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멀지 않은 곳(1)

 

 

아프리카,


   이 단어를 접하면 우선 떠오르는 생각이 우리에겐 너무 ‘멀고도 험한 곳’이라는 것이 아닐까. 2002년에 북부의 모로코를 다녀오고, 2007년에 남부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다녀왔건만, 내 머릿속에는 아프리카가 여전히 같은 관념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2주간에 걸쳐(2013. 8. 2.- 2013. 8.16.) 아프리카의 동부 케냐와 탄자니아를 방문하는 동안 내내 느낀 것은 이제는 아프리카가 결코 그처럼 ‘멀고 험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대한항공이 2012년 6월부터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까지 주 3회 직항편을 운항하게 된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닐까 싶다.

 

동아프리카의 관문

 

   8월 2일(금) 밤 9시 20분 인천공항을 출발했다. 비행기 기종이 혹시 요새 사고 소식이 자주 전해지는 보잉 777기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기종이 에어버스의 A300-200임을 확인하는 순간 사라졌다. 나약한 인간은 자라 보고 놀라면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법이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 제 고도와 높이를 잡아 안전벨트를 풀어도 된다는 신호등 켜질 때쯤이면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라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자연스레 잠자리에 들었다. 푹 자고 깨어보니 여승무원이 두꺼운 이불을 덮어주었음을 알게 되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침을 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감사할 따름이다. 정신을 차리자 곧 착륙한단다. 기내에 비치된 모니터로 항공지도를 보니 북경, 고비사막, 아프가니스탄, 이란, 예맨, 아덴만, 이디오피아의 하늘을 순차로 거쳐 왔음을 일목요연하게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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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아프리카가 전처럼 돌고 돌아서 가는 곳이 아니라 그냥 비행기 타고 한잠 자고 나면 가는 곳인 것이다. 동아프리카의 관문인 케냐의 나이로비 공항에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현지시각으로 8월 3일(토) 오전 4시 30분. 총 비행시간은 13시간 10분. 시차는 서울보다 6시간 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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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발 1,676m에 위치한 나이로비의 날씨는 아침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다소 쌀쌀했다. 하긴 이곳은 지금이 겨울이다.
   이번 아프리카 방문의 첫 일정은 탄자니아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탄자니아의 다르 에스 살람으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해 대한항공 라운지에서 오전 8시 10분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그 라운지로 가는 도중에 공항 면세점 구역을 지나게 되었는데, 면세점의 상당수 점포들이 유리창이 깨지고 진열한 물건은 없고 마치 폭격을 당한 모습이어서 눈길을 끈다. 대한항공의 박진성 나이로비지점장님의 말씀이 면세점 운영자가 유력 정치인을 끼고 임대료를 대폭 올리면서 일정 기한까지 안 낸 임차인들을 강제로 쫓아내는 통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대항항공 라운지에서 탑승구까지 가는 동안에 살펴본 공항의 모습은 70-80년 대 김포공항을 연상시켰다. 김포공항이 나이로비공항을 참고했다니 아이러니가 아닐까. 옛날에는 이 공항이 그만큼 첨단이었다는 것일까. 인천공항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세계는 무한경쟁의 시대이고 거기서 잠깐 한 눈 팔면 곧 낙오자가 되는 게 비정한 현실이다. 지난 4월 케냐의 대통령 선거 때 야당 후보자가 ‘코리아를 배우자’고 했다는 말에서 으쓱함보다는 왠지 모를 전율감이 느껴지는 것도 다 그런 이유이리라.

 

  다르 에스 살람(Dar es Salaam)

 

     8시 10분에 케냐항공을 타고 나이로비 공항을 출발해 탄자니아의 상업수도 다르 에스 살람으로 갔다. 소요시간은 1시간 35분. 다르 에스 살람 공항은 제주공항만하다. 케냐와 국력의 차이가 한 눈에 또 비교되는 대목이다.
   비행기로 케냐에서 탄자니아로 국경을 넘으면 바로 킬리만자로 산이 비행기 아래로 보인다.
  해발 5,895m의 높이로 아프리카 대륙의 최고봉으로 만년설을 자랑하던 이 산을 하늘에서 내려다 본 풍경은 아쉽게도 눈이 거의 없다. 지구온난화로 대부분 녹은 것이다. 차라리 보지 말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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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킬리만자로 산 ]

 

    다르 에스 살람 공항에는 겨울의 건기임에도 드물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교통체증이 매우 심했다. 영국식민지(1961년 영국에서 독립)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차들은 좌측통행이다. 대부분의 도로는 편도 1차선이다. 그 위를 달리는 차들은 대부분 오래 된 중고차들인데(신차는 너무 비싸서 여간해선 못 산다), 중고차들이다보니 자연히 핸들이 오른쪽에 있는 일제 자동차들이 제일 많이 눈에 띈다. 일본인들 별별 군데서 다 득을 본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배가 아픈 걸 어쩔거나... 매연이 심한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매연을 내뿜는 중고 벤츠가 판을 치던 모로코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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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르 에스 살람 국제공항 ]

 

      자동차는 일제가 주류이지만 현대생활에서 자동차보다 더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인 휴대폰은 단연 삼성제품이 독보적인데, 흥미롭게도 진본보다는 짝퉁(중국제)이 더 많이 유통된다는 것이다. 짝퉁의 가격이 진본의 1/5 수준이란다. 삼성 측에서도 아직은 그냥 묵인하는 모양이다. 언뜻 보아서는 외양이 거의 구별이 안 된다.

 

   도심의 세레나 호텔에 도착하니 대사관의 정일 대사님이 반갑게 맞아 주신다. 토요일이라 휴무인데도 일부러 나오신 것이다. 감사할 따름이다. 월요일에 다시 뵙기로 하고 헤어졌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가이드 김현식씨의 안내로 시내를 둘러보았다. 인구 320만 명의 다르 에스 살람은 탄자니아의 상업수도로 항구도시이다. 본래 탄자니아의 정식 수도였는데, 1974년 내륙의 도도마(Dodoma)를 행정수도로 정해 국회가 그곳으로 이전했다. 그러나 나머지 행정부, 사법부는 여전히 다르 에스 살람에 있다. 그래서 우리 대사관도 역시 이곳에 있다. 결국 탄자니아의 실질적인 중심도시인 셈이다.
  빈부의 차이가 커 해안가에는 고급 저택들이 즐비한데, 한 발짝만 안으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모습이다. 편도 1차선의 차도 외에는 포장된 인도를 보기 어렵다. 당연히 먼지가 풀풀 난다. 다음 날 배를 타고 잔지바르에 갔다 오면서 보니까 한 마디로 “100m 미인”이다. 바다에서 볼 때는 꽤 아름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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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르 에스 살람 전경 ]

 

   그래도 곳곳에서 높은 건물을 짓고 공사를 하고 있는 모습에서 훗날 발전된 아름다운 도시를 떠올렸다. 비록 지금은 탄자니아의 1인당 GDP가 550달러 정도이지만, 한반도 면적의 4.3배에 달하는 국토면적에 풍부한 지하자원과 관광자원을 갖추고 있고, 연 7%대의 경제성장, 연 2.5%의 인구 증가(현재 4,770만 명)를 계속하는데다 정치까지 안정되어 있어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에.    

 

   우선 한식당 ‘궁(宮)’으로 가서 점심식사를 했다. 이번 아프리카 여정의 첫 식사를 한식으로 한 것이다.  ‘궁(宮)’은 교민이 운영하는 식당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손님이 별로 없었다. 한국대사관이 근처에 있을 때는 손님이 많았는데, 대사관이 이사를 가는 바람에 타격을 입는 듯했다. 그래도 주인 아주머니의 인상은 후덕했다. 집사람을 알아보고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고 방명록에 싸인도 해 달란다. 덕분에 내 이름까지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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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식당  '궁' ]

 

식사를 마친 후 먼저 국립박물관으로 갔다. 이 나라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나라 시골의 어느 군민회관 정도의 크기인 이 박물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대한 상아였다. 그 상아를 쇠사슬에 묶인 노예들이 메고 가는 모습을 꾸며 놓았다.

 

 그 밖에 마사이족들이 사냥에 사용하던 무기들과 몇몇 토기 등이 전시되어 있었으나,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이라고 하기에는 전시물이 너무 빈약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침 초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몰려 와 관람을 하였는데, 그들의 귀여운 모습은 우리네와 하나도 다를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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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박물관과 상아를 맨 노예 모습 ]

 

    박물관에서 나와 전통공예품시장으로 갔다. 무엇보다도 광목 같은 천에 페인트로 초원 위의 각종 동식물과 킬리만자로 산을 그린 그림들이 시선을 끌었다. 그림 적업장의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지만, 원색을 강조한 그림들에서 본래 광활한 초원에서 살던 그들의 보습을 보는 듯했다. 이런 그림은 이후에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다.    

 

   검은 색 목단으로 만든 정교한 동물조각품들도 눈길을 끌었는데, 구두약을 칠한 가짜 목단이 많다는 말을 듣는 순간 ‘아니 이럴 수가’하는 허탈함에 젖어야 했다. 잘못된 상혼이 뻗쳐나가는 끝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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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인트로 그린 그림 ]

 

   어시장이 볼 만하다고 하여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항구도시인 만큼 어시장도 바닷가에 있다. 마치 우리의 가락동이나 노량진의 어시장을 방불케 하는 이 어시장은 다소 지저분하기는 해도 활기가 넘친다.
   그런데 우리 일행을 보자 “고등어, 갈치, 오징어, 가오리, 꽁치, 새우”를 사라고 외친다. 도대체 언제 한국말로 생선 이름을 배운 것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김현식씨 말이 한국인들이 생선 사러 자주 온다고 한다. 꽃게 1kg에 우리 돈으로 1,500원 정도이니 나부터라도 이곳에 산다면 자주 다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시내에 일식당이 몇 개 있는데 주인이 전부 한국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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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르 에스 살람의 어시장 ]

 

     항구의 어시장 맞은편으로는 왕복하는 카페리가 다닌다. 그런데 그 배를 타려면 1-2 시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다. 해안가 도로를 이용하여 가려면 악성 교통체증으로 그보다 더 걸리기 때문에 도리 없이 기다린다. 그래서 배를 기다리는 차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멀지도 않으니 부산의 광안대교처럼 다리를 하나 놓으면 간단히 교통난이 해결되련만 기대하기 어렵단다. 카페리 운항선사의 뒤에 유력한 권력자가 있다는 것이다. 민심에 반하는 그 권력이 얼마나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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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시장에서 ]

 

   호텔로 돌아가는 가는 길에 농산물시장 있어 잠깐 들렀는데, 감자, 마늘, 고추, 옥수수, 바나나, 배추, 상추 등 우리 시장에서 볼 수 있는 웬만한 것은 다 있었지만, 채소가 썩 신선해 보이지는 않았다.  

 

   세계적인 호텔체인인 세레나호텔은 시설도 훌륭하다. 내부시설도 깔끔하고, 푸른 초원과 야자수나무, 그리고 깨끗한 야외수영장이 관광객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뷔페식 저녁식사는 열대과일이 풍부하여 집사람이 특히 좋아했다. 사탕수수를 직접 짜서 만들어 주는 주스가 특히 신선하고 맛이 좋았다.
   그런데 마침 이날부터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이 이 호텔에 며칠 투숙하는 바람에 경비가 삼엄했다. 외부에서 들어가는 차량들은 폭발물탐지기로 차량바닥까지 조사했고, 투숙객들도 현관 출입 시 반드시 엑스레이 투시기를 통과해야 했다. 클린턴은 아프리카의 농업을 발전시키는 일에 일조하기 위하여 방문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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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레나 호텔 ]

 

 잔지바르(Zanzibar)

 

    8월 4일, 일요일이라 어디를 둘러볼까 망설이다 잔지바르에 가면 옛날 노예시장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고 하여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잔지바르는 섬이기 때문에 다르 에스 살람에서 배를 타고 가야 한다. 비행기도 있으나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아 배를 탔다. 가는 데 2시간 30분, 돌아오는 데 1시간 30분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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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 위치]

 

    같은 거리를 어떻게 1시간이나 단축할까? 비결의 배의 성능이다. 오가는 배로 킬리만자로 Ⅰ,Ⅱ,Ⅲ,Ⅳ호가 있는데, 그 중 Ⅳ호가 최근에 건조된 것이어서 다른 배들보다 성능이 뛰어난 것이다. 그 대신 1시간이나 단축할 만큼 배가 빨리 달리므로 배멀미를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가이드 김현식씨가 준비한 ‘귀미테’까지 붙였지만 심한 어지러움증에 시달려야 했다. 건장한 흑인들도 토하는 것을 보면서 나와 집사람의 건강에 자신감을 얻었다면 과언일까.

 

    배는 마치 비행기처럼 VIP석, 비즈니스석, 이코노미석으로 객실을 구분하여 놓았다. 왕복 모두 만원인 것으로 보아 그만큼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특히 내륙에서 각종 생필품을 잔뜩 사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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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킬리만자로 여객선 ]

 

     잔지바르는 인구 40여 만명이 사는 섬이지만, 사실상 탄자니아 내의 독립국이나 비슷하다. 본래 영국식민지에서 1961년 내륙에서 탕가니카가 독립하고, 1963년 잔지바르 섬에서 잔지바르가 따로 독립하였다가, 1964년 두 나라가 합쳐져서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 내륙은 이슬람교도가 35%인 데 비하여 잔지바르는 99%가 이슬람교도이다. 그런 역사적 배경으로 잔지바르에는 별도의 고등법원이 있고, 내륙에는 없는 이슬람 종교법원도 있다.
   이처럼 이슬람세가 강한 곳인데 마침 아직 라마단 기간이 끝나지 않아 점심식사를 할 음식점 찾기가 힘들다며 김현식씨가 도시락을 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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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돛을 단 고깃배와 바다에서 배를 끌고 가는 어부]

 

   다르 에스 살람에서 잔지바르까지 가는 2시간 30분의 뱃길은 순탄하다. 초록빛 바다를 가르며 달리는 뱃전에 서면 시원한 바닷바람이 멀리 극동에서 온 관광객의 옷깃을 스친다, 다르 에스 살람 최대의 빈민지대가 보이는가 하면 그 앞 바다에 한가로이 떠 있는 요트들도 보인다.  동력 없이 돛에 의지하여 움직이는 고깃배도 있고, 분명 바다 한 가운데이건만 수심이 낮은 곳인지 걸어서 배를 끌고 가는 어부가 있어 눈을 크게 뜨게 한다. 

 

   배에서 접근하면서 보이는 잔지바르는 붉은 색 지붕의 남부유럽풍 건물들이 아름답게 늘어서 있는 멋진 곳이다. 그러나 이곳도 막상 상륙하여 보면 역시 ‘100m’ 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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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 본 잔지바르 전경 ]

 

  잔지바르는 사실상의 독립국답게 상륙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여권으로 입국심사를 한다. 관광객이 몰려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입국장 기둥에 여러 나라 국기가 그려져 있는데, 태극기도 그려져 있어 반가웠음은 물론이다. 대한민국의 위상이 이곳에까지 뻗쳤음이리라.  김현식씨의 사전 연락을 받은 잔지바르 현지가이드가 차를 가지고 나와 있어 그 차로 이동했다. 교통체증이 심하기는 여기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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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지바르 입국장의 태극기 ]

 

   노예시장의 유적이 있는 중심가로 가는 동안 길 양옆의 풍경을 볼 수 있었는데, 인산인해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터를 지나게 되었다.   먼지가 풀풀 나는 맨땅에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의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여자들은 대부분 얼굴에 보자기를 쓰고 몸에 망토를 두른 ‘히잡’ 형태였다. 얼굴을 몽땅 가린 차도르를 쓴 여자는 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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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지바르의 장터 ]

 

       노예시장은 과거 포르투갈 사람들이 내륙 각지에서 잡아온 노예들을 이곳에 수용하였다가 수출하는 기지로 사용한 곳이다.  한 뼘 정도 되는 틈으로 겨우 햇빛이 들어오는 지하의 좁은 골방, 화장실도 따로 없는 맨바닥에 50명(남자), 75명(여자)씩 가두어 두었다니 참으로 끔찍하기 짝이 없다.  그 골방에는 지금도 당시 도망치지 못하게 노예들을 묶었던 쇠사슬이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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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를 가두었던 골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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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사슬을 목에 건 노예형상 ] 

 

   드넓은 초원에서 동물들과 그야말로 평화롭게 지내던 흑인들에게 느닷없이 총을 들고 나타난 백인들, 본래 그 땅의 주인이었던 흑인들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학살하고 노예로 부리고 그냥 물건 취급하면서 사고판 백인들, 역사는 그들을 과연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창조주가 있다면 과연 이를 용인한 것인가.
   2006년에야 비로소 영국의 블레어 총리와 프랑스의 시라크 대통령이 노예무역에 대하여 사과하고, 2007년에 미국 의회가 사과했다고 하지만, 과연 얼마나 진정성이 담겼을까.
   노예시장 옆에 세워져 있는 성당 속 예수님상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중 한국의 어린 처자들을 잡아다 군인들의 성노예로 부리고도 사과는커녕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하려고 발버둥치는 일본인들의 행태는 또 어떤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표어가 시리도록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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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시장의 성당 ]

 

    노예시장 유적지에서 나와 시가지를 걸었다. 안타깝게도 식민지 시대에 세운 건물들이 개보수를 하지 않아 거의 폐허화되고 있었다. 해안가의 멋진 집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전통공예품을 파는 골목이 있어 가 보았다. 우리나라의 인사동 같은 곳이다. 골목이 거의 미로 수준이다.
   이곳에서도 다르 에스 살람의 공예품시장처럼 페인트로 그린 동식물 그림과 목각 제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안목이 없는 나로서는 잘 모르겠으나, 집사람 말이 다르 에스 살람의 그곳보다는 물건의 질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눈구경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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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지바르의 시가지 ]

 

    마침 앞서 말한 클린턴도 이곳을 방문하여 동행한 그의 딸 첼시와 골목에서 마주쳤다. 그녀가 거리의 아이들에게 살갑게 대해 주는 모습이 보기 좋다. 총을 든 군인들이 경비를 삼엄하게 서는 것은 전직 미국 대통령에 대한 예우차원인가, 아니면 혹시나 있을지 모를 테러를 대비하기 위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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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린턴의 딸 첼시 ]

 

     2-30분 정도 차를 타고 나가면 에메랄드빛 해안의 멋진 풍광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리고 돌고래도 볼 수 있다는데.... 배의 출항시간에 쫓겨 포기한 게 아쉽다. 이곳으로 오는 배 안에서 본 많은 서양 젊은이 배낭족들을 하나도 볼 수 없는 것이 다들 그곳으로 간 까닭인가....

 

탄자니아 고등법원

 

   8월 5일 오전 10시, 한국대사관의 오창석 서기관님과 함께 탄자니아 고등법원을 방문하였다. 탄자니아의 최고법원으로 우리의 대법원격인 항소법원(The Court of Appeal of Tanzania)은 휴가 중이라 대신 고등법원을 방문한 것이다. 탄잔아에는 고등법원이 다르 에스 살람의 탄자니아 고등법원과 잔지바르의 잔지바르 고등법원 두 개 있다. 준두(Fakihi A.R. Jundu) 고등법원장과 4명의 고등법원 법관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건물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언뜻 보아서는 법원 건물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차를 몇 대 주차할 공간도 부족하다. 법관 1인당 연간 400건 정도 처리한다고 한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통해 그 동안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 법관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사법제도에 관한 연수 및 교류를 하였는데 탄자니아 법관은 아직 한 명도 그런 적이 없다고 하였더니, 나중에 항소법원장에게 전하여 탄자니아 법관들이 한국을 방문하도록 하겠다며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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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자니아 고등법원장 및 법관들과 함께 ]

 

    고등법원 방문을 마치고 한국대사관을 들렀다. 대사관은 현재 다르 에스 살렘에서 최고로 높은 건물인 22층짜리 현대식 건물의 19층에 있다.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 집기가 다 비치되지 않은 상태이다. 공간이 널찍하고 바닷가에서 멀지 않아 전망이 탁 트여 근무여건이 매우 좋아 보였다. 


    정일 대사님의 초청으로 이 건물의 22층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서울 남산의 N타워처럼 식당이 회전식이어서 식사하는 동안 앉아서 다르 에스 살람의 전경을 다 볼 수 있다. 바닷가 쪽의 풍요로운 풍경과 내륙 쪽의 그렇지 못한 풍경이 대비된다. 비록 서울만큼 번화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전쟁의 위협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는 한가로움이 부러움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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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전식당에서 본 잔지바르 항구. 정일 대사님과 함께]

                                   

   점심식사를 마치고 공항으로 이동하여 아루샤행 비행기에 올랐다. 다르 에스 살람이 탄자니아의 동쪽 끝 항구도시인 데 비하여 아루샤(Arusha)는 케냐 접경에 있는 내륙도시이다(인구 130만 명). 오후 4시 30분에 출발한 비행기가 아루샤 인근 킬리만자로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였다.
  이 공항은 명색이 그래도 국제공항(Kilimanjaro International Airport)이라고 씌어 있는데 실상은 활주로와 관제탑 하나 덜렁 있는 전형적인 시골공항이다.  현지 가이드 도노반이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차로 아루샤의 메루 호텔(Mount Meru Hotel)까지 가는데 1시간 30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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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킬리만자로 국제공항 ]

 

     메루 호텔 인근의 메루산은 해발 4,565m로 탄자니아에서 킬리만자로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그러나 도착한 때부터 시작하여 이틀 후 아루샤를 떠날 때까지 끝내 그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내내 구름에 가려 있었던 것이다.

 

    메루 호텔은 2010. 12. 17.에 문을 연 현대식 호텔이다. 탄자니아의 현 대통령 키크웨테(Kikwete)가 공식적으로 개관한 호텔이라는 동판이 현관에 자랑스레 걸려 있다. 
  그 호텔의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는데, 내 입맛에는 영 맞지 않았다. 그래도 집사람이 비프스테이크의 굽는 정도를 미디엄으로 시켰는데 바싹 구운 고기가 나와 웨이터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더니 곧바로 새로 만들어다 준다.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이 잘 된 듯하다. 내부 시설도 훌륭했고, 특히 정원이 아름다웠다. 다르 에스 살람의 세레나 호텔도 그렇듯이 아무래도 땅이 넓고 값이 싸니까 특급호텔들은 부지를 널찍하게 잡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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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루 호텔의 전경과 정원 ]

 

  킬리만자로

 

  8월 6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킬리만자로 산을 향해 출발하였다. 산행 가이드로 도노반이 기도와 이노센트를 데려 왔다. 기도는 킬리만자로 정상만 11번 올라갔다는 베테랑이다. 이노센트는 본래 운전 전문인데, 이 날은 산행도 내내 함께 했다.

 

  가는 길에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Rwanda)를 지나게 되어 주차장에 차를 대고 안에 들어가 보려고 했으나 사전에 방문이 약속된 것이 아니라서 출입이 안 된다고 하여 건물 사진만 찍고 발길을 돌렸다.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는 1994년 르완다에서 발생한 대학살 사건을 다루기 위해 UN의 결의로 세워진 국제사법기구다. 1997년 1월 UN안전보장이사회 산하에 재판소가 설치돼 첫 재판이 이뤄졌다. 르완다 대학살만을 다루는 임시 기구이지만 아직도 전범이 모두 체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르완다 대학살 사건은 1994년 아프리카의 르완다에서 벌어졌다. 당시 다수 종족인 후투(Hutu)족 출신 대통령이 피살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후투족이 100일 동안에 소수민족인 투치(Tutsi)족 80만 명을 살해했다. 투치족의 르완다애국전선이 정권을 잡으면서 학살은 종식되었고, 투치 족 출신의 폴 카가메 대통령이 UN에 학살 책임자들의 처벌을 요청하여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가 설립된 것이다.
   이 재판소를 아루샤에 설치한 것은 르완다 내에 둘 경우 중립성 문제가 있을 수 있고, 탄자니아가 당시 주변국들 중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적이었던 데다 아루샤는 르완다와도 가깝기 때문이다. 1997년 시작된 첫 재판에서 대학살 당시 르완다 총리였던 장 캄반다(Jean Kambanda)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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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

 

   아루샤에서 킬리만자로로 가는 길(편도 1차선의 포장도로이다) 옆에는 지평선이 보이는 옥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탄자니아와 케냐에서는 도시를 벗어나면 그야말로 광활한 대지가 눈앞에 펼쳐져 일직선의 지평선이 마치 하늘과 땅을 가르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그 장면을 대할 때마다 ‘저 넓은 땅이 우리나라에도 있다면...’ 하는 아쉬움이 늘 머릿속에 자리한다.
  그리고 가끔 지나게 되는 시골마을의 노천시장(주로 농산물이 거래된다)에서 민초들의 고단한 모습을 생생하게 접하노라면 괜스레 마음이 짠하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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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수수밭과 노천시장]


  아루샤보다는 작은 도시 모시(Moshi)를 지나면 곧 킬리만자로 산에 도착하게 된다. 킬리만자로 산 등산을 위해서는 아루샤보다는 모시에서 숙박하는 것이 편한데도 많은 사람들이니 아루샤에서 묵는 것은 모시에는 이렇다할 만한 호텔이 없기 때문인 듯하다.

 

  오전 11시 킬리만자로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다. 해발 1,970m의 마랑구(Marangu) 지구이다. 이미 세계 각지에서 온 많은 등산객들과 그 등산객들의 짐을 운반할 포터들도 붐빈다.  

 

  등산객들이 정상 정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포터들을 고용하여야 한다. 적게 잡아 4박 5일 걸리는 일정이라 숙식을 해결할 식량과 침구가 있어야 하는 까닭에 등산객들로서는 포터의 이용이 필수적이고, 탄자니아 정부에서는 인력 고용 측면에서 이를 요구하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다. 포터들 중에는 여자도 있는데, 커다란 짐을 머리에 이고 가는 모습이 가히 경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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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킬리만자로 등산로 입구 ]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등산을 위해서는 입산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 절차가 부지하세월이다. 무려 1시간 30분 걸렸다. 이곳 특유의 ‘뽈레뽈레(Pole Pole)’ 문화 탓이다. 뽈레는 스와힐리어로 ‘천천히’라는 뜻이다. 이곳 사람들(케냐도 마찬가지이다)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너무 늦는 것 아니냐고 하면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라는 답이 돌아온다. 역시 스와힐리어로 ‘걱정 말라’라는 뜻이다. 그런데다가 워낙 교통체증이 심하다 보니 케냐나 탄자니아에서는 약속시간에 2시간 늦는 것은 예사라고 한다. 한 때 악명을 떨쳤던 ‘코리안 타임(Korean Time)’은 그야말로 새 발의 피인 셈이다. 성미 급한 한국인에게는 복장이 터질 노릇이다.

 

    결국 12시 30분이 되어서야 등산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처럼 시작이 늦는 바람에 하산할 때 날이 어두워져 다소 고생을 하였다.  킬리만자로 등산로는 5단계로 나뉜다. 첫째가 해발 2,720m의 만다라(Mandara)지구까지로 정글지대(Forest)이다. 둘째가 해발 3,720m의 호롬보(Horombo)지구까지로 황야지대(Moorland)이다. 셋째가 해발 4,703m의 키보(Kibo)지구까지이고, 넷째가 해발 5,685m의 길만스(Gilmans)지구까지인데 둘 다 산악불모지대(Alpine Desert)이다. 마지막 다섯째가 해발 5,895m의 정상(Uhuru Peak)이다.

 

  우리는 어차피 간단한 트래킹을 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만다라지구까지만 갔다 오기로 했다. 그래도 총 연장 16km로 왕복 6시간 30분 걸리는 만만치 않은 산행이다. 특히 요새 거의 등산할 기회가 없었던 집사람이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히 아무 탈 없이 완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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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킬리만자로의 등산로 ]

 

    만다라까지의 등산로는 온통 하늘이 거의 안 보이는 정글 속으로 이어진다. 물론 중간 중간 바위나 돌로 된 길이 없는 것은 아니나 대부분 화산재로 된 붉은 색 흙길이어서 걷기에 편하다.
   거기에 춥지도 덥지도 않은 기후가 일조하였는데, 가끔 이슬비가 섞인 운무가 찾아왔지만 노련한 가이드 기도 덕분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당신 이름 ‘기도’가 한국말로는 ‘pray’ 라는 뜻이어서 우리는 오늘 계속 킬리만자로 산신령한테 기도(pray)하면서 올라가니 아무 탈 없이 잘 할 거라고 하자, 기도가 자기만 믿으라며 아무 걱정 말라고 맞장구를 친다. 

 

    오후 4시, 마침내 해발 2,720m의 만다라지구에 도착했다. 백두산 정상(2,744m) 정도의 높이에 올라온 셈이다. 주위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삼각지붕 형태의 통나무집(Lodge)들이 여러 개 있었다. 정상으로 갈 사람들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올라가는 것이다. 통나무집 안을 들여다 본 집사람이 자기는 도저히 그 안에서 못 잘 것 같다고 한다. 이 높은 곳에 있는 통나무집의 시설이야 안 보아도 뻔하다. 눈비를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설인 것이다. 그나마 그런 시설이 있다는 게 등산객들에게는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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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의 만다라 지구] 

 

    생각 같아서는 만다라지구에서 좀 더 머물고 싶었지만, 기도가 하산을 재촉한다. 아무래도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하산을 다 마치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이다. 평소의 등산 경험으로는 3시간 30분 걸려 올라간 산을 내려갈 때는 한 시간 정도 단축하는 것이 예사였는데, 막상 이번에는 여의치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집사람이 내리막길이라고 해서 빨리 걷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저녁 7시가 되어서야 하산을 끝냈는데, 이미 주위는 깜깜절벽이었다.
   아루샤의 호텔로 돌아오니 밤 9시 30분. 당초 중국집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었는데, 다 취소하고 그냥 샤워 후 꿈나라로 향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