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속에서 神仙을 먹고(설악산 마등령)

2010.02.1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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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 속에서 神仙을 먹고


   1997. 5. 9. 장수대에서 출발하여 대승령을 넘어 십이선녀탕계곡으로 하산하는 산행을 한 지 만 1년이 지난 1998. 5. 8. 다시 설악산 등산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백담사에서 출발하여 오세암을 거쳐 마등령을 넘어 비선대로 내려오는 코스를 택하였다. 작년이나 올해나 모두 사법연수생들의 수학여행길에 겸해서 이루어진 산행이었기 때문에 등산팀은 연수원교수들로만 구성되었다.

   아침 8시, 賈在桓 원장님의 황감한 전송을 받으며 백담사행 봉고차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전날 묵었던 대명콘도측의 작은 실수로 출발시간이 예정보다 30여 분 늦어진데다 온 산을 뒤덮은 구름 때문에 은근히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내색을 할 수도 없는 노릇,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미시령을 넘었는데, 용대리에 도착할 무렵에는 다행히 날이 개는 듯하여 한시름 놓았다.

   용대리부터 백담사까지의 백담계곡은 말 그대로 굽이굽이 심심산골이다. 명색이 一國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의 유배지로 굳이 백담사를 택한 이유를 알 만하다. 용대리 입구만 차단하면 그의 체포를 외치던 결사대들의 침입(?)을 쉽게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 아닐는지.  

   8시 55분. 교수 18명과 안내인 2명으로 구성된 환상의 등반팀이 백담산장에서부터 드디어 등산화의 첫발을 내디뎠다.  
   평소 등산을 하지 않아 자신이 없다는 교수들은 앞세우고, 나는 원거리 산행의 고정멤버인 勝淳總帥, 千洙公子 그리고 안내인 한 명과 맨 뒤에 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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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래에 복원된 영시암(永矢庵)에서 잠시 숨을 가다듬는 동안에 봉정암으로 가는 일단의 보살님들과 섞이게 되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千洙公子께서 큰 일 났다고 하신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이다. "아니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빨리 가길래 보이질 않는거야." 하는 푸념을 엿들은 한 보살님이 당신 일행들은 진작에 오세암(五歲庵) 쪽으로 갔다는 것이다.  

   맙소사, 일주일 전 체육대회 때 낮밤으로 무리를 하여 몸살이 난 상태인데도 總帥라는 직책 때문에 산행에 동참하신 勝淳總帥께서 앞에 가는 보살님의 엉덩이에 미혹하여 그것만 보고 따라 걷다가 정신이 혼미하여 五歲庵으로 갈라지는 길을 놓치고 봉정암을 향하여 가고 있었던 것이다.  

   부리나케 1Km 정도를 후진하여 앞서 간 대열을 뒤쫓으려니 보통 일이 아니다. 그야말로 고행길 그 자체다. 등에서는 땀방울이 모여서 내를 이룬다. 출발시간이 늦어진 것도 찜찜한데 이 또한 무슨 불길한 징조란 말인가. 하늘은 왜 다시 흐려 온담....  

   가랑이 사이에서 요령소리가 나게 발길을 재촉하노라니 마침내 저 멀리 앞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巨軀(?)를 이끌고 가는 저 사람은 누구일까?
   잠시 후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상훈거지(巨志). 폭탄을 너무 많이 터뜨려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죄로 유황지옥에 떨어져 신음하더니 용케도 빠져 나왔다. 천국에 한 발짝이라도 가까이 가려 함인가, 기를 쓰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저 巨志王은 겉으로만 규율부장 행세를 하지 속으로는 물러터지기 한이 없다고 千洙公子께서 촌평을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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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行 시작 2시간 남짓 만에 五歲庵에 도착하였다. 1,400여 년 전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이 절은 고려시대에 다섯 살(五歲) 난 동자가 성불한 곳이라 하여 五歲庵이라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蓮花半開形의 명당에 자리하였건만, 그 후로는 成佛한 大德이 나오지 않아 안타깝다고 절 입구의 안내문이 전한다.
   나름대로의 계획은 오늘의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하여 달라고 이 곳에서 부처님께 빌 작정이었는데, 앞선 일행이 여전히 보이지 않는 통에 마음이 급하여, 대웅전 앞뜰에서 合掌三拜로 대신하였다.  
   안내인이 점심에 먹을 물을 길어 가자고 하는 것을, 절의 공양주보살이 산 위에도 곳곳에 물이 많다고 하여 그냥 발길을 재촉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새로운 고난의 단초가 될 줄이야.

   그로부터 다시 1시간여가 지나 마침내 민,형사 총괄교수가 이끄는 中軍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사교수들과는 달리 형사교수들은 총괄인 二洙大兄만 보인다. 그 門派는 어찌하여 병졸들이 장수는 팽개쳐 둔 채 뿔뿔이 제 살길만 찾아갔느냐는 놀림을 혼자 침착하게(?) 감내하여야 하는 二洙大兄의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휘하에 勝淳總帥, 千洙公子, 尙勳巨志, 凡衣居士, 三峰禪師를 모두 거느린 채 그들의 일사불란한 호위를 받고 있는 元奎道士의 어깨가 상대적으로 한없이 올라간다. 어흠!

   다 왔으니 힘을 내라는 격려의 소리와 우스개 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마등령 정상에 도착한 것은 12:30 경이었다. 출발로부터 3시간 30여 분 걸린 셈이다. 이름처럼 말(馬)의 등과 같은 모양을 하였는지는 구름 때문에 살필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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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嗚呼哀哉라, 세상에 이럴 수가! 우리는 눈 뜨고는 차마 못 볼 目不忍見의 慘狀을 보고 말았다.
   선발대로 떠났던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노모(盧某),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은 石品, 고매하고 점잖키로 소문났던 不甲山 長吾大師, 평소에는 무릎이 아프다고 엄살을 떨다가도 산에만 갔다 하면 飛上하는 동기사랑, 속세의 노래꾼들 밥줄을 위협하는 상옥오빠, 이들 5인이 김밥을 펼쳐 놓은 채 아귀같이 입을 놀리고 있지 않은가.
   선발대는 주력부대가 지나거나 머무를 곳의 지형을 살피는 것이 임무이지, 먼저 가서 밥이나 먹는 것이 할 일이 아님을 알련만....  

   등산안내인 생활 50 평생에 같이 산에 와서 일행보다 먼저 정상에 도착하였다고 밥을 먼저 먹는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고 동행한 안내인마저 혀를 내두른다. 乙巳五賊에는 못 미쳐도 가히 '硏修五賊'이라고 할 만하다.
   연수원산악회에서 영구 제명할 것인지의 여부는 추후 재론하기로 하고, 나중에 징계절차에서 오리발을 내미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亨夏白頭께서 갑제1호증의 1 내지 5(각 사진)를 일일이 남겨 놓았다.

   硏修五賊 중에서 특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둘 있다.
  
   첫째가 石品이다.
   그는 실로 안타까운 인물이다. 평소에 워낙 훌륭한 인품이 돋보여 '石品'이라는 별호마저 얻은 이 인격자께서는 원거리 산행 때만 되면 그간에 쌓은 공덕을 다 까먹곤 한다.
   원 세상에, 등산화까지 벗고 철퍼덕 주저앉아 천연덕스럽게 김밥을 먹는 모습이라니. 이번에는 아마도 전날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은' 황홀감에서 깨어나지 못해 사리 변별력이 미약했던 모양이다. 심신미약 감경사유가 될까 모르겠다.  

   둘째가 상옥오빠다.
   평소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할 때는 노래연습 하여야 한다며 제대로 먹지도 않더니만, 그간에 주린 배를 다 채우려 함인가 그 사이를 못 참아 五賊의 대열에 합류하다니.   그래 놓고는 曰, 자기는 결코 수괴가 아니며 단지 부화뇌동한 것뿐이라며, 어디까지나 故意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름하여 過失犯이란다. 감경사유가 된다는 것이다. 형법에 '過失食事罪'가 있나 모르겠다.  

   마등령 정상에는 물이 없어 바로 밑의 샘터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헌데 이게 웬 일, 샘터에 물이 병아리 오줌 정도밖에 안 흐른다. 짙은 구름 속에 갇힌 데다 안개비마저 내려 寒氣가 뼛속으로 스며드는 터라 따끈한 국물이 있어야 할 판인데 난감한 일이다. 五歲庵의 보살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도 안내인이 인내심을 가지고 정성스레 받은 물로 라면을 끓이는데, 그 사이를 못 참아 모두들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배낭에서 김밥들을 꺼낸다. 밥덩이인지 떡덩이인지 구분이 안 된다.

   이 때 모두의 환호성을 자아내게 만든 것이 등장하였으니, 바로 神仙草이다.  
   안내인이 팔부능선에서 갓 채취하여 온 이 풀을 된장에 찍어 입에 넣는 순간의 그 맛과 향이라니, 그야말로 정말 먹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天下一味였다. 피로가 싹 가시고 완전히 神仙이 된 기분이다.

   구름 속에 神仙이라...!
   일주일 전 체육대회 때 계주를 하다 現職 연수생과 부딪힌 발목이 시큰거린다느니(睦발을 해 드릴까?), 주제넘게 어젯밤 캉캉 춤을 추어서 그런지 허벅지가 땡긴다느니 하며 되도 않는 이유를 대고 막판에 변절하여 대오를 이탈한 前職 연수생 榮順과 鎭守가 어찌 이 맛을 알리오. 이들은 아직도 無間地獄에서 헤매고 있는 거나 아닌지.

   허기를 겨우 벗어나나 싶은 순간 巨志王의 양민 학살이 다시 시작되었다. 유황지옥에서 겨우 살아오고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인지, 아니면 세 살 버릇이 마흔셋까지 가는 것인지 정말 못 말린다.
   어린 백성들은 巨志王과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하여 안간힘들을 써야 했다. 급기야는 안내인들마저 폭탄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들이야말로 이번 산행에서 정말로 여러 가지 진기한 경험을 한다.  


   배가 부른 뒤의 하산길은 언제나 그렇듯이 한결 여유가 있었다. 다만 食率들을 다 팽개치고 혼자 내달은 元奎道士님은 한 때 호전기미를 보이던 증상이 다시 도진 모양이다.
   '무릇 산은 낮이건 밤이건 간에 낑낑대고 올라갔다가 후딱 내려가는 것이 제일 나쁘다'고 하시며, 심오(深奧)하기 이를 데 없는 경험철학을 갈파하신 것이 고작 석 달 전의 일인데 말이다. 등산장비를 몽땅 연수원에 두고 그냥 살악산에 가시는 치매 6기의 경지에 도달하셨으니 그럴 만도 하긴 하다(그 배낭 속에 들어 있던 독일제 梨果洋酒는 지금 어디에?).  

   그런가 하면 올라 갈 때는 빠른 발을 자랑하며 硏修五賊의 대열에 속하였던 石品께서 하산길에서는 반대로 中軍과 끝까지 함께 하였다. 前非를 뉘우친 것일까?
   그 바람에 내내 동행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주목을 받는 영광을 안았다. 뾰족한 바위만 보였다 하면 '촛대바위'라고 命名하는 통에 설악산이 졸지에 촛대바위의 群落地로 되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안내인으로부터 촛대바위가 맞다는 강요된 동의를 받고는 자기도 등산안내인의 자격이 있다고 뽐내는 것만큼은 아무래도 그의 인품과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우스개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비선대까지 도착하였으니, 더 이상의 寸評은 이제 그만하고 이 보고서를 끝내야겠다. 아무래도 생명의 위협이 느껴진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즐겁고 유익한 山行이었다. 교수들끼리 모처럼 마음껏 웃고 즐길 수 있었기에 말이다. 위에서 언급된 교수님들의 고매한 인품에 조금이라도 손상이 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 정도만으로 손상될 인품도 아니겠지만, 너그럽게 양해하여 주시리라 믿는다.  

   끝으로 이번 산행에 적극 동참하여 주신 교수님들과 여러 모로 큰 도움을 주신 지대운 속초지원장님 이하 안내인을 포함한 여러 관계자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1998. 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