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5. 8. 21.자)

“때론 김삿갓 때론 고산자 되어… 산따라 길따라 21년 방랑했죠”

9월 퇴임하는 민일영 대법관, 백두대간 산행기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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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일영 대법관이 2004년 북한 금강산을 오를 때의 모습. 금강산 관광이 허용되던 당시 목에

‘금강산 관광증’을 걸고 포즈를 취했던 그는 산행기에“아, 금강산! 그 자체였다”고 감회를 적었다.

민일영 대법관 홈페이지

 

 

‘심장이 산을 부르고 몸이 그 외침을 따라가는 사람, 그래서 산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한 산악인.’ 

민일영 대법관(60)은 함께 산을 오르는 후배 법조인들에게서 이런 평가를 받는다. 주말이면 하루 10시간씩 등반을 하면서 전국의 산하를 훑고 다니는 그의 발걸음은 젊은 판사들도 헉헉대며 따라잡아야 할 정도로 거침이 없고 단단하다. 

백두대간을 돌면서 산행기를 써온 지 21년째. 민 대법관이 다음 달 퇴임을 앞두고 자신의 홈페이지에 차곡차곡 쌓아온 글들을 모아 20일 책으로 펴냈다. 비매품으로 엮은 책 ‘산 따라 길 따라’는 총 860쪽이다. 전화번호부만큼 두껍고 큰 책에는 그가 담고 싶었다는 ‘시인 김삿갓의 낭만과 고산자(古山子)의 충정’이 곳곳에 녹아있다. 

최근 기자와 만난 민 대법관은 스스로 “내 사주에 역마살이 끼어있는 것 같다”며 미소지었다. ‘태생적 방랑기’가 있다고도 했다. 적막감이 감도는 대법원에서 하루 종일 판결에 몰입하는 근엄한 모습과는 정반대의 자평이었다. 

“하루하루 쌓여가는 업의 무게가 무겁다고 느껴질 때쯤이면 훌쩍 떠나곤 했지요.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금수강산의 산천을 따라 다니면서 배우고 느낀 것도 많아요. 그런 기록들을 묶었을 뿐입니다.” 

그의 글에는 국립공원은 물론이고 청량산, 금병산, 백덕산, 갈기산, 가리왕산 등 알려지지 않은 산에서 발견한 숨은 매력들이 빼곡히 담겨 있다. 수백 장의 사진과 함께 산행 코스의 특징, 등반길 에피소드들을 세세히 적었고, 사찰과 문화재가 갖는 의미와 역사도 자세히 소개했다. 일곱 도둑을 감화시켜 일곱 스님으로 만들었다는 칠보산 칠장사나 머슴의 구애를 받았던 월명 스님의 일화를 바탕으로 한 변산의 월명암 이야기에는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법원산악회장을 지내기도 한 민 대법관은 1950m 높이의 한라산을 시작으로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 등 이른바 한국의 ‘10좌’를 완등했다. 경기 양평 중원산의 ‘깔딱고개’를 넘어가면서 입에서 단내가 난 적도 있고, 무리한 산행으로 무릎 관절 수술을 받기도 했다.

“내려가는 길이 올라가는 길보다 힘든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도 똑같은 길을 되돌아 내려가는 것은 등산의 맛을 뭉개는 셈이나 마찬가지예요.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산행길에 마주치는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않았다. 가지와 잎이 마르는 병에 걸린 채 방치된 나무들, 글씨가 지워진 낡은 표지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컵라면 그릇과 쓰레기…. 민 대법관은 “환경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사람이 산을 즐길 수 있도록 조금은 더 시설 투자를 할 필요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산 정상에서 크게 ‘야∼호’를 외치는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지적했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야호’를 외쳤다가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으로부터 “야생동물들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고 주의를 받았던 때를 잊지 못한다. 

옛 한시와 서예에도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려진 민 대법관은 산을 오를 때 한시를 자주 읊조리곤 한다. 실제 그의 산행기에는 그 산의 느낌에 맞는 한시가 곳곳에 소개돼 있다.

‘산꼭대기는 차마 오르지 않는데/오르기 힘들어서가 아니다/산에 사는 사람의 눈으로는/인간 세상 바라보기가 두려워서이다.’(고려시대 문인 이규보의 산중우거·山中寓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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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대법관은 퇴임 이후 자택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면서 다시 산을 찾을 계획이라고 했다.

“그냥 거기에 고개가 있으니 오르고 나루가 있으니까 건너는 것이지요. 1등을 하거나 상대방을 이기려고 어금니 깨물 일 없이 능력껏 겸손하게 오르는 것. 그게 산입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출처 : http://news.donga.com/3/all/20150821/731663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