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어디에 (인왕산)

2010.02.16 11:50

범의거사 조회 수:10332

 

            호랑이는 어디에
 

沃峰禪師님,
 

벌써 11월입니다. 무르익던 가을도 어느 새 꼬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선사님의 말씀대로 어제 진 해나 오늘 뜬 해나 다를 바가 전혀 없건만, 그래도 무심한 세월이 물처럼 흘러갑니다. 올해도 두 달이 채 안 남았군요. 그 흐르는 세월이 아까워 지난 주말(11/4)에도 산을 찾았습니다. 높은 데 올라가면 그만큼 해를 가까이 할 수 있고, 그것을 동아줄로라도 잡아매 볼까 해서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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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시작한 서울의 재발견을 위한 탐방의 일환으로 仁王山을 올랐습니다. 얼마 전에 한 번 답사를 한 일이 있는 백하선사가 길잡이를 하였답니다. 일요일 아침 9시의 경복궁역은 그 한산함에 비례하여 다소 을씨년스러웠습니다. 현대적선빌딩의 굳게 닫힌 출입문도 공휴일은 쉬는 걸까요? 하기야 오가는 이가 없다면 門도 의미가 없겠지요.
 

  사직공원을 끼고 도는 길을 따라 잠시 오르자 단군성전이 나오더군요. 몇 십년 서울에 살면서도 처음 보는 곳이었습니다. 저 머나먼 곳의 태백산에 있는 단군성전은 진작에 가보았으면서도 말입니다. 늦가을에 인왕산행을 나선 길손말고는 아무도 찾는 이가 없음은 그 장소의 후미짐때문인가요, 아니면 그 때가 일요일의 이른(?) 아침이어서인가요. 그도 저도 아이면 초등학교에 설치된 단군상의 목이 단칼에 베어지는 실로 무지막지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세태를 반영한 것인가요?


THFLA002.GIF  인왕산길(인왕스카이웨이)은 일견하여 자동차전용도로로 만들어진 듯하였습니다. 인도가 따로 없더군요. 하지만 賞秋客이 지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역시 공휴일이어서인지 자동차가 어쩌다 한 대씩 지나가기 때문이지요. 길 자체가 교통수요를 충족시키기보다는 군사도로 혹은 관광도로로 개설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 인왕산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인왕산등산로가 나옵니다. 정상까지 성벽 옆으로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쉽게 올라갈 수 있지요. 계단의 가운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흰색 야광페인트가 칠해져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산에다 흰 줄을 그어 놓은 듯이 보이는데, 인왕산을 지키는 군인들의 야간순찰을 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仁王山,
 

  경복궁 서쪽에서 바위의 아름다움(이를 岩骨美라고 하나요?)을 뽐내고 있는 인왕산(338m)은
THFLA003.GIF 1968년 1.21사태(김신조 등 북한 특수부대원들의 청와대습격사견) 이후 입산이 전면 금지돼오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1993년 3월부터 다시 시민들에게 개방되었지요. 등산로 입구에 서 있는 팻말에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인왕산의 "왕"자는 한자로 "王"인데, 일제시대에(1925년) 일본인들이 "旺"으로 고쳤다는군요. 그 뜻인 즉, 일본인(日)들이 조선의 왕(王)을 지배한다는 의미에서 "王" 옆에 "日"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日帝의 간악한 잔재를 접하게 되어 참으로 입맛이 쓰답니다. 그 "日"자를 떼어버리고 본래의 "王"자를 되찾은 것이 근래의 일이라고 합니다.  
 

  인왕산길에서 성곽을 따라 난 인왕산의 등산로를 오르다보면 왼쪽으로 내려가는 철제계단이 하나 나옵니다. 본래 등산로 옆으로 군사용 철책이 쳐져 있어 출입이 통제되는데, 위 철제계단을 내려서면 간이출입문이 하나 눈에 띄지요. 그 문을 나서면 바로 國師堂으로 가는 길로 연결됩니다(단순히 국사당만 보려 한다면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내려 올라가는 것이 오히려 가깝지요). 이번 산행의 목적이 단순히 정상을 오르는 것보다는(그러기에는 높이가 너무 낮지요) 숨겨진 서울의 모습을 보는 것이었기에 당연히 국사당으로 발길을 잡았습니다.  


THFLA004.GIF   國師堂(중요민속자료 29호)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의 수호 사당으로 본래 南山 꼭대기(지금의 팔각정 자리)에 세운 사당으로서, 단군왕검과 천산수(天山水) 삼신, 태조, 무학대사를 위시한 여러 神을 모시고 있지요. 주로 궁중 나인(내인)들이 치성을 드렸고, 나라가 망하고도 치성은 이어졌다고 합니다. 성리학을 통치철학으로 내세웠던 조선시대에 국사당이 오랜 세월 동안 민간신앙의 중심지로서 도성 안에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지요.

  그 사당 내부에는 중요민속자료 17호로 지정된 조선 무신도(巫神圖) 19점이 벽에 걸려 있는데, 태조 이성계의 모습을 그린 것이 2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림들의 대부분이 코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그림은 얼굴이 코만 보이는 듯하였답니다. 코와 性器의 관련성을 이야기하는 오늘날의 음담이 그 시절에도 있었을까요?

  이런 내력을 가진 국사당인데, 일본인들이 1925년(乙丑年) 남산에 자기들의 신사인 朝鮮神宮을 짓고는 그 자리에 있던 국사당을 이 곳으로 옮겨버렸다고 합니다. 때맞춰 仁王山의 이름도 "仁旺山"으로 바꾸고 말입니다. 天皇 하늘님이 납시셨으니 조선의 잡신들은 썩 물렀거라 했겠지요. 정말로 소름끼치고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禪師님,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달랑 3칸 짜리 본채 건물 양옆으로 1칸 짜리 별채를 붙여놓은 것은 또 무엇인가요? 비록 조그마한 사당일 망정 안내판에 써있듯「지금도 봉축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긴 역사를 안고 있는 장소라면서 그 건물의 관리상태라니....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니 본채의 양옆 벽을 터서 서로 통하게 해 놓은 양쪽 별채는 堂主가 살림하는 곳이더군요. 그 당주로 보이는 분의 모습은 차라리 설명을 그만두겠습니다. 아무려면 왕실 사당을 본래 그런 식으로 짓고 관리하였겠습니까.

 

  외인아파트 두 동을 폭파하고 필동 수방사 자리에 한옥마을을 조성하는 등 여러 해를 두고 서울시가 거창하게 진행한 "남산 제 모습 찾기" 사업이 어째서 이 국사당은 철저히 외면한 것일까요. 당연히 팔각정의 원래 자리로 복원하였어야 하지 않나요? 그래서 남산 꼭대기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하여야 하지 않나요? 덕수궁의 수문장 교대식처럼 매일 오후 일정한 시각에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굿을 하여 국가의 태평과 백성의 편안을 도모할 수 있다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최소한 우리의 민속을 영구히 보존하는 교육과 관광의 명소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한 굿을 보고 순수하게 우리 고유의 민속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미신 운운하며 혈압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으려나요? 남산으로 못 옮긴다면 적어도 현재 있는 곳에서나마 주변 정화작업과 보수작업을 왜 못합니까? 돈이 없어서인가요, 관심이 없어서인가요? 아니면 장승백이의 장승을 베어버리고 초등학교의 단군상의 목을 자르는 그런 사람들이 市長이나 구청장 선거 때 행사할 표가 무서워서인가요? 너무나 후미진 곳에 너무나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는 국사당의 퇴락한 모습에서 우리 문화정책의 현주소를 읽는 듯하여 입맛이 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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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사당 옆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에서 보는 서울 조망이 장히 좋더군요. 국사당이 쫓겨온 남산도 보인답니다. 그 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선(禪)바위"(서울시 민속자료 4호)가 나옵니다.

  거대한 바위가 다소 앞으로 기운 듯하면서 直立으로 서 있는데, 바위 곳곳에 커다란 구덩이가 세로로 파여 있는 것이 멀리서 보면 마치 장삼을 입은 승려를 닮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그 옛날 한양에 도성을 쌓을 때 佛子인 무학대사와 儒學者인 정도전이 이 바위를 성 안으로 넣니 마니 하며 싸웠다고 합니다. 성 안으로 넣을 경우 불교가 융성해질 것을 우려한 정도전의 결사반대로 결국 성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는군요.

    그만큼 영험함 있어 보이는 걸까요, 바위 앞엔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기도가 잘 받아들여지는지라 "기자(祈子)바위"라고도 불린답니다. 그 바위 꼭대기에 앉아서 따스한 햇살을 즐기는 무심한 비둘기 두 마리는 그러한 사정을 아는지....    

  
THFLA006.GIF  국사당 갔던 길을 되돌아 나와 다시 인왕산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가도 가도 바위길이지만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위로 바라보이는 풍경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216호)를 떠올리게 하고, 한 발짝 올라갈 때마다 내려다 보이는 시내 경치 또한 괄목할 만하게 달라지기 때문이지요.

  "欲窮千里目이면 更上一層樓라"고 하지 않던가요. 천리 밖을 보려면 한 층을 더 올라가야 하는 법이거든요.

 

   어느새 추위가 가시고 등에 땀이 솟을 즈음이면 정상에 다다르게 됩니다. 인왕산의 개방 직후에는 하루에도 수 만 명씩 찾았다고 하던데, 지금은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주변 동네 주민들의 산책코스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산 정상에 만들어놓은 평상에서 김밥과 과일을 먹는 가족산행객들을 보고 떠올린 생각입니다.
 

禪師님,

 

  인왕산은 결코 높은 산이 아니지만, 그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 불광동을 지나 저 멀리 일산의 아파트군락까지 보인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동쪽으로 한 눈에 보이는 한양의 성내가 일품이지요.

   바로 코앞에 내려다 보이는 경복궁과 청와대, 그리고 그 뒤의 북악산. 그 북악산에서 왼쪽으로 뻗어가는 줄기인 낙산(駱山), 그 산을 돌아 경복궁의 전면 남쪽으로 오면 그 곳에는 남산(목멱산)이 자리하고 있고, 거기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 바로 북악산의 오른 쪽에서 위용을 뽑내는 인왕산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그 눈길이 미치는 곳을 따라 도성을 쌓았으니 그것이 바로 총연장 18Km의 한양성.

 

  풍수지리를 배운 일이 있는 길벗 백동선생의 설명으로는 북악산이 主山, 낙산이 左靑龍, 인왕산이 右白虎, 남산이 案山이랍니다. 白面書生인 소생의 눈에도 우백호(인왕산)에 비하여 좌청룡(낙산)이 너무 빈약해보였습니다.

   그래서인가요, 한양에서는 옛부터 큰 아들보다는 작은 아들의 기가 세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왕들 중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분들은 하나같이 작은 아들이었다나요.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광해군, 효종, 영조, 고종..... 결국 경복궁의 터를 잘못 잡았다는 것이지요. 현재의 연세대학교 자리에 세웠어야 했다는 이야기는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경복궁과 북악산 사이에 위치한 청와대도 마찬가지랍니다. 너무 산쪽으로 올라가 있어 북악산의 흘러내리는 기를 중간에 차단한다는군요. 평지에서 볼 때는 모르겠더니 인왕산 정상에서 보니까 역시 그럴싸하였지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민족정기를 끊으려고 의도적으로 그 곳에 총독관저를 세웠다는 이야기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결국은 흉지라는 말인데, 그 곳 주인이었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역대 대통령들의 순탄치 않았던 삶이 클로즈업되는 것과 상관이 있을까요.

 

   인왕산에서 내려다본 경복궁은 복원사업이 한창이어서인지 많이 파헤쳐진 모습이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흥례문의 낙성식을 가졌지만 그 많던 전각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아직도 황량하기만 하더이다. 궁궐의 잔디밭은 전각의 무덤이라는 말이 실감났지요. 남의 나라 궁궐을 어떻게 저리도 철처하게 파괴하였단 말인가요. 앞으로도 10여 년은 더 걸릴 것이라는 복원사업, 그것이 끝났을 때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찬반 논란이 있었던 중앙청건물의 철거가 잘 한 일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禪師님,

 

  요새는 주말을 어떻게 보내시고 계신가요? 몇 십년 지내온 "나홀로 주말"을 지금도 고집하시나요? 이제는 내명부에 신경을 쓰셔야 할 때가 아닌지요?

 

  인왕산의 정상에서 바라보는 전후좌우 경치는 의구(依舊)하건만 포효하던 호랑이는 어디로 갔는지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는군요. 온통 바위뿐인 산이라 기거할 만한 곳이 없어 멀리 가버렸나 봅니다. 그럼 옛날에는 숲이 울창했었나...? 잊을 만하면 부질없는 생각을 떠올리는 고질병이 또 도졌습니다. 병이 깊어지기 전에 빨리 하산해야겠습니다.

 

  시작할 때 남쪽에서 올라간지라 이젠 북쪽의 자하문 방향으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정상을 지키고 있는 군인이 길을 막더군요. 요새 그 쪽의 등산로는 통제한다나요. 바로 얼마 전에도 그 길로 내려갔다는 백하선사의 말에는 메아리가 없었습니다. 안 된다는 데야 도리가 있나요.

   동쪽 사면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인왕산길까지 내려간 후 아스팔트길로 최종목적지인 자하문까지 갔지요. 교통량이 많지 않은 이 길을 남산의 산책로처럼 차 없는 길로 만들면 좋겠다(최소한 주말에라도)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흙길로 하면 금상첨화이겠지요.

   산행 시작 후 3 시간만에 드디어 오늘 나들이의 최종목적지인 자하문, 세검정고갯길 마루턱에 세워진 이 성문에 도달했는데, 어? 자하문(紫霞門)이 아니네요. 현판에는 엄연히 "창의문(彰義門)"이라고 씌어져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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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인터넷에 들어가 보았지요.
 

  "조선왕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태조(太祖) 4년(1395)부터 도성(都城)쌓기에 들어갔다. 도성에는 동서남북에 4대문과 그 사이사이에 4개의 작은 문을 만들었다....북문 격인 숙청문과 서문 격인 돈의문 사이에 자리한 창의문을 일명 자하문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조 때 이 일대를 개성의 자하동처럼 골이 깊고 물과 바위가 아름다워 '자핫골'이라 부른 데서 비롯된다(http://www.hankooki.com/whan/200011/ w200011282035206151233.htm)


  "창의문은 다른 도성문들과 마찬가지로 태조 5년(1396)에 도성의 서북문으로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 이름이 '의를 드러낸다'는 뜻의 창의(彰義)로 지어졌는데, 아마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 서소문인 소의문(昭義門)과 함께 서쪽의 문으로 인식되어 오상(五常) 가운데 서방에 해당하는 '의(義)'자가 붙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그 창의문이 이름값을 톡톡히 한 적이 있다. 광해군 15년(1623) 3월 壬寅 밤 삼경에 약 1,000여 명의 '의로운 군대(義旅)'가 이 문으로 들어와 창덕궁 문으로 갔다. 그 때 '의롭지 못한' 왕은 궁궐 담을 넘어 도망을 치고 새 왕이 들어섰다. 광해군에서 인조로 왕이 바뀐 인조반정(仁祖反正)이다. 창의문은 그 이름대로 의를 드러낸 셈이 되었다.... 창의문은 현재 남아 있거나 혹은 복원한 도성문들 가운데 유일하게 좌우로 성벽이 살아 있다. 게다가 창의문은 다른 문들과는 달리 열려 있어 그리로 지나다닐 수도 있다. 여름에 그 문에 들어서면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서북쪽 북한산에서 내려온 바람이 모두 이 한 곳으로 모여드는 느낌이다. 창의문은 살아 있다.... 그러나 창의문이 살아 있다고는 하나 온전히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시내 중심가에서 세검정 쪽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창의문으로 드나들지 않는다. 문 서측으로 뚫린 길을 타고 성 밑으로 굴을 파고 다닌다. 창의문은 그저 한 여름 무더위에 인근 노인네들의 땀을 식혀주는 것으로 제 구실을 삼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처럼 자동차가 주된 교통수단이 되어 있는 한 이런 현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창의'를 하지는 않더라도 가끔은 그저 휘적휘적 걸어서 창의문을 드나들어 보는 것도 뜻이 전혀 없는 일은 아닐 터이다 (http://www. koreanhistory.org/walk/seoul/ seoul06.html)." (2001. 11. 8.)

 

(추신) 인왕산길이 끝나고 북악산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환기미술관이 있지요. 그 미술관 앞에 "손만두집"이라는 만두집이 있습니다. 2층짜리 양옥 가정집을 개조하여 낸 곳인데, 창 밖으로 인왕산을 관조하며 먹는 만두의 맛이 한 마디로 끝내줍니다. 한 번 들러보십시오. 나오실 때는 댁에서 기다리실 사모님을 위하여 물만두 한 봉지(냉동포장)를 사 갖고 나오는 것을 잊지 마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