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주가 따로 없다(울진, 안동하회마을)

2010.02.16 11:12

범의거사 조회 수:10481

 


                 구세주가 따로 없다

 


   忠州에서의 마지막이 될 5월, 계절의 여왕이라는 칭호에 걸맞지 않게 하루하루가 덧없이 지나가는 것 같아 못내 아쉬워하며, 무언가 대자연 속에서 속세의 때를 벗는 일을 한 가지라도 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있던 중,

    5월의 셋째 주로 접어들면서 御夫人으로부터 예상되던 公法學會의 개최소식이 없다며 주말에 시간이 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였다.

   때를 놓칠세라 초등학교 다니는 두 아들에게 서울 가면 엄두도 못 낼 현장교육도 시킬 겸해서 流浪의 길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행선지는 동해안.


   지도책을 펼쳐 놓고 보니 죽령을 넘어 영주의 부석사와 소수서원을 거쳐 불영계곡을 지나 울진으로 가는 길이 환상적으로 보였다. 돌아올 때는 안동으로 우회하여 도산서원과 하회마을을 들르리라.


  신경정신과의사이자 旅行道士인 孔재연 院長이 그려 준 약도를 들고 그의 염려 半, 격려 半이 혼합된 인사를 뒤로 한 채 차에 몸을 실은 때는 정확히 1996.5. 18. 14:55.  


  평소에는 다 죽어가다가도 마이크와 운전대를 잡으면 기운이 펄펄 나는 마나님을 모시고 있는 덕분에 이 번에도 어린 衆生은 조수석을 차지한 채 지도책과 이정표를 대조하며 우회전, 좌회전을 아뢰는, 말 그대로 助手 노릇을 하여야 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충주호를 왼쪽으로 하고 월악산을 오른쪽에 둔 채 꼬불꼬불 호반길을 단 숨에 내달으니 어느 새 저만치 커다란 고개가 앞을 막는다.

     이름과는 달리 대나무는 눈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 고개, 언제 넘어도 멋과 정취가 아우러진 고개, 그러나 그 옛날 과거 보러 한양길 가던 선비들은 미끌어질까봐 지나길 꺼렸다는 고개,

     中原과 嶺南을 잇는 竹嶺은 하도 길어서 걸어 넘을라치면 굽이야 구보구보가 눈물이 나겠지만, 20세기 말의 발달된 문명의 利器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넘는 村夫의 心中에는 그저 여기는 터널을 뚫지 말기를 하는 바램만이 있을 뿐이었다.


  고갯길의 내리막이 끝나는 곳에 있는 고을인 풍기가 개성, 강화, 금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4대 인삼산지라고 두 아들놈에게 설명을 하여 주느라 우회길을 놓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읍내를 관통하면서 좌우를 유심히 둘러보았으나, 인삼가게가 하나도 보이지 않음은 내 눈이 나빠서인가? 鈍者의 머리로는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분명 주위에 인삼밭이 많이 있음에도...


  불영계곡을 해가 있을 때 통과하려면 부석사와 소수서원을 찾는 일은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孔院長의 충고를 떠올리며, 영주를 그대로 지나 봉화를 거쳐 일로 東進을 거듭하니 “낙석(落石) 주의”라는 간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바야흐로 郡立公園 佛影溪谷이 시작되는 곳이다.

   부처님의 모습이 연못에 비치는 절이라고 해서 佛影寺라는 이름이 지어지고, 거기서 다시 佛影溪谷이라는 이름이 나왔으니,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하는 식이 여기도 적용됨인가.  


  높은 산의 허리를 비집고 겨우 길을 냈기에 산굽이에 가로 막혀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데, 그나마 오른쪽은 천길 낭떠러지가 계속되는 곳, 저 밑의 계곡에는 산삼 썩은 물이 이 바위 저 돌에 부딪쳐 퍼렇게 멍이 든 채 길손의 아찔한 눈을 유혹하는 곳이 바로 佛影溪谷이다.

   잠시 차를 세우고 발에 낀 먼지라도 씻고 싶건만, 西山을 넘어가는 해가 허락치 않으니 어쩔거나. 아쉬움을 저 물에 띄워 보내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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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의 殘影이 상기도 머릿속에 맴도는데 무심한 자동차는 어느 새 客을 바닷가에 내려놓는다. 넘실대는 파도 속에서 아까 띄워 보낸 아쉬움을 찾아보지만 오징어가 삼켰는지 보이지를 않는다.

   벌써 30여 년 전의 일이건만, 당시 무장공비의 대거 출현으로 어린 가슴을 놀라게 했고, 아직도 이 곳의 地名을 대면 그 때의 일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 곳, 울진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조용하기만 하다.  

 

  죽변항 못 미쳐 자리한 아리아모텔은 외지고 한적한 바닷가에 있건만 저녁 7시밖에 안 되었는데도 방이 없단다. 孔院長이 예약을 하여 주지 않았으면 食率을 거느린 채 속절없이 헤맬 뻔하였다.


  국내 유일의 노천온천으로 유명하였던 덕구온천이 지척에 있다기에 밥부터 먹자는 아들놈들을 달래며 주린 배를 움켜잡고 온천장을 찾았다.

   언젠가 釜谷의 대규모 온천장을 갔다가 그 번잡하고, 비위생적임에 온천물이 아깝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했던 기억을 되살리며, 이번에는 어쩌려나 했는데,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단체관광객을 주된 고객으로 하는 온천장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요금을 올리더라도 좀 더 위생적이고 안락한 시설을 갖추는 데 눈을 돌릴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여전하였다.

    이 교통 불편한 외진 곳을 不遠千里 찾아오는 사람들이 온천요금 조금 더 받는다고 발을 끊지는 않을 것이다. 도리어 그들에게는 먼 길의 路毒을 풀 수 있는 편안함이 필요할 것이다.

    세계화는 입으로만 외친다고 될 일이 아니지 않을까. 언제까지 6-70년대식 관광풍토에 젖어 있어야 하는 걸까.

 

   온천욕을 끝내고 죽변항을 찾았다. 바닷가에 있는 등대횟집에서 회를 주문하였는데, 아이들은 싱싱한 오징어를 정신없이 먹어 댄 반면, 어른용으로 시킨 도다리회는 기대 밖이었다.

   미진함을 뒤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등대횟집에서 옆자리에 앉아 요란스레 저녁을 먹던 정체불명의 善男善女가 취기어린 모습으로 우리가 투숙한 바로 옆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제서야, 처음에 숙박 등록을 하러 혼자 계산대에 갔었을 때 주인 여자가 미안하지만 방이 없다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하였다. 러브호텔이 서울 근교에만 있는 줄 알았으니... 명색이 判事라면서 세상물정에 이렇게 어두워서야 원.


   1996년 5월 19일 이른 아침. 

 

   방에 누워 해돋이를 보겠다고 집을 나설 때부터 품었던 야망은 창문 너머 저 멀리 수평선에 아스라이 펼쳐져 있는 구름을 보는 순간 그 속으로 날려 버려야 했다.

   몸이 약해 아침에 일찍 못 일어나는 御夫人께서도 모처럼 야무진 꿈을 꾸고 5시경에 눈을 떴건만 잠도 깨고 꿈도 깨야 했다.


  이럴 때는 팔자소관으로 돌리는 것이 제일 속 편하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는 터라 쉽게 체념을 하고, 아이들을 깨워 다시 죽변항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먼 바다에 나가 밤새 고기를 잡은 고깃배들이 아침 일찍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엎친 데 덮친다고 하던가. 이 날따라 중매인들이 놀기 때문에 고깃배가 안 들어온다고 하지 않는가. 잡아 와야 팔아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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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닷가에 좌판을 벌리고 있는 아주머니들의 고기판을 들여다보며 하릴없이 거닐기도 하고, 부두에 매여 있는 오징어배에 다가가 그 생김새를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한 동안 거니는데,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통통배가 하나, 그리고 그 뒤를 이어 30톤짜리 제법 큰(?) 배가 연이어 들어온다.

   얼른 뛰어가 보니, 팔팔 뛰는 싱싱한 물고기들을 배에서 내리고 있었다. 청어, 대구, 도다리, 가자미, 문어, 장치 등등... 곧 이어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논다던 중매인이 나타나 입찰을 시작하였다.

 

   TV나 영화에서 보던 입찰자들의 이상한 손짓, 발짓은 볼 수 없었고, 상인들이 각자 입찰가격을 적어 내고 그 자리에서 최고가응찰자를 정해 그에게 매각한다.

   놀라운 것은 횟집에서 사먹으려면 그보다 신선도가 훨씬 떨어짐에도 100만원 어치는 족히 될 분량의 싱싱한 물고기들이 겨우 175,000원에 낙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입찰에 참가하였던 상인들은 오늘 따라 엄청 비싼 가격이라고 고개짓을 하는 것이었다. 고깃배에서 내리는 어부들이 하나 같이 나이가 든 노년기의 사람들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유통구조의 개선이 없이는 생산자, 소비자의 눈물 속에 중간상인만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는 세상이 계속되리라.


  商人笑時漁人淚(상인소시어인루)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

 

   중간상인 하하 할 때 뱃사람은 눈물 짓고

   노래 소리 드높을 때 원성 또한 높아간다


가 따로 없었다.


   죽변항을 뒤로 하고, 南行길을 재촉하여 성류굴을 찾았다.

   麻衣太子를 비롯한 여러 聖人들이 머무른 곳이라 하여 聖留窟이란다(麻衣太子가 聖人인지는 잘 모르겠다). 단양의 고수동굴만큼이나 유명한 곳인데도, 이른 시각이어서인지 한산하였다.

   신경통에 좋다고 석순을 마구 잘라가 고수동굴과 마찬가지로 동굴 내부는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벌을 받아 그들의 신경통이 오히려 더 악화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랬으면 하고 바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동굴 내부의 수심이 30미터나 되는 연못은 금방이라도 이무기가 튀어 나올 것 같은 음산함을 풍겼는데, 되레 그것이 동굴길이가 짧으면서도(총연장이 470m에 불과하다) 고수동굴에서 느낄 수 없는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하였다.


   동굴 입구에서는 한 아주머니가 아침 일찍부터 산나물을 팔고 있었는데, 손가락만한 더덕들을 묶어 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관광지마다 널려 있는 팔뚝만한 중국산 더덕이 아닌 말 그대로 身土不二의 더덕이었다. 그 향기가 너무 진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깊은 산 속에 들어가 하루 종일 캔 것이라고 진열하여 놓은 것이 고작 서너 두름이었는데,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팔기가 너무 아까워 집에서 먹으려다가 그 놈의 돈이 원수여서 할 수 없이 팔러 나왔다는 그 아주머니의 말이 결코 허튼 소리로는 들리지 않았다. 한 두름에 5,000원. 

   수산물만 아니라 임산물도 생산을 위한 노력의 대가를 제대로 못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까기가 힘들다고 주저하는 마나님을 내가 까준다고 설득하여 두 두름을 사고 10,000원을 내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귀한 게 고작 냉면 두 그릇 값이라니....


  성류굴을 벗어나 인근 백석해수욕장으로 갔다. 아직 철이 아니라 해수욕장은 밀려오는 파도만이 客을 반겼고, 넓은 해변에서 네 식구만이 활개치며 놀았다. 조개를 줍기도 하고, 파도를 따라 달리기도 하면서. 그 상쾌함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알리라.


   영덕에서 南行길을 마감하고 안동을 향해 西行길로 접어들었다.

   아침나절에 참으로 많은 일을 한 것 같은데 아직 오전 11시다. 이런 속도라면 안동댐, 도산서원, 하회를 여유 있게 둘러 볼 수 있으리라고 야무진 생각을 하면서, 경상북도 북부지방의 꼬불꼬불 산골길을 누비고 다니다, 주왕산 북쪽 기슭의 신촌약수터에 이르렀다.  


   철분이 잔뜩 함유된 떫은 약수를 마시고, 약수로 만든 300원짜리 엿을 사먹고, 가져 간 물통에 약수도 가뜩 담고, 기지개를 켜며 산천경개도 둘러보고, 온갖 여유를 부리다가 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데 아니 이럴 수가!

   맙소사, 자동차가 파업을 하는지 꼼짝을 않는다.

   ‘당신네는 즐기고 다니는지 몰라도 나는 죽을 맛이요, 나도 약수 좀 한 모금 주쇼!’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하늘이 노래지다 못해 무너지는데,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니 솟아날 구멍이 보였다. 길 건너에 자동차정비업소가 있는 것이 아닌가. 요사이도 일요일에 놀지 않고 일을 하는 고마운 아저씨가 있다니...

 

   그런데 또다시 희비가 되풀이될 줄이야. 자동차의 앞 뚜껑을 열고 이것저것 살펴보던 이 아저씨 曰,

 

  "축전지가 완전히 나갔기 때문에 응급처치로는 안 되고 새로 교환하여야 합니다. 비용은 55,000원입니다."

 

   아, 無情도 하시지. 주머니에 30,000원밖에 없는데.... 그나마 점심 값과 하회마을 입장료로 남겨 놓은 것인데...

   그러나 어쩌랴.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였더니, 일요일에도 일하시는 부지런한 이 아저씨, 착하기도 하셔라. 외상으로 교환하여 줄 테니 충주에 가거든 은행 온라인으로 입금시키란다. 이래서 일찍이 추석선사(酋席禪師)께서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갈파하셨나 보다.

 

   충주댐을 수시로 보아 온 아이들에게는 안동댐은 콘크리트댐이 아니라 사력(沙礫)댐이라는 것 외에는 신비함이 없었다. 그들에겐 오히려 이 때쯤 서서히 찾아오기 시작한 허기를 어떻게 달랠 것이냐가 관심거리였다.

   하회마을에 가서 헛제사밥을 사 줄 테니 조금만 참으라고 달래면서 도산서원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陶山書院이 자리한 도산면은 안동군의 맨 위쪽에 있는지라 봉화에서 오히려 더 가까울 듯하였다.

   청량산에서 흘러나온 맑은 물이 굽이치는 곳의 울창한 숲 속에 위치한 도산서원은 그 교통의 불편함 때문에(?)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퇴계선생의 숨결이 살아 있는 듯하였다.

 

   10여 채가 넘는 건물 중에 특히 재미 있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이름하여 亦樂書齋. "또한 즐거운 공부방"이란 뜻인가?

   안내판을 보니 인근의 양반이 자기 아들을 도산서원에 入院시키고, 그 기념으로 지어 주었단다. 고매하신 퇴계선생께서 설마 뇌물을 받으셨을 리는 없고, 기부금입학의 元祖쯤 되지 않을까 하고 俗된 생각을 하여 본다.


  전시된 유물 중에서는 퇴계선생의 친필 서한이 눈을 끌었고, 한석봉이 선조임금님 앞에서 썼다는 현판글씨가 春客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지금 우리 네 식구 모두 서예를 배우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시계를 보니 어느 덧 오후 3시. 더 이상 머무를 시간이 없어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하회로 내달았다.

    마을로 들어서기 전, 그 유명한 헛제사밥을 하는 식당을 먼저 찾았다. 제사를 지내지 않고 제사음식을 내놓으니 이름하여 헛제사밥이란다.

    주머니를 톡톡 털어 허기를 달래는데, 유감스럽게도 주머니를 톡톡 턴 보람이 없었다. 주머니가 가벼웠기 때문일까? 한 번 먹어 본 사람은 여간 배가 고프지 않으면 다시 찾기 힘들 것 같았다. 짜기는 왜 그리도 짜며, 써비스정신은 어디에다 제사지냈는지....


  식솔들은 처음이지만 나로서는 두 번째 찾는 하회마을은 또 한 번의 실망감을 안겨 줄 뿐이었다.

   한 집 걸러 막걸리집이요, 두 집 건너 선물가게이니, 누가 있어 이 곳을 양반고을이라고 할 것인가.

   입구에서 받는 엄청난 주차료와 입장료는 도대체 어디다 쓰길래 집집마다 장사판을 벌려 놓고 취객을 유혹하는 것일까?

   저 많은 상점들은 입구의 주차장에 몰아 놓고 마을만큼은 명성에 걸맞게 고즈넉한 풍경을 유지하여야 하는 것 아닐까? 간판만 번지르르한 무슨무슨 대책위원회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일까?

   별별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스울 뿐이다. 緣木求魚해본들 소용이 있을 리 없잖은가.

 

   西涯 선생의 古宅에 있는 새로 지은 유물전시관은 영화 속에서 보던 중국음식점 그대로였다. 차라리 전시를 하지 말지, 선생의 얼굴에 흙칠을 하는 것만 같아 속절없이 나그네의 얼굴만 뜨뜻해졌다.

   누구를 탓해야 하는 것일까. 千年의 古都인 경주를 시멘트로 도배장판하여 놓는 사람들이 문화재를 관리하는 한, 이 곳이라고 제 모습을 유지하기는 어려우리라. 그러면서도 한 쪽에서는 "관광한국"이라는 구호를 외쳐대고 있으니...

 

   충주에 부임하면서부터 한 번 가보자고 2년을 두고 그렇게 졸라 대던 집사람과 아이들 조차도 흥미를 잃은 듯하여 서둘러 하회마을을 벗어나, 입구의 하회탈 박물관으로 갔다.

   우리나라의 각종 탈은 물론이거니와 아프리카와 大洋洲의 여러 나라 탈을 전시하여 놓은 게 볼 만하였다. 놀라운 것은 이 박물관을 개인이 지어서 운영한다고 하는 것이었는데, 그 정갈함이 하회마을이 주는 실망에 대비되어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구경을 마치고 나오려니 큰 놈이 하회탈을 꼭 사야 한다며 버틴다. 주머니에는 3,000원밖에 없는데.... 실로 난감해 하는데 御夫人께서 비상금이라며 세종대왕을 한 장 내미는 것이 아닌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와 함께.

    어째 이 번 여행길에서는 궁지에 몰리면 매번 약속이나 한 듯이 救世主가 나타나니 신기한 노릇이다.


   三父子의 목에 2,000원짜리 탈목걸이를 일일이 걸어 주는 妻의 손길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1996. 5. 21.).  

 

송학사-강촌사람들.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