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길어올리기(해인사)

2014.02.26 23:41

범의거사 조회 수:5070

 

존경하옵는 옥봉선사(沃峰禪師),

 

   전국을 휩쓴 조류독감이 다소 수그러드는가 싶더니 영동에는 연일 폭설이 쏟아져 인명피해까지 발생하고, 급기야 경주에서는 대량참사까지 터지는 등 나라가 어수선합니다. 반면 서울은 예년보다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는 가운데 어느덧 우수(雨水)가 지났네요. 평양에 갈 방법이 없으니 대동강 물이 풀렸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군요.

    어떻든 겨울이 꼬리만 남긴 채 멀어져 가고 봄기운이 서서히 찾아오는 환절기를 맞아 선사님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하옵신지요?

 

제번하옵고,

   불자이신 선사님께서는 당연히 해인사를 가 보셨을 것으로 압니다. 범부도 그동안 몇 차례 다녀왔지요. 하온데, 지난주에 촌자(村者)는 참으로 특별한 경험을 하였답니다. 오래도록 잊지 못할 뜻깊은 경험이었지요.

   갑오년(甲午年) 정월 대보름인 지난 14(금요일) 늦은 밤에 해인사를 찾았습니다.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김천역으로 간 다음 그곳에서 택시를 타고 해인사로 가면 서울에서 해인사까지 2시간 30분 만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그래서인지 전에는 참으로 먼 곳으로 느껴지던 해인사가 이제는 마치 곁에 있는 듯합니다.

 

   팔만대장경 보존국장인 성안스님과 저녁 공양 및 다담(茶談)을 나눈 후, 산책 겸 해인사 대중들의 식수원인 저수지까지 걸었는데, 대보름 달빛이 참으로 교교(皎皎)하더군요. 산이 높고 깊어서인지 겨우내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 있는 산길을 달빛 아래 걸으니 운치가 그만이었지요.

 

광배.jpg

[오른쪽이 성안스님] 

 

   조조(曹操)가 그의 유명한 단가행(短歌行)에서 읊었듯이 달이 밝으니 별빛은 상대적으로 희미한데 남쪽으로 까마귀가 날아가듯[월명성희 오작남비(月明星稀 烏鵲南飛)]’ 나그네는 발길을 옮겼답니다. 무공해의 청정지역에 높이 뜬 정월 대보름달, 그 휘영청 빛나는 모습을 시샘이라도 하는 걸까요 이따금 달빛을 가리며 지나가는 구름은 한 폭의 시(詩)이자 그림이었습니다.

 

선사님,

 

   범부(凡夫) 일행은 그 달빛에 취하여 그만 밤을 잊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길을 나선 김에 밤 1130분에 해인사에서 출발하여 왕복 2시간 30분 걸리는 곳(해발 1,000m)에 있는 마애불까지 다녀온 것이지요(해인사에서 2km). 본래 계획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다녀올 예정이었는데, 티끌 하나 없는 보름달 아래에서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길을 걷는다는 것이 아무에게나 아무 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기에 만용을 부린 것이지요. 그렇게 달빛 길어올리기를 하였답니다. 임권택 감독님의 같은 제목 영화를 떠올리면서 말입니다.

 

       물을 길러 갔다가 달빛이 너무 탐나 달도 함께 담았네. 돌아와서 응당 깨달았네, 물을 비우면 달빛도 사라진다는 것을.

 

   길을 나설 때는 산심수심객수심(山深水深客愁深)이었지만 월백설백천지백(月白雪白天地白)의 세상으로 들어서니 산도, 물도, 눈도, 달도, 그리고 도 모두가 혼연일체인 몰아(沒我)의 경지에 빠졌답니다. 하늘의 달, 땅의 눈이 함께 빛이 되어 길은 밝고, 생각은 맑게 개었습니다. 세사에 시달린 번뇌가 달빛으로 승화하는 순간이었지요.

   그렇게 구름에 달 가듯이 가던 나그네가 갑오년 215일 새벽 15,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애불 앞에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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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세기 통일신라시대부터 1,200년을 넘게 가야산을 지켜온 마애불(보물 222. 높이 7.5m, 너비 3.1m)의 온화한 미소는 어떻게 그려야 할까요. 중생에게 한없이 베푸는 자비의 손길 앞에 범부(凡夫)는 그저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습니다.

   바다가 만물을 비추듯 불법을 관조(觀照)함이 곧 해인이니, 마애불은 해인사라는 반야선(般若船)을 이끌고 고해(苦海)를 헤쳐 나가는 선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 마애불을 모신 이와 1,200년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당신의 지극한 정성이 읽혀지는 듯했습니다.

   내년 을미년(乙未年) 정월 대보름에도 다시 뵈올 수 있기를 기도하며 마애불과 하직하고 하산길을 총총 재촉하였답니다.

 

마애불1.jpg 

 

   15일 새벽 2시 반, 해인사로 돌아와 요사채에 누우니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한동안 말똥말똥하더이다. 그래서 고려시대의 문신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의 시를 읊조리며 잠을 청했습니다.

 

해인(海印)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성불하십시오.

 

범의(凡衣) 올림

 

가야산 정상.jpg

[해인사에서 바라본 가야산의 여명: 눈 덮인 정상 위로 구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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