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지심(分別之心)을 어찌할꼬

 

 

  사법연수원 교수 시절이던 1999년 여름에 무릎수술을 한 일이 있다. 그 해 7월 말에 장대비를 맞으며 영암 월출산을 무리하게 등반한 것이 화를 자초하여 무릎연골을 정비해야 했던 것이다. 그 후 산행을 자제하다 범부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해 결국 그 해 10월 30일 억새평원을 보려고 사법연수원교수들과 함께 영남알프스를 찾았다. 다행히 무릎이 견뎌 주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데, 이게 또 다른 병을 불러왔다. 130만평이나 되는 거대한 억새군락지를 보고 나니까 포천의 명성산이나 정선의 민둥산에 있는 억새밭을 보고도 시큰둥해진 것이다. 한번 높아진 생활수준은 다시 낮추기가 어렵다고 하더니 영락없이 그 모양이 된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12년이 지난 2011. 11. 12. 다시 그 영남알프스를 찾았다. 이번에는 법원산악회원들과 더불어.

   서울에서 내려간 사람 외에 울산, 부산, 창원, 밀양, 진주의 산악회원들이 합류하여 100여 명에 달하는 대부대가 산을 점령하였다.

 

  해발 1,000m 내외의 재약산(1,018m), 사자봉(1,189m), 능동산(981m), 가지산(1,241m), 간월산(1,069m), 신불산(1,209m ?), 영축산(1,081m)이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어 겨울이면 눈 덮인 고봉들의 모습이 마치 알프스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 영남알프스이다.

 

  맨 북쪽에 있는 가지산을 기점으로 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다 능동산에서 갈라져, 서쪽으로는 사자봉→재약산이 펼쳐지고, 동쪽으로는 간월산→신불산→영축산으로 이어진다. 흡사 좌청룡 우백호의 형국이다. 12년 전에는 가지산 석남사에서 일박(一泊)하고 그 우백호에 해당하는 능동산→사자봉→재약산을 거쳐 밀양 표충사로 하산했었다. 이번에는 그 좌청룡에 해당하는 간월산→신불산→영축산 코스를 택하였다. 어느 코스나 광대한 억새평원이 산사람의 눈을 즐겁게 한다.

 

영남알프스1.jpg

 

2011. 11. 12.(토)

 

  전날 퇴근 후 버스를 타고 밤늦게 통도사관광호텔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다소 피곤하련만 아침 6시 30분부터 시작된 아침식사시간에 마주치는 산악회원들의 얼굴은 환하기만 하다. 아마도 머릿속에는 이미 영남알프스의 억새밭이 펼쳐져 있으리라. 

  버스를 타고 등억온천지구에 있는 간월산 주차장에 도착하니 울산팀과 창원팀이 먼저 와 있다. 영남알프스2.jpg조용구 울산지방법원장과 윤인태 창원지방법원장이 반가운 얼굴로 맞이한다.

  이제껏 많은 산을 다녔으면서도 등산 전에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맨손체조를 하면서 우선 몸을 풀었다. 총원이 100여명이나 되다보니 부상방지를 위하여 필요하다.

 

   “하나, 둘, 셋, 넷....”

 

법원산악회 김성원 총무(밀양지원 사무과장)의 구령소리가 맑은 공기를 가른다.

 

   인원 점검을 마치고 아침 8시 15분 대장정에 올랐다. 출발지에서 간월재 정상까지 가는 길은 계속 오르막이다. 본의 아니게 산행에 끌려 다니느라 고생하는 황진구 부장이 걱정되어 좌우를 둘러보는데 보이지 않는다. 산에 가면 으레 맨 뒤에 처져 힘겨워했는데, 어찌 된 일일까.

         

      등영남알프스3.jpg산로만 따라 올라간다면 간월재 정상에 도착할 즈음에 이미 지쳐 버려 그 이후의 산행이 힘들겠지만, 다행 히 갈지(之)자로 된 임도(林道)가 나 있어 다소 돌아가기는 해도 걷기가 훨씬 쉽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늦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신불산의 공룡능선도 보이고, 간월산의 험준한 암벽들도 눈에 들어온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 때문일까, 우리 일행 말고는 다른 등산객들은 안 보인다. 혼자 와서 사색을 하면서 걸어도 참 좋겠다는 오경미 부장의 말이 피부에 와 닿는다. 구름 낀 하늘이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아침 10시, 간월재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은 신불산과 간월산 사이의 안부이다. 전망대도 있는 이곳은 단순한 안부가 아니라 나무로 된 식탁, 의자 등이 있는 넓은 휴식 공간인데, 영남알프스4.jpg 그에 더하여 휴게소 건물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내막은 알 수 없으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산은 가능하면 손을 대지 않는 게 좋은데... 

     

  고갯마루답게 바람이 드세다. 올라온 반대방향으로 고원지대가 펼쳐지고 그 끝에 사자봉과 재약산이 보인다.

                  

   간월산은 “간월”이라고 해서 달을 바라보는(看月) 경치가 좋은 곳인가 했더니, 한자로 “肝月”이라고 쓴단다. 간 모양의 달도 있던가? 반달이 그 쯤 되려나? 선뜻 개념이 떠오르지 않는다.

   산행 후에 인터넷을 검색하여 보니 대동여지도에는 “看月山”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렇지, 영남알프스5.jpg 그래야 뒤의 신불산(神佛山), 영축산(靈鷲山)과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가.

   더구나 억새 외에는 이렇다 할 나무가 없어 시야가 가릴 일이 없으니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바라보기에 제격이다.

   “간월산(看月山)의 만월(滿月)”,

말만 들어도 멋진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아무튼 그 간월산의 정상이 코앞이지만, 오늘의 산행코스가 아니기 때문에 반대 방향의 신불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부터 신불산을 거쳐 영축산에 이르기까지는 능선길인데, 좌우의 억새밭 사이로 계단이 가지런하다. 앞을 보아도, 옆을 보아도, 뒤를 돌아보아도 끝없이 펼쳐지는 억새평원. 아쉽게도 만개시기가 지나 꽃이 대부분 떨어졌다. 억새밭은 무엇보다도 바람에 흰 꽃이 무리지어 춤을 추는 모습이 장관인데 내가 늦게 온 걸 어쩌랴.


  신불산 가는 능선길은 오르막내리막이 심하지 않아 걷기가 수월하다. 가끔 바위도 나타나긴 하지만 그야말로 심심풀이이다. 영남알프스6.jpg

  중도에 이름 모를 암봉(岩峰)이 하나 있고, 그곳에 돌탑이 서 있다. 길에 놓인 조각돌을 얼른 하나 집어 들어 그 위에 올려놓고 산신령께 기도를 올렸다.  산신령(神)과 부처님(佛)이 공존하는 산이니 기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산신령님, 저희 일행이 100명이나 됩니다. 오늘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11시에 신불산 정상에 도착하니 창원법원 식구들의 모습이 보인다. 오는 내내 안 보여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했는데, 진즉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만능 스포츠맨인 윤인태 법원장님을 닮아 모두 힘이 넘쳐나는 듯하다. 그 중에 황진구 부장도 끼어 있어 사람을 놀라게 한다. 그러고 보니 황부장은 대법원에 오기 전에 창원에 근무하였던 터라, 옛 동료들을 만난 반가움에 힘든 줄 모르고 함께 올라온 모양이다. 

 

영남알프스7.jpg

 

 산신령과 부처님이 공존하는 신불산 정상에는 귀신도 풀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신불산의 표지석에는 높이가 1,209m로 표시되어 있는데, 바로 그 앞에 있는 대형 등산안내도에는 1,159m로 기재되어 있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보면 마찬가지로 두 가지의 높이가 다 나온다. 도대체 어느 것이 맞는 건가. 하다못해 정상에만큼은 틀리든 맞든 한 가지로 통일해서 표시해 놓아야 덜 헷갈릴 텐영남알프스8.jpg데 이거야 원...

  이곳을 관할하는 울산법원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전부 고개를 절레절레. 누구한테 물어봐야 정답을 알 수 있으려나.

 

   구름이 잔뜩 꼈던 날씨가 어느 새 맑게 개어 하늘이 눈이 시리도록 푸르다. 전형적인 가을하늘이다.

  사진전문가인 울산법원의 이주용 사무국장님이 그 하늘을 배경으로 작품사진을 하나 찍어 주겠다고 하여 포즈를 취해 보지만, 인물이 받쳐 주질 못하니 기대할 일은 아니다.

 

  신불산 정상에서 내려오다 전망대가 있는 신불재 옆의 억새평원 속에 들어가 울산에서 가져온 마늘막걸리를 반주삼아 점심식사를 하고 영축산으로 향했다.

   역시 능선길의 연속인데, 왼쪽은 절벽(그 아래로 언양이 보인다)이고 오른쪽은 고원인 전형적인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이다. 영남알프스9.jpg 오른쪽 고원은 물론 억새평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길의 흙이 축축하여 시선을 끈다. 처음엔 비가 와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길 오른 쪽의 억새밭이 늪지대라는 것이다. 명칭은 단조늪.

   비록 물이 흥건하게 고인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유심히 보면 습기가 풍부함을 금방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병영생활을 했다고도 하고, 8·15 해방 후 빨치산들이 활동하던 거점이었다고도 한다.

  이곳에는 긴 띠를 풀어놓은 듯 돌로 쌓은 석성터도 보인다. 단조성(丹鳥城)이라고 한다.              

 

  오후 1시에 영축산(靈鷲山 1,081m) 정상에 도착했다. 억새평원보다는 통도사가 있는 산으로 더 알려진 이 산은 신불산과 달리 정상이 화강암으로 된 암봉이다. 그래서 기념사진을 찍기도 만만치 않다. 반면 바위를 벗어나면 나무들이 제법 자라 신불산과는 또 다른 광경이다. 뭔가 알지 못할 영험함이 느껴지는 것은 이 산의 이름 때문일까. 

 

영남알프스10.jpg

 

    영축산의 한자 표기는 ‘靈鷲山’이다. 옥편을 찾아보면 ‘신령 령(靈), 수리 취(鷲)’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영취산이라고 불러야 한다. 대동여지도에는 이런 이름이 산이 여덟 군데나 나온다. 그런데 왜 영축산인가. 영축산의 표지석을 세운 양산시의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았더니 아래와 같은 설명이 나온다.

 

  영축산은 석가모니가 화엄경을 설법한 고대 인도의 마가다국에 있던 산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자 표기는 '영축산(靈鷲山)'과 '취서산(鷲栖山)' 두 가지로 표기되지만, 이에 대한 한글 표기는 영축산·영취산·축서산·취서산 등으로 되어 있어 혼동을 불러일으킨다. 이 같은 현상은 한자 '취 또는 축(鷲)' 자에 대한 한글 표기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일반 옥편에서는 '독수리 취'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축'으로 발음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리고 '취 또는 축' 자가 원래 '축'으로 표기되었다는 근거는 1463년(세조 9년)에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법화경언해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산 이름 혼동의 원인은 불교에서 유래된 '축(鷲)' 자를 일반인들이 접하기 쉬운 한자사전의 표기 '취'로 읽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혼동을 피하기 위해 2001년 1월 9일 양산시 지명위원회에서 영축산으로 확정하였다.

(http://yangsan.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1401778)

 

  간월산에서부터 시작하여 신불산을 거쳐 영축산에 이르기까지 가는 곳마다 지명 아니면 높이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한다.

 

  달이? 산신령이? 부처님이?

 

  아니다. 실제로 어지러운 것은 없는데, 단지 내 마음이 어지러우니 어지럽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그 산을 뭐라고 부르든, 높이가 얼마라고 하든, 그 말이 맞든 틀리든, 그 산은 그 자리에 그냥 의연히 있는데, 그 산을 바라보는 속인의 마음이 이리 쏠렸다 저리 쏠렸다 할 뿐이다.

   집착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보면 될 것을 무얼 그리도 이리저리 재는지... 언제나 이 분별하는 마음을 버리려나. 부처님은 정작 영축산에서 말씀 대신 단지 연꽃을 들어 불법을 전하고 가섭존자는 이에 미소로 화답하였다는데, 범의(凡衣)를 걸친 백성에게 염화미소(拈華微笑)의 법문은 너무나도 아득한 이야기이다.

 

  그 분별지심으로 가득차 무거워진 몸으로 통도사 부근 지산리 쪽으로 가파른 길을 하산하려니 무릎이 끊어질 듯 아프다. 간월재처럼 임도라도 잘 닦아놓았으면 좋으련만. 차라리 산행코스를 역(逆)으로 잡았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지산리 버스정류장 최종목적지에 도착하니 오후 3시이다. 출발지로부터 총 6시간 45분 걸린 셈이다.

 

  통도사관광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뒤풀이삼아 이른 저녁을 먹은 후 6시에 서울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해가 짧은 탓에 이미 차창 밖은 깜깜하다. 이제 남은 일은 꿈속에서 산신령을 만나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는 것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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