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고 또 쉬는 곳(범어사)

2015.05.31 14:01

범의거사 조회 수:941

 

옥봉선사님,

 

참으로 오랜만에 안부 여쭙니다.

평안하신지요?

지난 법의 날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찾아뵙고 축하드리는 예의를 갖추지 못해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유수처럼 지나가는 세월 속에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하루하루 허덕이며 살다 보니,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다시 여름이 되는 계절의 변화마저 소생과는 무관한 일처럼 여겨지기만 합니다.

 

   그런 연유로 지난 2015년 320-21일 부산을 다녀왔음에도 그 소식조차 전하지 못하였습니다. 부산고등법원장의 초청으로 대법원 제3부 대법관들이 부산을 방문한 것입니다주말을 끼고 법원을 찾은 김에 겸사겸사 부산의 여러 명소도 둘러보았습니다.

    영화 국제시장으로 인해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국제시장, 둘레길 열풍 속에 태어난 이기대(二妓臺) 갈맷길, 마천루의 숲으로 변한 해운대, 조용필의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에 등장하면서 주가가 급등한 동백섬과 오륙도... 그 하나하나가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범부에게 무엇보다도 깊은 추억으로 남을 곳은 범어사(梵魚寺)였습니다.

    그동안 전국의 웬만한 사찰은 두루 다녀보았어도 유독 범어사는 갈 기회가 없어 아쉬웠는데, 이번에 부산에서 1박을 하는 일정이 잡히자마자 곧바로 범어사를 택하여 묵은 소원을 풀었답니다.

 

    금정산 자락에 자리한 범어사는 조계종 14교구 본사답게 실로 거찰(巨刹)이더군요. 부산 시내에 있건만 절에 들어서면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무릉도원처럼 아늑하더이다.  

     주지이신 수불(水弗)스님이 넉넉한 풍채와 온화한 미소로 한양나그네를 맞아주시는데, 초면이건만 전혀 어색하지 않은 친근감을 느끼게 함 또한 금정총림 범어사의 깊은 내공 때문이 아닐는지요. 비록 큰 절의 살림을 맡아 소임을 다하시느라 여념이 없지만, 스님의 선승으로서의 면모는 여일하시더군요.

 

수불스님.jpg

 [수불스님과 함께]
 

   절에서 잠자리로 제공해 준 휴휴정사(休休精舍)는 조금 과장하면 동시에 100명은 족히 머물 수 있을 만큼 넓은 방이었습니다.

    이름대로라면 몸도 쉬고 또 마음도 쉬는 곳일 텐데, 금정산의 기()가 워낙 충만한 곳이라 그 안에서 홀로 마음을 내려놓고 밤을 보내기에는 범부의 그릇이 너무 작고 벅찼답니다. 그래도 주지 스님의 깊은 뜻을 헤아려 자리를 펴고 누웠는데 역시 잠이 쉽게 들지 않더군요.

    분별하고 시비(是非)를 가릴 것이 많아 번뇌에 찌든 속인은 쉬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았던 것이지요.

 

   21일 아침에 산내 암자 원효암을 찾았습니다. 범어사에서 금정산 정상을 향해 1시간 정도 걸으면 나오는 조그마한 암자입니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금정총림(金井叢林) 방장(方丈)이신 지유(知有) 스님이 머물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장좌불와(長坐不臥)에 일일일식(一日一食)으로 유명하신 스님은 올해 연세가 85세이신데도 겨울이면 용평스키장 최상급코스에서 스키를 즐기신다고 하여 속인의 입을 벌어지게 하였지요.  무슨 연유로 그런 위험한 운동을 하시냐고 여쭈니, 그것이 정신 집중에 최고라고 하시더군요.

    하기야 스키를 탈 때 잠시라도 한눈을 팔거나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그대로 넘어져 구르는 것을 생각하면 스님의 말씀을 이해 못할 바 아니나, 아무리 그래도 스님 연세에는 좀 지나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지유스님.jpg

     [지유스님과 함께]

 

     그런가 하면 귀한 손님이 왔다고 시계를 옆에 놓고 시간을 측정하시면서 몸소 원두를 갈아 커피를 타서 주시는 바람에, 평소 커피를 멀리하여 온 촌자도 기꺼이 커피를 마셨답니다. 잘은 모르지만 구수한 맛이 좋더군요.

      1시간 넘게 꼿꼿한 자세로 마음공부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시는 스님의 법문을 경청한 후 다음 일정 때문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선사님,

곧 초파일이 다가오네요.

성불하시길 빕니다.

 

2015. 4.

 

범의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