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화원(점봉산 곰배령)

2020.09.03 20:23

우민거사 조회 수:508

 

                 천상(天上)의 화원(花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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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배령,

 

   설악산 남쪽 점봉산에 있는 고개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부지불식간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이 고개를 촌부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지난 봄의 일이다. '천상의 화원'이라 불릴 만큼 야생화가 만발하는 곳이라는 신문기사를 본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물정을 몰랐던 촌부는 여느 산이나 고개처럼 마음만 먹으면 아무 때고 갈 수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여름 휴가철에 가야지 하고 미루었다가 7월 말이 되어 이제는 가볼까 하고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았더니, 맙소사, 하루 탐방객을 350명으로 제한하고 있었고, 탐방 예정일의 적어도 한 달 전에는 산림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예약을 해야 탐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니 밀포드도 아니고 우리나라 산에도 사전 예약을 해야, 그것도 제한된 인원만 갈 수 있는 산이 있다고?’ 하지만 혼자 투덜거려 보았자 무슨 소용인가. 이불 밑에서 활개치기일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히말라야 산악회의 여름 산행지로 곰배령을 택하고, 사전 예약을 거쳐 결정된 산행 일자가 8월 29일(토)이다. 그런데 막상 산행을 며칠 앞두고 문제가 생겼다. 한동안 잠잠해지는가 싶던 코로나19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태풍 ‘바비’의 뒤끝으로 비가 계속 내린 것이다. 토요일 산행을 앞두고 금요일 오전까지 산악회원들 간에 설왕설래하다가 일단 결행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2020. 8. 29. 아침 6시에 강남역에 모여 출발했다. 도반인 박재송님이 현재 대학생으로 군 입대 대기 중인 아들(박종혁군.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때도 동행했다)을 데리고 왔다. 프로 못지않은 산악인 박영극님은 여전히 힘이 넘치는 모습이다.

   날씨는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잔뜩 흐릴 뿐 비는 오지 않았다. 이런 날은 오히려 더위가 덜해 산행하기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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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이면 정체가 심하기로 악명을 떨치는 서울-양양 고속도로가 코로나19 탓인지 아니면 흐린 날씨 탓인지 아무튼 뻥 뚫린 덕분에 곰배령 주차장까지 쉽게 갈 수 있었다. 중간에 가평휴게소에 들러 아침 식사를 하였음에도 8시 45분에 도착했다. 전날 오후에 원통에 내려가 당신의 공장에서 밤을 보낸 오강원님이 미리 와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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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배령의 위치]   
        
   점봉산 곰배령이 있는 인제군 기린면의 진동리는 사실 우리나라에서 얼마 남지 않은 오지(奧地)의 하나이다. 예전 같으면 겨우 손꼽을 정도의 화전민들이나 살 만한 곳이다. 그래서 서울-양양 고속도로의 인제 나들목에서 진동리를 가려면 꼬불꼬불 산골길을 한참 가야 한다. 

 

   그런 진동리(정확히는 진동리 중 진동2리)의 ‘곰배령주차장’에 도착하니 이게 웬일, 커다란 운동장만 한 주차장에 이미 많은 차들이 와 있었다. 곰배령으로 인하여 생긴 변화이다. 점봉산의 8부 능선쯤에 있는 곰배령은 이곳 진동리(곰배령의 남동쪽)와 반대편의 귀둔리(곰배령의 북서쪽)를 잇는 고개이다.

   전에는 어느 산에나 흔히 있는 단순한 고개에 지나지 않아 점봉산 등산객들조차도 아무 생각 없이 넘나들던 곳인데, 고갯마루에 야생화 단지가 단장된 후로는 전국에서 뭇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오전 9시에 산행의 첫발을 내디뎠다. 출발 전에 인증사진을 찍는데, 마스크를 쓰려니 쓴웃음이 나왔다. 서울 같은 대처(大處)도 아니고, 설악산 국립공원 안 청정 산악지역에 있는, 해발고도가 1,424m나 되는 산(점봉산)의 1,164m 지점까지 올라가는 데 마스크를 써야 하다니... 그러나 어쩌랴, 마스크를 안 쓰면 입장이 안 되는 것을.
 
   바리케이드를 친 탐방로 입구(점봉산 생태관리센터)에서 주민등록증으로 예약 여부 및 신분을 확인하고, 체온을 재고, 마스크 착용 여부를 확인한 후에야 산을 오를 수 있었다. 청정지역을 보존하려는 관계 당국의 조치이니 뭐라고 할 말도 없다. ‘밀포드’는 하루에 50명밖에 못 들어가는데 그래도 이곳은 350명이나 들어가지 않는가. 시혜에 감사해야 하는 건가. 아무튼 들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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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리 ‘곰배령주차장’과 탐방로 입구]

 

   탐방로 입구에서 곰배령 정상까지는 두 갈래 길이 있는데, 계곡을 따라 난 길(아래 지도의 1코스)은 5.1Km이고, 능선 위로 난 길(아래 지도의 2코스)은 5.4Km이다.

   우리는 계곡을 따라 난 길로 올라갔다가 능선 위로 난 길로 내려오기로 했는데, 이게 오판이었다. 능선길은 오르막 내리막에 경사가 심한 곳, 계단이 이어지는 곳 등이 있어 무릎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 반면에 계곡길은 거리도 짧은 데다 시종 완만하고 정비가 잘 되어 있어(해발 1,000m가 넘는 산의 산길로는 고속도로 수준이다) 걷기가 편하다. 따라서 능선길로 올라갔다가 계곡길로 하산하는 것이 한결 수월하다. 겪어보고 나서야 아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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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배령 산행지도]

 

 

 

  계곡을 따라 난 길은 하늘을 가릴 정도로 활엽수의 숲이 우거져 한결 더위를 피할 수 있다. 더구나 길옆의 계곡으로는 산삼 썩은 청정수가 소리 내어 흘러 청량감을 더해 준다. 근래 비가 많이 온 탓인지, 본래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수량이 풍부하고 깨끗해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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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배령 가는 계곡길과 청정계곡]

 

  입구에서 2Km 정도 올라가면 강선마을이 나온다. 심심산골의 작은 마을이건만 전국에서 몰려드는 탐방객들을 맞이하느라 펜션이 곳곳에 있다. 그리고 이런 곳이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막걸리와 감자전을 즐길 수 있는 현대판 주막이다.

   산나물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 점봉산답게 곰취로 빚은 곰취막걸리와 산나물빈대떡이 일품이다. 산나물빈대떡의 맛에 취해 감자전은 뒤로 밀리고 말았다. 여하튼 곰취막걸리와 산나물빈대떡은 강추이다(막걸리는 도반들이 강추).

   그나저나 이 좋은 곳에서 이 좋은 술, 좋은 안주을 놓고 시 한 수가 없어서 되겠는가.

 

오늘도 좋은 날이요 이곳도 좋은 곳이

좋은 날 좋은 곳에 좋은 사람 만나 이셔

좋은 술 좋은 안주에 좋이 노니 좋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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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마을 안내판, 곰취막걸리와 산나물빈대떡]

 

   유유자적하며 걷다 보니 어느 순간 하늘이 보인다. 그리고 펼쳐지는 천상의 화원. 야생화 천국이다. 구름이 오락가락하여 시야가 흐렸다 갰다 하는 게 오히려 더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저 이름 모를 수많은 꽃들은 누구의 작품이런가. 곰이 배를 드러내고 누운 형국이라고 해서 곰배령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니 환웅의 작품인가, 아니면 이곳을 관장하는 산신령이 주최하는 야생화경진대회에 참가하려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인 것인가.

    꽃 이름을 하나하나 알지 못하여 ‘저건 꽃, 저건 풀’ 수준으로밖에 감상하지 못하는 무지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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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배령 고갯마루]


   곰배령 고갯마루임을 알리는 표지석에서 인증사진을 찍으려면 줄을 서야 한다. 요새 이름깨나 나 있는 산에 오르면 늘 겪는 일이다. 그래도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릴지언정 새치기를 하거나 빨리빨리 찍고 비키라고 재촉하는 사람들은 볼 수 없다. 오히려 뒷사람이 앞사람 사진을 이리저리 찍어주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이젠 우리 국민들도 그만큼 여유가 생긴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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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배령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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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화원]


   곰배령 정상의 야생화단지가 그리 넓은 것은 아니지만(영남알프스 사자평이나 민둥산의 억새 평원을 연상하면 안 된다), 단지 가운데에 나무데크 또는 야자매트로 탐방로를 내고 난간을 설치한 까닭에 야생화가 사람 손을 탈 일은 없다. “꽃을 꺾지 마세요”,“꽃밭에 들어가지 마세요” 같은 표지판이 없어도 너나없이 눈으로만 감상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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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화원에 설치된 탐방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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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배령에서 귀둔리로 하산하는 길은 거리가 3.7Km이다. 타고 온 차를 그쪽에 대기시킬 수만 있다면 그리로 하산하는 것도 방법일 듯하다.

   귀둔리 가는 갈림길의 이정표를 지나 오르막을 오르면 이내 진동리로 내려가는 능선길이 나온다. 이 능선길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점봉산 정상과 그 너머로 설악산 대청봉, 증청봉 등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나무데크를 널찍하게 깔아 놓아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 일행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여러 팀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 다른 곳을 골라 민생고를 해결했다. 대청봉은 오락가락하는 구름으로 인해 제대로의 선명한 모습을 끝내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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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둔리 가는 갈림길의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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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 있는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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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바라본 대청봉]

 

  계곡길에서는 몰랐는데, 능선길의 좌우는 곳곳의 땅이 파였다. 먹이를 찾는 멧돼지들의 소행이다. 멧돼지가 서울의 도심에도 출몰하는 판이니 이 깊은 산중에는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곳곳에 조심하라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

 

  능선을 따라 하산하는 길은 앞서 기술했듯이 무릎에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다소 지루한 느낌이다. 그 대신 계곡이 있는 곳까지 내려가면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고 땀을 식히면서 산행으로 쌓인 피로를 풀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우리 일행 말고는 지나는 사람도 없는 깊은 산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생태관리센터 직원이 마스크를 쓰라는 바람에 흥이 다소 깨지긴 했지만....
  그놈의 코로나19가 뭔지, 이런 깊은 산속에서도 마스크를 꼭 싸야 한단 말인가. 마스크의 답답함에서 탈출하려고 새벽부터 서둘러 이 구중심처(九重深處)를 찾은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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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에서의 탁족(濯足)]

 

   하산을 끝내고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오후 3시다. 곰배령 정상까지 왕복하는 데 보통 4시간 정도 소요된다는데, 더워서 걸음이 느려지기도 했고, ‘세월아 네월아’ 하다 보니 6시간 걸린 셈이다. 주차장을 막 벗어나는 순간,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이 무슨 조화인가. 마치 우리가 산행을 끝내기를 기다린 것만 같다. 도반 중 누군가가 평소에 덕을 많이 쌓은 모양이다.    

   원통의 오강원님 공장으로 이동하여 관리동에서 샤워를 하고 바비큐 파티를 하는 것으로 곰배령 산행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다음에는 점봉산 정상에 오를 것을 기약하면서.(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