晩秋, 그 낙엽을 밟으며(북한산성 12성문 종주)

2010.02.16 12:39

범의거사 조회 수:13395

 


            晩秋, 그 낙엽을 밟으며

                     
                        
 
 산을 좋아하는 나더러 누가 어느 산을 가장 많이 가 보았느냐고 묻는다면 단연 북한산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 북한산이건만 진작부터 벼르기만 하였을 뿐 실행에 옮기지 못한 등산코스가 있었다. 바로 북한산성 12성문 종주코스이다. 2007. 11. 17. 그 동안 마음 한 구석에만 담아두었던 그 종주를 단행하였다. 마치 지난 여름에 묵은 빚을 갚는 심정으로 설악산 공룡능선에 도전하였듯이.

  유사시 한양의 도성이 함락되면 왕이 대피하기 위하여 쌓은 성인 북한산성은 총 길이가 12.7km이고 성안 넓이가 약 200만 평으로, 4대문으로 둘러싸인 한양도성의 넓이(약 232만 평)에 버금간다. 남한산성이 인조 2년(1624년)에 축조되어 병자호란 때 왕이 그곳으로 대피한 것과 달리, 북한산성은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숙종 37년(1711년)에 축조되었다. 남한산성보다 유사시에 대피하기에 가깝고 산세도 험하여 방어하기에 더 낫다고 본 것이 아닐는지.

  이 북한산성을 한 바퀴 돌려면 12개의 성문을 지나야 한다. 대서문, 대남문, 대성문, 대동문, 북문 등 5개의 큰 문과 가사당암문, 부왕동암문, 청수동암문, 보국문(동암문), 용암문, 위문(백운봉암문), 시구문(서암문) 등 7개의 암문(暗門)이 그것이다. 큰 문은 문루(門樓)가 있고 출입구도 아치형의 홍예문(虹霓門)이지만, 암문은 문루가 없고 모양도 대부분 사각형이다. 산성의 총 길이는 12.7km이지만(순수 성곽의 길이는 8.4km), 지세(地勢)상 성곽을 우회하여야 하는 곳이 있어 종주길은 13km가 넘는다.
  북한산성에는 그 밖에도 중성문과 두 개의 水門(수문은 현재 터의 흔적만 남아 있다)이 더 있으나 산성 종주길에서는 만나지 못한다.

2007. 11. 17.  

  전날 오후 5시까지 확인하였던 일기예보에서 내일은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에 비가 오락가락할 것이라고 하여 비 맞을 각오를 하고 나선 길인데, 오전 9시 북한산성 입구 주차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등산객들이 북한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이라고 일기예보를 모를 리 없건마는 그게 무에 그리 대수냐는 듯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니면 일기예보가 틀리는 게 예사이니 아마도 오늘도 일기예보가 틀려 비가 안 올 것이라고 믿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차장에서 대서문까지는 셔틀버스를 이용하였다. 20분 정도 걸으면 되는 거리지만, 포장도로인데다 앞으로의 일정을 감안하여 힘을 비축하기로 한 것이다.
  
  

 
  9시 30분, 드디어 북한산성 12성문 종주의 첫 번째 문인 대서문을 출발하여 의상봉으로 향하였다. 대서문은 북한산성 성문 가운데 서쪽을 대표하는 성문으로 북한산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발 150m 지점에 자리하여 12 성문 중 가장 고도가 낮은 곳에 있다. 이 문의 편액글씨는 이승만 대통령의 작품이다.  
  
  대서문에서 의상봉을 직접 오르는 길은 성문 종주 코스 중 가장 험난하다. 경사가 급하고 쇠줄난간을 잡고 바위를 오르기도 한다. 게다가 등산로가 불분명한 곳이 있어(코스가 험하다 보니 등산객 많기로 유명한 북한산에서조차 이 길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송봉준 판사가 사전답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중에 등산로를 잃고 우왕좌왕하기도 했다.
   산행 경험이 적은 조의연 판사는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쉰다. 어느 산에서나 등산 시작 후 나타나는 일반적인 깔딱고개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등산자켓은 진즉에 벗어서 배낭 속에 넣었다. 벌써 등이 땀에 젖은 것이다.

  산이 제 아무리 험하다 한들,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인간의 발을 어찌 당하랴. 10시 10분 마침내 의상봉 정상(502m)에 도달하였다. 맞은편의 원효봉(505m)이 우리를 보고 수고하였다고 인사하는 듯 손에 잡힌다. 우리와는 달리 북한산성 입구 주차장이나 백화사 쪽에서 비교적 완만한 등산로를 따라 올라온 사람들이 이미 여럿 있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백운대 주위의 산세들이 일품이다. 왼쪽으로부터 염초봉,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이 차례로 보이고, 유심히 보면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의 안부에 위치한 위문도 눈에 들어온다. 위문은 오늘 지나야 할 12성문 중 열 번째인데, 저기까지 언제 갈 거나...
  일단 의상봉에만 도착하면 이어서 용출봉→용혈봉→증취봉→나월봉→나한봉→문수봉 등 6개의 암벽 봉우리를 차례로 넘어 대남문까지 이어지는 의상봉능선이 펼쳐지는데, 작은 공룡능선이라고 할 정도로 좌우 경치가 뛰어나다.

  10시 20분, 두 번째 문인 가사당암문에 도착하였다.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 해발 488m 지점에 위치한 암문으로서, 서쪽으로는 백화사로 동쪽으로는 국녕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에 있다. 국녕사(國寧寺)는 북한산성 축조 당시 창건된 사찰로서, 그 동안 폐허 상태로 있다가 1998년 능인선원의 주도로 중창이 된 절이다.
  용이 승천하였다는 용출봉(龍出峰)의 심장인 용심혈(龍心穴)에 자리하고 있는데, 법당에 서서 보면 아마추어의 눈에도 천하명당 자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지난 11월 3일 대법원장배 전국등산대회 때 이곳에 처음 왔다가 그 기막힌 자리잡음에 혀를 내두른 기억이 새롭다.
  또한 이 절에는 높이가 24m(동양 최대라고 하니 아마도 세계 최대가 아닐까 싶다)나 되는 청동좌불이 모셔져 있는데, 부처님의 수인(手印)이 특이하게도 두 손을 모은 합장인(合掌印)이어서 눈길을 끈다. 인도의 아잔타(Ajanta)석굴이나 중국의 돈황석굴에서나 볼 수 있을 뿐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이다. 아무튼 이 청동좌불은 그 거대함으로 인하여 의상봉능선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가사당암문에서 세 번째 문인 부왕동암문까지 가려면 용출봉(571m), 용혈봉(581m), 증취봉(593m)을 차례로 지나야 한다. 쇠줄난간을 잡고 올라가야 하는 오르막 바위길이 있는가 하면, 평지처럼 걷는 길도 있고, 올라갔으니 당연히 내려가야 하는 내리막길도 나온다. 본래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인생살이 아니던가. 그냥 평탄하기만 하다면 산행의 재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가는 길의 2시 방향으로 멀리 문수봉에서 시작하여 승가봉, 사모바위를 거쳐 비봉으로 이어지는 비봉능선의 수려함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11시 20분, 세 번째 문인 부왕동암문에 도착하였다. 가사당암문에서 출발하여 1시간 걸린 셈이다. 문이 위치한 곳의 해발고도가 521m이니 문의 높이가 점점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왕동암문은 북한산성의 7개 암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정식 홍예는 아니지만 위쪽 성돌을 둥글게 파서 홍예문처럼 만든 게 특이하다. “소남문”이라고도 불리었으며, 부왕동이란 이름은 성안 동쪽에 있는 부왕사(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로 내려가는 계곡 일대를 일컫던 이름이라고 한다.
   그나저나 비록 큰 문에 비하여 대접을 못 받는 암문이라고는 하지만, 작은 나무판에 대충 적어 문의 옆구리에 붙여놓은(12 성문 중 유일하다) 표지판은 좀 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왕 성곽을 보수하여 제 모습을 찾을 요량이면 문의 이름을 쓴 현판도 어느 정도 볼 만하게 만들어 붙여 놓으면 좋지 않을는지...  

   부왕동암문을 지나면 나월봉, 나한봉, 716봉이 차례로 기다린다. 이들 봉우리는 오르기가 만만치 않아 때로는 우회를 하기도 하여야 한다. 2001. 10. 3. 고등학교 친구들과 삼천사 계곡을 지나 문수봉으로 향하다 나월봉 언저리에서 길을 잃어 무진 고생을 한 기억이 새롭다.   716봉의 암벽을 오를 때는 바람이 세차게 불어 하마터면 모자를 날려 보낼 뻔하였다. 지난 8월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갔다가 더어반에서 3,000원 주고 산 카우보이모자로 마음에 쏙 들어 앞으로 계속 애용할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순간적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11시 55분, 네 번째 문인 청수동암문에 도착하였다. 이 문은 해발 694m에 위치한 성문으로 여기서 동남쪽으로 비봉능선으로 가는 길이 갈려나간다.
   비봉능선 자체는 문수봉(727m)에서 바로 승가봉(575m)을 거쳐 비봉(560m)으로 이어지지만, 문수봉의 암벽구간이 위험하여 문수봉을 우회하는 등산로를 만들었고, 청수동암문이 바로 그 비봉능선 등산로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이처럼 청수동암문은 의상봉능선과 비봉능선이 만나는 지점일 뿐만 아니라, 삼천사계곡을 따라 올라온 등산객들도 이곳으로 모이는 까닭에 늘 사람들로 붐빈다. 이를테면 교통의 요지인 셈이다.  
   청수동암문 바로 위의 문수봉 암벽구간을 우회하여 대남문으로 가는 길은 평탄하다. 의상봉능선의 종점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12시 5분, 다섯 번째 문인 대남문(大南門)에 도착하였다. 의상봉능선의 종점이다. 대남문은 북한산성 성문 가운데 남쪽을 대표하는 성문으로 문수봉(727m)과 보현봉(715m) 사이의 안부에 위치해 있다. 해발고도는 663m이다. 편액은 서예가 박병규의 글씨이다.
   대남문의 남쪽 바깥으로는 구기동계곡으로 연결되고, 북쪽 성안으로는 행궁지로 곧바로 연결된다.
   이 행궁지 가는 길의 단풍이야말로 북한산 단풍의 별미인데, 이 날은 이미 만추로 접어든 시점이라 발에 밟히는 낙엽의 사각거리는 소리에 만족해야 했다.  

   이미 12시가 넘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대남문 주위의 공터마다 사람들이 진을 치고 앉아 점심을 먹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곳이 식사장소로 제일 적합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다른 문들과 달리 성 안쪽으로 공터가 꽤 넓다.
   주차장 근처에서 사온 김밥의 맛이 제법이다. 조 판사와 송 판사가 가져온 과일까지 곁들이니 이내 포만감에 젖는다. 어제 일기예보에서 흐리고 비까지 온다던 날씨는 예보를 비웃기라도 하듯 화창하기 그지없다.

    그 동안 거의 쉬지 않고 달려왔는지라 점심 식사 후 좀 오래 쉬고 싶었지만, 12개 성문 중 이제 겨우 다섯 개를 지났으니 갈 길이 멀다. 그래서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는데, 다행히 이제부터 대성문→보국문→대동문까지는 성문 간의 거리가 짧고, 이들을 지나 용암문까지 이어지는 산성주능선길은 성벽을 따라서 난 길만 따라간다면 오르막내리막이 심하여 힘들지만, 곳곳에 평탄한 우회로가 있어 훨씬 수월하다.
   욕심 같아서는 성벽을 따라서 난 길로만 가고 싶었지만, 겨울의 초입으로 들어서는 길목의 늦가을 해가 짧은 것을 생각하여, 그리고 아직까지는 틀렸지만 언제 일기예보가 맞아 비가 올지 몰라 되도록이면 우회로를 택하였다.    

   13시 20분, 대남문에서 숲속 길을 따라 여섯 번째 문인 대성문(大城門)에 도착하였다. 해발 625m 지점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 성문 가운데서 가장 큰 문이다(높이 4m, 폭 4.5m). 청수동암문을 기점으로 해발고도가 점차 낮아지고 있다.
    대성문은 본래 처음에는 “소동문”으로 불린 작은 암문이었으나, 성문 위치가 문 북쪽 기슭의 행궁에서 이곳을 통과하여 형제봉(462m)을 거쳐 북악터널 부근을 지나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지점에 있어서 왕이 이 문을 출입하게 됨에 따라, 성문을 성대하게 개축하고 이름도 대성문으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편액은 숙종의 글씨이다.

   13시 30분, 대성문을 떠난 지 10분만에 일곱 번째 문인 보국문(輔國門)에 도착하였다. 역시 우회로를 택한 덕분에 일찍 도착한 것이다. 해발고도는 567m.
   북한산성의 여느 암문들처럼 조그만 암문에 불과한데 웬 일로 거창하게 보국(輔國 : 글자대로라면 나라를 돕는다는 의미이다)이라는 이름이 붙었나 하고 의아해했는데, 나중에 알고 본즉, 본래 이름은 “동암문”이었으나, 그 아래에 있었던 절인 보국사(輔國寺)의 이름을 따 보국문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보국문에서 성문 밖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정릉계곡으로 이어진다.  
  
    13시 35분, 여덟 번째 문인 대동문(大東門)에 도착하였다. 보국문에서 대동문은 지척이다. 산성을 따라 난 길도 평탄하다. 중간지점에서 성 밖으로 칼바위능선이 펼쳐진다.
   대동문은 북한산성의 성문 중 동쪽을 대표하는 성문으로 해발 54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문루는 1993년에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이 문의 편액 역시 숙종의 글씨이다.

   성문 밖으로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 우이동 진달래능선, 소귀천계곡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대동문도 오고가는 등산객들로 붐빈다. 성문 안쪽으로는 역시 행궁지로 연결되는 등산로가 있다.
  대동문에서 용암문까지는 1.5km로 제법 멀다. 그러나 길이 거의 산책로 수준이라 걱정을 안 해도 된다.

   13시 50분, 용암문 가는 길에 동장대(東將臺)에 들렀다. 장대(將臺)는 전투시에 장군이 군대를 지휘하는 곳이다. 북한산성에는 본래 동장대, 북장대, 남장대 등 3개의 장대가 있었는데, 현재는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동장대만 1991년에 복원된 상태이다. 동장대의 편액은 복원 당시의 서울시장이었던 조순이 썼다. 

   이 동장대로 올라가는 길의 낙엽이 참으로 멋지다. 아직 가지에 매달려 있는 나뭇잎도 있었지만 대부분 땅에 떨어져 수북하게 쌓인 위를 걷노라면 그 푹신함이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 것 같다.
   비록 연출된 것이긴 하나 카메라에 잡힌 늦가을 산객의 뒷모습이 산과 사람의 하나 됨을 보여주는 듯하다.
   동장대에서 용암문 가는 도중에 전에는 북한산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산장을 헐어 쉼터로만 사용하고 있다.     
   오염원이 될 수 있는 산장을 헐어버린 국립공원관리공단측의 처사가 백번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산성 종주길에서 유일하게 유사시에 등산객들에게 대피처와 음식제공처 역할을 하던 곳이 없어진 아쉬움도 쉽게 지울 수가 없다.  

   14시 10분, 아홉 번째 문인 용암문(龍岩門)에 도착하였다. 이 문은 용암봉 기슭 해발 58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암문이다.
   이 용암문에서 밖으로 나가 동쪽으로 내려가면 유명한 도선사가 나온다. 대학교 4학년 때(1977년)의 바로 이 무렵 도선사에서 사법시험공부를 하고 있던 기억이 머릿속을 맴돈다.
   두꺼운 법률책에 파묻혀 지내던 시절, 화려한 등산복을 입고 “하하 호호” 하면서 절의 공부방 옆 등산로를 오르내리는 선남선녀들이 꽤나 부러웠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3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남다른 감회가 어찌 없겠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법전과 씨름하고 있을 “거북이”를 비롯한 수많은 고시생들에게 격려를 보낸다.

   용암문에서 위문까지 가는 길은 산성주능선에서 가장 힘든 코스이다.
   만경대의 서쪽 산록을 끼고 도는데 바위길이 하도 험하여 쇠줄을 잡고도 진땀을 흘리는 경우가 많다. 쇠줄을 놓치거나 발을 잘못 디디면 천길 수직 암벽 밑으로 떨어져 세상과 작별을 고해야 한다.
    그 대신 멋진 경치가 이런 어려움을 보상해 준다. 우뚝 솟은 노적봉(716m)의 뒤통수가 보이고, 그 아래로는 의상봉과 원효봉이 함께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런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까, 이 길 역시 늘 등산객들로 붐빈다.

   14시 50분, 열 번째 문인 위문(衛門)에 도착하였다. 백운대(836m)와 만경대(800m) 사이의 안부에 위치하여, 북한산성 성문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문이다(690m). 대남문에서 시작한 산성주능선길이 여기서 끝난다.
   위문의 본래 이름은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이었는데, 일제시대 때부터 위문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위문은 일본에서 과거 궁성의 성문을 지키는 관서명칭이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북한산 지도에 백운봉암문을 위문으로 표시하여 놓은 것을 이제껏 부르고 있다니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출처 : http://blog.daum.net/kcyun3/14486326).
   위문은 백운대로 올라가는 사람, 우리가 지나온 용암문 쪽으로 가는 사람, 구파발을 향하여 대서문 쪽으로 내려가는 사람, 우이동 쪽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교차하는, 그야말로 교통의 요지에 자리한 곳이라 12성문 중 등산객이 제일 많은 곳이다.    

   만경대의 산록을 끼고 도는 등산로의 마지막 부분에서 위문까지는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그 계단을 허위허위 올라가니 숨이 가쁘다. 숨도 돌릴 겸 10분간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진즉부터 보호대를 하였건만 무릎에 엄습하는 통증을 어쩔 수 없다. 산행 시작한 지 이미 5시간 30분이 지났으니 어찌 무릎이 안 아프겠는가. 그나마 구암도사가 가르쳐 준대로 평소에 매일 뜸을 뜨는 덕분에 이번 같은 산행도 가능한 것이다.

   15시 정각에 위문을 출발하는데 마침내 비가 오기 시작한다. ‘결국은 일기예보가 맞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졌다. 이제부터는 무릎이 약한 등산객들이 제일 싫어하는 내리막길(그것도 대부분 돌길에다 경사도 급하다)을 한참 가야 하는데, 비까지 오다니 이를 어쩔거나... 애타는 마음을 북한산 산신령이 알아주신 것일까, 천만다행으로 가는 빗방울이 10분 정도 날리더니 그친다.

   위문에서 열한 번째 문이 있는 원효봉을 가려면 염초봉에 올랐다가 바로 원효봉으로 이어지는 원효봉능선을 타는 게 정도이지만, 염초봉은 북한산에서 등반하기에 가장 위험한 곳으로 악명을 떨치는 곳이라 우회하기로 했다.
   약수암을 거쳐 대동사를 지나는데, 절의 현판이 “北漢山靈鷲峯大東寺”(북한산영취봉대동사)로 되어 있다. 웬 일인가 했더니 염초봉의 본래 이름이 “영취봉”이라고 한다.    

   16시 정각, 열한 번째 문인 북문(北門)에 도착했다. 북한산성 성문 중 북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인데, 문루는 없어지고 출입문만 남아 있다. 문루는 '한도형'이라는 사람(정신이상자였다고 한다)의 방화로 무너졌고, 타다 남은 재목과 기와는 대남문을 증개축하는 데 사용했다고 환다.   
   염초봉과 원효봉 사이의 안부에 위치한 북문의 해발고도는 430m이다.
   대동문, 대서문, 대남문의 문루들을 다 복원한 마당에 이 문만 을씨년스럽게 그냥 놓아두는 이유가 뭘까. 이름조차 대북문(大北門)이라고 안 하고 그냥 북문이라고 불리며 홀대를 받고 있는 게 안쓰럽다.

   북문에서 원효봉 정상(505m)은 지척이다. 정상에서 이제까지 온 길을 돌아보는 맛이 괜찮다.
   해가 저물어가는 석양빛 아래 저 멀리 산성주능선의 동장대가 아스라이 보인다. 아픈 무릎을 이끌고 저 먼 길을 돌아온 내가 스스로 대견스럽다. 맞은편의 의상봉이 “드디어 그곳에 도착했군요” 하고 인사하는 듯하다.
   사람이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는 게 바로 산이 아닐까. 누구처럼 산이 있어 산에 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산에 올랐을 때 느끼는 성취감이 나를 산으로 인도하는 이유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16시 45분, 드디어 마지막 열두 번째 문인 시구문에 도착하였다. 원효봉에서 하산을 계속하여 한참 내려온 해발 18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본래 이름은 “서암문”인데, 성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이 문을 통하여 성 밖으로 내보냈기 때문에 시구문(屍軀門)으로 불리게 되었다.
   중구 광희동에 있는 광희문(光熙門)이 한양도성의 시체를 내보내는 역할을 하다 보니 시구문으로 불린 것과 마찬가지이다.
   세상을 하직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그에 대한 배려일까, 암문임에도 위쪽 성돌을 둥글게 파서 홍예를 만든 게 특이하다.

   이제는 주위가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산의 밤은 도심보다 빨리 찾아오기 마련. 하산을 서둘러 산성계곡을 통해 주차장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정각이다. 아침 9시에 출발하여 꼭 8시간 만에 종주를 끝내고 원점으로 회귀한 것이다. 벼르고 별렀던 북한산성 종주를 마침내 해냈건만 성취감과 함께 따라 오는 아쉬움의 정체는 “이 뭐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