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쭉길 따라(지리산 바래봉)

2010.02.16 11:51

범의거사 조회 수:9490

 

                 철쭉길 따라

 

  작년 11월초 인왕산을 올라갔다 온 후 고이 모셔(?)두었던 등산배낭을 다시 꺼냈다. 무려 반 년만이다. 그 사이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어 어느 새 늦봄이다. 올 2월에 서울에서 대전으로 임지가 바뀐 탓일까, 왠지 모르게 안정되지 못한 삶이 산을 멀리하게 만들었고, 그에 비례하여 아쉬움만 쌓여갔다. 그러던 차에 실뱀장어의 꼬리 정도밖에 남지 않은 봄마저 형체가 위태롭기 짝이 없던 5월 14일, 지리산의 바래봉을 찾았다. 매년 봄가을로 거행되는 체육행사의 일환으로 대전고등법원에서 바래봉 등산을 택하였다고 해서 따라나선 것이다.      

바래봉(1,167m),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 입에 매년 오월이 되면 오르내리는 산이 바로 바래봉이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철쭉군락지가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지리산의 主峰인 천왕봉(1,915m)은 두 번 올랐건만 정작 바래봉은 초행길이다.  

null  대전부터 타고 간 버스에서 내린 곳은 바래봉의 북서쪽 斜面에 위치한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용산리 주차장이다. 주말도 아닌 평일의 오전 10시 30분인데도 주차장은 관광버스로 벌써 만원이다. 6.13 지방선거가 한 달밖에 안 남은 것과 관련이 있을까?  

  인근의 雲智寺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를 들으며 잠시 콘크리트 도로를 오르다 보니 이내 오솔길이 나온다. 좌우의 숲 사이로 난, 이름 그대로 오솔길이라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길이다. 길이 아니라 숲 속에 뚫린 터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과 벗하고자 산에 오르면서도 얼굴이 햇볕에 탈까봐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의 길인 셈이다. 그만큼 운치도 있다.  

  그런데 복병이 도사리고 있어 그런 운치를 마음놓고 즐기기가 쉽지 않다. 다름이 아니라 높은 산을 가다보면 의례이 한 군데는 있기 마련인 깔딱고개가 바로 시작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형사부의 中砥대사는 벌써 燒酒를 내리고 있다. 평소에는 넘치는 힘을 자랑하면서도 산에만 오면 헐떡거리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최고령이신 원장님은 진작에 앞서 가셨건만.....  

 

  다행히도 30분만 고생하면 깔딱고개에서 몰아쉬던 숨을 돌릴 수 있다. 여전히 좁은 길이지만 그래도 작은 능선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앗, 그런데 한 숨 돌린다는 것이 너무 지체를 했나, 새로운 복병이 출현했다. 아직 철쭉은 그림자도 안 보이는데, 어느 새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상춘객들이다. 추월해도 소용없고 먼저 가라고 양보해도 소용없다. 앞뒤로 끝 모르게 포위된 것이다. 그들의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귀가 멍멍할 정도이다. 이쯤 되면 여기가 산속인지 저잣거리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30여분을 상춘객들의 늪에서 더 버티고 오솔길을 벗어나자 넓은 찻길이 나타난다. 01.jpg

 

   아니 웬 찻길?

   오늘의 등산 길잡이인 오석룡 사무관이 연유를 설명한다. 1971년부터 이 곳에다 면양을 키우려고 바래봉 능선까지 찻길을 내고 초지를 조성했다는 것이다. 길이 넓어지고 앞서 갔던 원장님 이하 법원식구들도 만나게 되어 천만다행이다. 이젠 떨어지지 말아야지.  

 

  평발이라 걱정이 되었는데 금덕희판사도 김하늘판사의 호위를 받으며 이미 와 있다. 평소에 주말등산을 한다더니 그 효과를 보는 모양이다. 소주를 내리던 中砥대사도, 길동무를 해주던 二村선생도 다 모였다. 절륜의 정력가 弘意박사도 보인다. 디스크로 고생해서 허리가 안 좋다면서도 中砥대사와는 반대로 산에만 오면 펄펄 나는 水鄕처사는 역시 안 보인다. 이미 저 멀리 앞서 간 모양이다.  

   찻길을 따라 오르기를 10여분, 드디어 철쭉이 하나 둘 나타난다. 그러나 아직은 맛보기일 뿐이다. 오히려  저 아래 먼 발치로 내려다 보이는 운봉읍과 그 주변에 펼쳐진 운봉벌의 경치가 시선을 끈다. 계곡물을 막아 놓은 저수지를 가리키며 누군가가 저게 바로 ‘노영洑’라고 해서 웃었는데, 정작 화제의 주인공인 水鄕처사는 보이질 않으니....    

 

   “저기가 바로 바래봉 정상입니다”


  바래봉 0.8Km라고 씌어진 이정표를 본 후 30여분을 더 걸었을까, 오석룡 사무관이 가리키는 곳의 바래봉 정상은 밋밋한 초원지대이다.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를 엎어놓은 형상이어서 바래봉(바리봉)이라 이름지어졌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다. 혹은 산의 모양이 삿갓처럼 생겼다 해서 삿갓봉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그런데 왜 나무가 없는 것일까? 다시 이어지는 吳사무관의 설명이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1971년부터 면양을 키우려고 초지를 조성했지요. 그리고 면양떼를 풀어놓았는데, 이 놈들이 워낙 먹성이 좋아 수목들이 새순을 내밀기 무섭게 먹어치우는 통에 깡그리 말라죽었고 철쭉만 멀쩡했답니다. 철쭉 잎은 독성이 있어 면양이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 결과 주변에 번식을 방해할 다른 수목이 아무 것도 없고, 초지 조성하려고 비료도 주었으니 철쭉만 무성해질 수밖에요. 파내서 한 군데 모아 버린 철쭉나무들이 나중에 멀쩡하게 되살아 멋진 꽃밭을 이루기도 하였고요."  

  그러고 보니 길옆에 난 풀이 흔히 보던 풀이 아니다. 草地用으로 수입해 온 외국산인 모양이다. 一說에 의하면 이미 일제시대에도 목장이 조성된 적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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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래봉 철쭉군락은 바래봉 정상 남서쪽 바로 아래의 찻길이 끝나는 삼거리(1,100m)에서부터 우측 팔랑치(1,010m)쪽으로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이 곳에서부터 팔랑치까지의 약 1.5km 정도가 白眉이다.

   바래봉 철쭉은 하나같이 사람 허리나 키 정도의 크기로 빽빽하게 모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빛깔은 진한 분홍색이다. 4월 하순에 산 아래에서 피기 시작하여 5월에 이 곳에서 만개한다고 하는데, 올해는 더위가 일찍 찾아와서일까 이미 많이 진 모습이다. 그래도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가는 법이라고 않던가. 붉게 물든 군락지가 나그네의 발길을 끌어 잡는다.  

 

   “본래 지리산 철쭉은 지리산 8경의 하나라고 불리는 세석고원 일대가 유명하지 않나요?”  
 

   몇 푼 안 되는 지식으로 아는 체를 했더니만, 원장님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신다. 당신께서도 그런 이야기를 듣고 일부러 사모님과 함께 힘들여 세석고원엘 간 일이 있는데, 철쭉은 구경도 못했다고 하신다. 하긴 운봉 사람들은 세석고원의 철쭉은 철쭉으로 치지도 않는다고 한다.  

 

  나도 몇 해 전에 소백산에 철쭉 구경 갔다가 헛물만 켰다고 거들면서 여기 철쭉은 정말 대단하다고 감탄을 거듭하였는데, 잠시 후 그 감탄을 접어야 했다. 등산 초입의 오솔길처럼 좁은 길도 아니건만 걷기가 힘들다. 아, 다시 나타난 상춘객 군단!

   누가 묻는다면 지리산 바래봉에는 철쭉보다 상춘객이 더 많았다고 답하리라. 얼마 전 장항 에 검증 갔다가 대전으로 돌아오던 길에 들렀던 안면도의 꽃박람회장에도 꽃보다 사람이 더 많더니만.....

     팔랑치 채 못 가서 眺望臺에 도착할 무렵 배가 출출하다는 생각에 시계를 보니 어느 새 12시를 지나고 있다. 조망대는 말 그대로 지리산의 全景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동쪽의 천왕봉에서 시작하여 촛대봉, 반야봉을 거쳐 서쪽의 노고단에 이르는 지리산 주능선 전체가 손에 잡힐 듯 펼쳐져 있다. 모르긴 해도 지리산을 이처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도 드물것 같다. 내 꼭 저곳을 縱走해 보리라고 다짐해본다. 그런데 수술한 무릎으로 과연 가능UNI2937.gif 할까...?
   금강산도 食後景이다. 분명 이 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건만 눈을 씻고 찾아도 선발대가 보이질 않는다. 이 무슨 변고란 말인가?
  그러나 이내 그 연유를 깨달았다. 조망대 근처의 쓸 만한 자리는 모두 아줌마군단이 진작에 점령해버렸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팔랑치까지 더 진격해야 했던 것이다. 오호통재라, 내 주린 배여!  

    

 12시 40분, 드디어 팔랑치에 도착하여 배낭을 풀었다. 주위의 만개한 철쭉 구경은 나중 일이다. 차가운 도시락일 망정 꿀맛이 따로 없다. 그 동안 소주를 많이 내린 中砥대사는 어느 새 술잔을 기울이며 목을 축이고 있다. 이름하여 頂上酒란다. 술이 저리도 맛있을까...? 술을 못하는 나는 다소 한기를 느끼건만 원장님 이하 頂上酒에 얼큰해진 사람들은 얼굴에 화기가 돈다. 나도 변론을 재개해? 이럴 때마다 느끼는 유혹이다. 쩝, 그럴 수만 있다면야....  

 

UNI2938.gif    팔랑치 주변의 철쭉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푸른 산에 진분홍 주단을 펼쳐놓은 듯하다. 이름하여 요원(燎原)의 불길이라 할 만하다. 무리를 지어 피어남은 홀로 있기를 싫어해서인가, 아니면 그래야 남과 비교하여 자태를 더욱 뽑낼 수 있기 때문인가?

철쭉은 그렇게 화려한 꽃이 아니지만, 드넓은 산야를 진분홍 불꽃으로 태우기에 더욱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붉디 붉은 바위 끝에
잡고 온 암소를 놓아두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저 꽃을 꺾어 바치겠나이다."  


  신라 향가인 ‘獻花歌’에서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바쳤던 꽃이 바로 철쭉 아니었을까. 철쭉의 꽃말이 ‘사랑의 기쁨’인 것을 보면, 소 끄는 노인의 심정이 바로 그것 아니었겠는가. 

 

  볼 것을 다 보고 먹을 것도 다 먹었으니 이젠 하산하는 길만 남았다. 욕심 같아서는 계속 능선을 따라 한 눈에 들어오는 코스인 부운치→ 세동치→세걸산→고리봉→정령치(1,172m)로 가고 싶지만, 나 혼자 온 것도 아니니 기약도 없는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팔랑치에서 바래봉 남동쪽 斜面의 팔랑마을을 거쳐 남원시 산내면 내령리로 내려가는 길은 별 특징이 없는 평범한 산길이다. 다만 거의 다 내려간 지점에 마을 주민들의 차량통행을 위하여 콘크리트 포장을 한 길이 나와 이미 피곤해진 무릎을 더욱 피곤하게 하는 것이 아쉬움을 남긴다. 그렇지만 평생에 한 번 올까말까 한 등산객의 정취보다야 매일 그곳을 지나다녀야 하는 주민의 편의가 우선 아니겠는가....
    이젠 대전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눈을 붙이는 일만 남았다. 제발 조용히 가야 할텐데....(2002.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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