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그것이 있었기에(예외2-스페인,독일)

2010.02.16 11:59

범의거사 조회 수:18552

 


                거기 그것이 있었기에(2)
 


6. 동서문명의 교차로

   (1) 아랍문화의 꽃---그라나다(Granada)


ADE.GIF   통관하느라 애를 먹는 바람에 알헤시라스에서 점심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해치웠다. 그라나다의 알암브라궁전을 약속된 시간에 들어가려면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식당에 들어가 나오기까지 30분도 안 걸렸다. '빨리빨리'에 익숙한 한국인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지 스페인 사람들 같으면 꿈도 못 꿀 일이라고 양상혁씨가 고마워한다.
   그렇게 해서 오후 1시 15분에는 알헤시라스에서 그라나다로 출발할 수 있었다.

   스페인의 남쪽 해안을 따라 달리는 차창에 어리는 지중해변의 경치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피카소의 고향인 말라가까지 이어지는 해변에는 곳곳에 그림 같은 별장들이 자리잡고 있고, 길가의 입간판에는 별장과 콘도를 분양하는 광고가 자주 눈에 띄었다. 연중 비가 오는 날이 얼마 안 돼 푸른 하늘에서는 태양이 작열하고, 거기에 적당한 구릉과 쪽빛 바다가 조화를 이루니 헐리우드의 유명한 영화배우들이 이곳에 별장을 갖고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오후 2시 40분. 말라가 앞에서 지중해와 작별하고 버스가 내륙지방으로 접어든다. 이젠 안달루시아 지방의 구릉과 평원이 계속 이어지고 거기에 보이는 것은 끝없는 올리브농장이다.
   그렇게 2시간을 가려면 제법 지루할텐데... 하는 걱정을 미리 덜어주려는 듯, 양상혁씨가 스페인의 역사를 간단히 들려준다.


   이베리아 반도에 소금을 전해준 페니키아인들이 페니키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뜻으로 "히스파니아"라고 부른 것이 현재의 국명인 "에스파니아(Espana)"(스페인은 영어식 표기이다, 이하에서는 '에스파니아'로 표기한다)로 되었다는 이야기가 흥미를 끈다.
   무어인(아랍인)이 8세기(711년)에서 15세기(1492년)에 걸쳐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시절 그 중심지가 바로 안달루시아 지방이었기에 세비야, 그라나다, 꼬르도바에는 아랍의 유적들이 많다.


   그 위에 다시 겹쳐진 기독교문명이 공존하니 에스파니아는 동서문명이 교차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토가 예술성이 뛰어난 사원, 궁전, 성, 성당으로 뒤덮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곳곳에 유적이 산재해 있고, 그 안에는 진귀한 조각, 그림, 보석, 융단 등이 가득차 있는 덕분에 연간 관광객의 숫자가 1억 명에 이른다고 한다(에스파니아의 전체인구는 4,000만 명인데, 라틴계의 에스파니아人이 주류이고, 거기에 이베리아 원주민, 게르만인, 아랍인 등 다양한 종족의 혼혈이 모여 산다). 그만큼 조상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11세기에 발렌시아에 침입한 아랍인들을 물리치는 에스파니아 장군의 활약을 그린 영화 '엘시드'(찰톤 헤스톤 주연)를 비디오로 보고 나니까 오후 4시 30분이다.
   영화를 보느라 차창을 가렸던 커튼을 제치자 드문 풍경이 연출된다. 하얗게 눈이 덮인 산이 나타난 것이다. 해발 3,500m의 '시에라네바다'('눈 덮인 산'이라는 뜻)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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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의 눈 녹은 물이 일품이서 산 속에는 '랑하론'이라는 장수마을이 있는데, '랑하론'은 생수의 상표이기도 하다.    


   마치 시에라네바다의 품속에 있는 듯한 그라나다(Granada : '석류'라는 뜻)는 인구가 28만 명인 크지 않은 도시인데도 연간 관광객이 400만 명이나 찾는다. 유명한 알암브라 궁전이 이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라나다는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아랍인들의 최후 거점이었다. 기독교들에 밀려 세비야에서 꼬르도바로, 꼬르도바에서 다시 이곳으로 쫓겨온 그들은 1492년 이베리아 반도를 떠날 때까지 마지막 불꽃을 피웠다.
   그라나다는 미인의 고장으로도 유명한데, 에스파니아에서 아랍인들이 가장 오랫동안(거의 800년)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아랍 사람과 에스파니아 사람의 혼혈이 많은 까닭이라고 한다. 또한 그라나다 국립대학이 있는 덕분에 남부 최고의 교육도시로도 꼽힌다.    

   '알암브라'(Al Hambra : '붉은 성'이라는 뜻) 궁전으로 가는 길에 이정표에서 '싼타 페'(Santa Fe)라는 지명이 눈에 띈다. 현대자동차에서 만든 SUV의 이름이 에스파니아의 지명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러고 보니 한참 전에는 '그라나다'라는 이름의 차도 있었지...
   사비카 언덕에 있는 알암브라 궁전에 도착하기 직전에 언덕을 오르는 멋진 길이 하나 나오는데, 이름하여 '한탄의 길'이다. 1492년 그라나다를 마지막으로 떠나는 아랍 나사리왕조의 '보아브딜王'이 아름다운 그라나다를 떠나야 하는 아쉬움을 이곳에서 토로했다고 하여 그렇게 붙여진 것이다.


VWQBE002.GIF   80만 평의 넓은 대지 위에 자리잡은 알암브라 궁전(성벽의 길이만 2km)은 14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에스파니아에 있는 아랍문화를 대표하는 곳이다.
   하루의 입장객을 7,800 명으로 제한하고, 입장시각도 통제하는 것은 무분별한 관람으로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궁전은 크게 '까를로스5세 궁전', '알까사바', '까사 레알', '헤네랄리페'의 4구역으로 나뉜다.

  궁으로 들어가는 성곽의 문('심판의 문'이라 불린다)은 아랍의 건축물답게 역시 열쇠구멍 형태이다. 그 문을 통과하여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건물의 외양이 아무래도 이상하고 어색하다. 쯧, '까를로스5세 궁전'(Palacio de Carlos V)이다.
   회교도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16세기에 알암브라 궁전의 한복판에 까를로스 5세가 지었단다. 그것이 알암브라 궁의 전체적인 조화를 파괴하고 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까를로스 5세 궁전을 비켜 알암브라 궁전의 핵심인 '까사 레알'(Casa Real)의 내부로 들어가면 방과 뜰이 교대로 나온다.
   첫 번째는 대사(大使)의 방으로 가기 전 잠시 대기하는 신하의 방이기도 하고, 법정으로도 사용되었던 메슈아르(Mexuar)의 방(후에 기독교 세력이 들어와서는 성당으로 사용), 두 번째는 시에라네바다山의 눈 녹은 물을 끌어온 분수가 있는 뜰, 그리고 세 번째는 '대사(大使)의 방'(Salon de Embajadores)... 이런 식이다.
   대사의 방은 왕의 공식 접견실이다. 눈을 가린 외부 사신을 이곳으로 데려와 무릎을 꿇고 앉게 했다. 반면 왕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등지고 앉기 때문에 그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 바닥은 타일이고, 천장은 태양과 별이 총총한 하늘을 형상화했다.

   까사 레알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대사(大使)의 방에 이어지는 '아라야네스 정원'(Patio de los Arrayanes : '물의 정원'이라고도 불린다)이다.
   좌우 대칭으로 심어 놓은 아바라예나 나무와 가운데의 연못은 천국을 상징한다. 그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상징하는 샘물이 연못의 양쪽 끝에 있어 시에라네바다 산에서 끌어온 물이 그 곳으로 흘러 나와 연못으로 들어간다.


VWQBE003.GIF   사막에 살던 아랍인들은 생명의 근원을 물로 보았기 때문에 물을 매우 중요시했다. 알암브라 궁전도 '물의 궁전'이라고 할 만큼 곳곳에서 물이 나오고 흐른다. 유명한 기타연주자 '세고비아'가 연주하는 "알암브라 궁전의 추억"을 들으면 마치 물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는 듯하는 것도 바로 그런 연유이다.


   연못 좌우의 2층 건물은 정확한 대칭구조이다(이것도 아랍 건축의 한 특징이다). 대리석에 코란에 나오는 내용을 음각시켜 놓았으며, 아래 방에서는 여름을 지내고, 위의 방에서는 겨울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정면을 보면 2층 건물의 위로 덧대어 지은 부분이 보인다. 이 볼썽 사나운 부분은 기독교인들이 시에라네바다 산이 안 보이도록 증축해 놓은 것이다. 아랍인들은 이미 물러갔는데, 새삼스레 산의 정기를 차단하겠다는 것인가....

   아라야네스 정원을 지나고 나서도 까사 레알에는 볼 거리가 많다. 왕 외에는 금남의 지역인 사자(獅子)의 뜰(Patio de los Leones) 안에 있는 왕의 방(향연을 베풀던 곳), 두 자매의 방(왕이 사랑한 기독교인 자매가 있던 곳), 비극의 방(왕의 후궁과 정을 통하던 청년이 목을 잘린 곳), 분수대(12마리의 돌사자가 받치고 있다) 등은 그 모두가 예술품이나 다름없다.
   그런가 하면 왕의 목욕탕도 있는데, 왕이 후궁들의 마사지를 받으며 목욕할 때 욕실 이층에서는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했다. 그 악사들이 목욕장면을 보지 못하도록 모두 눈을 빼서 장님으로 만들었다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치자의 향락 뒤에는 민초의 고난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1829년 에스파니아 주재 미국대사 '워싱턴 어빙'이 그 곳에서 "알암브라 이야기"를 씀으로써 이 궁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워싱턴 어빙의 방'을 지나, '헤네랄리페'(Generalife)로 나서면 시에라네바다 산의 눈이 녹아 내린 맑은 물을 이용한 분수와 아바라예나 나무의 초록 잎새들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뜰이 멀리서 온 나그네로 하여금 발걸음을 멈추고 한 숨 돌리게 한다. 이 곳은 왕이 여름에 쉬었던 별장이다.

    까사레알의 정문과 '알까사바'(알암브라 궁전을 지키는 요새) 사이의 마당에 서면 궁전 밑으로 흐르는 '다로' 강의 건너편 북쪽 언덕에 흰색 건물들이 늘어선 '알바이신'(El Albaicin) 지구가 보인다.
VWQBE004.GIF   아랍인들이 살던 마지막 도피처로서 그라나다 점령 후에도 아랍인들이 모여 살다가 16세기 중반 폭동을 일으켜 쫓겨났다.
   기독교인들이 그라나다를 공격할 때 끝까지 항거해서 하얀 벽돌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옛날 아랍 거리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알바이신 지구도 볼 만하지만 그보다 의미가 있는 것은 그 옆 사끄로몬떼(Sacromonte) 언덕에 있는 집시동굴촌이다. 그리고 그들이 연출하는 플라멩꼬는 알암브라와 함께 그라나다를 대표하는 볼거리이다.    


   집시는 본래 인도의 북부지방에서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난 사람들이다. 그들의 첫 정착지인 이집트의 'Giptanos'에서 '집시(gypsy)'라는 말이 유래했다고 한다.
   이집트에서 다시 쫓겨나 체코슬로바키아로 갔다가 거기서도 쫓겨나 세 부류로 나뉘어 유럽 각지로 흩어지게 된다. 그들 중 한 부류가 에스파니아의 안달루시아 지방에 정착한 것은 VWQBE005.GIF 15세기(1447년). 그들이 지금도 싸끄로몬테 언덕에 동굴을 파고 살고 있는 것이다.

   이리저리 쫓기면서 끊임없이 떠돌아야 했던 집시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방랑문화 형식의 음악을 만들어냈고, 그 음악은 일상의 시름을 잊기 위한 잔치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었다. 그들은 우선 노래를 만들어냈으며, 이내 손과 발로 연출하는 리듬을 가미했다.


   집시들이 안달루시아 지방에 정착한 후 아랍인, 유태인, 기독교인의 문화가 접목, 융화하면서 탄생한 것이 바로 '플라멩꼬'이다.
   플라멩꼬의 어원은 아랍어인 'felag'(농부)"와 'mengu'(도망자 또는 피난민)가 합쳐진 것이다.
   화려하면서도 특이한 의상을 차려입은 무희가 격렬한 동작으로 춤추는 플라멩꼬에는 이처럼 집시의 애환이 서려 있는 것이다.

  알암브라 궁전에서 돌아와 호텔(Luna de Granada Hotel)에서 저녁 식사 후에 감기약을 먹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유고전범재판소에서 밀로세비치의 재판을 맡고 있는 권오곤 재판관의 반가운 목소리다. 휴가차 마드리드에 와 있단다.
   다음날 만나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막 끝는데, 이번엔 "띵똥∼" 호텔방의 초인종이 울린다. 환자가 잠든 사이에 집사람과 말썽이가 집시동굴에 가서 플라멩꼬 공연을 보고 돌아온 것이다. 흑흑, 아프지 말았어야 하는데... 언뜻 시계를 보니 밤 12시.  

   (2) 고대와 중세의 가교---꼬르도바(Cordoba)

   2003. 1. 3.

   드디어 별보기 운동이 끝났다. 아침 7시 30분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느긋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입안 곳곳이 헐어 짠 음식이나 쥬스가 닿으면 여전히 쓰리고 아프지만 그래도 마음에 여유가 있으니 한결 개운하다.    
  9시 30분. 꼬르도바를 향해 출발했다. 차창에 어리는 풍경은 어제와 진배없이 올리브나무 숲의 연속이다. 도중에 국도변 휴게실에 들렀는데, 화장실에 "화장실", "
", ""라는 표시가 붙어 있어 멀리 서울에서 온 이방인을 놀래킨다. 그만큼 한국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다는 의미일 게다.  

   12시 30분.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시 꼬르도바에 도착했다. 이 도시의 이름은 한 때 명성을 떨쳤던 가죽제품 '꼬르도반'에서 유래하였다.VWQBE006.GIF   현재는 인구가 28만 명이지만, 이슬람문화의 절정기였던 10세기에는 100만 명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에는 유럽에서 제일 가는 대학과 수백 개의 회교사원, 호화로운 궁전 등 명실 공히 유럽에서 제일 가는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였다.
   이곳으로 흘러들어 연구되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들이 11-13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후세에 전해졌으니, 꼬르도바는 고대와 중세를 잇는 가교였다고 할 수 있다.


   시내로 들어서자 강이 나온다. 세비야에서 보았던 과달끼비르강이 여기까지 거슬러 올라온 것이다. 그 강 위에 1세기 로마시대에 축조된 돌다리 '로마교'(Puente Romano)가 놓여 있다. 길이가 223미터로 전쟁으로 여러 차례 파괴되었지만 그때마다 개축되어 지금도 차량이 통행한다.

    중국음식으로 점심을 해결한 후(종업원의 불친절이 눈에 거슬렸다) 제일 먼저 유태인지구(La Juderia)로 갔다. 과거 유태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동네로 들어서는 입구에 로마시대의 철학자 세네카의 동상이 눈에 띈다. 그의 고향이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꼬불꼬불한 길과 하얀 벽들의 집, 창문을 장식한 가지각색의 화분들이 친근감을 주는 이곳은 세비야에서 보았던 것처럼 길들이 매우 좁다. 안에 광장이라고 하기에는 협소한 공간(골목 중에서 다소 넓은 곳이라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이 있는데, 그곳에 유태인 최초의 의사(이름은 잊어버렸다) 동상이 세워져 있다.    

    유태인 거리를 지나 남쪽으로 내려가면 메스끼타(Mezquita)가 나온다. 꼬르도바에서 가장 볼 만한 곳이다.
   785년 건설을 시작하여 987년까지 3번에 걸친 증개축 끝에 완성한 회교사원이다. 남북 180m, 동서 130m의 거대한 규모로서, 25,000명의 신도를 수용할 수 있다.
   신자들은 면죄의 문(Puerta de Perdon)으로 들어가서 오렌지 정원(Patio de los Naranjos)에 있는 연못(현재는 매립되어 없다)에서 손발을 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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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려나무의 문(Puerta de las Palmas)을 지나 사원의 중심인 미라브(Mirab) 쪽으로 가도록 되어 있다.


   내부에는 줄무늬 차돌, 백옥, 대리석, 화강암 등으로 만들어진 850개(본래 1,000개가 넘었다고 한다)에 이르는 둥근 기둥들이 아치를 이루며 서 있어 미궁궁을 연상케 한다.

   각 기둥마다 그것을 세우고 조각한 장인들의 싸인이 새겨져 있는데, 싸인을 탁본하여 모아놓은 전시공간이 따로 있다. 그 중 한 기둥에는 회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당한 한 기독교인이 기둥에 묶인 채로 개종을 거부하면서 손톱으로 새겼다는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아랍인들이 떠난 후 이 웅장한 메스끼타는 큰 변화를 겪는다. 알암브라 궁전에다 자기의 왕궁을 세웠던 까를로스 5세의 손길이 여기에도 미처, 중앙의 기둥 200여 개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르네상스양식의 성당을 지은 것이다. 그 바람에 회교 사원과 기독교 성당이 동거하는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특히, 성당을 지으면서 19개의 문 중 1개만 남기고 다 막아버린 통에 내부가 무척 어둡다. 성상(聖像)이나 성구(聖具)를 필요로 하지 않는 회교 사원의 밝은 분위기가 성상(聖像)과 성화(聖畵)로 가득찬 성당의 어두운 분위기로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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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스끼타에서 나와 북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꺾인 '벨라스께스 보스꼬' 거리에 들어서면 작은 꽃길(Calleja de las Flores)이 펼쳐진다.
   길가의 집집마다 바깥 벽에다 꽃화분을 내걸었는데, 그 지붕들 사이로 솟아 있는 회교 사원의 탑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그 중 내부를 개방한 어느 집의 안으로 들어갔더니 그림타일, 분수, 화분에 심은 관엽식물과 꽃들, 철책 등으로 장식한 예쁜 뜰(Patio)이 있다.
   그 아름다운 뜰에 넋이 팔려 있는데, 밖에서 얼른 가자는 외침이 들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나왔다.  

    오후 5시. 마드리드로 가는 초고속열차 아베(AVE)에 올라탔다. 이번 대장정에서 처음 타는 기차이다. 시속 250km로 달리는 이 초고속 열차는 하드웨어(전동차)는 프랑스의 TGV, 소프트웨어(신호체계)는 독일의 IC를 들여다 짬뽕한 것이다. 서로 자기 것을 팔려는 유럽의 두 강대국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고민하다 타협점을 찾은 것이다.
   마드리드까지 1시간 50분 정도 가는데, 고속으로 달리는데도 별로 흔들리지 않고 승차감이 괜찮다. 그래서인지 좀처럼 속도감을 느낄 수 없다.  

   저녁 6시 50분 마드리드의 아토차(Atocha)역에 도착했다. 1892년에 만들어진 역이라는데 쾌적한 느낌을 준다. 1992년 초고속 열차의 개통과 동시에 내부를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시민들의 휴식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 식물원과 현대식의 시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인근의 "한강"이라는 한식당으로 이동했다. 이번 장정에서 처음으로 먹어보는 한국음식이다. 밥도 맛있고, 김치도 맛있고, 불고기도 맛있다. 순식간에 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그 사이에 권오곤 재판관 가족이 음식점으로 찾아왔다. 그가 2001년 여름 네덜란드로 떠난 후 처음으로 만나는 참으로 반가운 해후(邂逅)다. 이국 땅 에스파니아에서 만날 줄이야.
   저녁 식사 후 권 재판관의 제의로 말썽이와 권 재판관의 아이들을 각기 호텔로 먼저 보내고 양쪽 부부끼리 시내 구경에 나섰다. 구경도 구경이지만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기 위함이다. 뿌에르타 델 솔 근처 번화가의 카페에서 이야기 꽃을 피우다 보니 금세 밤 11시가 된다. 아쉬움 속에 작별을 고하고 호텔(Hotel Gran Colon)로 돌아갔다.

  (3) 불야성---마드리드(Madrid)

   2003. 1. 4.

   아침 7시에 일어나 여유 있게 아침을 먹고 똘레도(Toledo)에 갔다가 오후에 돌아왔다(편의상 똘레도 이야기는 뒤에서 다룬다). 해발 646미터의 고원에 위치한 마드리드는 이베리아 반도의 중앙부에 자리잡은 인구 480만 명의 도시이다.


    마드리드는 에스파니아의 다른 유적 도시에 비하면 역사가 그리 긴 편이 아니다. 15세기말 에스파니아의 통일 후 발전을 거듭한 에스파니아가 무적함대를 자랑하는 절정기에 이르자 펠리페 2세가 1561년에 수도를 똘레도에서 국토의 중심인 마드리드로 옮긴 것이다. 이를 계기로 왕궁이 건설되고 귀족, 관리,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도시가 비약적으로 커졌다. 18세기 후반 까를로스 3세 때 수많은 건축물들이 지어지고, 도시가 더욱 커져 현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똘레도에서 돌아와 맨 먼저 찾은 곳은 '왕궁'(Palacio Real de Madrid ) 이다. 이 왕궁은 부르봉왕가 문화의 대표적 유산이다. 에스파니아에서는 1700년 까를로스 2세가 왕위계승자 없이 사망하자 합스부르그왕가(오스트리아)와 부르봉왕가(프랑스)가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전쟁을 한 결과 부르봉왕가의 승리로 돌아가 펠립페 5세가 등극한 후, 현재의 후안 까를로스 1세까지 이어지고 있다(정작 프랑스의 부르봉왕가는 프랑스혁명으로 소멸하였다).


VWQBE009.GIF   지금의 왕궁 자리에는 본래 합스부르그왕가의 왕궁이 있었는데, 그것이 1734년 크리스마스 때 화재로 불타버리고, 1738년부터 26년 간에 걸친 공사 끝에 1764년 지금의 왕궁이 완성되었다.
   르네상스양식과 신고전주의 양식을 혼합한 이 왕궁은 방이 무려 2,800개에 달하며 공식행사가 없는 날에는 일반 관광객들에게 개방한다.


  그 많은 방들을 다 볼 수는 없어 몇 개만 둘러보고 나왔다. 에스파니아 통일의 기초를 다진 아라곤의 페르난도왕과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을 상징하는 두 개의 옥좌가 있는 옥좌의 방(Salon de trono), 까를로스 3세가 돌아가며 점심, 저녁, 아침을 먹었다는 3개의 방, 서로 연결, 분해 조립이 가능한 88개의 도자기가 있는 도자기의 방, 약 150명 정도가 함께 식사할 수 있으며 15개의 샹델리아와 1,100개의 전구가 화려함을 더해 주는 만찬장(Comedor de Gala), 역대 왕과 왕비들이 전용으로 썼던 각종 은제품 식기류가 전시되어 있는 은제품식기류 전시실 등을 둘러보는 데도 시간이 제법 흘렀다.


   지금은 에스파니아에 막대한 관광수입을 안겨다 주고 있어 복덩어리일지 몰라도 그것을 짓느라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피와 땀을 흘렸을는지... 이 거대한 왕궁에 살았던 왕들은 과연 거기에 걸맞게 나라를 다스렸을까? 사치와 향락을 위하여 백성들의 고혈만 빨다 간 왕은 없었을까?
   절대군주가 호령하던 시절에 '고야'(Goya)가 하루 세 끼를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먹은 까를로스 3세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왕의 얼굴은 바보처럼 익살스럽게 그리고, 왕비의 치마에는 해골을 그려 넣은 이유를 알 듯하다.  

   왕궁에서 나와 '마요르 광장'(Plaza Mayor)으로 갔다. 마드리드 구시가지의 중심을 이루는 광장이다. 광장 복판에는 펠리페 3세의 기마상이 서 있다.
   먼저 지나온 포르투갈도 그렇고 에스파니아도 마찬가지로 도시마다 광장이 있으면 그 곳에는 거의 예외 없이 기마상의 거대한 동상이 서 있는 것이 이채롭다. 그만큼 영웅이 많다는 것인가, 아니면 왕들이 저마다 자기의 치적을 과시하려고 했기 때문일까?  


   17세기부터 19세기 전반까지 각종 공연장, 마녀재판 및 사형집행장, 왕가 결혼식장, 투우장 등 다채로운 행사장으로 사용된 마요르 광장은 현재도 축제나 공공행사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우리가 갔을 때도 무슨 야외공연 준비에 번잡한 모습이었다.

02 (4).jpg     마요르 광장을 떠나 인근의 가죽제품 면세점을 잠깐 구경하고 '에스파니아 광장'(Plaza de Espana)으로 갔다. 이미 저녁 6시가 넘은 시각이라 주위가 어둡다.
   이 광장은 세르반테스의 사망 300주년을 기념하여 1916년에 만든 것이다. 그래서 한복판에 세르반테스, 말과 나귀를 탄 돈키호테와 산초의 동상이 있다. 동상의 뒤로 보이는 피라미드형 빌딩은 Edificio Espana(27층, 117미터)로 현재 아파트와 호텔로 쓰이고 있다.


   마요르 광장도 그렇지만 특히 에스파니아 광장에서는 소매치기를 주의해야 한다고 귀가 따갑게 들었다. 현금을 많이 갖고 다니는 한국과 일본인 관광객이 주요 소매치기 대상이란다. 1주일 전에는 한국 여자관광객이 사람들이 뻔히 보는 데서 핸드백을 빼앗겼는데, 단순 소매치기가 아니라 거의 강도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드리드에서는 필요한 최소한의 돈만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핸드백조차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한다. 한국인 여권은 3,000불, 특히 미국 비자가 찍힌 여권은 6,000불에 암거래되고 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전날에 이어 오늘 저녁도 한식당('아리랑'이라는 곳)에서 배를 불리고 호텔로 돌아가 잠시 숨을 돌린 후 말썽이의 성화에 못 이겨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마드리드의 심장이라고 하는 '뿌에르타 델 솔'(Puerta del Sol : '태양의 문'이라는 뜻) 광장에 내렸다. 이 광장은 모든 거리 측정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어서, 마드리드의 모든 길은 이곳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또 이곳을 중심으로 모여든다. 때문에 이 광장의 역사는 마드리드의 역사라고 할 만큼 숱한 사건과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최초로 가스등이 커졌던 곳, 최초로 전차가 다녔던 곳, 최초로 전깃불이 켜졌던 곳, 최초로 지하철이 개통되었던 곳 등, 모든 시작의 중심이 되었고, 연말에는 모든 시민들의 함성과 함께 제야의 종을 울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 종이 한 번 울릴 때마다 포도를 한 알씩 삼키는 것이 풍습이라고 한다.

    마드리드의 밤은 서부유럽의 다른 국가에서는 보기 드문 진풍경을 연출한다. 밤 12시가 넘도록 시내 중심가가 쏟아져 나온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이다.
   서부유럽의 다른 도시들은 밤에 정적에 잠긴 죽은 도시가 되지만 이 곳은 밤이 되면 오히려 삶의 열기를 내뿜는 도시가 된다. 이는 에스파니아 사람들의 독특한 생활패턴 때문이다.


   그들의 아침은 10시에 비로소 시작되며, 낮에는 더운 기후 탓에 '시에스타'(Siesta)라고 하여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낮잠을 잔다. 오후 8시가 되어야 직장인들의 퇴근이 시작되고, 일반 가정에서 저녁식사가 끝나는 것은 밤 10시 무렵이다(새참을 포함하면 그들은 하루에 다섯끼를 먹는다).
   시에스타가 끝나야 상점들이 다시 문을 여는데, 특히 식당들은 오후 8시는 되어야 연다. 우리 일행이 어제와 오늘 저녁 7시에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한식당에 특별히 부탁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식사를 하는 동안 주인이 식당문을 잠가 다른 손님들은 받지 않았다.
   오후 8시부터 거리에 나오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그 때부터 쇼핑도 하고, 외식도 하고, 술도 마시고 하면서 밤 12시를 넘기는 것이다.

    에스파니아에서는 1월 5일이 어린이날이라 1월 4일 '뿌에르타 델 솔' 광장 근처의 번화가는 상가마다 아이들 선물을 사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길에서 옆 사람과 부딪치는 것은 예사다. 처음에는 소매치기들이 일부러 부딪치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지만 그게 아니다. 그러지 않고는 지나갈 수가 없는 걸 어쩌랴.
   국제축구연맹(FIFA)이 선정한 세계 최고의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을 파는 곳에 들어가 포르투갈 출신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미드필더로 활약하고 있는 '피구'(Figo)의 유니폼을 산 다음(말썽이가 그의 열렬한 팬이다), 거리 구경, 상점 구경을 더 하고픈 눈치를 보이는 집사람과 말썽이를 재촉하여 서둘러 호텔로 돌아왔다.
   목이 아프고 이마가 다시 뜨거워지고 있었다.
             
   (4) 세계문화유산---똘레도(Toledo)

    도시 전체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을 연상케 하여 유네스코가 도시를 통째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똘레도는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70km 떨어져 있다(버스로 1시간 30분 거리).
   도시 이름 자체가 Toletum('안전지대, 방어지대'라는 뜻)이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된 것에 보듯이 타호강(Rio Tajo : 포르투갈의 리스보아를 흐르는 떼주강의 상류이다)이 에워싸고 흐르는 돌산 위에 형성된 도시이다.


   똘레도는 1561년 펠리페 2세가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에스파니아의 수도였던 곳이다. 지금은 비록 수도로서의 명예는 빼앗VWQBE011.GIF겼으나 로마, 아랍, 기독교 문화가 공존하는 3,000년의 역사를 지닌 살아 있는 유적도시로 아직도 종교, 역사, 예술 방면에서 찬연한 빛을 발하고 있다.


   옛날에는 칼과 갑옷을 만드는 공장이 많았고, 그 전통이 이어져 지금도 금속세공업이 발달해 있다. 실제로 기념품 상점에 들어가 보면 중세 기사들이 사용하던 모양의 칼들을 팔고 있다. 말썽이가 몇 번이나 눈독을 들였지만 공항에서 통관이 안 된다는 구실로 단념시켰다.  

   2003. 1. 4. 간간히 비가 뿌리는 가운데 아침 10시 30분 버스에서 내린 곳은 똘레도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파노라마 언덕이다.
   타호강 건너 도시를 이루고 있는 많은 건물들 중에서 '알까사르'(Alcazar) 요새가 금방 눈에 띈다. 가장 높은 곳에 있고 가장 크기 때문이다. 본래 왕들이 살던 왕궁이었는데 육군사관학교(프랑코도 여기를 졸업했다)로 바뀌었다가 1936-1939년 에스파니아 내란 때 폭격으로 거의 폐허가 되었던 것을 내란 후 복구하여 현재는 군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타호강을 건너 '비사그라 門'(Puerta de Bisagra : 비사그라는 아랍어의 '밥사그라'에서 온 말로 '붉은 문'이라는 뜻)을 통해 구시가지로 들어가 똘레도 성당(Catedral)으로 갔다.
   회교도들을 물리친 기념으로 13세기에 착공하여 15세기에 완성된 에스파니아 카톨릭의 총본산이다. 지금도 에스파니아 국왕의 중요한 예배는 이 곳에서 진행하며, 성당의 정문은 국왕과 로마교황만이 출입할 수 있다고 한다.  
VWQBE012.GIF  

   중앙 제단의 뒤에는 '뜨란스빠렌테'('투명하다'는 뜻)라고 부르는 바로크풍의 대리석 투명조각들이 있어 이를 통하여 밖의 빛이 중앙제단까지 들어온다.
   성가대실의 가운데에는 용을 깔고 있는 독수리상이 있다. 독수리는 왕을 상징하고 용은 악귀를 상징한다. 용을 신성한 동물로 생각하는 동양의 문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보물실에는 금은으로 된 보화가 진열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높이 3m 무게 180kg이나 되는 황금빛 성체보관함(16세기초 '엔리케 데 아르페'의 작품)은 호화찬란의 극치를 보여준다. 금박을 입힌 양피 성경도 눈에 띈다.
   보물실 옆에는 엘 그레꼬의 걸작 '성의를 입는 사람'(El Expolio)을 비롯해 고야, 반다이크, 루벤스 등의 그림이 걸려 있는 방(성물실. 聖物室)이 있다.

  성당 밖의 광장으로 나오자 그림책을 파는 사람이 다가와 '7유로애!"라고 외친다. 그가 내미는 책을 보니 한글로 "똘레도와 마드리드"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에스파니아에서 가이드를 오래 한 김준한이라는 사람이 펴낸 책이다. 에스파니아 땅에서 보는 한글 책이라는 반가운 마음에 한 권 사고는 그 사람한테 가르쳐줬다. '7유로애"가 아니라 '7유로예요"라고 말하라고(1유로는 1,200원 정도이다).  

    똘레도 성당에 이어서 '산토 또메 성당'(Iglesia de Santo Tome)으로 갔다.VWQBE013.GIF오직 엘 그레꼬(El Greco)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기 위함이다.
   16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엘 그레꼬는 본래 그리스 사람인데 35세 무렵 에스파니아으로 건너가 똘레도에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그 곳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Domenikos Theotokopoulos)인데, 똘레도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간단히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의 '엘 그레꼬'라고 한 것이 아예 이름으로 굳어버렸다고 한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은 4.8mx3.6m 크기의 大作으로 그레꼬의 작품 중에서 최고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생전에 선행을 많이 베풀던 오르가스 백작이 사망하자 에스테반과 아우구스틴 두 성인이 나타나 백작의 시신을 친히 매장하였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그림 속에 그레꼬 자신의 모습을 집어넣고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손바닥을 펼치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그림 아래에는 백작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엘 그레꼬의 그림을 감상한 후 똘레도의 시가지를 멀리서 다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한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 사이 비가 개어 하늘이 청명해진 까닭에 시야가 매우 맑다.
   빵과 더불어 에스파니아 전통음식인 '하몽'이 나왔다. 돼지 뒷다리의 껍질을 벗긴 후 소금물에 담갔다 말리기를 5-6회. 그렇게 2-3개월 지나면서 숙성하는 동안에 간이 배고 소독이 된다. 그 상태에서 따로 익히지 않고 햄처럼 얇게 썰어 먹는다. 가격은 1kg에 100유로 정도이다.
   처음에는 맛이 다소 이상하더니 횟수를 거듭하니까 먹을 만하다. 말썽이는 처음부터 맛있다며 잘 먹는다.
   빵과 하몽을 더 달라고 했더니 종업원이 "추가?" 하며 우리말로 묻는다. 자랑스런(?) 한국인들이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5) 에스파니아 속의 비(非) 에스파니아---바르셀로나(Barcelona)

   2003. 1. 5.

   아침 7시에 일어나 아침 식사 후 마드리드 공항으로 갔다. 바르셀로나로 가기 위해서이다. 이베리아항공을 타고 1시간의 비행 끝에 9시 40분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을 나서는 순간부터 에스파니아 속의 비(非) 에스파니아를 경험한다. 출구 표지판의 맨 위에 "SORTIE"라고 씌어 있고, 그 밑에 "EXIT", 그리고 마지막으로 맨 밑에 "SALIDA"라고 씌어 있다. EXIT는 영어, SALIDA는 에스파니아어, 그러면 SORTIE는? 바로 까탈루냐어이다. 에스파니아 땅에서 에스파니아어가 영어만도 대접을 못 받는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바르셀로나가 있는 곳은 까탈루냐 지방이다. 이제껏 보아온 안달루시아 지방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이 지방에서는 에스파니아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까탈루냐의 고유 언어를 사용한다. 학교에서도 에스파니아어는 외국어로 가르친다. 결국 까탈루냐는 에스파니아 안에 있으면서도 에스파니아가 아닌 곳이다.
   그러기에 사마란치(그의 고향이 바르셀로나이다)는 국제올림픽윈원회(IOC) 전 위원장은 마드리드가 아닌 바르셀로나로 올림픽을 유치했고, 1992년의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오로지 까탈루냐 사람들에 의하여 치러졌을 뿐 중앙정부는 상관하지 않았다. 때문에 재정난으로 숙박시설을 짓지 못해 바르셀로나 항구에 정박한 배들을 숙박시설로 이용해야 했다. 이쯤 되면 차라리 독립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바르셀로나는 인구가 250만 명인데 연간 2,3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고 한다. 역사가 깊어 중세시대 그대로 보존한 구시가지가 있는가 하면, 에스파니아에서 상공업이 가장 발달하여 현대적인 빌딩이 늘어선 신시가지가 있다.
   예술과 건축이 발달하여 피카소, 미로, 가우디 등의 활동무대였고, 유명한 성악가 호세 까를로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들이 아우러져 세르반테스는 바르셀로나를 '유럽의 꽃'이라고 불렀다.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다.  

    공항에서 대기중인 버스를 타고 높이 173m의 몬주익 언덕으로 갔다. 서울로 치면 남산에 해당하는 곳이다.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 팬티만 입고 조깅을 하는 노인이 눈에 띈다. 겨울의 평균기온이 영상 11도 정도 되는 까닭에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 한다.

VWQBE014.GIF   언덕의 정상쯤 되는 곳에 1992년의 올림픽을 기념하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우리는 그 공원에서 그야말로 멋진 조각품을 보았다.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달리기하는 사나이, 바로 황영조이다. 바르셀로나와 자매결연을 맺은 경기도에서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그 황영조가 마라톤의 우승테이프를 끊은 주경기장은 위 조각품의 길 건너편에 있다. 그 안으로 들어서자 황영조가 1등으로 골인하는 순간의 관객들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이 곳에서 숨겨진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당시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밝혀준 성화는 불화살을 쏘아 점화한 것으로 TV에 방영되었는데, 실제로는 그 화살은 성화대를 넘어 날아갔고 점화는 별도의 장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몬주익 언덕을 올라간 쪽과 반대쪽으로 내려가는데 바르셀로나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으로 지중해를 끼고 있는 항구도시의 모습이 미항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콜럼부스 동상(51미터 높이의 탑 꼭대기에 세워져 있다)이 있는 '라파스 광장'(Plaza Puerta de la Paz : 평화의 광장)에 열린 벼룩시장을 둘러보고 점심식사를 위해 부둣가의 인공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어느 새 12시다.
   부두와 그 섬을 잇는 다리가 배가 지날 때는 옆으로 지그재그로 벌어지는 것이 이채롭다. 그 다리 밑에는 물보다 고기가 많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물 반 고기 반이다. 부두의 물이 그만큼 깨끗하다는 뜻도 된다.
   점심 메뉴는 에스파니아 고유음식인 '빠에야'(Paella).  고기, 생선, 야채와 함께 쌀밥이 나오는데 설익은 쌀이 숟갈로 뜨면 후르르 떨어진다. 그나마 한국인을 위해 본래보다 더 익힌 거라는데....
   벼룩시장에서 1914년에 제작한 독일의 철십자훈장을 발견하고 사려다가(20유로였다) 엄마의 제지로 미수에 그친 말썽이는 아직도 입이 다섯 발은 나와 있다.

VWQBE015.GIF    점심 식사 후 바르셀로나의 중심인 고딕지구에 있는 피카소미술관으로 갔다.
   흔히 천재화가라고 불리는 피카소의 어린 시절 습작과 청년시대의 작품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고, 말년의 것도 약간 있다.
   그러나 다 둘러보고 난 소감은 한 마디로 실망이다. 피카소라는 이름 하나 때문에 바글바글 몰려드는 관광객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피카소라는 이름을 빼고 그 그림들을 어디에다 전시한다면 글쎄, 유치원생들이나 구경을 갈까....


   아무리 아는 만큼 보인다지만 이건 아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가 생각나 몹시 씁쓸하다. 굳이 볼 만한 것을 고르라면 원근법을 교묘히 살려 그림 속의 침대가 마치 마술을 부리는 양 그 앞에서 좌우로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그림 정도이다.  

    피카소미술관에서의 실망을 다행히 '구엘공원'(Parc Guell)에서 만회할 수 있었다. 도심에서 벗어나 북쪽 외곽에 자리한 이 공원은 가우디의 작품이다. 그가 설계하고 시공하였음에도 구엘공원이라고 이름지어진 것은 구엘이 가우디의 절대적인 후원자였기 때문이다. 구엘이 있었기에 가우디가 있을 수 있었다고 할 만큼 가우디에게는 구엘의 존재가 중요했다고 한다.VWQBE016.GIF  

 

   구엘공원은 당초 미래의 이상적인 전원도시로 설계하여 60호의 주택을 지으려고 했으나, 건설 도중 자금난으로 30호밖에 짓지 못하고 중단했고, 1922년부터 공원으로 바뀌어 현재는 市에서 관리하고 있다.


   거칠게만 보이는 잡석으로 만든 돌기둥이 줄을 지어 서 있는데, 무엇 때문에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은 그 위로 올라가면 풀린다. 돌기둥들이 받침대가 되어 그 위로 길이 나 있고, 어떤 곳은 나무가 자라고 있다. 돌기둥 속을 비워 그 속으로 나무뿌리가 내려가도록 한 것이다.
   역시 수많은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광장에는 타일로 모자이크 한 벤치를 만들어 놓았는데, 마치 소파에 앉은 것처럼 편안하다.
   자연과 곡선 그리고 성경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이 모든 설치물들의 재료가 놀랍게도 다 폐품을 활용한 것이라고 한다. "천재적인" 이라는 말은 피카소한테 붙일 것이 아니라 가우디에 대한 수식어로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동화 속의 나라 같은 구엘공원에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다시 도심으로 향했다.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가족성당'(Temple de la Sagrada Familia)은 진정 명물 소리를 들을 만하다.
   가족성당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모든 건축비를 신도(가족)들의 성금으로 충당하기 때문이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사람(2001년에만 120만 명)도 가족에 포함된다니 우리도 졸지에 이 성당의 가족이 되었다.    


VWQBE017.GIF   이 성당은 1822년부터 짓기 시작한 것으로서, 세간에는 가우디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처음부터 가우디가 시작한 것은 아니다.
   지하 납골당의 일부가 완공되었을 때 가우디가 건설을 맞게 되어 1926년 그가 전차에 치여 사망할 때까지 동쪽만 만들었다.
   그 이후 여러 명의 건축가가 이어서 짓고 있는데, 총 18개의 종탑 중 아직 8개(가장 높은 게 107m)밖에 완성되지 않아 앞으로 언제 공사가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100년이 될지 200년이 될지....


   이처럼 세월이 지나는 사이에 네오고딕양식으로 시작한 것이 무데하르양식(기독교양식과 회교양식의 혼합양식)을 거쳐 초현실주의양식까지 가미되고 있다.
   모두 3개의 정문 중 가우디가 만든 동쪽 정문에는 마리아, 요셉, 예수, 천사, 그리고 여러 성인들의 모습을 조각하여 예수 탄생의 기쁨을 표현해 놓았다(반대로 서쪽 정문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한다).
   지하 납골당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가우디의 묘도 이곳에 있다.

   저녁식사 후 우리 가족을 제외한 다른 일행들은 오늘이 대장정의 마지막 밤이라며 호텔(Barbera Parc Hotel) 인근의 대형할인매장으로 쇼핑을 하러 나가느라 부산하다. 나는 아직도 감기가 낫지 않아 호텔에만 오면 오직 눕고 싶을 뿐인데, 집사람과 말썽이도 덩달아 나간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밤 10시쯤 벨소리에 깼다. 집사람과 말썽이가 서울에 혼자 두고 온 거북이를 주려고 잠바를 하나 샀는데, 그 가격이 10유로(12,000원)밖에 안 하더라며 신이 나서 펼쳐 보인다. 디자인이며 재질이 제법 괜찮다.
   말썽이가 나중에 형한테 가격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한다. 괜히 싸구려라고 안 입으면 어떡하냐고 걱정하는 모습이 밉지 않다.        

   2003. 1. 6.

   밤새 비가 왔는데 아침에는 햇살이 빛난다. 시내 관광을 위해 9시에 호텔을 나섰다. 대표적인 것들은 어제 보았기 때문에 오늘은 시간 되는 대로 구경하면 된다.
   외곽에 위치한 호텔에서 舊시가지까지 가는 30여 분 동안에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나 싶더니 이내 해가 난다. 여자의 마음만큼이나 변덕스러운 게 지중해의 날씨라더니 빈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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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의 건물들이 그대로 있는 고딕지구가 볼 만하다. 그 안에 있는 대성당(Catedral)은 15세기에 지은 것으로 길이 93m 폭 400m의 웅장한 규모인데도 어제 본 가족성당에 가려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 성당도 줄을 잘 서야 빛이 나는가 보다.


   성당 옆에는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이사벨 여왕을 알현한 작은 광장(이름이 '왕의 광장'이다)이 있다. 명색이 광장이지만 아직 이른 시각이라 우리 말고는 사람이 없다.
   거리의 상점들도 문을 안 열었다. 피카소가 단골로 다니면서 술값 대신 그림을 여러 장 그려주었다는 레스토랑인 '4 CATS'도 닫혀 있긴 마찬가지다.
   어린이날인 어제 광란(?)의 밤(에스파니아에서는 어린이날 밤에 동방박사가 거리행진을 하며 그것을 보러 많은 인파가 몰려든다)을 보내고 아직도 잠들을 자고 있나 보다. 마침 200년 된 빵집이 문을 열고 있어 겨우 인적을 느낄 수 있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람블라스 거리'(Las Ramblas: '람블라'는 아랍어로서 '냇물'이란 뜻이다)로 들어섰다. 이 곳은 까탈루냐 광장에서 부둣가 라파스 광장까지 일직선으로 뻗은 약 1km의 거리로, 원래 냇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19세기에 복개하여 거리로 조성했다고 한다. 서울의 청계천을 복원하면 이곳도 본받아서 복원하려나.
   갖가지 기념품점, 카페, 레스토랑, 호텔 등이 모여 있어 늘 북적댄다는데 오늘은 이곳 역시 한가하다. 아직 몇몇 가게와 거리 중앙에 있는 꽃시장만 열었기 때문이다.
   거리의 화가가 두 명 눈에 띄어 물어보았더니 초상화 한 장 그리는데 1시간 걸린다고 하여 그만두었다.    

    바닷가로 이동하여 점심식사를 하고 나오니까 또 비가 온다. 정말 변덕이 죽 끓듯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젠 공항으로 가 에스파니아에서의 길고 긴 여정을 마감하는 일만 남았다.
   오후 3시 45분 출발 예정이던 비행기가 연발하여 4시 10분에 이륙한다. 이착륙 시간을 정확히 지킨다는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의 명성도 옛말인가 보다.


    바르셀로나를 떠나 2시간 후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동안 같이 다녔던 일행들과 작별하고 우리 세 식구만 한동안 공항 구내에서 머물다가 밤 7시 55분 본(Bonn)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밤 9시 50분 본(Bonn)역에 도착하자 마중 나와 있던 이남호씨가 달려온다. 1988년에 헤어진 후 15년만의 만남이다. 참으로 반가운 얼굴이 아닐 수 없다.

6. 거기 그것이 있었기에

   (1) 15년 전으로---본(Bonn)

   2003. 1. 7.

   마침내 모닝콜에서 해방되어 실컷 늦잠을 자다 9시에 일어났다. 이남호씨가 예약해 준 '쾨니히스호프'(Koenigshof : '왕의 궁전'이라는 뜻)VWQBE019.GIF 호텔은 라인강가에 자리잡은 별 4개 짜리 1급 호텔이다.
   창에 드려진 커튼을 제치자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라인강이 눈 앞에서 도도히 흐르고 있다.
   호텔 뒷뜰에는 눈이 소복히 쌓여 있다. 근래에 없이 독일에 눈이 많이 내렸다고 한다.


  지하 1층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단체손님이 아닌 제 값(2인 1박에 160유로 + 침대 한 개 추가 10유로) 내고 투숙한 손님이라서일까, 아니면 나라가 다르기 때문일까, 그 간의 대장정기간 동안에 묵었던 호텔과는 격이 다르게 서비스가 좋고, 먹을 것도 풍부하다. 빵, 과일, 치즈, 우유, 쥬스, 커피, 녹차, 홍차, 요구르트, 햄, 소세지 등등이 매우 다양한 음식들이 먹어줄 사람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특히 커피나 녹차(또는 홍차)는 종업원이 직접 가져다 준다.      

    배를 실컷 불리고 아침 10시에 거리로 나섰다. 1987. 7.부터 시작된 1년(정확히는 13개월) 간의 법관 연수를 마치고 1988. 8. 떠났던 곳을 15년만에 다시 찾은 까닭에 감개가 무량하다.
   독일이 통일되어 수도가 베를린으로 옮겨갔지만 본(Bonn)의 외양은 그 동안 변한 게 없는 듯하다. 익히 다 아는 길이고 도심은 범위가 넓지 않은 까닭에 오전 내내 산보 겸 걸어 다닐 요량이다.


   호텔에서 가까운 법과대학은 정말 그 때 모습 그대로이다. 그 앞의 Bouvier 책방도 마찬가지이다. 안으로 들어가 새로 개정된 민법과 민사소송법에 관한 책을 몇 권 샀다.
   대학본부 앞의 넓은 잔디밭 운동장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고, 강아지들이 몇 마리 좋아라 뛰놀 뿐 사람은 거의 없다. 영하 5도나 되는 추운 날씨의 아침 시간에 나다닐 사람이 없는 게 당연하다.          
    번화가로 가서 베토벤하우스를 찾았다. 베토벤의 생가이자 박물관이다. 15년 전 본을 찾아오는 지인들마다 그리로 안내하여 보여 주었던 곳이다. 그래서 베토벤이 사용했던 피아노(흑백의 건반이 지금의 것과 반대이다), 친필 악보, 그가 끼었던 안경, 그의 머리카락 등 다 눈에 익은 것들이다. 나와 집사람과는 달리 처음 보는 말썽이는 신기한 모양이다.


    손님은 별로 없지만 거리의 상점들은 전부 문을 열었다. 하긴 독일의 상점들은 아침 일찍 문을 열고 대신 저녁에 일찍 문을 닫는 것으로 유명하다.
   저녁 늦게 영업하지 못하도록 상점 문을 닫는 시각을 법으로 정하고 있는 나라가 독일이다. 법으로 정할 게 따로 있지....
VWQBE020.GIF    여기저기 구경을 하고 엽서 몇 장을 산 다음 점심을 먹으러 '핸헨'(Haehnchen)이라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내부를 중세풍으로 장식한 제법 정갈한 음식점이다.
   여기서 말썽이가 점심 메뉴로 선택한 것이 바로 '아이스바인'(Eisbein)이다. 서울을 떠날 때부터 독일 가면 먹어보겠다고 별렀던 것인데, 한 마디로 독일식 돼지족발이다.
   나와 집사람이 15년 전 베를린에 갔다가 처음 먹어보고 감탄했던 독일의 전통음식이다. 커다란 접시 위에 삶고 구운 돼지 발을 올려놓고 칼과 포크로 쓸어 먹는 모습을 보고는 옆 테이블의 독일인들이 모두 손가락을 치켜 세워준다.
   한 노인은 다 먹고 나서 그 뼈를 가져가라고까지 한다. 말썽이가 모처럼 흡족한 표정이다.

    점심을 먹고 호텔로 돌아오니 이남호씨가 벤쯔를 몰고 벌써 와서 기다린다. 내일까지 자기가 운전하며 다니겠다고 한다. 이남호씨는 신학을 공부하는 중인데,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친절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 차로 하르트베르그(Hardtberg: 본의 서부지역)에 있는 말테자병원(Maltesakrankenhaus)으로 갔다. 말썽이가 1988. 2. 12. 이 세상에 태어난 병원이다. 병원 뜰에서 기념사진만 찍고 나왔지만, 참으로 의미있는 곳이다.
   첫 아이(거북이)를 제왕절개로 낳았기에 당연히 또 수술할 것을 예상했었는데, 수술은 최후의 수단으로 하는 것이라며 의사 다섯 명이 끝까지 지켜보면서 자연분만을 유도해 성공시켰던 곳, 아빠와의 첫 접촉이 중요하다며 갓 태어난 말썽이를 강보에 싸서 나에게 건네주고 두 시간 동안 안고 있게 한 곳, 퇴원할 때는 자기들이 부모 대신 관청에 출생신고을 하고 받아온 출생증명서를 건네주던 곳, 아이 잘 키우라고 분유, 기저귀 등 아기용품을 한 아름 선물로 주던 곳이 바로 이 병원이다.
   거기에다 병원비를 낸 것이 아니라 출산하느라 수고했다고 오히려 출산비를 받아오기까지 했다. 사회보장제도의 진수가 무엇인지 피부로 느끼게 해주었던 곳이다.

VWQBE021.GIF   병원에서 나와 곧바로 인근 브뤼저베르그(Brueserberg)에 있는 '바이마러 스트라세 41번지'(41 Weimarer Strasse)로 갔다.
   1987. 11.부터 1988. 8. 까지 살던 집이다. 말썽이는 태어나 6개월 될 때까지 살았다.
   내부는 모르겠지만 겉모습은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집 뒤의 정원, 고기를 구어 먹던 잔디밭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다.


   그 시절 나는 본(Bonn) 법과대학과 지방법원에 다니며 공부만 하면 되었고, 집사람은 오직 아이들 키우는 일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특별히 걱정할 게 없었던 참으로 행복한 시기였다.
   다른 일행들과 떨어져 독일에 이틀 더 체류하려고 하였던 이유는 바로 이처럼 말썽이의 출생에 관련된 곳들이 있었기에 그 곳을 돌아보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옛날에 살았던 집에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쾨니히스빈터(Koenigswinter : 본의 동부지역)에 있는 '페터스베르그'(Petersberg)로 갔다. VWQBE022.GIF라인강의 동쪽 야트막한 산 속에 있는 영빈관(개인도 투숙 가능하다)이다.
   전에 김영삼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도 여기서 묵었는데, 경호를 위해 군인들이 산 속을 다 뒤지는 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 산 속에는 지금도 야생 사슴이 뛰놀고 있다.


   이 곳은 영빈관답게 건물도 고풍스런 우아함을 뽐내고, 그 앞에 서면 라인강과 그 건너편의 본(Bonn) 시가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어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건물 안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차 한 잔을 마시며 언 몸을 녹였다. 밀크커피 2.5유로(3,000원), 녹차 2유로(2,400원)이니 분위기에 비하여 값이 상당히 헐한 편이다.
   이만한 위치에 이만한 건물이 서울에 있다면 그 값에 차를 마실 수 있을까.... 국민소득에 비하여 서울의 찻값은 정말 너무 비싸다.  
  
   어느 새 어두워졌다. 시내로 다시 들어와 독일 역사박물관으로 갔다. 이것은 독일 통일 후 수도를 베를린으로 옮기면서 새로 지은 것이라 나도 처음 보는 곳이다.
   독일의 역사를 쭉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나라의 역사박물관과 별반 다를 게 없으나, 2차대전에 관한 자료들이 눈길을 끈다. 나치의 잔학상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그들의 철저한 반성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일본의 동경에서 이런 박물관을 볼 수 있는 날이 있을까?  

    저녁은 이남호씨 집에 가서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 독일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는 사모님이 휴가차 미국에 한 달 가 있다가 오늘 오전에 도착했다는데, 어느 새 온갖 한식요리를 준비해 놓고 우리를 맞이한다.
   1987년 여름 처음 독일에 도착하여 집을 못 구해 쩔쩔 맬 때 서슴없이 자기 집의 빈 방을 내주어 한 달 동안 머무를 수 있게 해준 분들이 바로 이남호씨 부부이다. 수호천사가 따로 없다. 이번에 15년 만에 다시 본(Bonn)에 간다니까 제일 기뻐한 사람들도 바로 그분들이다.

   (2) 넘치는 라인강---코블렌쯔(Koblenz)와 보파드(Boppard)

   2003. 1. 8.  

   마침내 이번 유럽여행을 마감하는 날이다. 어제 감회가 새로운 하루를 보내고 호텔로 돌아와 늦게 잠자리에 든 탓에 오늘 아침에도 늦잠을 잤다.
   창가로 비치는 아침 햇살이 어제처럼 화사하다. 아침 10시 30분 이남호씨가 호텔로 왔다. 프랑크푸르트공항까지 데려다 주려는 것이다.  
   공항에는 오후 5시까지만 가면 되는 까닭에 도중에 코블렌쯔, 보파드, 로렐라이 언덕을 들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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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블렌쯔는 라인강과 모젤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도시이다. 특히 뾰족한 모서리 형태를 하고 있는 그 접점을 '도이체스 에크'(Deutsches Eck) 또는 '도이체 에케'(Das Deutsche Ecke)라고 부르며 관광객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거기에는 비스마르크를 등용하여 독일 통일을 달성한 빌헬름1세(WilhelmⅠ)의 거대한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그 도이체스 에크에 재앙이 닥쳤다. 라인강과 모젤강이 홍수로 범람하는 바람에 근처가 물바다가 된 상태에서 엎친 데 덮친다고 한파가 몰아닥쳐 꽝꽝 얼어버렸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상류에서 떠내려 온 나뭇가지 등 쓰레기로 바닥이 덮여 그것들을 치우는 청소작업이 영하의 추위 속에 진행되고 있었다.    

    코블렌쯔에서 보파드는 곧바로 라인강변을 따라 9번 국도로도 갈 수 있지만, 고속도로에서 보파드로 진입하는 산길이 참 아름다운지라 다소 우회하는 것을 무릅쓰고 일부러 고속도로를 이용했다. 독일 하면 생각나는 것 중의 하나가 숲이다. 고원지대를 지나는 61번 고속도로에서 라인강변의 보파드로 내려가는 산길 8km도 바로 그 숲 속에 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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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인강변에 자리한 보파드는 인구가 2만 명에 지나지 않는 작은 도시이지만, 로마시대의 유적이 있을 만큼 역사가 깊은 관광지이고, 강 건너에 로렐라이 언덕이 있어 찾는 이가 많다. 주로 전국 각지의 관광지에 있는 독일문화원(Goethe Institut)들 중 하나가 이 곳에 위치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1987년 8월과 9월 두 달간 머무르며 독일문화원에서 독일어를 배우던 시절 말썽이는 엄마 뱃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니 꽤나 춥다. 영하 7-8도는 족히 될 듯하다. 그런데 코블렌쯔에서 본 재앙이 여기에도 재현되어 있다. 라인강변의 호텔과 레스토랑들은 범람한 강물이 흘러들어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강가의 산책길과 공원들도 그 위로 넘친 물이 아직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얼어버려 통행이 불가능하다.
   당연히 유람선들의 운항이 정지되어 있고, 그 바람에 배 타VWQBE025.GIF고 강 건너 로렐라이언덕까지 가려던 우리의 계획은 단념하여야 했다.

    추위도 이길 겸 점심을 먼저 먹었다. 말썽이는 오늘도 아이스바인을 주문한다. 한계효용이 떨어졌음일까 오늘은 어제만 맛이 못하다고 하면서도 잘만 먹는다.
   배가 든든하니까 추위도 확실히 덜 느낀다. 옛날 생각을 하면서 시내를 한 바퀴 돈 다음 시장이 있는 번화가 한복판에 위치한 교회에서 강변쪽으로 내려가다 골목으로 접어들자 낯익은 집을 금새 알아볼 수 있다.

   '운터마르크트 스트라세 22번지'(22 Untermarkt Strasse)

   말썽이가 엄마 뱃속에 있으면서 살던 집이다. 내 나이 32살 한창 젊었던 그 시절로 잠시 돌아가 회상에 잠긴다. 당시 기저귀를 차고 뒤뚱거리며 재롱을 피웠던 거북이는 어느 새 고3 수험생이다.  

7. 다시 현실세계로

    이남호씨는 우리를 프랑크푸르트 공항까지 데려다 주고 본(Bonn)으로 돌아갔다. 다음에는 꼭 서울에서 재회할 것을 약속하면서.
   2003. 1. 8. 저녁 7시 55분, 서울로 가는 대한항공 비행기가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힘차게 이륙한다. 그와 동시에 한 마당 꿈만 같았던 2주일간의 여행에서 현실세계로 돌아오고 있었다. 다음날 오후 2시 15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