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봉선사님,

 

무더위와 장마에 기체후일향만강하옵신지요?

사건의 홍수 속에 묻혀 지내다 보니 요새는 편지 한 장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난 주말의 혼사는 잘 치르셨는지요?

마땅히 참석하여 감축의 말씀을 드려야 했는데,

실로 오랜만에 휴가를 내 서울을 떠나 있느라 그러지 못하는 불경함을 저질렀습니다.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유서하시기 바랍니다.

 

2010. 7. 이번 여름 휴가에는 김제의 금산사, 해남의 미황사, 강진의 백련사, 그리고 변산의 월명암을 둘러보았습니다. 백련사를 제외하고는 다 처음 간 곳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오대산 노인봉도 다녀왔답니다.

태생적 방랑기(放浪氣)를 모처럼 발산하였다고나 할까요.  

 

  후백제의 견훤이 아들에 의해 유폐되었던 금산사는 말 그대로 거찰이더군요. 그런데 의외로 찾는 이가 적어 고요하였습니다. 아마도 삼복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까닭에 사람들이 다 바다로 간 모양입니다. 

  해남의 미황사는 전부터 가보려고 벼르던 곳인데. 마침 빗방울이 떨어져 대웅전에 참배만 하고 후일을 기약하며 바로 돌아섰습니다. 절 뒤의 달마산 경치가 일품이더이다.

  강진의 백련사는 여연스님이 계신 곳이지요. 칠량만을 바라보며 마시는 차 한 잔에 더위와 여행의 피로가 싹 가시더이다. 소생에게는 언제 가도 살가운 절입니다. 명은당보살님이 텃밭에서 따온 상추, 고추, 가지 등으로 차려 내신 무공해 밥상에 앉아 밥 한 그릇을 후딱 비웠답니다. 

월명암1.jpg

 

   변산의 월명암(月明庵), 참으로 전부터 벼르고 별렀던 절입니다. 아, 그런데 누가 알았나요, 그렇게 높은 곳에 있는 줄, 그것도 요새 절답지 않게 자동차가 안 들어가는 곳에 있는 줄을... 내비게이션 덕택에 남여치라는 곳까지는 자동차로 갔는데, 거기서부터는 속절없이 걸어서 산을 올라가야 하더군요. 안내판에 2.2Km로 되어 있더이다. 대략 해발 600m 정도에 위치하고 있는데, 등산화도 없이 서둘러 1시간 남짓 걸려 올라 가려니 꽤 힘들었습니다.

 

  막상 절마당에 들어서니 절집은 평범하였습니다. 그래도 고지대 답게 대웅전 앞뜰에서 바라다 보이는 경치는 장관이었지요. 일망무제로 탁 트인 전경이 볼 만하더이다. 절 이름에 어울리게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참으로 운치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나저나 소생이 이 절을 꼭 가보고 싶었던 것은 이 절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진작에 들었기 때문이랍니다.

 

  월명암의 창건주인 부설거사는 애초 출가한 스님이었습니다. 경주에서 태어나 출가했던 그는 도반인 영조, 영희 스님과 함께 장흥 천관산 등 남해와 지리산을 거쳐  오대산으로 도를 닦으러 가는 길에 백제 땅인 만경평야를 지나다가, 독실한 불자였던 구무원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답니다. 구무원에겐 묘화라는 무남독녀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꿈에 연꽃을 보고 잉태해 태어난 묘화는 선녀 같은 용모에 착한 마음씨와 절조까지 지녔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못하는 벙어리였습니다.
 
  그런데 20년 동안 입 한번 벙긋하지 않던 묘화가 부설스님을 보자 말문이 트였습니다. 그러면서 부설 스님과 자신은 3생에 걸친
인연이 있으니 천생의 배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도반들과 맺은 언약이 있었던지라 부설이 걸망을 메고 집을 나서려 하자, 묘화가 칼을 들고 서서

"만약 스님께서 문지방을 넘으면 이 자리에서 자살을 하겠습니다. 구보리 하와중생(上求菩利下華衆生.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들을 구제함)을 하기 전에 눈 앞의 나부터 구하십시오"

라고 소리쳤습니다.

묘화와의 인연 또한 거스를 수 없다고 여긴 부설은 두 도반에게 부디 도를 이뤄 자신을 가르쳐 줄 것을 당부하면서 헤어졌습니다.
  월명암2.jpg
   그렇게 15년이 지난 뒤 영조, 영희 스님이 오대산에서 불도를 닦고, 돌아왔을 때 마을 앞에서 놀고 있던 부설의 아들 등운을 만났습니다. 부설의 안부를 묻는 두 스님에게 등운은 "우리 아버지는 10년 넘게 앓고 있어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두 도반이 왔다는 소리를 들은 부설은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달려왔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아마도 부설이 평소엔 병자 시늉을 내고, 모두 잠든 밤에 일어나 수행 정진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답니다.
   다시 만난 세 도반은 도력을 겨루기 위해 도자기에 물을 담아 대들보에 걸어 놓고 각자의 도자기를 쳤습니다. 그러자 영희와 영조의 도자기는 깨어져 물이 흘러 버렸습니다. 그러나 부설의 도자기는 깨어졌지만 물은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 때 부설거사가 읊은 게송이 이러했답니다.
 
   目無所見無分別 (목무소견무분별)
  耳聽無聲絶是非 (이청무성절시비)
  分別是非都放下 (분별시비도방하)
  但看心彿自歸依 (단간심불자귀의)
 
             눈으로 보는 바 없으니 분별할 것이 없고 
               귀로 듣는 바 없으니 시비 또한 사라지네
             분별 시비는 모두 놓아 버리고
             다만 마음 부처 보고 스스로 귀의한다네  
 
부설은 많은 게송을 지었는데, 그 중 지금까지 불가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팔죽시(八竹詩)이지요.
 
    此竹彼竹化去竹(차죽피죽화거죽)
    風打之竹浪打竹(풍타지죽낭타죽)
    飯飯粥粥生此竹(반반죽죽생차죽) 
    是是非非付彼竹(시시비비부피죽) 
    賓客接待家勢竹(빈객접대가세죽) 
    市井賣買歲月竹(시정매매세월죽) 
    萬事不如吾心竹(만사불여오심죽) 
    然然然世過然竹(연연연세과연죽) 
 
           이런 대로 저런 대로 되어가는 대로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이런대로 살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려니 그런 대로 아세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하고
           장터에서 사고파는 것은 시세대로 하네  
           세상만사 내 맘대로 안 되니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 대로 살아갈거나
 
  부설이 열반한 뒤 자녀인 등운과 월명도 머리를 깎았다고 합니다. 모든 분별을 넘고 생사를 뛰어넘어 해탈자재한 이는 부설만이 아니었습니다. 부설의 부인 묘화는 110살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환한 대낮에 바람과 구름으로 조화를 부려 비와 눈을 내리게 하는가 하면, 그 비와 눈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신묘한 도술을 부렸다고 전하며,  아들 등운은 충청도 계룡산으로 가서 선풍을 드날려 '등운조사'로 알려졌고, 월명은 월명암에서 육신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월명암은 바로 부설의 딸 월명의 이름을 딴 곳입니다.  
   

하늘과 물과 땅에 그린 세 개의 동그라미

 
  그런데 세상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불가에서만 비전되어 오는 월명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아래 이야기의 출처 : 조 현, 하늘이 감춘 땅, 한겨례출판사, 2008, 157쪽 이하 참조)

 

   부설이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왔을 때 머슴도 따라왔던 모양입니다. 이 깊고 깊은 산골에서 젊은 여자를 구경할 수도 없었던 머슴은 월명이 성장해 아름다운 처녀가 되자 그를 못내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늘 월명을 훔쳐 보다가 월명이 혼자 있을 때면 다가가서 수작을 걸곤 했지요. 머슴에게 들볶이던 월명이 어느 날 오빠 등운에게 가서  상의를 했습니다.

"머슴이 틈만 보이면 쫓아와서 자기 속사정을 좀 들어달라고 애걸복걸하는데 어쩌면 좋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등운이 "불쌍하지 않느냐"면서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을 어찌 매정하게 거절만 하느냐"고 "들어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월명은 머슴에게 몸을 허락했습니다. 그 직후 등운이 "네 마음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월명이 하늘에 동그라미를 그렸습니다. 허공에 그린 동그라미는 자취가 남지 않습니다. 마음에 아무런 동요가 일지 않는다는 의미였지요. 그러자 등운이 "그러면 됐다"고 안심했습니다.

 

  한번 월명을 취한 머슴은 월명에 대한 구애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이젠 아주 노골적으로 함께 살자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래도 월명이 대꾸하지 않자 "한번만, 한번만"하면서 따라붙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월명이 등운에게 가서 그 얘기를 하자, 등운은 "못 들어줄 게 뭐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월명은 다시 머슴에게 몸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등운이 다시 월명에게 "네 마음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월명이 이번엔 물에다 동그라미를 그렸습니다. 물에 그린 동그라미는 잠시 파동을 그리다가 잠잠해 집니다. 잠시 마음이 동요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는 뜻이지요. 이에 등운은 "그러면 됐다"고 했습니다.

 

   그 후 머슴의 계속되는 요구을 거절하지 못하고 등운과 상의한 다음 월명이 또 머슴에게 몸을 주었습니다. 등운이 앞서와 같이 다시 물었을 때 월명이 이번엔 땅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렸습니다. 땅에 그린 동그라미는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 만큼 이제는 머슴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머슴과 보낸 색의 감각이 마음에 아로새겨 지고, 머슴이 월명의 마음속에 남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두 번까지는 마장이 되지 못한 색이 이번엔 월명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자 등운이 월명에게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머슴을 유인하라고 하였습니다. 월명이 유인하자 머슴은 아궁이로 다가왔고, 다시 월명에게 바짝 다가가 수작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때 등운이 뒤에서 머슴의 등을 발로 차 아궁이 속에 밀어 넣어버리고, 아궁이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등운이 동생에게 말했습니다.

 

"너와 나는 산 사람을 화장시켜 죽여 버렸으니, 이대로 가다간 무간지옥에 떨어질 게 분명하다. 이제 죽기를 각오하고 수행 정진하지 않으면 무간지옥밖에 갈 곳이 없다."

 

  이 때부터 등운과 월명은 일체 눈을 붙이지 않고 수행 정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처절한 수행을 통해 무심삼매에 들어갔습니다. 한편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간 머슴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등운이가 산 채로 나를 죽였다"고 고해 바쳤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저승사자들에게 등운을 잡아오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저승사자들이 등운을 잡으러 갔지만, 등운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등운이 무심삼매에 들어 있어서 등운의 마음 한 자락도 붙잡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罪無自性從心起"라고 했던가요, 죄의 본성이 본래 있는 게 아니라 마음 따라 일어나느니,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죄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 뒤 등운뿐만 아니라 월명도 불도를 성취해 육신 그대로 승천했다고 합니다. 

 

  출가자인 부설을 환속시켜 자식을 낳게 한 묘화, 머슴과 살을 맞대며 운우지정을 나눈 그의 딸 월명. 그 모녀는 이렇듯 세속과 환락의 세상 속을 관통하면서도, 진흙 속의 연꽃으로 개화했습니다. 세속의 욕망과 명리 속에서 살아가는 속인에게 묘화는 '신묘한 꽃'이며, 월명은 '어둠 속의 달빛'이 아닐까요. 욕망과 명리와 감각의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그 모녀의 삶이 법비가 되어 속인의 육신을 씻어주고, 취모검((吹毛劍)이 되어 분별과 망상을 베어 버리기를 바란다면 과욕일까요?


성불하소서.

 

2010. 8. 3.

 

범의 합장

 

** 추신 : 오대산 노인봉(1,338m)은 세번 도전 끝에 2010. 7. 30. 비로소 정상을 밟았는데, 이번에도 구름이 잔뜩 끼어 소금강 경치 구경은 여전히 불가능했습니다. 소금강을 제대로 감상하겠다는 마음 역시 쓸 데 없는 분별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