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옥봉선사님,

 

선사님께 한 조각 나뭇잎글을 띄운 지 참으로 오래되었습니다.

소생의 불찰을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너그러이 유서하여 주시기를 앙망하옵니다.

가을이 무르익어 갈수록 하늘이 높아지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요?

철이 들면서부터 품은 의문이건만 환갑이 넘도록 여전히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풀지 못하고 지내는 어리석음은 또 무엇일까요?

 

    그제 하늘이 열려서인지 어제(2015. 10. 4.)는 더욱 하늘이 맑고 높아 보였지요. 4348년 전 하늘은 어땠을까요?

그 맑고 높은 하늘을 눈에 가득 담기 위해 소생은 길을 나섰습니다. 지난 9월 16일, 32년 16일 간의 법원생활을 마감하고 범의(凡衣)거사에서 우민(又民)거사로 변신한 후 첫 나들이였지요. 20년 전 소생에게 위  두 가지 호를 지어 주셨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소석(素石) 선생님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이번 여정은 서울둘레길입니다.

  서울둘레길 157km 중 안양 석수역에서 출발하여 안양천변을 따라 안양천이 한강과 합쳐지는 지점(올림픽대로 목동 부근)까지 16km를 걸었지요. 대략 4시간 걸리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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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둘레길 중 안양천변 석수역--한강합수지점 구간]

 

     출발시각이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한낮이었는데도 햇볕이 그다지 따갑지 않았고, 오히려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삽삽한 금풍(金風)에 땀을 흘릴 일이 없어 좋았습니다. 안양천의 물도 생각 밖으로 깨끗하여 물 밑으로 바닥이 보일 정도였고, 철새인 백로와 오리떼가 물고기들을 잡아먹고 있어 생태계가 살아있음을 보여 주더군요. 과거 안양천하면 떠올렸던 시커멓게 오염되어 악취를 풍기는 하천의 이미지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지요. 서울이 나날이 아름다워짐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물가 둔치의 으악새와 코스모스도 가을을 더욱 실감케 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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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의 안양천변 서울둘레길]

 

   잘 정비된 둔치에는 자전거 타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걷는 길과 자전거길이 분리되어 있어 충돌의 염려 없이 마음 놓고 걸을 수 있었습니다. 인도는 포장을 하여 흙먼지가 날리지 않아 좋았지만, 그 대신 흙길을 걷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영등포구 구간에 해당하는 부분 중 상당부분에는 육상경기장 트랙처럼 우레탄을 깔아 길이 쿠션이 있어 발이 한결 편했습니다. 영등포구의 재정형편이 다른 구에 비해 그만큼 좋다는 방증이겠지요.

 

    어제 걸은 16km의 구간은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양천구 등에 걸쳐 있는데, 구로구의 일부구간이 다른 구역에 비해 열악하더군요. 이 구간은 물에서 냄새도 나고, 둔치도 다소 지저분하고 어수선하였습니다. 한강과 만나는 합수지역에서는 많은 강태공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고, 실제로 제법 커다란 물고기들을 낚은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과연 그 물고기들을 먹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요. 한강 하류의 물이 그 정도로 깨끗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기야 음식점에서 그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내 놓으면 손님이 어찌 알겠나요.         

 

    사실 4시간에 16km를 걷는다는 것이 다소 힘든 여정이었지만, 도반(道伴)으로 동행한 목연대사(박태종), 성산대형(손기식), 예산대사(홍경식), 일청선사(구욱서), 원봉선사(노환균), 운문선사(박성재) 등 소오름산우회원들 모두가 환상적인 날씨와 멋진 풍광에 피로를 잊고 흥이 겨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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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름산우회원들: 좌로부터 홍경식,박태종,손기식,필자,노롼균,박성재]

    

   다만, 옥에 티라면, 이 길 역시 우리나라의 고질병 중 하나인 부실한 이정표가 가을나그네들을 애먹였다는 것이지요. 외길이 계속되는 곳에는 서울둘레길이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면서도 정작 삼거리 같은 갈림길에는 이정표가 없어 우왕좌왕하게 만들더군요. 이정표는 필요한 곳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일률적으로 일정간격(500m 쯤 될까요?)을 두고 세우라는 지시가 위로부터 시달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네요.

    서울둘레길 만들었다고 서울시장이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홍보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서울시장이나, 아님 그 밑의 국장, 하다못해 말단 담당자가 한번이라도 이정표만 의지해서(안내인의 안내를 받지 말고) 직접 걸어보면 이런 식으로 이정표를 세워 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소오름산우회에서 작년 2월부터 서울둘레길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한강이남 부분을 여러 번에 걸쳐 걸었는데, 매번 이런 식의 이정표 때문에 애를 먹었답니다. 소오름산우회 멤버들의 면면이 산행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베테랑들인데도 이럴진대, 이정표와 지도에 의지해 길을 나선 초심자들이라면 오죽할까요. 둘레길에서 종종 만나는 외국인들을 볼 때마다 걱정이 되더이다. 이런 사정을 시정 책임자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길손들의 원성이 그들 귀에 들리기나 할까요? 귀가 가려울 텐데... 

 

    게다가 사람들을 더욱 헷갈리게 하는 것은 길 이름이 겹치는 것이지요. 둘레길이 전국적으로 유행하다 보니 이곳에도 각 구청구간별로 구로둘레길, 영등포수변길 등 각 자치구마다 길 이름을 붙여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상당부분 서울둘레길과 겹치고, 그 겹치는 부분의 이정표에는 구로둘레길이나 영등포수변길 표지만 있을 뿐이어서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갑자기 서울둘레길이 사라졌으니까요. 이정표에 서울둘레길도 함께 기재해 넣는 정도의 친절함도 베풀지 못하는 게 우리나라 관공서의 행정이 아닌가 하여 씁쓸하기만 합니다. 도대체 행정이 공무원이 아닌 시민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날이 언제쯤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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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본 한강이북과 성산대교]

 

선사님,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여야겠네요. 소생이 지난 16일 법복을 벗은 것을 기화로 그동안 20여년에 걸쳐 사용하여 오던 호인 범의(凡衣)를 그만 사용하고 대신 앞으로는 우민(又民)을 사용하기로 하였지요.

범의로 지낸 동안에는 대중교통, 특히 지하철을 이용할 일이 거의 없었다가 이제 우민이 되어 자가용 대신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게 되었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오늘도 소생의 우거에서 석수역을 가고자 내이버에서 가는 방법을 검색한 후에 길을 나섰는데, 방배역에서 2호선을 타고 가다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환승하라고 되어 있어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내려 환승하는 곳을 찾으려고 했으나 아무리 찾아도 없더군요. 아무래도 이상하다싶어 지하철 안내도를 자세히 살펴보니 신도림역에서 1호선으로 환승해야 석수역을 갈 수 있더군요. 뒤에 알았지만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환승하라는 것은 지하철이 아니라 아예 역 바깥으로 나가 버스로 갈아타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2호선을 타고 신도림역으로 가서 1호선(천안행)으로 갈아타려고 부리나케 승강장으로 갔는데, 이번에는 급행열차만 타는 곳이었습니다. 지하철도 급행과 완행 두 가지가 있고, 역에 따라 승강장이 구별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지요. 아무튼 신도림역은 참으로 복잡하더군요.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겨우 완행 승강장을 찾아 간신히 1호선으로 갈아탈 수 있었지만, 덕분에 약속시간에 20분이나 늦었답니다. 도반들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였더니 지하철과 버스의 노선을 제대로 익혀 불편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우민(又民)이 되려면 3개월은 걸릴 거라고 하더군요. 그 때까지는 아무래도 우민(愚民)의 처지일 것 같습니다.

 

선사님,

 

가을이 무르익는 대신 아침저녁 일교차가 큽니다. 건강에 각별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한양을 떠나 여주 새말에서 우민이 총총 썼습니다.

 

2015. 10. 5.

우민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