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구름 푸른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구암 보시게.

 

다섯 달 만에 그대에게 글을 쓰는 듯하이.
건강상태가 특별히 호전된 것은 없는지 궁금하다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만추(晩秋)의 계절에 그대와 단풍 구경을 갈 수 있으면 참으로 좋으련만,
그래서 그대의 그 유려한 표현력으로 가을을 노래하는 것을 감상할 수 있으면 더 없이 기쁘련만,
하늘은 어찌하여 그대에게 가혹한 시련을 안기고 있나 모르겠네.
부디 훌훌 털고 일어나시게.

 

병상의 그대에 하기 민망한 소리이긴 하네만,
촌부는 여전히 발품을 팔며 이곳저곳을 찾고 있다네.

내 생애 또다시 오기 어려울지 모를 시간적 여유를 욕심껏 즐기고 있다고나 할까.
그렇지만 아직 과유불급(過猶不及)까지는 아니라네.

 

구암,

 

   지난 19일(2017. 10. 19.)에 촌부는 1박2일로 전남 장성의 백양사(白羊寺)를 다녀왔네. 조계종단의 제1호 총림인 고불총림 (古佛叢林) 백양사는 백제시대 창건된(무왕 32년, 서기 631년) 유서 깊은 절답게 고풍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네. 다만 1,500년 된 고찰임에도 아쉽게도 국보나 보물급 문화재가 하나도 없으니, 잦은 전란이 빚어낸 참화가 아닌가 싶네.  


   인공의 문화재는 없어도 절집과 그 주위의 풍경은 오히려 자연이 연출하는 최고의 국보급 문화재였네.  비록 유명한 애기단풍은 아직 철이 일러 볼 수 없지만, 백암산 백학봉과 조화를 이룬 가람배치가 한낱 촌자의 눈에도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네. 특히 아침 여명의 모습이 간밤에 본 쌍계루(雙溪樓)의 모습과 더불어 인상적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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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의 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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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루의 야경]

                                                                            

    백양사 새벽예불에도 참여했는데, 이제껏 다른 절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체험을 했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대웅전에서 공식예불이 끝나자 소등을 하고 주지스님을 비롯하여 예불참여자들이 모두 참선을 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라네. 이는 현 주지스님(토진스님)이 부임한 후 처음 시작한 것인데, 맑은 정신상태에서 잠시나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자는 것이지.

 

    그리고 참선이 끝나자 함께 빗자루를 들고 도량 청소를 하였네. 평소 관리가 잘 되고 있는 도량이라 아침에 굳이 청소를 해야 할 정도는 아닌데, 이 또한 도량을 깨끗이 쓸듯 마음을 깨끗이 닦자는 의미가 있다네. 겸하여 간밤을 한 절에서 보낸 사람들끼리 서로 자연스럽게 아침인사를 하는 기회도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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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의 아침 청소]

                                                                               

   백양사에는 40여개의 부속 암자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운문암(雲門庵)과 천진암(天眞庵)이 유명하다네. 운문암은 백양사에서 산 위로 난 경사진 비탈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야 하는데(4km. 걸어서 1시간 30분 정도 걸리고, 4륜 구동 SUV로 가면 20분 정도 걸리네), 예로부터 유명한 선원인 운문선원이 있다네. “북 마하연, 남 운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선풍을 날린 곳이라고 하지.


   지금 선원장으로 계신 수일(守一) 스님과 잠시 차담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폭포수처럼 거침없이 하시는 말씀에 오히려 내 등골이 서늘하더군. 전날 차담을 나눈 방장 지선(知詵스님의 제자로 그 선풍을 그대로 이어받아 언행에 거리낌이 없으신 듯하였네. 아무튼 두 사제지간의 노스님들한테서 고승의 모습을 뵐 수 있어 좋았네. 더불어 70세를 바라보는 연세에 요사채의 지붕을 직접 수리하시는 수일 스님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네.

 

   선원이 백학봉의 해발 650m 정도 되는 지점에 저리 잡은 까닭에 앞마당에 서면 전면으로 굽이굽이 펼쳐지는 산세가 장관이라네. 고도가 제법 되다 보니 백양사와는 달리 단풍도 군데군데 들었다네. 마침 날씨가 청명하여 멀리 무등산, 조계산, 백운산이 다 보이더군. 이 장면에서 어찌 시 한 수가 없을 수 있겠나.

 

   흰 구름 푸른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추풍에 물든 단풍 봄꽃도곤 더 좋아라

   천공(天公)이 나를 위하여 뫼빛을 꾸며내누나. 

 

남파 김천택의 시조일세. 단풍든 가을산의 경치를 단 석 줄로 이렇듯 그려낸 시인의 능력에 감탄할 뿐이네. 오호라, 구암대사의 촌철살인 글이 보고 싶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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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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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선원 앞뜰에서 본 전경]

 

   천진암은 백양사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있는 비구니 암자라네. 이 암자에 바로 사찰음식의 대가로 유명한 정관스님이 계시다네.

   이 스님은 뉴욕타임스에 소개되고, 베를린영화제에 초정되고, 넷플릭스(Netflix, 미국의 세계 최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회사)가 만든 음식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 시즌 3(Chef's Table Season 3)'에 출연하는 등 세계적으로 유명하신 분이라네. 19일 저녁식사를 천진암에서 했는데, 정관스님이 정성껏 차려 주신 음식으로 배를 가득 채우는 영광스런 자리였네.

 

   북한산 진관사도 그렇고 이곳 천진암도 그러한데, 오신채와 인공조미료를 안 쓰면서도 천연의 재료로 입에 착 달라붙는 감칠맛 나는 음식을 만드시는 스님들의 솜씨에 늘 감탄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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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의 정관스님과 저녁공양]

 

   구암,

 

   필부는 20일에 백양사에서 상경하여 그 다음날(21일) 바로 덕적도를 찾았네. 인천의 연안부두에서 배(완행. 카페리)를 타고 두 시간 걸리는 곳이네(고속선을 타면 1 시간 조금 더 걸리네. 거리상으로는 인천 연안부두에서 80km). 연산회 회원들과의 가을 정기산행이 진즉 예정되어 있었던 일정이었네. 

 

   인천대교 밑을 지나 인천상륙작전으로 유명한 팔미도의 등대를 바라보며 배를 타고 가는 길이 여유가 있어 좋더군, 해무가 다소 낀 게 흠이긴 하였지만, 화창한 날씨에 파도가 전혀 없어 배 멀미 약을 먹은 게 의미가 없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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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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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에서 바라보는 덕적도의 첫 인상이 참으로 깔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섬을 떠날 때까지도 그 인상이 그대로였네. 나중에 섬 주민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섬이 청정지역으로 지정되어 정부의 지원을 받는 모양일세. 대처 사람들이 지은 전원주택들, 자그마하면서도 예쁜 모습의 성당 등이 섬의 면모를 단적으로 대변하더군.

    인구 2,100명, 일주도로 18km인 이 섬은 우리나라에서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섬 중 네 번째로 크다고 하네(제주도, 울릉도, 백령도 다음일세. 면적이 36). 한 때는 인구가 15,000명에 이르렀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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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도 성당]

 

   덕적도의 산행코스는 30분짜리부터 시작하여 5시간짜리까지 다양하더군. 우리 일행은 돌아가는 배편을 생각하여 그중 3시간짜리를 택하였는데,

   등산로가 아기자기하면서도 있을 것은 다 있어서 밧줄을 잡고 암릉을 올라가기도 했네. 능선에서 바라다 보이는 바다 풍광이 일품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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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 풍경]

 

   이 섬에는 두 개의 해수욕장이 있는데, 그 중 규모가 큰 서포리 해수욕장은 특이하게도 외국인들한테 많이 알려져 있다고 하네. 여름 성수기에는 외국인이 거의 반을 차지할 정도라고 하네. 이 날도 내국인은 없고 외국인 몇 가족만 해변에서 놀고 있었네.

   아마도 인천에서 배를 타야만 접근할 수 있어 덜 붐비고, 물이 깨끗하고, 송림이 우거지고, 모래사장이 넓고 부대시설도 잘 되어 있어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게 아닌가 싶네. 덕적도는 섬 전체가 소나무숲이라고 할 만큼 소나무가 많은데, 특히 서포리 해수욕장의 울창한 송림이 눈길을 사로잡았네.


   해수욕장 근처의 횟집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했는데, 자연산 생선으로만 채운 풍성한 식탁에 우선 놀라고(이곳에서는 양식을 하면 비용이 더 든다고 하네) 그 가격의 저렴함에 다시 놀랐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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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리 해수욕장]


구암,

 

돌아오는 길에 인천연안부두에서 본 석양의 모습을 양념으로 추가하며 글을 맺네.
부디 건강을 회복하시게.
촌부 혼자 쏘다니는 꼴을 언제까지 바라만 볼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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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연안부두의 석양]

 


정유년의 상강(霜降)도 지난 만추(晩秋)에
우민이 금당천변 우거에서 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