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별은 너의 별(석남사, 영남알프스, 사자평)

2010.02.16 11:36

범의거사 조회 수:9787



                           저 별은 너의 별  



水鄕 : "무릎 괜찮겠어?"
凡衣 : "수술 한 번 더하지 뭐!"

   1999. 10. 29. 18:00. 갑작스런 발령으로 법원행정처로 떠나던 水鄕處士(노영보)의 오랜 우정이 밴 걱정의 말을 뒤로하고 울산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硏山會의 이번 가을 산행지는  영남알프스. 가을만 되면 정상의 억새평원이 각종 매스컴을 통하여 단골로 소개되는 곳, 작년에 벼르고 벼르다가 硏山會 총무였던 金精禪師(박상옥)의 갑작스런 발병으로 마지막 순간에 불발에 그쳤던 바로 그 곳이다.

  

   구체적인 등산코스는 울산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陶學의 대가 如山眞人(성윤환)이 정했고, 교통편 기타 각종 산행 준비는 관례에 따라 硏山會 실권자인 德隱道士(박병대)가 담당하였다.
   나머지 몸만 이끌고 따라 나선 사람은 큰바위 얼굴 道岩大師(윤영선), 白頭居士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二村선생(이형하), 모든 것이 한 수 위인 位首公子(한위수), 가수 윤수일과 구분이 쉽지 않은 美貌의 定石童子(윤정석), 그리고 필자이다. 연수원의 인격자 石品 素淡선생(석호철)은 이번에도 韻만 띄우다 말았다. 그의 山品이 나날이 하향곡선을 그리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1

   울산행 비행기 좌석에 앉는 순간, 29기 연수생들의 졸업시험 채점 때문에 지난 1주일여 잠을 제대로 못 잔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 와 그대로 잠에 떨어졌다. 덕분(?)에 아시아나 항공이 자랑하는 늘씬한 미녀승무원들이 제공하는 기내 서비스를 받지 못하였다. 1시간의 짧은 단잠에서 깨어나니 어느 새 울산공항, 미리 대기하고 있던 봉고차를 타고 언양으로 향했다. 금강산도 食後景이라고, 내일의 산행을 대비하여 그 유명한 언양불고기로 체력을 다지기로 한 것이다.

   언양은 길거리가 온통 고기집이다. 이 곳의 牛公이라 해서 특별히 다를 것이 없을 듯한데, 일행이 찾은 숯불구이 집에서 내어놓은 ‘낙엽살’은 정말 기막히게 맛이 있었다. 그 생김새와 이름을 생전 처음 보고 들은 이 낙엽살은 그 모양과 무늬가 마치 나뭇잎 같아 그렇게 불린다는데, 소 한 마리를 잡으면 두 근 정도 나온다고 한다.  

   고기로 포만해진 배를 끌어안고(게다가 대부분 술이 얼근해진 상태에서) 비구니 사찰인 石南寺를 찾으려니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밤 9시만 되면 잠자리에 드는 것이 보통인 절에 서 10시 가까이 된 늦은 시각인데도 主持 靈雲스님이 따뜻하게 맞아 주셔서 더욱 송구스럽다. 마음속으로나마 부처님께 용서를 구할 수밖에.  

   통일신라시대인 서기 824년 도의스님이 창건하였다는 千年古刹인 石南寺는 현재 70여 명의 女僧들이 머무는 巨刹로서, 우리나라 비구니 사찰 중 청도 운문사 다음으로 크다고 한다. 冬安居나 夏安居 등 결재기간 중에는 100명이 넘는 스님들이 정진을 한다고 하므로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石南寺가 자리한 산이 바로 迦智山(해발 1240m)이니 석가모니 부처의 지혜를 전하는 곳이 아닐는지. 女僧들의 수도도량으로 신문이나 방송에 자주 소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절 내에는 많은 전각들이 있으되 가람의 배치가 질서정연하여 어지러움이 없고, 스님들의 정성이 담긴 요사채는 깔끔하기 짝이 없다. 전국의 적지 않은 山寺에서 유숙하여 보았으나, 石南寺 만큼 정돈된 客舍를 본 일이 없다.

   새벽 3시 반. 예불시각임을 알리는 종소리에 눈을 떴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대웅전에 들어서니 벌써 스님들로 가득하다. 줄잡아 30여명. 주지스님까지 새벽예불에 참여하는 것이 이채롭다. 石南寺의 기율이 그만큼 엄격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런 엄숙한 분위기 속에 靑一點 불청객의 속세 남자가 한 명 끼어들었으니, 그야말로 "아차차!"이다. 이쯤 되면 주제 파악이 너무 늦은 셈이나, 이왕 내친걸음이라 두 눈 딱 감고 있는데 젊은 스님 한 분이 다가온다. 결국 쫓겨나는구나 싶었는데, 웬걸 엷음 미소와 함께 내미는 손에는 놀랍게도 예불시간에 낭송하는 불경이 들려 있었다. 오, 부처님! 당신의 자비에 감사합니다.
   1시간 여 계속되는 예불시간 내내 나의 話頭는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하여 달라고 비는 것이었다.  

   예불이 끝나고 대웅전 문을 나서는데 주지스님이 다가와 방이 춥지 않냐고 물으신다. 당신 품에 든 낯선 객들에게 춥기는커녕 속옷 차림으로 자도 될 만큼 따스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그 자상한 배려에 感泣할 따름이다.  
대웅전 앞 3층 석탑을 돌며 탑돌이를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하늘에서 별이 쏟아진다.  
그 별들을 하나 둘 세어 본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유난히 크고 환한 별이 하나 바로 머리 위에 있어 자세히 바라본다. 아하, 별이 아니라 달이네 그려! 그러고 보니 절 마당이 환한 것은 전깃불이 아닌 바로 저 달빛 때문이었구나.
   하현달에서 그믐달로 가는 길목이니 肝月은 바로 저런 모양의 달을 일컬음이리라. 절에 들어올 때 입구에 있던 저 달을 그 사이 누가 내 머리 위에 옮겨다 놓았을까?

   아직 동이 트기 전인 6시 30분. 후원의 스님들이 정성스레 차려준 아침 공양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가 환해진다. 저 멀리 산등성이에서 해가 떠오르면서 그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石南寺 창문을 통해 바라본 迦智山의 세계, 참으로 아릅답습니다." -- 德隱道士의 語錄이다.  

   공양을 마친 후 주지스님 방에서 스님이 직접 끓여 주시는 녹차로 심신의 피로를 씻는다. 특히 한 대접 다완에 탄 가루차(沫茶)의 향기가 코끝을 맴돈다. 이른 새벽 山寺에서의 그윽한 茶香을 어찌 筆說로 그려내랴.  가루차의 향이 산행 내내 입안에서 맴돌았다
   산행 중에 시장하면 먹으라고 쑥과 약초를 넣어 손수 만든 떡(스님들은 이를 '쑥카스테라'라고 불렀다)을 넣어주고 배내고개까지 타고 가라고 봉고차까지 내주시는 주지스님의 환송을 받으며 절문을 나섰다. 혹시 관세음보살이 現身한 것은 아닐까....

 

                                  2

   아침 8시 20분.  산행의 출발지인 배내고개에서 如山眞人으로부터 대략의 코스 설명을 들었다. 능동산→사자봉→재약산→고사리분교→표충사로 이어지는 길이 결코 쉬울 것 같지는 않다. 한 마디로 울주군에서 산을 넘어 밀양으로 가는 셈이다.

    


   무릎수술을 한 후 처음 나선 산행길이라 걱정이 앞선다. 다만, 배내고개에서 표충사까지 산을 따라 짚(jeep)차길이 뚫려 있어 여차하면 긴급구조를 요청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놓인다.  

   찻길을 따라 걸으려니 등산의 기분이 나질 않아 小路로 접어들었다. 출발지의 고도 자체가 높은 탓에 해발 982m의 능동산 정상이 이내 손끝에 잡힌다. 그 정상을 옆으로 돌아나가자 저 멀리 사자봉의 밋밋한 자태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 밑으로 물결치는 흰색의 향연, 바로 그 유명한 억새밭 평원인 사자평이다. 130만평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억새군락지이다.  

   억새밭 속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걷고 또 걷는다. 길옆의 크고 작은 억새가 나그네의 옷깃을 부여잡는데, 이따금 억새밭이 뭉개진 곳이 눈에 띈다. 아마도 등산객들이 사진을 찍은 곳인 모양이라고 했더니, 道岩大師의 유권해석이 허를 찌른다. 예의 종 깨지는 소리로 껄걸 웃으며 하시는 말씀,  

 

 "범의선생, 뭘 몰라도 한참 모르네. 자세히 봐라. 딱 두 사람이 누울 만한 공간이 아닌가."




  산행 출발 얼마 후부터 느닷없이, 이런 호젓한 곳을 가노라면 '그레이 로맨스'(로맨스 그레이와의 차이를 나는 알지 못한다)가 그리워진다고 노래하더니, 저 어른한테 저런 낭만이 있을 줄이야!
   이 다음에 꼭 다시 한 번 와서 '그레이 로맨스'를 즐겨 보라고 권한 즉, 또 한  번 폐부를 찌르는 一喝이 터져 나온다.

   "내 딴에는 길가의 커다란 바위를 연상하고 道岩이라고 作號하였는데, 이 사람 저 사람 아무의 발끝에나 다 채이는 돌멩이신세가 되어뿌렀네."

   억새가 잠시 잦아지는 곳에 웬 붉은 색 꽃이 보여 다가가니 철모르는 철쭉이 두 송이 피어 있다. 따스한 햇빛을 봄날의 그것으로 착각했나 보다. 하기사 철모르는 것이 어찌 철쭉뿐이랴. 눈을 조금만 돌리면 철없는 사람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이 세상인 것을.

   산행 시작 1시간 30분 여, 등산로 중간에 있는 山幕에서 파는 당귀차로 목을 축이고 계속 사자봉으로 향한다. 평원길이라 완전히 산책하는 기분이다.
   하늘에는 해님이 쓰다 버린 쪽박이 동행한다. 어젯밤에 본 달, 오늘 새벽에 본 肝月, 그리고 지금 보는 저 달, 그 달이 그 달이고 다른 달이 아닐진대, 왜 매번 달리 보이는 걸까? 그 달이 다른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수시로 변하는 까닭이리라.  

   비록 시야가 탁 트인 너른 평원이지만 그래도 길을 잃지 말라고 누군가 세워 놓은 이정표가 고맙다. 문득 그것에 눈길을 돌리니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바로 밀양의 유명한 얼음골이란다. 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곳이다.
   등산로 왼쪽의 억새밭에 내내 팔려 있던 정신을 수습하여 얼음골 주변을 둘러본다. 산 사이에 자리 잡은 분지가 또 다른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쯧, 얼음골은 진작부터 보였을 터인데 視而不見이 따로 없군.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 법이다.  

   사자평과 달리 얼음골 쪽은 경사가 급하고 곳곳이 낭떠러지이다. 저 아래 어느 곳엔가 그 옛날 名醫 허 준과 그의 스승 유의태의 체취가 서린 곳이 있으리라. 아끼는 제자의 학문에 畵龍點睛을 위하여 기꺼이 당신의 육신을 해부대상으로 내놓은 스승 유의태, 그 숭고한 뜻을 받들어 천하에 의술을 펼친 제자 허 준. 師弟之間의 그 고귀한 사랑이 골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듯하다. 그에 비하면 명색이 훈장이면서도 진로지도 하나 제대로 못하고 헤매는 내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고 참담하다. 
               
                                       3

   드디어 사자봉. 시계바늘은 어느새 11시를 넘어가고 있다. 전에는 天皇山이라 불렸고 대부분의 지도에도 아직은 그렇게 표시되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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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는 일본인들이 자기네의 천황을 기리느라 그렇게 붙인 것이고, 본래의 이름인 사자봉을 되찾은 것은 근래의 일이라고 한다.  
 

   해발 1,189m나 되건만 사자평에서 보면 평원에서 다소 높은 곳 정도로 여겨지는 곳이다. 대신 얼음골쪽으로는 天崖의 절벽이다. 등산객의 작품으로 보이는 크고 작은 돌탑이 이미 여러 개 세워져 있는데 德隱道士가 하나를 더 세운다. 무사한 산행을 기원하는 마음이 손끝마다 배어난다. 다 만든 돌탑에 내가 작은 돌 하나를 더 얹으니, 이를 일컬어 빈대라고 하지 않을는지.  

   갑제1호증(증명사진)을 남기고 사자봉을 내려와 바로 옆의 載藥山으로 향했다. 이름대로라면 곳곳에 약초가 널려 있어야 할 텐데, 엉뚱하게도 이제까지와는 달리 바위가 심심치 않게 길을 막는다. 그 중 한 바위를 타고 오르는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했다. 아뿔싸, 바위 위에 바로 나뭇가지가 가로질러 있는 것을 못 본 것이다.
   28기 연수생들(조병구, 권국현)이 선물한 선글라스 덕분에 콧등이 약간 긁히는 상처만 입었지만, 대신 안경의 코걸이 부분이 휘어졌다. 제자들의 정성 하나 제대로 간직하지 못하니 원....

   재약산의 정상에는 그 곳의 이름이 須彌峰(해발 1,108m)임을 알리는 아담한 표석이 세워져 있다. 迦智山이 그렇듯이 이 곳의 지명에는 불교식이 많다. 저 멀리 보이는 신불산, 영취산 또한 마찬가지이다.  

   갑자기 허기가 느껴져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은 지 오래이다. 귤을 까서 입에 넣고 갑제2호증을 준비한 후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점심식사 예정지인 고사리분교가 저 아래 보인다. 이번 등산로 중 처음으로 내리막다운 하산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고사리분교.  
   본래 사자평은 화전민들이 터를 일구고 살던 곳이다. 그래서 학교까지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산동초등학교 고사리분교이다. 그러나 지금은 화전민이 다 떠나고 학교도 터만 남은 상태이다. 대신 포장마차형 상점들이 여럿 있어 등산객들의 무거워진 발걸음을 붙잡는다.
   그나저나 수안보의 고사리에도 이화여자대학교의 수련원이 있는 것을 보면 ‘고사리’와 교육기관은 무슨 緣이 닿는가보다.  

   멀리 대구에서 空輸해 온 된장국과 생배추로 뜻밖의 호화판 점심을 먹은 후 본격적인 하산길을 재촉하였다.
   사자봉을 넘어 온 등산객들은 여기서 잠시 마음의 갈등을 겪게 된다. 아픈 무릎, 지친 다리를 이끌고 절벽 위로 난 급경사의 오솔길을 따라 힘들게 내려갈 것인가, 아니면 표충사까지 연결된 완만한 자동차길을 따라 편히 내려갈 것인가? 우리 일행은 이왕 나선 길, 多衆의 의사에 따라 폭포 구경도 할 겸 오솔길을 택하였다. 아이고, 내 무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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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솔길로 접어들면 곧 폭포가 나타난다. 대략 3-40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높은 곳에서 물이 떨어지는데, 중간중간 바위에 걸려 층을 이루니 폭포 이름 또한 층층폭포이다.  

   그 밑의 계곡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에 서면 폭포 중간에 걸린 무지개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구름다리는 밧줄과 나무발판으로 만들어진 소위 '흔들다리'인지라 사람이 올라서면 출렁거린다. 겁이 많은 道岩大師가 중간쯤 건넜을 때 장난삼아 뒤에서 흔들어댔다. 예상대로 이 어른 금방 사색이 되어 사람 살리라고 비명을 지른다.  

   구름다리를 건너느라 혼이 났음인가, 道岩大師께서 施肥할 곳을 찾는 눈치이다. 계곡의 다른 쪽에 또 다른 폭포가 二段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여 즉석에서 이를 二釜淵폭포라 이름지은 후, 그 곳을 향해 施肥하면 암반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새로운 연못이 생길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레 三釜淵폭포(본래 三釜淵폭포는 포천의 명성산에 있다)가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鑿岩(착암)은 고사하고 바지가랑이밖에 적시지 못한다고 하여 한바탕 웃었다. 覆盆子술이라도 한 병 구해드려야 할 판이다.

   아직은 무릎에 이렇다 할 신호가 오지 않지만 아무래도 조심스럽다. 자연히 천천히 걷게 되는데, 덕분에 山川景槪를 유심히 둘러볼 수 있다. 사자평 쪽과는 달리 깎아지른 절벽의 연속이고, 온갖 색깔의 단풍이 자태를 뽐낸다.  

   계곡물에 손을 담그니 생각 밖으로 물이 차지 않다. 비록 깊은 산 속이기는 하나 아무래도 남녘땅이어서 그런가보다. 단풍도 단풍이려니와 이번 산행의 白眉는 쪽빛 하늘이다. 어쩌면 하늘이 저리도 파랄 수가 있을까. 눈이 부시다 못해 눈물이 난다. 어제는 비가 와 마음을 졸이게 하더니 오늘 저 아름다운 하늘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나보다.  

   누가 이렇게 좋은 날을 잡았냐고 한 마디씩 하다가 德隱道士를 칭송하기에 이르렀다. 무릇 森羅萬象의 온갖 덕(德)이 그의 가슴에 와서 안기니(隱) 하는 일마다 복을 받는구나. 李 白의 표현을 빌리자면 夫德隱者는 萬物之逆旅라. 무릇 덕을 품은 자는 만물이 찾아드는 사랑방인 것이다. 거기다 맑디맑은 계곡물에서 擧風까지 하여 영남알프스의 정기를 한 몸에 받았으니 장차 그 이름을 크게 빛내리라. 아이러니하게도 산행을 마친 다음 날 또 비가 내려 德隱道士의 덕이 더욱 빛을 발하였다.

   7시간 10분의 산행 끝에 表忠寺에 도착하였다. 서기 654년에 창건되었으니 石南寺보다 더 오래된 古刹이다. 사명당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어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왠지 황량한 느낌이 든다. 아침에 떠나온 石南寺의 잘 짜여진 모습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까.  

   大光殿(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이다)에 들러 참배를 하고 나오다 시주할 돈을 찾으려니 앗, 또 "아차차!"이다. 지갑이 배낭 속에 있는 것이다.  
   법당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한 보살이 "시주를 안 하셔도 됩니다"라며 거든다. 딴에는 나의 무안함을 덜어주려는 배려였을 텐데 그 말에 더욱 얼굴이 화끈거린다. 얼른 밖으로 나와 배낭을 뒤져 시주를 하고 왔다. 그 보살의 얼굴에 맴돌던 온화한 미소가 등 뒤에 따라오는 듯하다.

   표충사에서 봉고차를 타고 밀양시내로 나왔다가, 기차시간에 아직 여유가 있어 영남 제일의 누각이라는 嶺南樓를 찾았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보수공사 중이었다. 그래서 접근불가였는데도, 이런! 입장료는 버젓이 받고 있었으니... 그 厚顔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제 남은 것은 서울행 기차 안에서 잠자는 일뿐이다. 다행히 무릎도 괜찮다. 음냐음냐! (1999. 1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