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허(淡虛)에게

 

    벗이여,
    잘 지내시는가?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부터 시작하여 함께 보낸 세월이 어언 45년 되었건만, 이렇게 그대를 수신인으로 하여 한 조각 글을 쓰는 것은 처음 아닌가 모르겠네.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그런 것 같은데, 요새는 나이 탓인가 내가 내 기억을 못 믿으니 혜량하고 보시게.

 

    오늘이 하지(夏至)일세.
    글자대로라면 이제 비로소 여름에 도달하여야 하는데, 폭염(暴炎)이라고 할 정도로 일찍부터 찾아온 찌는 더위로 인해 여름은 진즉 우리 곁에 와 있네그려. 아무리 인간이 자초한 지구 온난화의 결과라지만, 요새 더위는 조금 지나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네.
어디 그뿐인가, 더위와 함께 찾아온 심한 가뭄은 더 걱정일세그려. 논농사를 포기하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신문기사는 범부의 등에 소름을 끼치게 하는구먼.

 

    이런 저런 걱정이 앞서는 나날인데, 그대는 어찌 지내시는가?
    워낙 튼튼한 체질이라 건강하게 잘 지내리라 믿네만, 자신의 건강을 너무 과신하지는 말게. 환갑을 넘긴 나이를 생각해 하는 말일세.

    작금의 무더위 속에서도 운길선사의 표현대로 ‘야산을 개간’하러 다니는가? 점수는 여전히 잘 나오는가? 골프를 끊은 지 이미 오래 된 범부는 그대도 알다시피 산을 자주 찾는다네. 요새는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으니 전보다 더 자주 가는 편이지. 이 달 들어서도 주말을 이용하여 김포의 문수산(둘째 주)과 석모도의 해명산(셋째 주)을 다녀왔다네.

 

    문수산(文殊山)은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서북쪽으로 뻗어 나온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안성의 칠장산에서 다시 갈라져 시작되는 한남정맥이 끝나는 지점에 있다네. 비록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해발 376m), 날이 맑은 날 이 산의 정상에 서면 개성 뒤의 송악산이 빤히 보인다네.
    범부가 찾은 날도 미세먼지가 걷혀 시야가 탁 트인 덕분에 송악산을 제대로 볼 수 있었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곳이건만 언제나 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분단 조국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였지.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광적인 집착을 보이고 있는 북한 정권이 언제나 정신을 차리려나 모르겠네. 그대와 내가 생전에 송악산을 가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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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에서 바라본 송악산]

 

    한반도 주변정세는 날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임진강과 한강의 물길이 만나 서해로 흘러드는 곳의 남북 대치 현장은 적어도 겉으로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네. 다만 녹음이 우거진 우리 쪽과는 달리 북한 쪽 산들은 곳곳이 벌거벗은 상태여서 주민들의 곤궁한 삶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하였네. 위정자(爲政者)가 백성의 등을 따뜻하게 하고 배를 부르게 하지 못한다면 이미 자격을 상실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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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 중턱의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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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 정상. 뒤에 보이는 곳이 북한 땅이다]

 

    해명산(海明山)은 석모도에 있는 산일세. 보문사가 있어 유명해진 석모도는 강화도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가는 곳이지.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이다 보니 어디든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면 갈매기가 떼를 지어 날아들게 마련인데, 특히 외포리 부두의 갈매기들은 서울에서 가까운 지리적 이점 때문에 유선객(遊船客)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다네. 너도 나도 던져 주는 새우깡을 하도 많이 먹어서인지 갈매기들이 비만이라고 할 정도로 살이 통통하게 쪘다네. 새우깡을 공중에서 낚아채거나 바다 수면 위에서 쪼아 먹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어서 감탄을 자아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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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포리 갈매기]

 

    아무튼 비록 짧은 거리지만 이 갈매기들의 묘기가 석모도 가는 재미의 하나이고 배를 타는 낭만의 하나였는데, 이제 얼만 안 있으면 그런 재미도 낭만도 다 없어질 판이라네. 강화도와 석모도를 잇는 다리(석모대교. 길이 1,540m)가 완성되어 개통식(27일)만 남겨 둔 상태이기 때문일세. 강화도나 석모도에 사는 주민들의 편의를 생각하면 두 섬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는 것에 대해 어찌 토를 달 수 있겠냐마는, 사라져 가는 낭만이 마냥 아쉬움으로 다가온다네. 외포리의 여객선과 갈매기들은 범부가 일찍이 대학생 시절 때부터 타고 보아 온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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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와 석모도를 잇는 다리]

 

     해명산은 석모도의 남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섬의 중간 지점까지 이어져 있다네. 산이 높지는 않지만(해발 327m), 서해바다를 바라보면서 종주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네. 바다 건너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범부가 찾았을 때는 짙은 해무(海霧)가 삼켜 버렸는지 그 소리가 안 들리더군. 30도가 넘는 더운 날씨 속에서 산을 종주하려니(5시간 정도 걸렸네) 다소 힘이 들었네만, 나무그늘과 이따금 불어오는 해풍이 땀을 식혀 주어 나름 운치 있는 산행이었네. 그대도 한번 가 보시게. 우면산이나 청계산은 이제 갈 만큼 가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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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명산의 능선에서]

 

    해명산 종주가 끝나는 지점에서 만나는 낙가산(落架山)에서 서쪽으로 하산하면 바로 유명한 보문사(普門寺)일세. 신라 선덕여왕 4년(635년)에 창건된 이 절은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보문사,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의 하나이지. 명성에 걸맞게 찾은 사람이 역시 많더군. 믿는 종교의 이동(異同)을 떠나서 한번 쯤 가볼 만한 곳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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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사]

 

    벗이여,

    무더위에 심신이 지칠수록 적절한 활동이 필요하지 않겠나. 거동이 불편한 구암대사의 근황이 어떤지 모르겠네. 모쪼록 그대는 건강관리 잘 하시게.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다는 말을 늘 염두에 두시게. 나도 그리하겠네. 기회가 되면 백동선생과 함께 시원한 막국수나 먹으러 가세.

 

    정유년 하지에 우민거사가 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