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이 나를 부른다(1)

 

히말라야(Himalayas),

 

   해발 7-8,000m의 고봉들이 즐비한 세계의 지붕이다. 그렇게 높은 산들이 즐비한 곳이기에 만년설이 덮여 있고, 그래서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눈(hima)의 거처(alaya)’라는 뜻의 히말라야로 명명된 곳이다. 총연장 2,400km에 달하는 그 히말라야산맥의 중심지가 네팔이다. 그래서 네팔에는 해발 4,000m가 넘는 산만도 1,000개가 넘는다. 그러니 그보다 낮은 산은 명함도 못 내민다.

   비록 산이 좋아 틈만 나면 산을 찾고 그래서 법원산악회장이라는 감투까지 써 보았지만, 기본적으로 가장 높은 산이 해발 1,950m이고, 1,500m가 넘는 산을 다 합쳐도 9개에 불과한 곳에서 나고 자란 범부(凡夫)에게는, 히말라야는 언제나 먼 나라의 이야기였고, 전문산악인들이나 등반하는 곳으로 생각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20년 전 충주에서 근무하던 시절 고등학교 선배이신 안과의사 한 분이 히말라야에 다녀온 사진을 보여 주셨을 때도 그냥 동화책 속 사진을 보듯 덤덤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던 차에 근래 몇 년 사이에 주위에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온 사람들이 생기고, 작년 가을에는 바로 옆방 동료가 다녀왔다는 말을 듣고 나도 더 늦기 전에 도전하여 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네팔지도.jpg[히말라야산맥의 해발 8,000m 이상 14좌]

  

카트만두(Kathmandu)

 

   2014년 갑오년이 막 시작된 1월 3일(금) 오전 10시 30분, 인천공항에서 네팔행 대한항공 직항편이 출발하였다. 매주 월, 금 2회 직항편이 다니는데도 비행기는 좌석의 8할이 찰 정도로 붐볐다. 그 대부분의 승객이 등산복 차림인 것으로 보아 다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탄 사람들일 것이다. 그만큼 히말라야가 우리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는 이야기이다.

 

   인천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남서쪽으로 내려가 중국 남부를 지나면서 기수를 서쪽으로 돌려 미얀마, 방글라데시를 거쳐 네팔의 카트만두로 향한다. 지도상으로는 중국에서 히말라야산맥을 바로 넘으면 더 빨리 갈 것 같은데, 항공노선이 그렇게 정해진 데는 나름이 이유가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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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공노선]

 

   이렇게 정해진 노선 덕분에 방글라데시에서 네팔 상공으로 접어들면 이내 오른쪽 창 밖으로 히말라야산맥의 눈 덮인 봉우리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구름 위에 솟아 있는 그 설봉들의 경치에 취하여 계속 감탄사를 연발하는데, 동행한 박보영 대법관님은 그 풍경을 본 것만으로도 이번 여정의 값을 한 것 같다고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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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에서 본 히말라야산맥] 

 

   7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현지 시각 오후 2시 45분에 네팔 수도 카트만두(Kathmandu)에 도착하였다(서울보다 3시간 15분 늦다). 네팔의 인구는 3,043만 명, 그 중 220만 명이 수도인 이곳에 산다. 인구의 1/5이 서울에 모여 사는 우리와 비교하여 보면 이곳 사람들은 그다지 수도로 몰리지 않는 모양이다. 네팔의 국민소득은 1인당 700달러 정도이다.

   카트만두 국제공항의 정식명칭은 트리부반 국제공항(Tribhuvan International Airport). 트리부반은 1911년부터 1955년까지 네팔을 다스린 왕의 이름이다. 정치형태가 2007년 왕정이 끝나고 2008년부터 공화정으로 바뀌었지만 공항이름은 여전히 한참 전에 사망한 국왕이름을 따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이들이 전통을 중시하기 때문일까. 그냥 의문으로 남겨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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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 국제공항]

 

   공항은 활주로나 청사 모두 볼 품 없다. 국제공항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너무 협소하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태국, 인도, 중동 등 주로 아시아 국가들의 비행기가 이곳을 드나든다. 케냐의 나이로비공항이 그렇더니 일본을 오가는 직항편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미국행도 역시 없고, 유럽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을 오가는 것이 고작이다. 히말라야의 고봉들에 첫발을 디딘 사람들이 대부분 서양인이고 지금도 많은 서양인들이 이곳을 찾는데,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이곳에 오는 걸까.

 

   공항을 나서자 영상 16도의 후끈한 기운이 얼굴을 덮친다. 서울에서 추운 새벽에 집을 나서느라 겹쳐 입은 등산복이 거추장스럽다. 혜초여행사의 카트만두 지사에서 마중 나온 현지가이드 빔의 안내로 숙소로 가기 위하여 여행사 전용버스를 탔다. 이곳 버스에는 운전석과 승객석 사이에 칸막이가 있고. 운전석에는 조수가 동승한다. 조수가 특별히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고용증대 차원인 듯하다. 도로는 좌측통행이다. 영국식민지였던 영향이다. 현대자동차도 가끔 보이지만, 일제 스즈끼 자동차가 제일 많다.

 

   카트만두의 숙소인 하이야트호텔에 도착하니 호텔 측에서 일행 모두의 목에 환영의 꽃다발을 걸어주며 인사를 한다.

 

“나마스테”

 

우리말로 “안녕하십니까”에 해당하는 이 인사말은 네팔에 있는 동안 계속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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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야트호텔 로비]

 

    이 호화로운 호텔은 시내 중심가에서 좀 떨어져 있는데, 드넓은 부지에 마치 고성(古城)처럼 자리하고 있다. 호텔 로비는 여러 가지 모양의 돌탑 모형들로 룸비니 동산을 형상하여 놓았다. 트레킹 후 서울로 돌아가기 전날 이곳에서 다시 묵는 기회에 시간이 나서 호텔을 둘러보았는데, 뒤뜰의 산책길을 한 바퀴 도는데 30여분이 걸렸다. 경내에 실제로 경작하는 밭까지 있을 정도이다. 다만 지은 지 오래 되어 시설이 다소 낡은 게 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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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텔에 여장을 풀고 시내구경 겸 저녁식사를 위해 중심가로 나갔다. 가는 도중에 자연스레 길가 풍경을 접할 수 있었다. 해발 1,281m에 위치한 카트만두는 주위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분지이다. 때문에 대기 순환이 잘 안 된다. 게다가 겨울은 계절적으로 비가 안 오는 건기(乾期)라서 공기가 탁하다.

 

   여기에 더하여 폐차 직전의 자동차와 길을 덮는 오토바이들이 뿜어 대는 매연, 차도 외에는 포장이 되지 않은 탓에 펄펄 날리는 흙먼지, 이들이 오케스트라로 연출하는 공기는 가히 살인적이다. 숨이 턱턱 막힌다. 길가의 건물들과 나무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다.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이 복면을 하고 있는 이유를 알 만하다(그들은 복면강도가 아니다). 오죽하면 교통순경이 마스크를 할까. 마스크를 쓴 교통순경은 유럽, 미주대륙, 아프리카를 두루 다녀본 범부의 경험으로도 처음 보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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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차와 오토바이] 

 

   차선도 없는 길에 차와 오토바이가 엉키고 그 사이를 아무 데서나 사람들이 건너다니니, 서로 비키라고 빵빵거리는 경적소리가 귀청을 따갑게 한다. 2003년 12월 베트남의 하노이에 갔을 때 장면이 복사판으로 떠오른다.

 

   한편 길가 전봇대의 전선은 거미줄도 이보다는 나을 듯싶을 정도로 엉키고 엉켜 있는데, 그 중 일부는 땅에 거의 닿을 만큼 늘어져 있어 위험하기 짝이 없다. 우기(雨期)에 큰 비라도 오면 감전사고가 나지 않을까 걱정된다. 거기에 곳곳에서 눈에 띄는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있는 집들이 오버랩되는 통에 정녕 이곳이 인구 220만의 수도 맞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동시에 동방 나그네가 사는 대한민국의 서울이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인가 하는 고마움과 자긍심이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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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엉킨 전기줄]

 

    카트만두에서 가장 번화하여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상가밀집지역이 타멜(Thamel) 거리이다. 서울의 명동쯤에 해당한다. 반면 네팔 사람들은 이곳의 물가가 비싸 다른 곳에 있는 상가를 주로 이용한다. 그런데 여기도 오토바이들이 질주하며 빵빵 대는 통에 정신이 없다.

    이곳에는 각종 기념품점, 옷가게, 음식점, 술집들이 즐비하다. 유명상표의 등산용품점도 여럿 있다. 한국의 블랙야크 판매점도 있다. 외래 관광객들이 많이 찾다 보니 곳곳에 사설 환전소가 있는 게 특이한데(왠지 모르겠으나 카트만두에서는 은행이 눈에 잘 안 띈다), 한국 사람들을 위하여 원화를 네팔의 루피(NPR)화로 직접 바꿔 준다. 환율은 대략 1루피가 10원 정도이다(100루피가 1달러). 그만큼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온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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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점에서 트레킹 때 쓸 안나푸르나가 새겨진 모자를 사려고 흥정하여 가격이 3달러(처음에 5달러 달라고 하였다)까지 내려갔으나, 다음날 안나푸르나에서 가까운 포카라에 가서 살 요량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이게 실책이었다. 다음날 포카라행 비행기가 날씨 탓으로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포카라에서 모자 살 시간이 없었고, 결국 트레킹 내내 지난 여름에 킬리만자로에서 사온 모자를 쓰고 다녀야 했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날씨의 변수를 항상 고려하여야 한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이곳에서는 사고 싶은 물건은 뒤로 미루지 말고 눈에 띌 때 사야 한다.

 

   타멜 거리에서 나와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장소는 교민이 운영하는 한식당이다. 삼겹살, 김치찌개, 된장찌개가 푸짐하다. 참이슬 소주도 있다. 그 동안 다녀간 많은 한국인들이 게시판에 흔적을 남겨 놓았다.

   그 중에는 2011년 10월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 중에 조난당해 고인이 되었건만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는 산악인 박영석 대장의 것도 있다. 히말라야 8,000m 급 봉우리 14좌를 완등하고(2001년), 2004년 남극점 도보탐험에 성공했고 2005년에는 북극점에 도달함으로써, 지구의 3극점(북극점, 남극점, 에베레스트)과 히말라야 14좌, 7대륙 최고봉을 모두 등반한 세계 최초의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그의 업적에 경의를 표한다.

 

010네팔지도1.JPG  [안나푸르나 트레킹 개념도]

 

힐레(Hile)

 

1월 4일 아침 5시 30분, 모닝콜을 받고 일어났다. 국내선 비행기로 포카라로 이동해 버스로 나야폴까지 간 후 그곳에서 트레킹을 시작하여 힐레까지 가는 일정이 만만치 않아 일찍 서두른 것이다. 6시 30분 호텔 뷔페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7시 15분 카트만두 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까지는 차로 15분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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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선 청사와  대합실]

 

   마치 인천공항이 생기기 전의 김포공항처럼 국제선과 국내선이 함께 있는 카트만두 공항의 국내선 청사는 꼭 우리나라 시골 읍의 시외버스터미널 같다. 각지로 떠나는 남녀노소, 심지어 태어난 지 사흘밖에 안 되는 갓난아이까지 어울린 풍경이 촌스러우면서도 정겹다. 맨발에 슬리퍼만 신은 허름한 차림(세수는 언제 한 걸까)의 네팔인 모습을 보면서 이곳이 공항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당초 8시 30분에 떠나기로 한 부다항공 비행기가 언제 떠날지 모른단다. 카트만두공항에도 안개가 끼었지만 무엇보다도 포카라공항에 안개가 심해 비행기의 이착륙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략의 예정시각이라도 알려 주면 다른 볼 일이라도 보련만 무작정 기다리란다. 이런 상황에 이미 이골이 난 것일까,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속절없이 무료하게 4시간이나 허송한 끝에 12시 30분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전날에는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출발하였다니 그나마 다행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중에 포카라에서 카트만두로 돌아갈 때도 역시 안개로 출발이 늦어졌는데,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다반사로 겪는 일이란다. 앞으로도 유념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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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항공 비행기와 비행기표]

 

    카트만두공항을 이륙해 겨우 30분간 비행하여 포카라공항에 도착하였다. 기다린 시간에 비하면 다소 허무하다. 비행기의 오른쪽 창 밖으로 히말라야의 고봉들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다. 비행기는 50인승으로 빈 자리가 없었다.

 

    카트만두에서 북서쪽으로 140km 떨어진 곳의 해발 900m에 위치한 포카라(Pokhara)는 네팔 제2의 도시이다. 인구는 20만 명 정도이다. 교육과 관광의 도시로 알려진 도시답게 카트만두와는 달리 공항부터 일견 깨끗하고 정돈된 이미지를 풍긴다. 이곳은 연중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적이 없을 정도로 온화하다.

'포카라'는 네팔어로 호수라는 뜻이다. 이름에 걸맞게 페와호, 베너스호, 루파호 등 호수가 많다. 특히 페와호는 날씨가 맑은 날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산이 호수에 그대로 비쳐 장관을 이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곳에서의 뱃놀이가 필수적인 관광코스이다. 우리 일행에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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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카라 공항]        

 

   혜초여행사의 포카라 지사에서 운영하는 히말라야로지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양기영 지사장의 부인이 정성스레 만든 볶음밥이 꿀맛이다. 로지는 현대식 2층집으로 건물 앞뒤로 정원이 있는 그림 같은 집이다. 1층은 지사장이 살림집으로 이용하고 2층의 방 3개는 여행객의 숙소로 사용한다. 현지 가이드가 두 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 지사장은 산속에서 보낸 4일 동안 내내 동행하였다. 특별한 배려에 고마울 따름이다.

이곳에서 여행가방 속의 물건들을 트레킹용 카고백(용량 80L. 혜초여행사에서 제공)에 옮겨 담았다. 나중에 포터들이 운반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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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말라야 로지]

 

   당초 예정은 포카라에서 관광을 하고 나야폴로 이동하는 것이었는데, 비행기가 늦어진 통에 점심을 먹자마자 바로 버스로 나야폴로 이동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 바람에 안나푸르나가 새겨진 등산모자도 살 수 없었다.

 

   험한 산을 몇 개 넘나든 끝에 오후 3시 50분에 나야폴(해발 950m)에 도착하였다. 트레킹의 시발점인 곳이다.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로지(산장과 식당을 겸한 곳)가 있거나 거쳐서 지나가는 여러 지명을 만나게 되는데(지도에도 나온다), 이곳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곳이 마치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마을처럼 여겨지기 십상이나, 전혀 그렇지 않다. 고작해야 등산객들이 묵는 로지 몇 개 있는 곳이 적지 않다.

   나야폴(Nayapul) 역시 마찬가지이다. 처음에 나야폴에 다 왔다고 차에서 내리라고 하여 커다란 동네인 줄 알았더니, 원 세상에 길가에 등산객을 상대하는 상가로 보이는 집 몇 채 있는 게 전부였다. 한국의 지도에 깊은 산 속의 집 몇 채 있는 외딴 마을이 나오던가? 이곳은 워낙 높은 산을 여러 날 가야 하는 곳이기에 확실한 지명이 이정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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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폴에서 힐레까지 지형]

 

   나야폴에서 이 날의 목적지인 힐레(해발 1,470m)까지는 4.25km로 걸어서 3시간 정도 걸린다. 그러나 이미 시계는 오후 4시를 넘어서고 있고, 걸어가다 날이 어두워져 산속을 헤맬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지프(jeep)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우리 일행 외에 양 지사장, 현지 가이드(보조가이드 포함) 2명, 포터 4명과 주방팀 8명이 인도 마힌드라 자동차회사에서 만든 SUV 차량에 나누어 타고 짐은 차 지붕 위에 실었다. 이곳에서는 짐을 차의 지붕 위에 싣고 다니는 것이 일반화된 듯하다.

   차는 낡았음에도 비포장의 험한 산길을 잘 달렸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운전사의 운전솜씨는 가히 예술이다. 차의 주유구에 깔때기를 꽂고 기름통을 들어 그곳에 경유를 붓는 모습이 우리나라의 5-60년대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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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야폴과 지프차] 

 

   오후 4시 50분, 차로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다 올라갔다. 여기서부터 힐레(Hile)까지는 20분 정도 가파른 길을 걸어야 한다.  터들이 차에서 짐을 내려 운반에 편리하게 그들의 방식으로 다시 꾸린다. 능숙한 솜씨로 꾸린 짐을 지고 걷는 그들의 모습이 감탄을 자아낸다. 범부는 하나 메고 가기도 힘든 짐꾸러미를 많으면 3개씩 이고 지고 간다. 포터 중에는 여자도 있다(그녀는 보조가이드 수잔의 처이기도 한데, 남편은 가이드로 편한 일을 하고 아내는 포터로 힘든 일을 한다). 비록 돈을 주고 그들을 정당하게 고용한 입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옷가지 몇 개 든 배낭만 달랑 메고 가는 내가 괜스레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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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의 모습과 줄지어 출렁다리를 건너는 포터들]    

 

   오후 5시 10분, 힐레에 도착하였다. 역시 로지들로 이루어진 작은 동네이다. 우리가 묵을 곳은 “SEE YOU LODGE”. 해발 1,470m에 위치한 탓일까 아직은 해가 있는데도 쌀쌀한 기운이 벌써 옷깃 안으로 스며든다. 가이드 빔과 수잔이 따라 주는 따뜻한 차가 몸을 한결 풀리게 한다.    

    배정된 방에 들어가 짐을 풀고 공동샤워실에서 샤워를 하는 사이 주방팀이 저녁준비를 끝내고 부른다. 한국식으로 푹 삶은 돼지 수육으로 차려진 식단이 싱싱한 야채들과 함께 풍성하다. 수육 외에도 국을 비롯하여 김치, 깍두기, 깻잎, 오이, 고추 등등 여러 가지 반찬이 많다. 덕분에 고기를 안 먹는 나도 밥 한 그릇을 쉽게 비웠다. 이에 더하여 따뜻한 숭늉이 곁들인 눌은밥이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이 눌은밥은 이후 산속에서 지내는 나흘 동안 계속 식탁에 올라왔다.  우리 일행이 식사를 마친 후에야 가이드와 포터, 주방팀이 식사를 하였다. 이는 그 후에도 계속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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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힐레의 로지] 

 

   여기서 나흘 동안 지낸 로지들의 공통점이자 유의할 사항을 적어 본다.

 

   (1) 우선 방은 보통 2인실인데 난방이 전혀 안 된다. 그래서 침대 위에 침낭(슬리핑백)을 펴고 그 안에서 자야 한다. 침낭은 혜초여행사에서 준비하여 나야폴에서 나누어 주었는데(물론 나중에 반납한다), 여러 사람이 사용한 것인 만큼 위생 상태는 장담할 수 없으나 나름대로 쓸 만했다. 꺼림칙하면 한국에서 가져올 일이다. 추위를 많이 타는 촌자는 가이드에게 이야기하여 뜨거운 물주머니(핫백)를 받아 침낭 속에서 끌어안고 잤다.

 

   (2) 그리고 방에 샤워실과 화장실이 딸린 로지도 있다는 말을 듣긴 하였으나, 개별적으로 특별주문하기 전에는 공동샤워실과 화장실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그 샤워실에 옷을 거는 시설이 없는 까닭에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마침 양 지사장이 고도가 높아질수록 고산증 때문에 샤워는 가급적 하지 않는 게 좋다고 하여 핑계 김에 다음날부터 이틀간은 샤워를 하지 않았다.

 

   (3) 샤워실 외에 수도시설이 따로 되어 있어 세수나 양치질을 할 수 있는데, 그 물이 만년설이 녹은 것이라 여간 차가운 게 아니다. 아침 저녁으로 세수나 양치질을 하고 나면 얼굴과 입안이 얼얼하다. 궁리 끝에 가이드 빔이나 보조가이드 수잔한테 주방에서 더운 물을 갖다 달라고 하여 수건을 적셔 고양이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였다.

   화장실은 휴지가 없으므로 개인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볼 일을 보고 나면 바가지로 물을 떠서 붓도록 되어 있어 화장실은 비교적 깨끗한 편이다.

 

   (4) 한편 낮에는 산길을 걷느라 등산화를 신어야 하지만, 로지에서는 휴식도 취하고 식사도 하고 화장실, 샤워실을 가야 하므로 슬리퍼가 꼭 필요하다. 이를 준비하지 않은 탓에 로지마다 발에 맞지도 않는 것을 빌려 쓰느라 애를 먹었다.

   식사 후에는 주방팀이 차를 끓인 더운 물을 보온병에 담아 주므로 밤이나 이동 중에 유용하게 마실 수 있다. 보온병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5) 또 하나 필요한 게 있다. 다름 아닌 대형 랜턴이다. 네팔에는 전기가 부족하여 수시로 정전이 된다. 특히 산중에서는 동네별로 자가발전을 하기 때문에 언제 정전이 될지 모른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백미인 푼힐 전망대에서의 새벽 일출을 보려면 새벽에 깜깜할 때 산을 올라가야 하므로 헤드랜턴이 필수품이긴 한데, 로지에서 머무는 동안 정전이 되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제로 힐레 로지에서 저녁 먹기 전에 20여 분 동안 정전이 되었고, 고레파니에서는 저녁을 먹을 때부터 정전이 되어 다음날 아침까지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산속에서의 사흘째인 츄일레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정전이 되어 내내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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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힐레 로지의 아침]

 

고레파니(Ghorepani)

 

   1월 5일 아침 6시, 수잔이 따뜻한 차를 가지고 와 기상을 알린다. 이 날은 해발 2,880m에 위치한 고레파니까지 가야 한다. 힐레와 해발고도 차이는 1,410m, 거리상으로 약 10km이다. 간밤에 춥고 옆방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어도(로지는 방음이 전혀 안 되어 여행사에서 아예 귀마개를 준다) 그래도 비교적 잠을 잘 잔 편이라 몸이 가볍다. 더운 밥과 미역국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아침 8시 10분 고레파니를 향해 출발하였다. 트레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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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레에서 고레파니까지 지형도]

 

   로지를 벗어나자마자 돌계단이 나타난다. 물론 중간에 끊어지는 곳도 있긴 하지만 고레파니까지 수시로 돌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고지대로 이어지는 길의 경사가 급한 만큼 사람들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계단을 쌓은 솜씨가 대단하다. 높지도 낮지도 않게 걷기 딱 편할 정도로 일일이 인력으로 쌓느라 들인 네팔인들의 노고가 얼마나 클까. 멀리 동방에서 온 나그네가 지금 그 혜택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계단길로 이곳 주민들이 주요 운송수단인 말이나 당나귀들이 짐을 싣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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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계단, 말과 당나귀]

 

   트레킹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등에 땀이 차기 시작한다. 밤은 춥지만 무공해의 하늘을 통과한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대낮은 따뜻한 봄날인 이곳 날씨 때문이다. 그래서 출발할 때는 잔뜩 껴입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차례로 두꺼운 옷을 벗는 일이 나흘 내내 되풀이되었다. 등산로 주변에 상점을 겸한 로지들이 수시로 나타나는 덕분에 그곳에서 가쁜 숨을 잠시 돌리며 옷도 갈아입고 목도 축일 수 있다. 필요하면 용변도 해결할 수 있다.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이 어디든지 흔해서일까, 아니면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순박해서일까, 콜라 한 병 사 마시지 않으면서도 화장실과 수도를 이용하는 등산객들에게 싫은 내색을 전혀 하지 않는다.

 

   오전 9시 20분, 가이드 빔이 저길 보라며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흰 눈이 덮인 산의 봉우리가 보인다. 몇 겹의 산 저 너머로 마침내 안나푸르나 남봉(7,219m)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안나푸르나 산은 1,2,3,4 봉과 남봉의 다섯 봉우리가 있다. 이번 트레킹에서는 그 중 남봉을 주로 보게 된다. 주봉인 안나푸르나 1봉(8,091m)을 보려면 후술하는 ABC 캠프를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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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 보이는 안나푸르나 남봉]

 

   모두의 입에서 일제히 감탄사가 터진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계단식 밭과 진한 녹음이 우거진 산들이 찬조 출연한 가운데로 우뚝 솟은 설산의 모습을 한양 나그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내일 새벽에는 일출의 햇살이 저 산을 붉게 물들이는 모습을 보다 가까이에서 볼 수 있으리라.

 

   일단 안나푸르나의 모습을 보고 그 기운을 받았기 때문인가 불현듯 발걸음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좀 더 올라가면 보다 나은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는 가이드 빔의 말에 솔깃하여 속도를 낸다. 그렇게 허위허위 올라가 울레리(Ulleri, 1,960m)에 도착하여 한 숨을 돌렸다. 이곳의 한 로지 마당에서는 안나푸르나 남봉과 히운출리(6,434m)가 다 보인다. 산이 워낙 높아서일까 마치 하늘에 닿아 있는 것 같다. 아니 하늘이 산에 닿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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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레리에서 본 안나푸르나 남봉과 히운출리]

                                                                 

   기념사진도 찍을 겸 손님 접대용 탁자에 앉아 한참을 쉬는데, 로지의 주인이 마실 것을 사라고 권하지도 않고 거기에 앉지 말라고 하지도 않는다. 마치 이 산을 오르는 누구에게나 이용을 허락한 개방형 공간 같다. 큰 산을 닮은 그 주인의 넉넉함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 깊은 산속에 사는 그 욕심 없는 주인이 도인(道人)이자 신선이고 동방의 나그네는 객이다. 객이 신선의 세계에 들어온 것 아닐까.  지난 해 제천 금수산의 정방사(淨芳寺)에 갔다가 마주쳤던 주련(柱聯)의 글귀를 응용하여 본다.

 

高無高天還返底(고무고천환반저)

淡無淡水深還墨(담무담수심환묵)

道人山居少無慾(도인산거소무욕)

客入仙源勞不困(객입선원노불곤)

 

하늘은 그보다 더 높은 것 없으나 정작 땅에 닿아 있고

맑은 물은 그보다 더 맑은 것 없으나 깊을수록 검어진다.

도인인 로지주인 산속에서 욕심내지 않고 살아가니

신선 사는 곳에 들어온 나그네는 힘들어도 피곤하지 않구나.

 

   안나푸르나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흥분된 기분에 다소 빨리 걸어서일까 다리가 힘들다고 느낄 무렵 멀리 파란 지붕의 로지가 보인다. 점심식사가 예정되어 있는 반탄티(Banthani, 2,300m)의 ‘Green Hill View Lodge’이다. 어느새 시계바늘이 정오를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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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탄티의 로지]  

                                                                             

   힐레에서 아침식사를 우리 일행보다 나중에 하고 설거지까지 하느라 뒤늦게 출발하였건만 주방팀이 먼저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준비하여 놓았다. 메뉴는 음식 한류의 상징인 비빔밥이다. 한식 요리를 배우러 한국에 갔다 온 것도 아닌데, 주방팀의 한식 요리는 실로 놀라운 경지이다. 마당에 놓인 탁자에서 따뜻한 햇볕 아래 환상적인 비빔밥을 먹노라니 여기가 천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우리 식단이 호화판인 것과는 달리 주방팀과 포터들의 식사는 빈약하기 그지없다. 그들의 메뉴는 달밧으로, 접시 위에 밥과 몇 가지 찬을 놓고 소스를 뿌린 후 손으로 비벼 먹는다.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 등 조선 후기 화가들이 그린 금강산 그림을 보면 양반들이 가마를 탄 채 하인을 앞세우고 금강산을 유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마를 타지 않고 내 발로 걸어가는 것만 다를 뿐 지금 내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주제넘게 그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인가 이번 트레킹의 여행사 상품명이 “안나푸느라 로얄 트레킹”이다.

   양반, 하인의 주종관계가 아니라 서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받는 대등관계이기는 하나, 한 가닥 미안한 마음이 든다. 구한말의 개화기 무렵, 그리고 6.25 사변 직후에 한국을 찾은 서양인들은 어떠했을까. 아무튼 그 무엇보다도 경제가 발전하여 나라가 잘 살고 볼 일이다.

 

   점심식사 후 오후 1시 20분에 고레파니를 향해 다시 출발하였다. 여전히 돌계단을 올라야 하고, 때론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넌다. 군데군데 티벳의 상징인 파랑(靑), 하양(白), 빨강(赤), 초록(綠), 노랑(黃)의 오색 깃발 ‘룽따’가 펄럭이는 집들이 있는가 하면, 돌무덤 같은 것들도 보인다. 룽따의 존재는 그 집에서 티베트불교를 믿는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고, 돌무덤은 사람이 죽으면 화장 후 비석을 세워 그의 영혼을 기리는 곳이라고 한다. 매장된 시신만 없을 뿐 우리의 산소와 비슷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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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 깃발 룽따와 돌무덤]   

 

   반탄티에서 고레파니로 가는 길은 해발 2,300m에서 출발하여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영산인 백두산(해발 2,744m)보다도 훨씬 더 높은 해발 2,880m의 고지대를 향해 가는 길이건만, 생각 밖으로 숲이 울창하게 우거지고 길 옆 깊은 계곡의 수량도 풍부하다. 그 길을 터벅터벅 걸어 오후 4시 43분 고레파니에 도착하였다.

 

   안나푸르나 남봉을 비롯하여 다울라기리, 마차푸차레 등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푼힐 전망대의 전진기지(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곳답게 마을 입구에 등반객을 환영하는 일주문이 세워져 있다. 고레파니는 그만큼 이제까지의 로지 마을과는 달리 제법 규모가 크다. 중심가에는 상가도 제법 형성되어 책방도 있고 빵집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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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파니 입구와 중심가]

 

   그래서일까, 분명 다른 곳과 마찬가지의 시설을 한 로지에 불과한데도 이날 숙소로 정한 로지의 입구에는 "HOTEL TUKUCHE PEAK VIEW"라는 호텔 입간판이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다.

로지 뒤로 석양의 안나푸르나 남봉이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되풀이한다. 안나푸르나를 뒷동산으로 하고 있는 곳에서 하루를 묵는다는 것이 가슴을 설레게 하는데, 해발고도가 높은 만큼 확실히 춥다.

 

   식당에 들어서니 추위에 몸을 녹이라고 장작난로를 피워 놓았지만, 불을 붙이느라 뿌린 석유냄새가 코를 찌른다. 난로가에서 몸을 녹이며 저녁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정전이 되었다. 힐레에서처럼 전기가 곧 다시 들어오려니 했으나 함흥차사이다. 결국 다음날 아침까지도 전기는 소식이 없었다. 이 로지는 화장실에 양변기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용변 후 물을 퍼붓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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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레파니의 로지]

 

   저녁 메뉴는 닭백숙.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게 먹음직스럽게 보이지만, 육식을 멀리하는 범부에게는 역시 반갑지 않다. 그러나 밥과 국과 다른 반찬이 많은지라 불만은 없다. 더구나 따끈한 눌은밥이 있지 않은가.

 

   정전이 되어 달리 할 일도 없고 다음날은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하는지라 식사 후 씻고 바로 잠자리를 펼쳤다. 추위를 견디기 위하여 발열내의에 두꺼운 털스웨터을 겹쳐 입고 그 위에 다시 등산점퍼의 외피까지 껴입고 나서야 침낭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주머니를 끌어안은 것은 물론이다. 그렇게 고레파니의 밤이 깊어갔다.

 

푼힐(Poonhill) 전망대

 

   1월 6일 새벽 4시, 천지사방이 다 깜깜한 가운데 서둘러 침상에서 내려왔다. 이번 여정의 절정인 히말라야의 일출을 보기 위함이다. 정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주방팀이 따뜻한 마늘수프를 준비하였다. 해발 3,200m까지 올라가야 하므로 혹시 생길지 모를 고산병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새벽 4시 50분, 목적지 푼힐 전망대로 출발하는데 옷을 두껍게 입었음에도 차가운 새벽공기가 등골을 엄습한다. 털모자 위에 걸친 헤드랜턴으로 발밑을 비추며 전망대롤 향해 전진한다. 우리 일행 말고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가고 있다. 마늘수프를 마셨다고는 하나 빈 속이나 다름없는데다 차차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숨이 가빠진다.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걷다가 아무래도 힘이 들어 미리 준비하여 온 비아그라를 한 알 먹었더니 한결 숨이 덜 차다. 본래 심장병 약으로 개발된 것이 발기부전제로 발전하고, 이어서 고산병 약으로도 이용되는 것을 보면 앞으로 또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만물은 유전하는가보다.

 

   새벽 6시에 푼힐에 도착하였다. 푼힐은 푼(Poon)족이 사는 언덕(Hill)이라는 뜻이다. 일출이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여명이 서서히 깃든다. 가이드가 알려 준 일출예정시각은 6시 45분이다. 중심부에 세워진 전망대로 올라갔다. 많은 사람으로 붐빈다.

 

   6시 31분,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산인 다울라기리(Dhaulagiri, 8,172m)의 정상부에 햇빛이 비치기 시작하자 붉은 색으로 변하고, 안나푸르나 남봉(Annapurna South, 7,219m)도 붉게 물들며 윤곽이 드러난다. 그러나 아직 동쪽 하늘은 붉기만 할 뿐 해는 안 보인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새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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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푼힐 전망대] 

 

   6시 40분, 다울라기리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붉은 색에서 다시 본래의 흰 색으로 돌아가고 이내 주위가 환해진다. 그리고 안나푸르나 남봉을 비롯하여 그 왼쪽의 바라하시카르(Baraha Shikhar,8,091m), 닐기리(Nilgiri, 7,041m) 연봉, 오른쪽의 히운출리(Hiunchuli, 6,434m), 마차푸차레(Machapuchare, 6,997m)도 서로 내가 제일이라는 듯 웅장한 자태를 뽑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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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푼힐 전망대에서 바라본 모습]        

 

036안나푸르나.jpg [안나푸르나 남봉(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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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울라기리]

                                                                       

   너무나 멋진 모습들이다. 어찌 필설(筆舌)로 다 그려내랴. 말 그대로 서불진혜(書不盡兮)요 언불진혜(言不盡兮)이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하여 서울에서 그 먼 길을 달려 온 것이다. 그리고 그 달려온 보람으로 그간의 피로가 싹 가신다. 그런 기분 탓일까 춥지도 않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수확의 여신'이라는 뜻의 안나푸르나를 찾아 이름 그대로 풍성한 수확을 거둔 기분이다.

 

   그 황홀한 풍경을 눈 속에 담고 카메라에 담고 담아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다음 일정을 진행하여야 하는 양기영 지사장과 가이드가 그만 내려가야 한다고 진작부터 재촉을 하는데도 말이다. 앞으로 생전에 또 저 아름다운 광경을 접할 기회가 있겠냐 하는 진한 아쉬움을 삼키며 하릴없이 등을 돌려야 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