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2004. 2. 8. 눈 덮인 소백산에 올랐다.

참으로 오랜만에 한 겨울산행이다. 2000. 2. 9. 황병산을 다녀온 후 처음이니 꼭 4년만이다. 명색이 등산을 취미의 하나로 써놓은 사람으로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직무유기였던 셈이다.

이번 산행의 동반자는 충주지원장 시절부터 山友愛를 돈독히 해온 어제의 용사들이다. 다름 아닌 金'조~과(본인은 '비뇨기과'를 줄여서 이렇게 부른다)' 院長과 이병찬상무(그 사이 삼성생명에서 신한생명으로 옮겼다).

등반 전날 수안보온천에서 만나 일차 회포를 풀었다.

 

새벽 5시부터 서둘렀지만 단양의 가곡면 어의곡리 새밭(을전 : 乙田) 마을 버스종점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등산의 첫발을 내디딘 시각은 아침 8시 30분. 결코 빠른 시각이라고 할 수 없으나, 주차장에는 아직 차들이 안 보이고, 소백산 국립공원매표소를 통과하도록 등산객도 매표소 직원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출발지의 고도가 해발 300m인 이 소백산 등산코스가 다른 유명한 코스들보다 늦게 개발되어 덜 알려진 때문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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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밭 마을에서 비로봉을 오르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왼쪽으로 벌바위골을 타고 올라 국망봉을 거쳐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른쪽으로 명기리골을 지나 곧장 비로봉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내심 벌바위골로 올라가서 국망봉, 비로봉을 거쳐 명기리골로 내려오는 원점회귀형 코스가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金원장의 助言에 따라 명기리골을 지나 바로 비로봉으로 오른 후 천동(다리안) 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하였다. 벌바위골이 너무 험하여 겨울 산행으로는 위험다는 것이다.

 

매표소를 공짜(입장료가 1,600원이다)로 통과하면 비로봉까지 4.7Km(주차장부터 계산하면 5.1Km)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온다. 등산로가 소백산의 북쪽 斜面에 위치한 까닭에 그늘이 져서 겨우내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 있다. 때문에 출발지부터 아이젠을 차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을 앞길을 생각하고 걸음을 재촉하는데, 마침 일단의 사람들이 앞서 가고 있다. 구성원의 面面을 보니 한 가족 같다. 아들들은 그렇다 치고 벌써부터 처지는 딸들이 과연 정상까지 갈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그들을 앞질러 30분 동안 부지런히 걸었다. 初入부터 대략 1km 정도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등산로로서는 신작로나 다름없기 때문에 눈길임에도 빠르게 걸을 수 있다. 속도를 낸 김에 숨을 휘휘 몰아쉬며 걷다 보니 1 시간만에 3km를 주파했다. 그런데 이정표에 씌어 있는 남은 거리는 2.7km란다. 그렇다면 지나온 길을 합치면 5.7Km라는 이야기이니 앞뒤가 안 맞는다. 산에 가면 늘 겪는 일이건만 오늘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쯤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물과 귤로 힘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후 능선에 다다를 때까지 30분 동안은 소위 “깔딱고개”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본래 계단으로 되어 있는 길인데 지금은 눈에 덮여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도 역시 힘이 든다. 오늘의 등반코스 중 경사가 가장 급하고 험한 곳답게 등에서는 땀이 나고 입에서는 헉헉 거친 숨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이게 웬 일, 李상무가 저 멀리 앞장서서 휘적휘적 잘도 걷는다. 산에만 오면 肉水를 쏟아내느라 정신이 없고 몇 발짝 옮길 때마다 물을 찾던 사람이 오늘은 영 딴 사람이다. 그 사이에 飛岩이라도 드셨나? 나나 金원장이나 모두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소백산9.jpg

 

해발 1,080m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나고 마침내 어의곡에서 主능선으로 이어지는 支능선이 시작된다. 능선답게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이제는 좌우를 둘러볼 여유도 생긴다. 멀리 오른쪽으로 비로봉으로 생각되는 높은 봉우리도 보인다. 그리고 왼쪽으로는 국망봉도 눈에 들어온다. 등산로 옆으로 쌓인 눈은 그 높이가 무릎 위로 올라오고, 좌우의 나무에 내린 눈이 눈꽃터널을 이루고 있는 멋진 오솔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한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상고대(나무서리)! 상고대는 낮에 날씨가 풀려 안개가 많이 발생하였다가(습도 90% 이상) 밤에 기온이 급강하(영하 6도 이하)하면 공기 중의 수증기가 나무에 얼어붙어 생기는 서리이다. 거기에 초속 3m 이상의 바람이 불면 더 이상적인 상고대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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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과 달라서 나무의 가지만이 아니라 줄기에도 똑같이 내려앉기 때문에 상고대가 발생한 숲은 그야말로 은빛 천국이다. 높은 산(대략 해발 1,000m 이상)에서만, 그것도 조건이 맞아야만 드물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나도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실제 광경을 마주하였는데, 참으로 壯觀이다.

 

    소백산10.jpg 상고대와 눈꽃에 눈길을 주며 30분간 微吟緩步하다 보면 느닷없이 발이 푹 빠지는 곳을 만난다. 대략 산의 8부 능선쯤 되는 지점인데, 등산객들이 많지 않아 길이 그대로 눈에 덮인 것이다. 앞사람 발자국을 겨우 찾아 밟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릎까지 올라오는 눈을 피할 재간이 없다. 그만큼 걷기도 수월치 않다. 이렇게 되면 아이젠도 소용이 없다.

 

대신 분위기가 낭만적이어서 좋기는 하나, 그것도 잠시이지 30분을 눈 속에서 헤매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러기를 30분, 마침내 눈 속에서 빠져 나오면 왼쪽으로는 국망봉, 오른쪽으로는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삼거리에 도착한다.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소백산의 변화무쌍한 날씨 탓에 이제껏 보이던 국망봉은 짙은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비로봉까지 가는 주능선길은 삭풍(朔風)이 몰아친다.   소백산11.jpg

우리나라 겨울의 북서풍의 진수를 보여 주려는 것일까, 매섭게 부는 칼바람에 몸이 휘둘릴 지경이다. 자칫 그 바람에 멀리 풍기 쪽으로 날려갈까 겁난다. 하도 바람이 세게 부는 탓에 주능선에는 눈도 쌓일 겨를이 없다.

 

산을 오르느라 등은 땀으로 젖었어도 고어텍스 등산복과 핫패드(Hot Pad) 덕택에 추위를 못 느끼는데,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옷깃을 여미려고 장갑이라도 벗을라치면 금방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듯하다. 영하 15도는 족히 될 듯하다.

 

오전 11시 10분, 마침내 비로봉에 도착했다. 새밭마을에서 출발 후 2시간 40분이 걸린 셈이다. 해발 1,439m의 정상에는 사람들이 이미 많이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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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이 올라온 쪽은 등산객이 거의 없었으니대부분 죽령의 희방사쪽이나 단양의 다리안(천동)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리라.

 

정상에 서면 영월, 단양, 영주, 풍기 등 동서남북으로 뻗은 소백산의 장엄한 줄기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온통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눈 속에 찬 明月에 비추어 본다면 말 그대로 ‘月白雪白天地白’이리라. 나무 끝에 부는 삭풍과 天地를 뒤덮은 흰 눈, 겨울 小白山의 모습이다.

 

 

 

정상에 오른 증거물을 사진으로 남기고 서둘러 주목군락지 옆의 대피소로 이동했다. 정상에서 600m 떨어진 이 곳은 통나무집으로 지어졌는데, 비록 내부시설은 아무 것도 없을망정 바람을 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존재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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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점심 먹기에 이른 시각일까, 사람이 붐비지 않아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컵라면를 꺼냈다. 본래 빵 한 조각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金원장이 등산의 베테랑답게 뜨거운 물과 함께 준비한 것이다. 이런 높은 산과 추위 속에서 따끈한 컵라면이면 점심으로는 과분하다. 거기에 韓方茶까지 곁들였으니 그렇게까지 챙겨 주신 金원장 내외분께 감사할 따름이다.

 

휴대폰으로 정상 정복(!) 사실을 알리고 12시 10분 下山을 시작했다. 방향은 천동(다리안)쪽이다. 朱木群落地를 끼고 내려가는 멋이 있고, 길도 평탄하기 때문에 각 방향에서 비로봉에 오른 사람들이 애용하는 하산코스이다. 다만 정상부터 시작하면 6.8Km나 되어 다소 길고 지루한 것이 흠이다.

 

주목군락지에는 올라오는 사람, 내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가는 朱木들, 그 중 멋지게 생긴 나무 앞에서는 사진을 찍기 위해 차례를 기다려야 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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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능한 한 빨리 내려가 단양온천에서 목욕을 해보자며 金원장이 독촉하는 통에 사타구니에 불이 나도록 걸었더니 다리안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시간 35분. 본래 바위와 돌이 많은 길인지라 하산 때도 3시간 정도 걸리는 게 보통인데, 그 바위와 돌이 모두 눈에 덮여 길이 푹신한 것도 한 몫 단단히 했다. 덕분에 무릎에도 큰 무리가 안 되었다.

 

하산 시간을 단축한 덕에 시간이 충분하니 온천욕은 當然之事. 다리안에서 택시를 타고 새밭 마을의 주차장으로 이동(요금 13,500원)하여 金원장의 愛馬 “테라칸”을 타고 단양온천(‘소백산온천’으로도 불린다. 요금은 1인당 5,000원)으로 갔다.

 

본래 내가 충주지원장 시절 처음 문을 연 이 온천은 당시 유황냄새가 코를 진동하여 한국 제일의 유황온천임을 자랑했었다. 그런데 뒷날 그것이 유황을 태워 목욕물에 푼 사기극으로 밝혀져 폐쇄되는 운명에 처해졌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작년에 다시 문을 열었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金원장이 가보자고 해서 온 것인데, 소문대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예전과 같은 유황냄새는 물론 없었지만, 그래도 미미하나마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등산도 했고, 하산 후 온천욕까지 했으니 남은 것은 집에 돌아가는 일뿐이다. 金원장의 손에 이끌려 충주호반과 송계계곡의 멋진 드리이브길을 거쳐 다시 수안보로 가서 영화식당에 저녁을 먹고 서울로 돌아왔다.

 

충주에서 여주까지는 중부내륙고속도로, 여주에서 호법까지는 영동고속도로, 그 후는 중부고속도로. 이렇게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일요일 저녁인데도 어느 하나 밀리는 곳이 없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 우리 경제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의 반영이 아니면 좋을 텐데....(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