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화(山頂花) (북한산)

2016.04.21 11:14

우민거사 조회 수:511

 

어제(2016. 4. 16.) 밤 여주에는 봄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담 옆에는 연꽃을 심은 연못이 있고,

대문 앞에는 논밭이 펼쳐져 있는 시골집의

칠흑같이 어둡고 깊은 밤

마당에 떨어지는 낙숫물소리의 운치가 그만이었다.

 

주룩주룩 시원하게 내리는 모습이 오랜 가뭄을 해소해 줄 기세였다.

그야말로 메마른 대지에 내리는 한 줄기 광명이라고 할까.  

겨우내 말라 있던 금당천에도 물이 흐른다. 

 

전에는 우리나라의 날씨가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절이 뚜렷하다는 것이 세계적인 자랑거리였는데,

언제부터인가 4계절이 6계절로 바뀌어 버려 씁쓸하다.

초겨울, 한겨울, 늦겨울, 초여름, 한여름, 늦여름...

실종된 봄, 가을을 아쉬워하며 아열대기후로 변해 가는 날씨를 안타까워했는데,

슈퍼엘리뇨가 마침내 소소멸한 탓인지, 올해는 봄날씨가 제법 재현되고 있다.

참으로 다행이다.

 

그 봄이 지나가고 나서 뒤늦게 아쉬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기에

그 봄을 즐기려고 어제 다르마법우회 소속 사법연수생들과 북한산을 찾았다.

오후에는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매 뉴스시간마다 반복되었는데도 말이다.

그 이면에는 우선 예보내용이 중부지방은 오후 늦게나 비가 내릴 거라는 것이었다는 점과

요새는 그래도 전보다는 잘 맞기는 하지만 일기예보에 대하여 그동안 오래 쌓여온 관성적 불신이 겹쳐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비옷이나 우산조차 준비 안 한 것은 만용이었다.


북한산.jpg

 

아무튼

구기동에서 출발하여 북한산 사모바위를 거쳐 비봉에 올라 진흥황순수비에서 갑제1호증(인증사진)을 남기고

암벽을 따라 내려가려는 순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순간 당황스러웠다.

그 때 시각이 오후 1시.

일기예보상으로는 아직 비가 올 때가 아닌데....

하지만 누구를 탓하랴.

하산을 서두르는 발걸음이 왜 그리 무겁고 무릎은 유난히 아픈지... 

 순수비.jpg

[비봉의 진흥황 순수비](원본 크기의 모형이다.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록 비를 맞기는 했지만

산에 핀 꽃들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시내보다는 아무래도 온도가 낮은지라 벚꽃, 진달래, 개나리가 여지껏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특히 만개한 벚꽃과 진달래가 신록과 잘 어울려 상춘객의 눈을 즐겁게 하였다. 

그리고 거대한 암봉 밑 절벽에 의지하여 지은 절의 법당에서 퍼져나오는 향내음이

산나그네의 마음에 평화를 심어주었다.  

 

조선 후기 문인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5)가 1819년에 지은 시 "山頂花"에서 노래한 그 자체였다. 

     山頂花

 

誰種絶險花(수종절험화)
雜紅隕如雨(잡홍운여우)
松靑雲氣中(송청운기중)
猶有一家住(유유일가주)
 
                  산꼭대기에 핀 꽃

                  누가 꽃을 심었나,  저 험한 절벽 위에!
                  붉은 꽃잎이 비처럼 쏟아지누나.
                  흰 구름 아래 소나무만 짙푸른 산중인데
                  어럽쇼! 집이 한 채 숨어있구나.
 
지은이가 강원도 춘천 부사(府使)로 부임하여 청평산으로 봄나들이를 나섰다가 접한 풍경을 읊은 시라고 한다.
 

신록을 둘러보며 산길을 느긋하게 가던 시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험한 절벽에서 울긋불긋한 꽃잎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으니 말이다. 
아니 누가 저 험한 곳에 꽃을 저렇게 많이 심어 놓은 것일까?
고개를 들어 바라보아도 흰 구름 아래 소나무만 짙푸른 깊은 산중일 뿐인데 말이다.
그런데 어라! 숲 한 켠에 누가 볼세라 오두막 한 채가 숨어 있네.
아니 저런 곳에 집을 짓고 살다니...
집주인이 세상을 피해 숨었을망정 꽃은 무척 좋아했나 보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깊은 산중에 심었건만 오늘은 그만 시인묵객에게 들켜버렸다.
남의 비밀스러운 정원을 들여다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시인은 가던 길을 재촉한다.

 

산정화 (2).jpg

 

시인은 미안한 마음에 걸음을 재촉하였지만,

범부는 예보보다 일찍 내리는 비를 원망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같은 봄나들이라도

이쯤 되면 낭만의 차이가 너무 크다.

어찌하랴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을...

 

나무낭만보살마하살! 

 

병신년 춘야우중(春夜雨中)에(2016. 4.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