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따라 길따라(오대산,허브나라,안흥)

2010.02.16 11:55

범의거사 조회 수:9845

 


                  맛따라 길따라


  내년 8월(2003. 8.)이면 결혼 20주년이다. 마침 여름휴가철이라 그 기념을 위하여 집사람과 어디 여행이라도 하면 좋겠지만, 경호가 고3으로 대학입시를 코앞에 둔 때일 테니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하여 1년을 앞당겨 금년 여름에 중국에라도 가볼까 했다가 방학중에도 학원을 다녀야 하는 ‘거북이’와 ‘말썽이’를 두고 엄마가 집을 오래 비운다는 것이 역시 어려운 일인지라 마음을 돌려야 했다. 그래서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지리산 縱走이다. 

   마침 두 아이가 함께 8월 14일부터 16일까지 봉사활동을 가는 바람에 집사람과 둘이서만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었던 지리산 종주를 하기로 한 것이다. 2박3일 일정으로 지리산의 산장을 예약하고, 나는 나대로, 집사람은 집사람대로, 틈틈이 걷기운동을 하면서 체력을 비축하였다. 그랬는데.....

  8월 4일부터 한반도의 하늘을 엄습한 구름대가 처음에는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시도 때도 없이 비를 뿌리더니만, 10일이 지나면서부터 남부지방으로 이동하여 엄청난 양의 호우를 쏟아 붓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자고 일어나면 일기예보에 촉각을 곤두세운 보람도 없이 지리산 일대에는 15일까지 비가 많이 내릴 것이라는 뉴스를 끝으로 13일 아침 결국 지리산 종주의 꿈을 접어야 했다.      

                           

   8월 14일 아침에 아이들을 떠나 보내자마자 서둘러 강원도행 나들이길에 올랐다. 첫 목적지는 오대산 월정사. 

   평일의 오전이어서 그런가 중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가 말 그대로 고속도로의 구실을 하고 있었다. 집사람과 단둘이 하는 여행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러기에 오히려 5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가슴이 설레는가 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커피를 한 잔 뽑아다 주는데 괜히 웃음이 난다. 왜 웃느냐고 묻는 집사람도 역시 웃고 있다. 그래, 그 동안 서로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잊어버렸던 웃음의 여유를 잠시나마 되찾은 것이다. 
  
  서울을 떠난 지 3시간 남짓, 영동고속도로를 벗어나 진부로 들어섰다. 어느새 출출해진 배를 달래기 위해서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으니 부일식당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洪景植 대전고검차장님이 꼭 가보라며 일러준 음식점이다. 

 

   겉에서 보기에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곳이지만 발 들여놓을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붐빈다. 빈자리가 나기가 무섭게 새로운 손님들이 연신 들어찬다. 대부분 여행객이나 등산객 차림이다. 주된 메뉴가 산채정식(1인분에 7,000원)인데, 이 일대에서는 수안보의 영화식당만큼이나 유명하단다. 

 

    입맛이 매우 까다로우면서도 우리의 소박한 고유음식을 무척 즐기는 朴교수께서 밥 한 공기를 금새 비운다. 두릅나물이 특히 맛있다며 한 접시 더 달래기까지 한다. 나 역시 양념을 별로 하지 않아 담백하기 그지없는 산채들에 입맛을 다시는 사이 금방 배가 불러온다. 

   30년 전통의 부일식당 덕분에 지금은 부근에 비슷한 산채백반 식당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02.jpg   오후 2시, 월정사에 짐을 풀었다. 대웅전 앞 8각9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石彫菩薩坐像) 주위에서 발굴작업이 행해지고 있고, 그 옆의 요사채인 동별당의 기와를 銅기와로 교체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라 절 안이 다소 소란하다. 오늘따라 관광객도 꽤 많다. 

   아직 夏安居기간이긴 하지만 월정사에는 禪房이 없는지라 낮시간에는 이처럼 북적대도 상관이 없는 듯하다. 어차피 해가 지면 절은 짙은 적막에 싸이게 될 테니까.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상원사 가는 길로 들어섰다. 3년 전 겨울 함박눈이 내리던 연말에 발자국을 따라 걷던 바로 그 길이다. 그 때는 혼자서 하염없이 걸었는데, 오늘은 마나님이랑 손을 잡고 걸으니 감회가 새롭다. 한가로움의 美學을 들먹인다면 너무 거창한 표현일까? 

 

   계곡을 끼고 가는 10여 킬로미터의 이 길은 아름드리 전나무가 양옆으로 도열하여 하늘을 가리기도 하고, 물이 매우 맑아 바닥의 모래알까지 다 보이는 계곡이 나그네로 하여금 발을 담그고 쉬었다 가지 않을 수 없게 하지만, 여름 휴가철에는 아쉽게도 차가 많이 다녀 걷는 데 신경이 쓰이는 게 흠이다. 정말이지 차만 덜 다니면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훌륭한 산책로가 될 것이다. 

  5시 30분에 시작하는 저녁 공양에 늦지 않으려면 상원사 못 미쳐서 발걸음을 돌려야 한다. 내일 다시 올 거라고 생각하니까 아쉬움이 덜하다. 
갈 때는 모르겠더니 돌아가는 길이 제법 멀다. 하긴 20리가 넘는 길인데... 

   2Km 정도 남았을까, 갑자기 빗방울이 듣는다. 이 일을 어쩐다, “비 사이로 막 가”기 전에는 옷을 홀딱 적실 판이다. 문득 영화에서 보던 히치하이크(hitchhike) 생각이 났다. 손을 흔들며 애절하게 신호를 보내는데, 무심한 차들이 그냥 지나간다. 

    오, 부처님! 마침내 차 한 대가 선다. 젊은 부부가 아이 하나를 데리고 강원도 여행에 나서 며칠을 보내다가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란다. 월정사까지 고작 5리에 불과했지만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쯧,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그쳐 있었다.
                    
8월 15일, 

  지난 밤에 8시가 조금 넘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새벽 3시30분부터 시작되는 예불에 참석하는 것이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다. 공식예불이 끝난 후에도 한 동안 坐定한 채 참선하다가 법당을 나서니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깊은 山寺의 상큼한 새벽공기가 볼을 스친다. 가히 산사에서만 맛볼 수 있는 脫俗의 즐거움이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행장을 꾸려 길을 나섰다. 오늘은 오대산의 主峰인 비로봉을 오르는 날이다. 상원사 밑의 주차장까지는 자동차로 이동했다. Uni0758.gif아직 이른 시각이어서인지 어제와는 달리 오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조선시대 세조 임금이 문수보살을 만나 피부병을 고친 이야기를 집사람한테 해주면서 걷다 보니 어느 새 상원사다. 6ㆍ25 동란 때 漢岩禪師가 온 몸을 던져 지킨 법당 주위로 이젠 요사채들이 제법 번듯하게 들어섰다. 아직도 공사가 일부 진행중인 건물이 있긴 하지만 머지않아 끝날 것으로 보인다. 그 때쯤이면 禪房 본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우물가 옆의 요사채에 있는 식당에서는 공양시간이면 지나가는 등산객이나 탐방객들에게 식사를 제공한다. 張三李四 누구나 들어가서 자기 양껏 먹을 수 있다. 특히 콜레스테롤이 높아 고생하는 중생이라면 가끔 찾아가서 소찬을 즐길 만하다. 부처님의 자비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상원사에서 적멸보궁으로 가는 지름길이 생겼다. 다소 가파르긴 해도 길을 잘 다듬어 놓아 오르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마침 스님 두 분이 앞서 간다. 집사람이 산길에 익숙하지 못한 탓에 쉬엄쉬엄 걸었는데도 금방 中臺 사자암이 나온다. 가파른 산 중턱에 위치한 이 암자에도 공사가 한창이다. 참으로 어디를 가나 佛事의 연속이다. 1만원을 내고 기와장에 두 아이 이름을 적어놓았다. 집사람은 천주교 신자이지만 그렇게 시주를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다. 

  Uni0759.gif中臺를 지나면 이내 적멸보궁(寂滅寶宮)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여긴 사람들이 제법 붐빈다. 풍수지리상으로 오대산의 정기가 모여드는 곳에 위치한 이 곳은 언제 보아도 서기(瑞氣)가 감돈다. 

   법당 밖에 서서 오늘의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빌고 또 빈 후 마침내 비로봉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비가 오지도 않고 해가 나지도 않는 선선한 날씨가 아마추어 山客의 산행에 큰 부조를 한다. 서두를 형편이 아닌지라 가다 쉬다를 반복한다. 집사람은 실로 오랜만에 산행을 하는 까닭에 여간 조심스런 게 아니다. 그래도 틈틈이 체력훈련을 한 덕분인지 다소 힘들어하면서도 꾸준히 걷는다. 

  五臺山은 전국의 16개 국립공원 중에서 네번째로 큰 곳이다. 그러나 등산객의 숫자는 연간 20만 명 정도에 불과하여 산악국립공원 중 최하위권이다. 등산 코스가 다양하지 못하고 그나마 짧기 때문이다. 또한 인근에 설악산과 동해안이 버티고 있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요 며칠 연일 비가 오긴 했지만 여름 휴가철인에도 오늘 역시 등산객이 띄엄띄엄 눈에 띌 따름이다. 아줌마공화국을 연상시키던 지난 초여름의 지리산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비록 찾는 이는 적어도 등산로는 잘 정비되어 있다. 아니 찾는 이가 적다 보니 그만큼 파손이 덜 된 것일까, 나무로 만든 계단들이 깔끔한 모습으로 한양 길손을 반긴다. 그리고 그 옆의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가꾸어지지 않은 자연미를 보아달라고 손짓한다. 꽃 이름을 쓴 팻말을 옆에 꽂아놓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 자체가 야생화하고는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 뒤를 잇는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두는 게 적격이다. 

  비로봉(毘盧峰)

  해발 1,563m나 되는 높은 봉우리이다. 상원사를 떠난 지 2시간 30분만에 정상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출발지 자체의 고도가 높은 까닭이다. 치악산의 비로봉(1,288m), 소백산의 비로봉(1,439m)에 이어 오늘로 3대 비로봉을 다 오른 셈이다. 치악산의 비로봉을 처음 올라간 때가 1979년 여름이니 세 봉우리를 모두 오르는 데 23년 걸린 셈이다. 
Uni075a.gif정상에 부는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는데, 다람쥐 여러 마리가 뛰놀다가 우리 두 사람을 보고 후다닥 흩어진다. 아, 우리가 저들의 놀이공간을 빼앗았구나. 

  비로봉 정상에는 나무 대신 돌탑들이 여러 개 즐비하다. 아마도 언제부터인가 등산객들이 하나 둘 돌을 올려놓기 시작한 게 지금에 이르렀으리라.      
        
  정상에서 사방으로 눈을 돌리면 북쪽으로는 설악산이, 남쪽으로는 발왕산이 옅은 구름 속에 雄姿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동쪽에 노인봉 뒤에 있는 산은 필경 황병산이고, 서쪽으로 보이는 산은 계방산일 거라고 짐작해보지만, 자신은 없다. 아무튼 온 세상이 발 아래 놓여 있다. 

    높은 산의 一望無際로 탁 트인 정상에서 심호흡을 할 때의 황홀한 기분은 느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 맛에 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는 것이다. 다시 내려가야 함에도 말이다.

    산에서 내려와 승원스님의 안내로 월정사 주지 현해스님을 뵈었다. 법화경의 연구로 법명을 떨치는 高僧이시다. 그 스님이 거처하시는 곳의 堂號가 ‘심검당(尋劍堂)’이다. 

   지난 7월에 서산 開心寺에 갔을 때 굽은 나무를 그대로 재목으로 하여 지은 절집의 堂號도 역시 심검당이었는지라, 주지스님께 절에서 왜 하필이면 殺氣가 도는 칼을 堂號에 넣어 쓰느냐고 여쭤보았다. 佛家에서 칼은 사람을 살생하는 도구가 아니라 지혜를 상징한다고 하신다. 시퍼런 칼날 위에 설 수 있는 禪知識을 찾는 집이 바로 심검당인 것이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進一步하는 마음과 일맥상통하리라.     
                                Ⅱ

  집사람과 둘이서만 나선 舊婚旅行길이니 급할 게 없다.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길을 떠나는 것이다. 두 사람의 평소 꿈이 1주일 내지 10일 정도의 일정으로 서해안→남해안→동해안을 따라 유랑을 해보는 것이다. 배고프면 그 지역의 맛있는 집을 찾아 배를 불리고, 해가 지면 아무 데고 잠잘 곳을 찾아 하루 밤을 보내며, 그야말로 발길 닿는 대로 길을 떠나고픈 것이다. 거북이와 말썽이 두 아이가 모두 대학에 들어가면 꼭 실행에 옮겨보리라.

  2박3일의 旅程 중 아직 반이 남았다. 어디로 갈 것인가.
  월정사에서 진부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왼쪽으로 횡계 방향으로 가는 삼거리(월정사삼거리)가 나온다. 진부에서 월정사를 가는 오대산 국립공원의 입구가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곳의 마을 이름이 유천이다. 이 삼거리에서 횡계쪽으로 30미터쯤 가면 길가에 유천식당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 식당에서 마을 안 쪽으로 다시 10미터쯤 들어가면 유천막국수집이 있다. 진부의 부일식당보다 더 허름하고 규모도 작은 집이다. 

 

   그런데 이 집에 가면 100% 메밀로 만든 막국수를 맛볼 수 있다. 전분을 일체 안 넣고 오직 메밀로만 만들기 때문에 미리 반죽을 해 둘 수가 없어(반죽을 미리 해 두고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식당의 막국수는 전분이 섞인 것이다) 손님이 주문을 하면 그제서야 반죽을 하여 국수를 뽑는다. 

   밀가루가 안 섞인 진짜 막국수의 구수하고 털털한 맛이 참으로 일품이다. 막국수를 뽑는 동안 출출하면 돼지고기 수육을 시켜 먼저 입을 달래도 된다. 15,000원이면 수육 한 접시에 막국수 두 그릇으로 포식을 할 수 있다. 절을 떠나온 지 30분도 안 돼서 고기를 입에 대는 것이 다소 마음에 걸리나, 나는 진정한 佛子가 아니라고 자기합리화를 해본다.
  
  유천 막국수로 배를 불린 후 방아다리약수로 차를 몰았다. 약수도 약수지만 근처에 있다는 토굴불가마찜질방이 구미를 당긴다. 약수터 입구에는 주차한 자동차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차만 많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북적거린다. 

   아니 약수들 마시러 가지는 않고 왜 이 곳에서 서성대나 하고 의아해했는데, 이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약수터 입장료를 1인당 1,300원씩 받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는 없던 일이다. 그러니까 한 집에서 한 명만 대표로 물통을 들고 약수를 뜨러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주차장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원 세상에, 약수터 입장료를 받다니! 그것도 그런 거액을. 

  그러거나 말거나 약수를 마시기보다는 토굴불가마찜질방에서 찜질하고 약수로 목욕하는 것이 목적인 나와 집사람은 비싸더라도 입장료를 내려다가 혹시나 싶어 토굴불가마찜질방이 약수터 안에 있냐고 물어보았다. 앗, 그랬더니 토굴불가마찜질방은 그 곳이 아니라 속사쪽으로 고개를 넘어가야 한단다. 후유, 물 두 모금의 대가로 2,600원을 날릴 뻔했네 그려.    
   
  방아다리약수에서 서쪽(속사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길가에 토굴불가마찜질방 간판이 보인다. 결국 방아다리약수와 신약수의 중간지점인 셈이다. 
입구로 찾아드니 여기도 주차장에 차들이 여러 대 보인다. 마침 한 중년 여인네가 얼굴이 발개져서 나오길래 어떠하더냐고 물어보았다. 좋다고 한다면 좋다고 할 수 있단다. 애매하기 짝이 없는 답변이다

  나와 집사람은 안에서 푹 쉬고 1시간 30분 후에 입구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1인당 입장료 7,000원). 그러나 푹 쉬고 나오겠다던 기대는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허망하게 무너졌으니... 허술하기 짝이 없는 탈의실, 수도꼭지 몇 개뿐인 샤워실, 비좁고 컴컴하면서 별로 뜨겁지도 않은 찜질방, 지저분하기 그지없어 도저히 그곳에서 쉴 마음이 나지 않는 휴게실(?), 샤워와 찜질 후에 얇은 수건 한 장으로 머리를 감고 몸을 닦아야 하는 야박함.... 결국 30분만에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부일식당과 유천막국수집에서 느꼈던 강원도의 푸근한 인심이 방아다리약수와 토굴찜질방에서 한꺼번에 무너지는 순간이다. 텔레비전에도 방영되어 전국에 소개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Ⅲ

  15일 밤을 어디서 보낼까 설왕설래하다가 문득 허브나라가 생각났다. 3년 전에 처음 들렀을 때 그곳의 통나무집에서 하룻밤을 지내면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곳이다. 

  그 곳을 가기 위해 흥정계곡으로 들어서는데 웬 사람이 길을 막는다. 1인당 2,000원의 입장료를 내란다. 아니 공원으로 지정된 곳도 아닌데 통행세를 내라니... 그러나 안 내면 못 갈 판이니 울며 겨자 먹기로 낼 수밖에. 허 참, 도처에 봉이 김선달이 널려 있다. 

  1박에 8-10만원 하는 허브나라의 통나무집은 아쉽게도 전부 예약이 되어 있었다. 할 수 없이 흥정계곡 주위의 민박집들을 찾았지만 하나같이 꽉 차서 빈 방이 없다. 쓸만한 집들은 이젠 다 인터넷으로 예약을 받는단다. 

  이 곳의 민박집들은 말이 민박이지 전통적인 의미의 민박집이 아니다. 오히려 여관과 콘도를 결합해 놓은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서구풍의 목조건물이나 아스팔트싱글로 지붕을 덮은 양옥을 여러 채 예쁘게 지어놓고, 취사시설이 완비된 15평 내외의 각 방마다 별도의 출입구를 두며, 자갈을 깐 넓은 마당에는 주차 및 바베큐파티가 가능하고... 

   한 마디로 유럽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빵지온(Pension)’ 비슷하다. 여가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신종 숙박시설로 자리잡은 것이다. 대부분 1박에 8-10만원 받는다.    
     

   할 수 없이 차를 돌려 보광피닉스쪽으로 갔다. 그 사이에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날이 어두워졌다. 이제는 어떻든 잠자리를 정해야 한다. 今夜月明宿何村이런가, 비록 밝은 달은 없으나 밤이슬을 피할 곳은 여전히 필요하다. 허브나라에서 보광피닉스는 차로 20여분 거리이다. 예상대로 이 곳에는 산장, 모텔, 민박집 등이 많았다. 

   다시 민박집을 찾아 묵을까 하다가 산 속에 자리잡은 한 모텔(부성파크)로 갔다. 舊婚旅行을 왔으니 러브호텔에 투숙하는 것도 나름대로 그럴싸한(?) 일이다 싶었지만, 무엇보다도 저렴한 방값(1박에 3만원)이 결재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행히 내부시설도 깨끗한데다 의외로 조용하여 내심 걱정했던 옆방의 소음(?)도 없다. 주인 아주머니가 먹어보라고 주는 옥수수 맛도 기가 막혔다. 

8월 16일

  낯선 곳의 잠자리라서 그런지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모텔방의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산등성이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어제는 미처 몰랐는데 3만원짜리 모텔치고는 정말 근사한 곳에 자리잡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산의 한 옆으로 스키장의 슬로프도 보인다. 겨울이면 북적거릴텐데 한 여름이라 한적하기만 하다.    


  보광피닉스쪽에 오면 늘 들르는 산촌순부두집을 찾았다. 아침 8시 30분이면 너무 이른 시각인가, 아직 아침 준비를 못했다며 주인이 미안해한다. 콩을 갈아서 즉석에서 해주는 이 집의 순두부는 실로 내노라 할 만한데 너무 아쉽다. 할 수 없이  뭐든지 요기할 만한 거 없냐고 묻자 감자부침을 해줄 수 있단다. 꿩 대신 닭이지만 그런 대로 먹을 만하다. 
  
  집사람과 여행길에 나서면 맛있는 음식을 찾는 게 항상 주요 일과이다. 이효석의 고장 봉평으로 나가 막국수를 또 먹을까 하다가 허브나라의 허브떡이 생각나 다시 그 곳으로 갔다. 흥정계곡 입구에서 어제 끊었던 표를 보여주니까 오늘은 입장료를 더 이상 안 받는다. 어제 낸 것을 아까워해야 하나, 아니면 오늘 안 내는 것을 고마워해야 하나? 헷갈린다. 

  허브나라의 허브떡은 여느 떡집의 떡과는 달리 확실히 독특한 맛이 있다. 그것이 각종 허브를 넣은 데서 연유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웬 일일까, 이번 떡에는 예전과 달리 건포도가 들어 있다. 떡을 먹는 동안 내내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단 맛을 내려고 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래서는 허브떡의 고유한 맛을 잃을 수밖에 없다. 입맛이 예민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집사람이 이내 떡에서 손을 떼었음은 물론이다. 떡만으로는 아침이 부족한 듯하여 아침정식(한식)을 시켰으나 괜히 시켰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떡과 정식에 다소 실망한 채 이층으로 허브차를 마시러 올라갔다(아침식사를 한 사람에게는 허브차를 공짜로 준다). 다행히 허브차의 진하면서도 독특한 향이 코와 혀를 즐겁게 해준다. 창 밖으로 보이는 산에 걸쳐 있는 물안개도 분위기를 돋운다. 그 향기와 그 분위기에 젖어 한참을 앉아 있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이 나이에도 이런 여유와 낭만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뿌듯해하면서.

  허브나라를 떠나 영동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이젠 여주에 들러 부모님을 뵙고 서울로 가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던 伏兵(?)을 만나게 되었으니, 맛따라 길따라 떠도는 이번 여행길의 大尾를 장식하는 즐거운 복병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고속도로 표지판에서 “안흥”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치악산의 북쪽 산자락에 자리잡은 안흥, 그야말로 연고가 있거나 우연한 기회에 특별히 인연을 맺은 사람을 빼놓고는 알지도 못하던 산골 작은 마을이다. 그런 마을이 지금은 찐빵 하나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동네가 되었다. 처음에 심순녀 할머니가 안흥의 구멍가게에서 만들기 시작한 이른바 “안흥찐빵”은 이젠 겨울이 되면 서울의 동네 슈퍼마켓에서도 살 수 있는 명물이 되었다. 

  1998년 여름 치악산 등산을 하러 갔다가 당시 원주지원장(朴炳大 부장판사)으로부터 선물로 받아 처음 알게 된 이래 기회가 닿을 때마다 안흥찐빵을 사먹곤 하였지만, 정작 그 심순녀 할머니의 원조찐빵집엔 가본 일이 없었다. 

  처음엔 영동고속도로의 안흥나들목에서 나가면 바로 나오는 안흥찐빵집(심순녀 할머니의 동생이 하던 집)에 가서 찐방을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주인 아주머니가 빵이 없다며 그곳에서 20Km 떨어진 안흥으로 가보란다. 그러면서 안흥에 가면 빵집이 많은데 이러저러한 집이 원조집이니 그리로 가라고 자세히 일러준다. 

   빵이 없다고 문닫고 들어가도 그만일텐데, 비를 맞아가며 열심히 설명해주는 순박한 인심이 너무 고맙다. 더구나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제는 심순녀 할머니의 동생은 고기집을 차려 떠나고 아무런 인척관계도 없는 사람이 장사를 하고 있었음에도.... 

  안흥의 초입에 들어서니 길가에 온통 안흥찐빵집이다. 그리고 저마다 元祖라고 써붙여 놓았다. 그러나 심순녀할머니가 하는 진짜 원조집은 마을로 들어가는 舊다리(낡고 좁기 때문에 바로 옆에 새로 다리를 놓았다)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나오는 주유소 바로 옆집이다. 


  이 찐빵이 유명해진 것은 무엇보다도 빵 속에 넣는 맛있는 팥 때문인데, 달면서도 인공감미료를 전혀 넣지 않아 뒷맛이 개운한 이 팥의 반죽을 할 때는 종업원들도 못 보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안흥마을을 온통 뒤덮은 게 “안흥빵집”이건만, 이 집 저 집에서 사먹어 본 사람들이 다 이 원조집으로 몰려온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이 집에는 비가 오는데도 사람들이 빵이 솥에서 나오기를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벽에 걸린 커다란 사진 속의 심순녀 할머니가 대단해 보이는 것은 같이 찍은 사람이 대통령이어서일까? 

   어느 분야든 匠人이 대접받는 사회야말로 건전한 사회가 아닐는지... (2002. 8.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