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찾아 삼만 리(2)

 

4. 러시아(Russia)

 

(1) 입국

 

    오후 3시에 에스토니아와 러시아의 국경에 도착했다. 러시아는 유럽연합에 속하지도 않고 사회주의국가라 검문이 까다롭다는 말을 이미 귀가 따갑게 들었지만, 막상 겪어 보니 정말 대단했다. 국경을 완전히 통과하는 데 소요된 시간이 무려 1시간 50.

 

    멀리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환영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때맞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입국심사대(고속도로의 톨게이트를 연상하면 된다)의 바닥이 순식간에 물바다로 변하고, 승용차를 타고 와 개별적으로 입국하는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바지를 걷고 물속에 들어가 여권을 제시하고 심사를 받아야 했다. 비가 오는 것은 늘 있는 일일 텐데 입국심사대의 바닥이 그렇게 물에 잠기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무슨 심보일까. 심사 담당자는 심사 박스 안에 들어가 있으니 바닥이 물바다가 되든 알 바 아니라는 것일까.

 

    우리 일행처럼 단체관광객들은 버스 안에서 대기하다 순서가 되면 별도의 건물 안 심사대에서 심사를 받기 때문에 다행히 물바다로 들어갈 일은 없다하지만 물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대신 다른 어려움이 있다. 입국하려는 버스가 여러 대 있으면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 당연하므로, 우리가 탄 버스가 도착했을 때 마침 먼저 온 버스가 한 대 있어 그 버스에 탄 사람들에 대한 심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 버스의 사람들이 입국심사를 마치고 떠나 우리 버스의 차례가 되어 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러시아 경찰이 앞을 막으며 버스로 돌아가란다. 마침 다른 버스가 한 대 도착했는데, 이 버스는 관광객을 태운 것이 아니라 유럽의 도시 간을 이동하는 정기노선버스(이를 City Bus라고 한다)로서 도착 순서에 상관없이 우선적으로 입국심사를 한다고 한다. 만일 이런 버스가 줄줄이 오면 그 심사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통상 오후 3시 이후에 이런 버스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처음에 가이드가 탈린에서 서둘러 출발하여야 한다고 한 이유를 알겠다. 마침 더 이상 이런 버스가 오지 않아 한 대 통과만 기다렸는데, 그 시간도 짧은 게 아니었다.

 

    입국장을 통과하면서 보니까 출국장도 장사진이다. 러시아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엄격하게 검사하느라 시간을 잡아먹는 것은 그렇다 쳐도, 러시아를 떠나겠다는 사람들조차도 오래 붙잡아 두는 심사는 또 뭐람.

 

    어렵사리 국경을 통과하여 오후 450분에 마침내 러시아로 접어들었다. 비가 계속 오락가락 하는 가운데 버스가 넓은 평원 위를 계속 달린다. 차창에 어리는 주위의 풍경은 발트 3국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가로수가 굵고 큰데, 하얀 자작나무 숲이 자주 보인다.

    다만 농촌 풍경이 이곳은 러시아 땅임을 실감하게 한다. 빈부의 차이가 심하지 않은 발트3국에서는 농촌과 도시의 집들 사이에 거의 차이를 못 느꼈는데, 러시아 농촌에서는 반대로 낡고 허름한 함석지붕이나 망가진 채 버려진 집들이 자주 눈에 띄어 안타깝다. 한 마디로 궁기가 흐른다.

    외국인들이 한국 여행을 하면서도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니 씁쓸하다. 유럽 여행을 할 때마다 무엇보다도 시골의 주택들도 도시 못지않게 번듯한 것을 보면서 늘 부러워했는데, 러시아에서 동병상련의 기분이 드는 것을 어찌할거나.

 

    길가 풍경에 궁기가 흐르는 대신 발트 3국과는 달리 도로에는 오가는 차량이 많다. 페쩨르부르그가 가까워질수록 차량이 급속히 늘어나 시 외곽에 이르면 도로가 차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그래서인지 왕복 2차선 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하는 공사가 활발하다. 정작 시내로 들어가니까 오히려 교통이 원활하다. 도로가 넓은 탓이다.

 

발트68.jpg    [페쩨르부르그로 들어가는 도로 위의 차량들]

 

    오후 8시가 되어서야 숙소인 카렐리아(Karelia) 호텔에 도착하였다. 당초 예상보다 1시간 30분 더 걸린 것이다. 호텔방은 비좁고 비치된 비품도 부실하다. 이곳의 TV도 브라운관 곡면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호텔직원의 불친절함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무엇을 물어도 한두 번 물어서는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아예 들은 척도 안 하기가 일쑤다.

 

    이곳에 몇 시에 도착할지 몰라 여행사측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한식 도시락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어쭙잖은 현지식 식사보다는 차라리 그게 낫다. 차를 오래 타서 그런 것인가, 사회주의 원산지 국가에 왔다는 긴장감 때문인가, 다른 날보다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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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렐리아 호텔]

 

(2) 상트 페쩨르부르그(St. Peterburg)

 

2016. 7. 4.

 

    아침 630분 모닝콜에 잠이 깼다. 날씨도 궁금하고 러시아의 아침풍경도 구경할 겸 산책을 나갔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흐려 있다. 그래도 전날보다는 기온이 따뜻한 느낌이다.

     근처 잔디공원에 갔더니 아침산책을 하는 러시아인들이 몇 명 보인다. 그들 가까이 지나는데 왠지 모르게 경계심이 드는 것은 왜일까. 러시아의 치안이 불안하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던 탓이리라. 그러나 그 후 77일까지 4일간 머무르면서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페쩨르부르그(이 글에서는 페테르부르크라는 일반적인 표기보다는 원음에 가깝게 페쩨르부르그라고 표기한다)나 모스크바처럼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대도시에서는 치안에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소매치기나 조심한다면 모를까.

 

     모르긴 해도 치안당국에서도 관광객들의 안전에 신경을 꽤 쓰는 모양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병합한 후 서방세계의 경제제재가 계속되고 있는 판에, 엎친 데 덮친다고 러시아의 최대 수출품인 원유의 가격이 곤두박질치는 통에 경제가 매우 어려워진 상황이라 대규모로 몰려드는 관광객들이야말로 실로 반가운 존재일 것이다. 그런 관광객들이 다른 것도 아닌 치안 문제로 안 오게 되면 큰 일이 아닐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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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위 59.6도에 위치한 페쩨르부르그는 유럽의 변방이었던 제정러시아를 일약 유럽의 강국으로 만든 피요트르 왕이 '서구로 향한 창을 만든다는 장대한 계획 아래 1703년부터 암스테르담을 본 따 건설하기 시작하여 1712년 모스크바에 있던 수도를 옮겨온 도시이다. ‘페쩨르라는 말 자체가 피요트르 왕를 일컫는 말이다(페쩨르, 피요트르, 그리고 피터는 모두 예수의 제자 베드로를 칭하는 말이다).

 

    그 후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주된 무대가 되고 1918년 수도가 모스크바로 도로 옮겨지기 전까지 200년 넘게 제정러시아의 수도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60년대 이 도시의 작은 쪽방에 기거하며 거의 외출도 하지 않은 채 창밖으로 인간 군상들을 바라보며 소설을 써나갔다. 그렇게 해서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탄생했다.

 

    이 도시는 볼세비키 혁명 후에는 한동안 레닌그라드(Leningrad 19241991)’로 불렸다. 혁명 후에도 모스크바와는 달리 제정러시아 시대의 것이 그대로 보존 정비되어 있어 시 전체가 고풍스런 느낌을 준다. 지금도 러시아 제2의 도시로 상주인구가 500만 명 정도 된다.

     발트해 핀란드만 연안의 항구인 이 도시는 네바 강 하류 삼각주의 본래 늪지대였던 곳에 건설된 것으로 현재도 101개의 섬이 있다. 그 섬과 섬 사이, 그리고 시가지 사이사이에 거미줄처럼 운하가 발달하여 그 위로 365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가히 운하의 도시로 북방의 베니스라고 불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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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쩨르부르그 전도]

 

    아침 9. 새로 바뀐 가이드와 버스가 호텔로 왔다. 새 가이드인 한국교민 우신애씨는 26년째 러시아에 살고 있는 여자분이다. 러시아 남자와 결혼했다고 한다.

    버스가 출발하려는데 비가 오기 시작한다. 이 비는 이 날 아니 다음날까지 계속하여 내렸다. 거기에 바람도 강하게 불어 기온이 영상 10도까지 내려갔다. 아침 산책할 때 따뜻하게 느껴져 두꺼운 옷을 안 입고 나간 것을 하루 종일 후회했다. 추울지 모른다고 해서 초겨울 옷을 서울에서부터 싸가지고 와서는 정작 호텔에 두고 나왔으니...

 

    페쩨르부르그의 첫 관광지인 여름궁전에 가기에 앞서 바실리(Vasilyevsky) 섬의 대형 쇼핑센터에 들렀다. 발트3국에서는 안 그러더니 러시아의 첫 관광을 쇼핑으로 시작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지만, 단체여행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그냥 받아들였다.

    그런데 가이드가 다른 곳보다 저렴한 도매상가라고 해서 기념으로 산 털모자를 나중에 네프스키대로에 있는 대형상가의 그것과 비교하여 보니 오히려 값이 더 비싸고 질도 안 좋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바실리 섬에서 나와 시내를 관통하여 페쩨르부르그 교외의 페쩨르호프(Peterhof)로 이동하였다. 시내를 지나면서 운하의 도시답게 운하를 수도 없이 건넌다. 그 위를 지나는 다리가 자연히 많을 수밖에 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앞으로의 유람선 관광이 기대되었다.

     시내 중심가를 흐르는 네바(Neva) 강은 폭이 넓고 수량이 풍부하여 대형 여객선과 화물선(목재 운반선이 유독 많다)이 다니고 있었다. 도로를 주행하는 차들을 보니 러시아 자동차 시장의 22%를 차지하는 현대·기아차의 위력을 실감하겠다. 이는 모스크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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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바 강의 유람선]

 

    페쩨르호프(Peterhof)에 있는 여름궁전 입구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자 빗속에 귀에 익은 음악이 들려온다. 거리의 악사들이 애국가, 아리랑, 고향의 봄을 차례로 연주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산장수들이 몰려와 한국말로 “10유로~ 싸요 싸!”를 외친다. 한국인의 발길이 얼마나 잦은지 여실히 말해 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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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궁전 앞의 악사들]

 

    여름궁전은 피요트르 왕이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정부(리투아니아의 창녀 출신으로 나중에 결국 왕비가 되었다)에게 선물로 지어 준 것이라고 한다. 핀란드만의 넓은 부지에 20여 개의 궁전건물과 140여 개의 분수가 있는데, 당시 러시아와 유럽 전역의 최고 건축가들을 불러 모아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 따 지었다고 한다. 2차 세계 대전 때 파괴된 것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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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궁전과 분수]

 

    겨울이 긴 러시아에서 따뜻한 햇살과 청명한 날씨를 즐기기 위하여 지었기 때문에 궁전건물 내부보다는 분수가 있는 정원이 더 볼거리이다. 그런 까닭에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도 대부분 분수정원 주위에 몰려 있다.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졌다 약해졌다 하는 통에 우산을 폈다 접었다 해야 했지만, 여름궁전의 정원은 그 규모만큼이나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나그네의 입이 벌어지게 한다. 한낱 정부에게 이런 궁전을 짓고 정원을 만들어 준 피요트르 왕의 절대 권력을 새삼 실감케 한다.

   지금이야 러시아가 이 멋진 관광지로 돈을 벌고 있지만, 당시의 백성들이 시달렸을 노역이 얼마나 심했을까. 같은 시대 조선의 임금이 후궁을 위해 대궐 밖에 별도의 궁전을 지어 주려고 했다면 가능했을까. 성인군자를 지향해야 했던 조선의 왕에게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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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궁전 정원에 있는 피요트르 왕의 동상]

 

    여름궁전에서 나와 시내로 다시 들어가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 공원 근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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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게네프 공원]

 

    투르게네프(1818-1883)1852년 농노제를 비판하여 쓴 단편소설 무무(Mumu)’에 나오는 개 무무의 동상이 입구에 세워져 있고, 그 개를 지극히 아끼던 벙어리 농노 게라심의 동상이 안에 세워져 있는 음식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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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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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당 입구의 무무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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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당 안의 게라심 동상]

                             

   애틋한 내용과 관련된 음식점임에 비해 이 집 려시아 음식의 맛은 그냥 그랬다. 무무의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다.

 

    주인공 게라심은 벙어리이다. 그러나 그는 건강하고 힘이 세며, 네 사람 몫의 일을 하는 성실한 사람이다. 그는 원래 성실한 시골농부였는데, 여지주가 그를 우연히 발견하고 농노로 만들어 모스크바로 끌고 간다. 게라심은 모스크바로 끌려와 노예생활을 하는 동안 일을 잘해 여지주의 칭찬과 돌봄을 받았다.

     그는 세탁부 하녀 타티야나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여지주가 이를 알면서도 술주정뱅이 하인 카피톤에게 타티야나를 시집보낸다.

      그녀가 벽촌으로 카피톤과 함께 떠난 날 실의에 찬 게라심은 강가에서 물에 빠진 강아지 한 마리를 구한다. 이 강아지가 무무이다(벙어리인 게라심은 강아지를 이렇게밖에 못 부른다). 강아지 무무는 그 이후 게라심과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된다.

     그런데 무무가 자기를 보려고 부른 여지주에게 사나운 모습으로 대하는 바람에 여지주의 미움을 사 죽게 된다. 여지주를 거역할 수 없는 게라심은 자신이 직접 무무를 강에 빠뜨려 죽이고, 그 길로 곧장 짐을 챙겨 고향으로 도망간다.

      고향에 당도한 그는 예전처럼 성실한 농부로 살지만, 전과 달리 여자를 피하고 개 한 마리 키우지 않는다. 게라심의 도망 후 얼마 안 되어 여지주가 죽었고, 게라심은 공식적으로 농노에서 해방된다.

 

    비가 계속 내린다. 비를 맞으며 피의 성당을 찾았다. 농노해방령을 선포한 알렉산드르(Alexander) 2(1818-1881)1881년 암살을 당해 숨진 곳에 세운 성당(1907년 개관)이라 그렇게 불린다. 정식 명칭은 그리스도 부활 성당(Cathedral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이다.

    이름에서는 피 냄새가 나지만 페쩨르부르그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다. 모스크바에 있는 바실리성당을 본 따 만든 것이다. 입장권을 사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화려한 외양에 비해 내부는 비좁다. 그럼에도 관광객이 몰리다 보니 운신이 힘들 정도이다. 유명 화가들이 직접 도안한 모자이크로 된 성화들이 현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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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의 성당 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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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성당 내부]

  

    운하의 도시답게 피의 성당 앞도 운하이다. 빗속에 그 운하의 다리에서 바라보는 성당의 모습이 운치가 있는데,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우산이 뒤집히는 통에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날이 맑으면 피의 성당이 그 운하에 비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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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성당 앞 운하]

 

    운하를 따라 네프스키 대로(Nevsky Prospekt) 쪽으로 걸어가면 카잔(Kazan) 성당이 나온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San Pietro Basilica)을 본뜬 네오클래식 양식의 건물이다. 1801년부터 10년에 걸쳐 지은 이 성당의 완성 후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그 기념으로 승리의 트로피와 프랑스군으로부터 탈취한 군기 등이 성당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성당은 규모면에서 피의 성당을 압도한다. 네프스키 대로 쪽으로 넓혀진 반원형의 회랑에는 94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늘어서 있다. 그 회랑이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겨 모르고 보면 국회의사당 건물쯤으로 알 정도이다. 종교를 부정하였던 구 소련 시절에는 무신교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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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 성당]

 

    이 성당 맞은편에는 고풍스런 3층 건물이 아름다움을 뽐내는데, 그 건물의 1층을 서점으로 사용하고 있어 이채롭다.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서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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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 성당 맞은편의 서점 건물]

 

    자유시간에 우산을 쓰고 네프스키 대로를 걸었다. 비바람이 불어 매우 추웠지만 그렇다고 이곳까지 와서 돌부처가 될 일은 아니다. 총 연장 4.5의 네프스키 대로는 페쩨르부르그의 중심도로로 가장 번화한 곳이다. 비록 인공적으로 연출되긴 하였지만 화려한 건축물과 근현대가 교차하는 상징성 때문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최고의 호텔과 많은 레스토랑, 분위기 있는 카페, 상점 등이 늘어서 있다. 마침 대형 상가가 있어 들어가 보았더니 앞서 말한 대로 오전에 바실리 섬에서 샀던 털모자보다 질이 더 좋은 것을 떠 싼 값에 팔고 있다. 이거야 원....

 

    대만인이 경영하는 중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길거리에 중국인 관광객들이 넘쳐나건만 대만식당이라고 씌어 있어서일까 중국인들은 안 보이고 서구인 외에는 한국 관광객들이 대부분이다. 음식의 종류와 양이 풍부한데다 맛까지 좋아 오랜만에 포식을 했다. 한식당이 배울 점이다.

 

2016. 7. 5.

 

    이 날도 아침부터 비가 계속 내렸다. 7시에 일어나 호텔 근처를 산책하는데 기온이 차다. 서울에서 가져온 두꺼운 옷이 드디어 효용을 발휘할 시점이다. 한 번도 안 입고 그냥 도로 가져갔으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그러나 사실 내심으로는 그 옷 안 입는 게 억울하더라도 안 입을 수 있는 날씨이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계속 오는 비로 운하의 물이 불어 다리 밑을 통과할 수 없게 되는 바람에, 이날 예정되어 있었던 운하유람선 관광을 취소해야 했다. 운하도시의 진면목을 보고 싶었는데 참으로 아쉬웠다. 겨울옷 입기와 운하 유람선 타기를 맞바꾼 셈이다. 효용면에서 비교가 안 되는 바꿔치기이다.

 

    오전에 바실리 섬에 있는 로스트랄(Rostral) 등대(네바 강가에 있는 높이 32m의 등대이다. ‘로스트랄은 뱃머리를 의미하며, 기둥의 대에는 러시아의 4대강인 볼호프, 네바, 드네프로, 볼가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있다)를 지나 자야치(Zayachi) 섬의 페트로파블로프스키(Petropavlovskaya) 요새(흔히 피터폴요새라고 부른다)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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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트랄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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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로파블로프스키(피터폴) 요새와 성당]

  

    이 요새는 네바강변에 당초 스웨덴 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구축한 것으로 폐쩨르부르그가 바로 이 요새로부터 시작되었다. 나중에는 들어가면 못 나오는 감옥(정치범 수용소)으로 용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요새로 들어가는 정문인 네바 문(Neva Gate)죽음의 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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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

 

    그런 요새 안에 멋진 성당(페트로파블로프스키 성당. 피터폴 성당이라고도 한다)이 세워져 있는 것도 아이러니이다. 피요트르 왕과 예카테리나 여왕의 묘가 이 성당 안에 있다. 이 요새에서 강 건너편을 바라보면 바로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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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타주 미술관 전경]

 

    운하 유람선 관광이 취소되는 바람에 점심식사를 느긋하게 하고 이삭 성당을 거쳐 에르미타주 미술관으로 갔다.

     이삭 성당(St. Isaac's Cathedral)은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으로 1818년부터 40년에 걸쳐 지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 이삭의 축일이 530일인데 바로 그 날이 피요트르 왕의 생일이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14천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건축 당시에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황금빛 돔을 만드는 데 100kg 이상의 금이 들어갔다고 한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돔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페쩨르부르그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시간이 없어 들어가지는 못했다.

 

    이삭 성당 앞 이삭 광장에는 니콜라이(Nicholas) 1(1796-1855)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고, 그 뒤로 건축 중인 롯데호텔이 보인다. 그 호텔이 완공된 후에 다시 와 보면 좋을 텐데, 그럴 기회가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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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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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광장의 니콜라이 1세의 기마상. 가운데는 건축 중인 롯데호텔]

 

    비바람이 몰아치건만 에르미타주(Ermitage) 미술관 앞에는 입장을 위해 서 있는 줄이 끝이 없다. 우리도 비를 맞으며 1시간 30분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러시아의 악명 높은 소매치기 일당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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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타주 미술관 밖의 입장 대기 행렬]

    

    겨우 미술관 안으로 들어섰는데, 내부는 바깥보다 더욱 인산인해이다. 그러다 보니 가이드가 작품 설명보다 인원체크에 더 신경을 쓴다. 중국인 관광객이 역시 제일 많은 것 같다. 사람에 치여 전시물 구경이 그야말로 주마간산일 수밖에 없다.

    천장과 벽이 금과 은으로 장식된 화려한 방들과 많은 인물화 그림들이 주된 관람 대상이다. 그 밖에 정교한 조각품들도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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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안의 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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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장식의 천장, 벽과 샹들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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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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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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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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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으로 된 공작새 모양의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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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브란트의 그림 돌아온 탕자’.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포옹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루가복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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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의 그림 시몬과 페로’. 로마시대에 굶어 죽는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아버지를 면회 간 딸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젖을 먹여 살려냈다는 이야기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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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을 박제하여 얹은 도자기]

 

    루브르, 프라도와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소장품을 1분에 1점씩 보아도 8년이 걸린다고 하는(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루빈슨, 피카소, 고갱, 고흐, 르느와르 등의 명화를 비롯하여 이탈리아 등지에서 들여온 조각품들과 이집트의 미라부터 현대의 병기에 이르는 고고학적 유물, 화폐와 메달, 장신구, 의상 등 300만 점을 소장하고 있다) 이 미술관은 당초 예카테리나(Ekaterina. 1729-1796) 여왕이 1764년에 개인 컬렉션을 겨울궁전[이 궁전은 1754-1762년에 라스트렐리(Bartolomeo Rastrelli. 앞서 본 라트비아의 룬달레 궁전을 건축한 건축가이다)가 세운 러시아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에 전시하여 ‘ermitage’(프랑스 어로 은둔처라는 뜻)라 칭한 것에서 비롯된다. 여왕이 복잡한 국정에서 벗어나 머리를 식히는 장소였던 것이다.

 

    겨울궁전이 이 미술관의 본관에 해당하고, 이를 포함하여 모두 6개의 건물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모두 1,056개의 방, 117개의 계단, 2,000여 개의 넓은 창문 등 그 규모가 가히 놀라울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인파에 밀리고 시간에 쫓겨 겨우 1시간 구경하고 나왔는데, 가이드는 진수는 다 보았다고 하지만, 그야말로 장님 코끼리 만진 셈이다.

 

     피요트르 왕의 외손자며느리인 예카테리나 여왕은 본래 독일 여자이다. 피요트르 왕의 외손자로 독일에서 태어나 살았던 카를 울리히(Karl Ulrich. 후의 피요트르 3)가 왕세자가 되면서 예카테리나가 왕세자비로 간택된 것이다. 결국 러시아 로마노프왕조의 피는 한 방울도 안 섞인 셈이다.

      쿠데타를 일으켜 남편인 피요트르 3세를 왕위에서 내쫓아 죽이고 1762년 왕이 된 이 냉혈녀는 그럼에도 피요트르 왕의 충실한 후계자임을 자처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녀는 피요트르 왕과 함께 로마노프 왕조의 전성기를 구가한 여왕으로 평가받는다(그래서 러시아 사람들은 피요트르 왕과 예카테리나 여왕을 大帝라고 부른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걸린 그녀의 전신 초상화를 보면 후덕한 모습이라, 남편을 죽인 여자 같지가 않다. 그녀는 또한 정부가 23명일 정도로 호색녀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피요트르 3세를 죽인 것도 그녀의 정부인 알렉세이 오를로프(Aleksey Orlov)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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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르미타주 미술관의 예카테리나 여왕 초상화]

 

    오후 530분에 한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830분에 출발하는 모스크바 행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에 저녁식사를 일찍 한 것이다. 메뉴는 비빔밥. 이제까지 먹은 한식 중 제일 낫다.

    페쩨르부르그 공항은 공항청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도 X-레이 검사대를 지나야 한다. 테러를 대비하여 보안을 철저히 하겠다는 것으로 보이는데, 다소 지나친 감이 든다. 탑승구로 들어가려면 다른 공항들과 마찬가지로 어차피 X-레이 검사대를 다시 통과해야 한다. 모스크바까지 비행시간은 1시간 5.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하니 발트3국의 안내를 맡았던 송정호 가이드가 기다린다. 모스크바는 그가 다시 안내를 맡았다. 모스크바의 이즈마일로보(Izmailovo) 베가 호텔에 도착하여 짐 정리를 하고 나니 밤 12시다. 4성급의 17층짜리인 이 호텔은 이제까지 묵은 호텔 중 제일 시설이 좋고, 외양은 서울의 롯데호텔 복사판이다. 저녁을 일찍 먹은 탓에 배가 고파 서울에서 가져온 컵라면을 하나 먹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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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마일로보 호텔. 같은 모양의 건물이 4채이다]

 

(3) 모스크바(Moskva)

 

2016. 7. 6.

 

    전날 종일 비 맞고 다니고 비행기 타고 밤늦게 자고...등등으로 피곤이 쌓여 여느 때와 달리 아 침 710분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그래도 날씨를 알아볼 겸 호텔 주위에 잠시 산책을 나갔는데 제법 쌀쌀하다. 모처럼 푸른 하늘이 보이고 비가 안 와 다행이다. 계속 그래야 할 텐데...

 

    아침을 먹고 바로 붉은 광장으로 갔다. 크레믈린, 바실리 성당, 굼 백화점, 역사박물관으로 둘러싸인 붉은 광장은 전승 기념 퍼레이드 등 기념행사가 열리는 광장이다.

     한국에서도 신문지상에서 붉은 광장의 군사퍼레이드를 여러 번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정말로 붉은 색광장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 광장의 러시아 어 ‘Krasnaya Ploshchad’의 번역 오류에서 비롯된 착각이었다. ‘붉은 광장이 아니라 아름다운 광장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았는데(Krasnaya아름다운’, ‘붉은등의 뜻이다) 언제부터 그리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일설에 의하면, 본래 아름다운 광장으로 불렸으나, 혁명기념일에 붉은색 현수막을 역사박물관과 굼 백화점 벽 등에 걸고 붉은 깃발을 손에 든 사람들이 모여들어 광장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기 때문에 '붉은 광장'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회색 돌이 깔려 있는 일반 광장(최고너비 100m, 길이 500m)이다. 다만 이 광장을 둘러싼 건축물 중 굼 백화점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붉은 색이라는 데서 굳이 붉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나저나 광장은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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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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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광장 쪽의 크레믈린]

 

    내부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바실리(St. Basil) 성당, 역사박물관은 외양이 참 아름답다. 앞서 기술한 것처럼 페쩨르부르그의 피의 성당이 이 바실리 성당을 본뜬 것인데, 바실리 성당이 훨씬 아름답다. 마치 동화 속의 건물 같아서 금방이라도 요정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갖가지 색깔로 소용돌이치는 양파 모양의 돔으로 유명한 바실리 성당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잘 알려진 상징적인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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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성당]

 

    이 성당은 단일한 토대 위에 중앙의 첨탑을 중심으로 아홉 채의 독립된 예배당이 배열되어 있다. 제정러시아의 왕 중 잔혹하기로 이름난 이반 4세가 카잔(Kazan)을 정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명에 따라 1555년에서 1561년까지 건설되었다.

     이반 4세는 성당이 완성된 후 앞으로 이 성당에 필적할 만한 아름다운 건물을 다시 짓지 못하도록 건축가 야코블레프(Postnik Yakovlev)의 눈을 찔러 멀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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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발물관]

 

    외양이 마치 고풍스런 궁전 같은 굼(GUM. 종합백화점이라는 뜻의 Glavny Universalny Magazin의 약어) 백화점은 제정 러시아 시대인 1893년에 완공된 러시아의 최고급 백화점이다. 안에는 중앙에 분수대가 있고, 각종의 소위 수입명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물론 저렴한 물건을 파는 곳도 있고, 카페나 식당도 있다. 곳곳에 아이스크림 판매대가 있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굼 백화점에서 꼭 사먹어야 하는 물품에 속한다고 하는데, 찬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건너뛰었다.

     이 백화점 3층에 삼성전자 매장이 있는데, 전체 매장 중 규모가 백화점에서 제일 큰 것 같다. 일부러 들어가 보았으나, 손님이 붐비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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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굼 백화점의 전경과 내부 모습]

 

    백화점에서 나와 광장 주변을 이 곳 저 곳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구경하는데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는 게 심상치 않다. 가이드가 버스로 돌아갈 시간이라고 하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빗방울이 제법 굵다. 100m 달리기를 하는 수밖에.

 

    점심식사를 하러 간 식당이 근사하다. 본래 러시아 귀족이 살던 집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샹들리에 달려 있는 등 실내 장식이 고급스럽다. 종업원들도 옛날 전통 복장을 하고 있다. 집사람 말에 의하면 여자 화장실에 푸시킨의 책이 진열되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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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러시아 귀족이 살았던 집을 개조한 식당 입구와 내부 모습]

 

    식당 근처 거리 중앙에는 가가린(Yurii Alekseevich Gagarin)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는 1961. 4. 12. 보스토크 1호를 타고 1시간 29분 만에 지구 상공을 일주해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에 성공하였다. 냉전 상황 속에서 미국과 우주를 향한 치열한 경쟁을 하던 소련에서 그는 일약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그는 아쉽게도 1968년 비행훈련 중 추락사하였는데, 그 뒤 유명한 혁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크렘린 벽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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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가린의 동상]

 

    식사 후 크레믈린으로 갔다. 러시아어로 크레믈(kreml')은 성벽이라는 뜻이다. 크레믈린은 붉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궁이다. 궁은 한 변이 약 700m인 삼각형의 형태이고, 그 중 한 변은 모스크바강()에 접해 있다. 성벽의 높이는 9-20m, 두께는 4-6m이다.

    궁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못 미쳐서 무명용사의 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옆에 천연가스 관을 연결하여 1년 내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불이 타오르게 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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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명용사비]

 

    궁 안에는 성모승천성당(The Assumption Cathedral), 성모수태고지성당(The Annunciation Cathedral.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마리아에게 예수의 수태를 알려 주었다는 뜻을 담은 성당), 대천사성당(The Archangel's Cathedral. 천사 미카엘을 기리는 성당. 이반 1세 등 왕들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을 비롯하여 여러 성당, 수도원, 궁전, 종탑 등이 있다.

    중앙에 높이 81m의 대종탑(이반 4세 종탑)이 서 있는데, 이 종탑이 서 있는 자리가 모스크바의 정중앙에 해당한다고 하며 적이 침입하면 종탑에 있는 21개의 종이 일제히 울렸다고 한다.

    이곳의 건축물들은 14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축조되었는데, 주로 15-6세기에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설계하여 지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이 파괴된 것을 다시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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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레믈린의 성당들과 종탑]

 

   이러한 성당과 종탑 같은 건축물 외에 궁 안에는 40톤짜리 대포(Tsar Cannon. 오스만 터키와의 전쟁 때 과시용으로 만든 공갈포), 200톤짜리 종(Tsar Bell. 높이 6.1m, 직경 6.6m)도 있다. 쏘아 본 일도 없고 쳐본 일도 없는 유물들이다. 종은 모스크바 대화재 당시 물을 뿌리는 바람에 일부 깨졌는데 깨져서 떨어진 부분의 무게만 60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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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톤짜리 공갈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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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톤짜리 종]

 

    크레믈린에서 한양나그네의 눈길을 끈 것은 무엇보다도 궁 안에 있는 대통령 집무실 건물이다. 흔히 대통령궁이라고 부르는 건물이다.

     경찰이 지키고 있어 그 안으로는 못 들어가지만, 대통령궁을 둘러싼 철책이나 바리케이드 같은 차단 시설이 없어 관광객들이 자유롭게 근처까지 접근할 수 있고, 사진도 마음 놓고 찍을 수 있다는 게 실로 뜻밖이다. 원조 사회주의 국가인 러시아에서 대통령궁을 일반 건물 보듯이 그렇게 쉽게 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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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집무실 건물]

 

   크레믈린에서 예상이 빗나간 것은 대통령궁만이 아니다. 다름 아닌 바로 크레믈린의 하늘이다. 냉전시대의 헐리우드 영화 속 소련이 그렇게 그려진 탓인지 모르겠으나, 크레믈린 하면 으레 회색빛 하늘 아래 무언가 음침한 분위기를 연상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정작 촌부가 접한 크레믈린의 하늘은 쪽빛 그 자체였다. 이럴 때 부러워해야 하는 건가, 아님 예상과 너무 달라 실망해야 하는 건가? 청와대가 있는 서울의 뿌연 하늘이 그 쪽빛 하늘에 오버랩되어 씁쓸하기만 하다.

 

 로마의 시저가 브루투스에게 외친 말을 흉내 내 본다

 

크레믈린이여, 너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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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믈린의 파란 하늘]

 

    크레믈린에서 나와 모스크바 국립대학으로 갔다. 가는 길에 롯데호텔이 보인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성업 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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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호텔]

 

    모스크바 국립대학은 하늘을 찌르는 스탈린양식(레닌이 죽은 후 권력을 쥔 스탈린은 모스크바시 800주년을 맞아 7개의 고풍스러우면서도 웅장한 건물을 건축하여 사회주의 국가의 예술적, 기술적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려 하였다. 이를 '스탈린 양식'이라 한다. 그 건물은 외무성, 교통성, 레닌그라드호텔, 우크라이나호텔, 문화인 아파트, 예술인 아파트, 모스크바대학 본관이다)의 본관건물이 멀리서도 보이는 곳이다(높이 240m).

 

    1755년에 개교한 대학으로, 고르바초프, 사하로프, 안톤 체호프, 칸딘스키 등이 이 대학 출신이다. 현재 학생 수는 약 4만 명이다. 본관 앞에는 직사각형의 커다란 인공 호수가 있고 그 주변에 돌아가며 이 대학 출신 유명인들의 석조 흉상을 새겨 놓았다. 대학 구내로 들어가지는 않은 채 겉모양만 보고 가는 게 다소 아쉬웠지만, 남의 대학을 관광지 삼아 어슬렁거리는 것도 바람직한 것 같지는 않다.                                   발트132.jpg

                             [모스크바 국립대학 본관]

 

    대학 앞의 참새언덕(Sparrow Hills)에서는 모스크바 시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는 나폴레옹이 이 언덕에 올라 모스크바 시내를 내려다보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산이라고 하기에는 낮고 언덕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높은 이곳은 평야에 자리 잡은 모스크바에서 제일 높은 곳이다. 그래봐야 해발고도가 220m밖에 안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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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언덕에서 바라본 모스크바 전경]

 

    참새언덕에서 모스크바 시내를 조망한 후 노보데비치 수도원(Ensemble of the Novodevichy Convent) 옆에 있는 호수로 갔다. 차이코프스키가 백조의 호수를 구상했다는 호수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이 호수에는 백조 대신 오리들이 놀고 있다. 호수를 한 바퀴 도는 데 30분 정도 걸린다. 비가 올 듯 말 듯 날씨가 꾸물거리니까 덥지 않아 오히려 걷기에는 좋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부인 바바라 부시 여사가 미국과 러시아 두 나라의 선린 증진을 위해 선물했다는 오리 동상이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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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보데비치 수도원과 근처의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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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의 오리 동상]

 

    노보데비치 수도원(Ensemble of the Novodevichy Convent)은 러시아정교의 여자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은 모스크바 대공(大公) 바실리 3세가 1524년 리투아니아로부터 스몰렌스크(Smolensk)를 회복한 것을 기념하여 건축하였다. 수도원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1524-1525년에 세워진 스몰렌스키(Smolensky) 성당이다.

      수도원의 남쪽 외벽에 인접해 있는 공동묘지에는 러시아의 저명한 인물들이 묻혀 있다. 예컨대, 투르게네프(Ivan Sergeyevich Turgenev),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고골(Nikolai Gogol)과 같은 작가들과 스크랴빈(Alexander Scriabin)과 같은 음악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흐루시초프(Nikita Sergeevich Khrushchyov) 등이 그들이다.

 

    저녁식사를 하러 한식당 서울로 갔다. 모스크바 국립대학 근처에 있다. 메뉴는 육개장. 국물이 너무 진하고 강했지만, 리가의 설악산에서 먹은 육개장보다는 한결 낫다. 밑반찬도 여러 가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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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식당]

 

   오후 730분에 러시아 민속공연을 하는 극장으로 갔다. 전에 이미 본 적이 있는 집사람은 혼자 호텔로 돌아가고 나는 다른 일행들과 함께 관람을 했다. 극장이 꽤 넓은데 객석이 거의 다 찼다. 그러나 막상 공연 내용은 그리 인상적이지 못하다. 마치 워커힐 쇼를 보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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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공연장 및 공연의 일부]

 

2016. 7. 7.

 

   러시아, 아니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모닝콜에 맞춰 아침 7시에 일어나 가볍게 산책을 했다. 몸을 가볍게 푸는 운동도 되고, 날씨 특히 기온을 체감할 수 있기도 하여 여행 내내 매일 아침 산책을 한 것인데,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이국땅에서 마지막으로 하는 산책이라 생각하니 주위를 새삼 둘러보게 된다.

 

   아침 식사 후 간 곳은 아르바트(Arbat) 거리이다. 한국인에게는 모스크바의 명동이자 인사동이라고 소개되는 곳이다. 거리는 상당히 깨끗하고 정돈된 모습이다. 평소 모스크바의 젊은이들과 예술가들로 넘쳐 난다고 하는데, 평일의 이른 시간이어 그런지 넘쳐 나는 것은 중국인 관광객들이다. 무슨 이벤트인지는 모르겠으나 거리 한복판에 중국풍의 아치를 여럿 세워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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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트 거리]

 

    입구에 푸시킨(Aleksandr Seraggvitch Pushkin)이 신혼 때 두 달 머물렀다는 집이 있고, 그 바로 맞은편에 푸시킨 부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푸시킨의 처 나탈리아 곤차로바(Nataliya Goncharova)는 결혼 전부터 러시아 상류 사회 사교계의 꽃이었다. 곤차로바는 결혼 후 프랑스 출신 장교 조르주 단테스의 줄기찬 유혹으로 염문설에 휩싸였고, 결국 푸시킨은 단테스에게 신청하여 결투를 벌이다 단테스의 총에 맞아 38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죽으면서 그의 시처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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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킨의 신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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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킨 부부의 동상. 부인 곤차로바의 손을 잡으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한다]

 

    아르바트 거리 안으로 들어가면 빅토르 최(Victor Choi. 1962-1990)를 추모하는 낙서들로 가득한 벽이 있다. 그 앞에서 러시아 젊은이들이 내용을 알 수 없는 생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빅토르 최는 러시아 한인 3세로 그룹 KINO의 멤버였다. 구 소련시절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노래를 많이 해서 러시아의 청년들이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라트비아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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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최 추모벽]

 

    비가 오락가락 하는 가운데 거리를 한 바퀴 돌았다. 가게 전면에 10여 개 나라의 국기를 걸어 놓은 기념품 가게가 있는데, 그 중에 태극기도 걸려 있어 안으로 들어갔다. 외모가 한국계로 보이는 직원이 상품 안내를 한다. 손님에 따라 안내직원이 달라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모양이다. 기념으로 ‘MOSCOW’라는 글씨가 새겨진 모자를 하나 샀다.

    아르바트 거리에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거리답게 맥도날드와 스타벅스가 있다. 그리고 대형 슈퍼마켓도 있는데,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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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트 거리의 태극기 걸린 기념품 가게]

 

    아르바트 거리에서 나와 모스크바의 유명한 지하철을 타보았다. 경사가 급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150m까지 내려가야 지하철을 탈 수 있다. 이렇게 깊은 지하에 지하철이 다니는 것은 유사시 방공호의 역할을 겸하기 때문이다.

     흐루시초프가 고향 우크라이나를 생각해 만들었다는 키에프역은 거대한 벽화(우크라이나인의 생활상을 그린 것), 갖가지 조형물, 심지어 샹들리에까지 있다. 마치 지하미술관 같다. 역사가 깨끗하고 깊은 지하임에도 공기도 탁하지 않다. 전동차는 자주 다니는 편이고 속도도 빠르다. 내부는 1인씩 앉도록 좌석이 구분되어 있고, 청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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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철 역사의 에스컬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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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프역의 벽화]

    

   두 정거장 타고 가 지상으로 나오니 또 비가 온다. 광활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넓은 승리광장(2차 세계대전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5년에 만들었다. 59일이 승전기념일이다. 광장 안의 승전 기념 오벨리스크탑은 높이가 141.7m)을 빗속에서 잠깐 둘러보고 개선문이 있는 곳으로 갔다. 1812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문이다. 파리의 개선문과 비슷하다. 넓은 도로의 중앙에 세워 놓았다. 서울의 광화문 광장처럼 도로 중앙에 개선문과 광장을 만들고 양 옆으로 차들이 다니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크게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러시아답게 개선문도 참으로 크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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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광장과 승전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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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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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선문의 포토존]

 

    개선문 구경을 끝으로 모스크바 관광을 마치고 어제 저녁을 먹은 서울 식당 근처에 있는 신라식당에서 설렁탕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벽에 씌어 있는 싸인들을 보니 한국의 유명인사들이 많이 다녀간 모양이다. 음식 맛은 보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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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식당]

 

    모스크바의 악명 높은 교통체증을 고려할 때 가능하면 서둘러야 한다는 가이드의 재촉에 식사 후 바로 공항으로 이동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오후 330분이다. 서울발 러시아 항공 비행기는 855분에 떠나는데... 5시간 넘게 뭐하고 보내지? 드러내 놓고 내색은 안 해도 일행 모두 마땅찮은 표정이다.

 

    그런데 공항청사로 들어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출국심사를 완전히 끝내는 데까지 1시간 30분이 걸렸다. 이곳은 인천이 아니라 모스크바인 것이다. 그래도 남는 시간이 거의 4시간. 여행 처음 시작 시 이곳에서 리투아니행 비행기를 기다리느라 4시간 30분을 보내더니 여행을 끝내고 귀국할 때도 같은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여유가 있어 좋네!” 하며 집사람과 면세점 구경(딱히 살 것도 없지만)도 하고 의자에서 쉬기도 하고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태리 식당에 갔는데, 한자 표기가 재미있다. 우리가 伊太利라고 표기하는 것과 달리 意多利라고 표기한 것이다. 처음 그 앞을 지나갈 때는 중식당인가보다 했는데, 그 밑에 영어로 ‘Italian Restaurant’ 이라고 써 놓아 알게 된 것이다. 분명 몰려오는 중국인들을 위해서 그렇게 표기했을 테니 중국에서 그렇게 표기하는 모양이다. 나중에 중국에 갈 기회가 있으면 확인해 보아야겠다.

 

    모스크바를 떠난 비행기가 시베리아를 지나 몽골과 중국을 거쳐 서해를 건너 인천공항으로 가는 데 걸리는 비행시간은 8시간 10. 열흘 만에 편안한 집으로 돌아간다는 안도감이 인천공항 위의 뿌연 하늘을 보고 그만 탄식으로 바뀌고 말았다.

 

, 다시 스모그 속으로 들어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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