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청량하구나(청량산)

2015.06.17 22:12

범의거사 조회 수:851

 

            실로 청량하구나

 

    내가 청량산의 존재에 관하여 처음 들은 것은 청주지방법원충주지원장 시절이던 1995년의 일이다. 당시 여행도사였던 공재연 신경정신과 원장이 다녀왔다면서 꼭 가보라고 추천하였다. 그 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호문혁 교수님으로부터도 청량산과 청량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전국의 산을 찾아다니는 방랑객의 귀가 솔깃해진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건만, 차일피일 시간만 흘렀다. 2012년에 이르러서야 청량사의 경내네 발을 들여놓았고,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된 후 20년이 지난 2015년 5월에야 비로소 청량산 산신령께 등정 인사를 올렸다. 올 1월에 금년 1년치 법원산악회 일정을 짤 때 청량산을 계획표에 넣은 덕분이다.

 

2015.5. 9.

 

이 날도 예외 없이 아침 7시 반에 서울법원종합청사에서 버스로 출발하였다. 경상북도 봉화의 청량산 등산로 입구까지는 대략 4시간 걸린다. 화창한 봄날, 그것도 푸른 5월의 주말이라 고속도로가 붐볐지만, 빠른 길을 능숙하게 찾아가는 운전기사의 운전솜씨 덕분에 예정대로 도착하였다.

 

해발 870m의 청량산은 산 아래로 낙동강이 흐르고 산세가 수려하여 예로부터 소금강이라 불렸다. 1982년 8월 산을 중심으로 봉화군과 안동군 일대 48.76㎢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최고봉인 장인봉(丈人峰)을 비롯하여 외장인봉·선학봉·자란봉·자소봉·탁필봉·연적봉·연화봉·향로봉·경일봉·금탑봉·축융봉 등 12봉우리(육육봉)가 연꽃잎처럼 청량사를 둘러싸고 있다. 산속에는 신선이 내려와서 바둑을 두었다는 신선대, 선녀가 유희를 즐겼다는 선녀봉, 최치원이 마시고 정신이 맑아졌다는 총명수와 감로수 등의 약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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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사 일주문]

 

청량산 등산로 입구의 탐방안내소를 지나면 곧 주차장이 나오고 이곳에서 하차하여 청량사 일주문을 지나면 등산이 시작되는데, 포장된 이 길이 등산객을 처음부터 질리게 한다. 경사가 무척 급하기 때문이다. 3년 전에 청량사를 찾았을 때도 그랬다. 그렇지만 어찌 땀을 안 흘리고 명소를 구경할 수 있으랴.

 

몇 굽이를 돌고 돌면 마침내 청량사가 나타난다. 주위의 여러 웅장한 봉우리들이 연꽃처럼 둘러싸고 있는 한가운데에 절이 수줍은 꽃술처럼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는데, 부처님 오신 날을 준비하느라 바쁜 경내에는 온갖 꽃들이 봄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임유후(任有後. 1601-1673)의 시 ‘題僧軸’(제승축)을 떠올리게 한다.

 

山擁招提石逕斜(산옹초제석경사)

洞天幽杳?雲霞(동천유묘비운하)

居僧說我春多事(거승설아춘다사)

門巷朝朝掃落花(문항조조소낙화)

 

산들이 감싸안고 손짓하는 돌길을 따라 올라가니

호젓한 골짜기에 자리한 절에는 구름이 덮여 있다.

스님이 다가와 이르기를 봄이 되니 할 일이 많다오.

절문 앞에 떨어진 꽃잎들을 아침마다 쓸어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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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사 유리보전]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이 절은 특이하게도 법당이 유리보전(琉璃寶殿)이다. 약사여래불을 주불(主佛. 좌우의 협시불은 문수보살과 지장보살)로 모신 것이다. 만병을 치유하는 부처인 약사여래불을 모신 절이라서 그런가,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하러 찾는 이가 많다고 한다. 10년 넘게 아이가 없어 고민하던 부부가 이곳에서 묵으며 기도한 후 기(氣)를 받아 아이 셋을 줄줄이 낳았다는 이야기를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청량사에서 목을 축이고 절 옆으로 난 길을 따라 30여 분 오르니 김생굴이 나타난다. 신라시대의 명필인 金生(김생)이 머물며 10년간 글씨를 익혔다는 동굴이다. 규모가 작아 과연 이곳에서 그렇게 오래 머물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1,300년 전에는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을 수도 있으니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다. 굴을 정비하고 왕희지에 필적하는 신필(神筆)인 그의 글씨를 걸어놓으면 어떨까. 이 또한 부질없음인가...

 

김생굴을 지나면 경사가 급해지는데, 그 급해진 경사의 정점에 자소봉(840m)이 있다. 아예 급경사의 철계단을 올라가야 봉우리 정상에 다다른다. 온통 바위로 된 이 비좁은 정상에 서면 주위 사면이 훤하게 펼쳐진다. 청량산의 주봉인 장인봉의 정상은 펑퍼짐한 흙지대로 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시야가 오히려 가리는데, 자소봉은 깎아지른 절벽 위가 정상이다 보니 그 위에 서면 멋진, 그야말로 청량한 경치에 취하게 된다. 게다가 때마침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라니... 왜 이 산을 청량산이라고 하는지를 알게 해 준다. 그 경치에 취하여 발을 잘못 내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로 직행할 염려가 있어 정상 주위에 철책을 둘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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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소봉 정상]

 

자소봉에서 내려와 평지를 찾아 점심식사를 하였다. 이번 산행에도 어김없이 김인숙 비서관이 맛있는 점심을 준비하여 왔다. 나와 함께 근무한 지난 3년 반 동안 산행 때마다 보온도시락에 점심을 준비하여 온 그 노고에 늘 감사할 따름이다.

식사 후 몇 번 오르락내리락한 후에 하늘다리에 도착하였다. 남한에서는 제일 높은 해발 800m에 설치된 길이 90m의 출렁다리이다. 2008년에 설치하였다고 한다. 울렁증이나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못 건널 성싶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다리 중간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아름답다.

 

하늘다리.jpg

[하늘다리]

 

하늘다리를 지나면 곧 해발 870m의 장인봉에 도착하는데, 아무런 특징도 없고 시야도 좁아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 이곳에서부터 청량산 탐방안내소까지는 계속 내리막길인데, 이 길의 80-90%는 계단이다. 그것도 경사가 매우 급하여 앞으로 보면서 내려가기가 겁날 정도이다. 무릎이 약한 나에게는 쥐약이나 다름없다. 계단이 아닌 곳은 비좁고 미끄러운 흙길인데, 그마저 절벽 위에 겨우 만든 길인지라 길옆의 난간이 아니면 추락하기 십상이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산을 다녀보았지만 이런 하산길은 처음이다. 청량산이 풍광으로만 청량한 곳이 아니라 급경사의 내리막길로도 산객의 등을 청량하다 못해 서늘하게 함을 알겠다.

 

겨우겨우 하산을 끝내니, 아이고 내 무릎! 탐방안내소 옆 계곡물에 발을 깊이 담그는 순간 다시 청량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총 6.4km, 6시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