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보지 못했어도

  

    지난 해 가을 법원산악회에서 영남알프스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당시 창원지방법원의 윤인태 원장님이 영남지역에서 최고의 산행지로 꼽히는 곳이 있다면서 해가 바뀌거든 꼭 한번 가보라고 하셨다. 그곳이 바로 통영과 삼천포의 앞 바다에 있는 사량도(上島와 下島가 있는데, 그 중 上島. 이하의 사량도는 上島만을 뜻한다)의 지리망산이다.  '지리산을 바라볼 수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이름이 지리망산(지리望산)이라고 붙여졌는데, 윤인태 원장님에 따르면 지리산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천혜의 절경이라는 것이다.

 

     해가 바뀌어 임진년의 봄이 되어 그 지리망산을 향해 길을 나섰다. 남일대 리조트1.jpg 2012. 5. 11.(금) 퇴근 후인 저녁 6시 50분 서초동 법원종합청사를 출발하여 삼천포 남일대리조트까지 걸린 시간은 4시간 반.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4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바닷가 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남일대리조트는 시설이나 주변경치가 일품이다. 밤늦게 도착하여 아침 일찍 떠나는 바람에 그것을 충분히 감상하지 못한 게 아쉽다.

 

    2012. 5. 12.(토)

 

      아침 7시에 서둘러 식사를 하고 사량도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용암포로 향했다. 한양에서 온 산객들은 다들 미지(未知)의 섬에 있는 미지(未知)의 산을 등산한다는 설렘에 상기된 표정이다.

    8시 20분 용암포항에 도착하니 창원지방법원 본원, 진주지원, 밀양지원의 산악회팀이 도착하여 있었다. 작년 영남알프스 산행을 같이한 반가운 얼굴들이 많다.

     그런데 정작 지리망산을 그렇게 추천하셨던 윤인태 원장님은 안 보인다. 그 사이 부산고등법원의 재판부로 복귀하셨기 때문에 못 오신 것이다. 사량도행 배.jpg 대신 지난 2월에 새로 부임하신 우성만 법원장님이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이하신다. 

 

      사량도행 배는 차도 실을 수 있는 카페리였지만, 승선인원이 많아 차는 두고 사람만 탔다. 우리 일행이 거의 전세 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량도의 내지항까지 20분 정도 걸리는데, 뱃길 옆으로 양식장 부표가 바둑판의 흰 돌처럼 질서정연하게 떠 있다. 무슨 양식을 하는 걸까 하는 당연한 의문을 품었지만, 그 의문은 한참 지나서야 풀렸다.

      사량도에서 통영지원팀과 합류하고 나니 총 산행인원이 100여 명에 이르는 대부대가 되었다.

몸풀기체조1.jpg 진주지원 이장형 판사님의 구호에 맞추어 맨손체조로 몸을 풀고 9시 15분에 마침내 산행을 시작하였다. 

 

     해안도로를 따라 10여분 가다 금북개라는 곳에서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초입의 우거진 숲을 벗어나 곧 바로 지능선길로 접어들자 남해안 한려수도의 절경이 눈에 들어온다.

 

“우와~ 멋지다!”

 

하는 탄성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그리고 그 소리는 한걸음 한 걸음 위로 올라가면서 시야가 그만큼 넓어짐에 비례하여 커진다. 삼천포, 삼천포대교도 보이고 남해도도 보인다. 잔잔하기만 한 바다는 동요 속의 “초록빛 바닷물” 그 자체이다.

 

삼천포 일대 전경1.jpg

 

   그런데 등산로에 나타나기 시작한 암릉길이 앞으로의 여정이 녹녹하지 않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묘하게도 암릉길의 바위들이 크든 작든 모두 마치 칼로 두부를 썰어 쌓아놓은 듯 반듯하게 층을 이루고 있다. 주상절리의 형상으로 보인다. 지리망산 주능선1.JPG

 

    지능선에서 주능선으로 접어들자 본격적으로 암릉길이 산객을 맞이한다.

    사량도를 종주하려면 지리망산을 포함하여 10여 개의 크고 작은 암봉을 넘어야 한다. 이 암봉을 넘으면 저 암봉이 나오고, 그 암봉을 넘으면 또 다른 암봉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지리망산에 도착하기까지의 산행은 그 후의 극기훈련(?)을 위한 예비고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당시에는 몰랐다. 본래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인간사 아니던가. 아무튼 힘들면 경우에 따라 암봉을 우회하여 가면 된다. 지리망산 정상 가는 길1.jpg

   10시 45분.

해발 397.6m의 지리망산에 도착했다. 지리망산은 이제는 줄여서 지리산으로 많이 부른다고 한다.   

   사량도에서 달바위(월암봉. 해발 400m)에 간발의 차이로 1위 자리를 내주었다. 해발 400m가 무에 그리 높은 산이라고 힘들어하나 할 수 있지만, 출발고도가 0m임을 생각하면 결코 쉬운 산행이 아니다.

      지리망산의 정상에 섰으니 당연히 지리산의 천왕봉이 보여야 하는데,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주위에 어느 게 지리산이냐고 물으면 ‘해무 저 편에 뿌옇고 희미하게 보이는 게 아마도 지리산일 것’이라고 하는 하나마나한 답변만 돌아온다.

    근래 들어 비가 너무 안 와 하늘이 맑지 못한 탓이라고 애써 자위하여 보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양에서 이곳까지 달려온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리망산 정상1.jpg

 

    그러나 그 아쉬움을 만회시켜 주는 것이 있으니, 바로 섬 주위의 경치이다. 이곳에서는 그야말로 한려수도의 진수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전후좌우 어디로 눈을 돌리더라도 그저 마냥 좋다.

푸른 바다 위에 올망졸망 떠 있는 섬들, 섬 사이를 지나가는 통통배, 섬의 해안가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포구마을들, 쉽게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면서도 질서정연하게 설치되어 있는 양식장 부표들, 그 양식장에서 배를 타고 작업을 하고 있는 어민들, 그리고 그 위로 작열하는 태양...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다.

한려수도풍경1.JPG

 

    지리망산 정상을 지나면 암릉지대의 오르막 내리막이 더욱 심해진다. 두 발만으로는 안 되어서 두 손까지 써야만 전진할 수 있는 곳도 많다. 너무 힘들다 싶으면 우회하기도 한다.

    그렇게 앞으로 전진하다 보면 사량도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해발 400m)로 사량도의 한 복판에 있는 달바위(月岩峰, 불모산이라고도 한다)가 정면에서 위용을 자랑한다.  월암봉(月岩峰)이야 달바위의 한자어이니 이해가 되는데, 불모산은 뭘까?  지도에 따라서는 달바위와 불모산이 별개인 것으로 나와 있기도 하다. 

 

달바위1.JPG

 

    달바위 정상임을 알리는 표지석에는 친절하게도 400.0m라고 씌어 있다. 아마도 높이를 정확하게 표시한다고 소수점까지 찍은 모양인데, 그 소수점을 손으로 가리고 달바위내리막길1.JPG사진을 찍으니 해발 4,000m의 고봉이 되었다. 이쯤 되면 한반도 전체에서 백두산보다도 높은 최고봉인 셈이다.^^

  

   달바위의 급경사로 험한 암릉을 조심조심  내려가면 안부이다. 북쪽으로는 대항으로 내려가고 남쪽으로는 옥동으로 연결된다. 동쪽은 앞으로 가야 할 옥녀봉 방향이다. 어느덧 12시가 넘어가고 있어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이곳에는 좌판을 벌이고 술과 음료 등을 파는 분이 있는데, 장사를 위해 햇빛가리개를 치고 원형 식탁과 의자까지 진열하여 놓았다.

 

"인생이 별 거 있습니까? 쉬면서 목이나 축이고 가세요”

 

하면서 지나가는 산객들을 붙잡는다.   안부의 쉼터1.jpg 그런데 준비하여 온 음식과 술, 음료수가 있으니 어쩔거나... 미안한 마음에 그의 물건을 일부 팔아준다. 이를테면 자릿세를 낸 셈이다.

 

    통영지원에서 준비한 “충무김밥”은 역시 밥 속에 아무 것도 없지만, 꿀맛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싱싱한 멍게의 맛은 지금도 생각하면 입에서 군침이 돈다. 

 

    사량도로 배를 타고 건너오면서부터 가졌던 의문, 즉 바다에 떠 있는 부표는 무엇을 키우는 양식장일까 하는 의문이 이곳에서 마침내 풀렸다. 이 안부의 주인으로 바로 그 자릿세 징수권자가 멍게 양식장이라고 가르쳐 준 것이다. 사량도 일대에서는 주로 멍게를 양식한다고 한다.

 

가마봉 가는 암릉길.jpg    점심을 배불리 먹어 한결 기운이 나지만, 그 후의 여정은 그야말로 고행길이다.

    가마봉(해발 303m)에 도착하기까지, 암벽을 줄을 잡고 오르고,  깎아지른 계단을 오르내리고, 네 발로 엉금엉금 기고, 절벽 사이를 건너뛰고, 줄사다리를 타고 내리고... 암봉을 넘고 넘다 보면 다리가 후들후들 거린다. 

    심지어 거의 수직에 가까운 직벽에 계단이나 줄사다리를 설치하여 놓아 이런 곳에서는 뒤로 돌아 한 발 한 발 내려딛어야 한다. 아차하면 황천길로 직행하니 스릴을 넘어 두려움마저 몰려온다.

 

 

가마봉1.JPG

 

   잠시도 여유를 안 주고 이어지는 암릉길은 마치 유격훈령장을 방불케 한다. 그 중 가마봉의 주위의 암벽과 철계단이 압권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백미는 남아 있었다. 사량도 종주산행의 화룡점정은 옥녀봉을 오르는 것이다. 가마봉의 철계단1.jpg

 

    연지봉을 지나면 나타나는 옥녀봉은 높이가 해발 266m인데도 그 앞에 서니 입이 벌어진다. 마치 잘 생긴 팽이를 엎어 놓은 듯한 이 봉우리는 통째로 하나의 바위덩어리이다.

   이 봉우리는 사량도의 동쪽 끝에 위치하여 사량도 종주산행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암벽타기 연습을 하는 곳으로 딱 어울릴 만한 이 봉우리는 잘 생긴 것만큼이나 위험하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명색이 사량도 종주산행에 나선 이상 이곳을 지나치면 ‘팥 없는 팥빵’을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회하는 길은 진즉에 지나왔기에 이젠 퇴로도 없다. 수직의 암벽에는 굵은 밧줄만 두 개 걸려 있다. 그 밧줄에 하다못해 매듭이라도 지어 놓았으면 좋으련만 야속하게도 그렇지도 않다.

 

옥녀봉1.JPG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하여 그 밧줄을 잡고 기어오르는 동안에는 아무런 생각도 안 난다. 그 줄을 놓치면 어찌 될지 너무나 뻔하기에 오직 이 길밖에 없다는 일념으로 한발씩 오르니 정상이다. 생사의 기로를 벗어나는 순간이다.  

옥녀봉 오르기1.JPG   나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살았다는 생각뿐이다. 오르는 동안에 바위에 부딪힌 팔다리는 곳곳이 까지고 멍이 들었다. '상처뿐인 영광'이런가.

 

    겨우 정신을 차려 일행들을 둘러보니 황진구 부장과 변성환 판사의 뒤로 임해지 판사가 씩씩하게 올라온다.

   반팔셔츠를 입었음에도 어디 하나 다친 데가 없다. 여장부임을 여실히 증명한다. 그의 나이가 45세임을 누가 믿으랴.

 

     진주지원의 이봉자 과장 또한 임판사에 못지않다. 그 와중에도 사진까지 찍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 그뿐인가 이번 산행의 일정을 짜고, 숙소, 버스, 배편 등 일체를 이과장이 주도하여 준비하였다. 그 노고에 감사할 따름이다.

 

 옥녀봉 정상.jpg

 

    옥녀봉의 흔들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는 일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제 곧 최종 목적지인 금평항에 도착한다는 생각에 마지막 힘을 냈다. 오후 3시 35분 금평항에 도착하니, 우성만 창원지방법원장님을 비롯옥녀봉 사다리1.jpg한 앞서 간 팀이 기다리고 있다. 수고했다고 서로서로 격려의 인사를 건넨다.

 

    100여 명의 대부대가 산행에 나서 그 험한 길을 지나왔음에도 한 명도 낙오자가 없다는 게 놀랍다(뒤에 안 일이지만 우리가 다녀온 다음날 옥녀봉에서 추락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누군가가 ‘법원 사람들은 확실히 독한 모양’이라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옥녀봉과 금평항1.jpg  

 

     금평항은 사량도의 여러 포구 중 가장 크다. 그래서 사량면사무소가 이곳에 있다. 금평항에서는 사량도의 명물 먹거리인 꿀빵을 맛볼 수 있다.

     금평항에서 통영지원팀은 다른 배로 돌아가고 나머지 주력부대는 삼천포항으로 돌아왔다. 금평항이 사량도의 남쪽에 위치한 까닭에 갈 때와는 달리 사량도의 북쪽을 한 바퀴 돌아오느라 시간이 40분 걸렸지만, 배에서 사량도 종주길 능선에 있는 암봉들이 거의 다 보여 하나하나 짚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돌아오는 뱃길에서 본 사량도1.jpg

 

“히유~ 저길 어떻게 다녀왔지? 다시 가라면 못가.”

 

이는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사량도 지리망산!

 

   정말 아름다운 섬이고, 멋진 산이다.

   그렇지만 분명 한 번 가지 두 번 갈 곳은 아니다. 작년에 윤인태 원장님이 멋지다는 말만 하고 위험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갔지 아마 이렇게 위험한 줄 알았으면 망설였을 것이다. 적어도 100여 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가는 용기는 내지 않았으리라.

다만, 다행스럽게도 위험구간에 안전시설을 하기 위하여 현재 자재들을 실어다 놓은 상태이니 그 공사가 다 끝나고 나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삼천포의 남일대리조트로 돌아와 해수탕에서 목욕을 하고 삼천포대교 앞의 식당(삼천포회센터)으로 이동하여 우리나라에서 제일 맛있다는 삼천포회로 배를 불리며 이날의 산행에 관해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 해가 저물어 간다.

 

 삼천포대교 앞에서1.jpg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그리워지는 법인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창원,진주,밀양의 법원식구들과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눠야 했다.

    서초동 법원청사에 돌아오니 자정이 넘어 날이 바뀌어 13일 0시 20분이다.(끝)

 

 등산지도1.jpg

등산코스 : (내지항)→0.3km→(금북개)→2.5km→(지리망산)→1.8km→(달바위, 불모산)→ 0.5km → (안부)→0.6km→(가마봉)→0.5km→(옥녀봉)→0.8km→(금평항) : 총 7km, 소요시간 6시간 20분.

 

 

애고 도솔천아.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