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옛날이여 --문경 새재는 웬 고갠가

2010.02.16 11:45

범의거사 조회 수:9508

          

         , 옛날이여

         ---문경 새재는 웬 고갠가

 

      사법연수원 교수로 발령을 받아 충주를 떠난 지 4년이 흘렀다. 충주를 둘러싼 中原 일대는 27개월을 살았던 곳인지라 정이 많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새재(鳥嶺)길이 가장 뇌리에 남는다. 늘 눈에 선하고 그래서 더욱 걷고 싶은 곳이다. 그런데, 드디어 그 길을 다시 찾아 나설 기회가 왔다.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2001. 6. 28.

      

민사집행법제정안에 관한 심포지움(한국법학원 주최)과 공청회(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대비하느라 통상 34일로 주어지는 봄철 휴가를 가지 못하고 있다가, 위 일정이 다 끝나 뒤늦게 재판부 전체가 함께 하루 휴가를 냈다. 전날 밤 늦게 수안보에 도착하여 수안보에서 1박한 후 아침 일찍 새재의 문경 쪽으로 갔다.

새재는 충청북도 괴산과 경상북도 문경을 연결하는 고개이다. 한자어로는 ()(, 고개)이라 불린다. 정상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괴산군에 속하여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고, 남쪽은 문경시에 속하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쪽에서 저쪽까지 대략 10Km 정도. 고개 정상은 해발 650m이다. 이런 다분히 地圖學的인 설명보다는,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 장군이 천연의 요새인 이 곳에서 왜군을 막지 않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다가 전멸을 당했다 하여 더욱 알려진 곳이다. 그리고 지금은 문경 쪽에 KBS 인기드라마 태조 왕건의 촬영장이 들어서 한층 유명해졌다.

 

문경새재1.jpg

    새재의 문경 쪽 매표소를 지나면 이내 새재의 첫째 관문인 주흘관(主屹關)이 나온다. 조선 숙종 34(1708)에 축성하였고, 관문 좌우의 石城은 높이 4.5m, 3.4m, 길이 188m의 규모로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 문 앞에는 태조 왕건드라마를 촬영하기 위한 목책(木柵) 등 조형물들이 널려 있다.

관문을 바라보며 오른 쪽에 산머루즙을 팔던 집이 전에 있었던 것이 생각나 찾아보았으나, 주변을 정화하면서 철거된 듯 아쉽게도 보이지 않는다. 100% 순도를 자랑하는 참으로 감칠맛 나는 것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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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흘관을 지나면 곧바로 태조 왕건촬영장을 만나게 된다. 마침 촬영이 진행중인지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단역배우로 짐작되는 사람들이 그늘에서 졸거나 아예 드러누워 자는 모습도 보인다. 단 몇 초 얼굴을 보이기 위하여 하루 종일 쭈그리고 기다리는 그네들의 신세가 안쓰럽다. 어느 사회에서나 주인공이 아니면 고달픈 법이다.  

     촬영장은 의외로 잘 지었다. KBS가 모처럼 공을 들였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드라마에서 눈에 익은 건물들이라서 그런지 일면 반갑기도 하다.01.jpg

 

그렇지만 드라마 속에서만큼 화려하지는 않아(오히려 너무 초라한 곳도 있다), 동행한 판사는 다소 실망한 눈빛이다. 여름의 평일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전세버스를 타고 온 단체관광객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관광지로서의 인기가 괜찮은 모양이다

    

촬영장 옆의 수도시설(150m 지하의 암반수를 뽑아 올려 설치하였다)에서 목을 축인 후, 본격적인 산행(?)길에 들어섰다.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山峰을 가리키며 저기를 넘어야 한다고 하니까 판사는 다소 기가 질리는 모습이다. 유모차도 다니는 평탄한 길이고 숲 속을 거니는 것이니 전혀 힘들지 않다고 위로해보지만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는지... 서서히 다리에 힘이 들어갈 무렵 반가운 쉼터가 나타났다. 조선시대의 옛 모습으로 복원한 주막이다. 문경새재3.jpg

 

감자부침이나 하나 먹으며 쉬어 가자고 들어섰는데, 아뿔싸 집만 뎅그러니 서 있다. 전에는 막걸리도 팔고 토종닭백숙도 먹을 수 있었는데... 아무튼 정화사업 덕분에 곳곳이 변했다.

 

, 옛날이여!”

 

안내문에 있는 굽이야 굽이야 새재 길손이 하룻밤 쉬어가는 주막입니다라는 문구가 머쓱하다. 지나치게 난장(亂場)을 벌이지만 않는다면 수건을 머리에 동여맨 酒母가 길손을 맞는 것이 더 운치가 있을 텐데.

 

2관문까지 가는 길목에는 볼거리가 많다. 이 새재길의 볼거리는 제1관문과 제2관문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막을 지나면 곧이어 좌측에 용추(龍湫)가 나타나고, 이어서 우측으로 교귀정(交龜亭)이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문경새재4.jpg

   용추는 수정 같은 맑은 물이 구곡양장의 계곡을 따라 흐르다 반석을 가르고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곳이다.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八王(하늘과 땅의 모든 )과 선녀들이 어울려 놀았다 하여 팔왕폭포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출발할 때 기가 질렸던 판사가 제일 반긴다. 들어가 수영하면 참 좋겠다면서... 그만큼 경치가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안내판이 다소 과장된 느낌이다

 

교귀정은 조선 성종12(1484) 당시의 문경현감 신승명이 용추 근처에 세운 정자로서, 서로 임무를 교대하는 경상도 관찰사가 官印을 인수 인계하던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그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것을 근래에 다시 복원하였다. 영남 유생의 거두 김종직(金宗直)이 이 곳에서 지었다는 交龜亭의 마지막 행을 읊어본다.

 

月明今夜宿何村(, 달 밝은 이 밤을 어드메서 지낼꼬)”.

 

참으로 감칠맛이 나는 詩句이다. 그런데 이 를 적어놓은 입간판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몇 년 전엔 분명 길가에 세워져 있었는데....

 

길을 가다 보면 멋진 풍경이나 그럴싸한 건물만이 나그네의 발길을 잡는 것이 아니다. 모르고 보면 무심코 지나치기 십상인데 알고 보면 결코 그냥 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교귀정을 지나 제2관문 쪽으로 더 올라가다 보면 길가 오른쪽에 철제 울타리 안에 높이 2m정도의 못생긴 돌이 하나 우뚝 서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문경새재4-1.jpg

 

그 돌에는 세로로 '산불됴심'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안내판에 의하면 조선 정조 때 별장이 통행인을 단속하고 산림 유지를 위해서 세웠는데, 백성들이 잘 알도록 한글로 썼다고 한다. 산림보호에 관한 최초의 한글비석이리라. ‘조심古語됴심으로 새긴 것이 이채롭다. 억지로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돌도 그렇고, 한다 하는 명필 다 놔두고 張三李四로 하여금 쓰게 한 것이 모두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한다. 비록 하찮은 돌이지만 지방문화재 자료 제226호로 지정된 이유를 알겠다.

 

이처럼 나그네의 시선을 끄는 것에는 보는 이에게 정다움을 선사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것도 있다. 새재 길은 지금이야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고 잘 다듬어졌으니까 마음놓고 걸을 수 있지만, 사실 좌우에 1,000m가 넘는 조령산(1,017m)과 주흘산(1,075m)이 버티고 있는 사이로 난 길이기 때문에 무척이나 험준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주위에 커다란 소나무들이 많다. 문경새재4-2.jpg

 

그런데, 그만 倭人들이 그 소나무들을 버려 놓았다. 일제 말기(1943-45)에 자원이 부족한 倭軍이 에너지원인 연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 닥치는 대로 송진을 채취한 것이다. 그 채취의 흔적인 V자형 칼자국의 상처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아물지 않고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여행을 무사히 마치게 해달라고 서낭당(城隍堂)에 정성스레 돌을 올리고, 꾸구리바위 밑의 물 속에 100원짜리 동전을 던져 행운을 빌고(사실 이것은 새재와는 전혀 안 어울린다), 휴게소에서 잠시 쉬기도 하면서 걷다 보니 새재의 둘째 관문인 조곡관(鳥谷關)에 도착했다.

이 관문은 첫째 관문보다 앞선 조선 선조 27(1594)에 축성한 것이다. 그 후 1907년에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고 문루(門樓)를 옛 이름인 도동문이라 부르지 않고 조곡관이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문경새재5.jpg

 

좌우의 성벽 높이는 제1관문과 마찬가지로 4.5m이고, 문루는 전형적인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조곡관을 지나면 왼쪽 숲 속으로 약수터가 나오지만, 휴게소에서 이미 목을 축인 터라 그냥 지나쳤다. 여기서부터 제3관문까지는 특별한 볼거리가 별로 없다. 하지만, 숲이 더욱 우거져 그 사이로 난 길의 운치가 새재길 중 제일 낫다. 중간에 방망이로, 홍두깨로 팔려나가는 새재 박달나무의 신세를 노래한 문경아리랑의 가사를 적어 놓은 노래비가 길 옆에 세워져 있는데, 문경새재를 등장시킨 노랫말은 오히려 진도아리랑이 더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굽이야 구보구보가 눈물이 난다

 

이 노래비를 지나자마자 신을 벗었다. 그리고 양말도 벗었다. 3관문까지 2Km 남짓한 거리를 맨발로 걸을 요량이다. 판사와 판사는 흔쾌히(?) 따라하는데, 판사는 한사코 고개를 젓는다. 비록 매일 얼굴을 대하는 가까운 동료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외간 남정네이기에 발을 내보이기 싫어하는 여인네의 심정을 알 듯도 하다. 신을 벗은 김에 길가 물도랑에 발을 담그니 시원하기 그지없다. 아니 시원하다 못해 너무 차서 1분도 못 견디고 발을 빼야 했다. 서울은 찜통 그 자체일텐데....

 

맨발로 걷기를 시도한 이유는 간단하다. 공해로 찌든 서울을 모처럼 벗어나 대자연의 품에 왔으니 거기에 순응해서 그 地力을 발로 받아들여보자는 것이다. 마침 길도 평탄해서 안성마춤이고. 다만, 나는 전에도 팔공산 기기암(寄寄庵)에서 해 본 적이 있어 괜찮은데, 다른 두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다. 더구나 옛날 영남 유생들이 과거를 보러 가던 오솔길을 재현한 장원급제길은 다듬어지지 않은 채 숲 속으로 나 있는데 말이다. 다행히 무사히 제3관문에 이르렀다. 처음에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판사도 계속 활기찬 모습이다. 전날 수안보 영화식당에서 무공해 산채정식과 전국 최고(?) 一味의 된장찌개로 飽食을 한 덕분에 힘이 넘치는 것이려나. 아무튼 안도의 숨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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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재의 셋째 관문은 고갯마루에 위치한 조령관(鳥嶺關)이다. 1관문과 마찬가지로 조선 숙종 34(1708)에 축성하였다고 한다. 역시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만 남고 불 탄 것을 1976년도에 복원했다. 좌우 石城의 높이는 4.5m, 길이는 185m이다. 괴산군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고, 고갯마루에 있어 그 앞에 서면 시야가 넓게 트여 전망이 좋기 때문에, 새재 관문하면 보통 이 조령관을 일컫는다. 더구나 바로 옆에 약수터가 있어 길손이 목을 축이며 쉬기에 딱 좋다.

 

이 약수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는 법이 없다. 그런데 단 한 번 바짝 마른 적이 있다고 한다. 고개 아래 마을 사람들이 약수터 인근에서 개를 잡아먹고 그 그릇을 이 물에 씻었다가 그만 부정을 타 물이 말라버렸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온 마을 사람들이 산신령(약수터 바로 위에 산신령을 모신 사당이 있다)에게 제사를 지내고 싹싹 빌어 겨우 다시 물이 나오게 했다고 한다. 충주에 근무할 때 들은 이야기이다.

멀리 제2관문 쪽을 되돌아보니 부봉(釜峰, 916m)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깎아지른 절벽에 落落長松이 한 그루 서 있다. 白雪滿乾坤하더라도 獨也靑靑할 듯하다.

 

이제까지 걸어온 문경 쪽의 흙길과는 달리 괴산군 쪽으로 난 길은 시멘트 포장도로이다. 도대체 이 산 속의 길을 포장하겠다고 마음먹은 爲政者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반씩 나눠 갖고 있건만 문경새재라고는 불러도 괴산새재라고는 부르지 않는 이유를 알 만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할 수 없이 그 길을 피해 숲 속의 통나무 휴양림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지만, 중간 부분에서 결국 그 포도(鋪道)를 만나게 된다.

 

“4시간 내내 즐겁다가 마지막 10분에 기분을 망치는데요.”

 

판사의 말이다.

그렇지만 그 버려진 기분은 잠시 후 월악산국립공원 입구 산밑에 자리한 꿩요리 전문점 감나무집에 들어서는 순간 금새 잊혀졌다. 수안보 일대에는 특이하게 꿩요리를 하는 음식점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특히 감나무집은 꿩요리만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다. 꿩 한 마리를 가지고 샤브샤브, 육회, 만두, 탕수육, 튀김, 잡채, 국수전골, 매운탕의 8가지 요리를 만들어 순차로 제공하기 때문에 수안보를 지날 일이 있으면 한 번 들러볼 만하다. 어제에 이어 또 다시 배를 잔뜩 불린 판사가 나들이의 大尾를 장식하는 한 마디를 한다.

 

이번 여행은 완전히 補身관광이 되었네요.”

 (2001. 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