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릉은 어디메뇨(두타산,청옥산)

2010.02.16 12:42

범의거사 조회 수:13534


                       무릉은 어드메뇨   
                      

   산을 즐겨 찾게 되면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작년에 갔던 설악산 공룡능선이 그 중 하나였다면, 이번에 간 두타산, 청옥산 역시 그에 못지않게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충주지원장 시절인 90년대 중반 두타산 초입의 무릉계곡 입구만 잠깐 맛을 보고 온 이래 내 머리 속에 늘 잠재하여 있던 곳이다.  

 

       2008. 11. 1.(토)

   전날 퇴근과 동시에 법원도서관의 간부들과 함께 4시간 걸려 달려와 두타산 밑 무릉계곡 입구의 무릉프라자모텔(동해시 삼화동 856-19. 033-534-8855)에서 편하게 숙박한 덕분에 아침 일찍 등산을 시작할 수 있었다.

   무릉프라자모텔 앞에 있는 용추식당(033-534-9133)에서 주인이 졸린 눈을 부비며 아침식사로 만들어 준 닭죽도 맛있었지만, 뜨뜻한 국물 없냐고 하니까 싫다 않고 즉석에서 된장국을 끓여 주는 순박한 강원도인심이 더욱 좋았다. 

 

   준비물 때문에 근처 상가에 들렀는데 주인이 두타산의 의미를 아느냐고 묻는다. 모른다고 했더니 “골 때리는 산”이란다. ‘두’는 머리(頭)요 ‘타’는 때린다(打)는 뜻이라나.
   이유인 즉, 등산로의 경사가 워낙 급해 설악산 대청봉 오르기보다 더 힘들어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청옥산까지 갔다 돌아오려면 10시간은 족히 걸릴 거라며  조심하란다. 앗, 9시간 걸릴 것으로 예상하였는데...
   그러나 실은 이도 저도 다 틀린 예상이란 걸 이 때만 해도 몰랐다.

 

무릉계곡

 

   아침 7시 30분, 두타산 등산로가 시작되는 해발 180m 지점의 신선교(神仙橋)를 통과하였다. 이 다리를 통과하는 순간 무릉도원으로 접어들어 말 그대로 신선이 되는 것이다.


   다리 위에서 일단 무릉계곡의 맛을 잠깐 곁눈질하며 심호흡을 하고 등산로로 접어들자, 무릉계곡이 국민관광지 1호임을 자랑스럽게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이 우리 일행을 환영한다.

   이 안내판을 지나면 이내 길옆 왼쪽에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는 글씨를 날아갈 듯한 글자체로 새겨 넣은 커다란 바위가 보이고, 이어서 금란정(金蘭亭)이 나타난다.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은 조선시대 전기의 4대 명필 중 하나로 꼽히는 양사언(楊士彦, 1517~1584.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로 시작하는 시조로 유명한 바로 그 사람이다)의 글씨이다.
    원본은 무릉반석에 석각(石刻)되어 있는데, 워낙 명필에 명문이라 누구나 쉽게 보라고 이곳에 따로 새겨 놓은 모양이다.

 

    글의 내용인 즉, ‘동양의 근본사상인 유, 불, 선 삼교를 동양사상이 추구하는 최고의 이상인 천인합일로 승화시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조화, 통일, 일체 화합을 의미함”이라고 안내판에 씌어 있다. 내용을 알 듯 모를 듯... 쉬운 말로 어법에 맞게 써 놓을 수 없나...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신선이 노닐던 무릉, 너른 암반에 샘이 솟는 바위, 번뇌를 떨쳐내는 골짜기’이고, 이를 조금 의역하면

 

‘신선들이 노닐던 이 세상의 별천지, 물과 돌이 부둥켜 잉태한 대자연 속에서, 세속의 탐욕을 버리니 수행의 길이 열리네’

 

쯤 될 것이다. 

   금란정은 어떤 곳일까. 대한제국 말기 삼척 지방의 유림들은 향교 명륜당에 모여 유학을 강론하였으나, 그것이 일본인들에 의하여 제지당하자 1903년(광무 7년) 금란계(金蘭契)를 조직하였고, 그 뜻을 기리고자 전각을 세우려 했으나 그마저 할 수 없었다. 결국 해방 후인 1947년 북평에 금란정을 세웠다가 1958년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금란정에서 보면 수백 명이 놀 수 있을 만큼 넓디넓은 무릉반석(약 1,500 평)이 한눈에 들어온다. 금란정에는 계원들의 싯귀를 새긴 현판이 걸려 있고, 무릉반석에는 옛날 이곳을 찾은 시인 묵객들의 무수히 많은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갈 길이 멀어 자세히 볼 시간이 없다.


   돌아오는 길에 보기로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것은 요새 기준으로 보면 분명 자연훼손인데, 옛날 선비들의 행태는 애교로 보아 넘겨야 하는 건가.
 
    금란정을 지나면 삼화사 일주문이 나온다. 삼화사(三和寺)는 신라의 자장(慈藏)이 643년(선덕여왕 12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지었다는 절이다. 처음에는 흑련대(黑蓮臺)라 하였는데, 864년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절을 다시 지어 삼공암(三公庵)이라 하였다가, 고려 태조 때 삼화사라고 개칭하였다고 한다. 본래는 현 위치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1977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언뜻 보아도 참으로 정갈한 인상을 풍기는 절이다. 무릉도원에 있는 절이면 그 절에는 신선이 사는가, 스님이 사는가, 아니면 신선 같은 스님이 사는가... 속인의 머릿속에는 늘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서 탈이다. 그 잡념을 대웅전 앞마당에 서서 등산을 무사히 하게 해 달라고 비는 일념으로 털어냈다.  

    삼화사까지가 등산로의 초입이라면 이곳을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된다. 지대가 낮아서일까 벌써 11월이 시작되었건만 단풍보다는 초록빛이 더 강한 게 아직까지는 여름색의 티를 완전히 벗지 못하였다.

    무릉계곡과 그 좌우의 주상형(柱狀形) 절벽들이 만들어낸 선경(仙境)에 감탄하면서(그래서 이곳을 ‘한국의 장가계’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숲속으로 난 그나마 평탄한 길을 흥얼거리며 올라가다 보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는 두타산을 오르는 깔딱고개이고, 오른쪽으로는 용추폭포로 해서 청옥산 가는 길이다.  
 

두타산

  
    아침 8시. 두타산으로 가는 깔딱고개를 오르기 시작했다. 두타산을 ‘골 때리는 산’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두타산성까지 이어지는 이 오르막길은 정말로 숨이 찼다. 30분 동안 헉헉대면서 두타산성에 다다르자 펼쳐지는 장관이란 필설로 형언하기 어렵다.

    두타산 종주길 중에서는 이곳에서 보는 경치가 으뜸이다. 높은 산봉우리, 깎아지른 절벽, 그 사이의 계곡들과 기암괴석이 연출하는 절경에 넋을 잃는다.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청옥산 정상에는 아직도 구름이 걸려 있다.
    계곡 건너 절벽에 걸려 있는 관음암은 속세와 연을 끊은 모습이다. 저곳에서 면벽수도하면 100일 안에 득도할 것만 같다.


    그러면 낙락장송 밑의 바위에 걸터앉은 범부(凡夫)는 신선인가 수도승인가.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한낱 산객(山客)일 뿐인가.

 


    문득 이태백의 시 ‘산중문답(山中問答)’이 떠오른다. 아무리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한 시인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그 옛날에 이곳까지 왔을 리는 없을 텐데, 그가 지은 이 시야말로 이곳과 딱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혹시 그가 신선이었나? 하긴 시선(詩仙)이라고 하지 않던가...

問余何事捿碧山(왜 이 깊은 산속에 사냐고 묻는데)
笑而不答心自閑(미소짓고 대답 않으니 마음이 절로 한가롭다)  
桃花流水杳然去(복사꽃 뜬 물이 아련히 흘러가니)
別有天地非人間(이곳 별천지에 사는 나는 인간이 아니로세)

  
     매표소(무릉계곡관리사무소)에서 2.1 km 떨어진 곳의 두타산성(頭陀山城)은 조선시대 1414년(태종 14년)에 축성된 산성으로, 천연의 험준한 산 지형을 이용하여 지은 것이다.
    산의 돌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약간 다듬어 사용하여 견고하지는 않으나, 산의 지형이 험준하여 천연의 요새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의병들이 이곳에서 왜병들과 사흘간 전투를 벌이다 끝내 모두 산화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성벽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두타산성에서 가쁜 숨을 돌리고 기운을 재충전하여 다시 길을 나섰다. 아직 두타산 정상까지는 4km나 남았다. 이제까지 온 거리의 두 배이다.
    그래도 이제는 높이 올라온 값을 한다. 주위의 울긋불긋한 단풍이 어서 오라고, 자기들을 좀 보고 가라고 손짓한다. 


    대궐터 가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를 지나자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쨍하고 비친다. 이제껏 두타산의 서쪽 사면에 있어 그늘 속에 걸었는데, 해가 높이 뜨자 서쪽 사면에도 햇살이 찾아온 것이다. 언뜻 시계를 보니 아침 9시다.
    그 햇살이 눈부신 것에 비례하여 단풍의 붉은 색, 노란 색이 더욱 빛난다. 

    두타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길(햇대등)에 올라서자 청옥산과 고적대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줄기가 좀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형형색색으로 물든 크고 작은 봉우리들과 절벽들도 반긴다.
   능선길은 바람이 불면 춥고, 잦아들면 더워 등산자켓을 벗었다 입었다 해야 했다.

 

    이 능선길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적송(赤松) 군락지이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소나무들, 가지를 길게 드리운 멋진 자태의 소나무들, 나이를 짐작키 어려울 정도로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소나무들이 즐비한데, 분명 총알자국으로밖에 안 보이는 구멍이 난 소나무들도 있다. 임진왜란 때 생긴 것인지, 아니면 울진, 삼척에 침투한 무장공비들을 소탕할 때 생긴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모진 풍파를 견뎌내고 꿋꿋이 살고 있는 모습이 대견하다.  

 

    이 능선길을 올라가다 보면 쉰움산 쪽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곳에 세워져 있는 이정표의 거리표시가 가관이다. 매표소까지 7.7km란다. 앞으로 정상까지 800m 남았다는데, 이것을 합치면 매표소에서 두타산 정상까지 등산로의 총길이가 8.5km란 말인가. 이제껏 6.1km로 알고 왔거늘...
    등산로 중간 중간의 이정표에서 보면, 온 거리와 갈 거리를 합칠 경우 6.2km가 되는 수가 종종 있는데, 100m 정도 틀리는 거야 애교로 보아 줄 수 있지만, 이곳의 이정표는 정말 너무 심하다.  

    두타산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나뭇잎의 숫자가 줄어든다. 8부능선 쯤부터는 아예 낙엽이 되어 땅에 나뒹굴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발에 밟히는 흙의 감촉이 다르다. 유심히 보니 응달에는 얼음이 얼어 있다. 무릉계곡 입구에는 여름의 흔적이 남아 있건만 이곳은 어느새 겨울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 얼음이 살짝 언 길이 햇볕이 따스한 양지에서는 녹아 진창길로 변한다. 마치 이른 봄에 산을 찾은 기분이다.
     산 하나를 오르면서 여름, 가을, 겨울, 봄의 사계절을 다 맛보는 즐거움이란 가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이 어찌 아니 즐거우랴.

    두타산 정상 밑에서 예기치 않게 가파른 길을 만났다. 밧줄을 잡아야 겨우 올라갈 정도로 험한 곳이다. 그 동안 능선길을 편하게 왔으니 마지막으로 땀을 한번 흘리라는 것이 두타산 산신령의 주문인 모양이다. 


    한라산의 정기를 타고난 홍진호 판사, 베라크루즈표 비행기를 운전하는 편찬과장(이만석), 등산베테랑 열람과장(백중석), 지칠 줄 모르는 힘을 자랑하는 허의천 사무관으로 구성된 선발대는 진즉에 산 정상에 도착하였지만, 아무래도 힘이 부치는 듯한 홍일점 정리과장(윤성혜)과 보조를 맞추다 보니 다소 지체되었다. 배려심이 깊은 총무과장(김영록)이 끝까지 정리과장을 보살피며(?) 동행한다. 강원도가 고향인 최진영 국장님은 힘든 기색이 전혀 없고, 발목을 다쳐 걱정했던 산악회장(송봉준 판사)도 다행히 늠름한 모습이다.



  
    오전 11시 30분, 드디어 두타산(頭陀山) 정상이다. 해발 180m지점에서 출발하여 1,353m 까지 표고차 1,173m를 4시간 걸려 올라온 셈이다. 이쯤 되면 설악산 대청봉 오르기보다 힘들다고 하던 상점 주인의 말이 이해가 된다. 그러나 진짜 고생은 아직 멀었으니...
    ‘골 때리는 산’이 아니라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를 수행하는 산’(頭陀는 산스크리트어 dhuta의 음역으로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것을 뜻한다)인 두타산의 정상은 널찍한 평지이다. 헬기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부러 깎아 평평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백봉령에서 괘병산, 고적대, 청옥산을 거쳐 이어져 온 백두대간이 이곳에서 댓재로 이어진다.

 

    그나저나 산 정상에 덜렁 홀로 있는 저 무덤 속에서는 어느 혼령이 불도를 닦고 있을까. 도대체 저 무덤 주인공의 후손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묘터를 잡았을까. 시신 운구는 어떻게 하였을까. 다른 것은 몰라도 햇볕 하나는 잘 받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이르긴 했지만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용추식당에서 마련해 준 김밥에 컵라면 국물을 곁들이니 꿀맛이다. 거기에 더하여 열람과장이 비장의 무기인 삶은 문어를 내놓자 모두들 탄성을 지른다. 산 정상에서 고추장 찍어 먹는 문어야말로 별미 중의 별미이다.

청옥산

    점심 먹느라 1시간을 지체한 후 12시 30분, 청옥산을 향해 출발했다. 손에 잡힐 듯 보이지만 청옥산까지의 거리는 3.7km이다. 백두대간에 속하는 이 구간은 밋밋한 능선길로 보여 금방 가겠구나 했는데, 그게 아니다. 출발해서 한동안은 가파른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그렇게 30분을 계속 내려가자 안부(鞍部)가 나온다. 두타산과 청옥산의 경계지점으로, 여기부터는 다시 오르막길이다. 신기하게도 이 오르막길이 시작됨과 동시에 길옆으로 산죽(조릿대)이 무리지어 자라고 있다. 식물들이 어찌 그렇게 귀신같이 알까. 자연의 신비이다.

 

   두타산 정상까지는 날아 다녔던 비행기 운전사 편찬과장이 무릎을 절뚝인다. 지난 10월 중순 마라톤대회에 출전하려고 연습하다 다친 무릎이 시원찮은 모양이다. 산을 오를 때는 몰랐는데, 두타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동안 통증이 찾아온 것이다.
    청옥산 정상을 1.4km 남겨 둔 박달재(박달령)에 도착하여 편찬과장만 따로 박달골 쪽으로 하산할지 설왕설래하다가 계속 함께 가기로 했다. 견딜 만하다고 한다. 산행을 마무리할 때까지 제발 무사하기를...

    안부(鞍部)에서 박달재를 지나 청옥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급하지 않은 밋밋한 능선길이다. 두타산이나 청옥산 모두 정상 부근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의 형태인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의 동쪽 사면은 거의 절벽에 가깝고 멀리 푸른 동해바다가 보인다. 반면 서쪽은 완만하고 보이느니 산뿐이다. 동고서저(東高西低)라고 할까.

 

     오후 2시 25분, 청옥산(靑玉山) 정상에  도착했다. 밋밋한 능선길이라도 역시 산길은 산길이다. 두타산 정상에서 거의 2시간 걸렸으니 말이다.
     해발 1,403m의 청옥산 정상은 정말 볼품이 없다. 헬기장이 하나 덩그러니 만들어져 있을 뿐이다. 그 주위의 숲들로 인해 원경(遠景)을 보기도 힘들다. 정상이라고 하니 정상인가 보다 할 뿐이다.
     높은 산치고 정상이 이렇게 맨송맨송한 산은 보기 힘들 것 같다. 도대체 푸른 옥돌(靑玉)은 어드메에 있다뇨? 잠시 숨을 돌리고 하산길로 들어섰다.

내리뫼(下山)길 

    청옥산 정상에서 동쪽 능선을 따라 무릉계곡으로 곧바로 하산하는 길도 있지만, 너무 가파른 듯하여 청옥산과 북쪽 고적대(1,354m) 사이의 안부(鞍部)인 연칠성령쪽으로 우회하기로 했다(정확하게는 청옥산과 고적대 사이에 망군대<1,247m>가 있고, 그 망군대와 청옥산 사이의 안부가 연칠성령이다).
    백두대간을 더 걷는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편찬과장뿐만 아니라 나 역시 무릎이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 전자(前者)를 택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청옥산에서 연칠성령(蓮七星嶺)(1,180m)까지는 1.3km이다. 연꽃도, 일곱 개의 별도 어느 하나 찾을 길 없는 연칠성령에서 한 산악인을 만났다. 백봉령 정상부터 괘병산, 고적대를 거쳐 19km를 혼자 걸어왔단다. 백두대간 주능선길인 이 길을 오는 동안 등산객을 딱 한 명 보았다고 한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분인데,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같이 하산을 하였는데, 잠시 동행하더니 어는 순간 휙 하고 사라졌다. 혹시 무릉신선이 아니었을까...

    오후 3시 30분, 연칠성령에서 하산을 시작했다. 그런데, 오호라, 이 하산길은 무릎이 시원찮은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죽음의 고생길이다. 급경사로 된 길을 계속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산행을 시작한 지 이미 8시간을 지나고 있어 다리에 힘이 빠질 때가 된 마당에 이런 가파른 길을 내려간다는 것은 정녕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등산지팡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걸이가 천근만근이다. 그나마 그 동안 계속하여 뜸을 뜬 덕분에 겨우겨우 견딜 만하다. 편찬과장도 무척 힘들어한다. 그런데 옆에서 사뿐사뿐 걷는 최진영 국장님을 보고 감탄하면서 무릎이 아프지 않냐고 물으니 아무렇지도 않다고 한다. 산에 다니다 보면 이처럼 무릎이 튼튼한 사람이 제일 부럽다. 

    한 시간가량 고생한 끝에 급경사길을 벗어나 계곡물이 보이는 곳에 다다라 한숨을 돌렸다. 이젠 단풍도 다시 눈에 들어온다. 그 단풍에 홀려 발걸음이 다소 느려진 까닭에 사원터 대피소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오후 5시가 되었다. 아직 갈 길이 4.3km나 남았는데...
  ‘깊은 산속이라 해가 일찍 질 텐데’ 하는 걱정이 들긴 하였지만, 다리가 워낙 아파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야속하게도 해는 청옥산 뒤로 넘어가고 있건만, 이제부터 본격적인 단풍지대가 시작되어 가는 이의 발길을 부여잡는다. 상하 전후좌우가 온통 붉은 색 천지이다. 어쩌면 색이 그리도 고울까.
    거기에 무릉계곡의 너무나 맑은 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엮어내는 경치는 비경(秘境) 그 자체이다. 계곡의 너른 바위들은 또 어찌 그리도 흰색을 하고 있단 말인가. 정리과장 말대로 밤에 보면 눈이 덮인 줄 착각할 것 같다.   

   두타 청옥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단풍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
   아해야 무릉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내 비록 한낱 속인(俗人)일망정 남명(南冥) 선생의 시조를 흉내낸다고 흠이 되겠는가. 시간만 충분하다면 그 계곡물에 발이라도 담그고 싶건만...

   무릉계곡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다는 신선봉을 옆으로 하고 걸음을 재촉한다. 어느덧 주위가 어두워지고 있다. 
   계곡 위에 놓인 철제다리를 건넌다. 다리 건너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그 유명한 용추폭포가 있다는데, 그리고 그 주변에 쌍폭포, 장군바위, 병풍바위, 금강산바위, 별유천지폭포....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기암괴석과 폭포들이 자태를 뽐내는 무릉계곡의 진수들이 다 모여 있다는데...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진한 아쉬움 속에 매표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시각각 짙게 다가오는 어둠으로 마침내 플래시 불빛에 의존하지 않으면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오후 6시, 두타산성 올라가는 삼거리 갈림길로 돌아왔다. 내친김에 발걸음을 재촉하여 이번 원점회귀형 산행의 종착지인 신선교를 다시 건너면서 시계를 보니 저녁 6시 30분. 정확히 11시간의 산행을 마감하는 순간이다.

   무릉계곡의 진수를 못 보고, 무릉반석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리고 무척이나 힘든 산행이었지만, 오랫동안 별러 오던 두타산 종주를 무사히 마쳤다는 뿌듯함이 그 모든 것을 덮었다. 산행을 함께 한 법원도서관의 심의관, 국과장, 허의천 사무관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