, 높이 97.5m). 12세기 말 이슬람교도들이 세운 것으로서, 세비야성당 자리에 있던 회교사원의 부속 탑이었다. 그 후 16세기에 지진으로 파손된 것을 기독교인들이 수리하면서 꼭대기에다 종루(鐘樓)와 풍향계를 덧붙여 설치했는데, 이슬람 양식에 기독교 양식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바람개비'라는 뜻의 '히랄다'라는 이름도 그 때 붙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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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단이 아닌 나선형으로 이어진 완만한 경사면을 통해 위로 올라갈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탑을 세울 당시 회교사원의 首長이 너무 늙어서 그가 당나귀를 타고 올라갈 수 있게 나선형 사면(斜面)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집사람은 다리가 아프다고 하여 말썽이와 둘이 종루까지 올라갔는데, 십자가 모양의 세비야 성당 지붕(초록색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다)과 그 뒤로 세비야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투우경기장도 보인다. 투우는 부활절에 시작하여 10월까지만(매주 일요일 오후) 열리기 때문에 볼 수가 없다.


   말썽이가 사면을 돌아가며 디지탈카메라로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어느 새 여행길에 사진사가 집사람에서 말썽이로 바뀐 것이다. 자잘한 휴대품을 넣은 가방도 이젠 그의 등에만 걸린다. 세월은 흐르고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다.

   히랄다탑에서 내려와 집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성당 앞의 오렌지 정원으로 갔다. 정원 가득히 관상용 오렌지 나무가 심어져 있다. 집사람이 그 사이 묵주를 샀다며 보여준다.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묵주가 좋은 선물이라면서.

4. 아프리카 가는 길

   세비야 성당을 벗어나 점심식사를 하러 중국식당으로 가는데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나 싶더니 제법 소리내며 온다. 세비야가 있는 안달루시아지방은 겨울이 우기이다. 비록 강우량은 매우 적지만...
   모처럼 밥과 김치 그리고 된장국으로 포식을 한 후 오후 2시에 다시 알헤시라스(Algesiras)를 향해 버스에 올랐다. 그 곳에서 배를 타고 아프리카의 모로코로 건너가는 것이다.


   가는 도중에 비가 왔다 해가 났다를 반복한다. 길가에 세워져 있는 현대차인 아반테XD(현지에서는 상표가 엘란트라로 붙어 있다)가 반갑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가는 페리(ferry)의 선실에 설치되어 있는 삼성 TV에도 저절로 애정어린 눈길이 보내진다.

   오후 6시 30분 알헤시라스에서 모로코의 땅제로 가는 페리가 예정대로 출항하였다. 아랍인이 운영하는 배를 탔건만 예정된 시간에 출항을 한 것을 보면 그것이 아마 '인샬라'('알라의 뜻'이라는 의미)였던 모양이다. 어떤 때는 그 인샬라 때문에 몇 시간씩 출항이 늦어지기도 한단다.
   직선거리 14km의 지브롤터 해협을 2시간 40분에 걸쳐 항해한 끝에 모로코의 '땅제'(Tanger : 탕헤르) 에 도착하였다. 현지시각으로 저녁 8시 10분이다.


   인구가 80만 명인 땅제(Tanger)는 유럽에서 모로코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2003년부터 자유무역항이 되어 GM, IBM, Good Year 등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이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타고 간 버스가 페리에서 내리자 모로코 고유 복장인 '찔라바'를 입은 안내인이 나와 있다. 모로코에서는 현지 안내인이 없으면 관광이 불가능하다. 안내인이 텔레토비 인형을 닮아 모로코에 있는 동안 내내 텔레토비 아저씨로 통했다. 버스의 통관을 위해 20여 분 부두에서 지체하는 동안 얼핏 보니까 벤쯔 택시들이 뻔질나게 드나든다. 웬 벤쯔가 저리도 많지? 하는 의문은 다음 날 페즈로 가면서 풀렸다.
   통관을 마친 후 곧바로 호텔로 직행하여 저녁을 먹는데, 야채수프, 생선튀김, 빵, 감자 등이 나왔다. 야채수프와 감자는 간이 덜 된 듯 너무 싱거웠다.

   재채기가 본격적으로 콧물로 변한 피곤한 하루다. 침대에 눕자 이내 잠이 쏟아진다. 내일은 '새벽별 보기' 운동을 해야 한다.

5. 서구화의 길목에서

   (1) 모로코의 아침

    2002. 12. 31.

    새벽 5시 30분 기상시간임을 알리는 요란한 벨소리에 눈을 떴다. 바야흐로 '새벽별 보기' 운동의 시작이다. 집사람한테 생일(47번째)을 축하한다는 진한(^^) 인사를 하고, NWYSE012.GIF새벽(?)식사를 하러 호텔 1층으로 내려가다 보니 이 호텔이 별 4개 짜리 인터콘티넨탈호텔(Intercontinental Hotel)이란다. 그 1급 호텔의 아침식사용 부페가 걸작이다. 빵만 다섯 가지 종류이고, 커피와 홍차 외에는 과일도 없다.


   식사 후 잠깐 여유가 있길래 산책이나 할까 하고 호텔 밖으로 나가보았으나 황량하기 그지없어 발걸음을 되돌렸다. 세계적인 고급호텔체인인 인터콘티넨탈의 이름에 너무나 안 어울린다. 하긴 여긴 유럽이 아니지...

   아침을 먹고 페즈로 가는 차안에서 양상혁씨의 모로코에 관한 설명이 이어진다.
   영화 "카사블랑카"(Casablanca)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모로코는 아랍의 지리학에서 "석양의 섬(Jzirat el Maghreb)"이라고 부르는 북서아프리카의 최서단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대서양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과 접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지브롤터 해협을 경계로 유럽과 마주하고 있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면적은 71만㎢(그 중 서부사하라사막이 25만㎢)로 한반도의 3.5배이고, 인구는 약 3,000만 명 정도이다.


   이 나라는 이슬람교가 국교인 입헌군주국(현재의 왕은 모하메드 6세로 1999년 7월에 즉위했다)이나, 도시의 길에서는 회교도의 전통인 두건(히잡)을 두른 여인을 찾아보기 어렵고, 여름에는 비키니수영복 차림으로 해수욕을 할 정도로 회교국가들 중 가장 개방적이고 서구적인 나라이며, 유럽연합(EU)에 가입신청을 할 만큼 정치, 경제가 안정되어 있다. 서구화의 길목에 서 있는 것이다. 자국통화인 '디르함'(1디르함은 약 120원)이 있는데도 유로화를 불편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연유이다.


   원주민은 베르베르인이나, 현재는 아랍인이 더 많고(65%), 소수이긴 하나 아프리카 흑인도 있다. 한 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관계로 아랍어와 함께 불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그래서 길거리의 간판에는 아랍어와 불어가 병기되어 있다.


   우리나라와는 1962년 7월에 외교관계가 수립되었으나 그 동안 북한과 더 가까웠기 때문에 근래에 들어서야 비로소 삼성, LG 등 대기업이 전자제품을 중심으로 수출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으며, 관광길이 열린 것도 3년밖에 안 된다.

   (2) 농촌 풍경

NWYSE013.GIF    아침 7시 30분에 페즈를 향해 땅제를 출발한 버스가 처음에는 대서양의 파도가 몰아치는 해안선을 따라 가더니 1시간쯤 지나자 방향을 틀어 내륙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로 접어든다. 맑은 날이다. 군데군데 안개가 끼기도 했으나 시속 120km로 달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서구화된 도시와는 달리 농촌지역의 주민들은 아직 문명의 위험을 모르는 것일까, 고속도로를 걸어서 유유히 횡단하는 여인네들을 보고 가슴을 쓸어 내린다. 그 길가로 양떼를 몰고 가는 목동들은 차라리 낭만적이다.
   철분이 많아서인지 도로변에 보이는 평원의 흙들이 붉은 색을 띠고 있고, 곳곳에 콘크리트로 만든 높은 물탱크가 세워져 있다. 그러고 보니 넒은 평원을 가로지르는 관개수로가 자주 눈에 띈다. 본래 아랍인들이 일찍부터 치수에 능했음을 상기하게 한다.

   고속도로를 한 동안 달리던 버스가 국도로 들어선다. 지도상으로는 고속도로로 계속 더 가는 것이 빠를 성싶은데 굳이 국도로 들어선 내막을 알 길이 없으나,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농촌마을의 풍경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밭들의 흙이 온통 검은 색이어서 그 비옥함의 정도를 가늠하게 하는데, 그 밭두렁에는 성인의 키 만한 선인장을 세워 경계를 삼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간혹 나타나는 마을들은 그 초라한 겉모습에서 후진국 농민의 전형적인 삶을 읽게 해 주지만, 그래도 끝없이 지평선이 이어질 정도로 광활한 초원에서 그들의 잠재력과 앞날에 펼쳐질 풍요로운 미래를 점쳐본다.

   오전 10시 30분에 한 조그만 농촌도시에 도착해 차에서 내렸다. 사람도 차도 잠시 쉬어가기 위해서이다. 주유소를 겸한 휴게소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길거리로 눈을 돌리자 벤쯔들이 수시로 시야에 들어온다. 어제 밤 땅제에서 본 것들도 그렇고 지금 이 곳의 벤쯔들도 그렇고 일견하여 하나같이 '똥차'(말썽이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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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웬 벤쯔가 이리도 흔하며 왜 하나같이 낡은 것들뿐이냐고 양상혁씨한테 물었더니, 독일에서 폐차 직전의 벤쯔들을 싸게 수입해다 '그랑택시'(grand taxi : 6인승)나 자가용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독일인들은 돈을 들여 폐차할 차를 오히려 돈 받고 팔아치울 수 있어 좋을지 모르겠지만, 매연이 풀풀 나는 그런 고물차를 좋다고 타고 다니는 모로코인들의 심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가 하면 이탈리아로부터 피아트에서 만든 소형차를 들여다 '쁘띠택시'(petit taxi : 3인승)로 사용한다고 한다.  
   단순히 후진국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여 마음이 영 개운하지 않다. 과거 경제적으로 어지간히도 어려웠던 시절 우리나라에서도 '미제는 똥도 좋다'는 말이 유행하지 않았던가.


   거리의 풍경을 씁쓸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양상혁氏와 텔레토비 아저씨가 오렌지를 한 상자 들고 온다. 값이 너무 싸(정확한 값은 모르겠다) 아예 한 상자를 통째로 샀다는 것이다. 즉석에서 몇 개를 까먹었는데 그 맛이 기가 막히다. 우리나라의 슈퍼마켓에 나와 있는 수입오렌지들은 유통기간을 고려해 익지도 않은 것을 따다가 파는지라 껍질을 까기가 힘든데, 이 곳의 오렌지는 태양 아래서 완전히 익은 것을 따는 까닭에 마치 우리나라의 귤처럼 껍질이 술술 벗겨지고 당도도 높아 꿀맛 그 자체이다.

    '똥차' 벤쯔들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제부터 페즈까지는 리프(Rif) 산맥의 산악지대이다. 이곳은 표고가 2,700m인데도 고산준령이라기 보다는 적당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구릉이 이어지는 고원지대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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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민인 베르베르인들이 사는 토담집이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는 푸른 초원지대를 바라보며 말썽이가 한탄을 한다.

   "아빠, 저기 사는 사람들은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겠지? 저 사람들은 공부 안 해도 살 수 있겠지? 나도 저런 곳에서 살고 싶어"

   말썽이는 지금 중학교 3학년생이다. 이제 오늘이 가고 해가 바뀌어 2003년이면 고등학생이 된다. 대학입시까지 3년간 입시준비로 지긋지긋하게 고생할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할 말을 잊은 나는 엉뚱한 곳으로 화제를 돌린다.

   "야, 저기 봐라. 농부가 나귀에 쟁기를 매달아 밭을 가는 게 꼭 우리나라에서 옛날에 소에다 쟁기를 매달아 밭을 갈던 모습과 똑같지 않니?"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초원의 많은 곳에서는 마약을 재배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걱정이 없을까.....

   (3) 미로 찾기---페즈(Fes)

   12시 30분 드디어 '페즈'(Fes)에 도착했다. 모로코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페즈는  아랍인들이 8세기에 북아프리카를 횡단하며 휩쓴 직후 북아프리카의 종교,교육,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또한 수세기 동안 모로코 수도이기도 했다. 그 후 수도를 다른 곳으로 옮긴 후에도 모든 왕조들이 이 도시에 자취를 남겼다.  지금도 1년에 단 한 번 사용할 망정 왕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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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컨대 페즈는 모로코인들의 정신적 고향인 것이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프랑스인들을 축출하기 위한 상당한 추진력이 페즈에서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구 150만 명의 페즈는 8세기에 건설된 Fes El-bali, 14세기에 건설된 Fes El-Jdid, 20세기에 건설된 Ville nouvelle의 세 구역으로 구분된다. 앞의 두 구역은 모로코인들에 의하여 건설된 구시가지이고 마지막 구역은 프랑스인들이 식민지시대에 건설한 신시가지이다. 그 중 가장 볼 만한 곳은 구시가지 중에서도 페즈 엘 발리(Fes El-bali)이다.

   페즈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린 곳은 페즈 엘 발리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파노라마 언덕이다. 멀리 극동에서 온 이방인의 눈으로도 꽤나 복잡한 곳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저 안에 8만개의 골목이 있는데 그 중 5만개는 막다른 골목이라는 말에 기가 질린다. 외부인이 한 번 들어가면 현지인의 도움이 없이는 못 나오는 곳이다.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후에 미국과 유럽 사람들이 지도를 만들어보려고 하였다가 1년만에 손을 들었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페즈 엘 발리를 향해 언덕을 내려가는데 공동묘지가 눈에 띈다. 흰 비석들이 한결같이 한 방향으로 세워져 있다. 모두 회교의 성지인 메카를 향하고 있다는 말에 잠시의 궁금증이 풀린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벌써 오후 1시이다. 6시 30분에 아침을 먹었으니 배가 고플 때도 되었다. 페즈 엘 발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은 천정 높이가 10m도 더 되는 데다 실내장식도 화려한 것이 아마도 전에는 궁궐이나 사원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ㆍ서양에서 온 관광객들로 복작거린다.
   점심메뉴는 모로코의 전통음식인 '꾸스꾸스'이다. 닭고기와 양배추에 좁쌀밥을 더한 것이다. 그 좁쌀밥은 본래 손으로 먹는 것이라나... 후르르 흩어지는 것을 어떻게 손으로 먹을까? KAL 비행기 안에서 얻은 고추장으로 비비니까 오히려 먹을 만하다. 호박, 브로클리, 당근, 콩, 감자 등을 볶고 데친 야채볶음 전채도 맛이 그런 대로 괜찮다.

   현존하는 중세풍의 도시들 중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 중의 하나라는 페즈 엘 발리의 안으로 들어섰다.NWYSE017.GIF
   인구 30만이 밀집하여 있는 이 곳은 카라윈 사원(Karaouiyn Mosque. 초록색 지붕은 부(富)의 상징이며, 들어가려면 신을 벗고 손발을 씻어야 한다)을 중심으로 약 300개의 구역으로 나뉘는데, 각 구역마다 마을을 이루기 위한 다섯 가지 구성요소, 즉 빵집, 샘터, 회교 사원, 학교, 목욕탕을 갖추고 있다.
   골목이 워낙 좁아 자동차 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당나귀가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이용된다. 그래서 그것을 '택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과 관광객들로 워낙 붐벼 비집고 가지 않으면 걷기가 힘들 지경이다.


   길을 잃은 방랑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현지 안내인들이 우리 일행의 앞, 중간, 뒤에 따라 붙어 연신 주의를 준다.
    "Watch your step!"
    "Watch your head!"
   당나귀 똥에 길이 미끄럽고 툭하면 계단이니 발을 조심해야 하고, 허리를 굽혀야 통과할 정도로 갑자기 지붕이 내려와 있는 곳이 있으니 머리를 조심해야 한다. 그보다는 무엇보다도 앞사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곳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과 천막이 쳐진 시장들은 염색공장과 가죽 무두질공장들 뿐만 아니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공방(工房), 빵집, 음식점, 정육점, 채소가게, 과일가게, 옷가게 등으로 꽉 차 있으며, 고집 센 당나귀의 똥냄새와 주위를 별로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의 왁자한 소음들에 그만 5감(五感)이 마비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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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녔는지 정신이 없는데 어느 가죽공방으로 들어가 그 집 옥상으로 올라가니 그 밑으로 유명한 천연염색공장이 보인다.
   이 곳에서는 1년 내내 양가죽에 천연 염료를 사용해 야외에서 염색작업을 한다. 인부가 구덩이에 직접 들어가서 발로 작업하는 광경이 매우 이색적이다. 염료에는 비둘기 똥도 첨가된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전체에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는 것일까...
   염색공장 주위에 있는 가죽공방에서 가죽 기념품을 사볼까 하고 둘러보았으나 썩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그림엽서나 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값도 싼 편이 아니고...

   끝을 모르는 미로 속에서 두 시간을 헤매다 나왔다. 마치 별천지에 갔다 온 기분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비록 잘 닦인 대로와 비까번쩍하는 서구식 건물들이 들어선 번듯한 시가지는 아닐망정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삶을 영위하여 가고 있다.
   자기 삶에 만족한다면 이곳이 바로 천국이고, 만족하지 못한다면 Ville nouvelle(신시가지)가 바로 지옥일 수 있는 것이다.

   (4) 안녕∼! 2002년

   오후 3시 40분 페즈 엘 발리를 떠나 카사블랑카로 향했다. 대략 5시간 걸린다고 하니 짧지 않은 여정이다.
   페즈를 벗어나기 전에 Ville nouvelle(신시가지)를 통과하는데 길옆의 가로수마다 밑동이 흰색으로 칠해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이건 또 뭐지? 전기를 아끼려고 야광효과를 내게 하기 위함이란다. 절약의 미덕인가, 후진국의 비애인가?

 

   카사블랑카까지 계속 이어지는 평원의 단조로운 풍경에 눈이 스르르 감긴다. 하긴 새벽 5시 30분부터 일어나 설쳤으니...      
   얼마를 잤을까, 버스가 멈추는 기색에 눈을 떴다. 휴게소에 들른 것이다. 화장실 바로 옆에 사각형의 공간이 있어 안을 들여다보니 웬 사람들이 열심히 절을 하고 있다. 회교도들이 알라를 향해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그저 텅빈 공간에서 기도를 올리는 그들에겐 정말이지 부처님상도 십자가도 전부 우상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휴게소 건물에서 나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는 순간, 아 거기에 멋진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2002년을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석양이 아프리카의 평원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집사람도, 말썽이도, 나도, 모두 그저 멋지다는 것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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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영화 '카사블랑카'를 보면서 카사블랑카에 도착했다. 우리에게 모로코는 바로 이 영화를 통해서 알려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밤 10시가 넘는다. 감기 몸살이 겹친 몸이 피곤하기만 하다. 그런데 쉽게 침대에 누울 수가 없다. 말썽이가 시내 구경을 나가자고 성화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게 영화 '카사블랑카' 때문이다.


   말썽이의 성화에 밀려 밤 11시에 호텔(Kenzi Basma Hotel)을 나섰다. 말썽이가 굳이 시내구경을 나가자고 한 이유는 영화 '카사블랑카'에 나오는 '릭카페'(Rick Cafe)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하이야트 호텔(우리가 투숙한 호텔에서 멀지 않다)을 지나게 되었는데, 거기에 '카사블랑카 바'의 간판이 보였고 양상혁氏가 그 곳에 가면 릭카페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산임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카사블랑카는 인구가 500만 명이나 되는 북아프리카 최대의 도시이다. 모로코인들의 정신적 고향인 페즈나 행정의 중심지인 수도 라바트와는 달리 상업도시이다. 우리나라 삼성과 LG의 광고판도 종종 눈에 띈다.
   최대 상업도시의 명성에 걸맞게 늦은 밤인데도 길거리는 불야성이다. 수많은 인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동차들, 인도와 차도의 구별은 말뿐이고 신호등은 찾아보기 어렵다. 마치 밤 12시 이후의 동대문 밀리오레상가 주변을 연상시킨다. 혼돈 그 자체이다.
   이미 익히 보아온 똥차 벤쯔를 비롯한 온갖 차량들이 뿜어대는 매연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채 10분을 걷지도 못하고 말썽이가 항복을 한다.

    "아빠, 호텔로 돌아가자. 눈이 따갑고 숨이 막혀!"

   (5) 새 해가 밝아오고---카사블랑카(Casablanca)

   2003. 1. 1.

   아프리카에서 새 해를 맞는 느낌이 남다르다. 얼마 전까지는 생각도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좀처럼 이런 기회가 다시 주어질 것 같지 않다.
   그런 기분과는 달리 몸은 물먹은 솜 같다. 입안에 물집도 생겼다. 그러나 빡빡한 일정을 다 소화하려면 아무리 피곤해도 새벽 6시30분에는 일어나야 한다. 포르투갈의 리스보아에서 처음 출발할 때 앞으로 '사관생도의 졸업여행'을 할 거라고 한 말이 실감난다.

   카사블랑카는 본래 원주민인 베르베르인들이 '앙파'(Anfa)라고 불렀다. 그들은 바닷가 언덕에 하얀 집을 짓고 살았다. 그런데 15세기에 포르투갈인들의 침략을 받아 거의 폐허가 되었다가 18세기에 재건되어 "다렐 베이다(Darel Beida)"로 불렸다. 그리고 스페인人들이 이 명칭을 그들의 언어로 번역하여 '하얀 집' 즉, '카사블랑카'(Casablanca)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아침 8시 30분에 호텔을 나서 처음 찾아간 곳은 바닷가의 간척지에 세워진 '핫산2세 사원'(Mosquee Hassan II)이다. 이른 새벽(?)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는 듯 사원 앞의 넓은 광장이 썰렁하리만큼 조용하다.
   前 국왕인 핫산2세(현재의 국왕 모하마드 6세의 아버지)가 자신의 치적을 과시하기 위해 공사 시작 8년만인 1992년에 완공한 이 사원은 아랍세계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사원 다음으로 큰 회교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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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내에서 2만 명, 옥외 광장에 8만 명 합계 10만 명의 신도가 동시에 예배드릴 수 있다면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있을까. 실제로 가보지 않으면 아마도 그 거대함이 실감나지 않으리라. 전국에서 각 분야의 匠人 1만 명이 총동원되어 8년 동안 매일 24시간 주야로 작업한 끝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지붕의 2층은 개폐식이고, 지상 200미터의 탑은 아랍 전통 양식과 현대 최신 자재와 설계로 이루어진 첨단 건축물이다. 밤에는 탑 꼭대기에 장착된 레이저빔이 메카를 향해 동쪽으로 약 30km까지 빛을 쏜다. 알라의 축복을 받기 위함이리라.


   이 사원을 짓기 위하여 수조 원(정확한 액수가 알려져 있지 않다)에 이르는 건설비를 온 국민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충당했다고 하는데,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받았던 원납전(願納錢)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모로코판 원납전이 '怨納錢'(원납전)이 아니었기를...

   핫산2세 사원에서 바닷가를 따라 남쪽으로 난 길을 2km쯤 가면 '아인 디압'(Ain-Diab) 해변 별장지대가 나온다. 모로코왕의 별장도 있지만 그보단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웅장한 별장(궁전이다)이 제일 눈에 띈다. 그리고 모로코나 다른 아랍국가 부호들의 주택 내지 별장들도 즐비하다. 마치 포르투갈의 까스까이스 해변에서 본 별장지대와 비슷하다.


   골프장과 승마장도 있고 길에는 여전히 벤쯔가 즐비한데, 시내와 다른 것은 그 차들이 대부분 신형의 새 차들이라는 것이다. 매연으로 찌든 시내와는 달리 카사블랑카의 '비버리힐즈'인 셈이다. 길가에는 하나에 5달러를 받는 맥도날드 햄버거집도 있다, 그 집이 모로코 내에서 매출 1위라고 한다. 코카콜라와 더불어 자본주의의 상징이 된 맥도날드 햄버거는 온 지구촌의 음식이 되었다고 해도 될 듯하다.
   길에서 바닷가로 내려서면 노천 카페들이 분주히 손님을 받는다. 재미있는 것은 바닷가에 바로 붙어 있는 수영장들이다. 파도가 심한 까닭에 수영장에서 해수욕을 하는 것이다. 부촌답게 "Fitness Club"이라는 영문 간판을 내건 헬스클럽도 보인다.

NWYSE021.GIF   바닷가를 벗어나 신시가지에 있는 왕궁(Palais Royal)으로 갔다. 모로코 국왕이 일년에 2-3 번 들러 집무를 하는 별궁인데, 그의 방문에 대비해 언제나 완벽한 준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모래바람을 막기 위하여 사방을 성벽으로 둘러싸고 그 안에 정원을 조성하였다. 지붕은 역시 초록색이다. 성문이 열쇠구멍 형상인 것은 회교식 건물의 전형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회교국가에서는 어딜 가나 사원이나 왕궁의 문, 회랑 등이 모두 열쇠구멍 모습인데, 이는 천국으로 가는 열쇠를 의미한다고 한다. 스페인의 유적들 중에서도 알암브라 궁전과 같이 아랍인들의 지배 시절에 지어진 것들은 마찬가지이다.
   왕궁 앞의 널찍한 광장에는 총을 메고 순찰중인 군인이 눈에 띈다. 왕궁 경비병인 모양이다.

NWYSE022.GIF   카사블랑카를 벗어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모하메드5세 광장으로 갔다. 광장보다는 그 곳에 있는 물장수를 보기 위함이다.    
   광장 옆 법원 앞의 길에서 베르베르인의 전통복장을 하고 물을 파는데 1잔에 1디람(약 120원)을 받는다. 사실 그들은 물을 팔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사진의 모델이 되어 주고 모델료(1유로 정도)를 받는 것이 주된 일이다.

   더 이상 볼 것이 없는 카사블랑카를 떠나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로 향했다. 아직 아침 10시 20분밖에 안 되었다.

   (6) 인걸은 가고---라바트(Rabat)

   카사블랑카로부터 9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라바트에 12시에 도착했다. 라바트는 인구가 220만 명으로 로마시대에 이미 개척된 도시이다. 그 전에는 카르타고人들이 먼저 살았다니(BC 8세기)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셈이다. 그렇지만 17세기 때부터 스페인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고, 1912년부터는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현재는 왕궁과 모든 국가 주요 부서들이 있는 행정의 중심지이다. 대신 공단이 없고 고층 빌딩도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숲이 우거진 쾌적한 도시이다.

   우선 민생고를 해결하러 가는 대로변에서 공동묘지가 눈에 들어왔다. 유심히 보니 비석마다 십자가 형태이다. 기독교 묘지인 것이다. 회교국가의 수도에 기독교 공동묘지라니...
   종교라는 게 본래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임을 상기한다면 아무 것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럼에도 언뜻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무수히 벌어졌고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혈분쟁에 익숙해진 탓이다.
   거창하게 전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종교 때문에 결혼 중매가 일그러진 일이 한 두 번이 아님을 어쩌랴.

   점심식사로 가재미구이가 나왔다. 생선이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말썽이가 곁다리로 나온 클레멘토(오렌지의 일종)만 열심히 먹는 것을 보고 종업원이 다가온다. 사장의 지시라며 원한다면 스테이크를 해주겠다고 한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다.
   얼핏 주위를 둘러보니 저쪽에서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 일행을 바라보고 있다. 말썽이가 스테이크를 먹은 대신 비행기에서 가져온 고추장크림병 1개를 주어야 했다. 사장이 좋아한다는 종업원의 말을 모른 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물물교환인가?

NWYSE023.GIF    점심을 먹고 라바트 중심에 위치한 왕궁으로 갔다. 현 국왕인 모하메드6세가 거처하는 곳이다. 18세기에 세워진 이래 규모가 점점 커져 현재 그 넓이가 무려 45헥타아르에 이른다. 상주인구가 2,000여 명이고 정원사만 100명 정도 된다. 세네갈, 튀니지 등에서 데려온 흑인 내시들도 있다.
   궁 안에 수상 집무실, 국방부, 왕족학교, 그리고 회교사원도 있으니 한 마디로 도시 속에 있는 또 하나의 작은 도시나 마찬가지다.


   왕궁은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밖에서 '대사의 문'을 통해 국왕이 거처하는 궁전 앞까지 관광객의 차가 들어갈 수 있다.
   궁전 앞에는 근위병, 순경, 헌병, 특전요원 등이 지키고 있다. 이들 왕궁 경비 병력만도 합쳐서 1,500명이라고 한다.
   궁전 앞의 뜰에는 분수대가 두 개 있는데, 왕이 안에 있을 때만 작동을 한다. 우리가 갔을 때는 왕이 외출중인 듯 분수대가 조용히 쉬고 있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아랍국가의 왕은 정말 해볼 만한 것 같다.
   

왕궁을 나와 찾아간 곳은 '쉘라'(Chellah)라는 곳.NWYSE024.GIF  14세기에 건축된 성문을 들어서면 저 멀리 강이 보이는데, 그 사이에 폐허화된 유적지가 나타난다.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지이다. 1755년 지진으로 폐허가 된 것이다. 다행히 성곽은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유적지의 규모로 보아 한창 때에는 인구가 2만 명쯤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아 있는 주춧돌을 비롯한 각종 석물 등으로 보아 주거지, 상가, 극장 등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화창한 날씨가 마치 봄이 온 듯한데, 인걸은 간 데 없고 돌무더기만이 오가는 관광객들을 무심히 대할 뿐이다. 제 멋대로 자란 잡초와 무너지다 만 탑 위에 앉아 오수를 즐기는 황새 역시 무심하긴 마찬가지이다. 아니 그들은 쑥밭이 된 이곳의 한가로움을 즐기는지도 모른다. 인간들만이 종종걸음을 칠 뿐이다.

   로마시대의 인걸이 가고 그 후의 영웅호걸들도 무수히 명멸을 되풀이하였지만, 죽으면 그만인 이름을 남기기 위한 어리석은 집념은 기어코 무언가를 남기려고 한다.NWYSE025.GIF
   쉘라의 폐허를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핫산탑(Tour Hassan)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라바트 정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언덕에 위치한 이 곳은 본래 11세기에 회교 사원을 지으려고 했던 곳으로, 로마 유적지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측되는 돌기둥 355개(355라는 숫자는 태음력의 1년을 의미한다)가 대오를 갖춰 놓여 있다.
   사원 건축 도중 일을 추진하던 술탄(왕)이 죽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되어, 88m까지 쌓으려던 탑은 44m에 머물렀고, 지붕을 받치려던 기둥들은 마치 광장의 조형물처럼 남게 되었다. 이 탑은 세비야의 히랄다탑을 세운 건축가의 작품이라는 말도 들린다.

   핫산탑을 마주하고 광장을 가로질러 정면에 현 국왕의 할아버지(모하메드 5세)와 아버지(핫산 2세)의 무덤이 양옆으로 있다. 단순한 무덤이라기보다는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전통적인 아랍 양식에 현대 건축기법을 가미하여 지은 대규모 건축물이다.
   마침 핫산 2세의 무덤인 건물이 열려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중앙 하단에 관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카사블랑카에 그 큰 사원을 세운 왕답게 죽어서도 대궐 같은 곳에서 세상을 호령하는 듯하다. 이승에서 못 다한 무슨 미련이라도 남아 있는 것일까...

   라바트에서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12세기에 조성된 '오이디아스' 마을.  이 곳은 성곽으로 둘러싸였는데, 스페인의 안달루시아풍이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쫓겨온 아랍인들이 세운 탓이다. 페즈처럼 미로가 많았으나 길이 넓어 걷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해안가에 위치한 이 곳에는 포대가 아직도 남아 있어,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침략자들에 맞서 영토를 지키려고 애썼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오후 3시 15분. 라바트를 출발했다. 목적지는 땅제. 모로코 일주를 마치고 거기서 다시 페리를 타고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버스 안에서 이틀 간의 일정을 되돌아보다가 따스한 햇살에 깜빡 잠이 들었나 했더니 차가 서려고 한다. 작년(그래봐야 이틀 전이다) 12월 30일 밤에 묵었던 땅제의 인터콘티넨탈호텔에 다시 여장을 풀었을 때는 밤이 한참 깊었다.


   강행군을 견뎌내려면 먹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늦은 저녁으로 빵을 꾸역꾸역 쑤셔 넣지만 맛이 있을 리 없다. 혓바늘이 돋은 곳에 오렌지쥬스가 닿으니까 칼에 벤 듯 쓰라리다. 계속 약을 먹건만 감기는 더욱 심해진다. 내일이 걱정이다.

   (7) 다시 유럽으로---지브롤터 해협

   2003. 1. 2.

   새벽별 보기 운동의 정점에 서는 날이다. NWYSE026.GIF오늘만 무사히 넘기면 내일부터는 편해진다니 기대가 크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났다. 6시 30분에 스페인으로 떠나는 배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둘러 부두로 나간 보람도 없이 배가 떠날 생각을 안 한다. 인샬라! 알라의 뜻이다.


   예정보다 1시간 15분이나 늦은 7시 45분, 드디어 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출항한 지 20여분, 항만을 벗어난 페리가 대해로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태양이 동쪽에서 빛을 발한다. 올 1년 내내 그렇게 밝은 빛을 비춰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대략 2시간 30분 정도 걸려 스페인의 알헤시라스에 도착할 때까지 대서양과 지중해의 풍광을 실컷 즐겼다.


    "바다를 여행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축복입니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 주니까요. 그런데 그 날 배에는 신년 연휴를 지내고 유럽대륙으로 가는 엄청난 모로코사람들 때문에 정말 혼잡했답니다."


   여행 후 집사람이 말썽이의 홈페이지에 남긴 말이다.

   그랬다. 지난 12월 30일에 모로코로 건너가는 배는 텅 비었었는데, 오늘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배는 거의 만원이다. 그 바람에 스페인에 도착하여 통관절차를 밟는 데도 1시간 30분이나 걸렸다.
   밀입국을 막느라 모로코인들의 여권을 일일이 검색하며 시간을 끌던 출입국 직원들이 정작 우리 일행의 것은 보지도 않고 통과시킨다. 그럴 거면 별도의 통관창구를 만들어 놓으면 좋으련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