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파타고니아, 마침내 그곳을 갔다!

 

   사주 속의 역마살 때문인지 운수납자로 국내의 이 산 저 산을 오르내린 지는 실로 오래 되었지만, 해외로 눈을 돌려 멀고도 먼 곳에 있는 산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은 불과 5년 전인 2014년 1월 히말라야를 가면서부터이다. 그리고 해외 트레킹의 횟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부지불식간에 머릿속에 자리 잡은 곳이 있었다. 전 세계 트레커들의 로망이라는 곳, 파타고니아가 바로 그곳이다. 

 

   그러나 정작 파타고니아는 남미의 맨 아랫부분에 있어 비행기를 세 번 타야 갈 수 있고, 그렇게 해서 가는 데만 30시간 걸릴 정도로 먼 곳이다. 그러다 보니 누구나 가고 싶다고 해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시간과 비용도 많이 들지만, 무엇보다도 가야겠다는 굳은 의지, 아니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대개 막연히 머릿속에서만 그릴 뿐 선뜻 나서기가 어렵다.
     
   그런 머릿속의 파타고니아를 발끝의 파타고니아로 현실화하려고 작년 3월에 시도했었는데, 성원 미달로 아쉽게 불발되었다. 그 후 다시 1년을 기다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꿈이 이루어졌다. 2019. 3. 11. 파타고니아를 향한 긴 여정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이래 산벗이 된 오강원님이 이번에도 도반이 되었고, 이에 더하여 해남 대흥사의 주지 월우 스님과 스님의 지인 김한옥님이 함께 했다.

 

   이번 일정은 다소 특이했다. 본래 3월 1일에 출발하여 29일간 남미 일원(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을 여행하는 팀(총 16명. 이하 ‘남미 일주팀’으로 약칭)이 있었는데, 우리 일행이 그들과 산티아고에서 합류하여 함께 파타고니아 트레킹을 한 후 헤어져 귀국하고, 그들은 남은 일정을 마저 소화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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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 전체 일정 개념도]

 


인천공항에서 산티아고까지

 

   2019. 3. 11. 오후 6시 30분 인천공항을 이륙한 델타항공 DL026편 비행기가 태평양을 건너 13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미국 애틀랜타 공항에 도착했다(현지시각 오후 7시). 이곳에서 칠레의 산티아고행 비행기로 환승해야 한다.

 

   그런데 환승을 위한 입국절차를 밟는 데만 2시간 넘게 걸렸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입국심사가 까다로워진 것을 아무리 감안한다 하더라도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는 입국행렬을 고려하면 심사창구를 늘려 입국자들의 편의를 도모할 만도 한데, 누가 오라고 했냐는 듯 한없이 기다리게 하는 불친절에 혀를 내둘렀다.

   세계 어디를 가나 갑(甲)과 을(乙)의 관계는 불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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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애틀랜타]

 

   애틀랜타 공항에서 입국심사를 마치고 다시 산티아고행 비행기를 탈 때까지 2시간 여유가 있어 저녁식사를 하려고 식당을 찾았으나, 이미 밤 9시가 넘은지라 대부분의 식당이 문을 닫았고, 맥도날드 햄버거가 유일한 대안이었다. 애틀랜타 공항은 그 크기에 비하여 면세점도 기대 이하였다. 해외 공항을 가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인천 공항만한 곳이 없다. 

 

   밤 11시 델타항공 DL147편 비행기를 타고 애틀랜타를 출발해 산티아고로 향했다. 밤12시에 기내식이 나왔지만, 이미 탑승 전에 햄버거를 먹었는지라 전채요리인 샐러드만 먹는 데 그쳤다(주식은 생선).

 

    9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산티아고에 도착하니 현지시각으로 2019. 3. 12. 아침 9시 30분이다.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이때까지 총 27시간이 걸렸는데 12시간의 시차 때문에 마치 15시간 만에 온 것처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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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틀랜타→산티아고]

 

    산티아고 공항의 입국심사는 애틀랜타와는 달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테러의 위험이 덜한 까닭이다.

    파타고니아 트레킹을 함께 할 남미 일주팀이 칠레 북부의 칼라마로부터 오전 11시에 도착했다. 이미 열흘 넘게 여행 중인데도 모두 활기찬 모습이다. 연령대가 대부분 60대임에도 이후 트레킹 내내 그들의 지칠 줄 모르는 활력에 감탄할 따름이었다. 하긴 한 달간 남미를 여행한다는 것이 보통 체력으로 될 일인가. 그것도 단순 관광이 아닌 트레킹을 겸한 여정인데 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이 오히려 도중에 합류한 우리 일행이 제대로 따라올 수 있으려나 걱정했다고 하니 혀를 내두를 일이다.   

 

   공항을 나서니 후끈하는 열기가 얼굴을 덮쳤다. 산티아고(Santiago)는 해발고도가 520m나 되는데도 기온이 섭씨 30도란다. 이곳은 아직 여름인 것이다. 지구 반대편의 쌀쌀한 서울에서 입고 온 옷이 부담스러워 파카를 벗고 등산조끼를 걸치니까 한결 견딜 만했다. 

 

   이날은 더 이상 비행기를 타지 않고 산티아고 시내 관광을 한 후 호텔에서 묵도록 되어 있어, 대기 중이던 관광버스를 타고 시내 중심가로 이동했다. 먼저 중앙상가로 가 그 안에 있는 식당(El Galas)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한국의 해물뚝배기 비슷한 음식이 나왔는데, 맛은 좋으나 양이 너무 많아 다 먹을 수가 없었다. 바야흐로 동방의 촌부에게는 양이 벅찬 서양음식에 익숙해져야 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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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의 중앙상가]

 

    중앙상가는 지붕이 있는 시장, 즉 바자르(bazaar) 형태이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내부를 둘러보았는데, 재래시장임에도 짜임새가 있어 보였다. 식당가도 있고 어시장도 있다. 만국기가 걸려 있는 곳에서는 태극기도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세계 어디를 가든 태극기를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만큼 세계 속의 한국이 된 것이다. 산업전선의 일꾼들과 K-팝으로 대표되는 한류 전도사들에게 감사할 일이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덕분에 촌부 같은 장삼이사가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게 된 데는 정치인도 아니고 법조인도 아닌 바로 그들의 공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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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상가 내부의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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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상가 부근 거리에서. 오강원님(좌), 월우 스님(우)과 함께]

 

    중앙상가를 벗어나 자연사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널찍한 공원 안에 자리 잡은 이곳에서는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칠레의 지질구조를 보여 주는 전시실이 우선 눈길을 끌었고, 칠레에 사는 동물들의 모형을 전시하는 공간에서는 무엇보다도 거대한 실물 고래 뼈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런가 하면 15,000년 전에 살았던 원시인의 유골이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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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 박물관 전경과 고래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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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0년  전 원시인의 유골]

 

   그 옛날에 살았던 이들과 지금 그들의 유골을 바라보는 촌부는 과연 무엇이 다르려나. 앞으로 다시 15,000년의 세월이 흐른 후의 후손들도 현세인의 유골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하려나...

   영양가 없는 상념을 뒤로하고 박물관의 문을 나서니 햇살이 따갑다. 어느새 나오셨는지 월우 스님이 공원 안의 노점상에서 사셨다면서 손목에 묶는 매듭을 건네신다. 부적 삼아 묶고 다녔다.

 

   1541년에 건설된 유서 깊고 넓은 산티아고를 반나절의 짧은 시간에 다 둘러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산티아고를 한눈에 다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갔다. 바로 산크리스토발 언덕(Cerro San Cristóbal)이다. 서울의 남산에 해당하는 곳이다. 지표면으로부터 정상까지의 표고차가 대략 350m 정도 된다.
     남산처럼 순환도로가 있어 버스를 탄 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말 그대로 주마간산(走馬看山. 아니 走車看市가 오히려 현대적인 표현으로 어울릴지 모르겠다)이었지만, 그 와중에 서민들의 주거지와 고급주택가가 확연히 구별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풍경이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전 세계의 큰 도시치고 안 그런 곳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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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크리스토발 언덕에서 내려다본 서민주거지와 고급주택가]

 

    산크리스토발 언덕에서 내려와 찾아간 곳은 야자수 등 나무가 우거진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이다. 산티아고의 중심부에 위치한 만큼 사람들로 북적였다.

    광장을 가운데 두고 대성당(Catedral metropolitana de Santiago), 중앙우체국, 역사박물관, 시청 등 스페인 식민지 시대 때 유럽풍으로 지은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특이한 조각도 눈에 띄었다. 대성당 안은 유럽의 성당들처럼 화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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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의 전면과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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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우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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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박물관(좌)과 시청(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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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스 광장의 조각]

 

   대성당 옆으로는 서울의 명동에 해당하는 번화한 거리가 바로 이어진다. 각종 명품가게들은 물론이고 다양한 종류의 상점들이 거리의 양옆으로 늘어서 있다. 그렇지만 애초부터 쇼핑은 예정에 없고 단지 산티아고 최고의 번화가를 거닐며 눈요기(Window Shopping)를 한다는 데 의미가 있었을 뿐인지라 거리 모습을 카메라 담는 정도로 그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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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의 번화가]

 

    번화가를 지나 인근의 대통령궁(모네다 궁전. La Moneda Palace)으로 갔다. 대통령궁 주변에는 각종의 다른  관공서 건물들도 들어서 있다. 이들 관공서들은 현대식 빌딩인 데 비하여, 대통령궁은 외양이 옛 유럽풍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시멘트 콘크리트로 지었다.

   대통령궁 바로 앞에 물이 찰랑거리는 사각형의 분수대가 있고, 그 앞에 근위병 한 명이 왔다 갔다 할 뿐 경비가 허술해 보였다. 분수대 앞은 넓은 잔디광장이다. 전쟁이나 테러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나라의 대통령궁인지라 시내 한복판에 있어도 특별히 경비를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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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궁]

 

    대통령궁을 끝으로 시내 관광을 마치고 한식당(하누리)으로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이제 겨우 대장정의 시작점에 와 있을 뿐이라, 벌써 한식을 찾을 일이 아니었지만, 남미 일주팀은 한국을 떠나온 지 이미 열흘이 넘은 까닭에 한식이 그리울 법했다. 돼지갈비와 된장찌개, 김치찌개, 빈대떡 등등 입맛을 당기게 하는 음식들이 허기진 배를 채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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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의 한식당 하누리]

 

    식사를 마치고 호텔(Grand Mercure Centro Hotel)에 도착하니 밤 8시가 넘었다. 호텔이 시내 중심가에 있는지라(아르마스 광장에서 멀지 않다) 웬만하면 시내 야경을 보러 나갈 만했지만, 오랜 비행시간과 시차로 인한 피로, 거기에 더하여 다음 날에는 새벽 2시에 일어나야 하는 빡빡한 일정 등을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아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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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어 호텔]

 

푼타 아레나스와 푸에르토 나탈레스

 

  2019. 3. 13.
  전날 기나긴 여정 끝에 겨우 호텔의 편한 잠자리에 들었나 했는데, 채 4 시간도 자지 못하고 다음 날 새벽 2시에 일어나야 했다. 새벽 3시에 아침식사가 로비에 준비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양승호 인솔자로부터 듣고 로비에 내려가 보니 빵과 과일, 오렌지 주스, 커피, 홍차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가뜩이나 새벽 3시의 이른 시각이라 식욕이 날 리가 없는데, 빵은 딱딱해서 먹을 수 없었고(이후 칠레에서 트레킹 도중 점심 도시락으로 나온 빵은 한결같이 그랬다. 오죽하면 '누가 먹을까봐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나보다'라는 농담을 했다), 과일은 일찌감치 내려와 진을 치고 있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거의 싹쓸이하다시피 한 상태였다. 그래서 오강원님이 한국에서 준비하여 온 미숫가루(‘하루한끼’라는 상표)를 더운 물에 타서 먹는 것으로 대신했다.

 

    새벽 3시 45분 호텔을 나와 산티아고 공항으로 향했다. 전날 애틀랜타에서 도착했던 그 공항이다. 이번에는 그 공항에서 국내선으로 타고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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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6시 10분 비행기를 타고 3시간 20분 걸려 아침 9시 30분에 푼타 아레나스에 도착하였다. 공항을 나서니 산티아고와는 달리 쌀쌀하다. 남극이 비행기로 두 시간밖에 안 걸리는 곳이니 당연히 그럴 만하다.

 

   푼타 아레나스!

 

   마침내 남미의 끝에 다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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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푼타 아레나스 공항]

 

    공항에서 마젤란해협이 지척이다. 지리 교과서와 역사책에서만 보았던 바로 그 해협이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이어주는 이 해협은 1520.10.21. 마젤란이 인도로 가는 항로를 탐험하던 중에 발견하였다. 당시 마젤란은 이 해협을 빠져나가는 데 36일이 걸렸고 악천후에 시달리다 드넓고 잔잔한 대양을 만나자 이를 태평양(el Pacifico)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마젤란은 이 해협을 지날 때 무척 힘이 들었다고 하는데, 촌부가 푼타 아레나스에서 접한 마젤란해협은 마치 절에 간 색시처럼 얌전했다. 나그네가 멀리 동방에서 30시간 걸려 찾아온 수고에 보답이라도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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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젤란해협]

 

      푼타 아레나스에 도착하였지만 파타고니아 트레킹 전진기지는 아직도 멀다. 버스를 타고 북서쪽으로 3시간 더 가야 한다. 푸에르토 나탈레스(Puerto Natales)가 그곳이다.

   이곳까지 가는 길의 차창으로 보이는 풍광은 삭막하기 짝이 없다. 나무도 자라지 않는 황량한 벌판이 이어진다. 비바람도 불어 더욱 을씨년스럽다. 그나마 중간 중간 나타나는 호수가 무료함을 달래준다. 특히 한 호수에서는 홍학이 떼를 지어 놀고 있어 나그네의 눈을 즐겁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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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토 나탈레스 가는 길의 모습]

 

     휴게소를 가기 위하여 도로변의 매우 작은 마을에 잠시 들렀는데, 그 마을의 작은 공원 같은 공터에 있는 동상이 눈길을 끌었다. 말 그대로 벽촌의 작은 마을에 웬 동상? 촌자는 호기심이 발동하면 참지 못하는 까닭에 그 동상에 가까이 가 보았다.

 

    스위스계 정치인으로 1964년부터 1970년까지 칠레의 대통령을 지낸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 (Eduardo Frei Montalva, 1911.1.16.~1982.1.22.)의 동상이었다. 그의 장남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Eduardo Frei Ruiz-Tagle)도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칠레의 대통령을 지냈다. 마치 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 부자(父子) 같다. 이 작은 산골마을에 왜 전직 대통령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는 것일까...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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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 대통령의 동상]

 

     오후 1시 무렵에 비가 내리는 가운데 마침내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도착하였다. 태평양에서 굴곡진 해안을 따라 내륙 깊숙이 들어온 곳에 위치한 바닷가 도시이다.

 

    이른 새벽부터 설치느라 절박해진 민생고를 우선 해결하기 위하여 식당(Restaurante Cormoran de Las Rocas)으로 갔다.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한 이 식당의 준비된 음식은 연어스테이크와 쌀밥이었다. 이후 계속된 일인데, 이번 일정에서 식사 때 육류(소고기나 양고기)든, 해물이든, 스테이크가 나올 경우에는 그 양이 엄청나(서양인 기준인 까닭이다) 평소 식사량이 적은 촌자는 늘 남겨야 했다.

    지구촌 곳곳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이들이 넘쳐나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아까운 일이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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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모란 데 라스 로카스 식당]

 

     점심식사 후 걸어서 인근의 호텔(Noi Indigo Patagonia)로 이동했다. 이 호텔 역시 바닷가에 있다. 이곳의 위도가 남위 51도 43분 39초임을 호텔 벽면과 입간판에 써놓은 것이 눈길을 끈다.
   호텔방에 짐을 풀어놓은 후 시내 구경을 나섰다. 도시 규모가 제법 크다. 빗방울도 오락가락하고 날씨도 쌀쌀해서인지 거리가 붐비지는 않았지만, 상점가가 바둑판 모양으로 반듯하게 조성되어 있다. 관광도시인지라 호텔, 식당, 카페 등이 많은데, 파타고니아 트레킹의 전진기지인 만큼 등산용품점들도 곳곳에 있다.

 

    파타고니아 로고가 새겨진 등산 모자를 하나 구입했다. 이후 바릴로체에서 다른 모자를 하나 더 사기 전까지 이 모자를 내내 쓰고 다녔다.  2개에 25불(오강원님도 하나 구입했다)이니 가격은 다소 비싼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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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토 나탈레스의 노이 인디고(Noi Indigo) 호텔과 그 앞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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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토 나탈레스의 거리 모 습]

 

     파타고니아(Patagonia) 로고가 새겨진 모자를 쓰니까 파타고니아 트레킹을 온 실감이 난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부는 폭이 점점 좁아지면서 긴 삼각형 모양을 띠는데, 파타고니아는 바로 이 삼각형 지역을 가리킨다. 대체로 남위 38°선 이남, 칠레의 푸에르토 몬트(Puerto Montt)와 아르헨티나의 콜로라도(Colorado) 강을 잇는 선의 이남 지역으로, 전체 면적이 100만 ㎢를 넘어 한반도 면적의 5배 정도 된다.
    파타고니아라는 명칭은 1520년 마젤란이 이곳을 탐험할 당시 원주민들의 커다란 발자국을 보고 ‘큰 발’이라는 의미의 ‘파타곤(patagón)’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다. 


    파타고니아는 서쪽은 안데스산맥이 남북으로 달리고, 동쪽은 대부분 고원지대이다. 안데스산맥을 기준으로 서부의 칠레 파타고니아(Patagonia chilena)와 동부의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Patagonia argentina)로 나뉜다.

    칠레 파타고니아는 강수량이 많고, 안데스 산지에 빙하의 침식 작용이 더해져 복잡한 해안선과 산악 지형이 특징이다. 반면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는 건조한 기후에다 대부분 넓은 고원이다.

    파타고니아는 칠레나 아르헨티나 모두 핵심 지역과 거리가 멀어 인구가 적고 큰 도시가 드물다. 밀 재배와 목축업, 석유와 천연가스의 채굴 등이 주요 산업이며, 최근에는 관광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시내 구경을 간단히 하고 돌아와 오후 6시에 호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메뉴는 농어구이. 역시 그 크기에 놀랐다. 월우 스님이 인천공항에서 사 온 김치가 인기를 끌었다. 어디를 가나 한국 사람들에게 최고의 인기메뉴는 역시 김치이다. 

 

     식사 후에 오강원님, 월우 스님, 김한옥님과 함께 다시 거리 산책을 나섰다. 저녁 8시가 넘도록 훤하다. 이곳저곳을 무작위로 거닐다가 화덕구이 피자집에 들어갔다. 손님이 보는 앞에서 거대한 화덕에서 피자를 구워내는 집이다. 요새는 서울에서도 화덕구이 피자집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관광객이 뿌리고 가는 돈이 주 수입원인 이 도시에서 달러화를 받지 않아, 새삼 남미의 끝 오지에 와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달러 대신 카드 결제는 가능하다. 바야흐로 세상 어디를 가나 카드 전성시대이다.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W 트레킹 1일차

 

  2019. 3. 14.
  마침내 파타고니아 트레킹이 시작되는 날이다. 아침 6시에 일어났다. 시차 때문에 아직은 밤에 잠을 설쳤지만, 공기가 워낙 좋은 곳에 와 있어서인지 몸은 상쾌하다. 뷔페식 아침식사를 마치고 8시에 호텔을 나섰다. 


   출발에 앞서 앞으로 4일간 산악지대를 트레킹 하는 동안에 필요한 짐을 따로 꾸려 더플 백(duffel bag. 여행사에서 미리 나누어 주었다)에 넣고, 나머지 짐은 캐리어에 넣어 분리하였다. 캐리어는 여행사 측에서 따로 보관하였다가 4일 후 칼라파테의 호텔에서 돌려주고, 더플 백은 트레킹 하는 동안 포터가 매일 산장에서 산장으로 운반하여 준다. 촌자를 비롯한 트레커들은 낮에 걷는 동안에 필요한 도시락, 옷, 비상약, 등산용품 등을 넣은 배낭만 지고 가면 된다.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1시간 30분 정도 이동하여 토로(Toro) 호수를 지나면 곧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토레스는 ‘탑’, 파이네는 ‘푸른 색’이라는 뜻) 국립공원에 도착한다. 빙하가 녹은 물로 채워진 이곳 파타고니아의 호수들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바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넓은 게 많다. 그래서 자연이 빚어낸 그 멋진 풍광에 넋을 잃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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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로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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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입구의 평원]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안에 있는 그레이(Lago Grey) 호텔에 도착하여 잠시 숨을 돌리면서 호텔 밖의 전망대로 나가 풍광을 바라보면 감탄사가 절로 난다. 바야흐로 설산과 호수가 연출하는 풍광을 접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 접하는 그 아름다움에 입이 벌어졌지만, 나중에 트레킹이 진행됨에 따라 계속 만나게 되는 설산과 호수에 비하면 사실 이곳의 풍광은 시작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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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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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과 호수]

 

    이제까지 타고 온 버스와는 작별하고 30분 정도 걸어서 유람선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갔다. 배를 타고 40분 동안 그레이(Grey) 호수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이동하는 것이다.
    유람선을 타고 가는 동안 전면과 좌우로 펼쳐지는 풍광은 가히 절경이다. 특히 전면의 설산과 그레이 빙하가 나그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산에서 떨어져 나와 호수 위에 떠 있는 빙하들을 볼 수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빙하의 눈에 보이는 부분은 전체의 1/5이라고 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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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호수의 유람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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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과 그레이 빙하]

 

    그레이 산장(Refugio Grey) 부근 선착장에 도착하여 유람선에서 내렸다. 여기서부터 말 그대로 두 발로 걷는 트레킹의 시작이다. 이 트레킹 코스를 ‘W 트레킹’이라고 한다. 트레킹 동안 숙박하거나 지나게 되는 그레이 산장, 그란데 산장(Refugio Paine Grande), 쿠에르노스 산장(Refugio Cuernos), 노르테 산장(Refugio Norte), 칠레노 산장(Refugio Chileno)을 잇는 코스가 W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w트레킹 개념도.jpg [토레스 델 파이네 W 트레킹 개념도]

 

     그레이 산장을 옆으로 지나 산길을 30분 정도 올라가자 그레이 빙하 전망대(Mirador Glaciar Grey)가 나왔다. 전망대라고 해서 무슨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고, 그레이 빙하를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일 따름이다. 빙하를 바라보며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했다. 마침 날씨도 따뜻하여 삼삼오오 모여 앉아 여행사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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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빙하 전망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도시락의 샌드위치빵은 정말로 맛이 없어 오강원님과 반씩 나누어 먹고, 초콜렛과 과자 등을 곁들였다.

   칠레 현지 가이드 에릭(Erick)과 후안(Juan)의 말에 의하면, 파타고니아의 변화무쌍한 날씨 때문에 그레이 빙하와 그 뒤의 설산을 볼 수 있는 날이 흔치 않다고 하는데, 이날은 저 멀리 이역만리에서 온 나그네들을 하늘이 돕는 것인지 날씨가 쾌청하여 제대로 즐길 수 있었다. 

 

   여유 있게 풍광을 감상하다 오후 3시에 이날의 최종 목적지 그란데 산장을 향해 출발했다. 거리는 11Km. 그레이 호수를 오른쪽으로 두고 왼쪽으로 파이네 그란데(Paine Grande. 3,050m) 산의 산록으로 난 둘레길을 걷는 것이다. 호수 건너편에는 2,500~2,700m 급의 설산들이 계속 이어진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산길을 앞에 가는 사람들과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걸으랴, 파란 하늘 아래 설산과 호수가 연출하는 풍광을 카메라에 담으랴, 반대 방향에서 오는 사람과 지나치며 인사하랴 경황이 없는데, 파타고니아답지 않게 맑은 날씨 속에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배낭을 멘 등에 땀이 차서 옷을 벗었다 입었다 해야 했다.
   산길을 걷는 도중에 비는 결코 환영할 게 못 되지만, 사람이 날아갈 정도라는 파타고니아의 유명한 바람만큼은 도대체 그 실체가 어느 정도인지 한번 경험해 보고 싶었는데, 야속하게도(?) 그 바람이 촌부의 바램을 외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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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과 산과 호수]

 

    걷는 중에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남아공에서 왔다는 한 청년은 한국어 인사말을 열심히 물어왔다. 자기가 아는 한국말이 맞는 것인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남미의 끝에서 아프리카의 끝에서 온 사람을 만나고, 더구나 그가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것을 보면서, 바야흐로 지구촌이 한 가족이 되는 시대의 복판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대략 3시간 반 걸려 오후 6시에 그란데 산장에 도착했다. 이 산장은 페오에(Pehoe) 호숫가의 넓은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남미 일주팀은 산장 안이 숙소였으나, 우리 일행 네 명은 뒤늦게 합류한 까닭에 산장 안에 빈 방이 없어 산장 밖 텐트촌에 짐을 풀었다.
   텐트가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아 잠자리가 다소 불편하긴 했지만, 산장의 다인실에 비하여 텐트는 1인용이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한테 방해를 받지 않는 이점이 있었다. 안데스산맥의 자락에서 텐트를 치고 잔다는 것도 또한 나름의 의미가 있는 추억거리였다. 더구나 텐트에서 잔 덕분에 다음날 아침 텐트촌 뒷산 위로 펼쳐지는 여명의 멋진 광경을 볼 수 있어 망외의 소득을 올렸다. 산장 안에서 잔 사람들에게 그 사진을 보여 주자 다들 놀라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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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36.jpg [그란데 산장과 텐트촌]

 

   산장 안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 8시에 뷔페식 식사를 한 후 잠시 담소를 나누다 텐트로 돌아왔다. 시차도 아직 극복되지 않은 상태이고, 물설고 낯설은 곳에서 침낭(텐트촌에 비치되어 있다) 안에 들어가 잠을 청하려니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전전반측으로 이리저리 뒤척이다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 W 트레킹 2일차

 

  2019. 3. 15.
  아침 6시에 텐트에서 나오니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일출이 진행됨에 따라 페오에 호수 주위가 붉게 물든다. 그리고 텐트촌 위의 뒷산 하늘에 햇빛과 구름이 어울려 무어라 형언키 어려운 장관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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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란데 산장의 여명]

 

   산장 안의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행장을 꾸리고 전원이 모여 간단한 체조로 몸을 푼 다음 8시 25분 산장을 출발했다. 최종 목적지인 노르테 산장까지는 27km로 이번 트레킹에서 하루에 걷는 거리 중 가장 길다. 소요시간은 약 10시간. 오르락내리락이 계속되는 산길의 평균 고도는 678m이다.

 

    페오에(Pehoe) 호숫가에서 출발하는데, 이 호수와는 이내 작별하고 스코츠베르그(Skottsberg) 호수 등 몇 개의 크고 작은 호수를 지난 후에는 거대한 노르덴스크홀드(Nordenskjöld) 호수를 계속 오른쪽으로 두고 걷는다.
   진행방향 왼쪽으로는 전날 본 파이네 그란데가 계속 따라오고, 전면으로는 쿠에르노스(Cuernos. 2,600m)봉우리가 내내 위용을 자랑한다. 1,200만 년 전에 생겼다는 이 봉우리는 정수리 부분이 검은색의 점판암이고 그 아래로는 흰색의 화강암인데, 생김새가 마치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 본 버섯바위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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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에르노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안의 산장 중 시설이 가장 열악한 이탈리아노 캠핑장 부근에 있는 프란세스 계곡(Valle Francés)에서는 설산과 빙하, 그리고 그것이 녹은 물이 콸콸 흐르는 계곡을 만나게 된다.  프란세스 계곡은 파이네 그란데와 쿠에르노스 사이에 형성된 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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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세스 계곡]

 

    어느새 시계바늘이 12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당초 예정은 설산과 빙하를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계곡 상부의 프란세스 전망대에 다녀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오후에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에 전망대 왕복은 포기했다. 대신 조망이 꿩 대신 닭 정도는 되는 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점심식사를 했다.

   설산과 빙하와 그것이 녹은 물이 흐르는 계곡, 히말라야처럼 8,000m 높이를 자랑하는 것도 아닌 2,500~3,000m급의 봉우리가 연출하는 이곳의 풍경을 무어라고 묘사해야 할까. 길섶에 풀썩 주저앉은 나그네의 옆에 놓인 배낭에 눈길이 간다. 역마살이 낀 주인을 만나 멀리도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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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심식사 후 쿠에르노스 산장을 거쳐 걷는 길에 가끔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렇다고 비옷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흐린 날씨 덕분에 덥지가 않아 걷기가 수월했다. 걷다가 돌아서면 파이네 그란데가 나를 두고 어디로 가냐고 소매를 부여잡고, 산길 왼쪽 쿠에르노스의 버섯봉우리와 오른쪽의 호수는 쉬었다 가라고 계속 손짓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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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에르노스의 버섯봉우리와 반대편의 호수]

 

     이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걷는데, 전날에 이어 이날도 화재로 인하여 죽은 나무들의 잔해가 늘어선 지대가 산객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자연발화라고 해도 안타까울 판인데, 등산객의 부주의로 인하여 불이 났다고 하니 이를 어쩌랴. 파타고니아에서는 이후에도 이런 지대를 종종 접하게 된다.
   아무리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곳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으면 그 가치가 알려지지 않고(꼭 알려져야 하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사람의 발길이 닿으면 인재(人災)가 발생하는 현실을 어떻게 조화할 거나.

 

파타고니아43-1.jpg [화재로 인해 죽은 나무들]

 

   얼마나 걸었을까, 호수를 옆에 끼고 산속으로만 이어지던 길이 끝나고 넓은 고원지대가 열렸다. 오후 5시 무렵이다. 큰 나무는 없고 선인장과에 속하는 야트막한 식물들이 고원지대를 덮다시피 했다. 다리가 아파 가이드 에릭에게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고 물으니까 1시간 반 정도 더 가야 한다고 한다. 야속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네그려. 하긴, 인생길이 본래 다 그런 게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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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지대]

 

   멀리 고원지대의 끝에 마침내 토레스 호텔이 보인다. 그 부근에 노르테 산장이 있다는 소리에 갑자기 다리에 힘이 솟는다. 모르는 사이에 왼쪽으로 토레 산군이 나타나 시야에 들어왔다. 다음날의 트레킹코스인 토레 3봉 중 두 개가 구름 속에서 들락날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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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레 산군]

 

    길고 긴 여정 끝에 저녁 6시 30분 노르테 산장에 도착했다. 바지와 등산화에 켜켜히 쌓인 먼지를 털고 산장 안의 6인실(2층 침대가 3개 놓여 있다)에 들어가 여장을 풀었다. 꼼짝도 하기 싫다. 8시로 예정되어 있는 저녁식사를 위해 산장을 나서려니(식당은 50여 미터 떨어진 별채에 있다) 굵은 빗방울이 쏟아진다. 천우신조이런가, 낮에 걷는 동안을 피해 밤이 되어서야 비가 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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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테 산장]

 

   식당이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온 등산객들로 붐볐지만, 우리는 여행사에서 미리 예약을 해 둔 자리에서 비교적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일행 중 한 분이 포도주를 사서 돌려 반주를 곁들였고(이후로는 저녁식사 때마다 돌아가며 한두 분이 포도주를 돌리는 게 관행처럼 되었다), 특히 ‘관세음보살’이라는 칭찬을 받은 한 여자분(이름은 밝히지 않는다)이 한국에서 가져온 팩소주를 내놓아 탄성을 자아냈다.

 

    이 분은 여행가방에 소주 말고도 컵라면, 볶은 김치, 햇반, 누룽지 등등을 가져와 여러 사람에게 보시하였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 탑승할 때 가방 무게로 인하여 추가비용을 냈을 정도이다. 그 가방은 말 그대로 보물창고이다. 본인보다는 남을 위해 그렇게 싸 들고 다니는 게 즐겁다고 한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저녁식사 후 샤워를 하고(산장에 더운 물이 나오는 샤워실이 있다) 잠자리에 누웠다. 피로가 쌓였던 것일까, 이내 잠이 들어 밤새 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 꿈나라를 헤맸다.

 

토레스 델 파이네 W 트레킹 3일차

 

   2019. 3. 16.
   이날도 아침 6시 기상이다. 밤새 비가 내렸으니 그만 그쳐도 되련만 여전히 내리고 있다. 아침식사를 하고 8시 45분에 길을 나섰다. W 트레킹의 화룡점정인 토레 3봉(Las Torres)을 보러 가는 것이다. 산행거리는 16Km. 오르막이 심하고 너덜길도 한참 걸어야 하기 때문에 전날보다 거리는 짧아도 강도는 만만하지 않다. 더구나 비까지 오지 않는가.

 

   이번 산행을 위해 위아래가 분리된 비옷을 새로 장만해 갔는데, 뒤집어쓰는 판초 우의보다 내부에 습기(몸의 더운 열기가 밖으로 배출되지 못하고 냉각된 것)도 덜 차는 데다 편하고 훨씬 실용적이다. 비가 가볍게 올 때는 웃옷만 입으면 되고, 많이 올 때는 바지가 등산화까지 덮어 발이 물에 젖을 염려도 없다(따라서 굳이 스패츠를 따로 착용할 필요가 없다).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을 산행할 때는 이런 비옷을 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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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레 3봉 가는 길]

 

   전날 온 길을 한동안 되돌아가다 계곡을 건너 갈림길에서 산 위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전날 막판에 고원지대를 걸을 때는 지루했었는데, 이날 미끄러운 산길을 위쪽을 향해 오르며 전날 걸어온 길을 내려다보려니 그 길이 편하고 좋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늘 그런 것이 인간사가 아닐는지. 그나마 칠레노 산장까지 가는 길은 평탄한 편이어서 말을 타고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돈을 내면 마부가 말에 태워 간다), 그 이후는 고행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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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과 함께 달리는 길]

 

   칠레노 산장까지 가는 동안 비가 오다 개다 한다. 온 천지가 구름에 덮였다 싶으면 불어오는 바람에 그 구름이 걷히고 선경이 나타난다. 구름 사이로 이따금 해도 얼굴을 잠깐 내밀다 들어가곤 한다.

 

    바람고개(Paso de los Vientos. Windy Pass)라는 표지판이 세워진 곳에 다다르니, 보이는 것은 구름뿐이고 들리는 것은 바람소리뿐이다. 풍운(風雲)에 잠긴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으로 서 있는 기분을 어찌 필설(筆舌)로 표현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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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고개]

 

     아직은 이른 오전 시간대임에도 벌써 하산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날 올라갔다가 칠레노 산장에서 자고 내려오는 사람들이다. 그 중에 한국인 젊은이들도 몇이 있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젊은 나이에 이곳까지 올 생각을 하다니... 산이 좋아 평생 떠돌아다닌 동방나그네도 그 나이에는 생각조차 못한 일이다. 참으로 대견하다.

 

   오전 11시 비를 맞으며 칠레노 산장에 도착했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이 산장은 계곡 바로 옆에 있어 운치가 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산 위의 빙하가 녹은 물이 섞인 감로수가 우렁찬 소리를 내며 계곡을 따라 흐른다. 그 모양을 볼작시면,
 
유수는 청산으로 휘돌아 이 골 물이 쭈루루루, 저 골 물이 콸콸,

열의 열두 골 물이 한 데로 합수쳐, 천방져 지방져 언덕져 구부져,

방울이 버큼져, 건너 병풍석에 마주 쾅쾅 때려,

대해수중으로 내려가느라고 버큼이 북적, 물너울이 뒤뚱,

우르르르 콸콸 뒤둥그러져,

산이 울렁거려 떠나간다.

아마도 예로구나, 요런 경계가 또 있나.     

 

판소리 수궁가(水宮歌)의 고고천변(皐皐天邊) 대목에 나오는 장면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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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50.jpg [칠레노 산장과 계곡]

 

   칠레노 산장에서 예의 맛 없는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12시에 다시 길을 나섰다. 토레 3봉을 본 후에 이곳으로 되돌아와 숙박을 할 예정이라 원하면 배낭을 두고 가도 되었지만, 촌부는 그냥 배낭을 짊어졌다. 도중에 일기 변화에 따라 갈아입을 옷도 필요하고 마실 물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무엇보다도 배낭 없이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은 안전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산장을 나섰는데 비가 여전히 내린다. 이제부터는 경사가 급하고 좁은 산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입에서 단내가 나게 걷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고 멀지 않은 곳에서 설산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때마침 비도 그쳤다.

 

   풍광이 좋은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월우스님은 달마대사의 현신이런가. 이틀 전 그란데 산장 텐트촌에서 무명씨(無名氏)에게 거액의 보시를 한 아픔을 초탈한 모습이다. 촌자도 비슷한 자세를 취해 보지만 속진(俗塵)의 켜켜이 쌓인 때가 묻어남을 어쩌랴. 그 세속의 때를 어떻게 씻어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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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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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우 스님 흉내를 내 보지만...]

 

고려말 공민왕 때 문신이었던 김제안(金齊顔: ?-1368)의 시를 떠올린다.

 

 

世事紛紛是與非(세사분분시여비)

十年塵土汚人衣(십년진토오인의)

落花啼鳥春風裏(낙화제조춘풍리)

何處靑山獨掩扉(하처청산독엄비)

 

옳으니 그르니 따지느라 세상은 어지럽고

십년 벼슬길의 속진(俗塵)입은 옷만 더럽혔네.

봄바람 속에 꽃이 지고 새는 지저귀는데

어느 청산에서 홀로 사립문 닫고 지낼거나.

 

   비록 때는 못 씻었지만,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한 후 각오를 새롭게 하고 일어났다. 이제부터는 급경사의 너덜지대가 이어지고, 그리로 난 길을 한참 올라가야 비로소 토레 3봉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덜지대를 오르다 보니 지난해 히말라야 랑탕에 갔다가 체르코리 정상 못 미쳐서 너덜지대를 오르느라 고생한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그 히말라야에 다시 가고 싶다.

    비가 그치고 해가 쨍하고 빛나니까 배낭을 멘 등에 땀이 찬다. 숨은 가쁘고, 땀은 나고, 발은 무겁고... 이역만리까지 와서 이 무슨 사서 고생이람.

 

   숨이 턱에 닿을 무렵 마침내 토레 3봉 전망대에 도착했다. 바로 눈앞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거대한 암봉 세 개[북봉(2,260m), 중봉(2,850m), 남봉(2,500m)]. 그 밑의 빙하, 그 빙하가 녹아 폭포를 이루며 내리는 물이 만든 깊이를 알 수 없는 초록색 호수... 그저 ‘멋지고 굉장하고 신비스럽다!’는 감탄사 외에 무슨 말을 하랴. 

   암봉만 세 개 우뚝 서 있는 돌로미테의 트레치메는 이곳에 비하면 밋밋한 셈이다. 접근성이 돌로미테만 하다면 아마도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지 않을까 싶다. 이런 장관을 남미의 끝 이곳에 배치한 것은 그런 점을 고려한 신의 한 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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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54.jpg [토레 3봉과 호수]

 

    파타고니아의 정통 거센 바람은 아니지만, 지대가 높은 탓인지 바람이 그래도 강하게 분다. 올라오느라 벗었던 등산자켓을 꺼내 입어도 춥다. 오래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다리에 힘이 풀린 상태에서 다시 너덜지대를 지나 칠레노 산장까지 되돌아 내려갈 길도 멀다. 그래도 전날부터 내리던 비가 그친 것만도 다행이다. 비가 오면 토레 3봉이 구름에 가려 못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레이 빙하 전망대에서도 그러더니 이번 트레킹 여정에는 하늘이 돕는지 날씨가 좋아 한몫 했다. 

 

   토레 3봉의 모습을 눈 속에 담고 카메라에 담고 담은 채 하산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칠레노 산장에 도착하니 오후 5시다. 숙소는 전처럼 6인실이다. 샤워를 하고 7시에 저녁을 먹은 후 잠시 쉬다가 잠을 청했다. 산장의 내부 게시판에 걸린

 

“우리가 정복하는 것은 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It’s not the mountain we conquer but ourselves)”

 

라는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의 명언을 음미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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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노 산장의 내부 게시판]            

 

토레스 델 파이네 W 트레킹 4일차
 
   2019. 3. 17.
   어김없이 아침 6시에 일어났다. 전날 날씨 탓에 토레 3봉을 못 본 경우에는 오전에 다시 올라갔다 오는 것이 보통이지만, 우리는 전날 제대로 보았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었다.

 

   아침식사를 하고 8시 30분에 칠레노 산장을 출발했다. 목적지는 전날 아침에 떠나왔던 노르테 산장 부근이다.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아르헨티나의 칼라파테(Calafate)로 이동하면 하루 일정이 끝난다. 

 

   칠레노 산장에서 노르테 산장으로 가는 하산길에도 한동안 비가 왔다. 그 비가 개고 구름이 걷히자 높은 산과 고원지대가 자태를 드러내고 떠나는 동방나그네들을 환송한다. 나그네 역시 이곳을 떠나기가 아쉬워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급기야 가이드 후안이 시간이 없다고 재촉한다. 그래 갈 사람은 가야지 않겠나.

 

   그나저나 워낙 공기가 맑은 곳이지만, 비가 막 갠 후에는 더욱 상큼하여 절로 심호흡을 하게 된다. 말 그대로 대자연과 함께 호흡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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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노 산장에서 노르테 산장으로 내려가는 하산길]

 

   오전 11시에 아르헨티나로 떠나는 버스에 올랐다. 약 한 시간 정도 달려 국경에 도착했다. 칠레 출국이나 아르헨티나 입국이나 절차가 까다로운 것은 아닌데, 업무를 수동으로 처리하는지라 시간이 다소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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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아르헨티나 출입국사무소]

 

   아르헨티나로 들어서자 풍광이 이제까지와는 판이하다. 높은 산 대신 광활한 대지가 펼쳐졌다. 가도 가도 지평선이 이어진다. 농작물을 심은 것도 아닌 그야말로 거친 광야이다. 그 광야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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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문득 어느 노랫말이 떠올랐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러 왔느냐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평생
                [윤심덕의 ‘사(死)의 찬미’ 중에서]

 

   인적이 없는 누런 벌판에는 가을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 벌판에서는 돈도 명예도 다 부질없는 허상일 뿐이다. 그곳에 동방나그네는 무엇을 찾으러 왔는가.

 

"이 뭐꼬~?"

 

    오후 5시에 칼라파테의 호텔(Alto Calafate Hotel)에 도착하였다. 마침내 산장 생활을 청산하고 이제부터는 편하게 잘 수 있다. 아르헨티노(Argentino) 호숫가의 언덕에 자리한 이 호텔은 고층의 콘크리트 건물이 아닌 알프스의 산장 풍으로, 널찍하고 쾌적했다. 내부 시설도 훌륭하다. 호숫가로 지는 저녁노을도 일품이다. 

 

   오후 7시 30분에 호텔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는데, 주 요리로 나온 연어스테이크가 하도 커 아깝지만 결국 남겨야 했다. 함께 나온 말벡(Malbec) 포도주는 무한리필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적어도 잠자리와 식사 걱정은 안 해도 되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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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토 칼라파테 호텔과 저녁노을]

 

페리토 모레노 (Perito Moreno) 빙하

 

   2019. 3. 18.
   이날은 비교적 일정에 여유가 있는 날이다. 하지만 6시 기상 8시 출발의 패턴에는 변함이 없다. 대기 중이던 버스를 타고 로스 글라시아레스(Los Glaciares) 국립공원(=빙하국립공원. 1981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자연유산이다)의 주인공인 페리토 모레노 빙하를 보러 갔다.

 

   날씨가 꽤 쌀쌀한 가운데 아르헨티노 호수(이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빙하호수로 길이가 무려 160km이다)를 끼고 한 시간 반 정도 가자 선착장이 나왔다. 이곳에서 유람선을 타고 페리토 모레노 빙하로 가까이 다가가 사진에서나 보던 모레노 빙하를 바로 코앞에서 직접 보는 것이다. 유람선을 타는 시간은 대략 40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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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노 빙하 조감도 및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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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64.jpg [유람선에서 본 모레노 빙하]

 

   푸른빛이 감도는 흰색의 거대한 빙하절벽 앞에 서면 전율이 느껴진다. 거대한 성벽 앞에 선 느낌이다. 그 얼음성벽 앞에 떠 있는 유람선은 한낱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배에 탄 인간의 왜소함은 또 어떤가.
   태평양을 건너온 습기 먹은 구름이 안데스 산맥에 부딪쳐 눈을 토해 놓고, 그 눈이 얼고, 그 위에 다시 눈이 내려 쌓이기를 반복하며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시간의 결정체가 바로 이 빙하 아니던가. 저 신비하기까지 한 푸른빛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 빛, 그 빙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는 1877년에 아르헨티나의 탐험가 프란시스코 파스카시오 모레노(Francisco Pascasio Moreno)가 발견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길이 35km, 폭 5km, 수면 위의 높이 70m(수면 아래로는 100m)인 이 빙하는 남극과 그린란드의 그것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빙하로서, 1981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으로 빙하는 2500m 이상의 높은 곳에서 형성되는데, 모레노 빙하의 해발고도는 1500m에 불과하다. 저지대임에도 이곳에 빙하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건 남극에 가까워 겨울에 극한의 추위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구 온난화가 현재 속도로 계속된다면 반세기가 지나기 전에 이 빙하는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유람선에서 내려 다소 이르기는 했지만 버스를 타고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바로 직전에 배를 타고 보았던 그 빙하를 바라볼 수 있는 호숫가에 자리한 식당(Nativos de la Patagonia)이다. 기가 막힌 곳에 위치한 식당에 걸맞게 음식도 맛이 괜찮았다. 이제는 관광 비수기에 접어들은 데다 이른 시각이어서인지 손님은 우리 일행뿐이다. 식당의 수지타산이야 우리가 신경 쓸 바 아니니 여유를 가지고 호젓하게 점심을 즐겼다. 더구나 도시락에서 해방된 것만도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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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vos 식당의 전경과 내부]

 

    식사를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올라 모레노 빙하 주위를 산책로를 따라 둘러보는 곳으로 이동했다. 유람선을 타고 보는 것이 빙하를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이라면 이 산책로에서 보는 것은 빙하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빙하가 덮여 있는 계곡을 멀리까지 볼 수 있어 빙하의 규모를 어림잡을 수 있기도 하다. 

 

    산책로가 나무 난간으로 잘 정비되어 있어 관광객들로 붐비는데, 빙하의 이모저모를 잘 살펴볼 수 있는 데서 한걸음 나아가, 이따금 빙하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직접 목격할 수 있기 때문에 모두 난간에 기대어 열심히 관찰한다. 카메라에 동영상으로 담아보려고 애쓰지만 쉽지 않다. 예고 없이 순식간에 떨어지는 까닭이다. 그런데 그 소리가 무척 요란해 마치 천둥이 치는 것 같다. 난간을 따라 오르내리다 보면 2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사실 이곳 빙하 관광의 백미는 빙하 위를 걷는 것으로, 현지 인솔자의 인도 하에 트레킹하는 상품이 있다. 그러나 65세 이상은 참여가 안 되는 데다(평등권 침해로 위헌 아닌가?), 주어진 시간도 넉넉하지 않아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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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에서 본 모레노 빙하]
 
   오후 2시 30분, 빙하 구경을 마치고 엘찰텐(El Chalten)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4시간 반은 가야 한다. 도중에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광활한 평원, 넓은 호수, 그 뒤로 보이는 안데스산맥의 높은 산들을 계속 만나게 된다. 다음날부터 이틀간 트레킹을 하게 될 피츠로이와 세로토레도 먼발치에서 볼 수 있다. 석양에 두 봉우리가 연출하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좁은 땅에서 아옹다옹 다투면서 살아야 하는, 그것도 상존하는 전쟁의 위험을 안고 사는 백성에게 이곳의 드넓고 평화스런 풍경은 그저 부러움의 대상이다. 참으로 축복받은 곳이 아닐는지.

   그렇지만 후술하듯이 페론이 망쳐 놓은 경제로 인해 오래도록 시름을 앓고 있는 곳이라는 게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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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찰텐 가는 길의 주위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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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빛을 받으며 멀리 피츠로이와 세로토레가 보인다]
 

    저녁 7시, 엘찰텐에 도착했다. 이곳은 10여 년 전만 해도 일주일에 두 세편의 버스만 다니던 그야말로 깊은 산골의 조용한 마을이었다. 그렇게 작았던 동네가 지금은 피츠로이와 세로토레를 찾는 트레커들에게 성지가 되었다. 호텔과 식당, 카페, 등산용품점들이 줄줄이 들어서 있다. 물론 그렇다고 거리가 북적거리거나 혼잡한 것은 아니다. 산촌의 아늑함과 도시의 편리함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오래 머무르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휴양지로도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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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찰텐]

 

     자그마하지만 시설이 훌륭하고 정갈한 호텔(Chalten Suites Hotel)의 식당에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 주식(소고기 스테이크)이 나오기 전에 김밥이 나온 것이다. 그것도 가지, 호박 등 여러 나물과 함께. 호텔 측에서 특별히 직접 만든 것이라는데, 맛을 제대로 냈다.  소고기 스테이크도 맛이 좋았다. 거기에 월우스님이 가져오신 동방미인(東邦美人) 청차를 곁들이니 금상첨화였다. 음식을 나르는 아가씨가 매우 상냥하고 친절했는데, 절친이 한국인이라고 한다. 

 

   저녁 식사 후 엘찰텐 로고가 들어있는 모자를 하나 살까 하고 기념품 가게와 등산용품점에 가보았으나. 시간이 늦어서 상점이 모두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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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lten Suites 호텔]

 

피츠로이(Fitz Roy) 트레킹

 

  2019. 3. 19.
  예외 없이 아침 6시에 일어나 식당에서 간단히 뷔페식 아침식사를 했다. 이곳 호텔에서 하루 더 묵기 때문에 이날은 배낭만 간단히 꾸리면 되었다. 목적지는 피츠로이(Fitz Roi) 산이다.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빙하국립공원)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3,405m)를 보러 가는 것이다. 산행 거리가 총 21Km로 만만치 않다. 9시간을 걸어야 한다.

 

   오전 8시 30분 호텔을 나서서 대기하고 있던 마이크로버스에 올랐다. 산행 출발지인 호스테리아 엘 필라(Hosteria El Pilar)까지 가는 길이 좁아 대형버스가 못 가기 때문에 여행사에서 대체수단을 마련한 것이다.

 

    마이크로버스에서 내리니 현지 산악가이드 두 명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스트레칭으로 간단히 몸을 풀고 9시에 산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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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의 북쪽에 자리한 피츠로이는 1981년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산이다. 상어 이빨처럼 하늘을 물어뜯을 듯 솟아 있는 산군의 중앙에 위치한 피츠로이는 거칠고 바람이 드센 남부 파타고니아의 최고봉이다.

 

    빙하 위로 솟은 뾰족한 산의 주변이 언제나 구름에 덮이고 눈이 흩날려, 이곳에 처음 정착한 원주민들은 이 산을 ‘연기를 내뿜는 산’이라는 뜻의 '엘찰텐(El Chalten)'으로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그 이름이 산에서는 사라지고, 대신 마을 뒤로 그 산의 정상이 보이는 마을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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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뒤로 피츠로이 산군이 보이는 여명의 엘찰텐 ]
 

   호스테리아 엘 필라에서 피츠로이로 가는 등산로는 잘 정비되어 있어 걷기가 편하다. 거목들이 빼곡한 등산로로 접어들어 얼마 가지 않아 피츠로이와 주변의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다섯 개의 봉우리가 마치 오봉능선처럼 늘어서 있다. 그 중의 백미인 피츠로이는 언뜻 보면 북한산 인수봉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슷하다. 그 모습을 클로즈업하여 찍은 사진을 일행에게 보여 주며 인수봉 사진이라고 하니까 정말 그런 줄로 알고 믿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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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로이의 오봉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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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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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로이와 피에드라스 블랑카스 빙하]

 

     피츠로이 밑으로 달리는 피에드라스 블랑카스(Piedras Blancas) 빙하와 그에 이어지는 호수를 보고 멋지다고 감탄하며 다 온 줄 알았더니, 산악가이드 말이 진수를 보려면 아직 멀었다고 한다. 어째 힘들이지 않고 너무 싱겁게 왔다 했더니...

 

   나무가 우거진 등산로를 한동안 걷는데 갑자기 넓은 초원(스텝)이 나타났다. 이건 뭐지? 하면서 발걸음을 옮기려니 가이드 말이 이 초원을 가로 질러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면 진짜 등산로가 나온다고 한다. 경사가 급한 깔딱고개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너덜지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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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지대와 깔딱고개]

 

        파타고니아의 그 유명한 거센 바람이 도대체 어디로 휴가를 간 걸까. 피츠로이로 향하는 길목의 마지막 고비인 너덜지대 깔딱고개를 오를 때는 구름 한 점 없는 초가을의 내리쬐는 따가운 햇볕에 땀이 줄줄 흐르건만 바람 한 점 불 생각을 안 한다. 

   비도, 눈도, 바람도, 구름도 없는 파타고니아라니, 참으로 믿기 힘든 날씨이다. 각오했던, 그래서 대비했던 궂은 날씨 대신, 너무나 청명한 날씨가 오히려 나그네를 당혹하게 한다.

 

   이탈리아에서 온 젊은 부부를 따라온 두 살밖에 안 된 어린 아이가 씩씩하게 걷는 모습에서 힘과 용기를 얻는다. 어떤 사람은 이 길을 두고,

 

“끝을 알 수 없는 인생길에 비하면,

 목적지가 어디인지 이미 알고 가는 이 길은 얼마나 자비로운가.”

 

라고 표현했다(김석원 외 2인 공저, 세상의 끝 남미 파타고니아, 176쪽).

그의 말대로, 복잡하던 생의 희로애락이 단순명료해지는 산길이 아닐는지.

 

   힘들여 한 발짝 한 발짝 오르는데, 어느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장엄한 모습! 피츠로이와 그 밑의 트레스(Los Tres) 호수가 오느라고 수고했다는 듯 반가이 맞는다.

   낮 12시 45분. 가까이에서 본 피츠로이는 거대한 암괴였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좌우에 형제를 거느리고 우뚝 선 암괴!

   피츠로이의 빙하가 녹은 물이 만든 초록색 트레스 호수는 토레3봉 밑의 호수보다는 규모가 작았다. 그렇지만 높은 산이 있고, 빙하가 있고, 그 빙하가 녹은 물이 고인 호수가 있는 파타고니아의 전형적인 풍광이 주는 매력은 토레3봉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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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로이와 트레스 호수]

 

   엘찰텐의 호텔에서 만들어 준 점심도시락 샌드위치빵은 칠레 산장의 그것에 비하여 맛이 조금 나았지만,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이번에도 오강원님과 반반씩 나누어 먹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연기를 뿜는 산’이 연기를 뿜을 생각을 전혀 안 하고, 맑디맑은 푸른 하늘 아래에서 마음껏 멋진 자태를 연출하는 멋진 풍광에 눈이 즐거우니 배도 덜 고프다.  

 

   실로 보기 드문 날씨라고 현지 산악가이드조차 감탄하는 쾌청한 날씨 덕분에 피츠로이의 진면목을 아낌없이 다 본 후 하산을 서둘렀다. 하산 길임에도 여전히 덥다. 차라리 비바람이 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이다.

 

   깔딱고개를 내려와 온 길로 되돌아가는 대신 엘찰텐으로 직접 걸어서 가는 길을 택했다. 트레킹하러 와서 또 차를 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원지대로 난 이 길은 비교적 평탄한데, 한참을 걸어도 뒤를 돌아보면 피츠로이가 계속 따라온다. 인근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보니 웬만한 곳에서는 다 보이는 것이겠지만, 그보다는 아마도 동방나그네를 떠나보내기가 싫어 붙잡으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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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오는 피츠로이]

 

 시조 한 수를 떠올린다. 

 

이시렴 부디 갈다 아니 가든 못할쏘냐
무단히 슬트냐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려도 하 애닯고야 가는 뜻을 일러라

 

     싫어서도 아니고 남의 말을 들어서도 아니다. 나그네는 오히려 얼마든지 더 있고 싶은데, 주어진 일정이 허락하지 않으니 어쩌랴. “거자필반(去者必返)이니 다시 오리다!” 하고 외치고 싶지만, 내 삶이 다하기 전에 이 먼 곳을 다시 올 수 있으랴 싶어, 그냥 가슴속에 담아둔 채 발걸음을 재촉한다.

 

     따스한 햇살을 등에 받으며 얼마를 걸었을까, 산 반(半) 호수 반(半)의 파타고니아답게 등산로 옆으로 커다란 호수가 하나 나타났다. 물이 하도 맑아 바닥이 다 보인다. 그 위로 설산의 모습이 겹쳐지니 한 폭의 동양화이다. 아픈 다리도 재충전하고 땀도 식힐 겸 쉬어가기로 했다.

 

    등산화를 벗고 호수에 발을 담갔다. 빙하 녹은 물이라 당연히 얼음장처럼 찼지만, 그 차가움이 오히려 발의 피로를 풀어주었다. 등산길에 즐기는 탁족(濯足)의 맛은 해본 사람만이 안다. 지금 이 순간 지분(知分)과 안분(安分)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랴. 분수를 알고 분수에 만족하니 즐거움이 또한 그 안에 있구나(樂亦在其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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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 호수에서의 탁족]

 

    산을 넘고 고원지대를 지나 엘찰텐에 다다를 즈음에, 그랜드 캐년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계곡이 발아래 시야에 들어왔다. 계곡 안에는 강(개울?)이 흐르고 널찍한 초원이 펼쳐져 있다.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 산 위로는 구름이 한가로이 떠돈다.

 

   일행이 다 떠나도록 한동안 바위에 걸터앉아 그 풍경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그렇지 아직 갈 길이 남았지. 이 계곡이 끝나는 지점에 엘찰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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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계곡]

 

    오후 6시, 엘찰텐에 도착하였다. 저녁식사(7시) 전까지 시간이 있어 시내를 둘러보았다. 다음날이면 떠나야 하는지라 이 작고 한적하고 평화로운 도시의 이모저모를 더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념품 가게도 들러보았으나, 털모자를 하나 산 것 외에는 딱히 ‘이거다’ 하고 살 만한 물건이 없었다. 문득 고개를 드니 뒷산 너머로 피츠로이의 정상부위가 석양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호텔의 식당에서 저녁으로 나온 닭고기구이 역시 너무 커서 촌자는 반만 먹는 것으로 그치고, 전날처럼 월우 스님이 타 주신 동방미인차를 마시며 엘찰텐의 깊어가는 밤을 보냈다.  

세로토레Cerro Torre) 트레킹

 

   2019. 3. 20.
   이번 파타고니아 일정 중 트레킹으로는 사실상 마지막인 날이다. 기상과 식사 출발은 전날과 동일했다. 이날 트레킹 목적지는 세로토레(Cerro Torre. 3,102m) 산이다. 산행거리는 22Km, 예정 소요시간은 7시간.

   전날과 달리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은 없고, 호텔을 나서서 시내를 가로질러 곧바로 산길로 접어든다. 이 길에서는 처음에는 어제 본 피츠로이를 계속 오른쪽으로 보면서 걷는다. 세로토레 산은 한참 후에나 나온다. 사실 두 산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데, 접근로는 전혀 다르다.

 

   남부 파타고니아에서 가장 멋진 장관을 자랑하는 산 중의 하나인 세로토레는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영토분쟁을 빚는 지역에 있다. 세로토레를 비롯하여 4 개의 산이 연봉을 이루는데, 그 중 세로토레가 가장 높다. 워낙 뾰족한 암봉이라 지구상에서 가장 오르기 어려운 봉우리 중 하나로 꼽힌다. 첫 등정이 이탈리아 등반대에 의하여 1974년에야 비로소 이루어졌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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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토레 가는 길에서]

       

   세로토레를 향해 숲속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에는 유난히 송충이가 많이 떨어져 있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송충이의 색깔이 까맣다. 얼핏 보면 작고 가느다란 나뭇가지 같다. 대부분 죽은 사체들인데 일부는 살아서 꿈틀거린다.

   촌부는 잠시 쉬는 동안에 세워 놓은 등산스틱에 이 송충이가 떨어져 있는 것을 나뭇가지인 줄 알고 맨손으로 쓸어내리다가 손바닥을 송충이한테 쏘여, 귀국 후에도 한동안 가려움증에 애를 먹었다.   
 
    그 등산로에서 호주에서 온 젊은 부부를 만났다. 놀랍게도 그들은 생후 두 달밖에 안 된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다. 파타고니아의 최연소 트레커로 기네스북에 등재해도 될 법하다.

    그런 아이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 이 험준한 곳을 찾아온 그들의 용기가 참으로 놀랍다. 호주가 이웃에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울러 그 산모의 건강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한국 여인 중에 출산 후 두 달 만에 이런 여행을 나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니 도대체 있기나 할까.

 

    그런가 하면 독일인 남녀 한 쌍을 만났는데,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외양을 보고 부녀지간이냐고 물었더니 친구 사이라고 한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히말라야나 알프스, 그리고 이곳 파타고니아, 어디를 가든 지구촌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게 해외 명소 트레킹의 매력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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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2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온 호주인(상)과 친구 사이의 독일인 남녀(하)]

 

   전날처럼 바람도 없는 화창한 날씨의 축복을 받으며 계속 걷다보니 마침내 세로토레가 시야에 들어온다. 피츠로이 산만큼은 아니어도 이곳 역시 마지막에는 깔딱고개를 올라서야 세로토레 산군과 그란데 빙하(Glaciar Grande), 그리고 그 밑의 토레 호수(Lago Torre)를 만나게 된다. 

 

   11시 45분 토레호숫가에 도착했다. 산과 빙하, 호수는 이젠 익숙한 풍경이다. 그런데 이 세로토레 산의 모습이 기이하다. 마치 역사물 중국영화나 사극에 나오는 고관대작의 모습이다. 앞뒤의 산들은 그 부하들처럼 조아리고 있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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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89.jpg [세로토레와 토레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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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월우 스님, 촌자, 오강원님, 김한옥님]

 

    예의 맛없는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잠시 머물다가 하산했다. 이날은 올라온 길로 온전히 되돌아가 엘찰텐으로 복귀하도록 되어 있다.

 

    트레킹으로서는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하산길에 보이는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되돌아서서 세로토레와 새삼 작별인사를 하기도 하고,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가에 닿아있는 산, 그 밑에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석별의 정을 나누며, 다시 보기 어려운 원시 자연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차라리 비바람이 치면 앞만 보고 가기 바빠 정신이 없었을 텐데... 너무도 쾌청한 날씨가 떠나야 하는 나그네로 하여금 괜스레 상념에 잠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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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토레에서 내려오며]

 

      오후 3시 10분, 엘 찰텐의호텔에 도착하여 아침에 맡겨 둔 짐을 찾아 대기 중이던 버스에 실었다. 이틀 전에 떠나온 칼라파테로 돌아가는 것이다. 대략 3 시간 걸려 칼라파테에 도착하였고, 전에 묵었던 호텔(Alto Calafate Hotel)에 다시 투숙했다.
   도중에 잠깐 들른 도로변 휴게소의 앞마당에 세계의 14개 주요도시까지의 거리를 표시한 이정표가 있었는데, 서울이 두 번째로 표시되어 있었다(거리 17,931km). 파타고니아 고원 지대의 조그만 휴게소에까지 서울이 알려져 있다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여야 하나 모르겠다. 바야흐로 21세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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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표]  

 

    저녁 8시, 맛없는 도시락에 허기진 위장을 달래 주기라고 하려는 듯, 양승호 대리가 인솔하는 대로 버스를 타고 간 저녁식사 장소(아사도)는 한 마디로 고깃집이다.

    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구이가 무한리필의 샐러드와 함께 나오는데, 그 엄청난 양에 놀라기도 하였지만, 맛 또한 기가 막혀 다시 놀랬다. 그래서일까, 칼라파테의 중심가로부터 제법 떨어진 외곽에 자리 잡고 있는데도 많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고깃집의 식당 홀에서 간이식으로 탱고 춤을 보여주는 것도 이색적이다. 


     식사 후 호텔로 돌아오니 밤이 한참 깊었다. 이 밤이 지나면 남부 파타고니아는 추억 속의 장소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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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파테의 고깃집]

 

바릴로체(Bariloche)

 

  2019. 3. 21. 
   서울을 떠난 후 어느 새 열하루 째가 되는 날이다. 칼라파테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북부 파타고니아의 바릴로체(Bariloche)로 이동하는 게 주된 일정이다.
   이제까지 늘 그랬던 것보다 한 시간 늦은 아침 7시에 일어나 호텔에서 뷔페식 아침식사(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음식 종류가 다양하여 풍요롭다)를 하고 9시에 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12시 45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야 해서 여유 있게 길을 나선 것이다. 공항은 시골 공항 치고는 제법 붐볐다. 전광판을 유심히 보니 국제선도 오간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타고 갈 비행기가 한없이 늦어지는 것이었다. 언제 출발한다는 안내도 없이 무작정 기다리라고 하더니, 결국 예정보다 무려 3시간 30분이나 늦은 오후 4시 15분에야 비행기가 출발했다. 그 바람에 바릴로체에 도착하여 보내기로 예정되어 있던 자유시간이 없어지는 참사가 빚어졌다. 

 

   그렇게 사람을 오래 기다리게 한 비행기의 기종이 보잉 737-800이라는 것을 알고 가슴이 철렁했다. 요새 툭하면 사고가 나는 그 보잉 737 Max 아닐까? 검색하여 보니 다행이도 다른 기종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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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파테 공항]

 

    1시간 45분 비행하여 오후 6시에 바릴로체(Bariloche)에 도착했다. 대기 중이던 버스에 올라 시내 중심가에 있는 호텔(NH Edelweiss Hotel)에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방이 널찍하고 쾌적하여 좋았는데, 8시에 저녁식사를 하러 호텔 식당으로 갔다가 입맛을 다셨다. 주식으로 나온 소고기 스테이크가 크기도 했지만, 너무 익혀(특급 Weldone) 딱딱해 맛만 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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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바이스 호텔]

 

   바릴로체는 아르헨티나가 세계 6대 부국에 속해 있던 시절, 유럽 특히 스위스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많이 정착한 도시이다. ‘바릴로체’의 뜻은 ‘산 너머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유럽인들은 산이 아니라 바다를 건너 왔지만, 아무렴 어떠랴, 원주민이 보기에는 똑같은 외지인일 뿐이다.

 

   아무튼 이곳은 전장이 85km에 이르는 나우엘 우아피 호수(Nahuel Huapi. 해발고도 760m, 최고 수심 300m, 면적 50㎢)의 호숫가에 자리한 그림 같은 곳이다. 아르헨티나 최대의 휴양도시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다.

 

    ‘남미의 스위스’라고 불릴 만큼 스위스에서 온 사람들이 많다 보니 자연스레 초콜렛산업이 발달하여, 유럽풍의 거리에는 초콜렛 전문 상점들이 즐비하다. 마치 서울에서 한 집 건너 카페가 있는 식이다.

    같은 맥락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호텔들의 이름에 에델바이스, 티롤, 샤모니 등의 이름을 볼 수 있고, 주민들의 주거지도 알프스 풍의 집들이 많다.

 

   이제는 힘들여 높은 산을 오르는 일정은 없는지라 저녁식사 후 몇몇 일행들과 함께 시내 야경을 보러 나섰다. 유럽문화의 영향을 그대로 받은 곳이라 많은 상점들이 이미 문을 닫아 거리가 어두웠다.

    그나마 영업을 하고 있는 카페 비슷한 주점이 하나 있어, 그곳에 들어가 맥주와 음로수를 마시며 회포를 풀었다. 이제껏 트레킹 마치면 숙소에서 잠자기 바빴는지라 여러 날 함께 걸으면서도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던 어색함을 뒤늦게 푸는 자리가 되었다. 이럴 때 능숙하게 자리를 주도하시는 월우 스님의 입담이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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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릴로체의 야경]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생음악을 연주하는 큰 술집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 안의 손님들이 우리 일행을 보고 손을 흔들며 환호한다. 생김새가 동양인인 것을 보니 필시 멀리서 왔을 것인즉, 환영한다는 의미이리라.

 

   2019. 3. 22.
   바릴로체의 주위 명소를 둘러보는 날이다. 여유가 있는 만큼 아침 7시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9시에 호텔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이동하여 캄파나리오(Campanario) 전망대(해발 1,049m)로 갔다. 리프트를 타고 전망대에 오르면 360도 돌아가며 주위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다.
  푸르디푸른 하늘 아래 라오라오 반도(Llao Llao Peninsula. 이곳에 있는 라오라오 호텔은 마치 중세의 성 같다), 빅토리아(Victoria) 섬, 트로나도르(Tronador, 3,491m) 산, 카테드랄(Catedral. 2,405m) 산 등이 넓은 나우엘 우아피(Nahuel Huapi) 호수와 어울려 연출하는 그림 같은 풍경이 객의 넋을 잃게 한다. 기념품 가게에서 아르헨티나 로고가 들어있는 캡 모자 하나를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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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파나리오 전망대에서 본 풍경. 가운데 사진 오른쪽은 양승호 대리]

 

   전망대에서 내려와 장미오일 공장(매장을 겸하고 있다)을 거쳐 호숫가에 있는 호텔(Luz Y Fuerza Hotel)의 식당으로 갔다. 점심식사를 위해서였다. 다소 이른 시각이어서 우리 일행 외에는 손님이 없었다. 야채 뷔페와 양고기 구이가 먹을 만했으나, 이즈음에는 고기에 질려 있던 촌부에게는 그저 양이 많은 식사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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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z Y Fuerza 호텔]

 

   점심식사 후 다시 버스를 타고 라오라오 반도에 있는 나우엘 우아피 호수 선착장으로 이동했다(나우엘 우아피 국립공원 안에 있다). 도중에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았던 라오라오 호텔 앞을 버스를 탄 채 주마간산으로 지나쳤는데, 골프장까지 갖춘 이 호텔은 휴양처로서는 참으로 제격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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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라오 호텔]
 
   오후 2시, 선착장에서 유람선에 올랐다. 배는 말이 호수이지 파도가 없는 잔잔한 바다를 떠가는 듯하다. 갈매기들도 따라와 운치를 돋운다. 좌우로 높은 산을 두고 푸른 물 위를 나는 듯 유람선이 달리는데, 난간에 나가도 날씨가 좋아 바람이 차지 않고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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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엘 우아피 호수의 유람선에서 본 풍경]


강상에 둥둥 떴는 배
풍월 실러 가는 밴가
십리장강 벽파상에
왕래하던 거룻배
....(중략)...
백구야 날지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다
...(하략)...

 

어디선가 판소리 단가 ‘강상풍월(江上風月)’이 들려오는 듯하다.
 
   이 유람선을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빅토리아 섬의 세콰이어 숲길과 가벼운 화산재가 깔린 호숫가, 아라야네스(Arayanes) 국립공원의 아라야네스 나무숲(기둥이 붉은 색인 이 나무는 땅 속 깊은 곳에서 빨아올린 물이 지나는 관이 표피 부근에 있어 나무등걸이 차가운데, 이곳이 군락지이다) 등을 둘러본 후 바릴로체 선착장에서 하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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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토리아 섬의 세콰이어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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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섬의 화산재 깔린 호숫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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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야네스 나무숲]

 

   호텔로 돌아오니 어느새 저녁 7시가 넘었다. 식당에서 농어 스테이크로 맛있는 저녁식사를 한 후, 호텔 내의 카페로 자리를 옮겨 일행들과 담소를 나누다 방으로 올라갔다.

 

부에노스아이레스

 

   2019. 3. 23.
   아침 7시 15분에 일어나 호텔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12시에 공항을 향해 출발하기 전까지 자유시간을 보냈다. 초콜렛을 몇 봉지 구입한 후 월우 스님, 오강원님, 김한옥님과 함께 바릴로체 시내구경을 나섰다. 

 

   이곳에 도착하던 날 밤에도 거리구경을 했지만 어두워서 잘 보지 못했던 거리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신구건물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관광지답게 거리가 짜임새가 있었다. 관광산업 육성을 외치는 우리나라의 고을들도 이제는 좀 어지러운 간판들과 난삽한 거리를 짜임새 있게 정리하여야 하지 않을까. 촌부의 주제넘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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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107.jpg [바릴로체의 거리 모습]

 

    전술한 보물창고를 가지고 다니는 관세음보살이 끓여준 누룽지(놀랍게도 작은 전기 밥솥을 가지고 있었다)를 볶은 김치와 함께 맛나게 먹으니 이역만리에서 이보다 더 훌륭한 점심이 없다.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공항으로 갔다. 

 

    오후 2시 30분에 바릴로체를 출발한 비행기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4시 35분에 도착하였다. 착륙 전 하늘에서 내려다 본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산이 전혀 없는 끝없는 평지 위의 도시였고,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였다. 건물과 녹지, 호수가 잘 어울리고 있었다. 100m 미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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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에서 본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기 중이던 버스를 타고 시내 중심가에 있는 호텔(Scala Hotel)로 가는 차창에 어린 거리 풍경은 우선 널찍한 대로가 인상적이었다. 무려 왕복 16차선,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넓은 대로이다. 도로 중앙에 나무숲의 공원이 있을 정도이다. 워낙 넓은 평원에 건설한 도시이니 도로를 그렇게 넓게 낸다 해서 이상할 게 없지만, 좁은 국토의 나라에서 온 동방나그네에게는 놀라운 모습이다. 그 거리를 지나는 시내버스의 문이 앞, 뒤, 중간 세 곳에 있는 것도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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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의 16차선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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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라(Scala) 호텔]

 

    호텔에 도착한 후 저녁식사를 겸한 탱고 공연을 보러 출발(저녁 8시 30분)하기 전까지 시간이 있어, 피자라도 사 먹을 겸 호텔 주변 시내 구경을 나섰다. 16차선 주위의 건물들은 유럽의 바로크양식 건물들을 비롯하여 외양이 멋진 것들이 즐비했다. 과연 한때 세계 6대 부국을 자랑한 나라의 수도다웠다.

 

     그런데 그 대로로 이어지는 골목길로 들어서는 순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 멋진 건물들의 옆과 뒤의 모습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심한 것은 허물어지고 있는 것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길도 아스팔트는 파이고 보도블록은 깨진 채 뒹굴고 있었다. 건물과 도로를 수리하고 보수할 돈이 없는 것이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본 해안가 건물들을 연상케 했다. 부(富)를 동경하여 유럽에서도 이민행렬이 줄을 잇던 부자 나라가 어찌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아르헨티나는 한반도의 12.6배 크기에 인구 4천 4백만 명이 사는 나라이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한때 '남미의 파리'라 불렸고, 1913년에 이미 남미 최초로 지하철을 건설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대로와 거대하면서도 매우 화려한 오페라 하우스인 콜론극장(Teatro Colón)이 있으며, 곳곳에 바로크식 고층건물이 즐비한 나라이다. 팜파스 초원에 5,200만 마리의 소떼가 득실거려 한때 이탈리아 대리석 한 장과 소 한 마리를 맞바꾸던 풍요의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지금 경제난으로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2001년에 이어 작년에 다시 외환위기를 겪어, 지급불능(디폴트 default)을 선언하고 IMF에 손을 내밀어 구제금융을 요청하였다. 외환보유고가 겨우 500억 달러를 약간 상회하는데, 외채가 무려 2,000억 달러에 육박할 뿐만 아니라, 마이너스 경제성장률, 늘어나는 실업률로 고통받고 있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르헨티나의 이런 경제적 어려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후안 페론(Juan Domingo Perón. 1895-1974)과 에바 페론(Eva Peron. 1919-1952)이다.

    후안 페론은 군인 출신으로 1943년 군사쿠데타에 참여하여(당시 계급은 대령) 1946년부터 1955년까지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빈민구제를 내세우며 나라 곳간을 열고 돈을 퍼준 전형적인 포퓰리스트였다.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매년 20% 이상 임금을 인상하고, 사회보장제도를 확충한다며 국고를 거덜 냈다. 그로 인해 아르헨티나는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져들었다.

    후안 페론은 페론주의라는 기치를 걸고 정치적 입지를 다져갔다. 페론주의는 기간산업의 국유화, 외국 자본의 축출, 노동자 위주의 사회 정책 등 국가 사회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후안 페론의 이런 포퓰리즘 정책에 앞장 선 인물이 바로 그의 둘째 부인 에바 페론이다. 페론 부부가 내건 정책은 대부분 대중의 인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일 뿐, 실질적으로 나라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겉으로는 노동자와 여성 등 약자를 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 혜택을 받는 사람은 거의 없는 허세와 기만의 정책이었다.

 

   외면적으로는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인기의 이면에는 페론 부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세력에 대한 끊임없는 탄압이 감춰져 있었다. 비판세력의 제거로 아르헨티나는 정치적으로 경직되었고, 페론 부부와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독재 속에서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나라 곳간이 비고 경제가 무너져가고 있는 와중에도, 비판세력을 제거한 페론 부부는 나라 돈을 자기 것처럼 마음대로 썼다. 에바 페론의 사치는 극에 달했고 많은 돈을 빼돌려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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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 전역을 돌아다니며 복지사업과 봉사활동을 벌이고 성녀를 자처하였지만, 실제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대중적 인기를 더 이끌어내기 위해 에바 페론은 남편 후안 페론과 자신의 우상화 작업까지 했다. 초등학교에서는 매주 페론 부부를 찬양하고 기리는 글짓기를 하도록 하였고, 스페인어 수업 시간에는 에바 페론 본인의 자서전 ‘내 인생의 사명’을 교재로 채택하게 하였다. 
 

   에바 페론은 1952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척추 백혈병과 자궁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아르헨티나 대중들은 에바 페론의 죽음을 광적으로 애도했다. 한 달 간의 장례식은 국민들이 바치는 꽃으로 덮였다. 그러나 그녀가 죽은 후 그간에 숨겨졌던 페론 정권의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리한 경제정책은 실패로 돌아갔고, 끊임없는 인플레이션과 실업, 지지층이었던 노동자들의 동요 등등.. 급기야 군부마저 후안 페론에게 등을 돌려 후안 페론은 군부 쿠데타로 쫓겨나 해외로 망명하였다.

 

    후안 페론의 망명으로 에바 페론의 시신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한때는 페론주의의 부활을 염려한 아르헨티나 군부에 의해 에바 페론의 시신이 탈취되어 이탈리아에 숨겨지기도 하였다. 에바 페론은 죽었고 그녀가 실제적으로 남긴 혜택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생전에 그녀를 좋아했던 수많은 노동자, 여성, 빈민들은 여전히 그녀를 그리워했다. 죽은 뒤에도 그 인기 탓에 편히 눈을 감지 못하던 에바 페론의 시신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에 있는 레콜레타 공동묘지(La Recoleta Cemetery)의 가족 묘역으로 옮겨졌다. 죽은 지 24년 만의 일이었다.

 

    페론의 포퓰리즘으로 인해 아르헨티나에 짓게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 페론이 아르헨티나에 남겨놓은 해악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고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아르헨티나는 고등학교까지 학비가 무료이고, 대학교도 국립대학교는 무료이다. 국공립병원도 무료이다. 예산 지출을 줄이기 위해 출산장려금과 연금혜택을 줄이려 하면 격렬한 시위가 벌어진다. 한번 공짜 맛에 길들여진 국민들에게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하는 것은 공염불이다. 이미 때가 늦은 것이다. 진정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이다.

 

      대부분의 상점이 아직 문을 열지 않아(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이렇게 느긋한 게 현실이다) 결국 피자를 사먹지 못하고 호텔로 돌아와 잠시 쉬다가 탱고를 보러 피아졸라(Piazzola)로 갔다. 이곳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오래 되고 가장 큰 탱고공연장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넓은 공연장이 손님들로 꽉 찼다. 식사(소고기 스테이크. 포도주를 곁들인다)를 하면서 공연을 관람하는 이를테면 극장식 식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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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111-1.jpg [피아졸라 탱고 공연장]

 

    탱고(Tango)는 아르헨티나에서 1860년경 생겨났다. 19세기 유럽은 인구가 넘쳐났지만 일자리가 부족하여 실업자가 늘었다. 반면에 당시 아르헨티나는 세계적인 부국이었고, 경제가 급속이 발전함에 따라 노동력이 부족했다. 이에 유럽의 하층민들이 아르헨티나 드림을 꿈꾸며 이곳으로 대거 이주하였다.
   멀고 먼 이국땅에서 수백만 명의 이민자들이 향수를 달래는 춤과 음악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항구 사창가와 술집에서 태어났으니, 그게 바로 탱고이다. 처음에는 사창가에서 순번을 기다리던 남자들끼리 이 춤을 추곤 했다. 아르헨티나 드림을 찾아온, 돈을 벌겠다고 홀로 이민을 온 사람들이 창녀에게서 외로움, 절망감, 향수를 다 해소할 수는 없었기에, 그들의 애절한 마음이 탱고에 담기게 된 것이다.

 

     피아졸라 공연장에서는 이따금 군무(群舞)를 추기도 했지만, 주로 남녀 각 1인의 무용수가 듀엣으로 추는 무대가 주를 이루었다. 음악 선율에 맞추어 춤을 참 잘 추었는데, 마치 발레를 보는 듯했다. 공연은 밤 10시 30분에 시작하여 1시간 정도 하였다.
  호텔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자정이 다 되었다. 그렇게 이번 일정의 마지막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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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

 

   2019. 3. 24.
   남미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오전에 시내관광을 한 후 점심식사를 하면 공항으로 이동하여 아르헨티나를 떠나 마침내 귀국길에 오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심장부(서울의 광화문 광장에 해당한다)에 있는 5월의 광장(Plaza De Mayo)으로 갔다.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첫걸음이 된 1810년의 5월 혁명(의회를 구성하고 독립을 선언했다)을 기념하는 탑이 있고, 광장 이름도 그에 맞춰 지은 것이다. 이 광장은 그 후로도 파란만장한 정치적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지금도 군사정부 시절에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다(전시 주최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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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광장과 기념조형물]

 

   광장 주위에 대통령궁과 대성당(Catedral Metropolitana), 식민지 시대의 식민청사(지금은 박물관) 들이 있다. 대성당은 프란시스코 현 로마교황이 교황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추기경으로 봉직하고 있던 성당이다. 그 대성당에서 기념으로 묵주를 구입했다. 촌자는 불자이지만 집사람은 천주교 신자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연방대법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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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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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전면과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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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구 식민청사)과 그 앞에서 열리고 있는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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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대법원]

 

     5월의 광장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중심가를 벗어나 북서쪽에 있는 장미공원으로 이동했다. 사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도시의 반이 공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곳곳이 공원인 도시이다. 그런 공원 중에서도 용인 에버랜드의 장미축제장을 연상케 하는 이 공원에는 갖가지 장미꽃이 만발해 있었다.

 

     그런데 그 장미꽃들보다는 그 장미꽃들 위로 펼쳐지는 잉크를 뿌린 듯한 푸른 하늘이 더 나그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제까지 트레킹을 했던 산악지대도 아닌 대도시의 한복판에서 보는 하늘이 어쩌면 그리도 푸를 수 있을까. ‘맑은 공기’라는 뜻의 도시 이름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명불허전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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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공원]

 

   장미공원의 하늘에 감탄하며 발길을 돌려 이 도시의 또 하나의 명소인 레콜레타 공동묘지(La Recoleta Cemetery)로 갔다. 4,500여 개의 무덤이 있는 이 공동묘지는 사전에 묘지라는 말을 듣지 않고 가면 대리석 조각공원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아르데코, 바로크, 신고딕 등 각종 건축양식의 무덤들을 볼 수 있다.
   이곳은 19세기 초부터 20세기 말까지 조성되었는데, 무덤 한 기당 5억 원 정도 들었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대통령 등의 정치인을 비롯한 각계의 유명인사들이 묻혀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더 이상의 여유 공간이 없다고 한다. 

 

  아무튼 이 묘지에 전술한 에바 페론의 무덤이 있어 관광객의 발길을 끈다. 그 앞에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당연히 함께 있을 줄 알았던 후안 페론의 무덤은 없다. 현지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후안 페론의 무덤은 위치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혹시 모를 테러(무덤을 파헤치는 일)를 염려한 때문이란다. 그의 포퓰리즘이 남긴 깊은 상처가 그를 죽어서도 편하게 놔두지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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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콜레타 공동묘지와 에바 페론의 묘]

 

    레콜레타 공동묘지를 나와 엘 아테네오(El Ateneo) 서점을 들렀다. 내부에 공연장까지 갖춘, 마치 오페라극장 같은 이 거대한 서점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또 다른 명물로서 관광코스의 하나이다.   

    본래 1800년대에 극장(노르테 국립극장)으로 지어졌다가, 1919년 지금의 형태로 새로 지은 후 오페라, 발레 등을 공연하는 문화광장이었는데, 2000년 출판그룹 엘 아테네오가 사들여 극장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점으로 변신시킨 것이다.

   현재 매장 면적이  2000㎡로 중남미 최대 규모이다.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고 했던가. 아르헨티나의 문화적 저력을 보는 듯했다.  붐비는 사람들 틈에서 기념으로 Susana Rinaldi의 탱고음악 CD를 하나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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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 아테네오 서점]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니 남미에서 이제 남은 일정은 한식당(향가)으로 가서 식사를 하고 떠나는 것이다. 한식당은 한인타운에 있다. 이 거리는 다소 초라하기는 했으나 온통 한글 간판이 걸려 있어 반가웠다. 지나가는 행인도, 그들이 주고받는 말도 모두 정겨운 한국인, 한국말이었다.
    그런데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는 놀랍게도 손님의 반이 아르헨티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능숙한 솜씨로 젓가락을 놀리며 매운 음식을 거침없이 먹고 있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비빔밥, 돼지갈비 등등 웬만한 음식은 다 있었고, 음식재료를 어디에서 구했는지 모르겠으나 서울에서 먹는 한식과 다를 바 없이 맛이 좋았다. 더하여 참이슬도 있어 애주가들의 환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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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타운 거리의 음악회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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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당 향가]       

 

   식사를 하고 남미 일주팀과 아쉬운 작별을 한 후 공항으로 이동했다. 저녁 8시 17분에 떠나는 델타항공 DL110편 비행기를 타고 미국의 애틀랜타로 가서(10시간 30분 비행), 국내선(델타항공 DL2750편)으로 환승하여 시애틀로 간 후(5시간 35분 비행), 그곳에서 다시 인천 행 대한항공으로 갈아타면 11시간 50분 걸려 인천공항에 도착(2019. 3. 26. 오후 3시 20분)하는 것이다.

 

   그런데 애틀랜타 공항에서 시애틀로 출발하는 국내선이 1시간 15분이나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시애틀에서 인천 가는 비행기를 놓칠 뻔했다(환승에 주어진 시간이 겨우 45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인천 행 대한항공이 늦게 떠나는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마지막 탑승자로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여기에는 시애틀 공항의 환승절차가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게이트를 나왔다가 옆에 있는 출국게이트로 가기만 하면 될 뿐 다른 절차를 밟을 필요가 일체 없는 시스템이 한몫 했다. 그래서 여권에 미국 입국(애틀랜타) 도장은 있어도 출국(시애틀) 도장은 없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기네 나라로 들어오는 사람은 까다롭게 심사를 해도 나가는 사람은 별로 신경 안 쓰는 모양이다.

 

    이렇게 16일간의 장정을 마치고 귀국한 인천공항의 하늘은 미세먼지로 뿌옇게 덮여 있었다. 푸르디푸른 하늘에 익숙해져 있던 두 눈이 다시 뿌연 하늘에 익숙해져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우리는 언제 다시 푸른 하늘을 자랑할 수 있으려나...(끝)         

 

(후기) 글을 마치려니 감사를 드릴 분들이 많다. 길고도 힘들었던 여정을 동행하여 주신 오강원님, 월우 스님, 김한옥님께 우선 깊이 감사드린다. 우여곡절 끝에 이번 파타고니아 트레킹을 가능케 하여 주신 혜초여행사의 석채언 사장님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아울러 현장에서 인솔하느라 애쓴 양승호 대리님의 노고를 치하하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도중에 합류하였음에도 기꺼이 함께 하여 주신 남미 일주팀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 모든 분들의 건승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