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나라 험한 나라(남아공--예외 6)

2010.02.16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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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나라 험한 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이라고 한다), 그 이름을 들으면 우리에게는 오랜 동안의 흑백차별(apartheid)과 1994년 백인통치를 종식시킨 만델라의 화합정책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나라가 아닐까. 아니 그 전에는 희망봉이 먼저 주어진 화두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프리카 대륙의 맨 아래쪽에 위치하였기에 여간해서는 가 볼 엄두를 못 내는 이 나라를 가게 된 것은 이 나라의 더어반(Durban)에서 개최된 세계도서관정보대회(World Library and Information Congress)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2002년 모로코를 방문한 이후 두 번째로 아프리카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서울에서 더어반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참으로 먼 나라였다. 서울에서 더어반까지 가는데 무려 25시간 가까이 걸렸으니 말이다. 2007년 8월 17일 오후 3시 25분 중화항공(Cathay Pacific Airlines) 비행기편(CX411)으로 인천을 출발하여 3시간 후에 홍콩에 도착하였는데, 여기서 요하네스버그로 떠나는 남아공항공(South Africa Airways) 비행기(SA287)를 타기 까지는 6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 시간을 이용하여 홍콩 시내 구경을 하고 오려고 했으나, 출•입국 절차에 걸리는 시간, 오고 가는 시간 등을 합하면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공항관계자가 못 나가게 하는 바람에 속절없이 그 시간을 공항에서 보내야 했다.

  그나마 비씨 플래티넘카드 소지자에게 발급해 주는 귀빈실이용카드(Priority Pass)를 가져 간 덕분에 귀빈실(Priority Lounge)을 이용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인천공항에서는 처가 동반자로서 함께 이용하려면 27,000원을 내라고 하여 이용을 포기하였는데, 홍콩공항에서는 동반자 요금을 받지 않았다. 인천공항이 부당한 요금을 징수하는 것인가, 아니면 홍콩공항이 바보인가? 모를 일이다. 아무튼 홍콩 공항의 귀빈실(Priority Lounge)에서는 조용히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간단히 요기를 할 수도 있고(농심 컵라면도 있다), 신문을 보거나 인터넷을 할 수 있어 좋았다.

  홍콩에서 8월 17일 밤 12시에 출발한 비행기가 요하네스버그 공항에 도착한 것은 8월 18일 아침 7시(현지시각)였다. 순 비행시간은 13시간이다. 그 동안 온몸이 뒤틀리는 것을 겨우 견뎌냈다.
  요하네스버그 공항에서 다시 2시간을 기다렸다가 오전 9시에 더어반 가는 남아공항공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더어반에 도착하니 오전 10시이다. 서울에서 부친 짐을 찾으려 했으나 3개 중 하나가 안 보인다. 어째 출발부터 징조가 좋지 않다. 확인 결과 서울에서 같이 간 일행의 짐 중 4개가 요하네스버그 공항에서 더어반행 비행기에 실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짐들은 결국 나중에 따로 보내져 왔다.
  
더어반과 남아공의 치안

  더어반(Durban)은 남아공에서 세 번째 큰 도시이다(인구가 300만 정도). 홍수환 선수가 1974년 이곳에서 열린 밴텀급 세계권투 타이틀매치에서 이겨 챔피언이 되는 바람에 우리에게 알려진 이 도시는 사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휴양지이다. 인도양에 접해 있어 1년 내내 기후가 온난하고 해변의 풍광이 아름다워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곳이다. 아니 과거에는 그랬다는 표현이 옳다. 1994년 남아공에서 백인통치가 막을 내리고 만델라로 대표되는 흑인정권이 들어선 후 이 유명한 휴양도시는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엉망이 되어 버린 치안 때문이다.

  더어반에 첫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떠날 때까지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신변안전에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의 안내를 맡은 현지교민들도, 호텔의 종업원들도, 택시운전사도, 법원에서 만난 남아공판사들도 하나같이 같은 말을 한다. 해가 지면 거리에 나갈 생각을 아예 마라. 낮에도 가능한 한 차로 이동하고 길거리에서 혼자 다니지 마라. 택시를 타도 흑인 전용 택시는 타지 마라. 호텔에서도 귀중품은 반드시 금고에 넣어두어라. 주머니에는 약간의 돈만 넣고 다니되, 만일 강도를 만나면 순순히 두 손을 들고 강도가 직접 꺼내 가게 놔두어라. 여기서는 살인사건은 뉴스거리도 안 된다[남아공의 인구가 우리나라와 비슷한데, 2006년 1년 동안에 살인사건으로 19,000명이 숨지고(하루 52명 꼴), 강도사건이 21만 건(그 중 무기를 든 떼강도가 12만6천 건) 발생하였다]. 주의사항으로 들은 말을 열거하자니 한이 없다.
    
  그런데 길거리만이 아니라 호텔 자체도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우리 일행(도서관대회 한국 참가단)이 묵은 로얄호텔(Royal Hotel)은 명색이 더어반에서 두 번째로 좋은 호텔이라는데, 방청소를 맡기고 외출하고 돌아오면 옷가방이 흐트러져 있기 일쑤였고, 급기야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의 한상완 위원장님은 호텔방에 놓아둔 선글라스가 없어지는 일을 당했다(호텔측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경찰에 신고한 결과, 며칠 후 선글라스가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이 쯤 되면 누구의 소행이었는지 충분히 짐작된다).

  이런 형편이니 더어반에서 6일 동안 머무르면서 바닷가의 모래사장을 제대로 밟아본 것은 처음 도착한 날 버스를 타고 단체로 가서 30분 정도가 전부였다. 바닷가의 호텔 20층에 있는 식당에서 바라보며 “해변이 참 아름답다” 하고 감탄해 본들 그림의 떡일 뿐이다.
  도서관대회 둘째 날(8월 20일) 밤에 더어반시에서 주최하는 해변축제(Metro Beach Party)가 열렸으나, 거의 5m 간격으로 경비원을 배치한 일정구역 안에 천막을 치고 진행되었기 때문에, 머나 먼 이국땅의 인도양 해변이 가져다 줄 낭만의 밤은 애당초 기대할 수 없었다.    

  호텔에서 세계도서관정보대회가 열리는 국제회의장까지 아침, 저녁 일정 시간대에만 셔틀버스가 다니는지라, 하루는 낮 시간에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하러 가느라 호텔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 15분 정도 걸어서 간 적이 있는데, 그 15분이 마치 15시간처럼 느껴졌다. 깨진 보도블록, 상점의 깨진 유리창, 허름한 옷차림을 한 채 곳곳에서 서성이는 험한 인상의 흑인 젊은이들... 회의장에 도착했을 때는 전신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 후로는 개인적으로 이동할 경우 짧은 거리라도 반드시 택시를 이용하였음은 물론이다.  
  
  앞서 말한 한상완 위원장님의 초대로 저녁식사를 하러 간 “Daruma”라는 상호의 일본식 철판구이를 하는 음식점(물론 택시—그것도 호텔에서 기사를 확인한 택시—를 불러 호텔정문에서 타고 음식점 정문에서 내렸다.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음식점은 바닷가 바로 옆에 있지만 밤바다의 모습을 볼 엄두를 낼 수 없었다)의 출입구 구조가 특이했다. 자동문을 두 번 통과해야 하는데, 처음 통과한 문이 완전히 닫혀야만 다음 문이 열린다. 강도의 침입을 예방하기 위한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전전긍긍하면서 지낸 더어반에서의 체류기간 동안 다행히 별다른 사고를 겪지 않았으나, 결국 나중에 요하네스버그 공항에서 손재수를 겪었다.
  빅토리아 폭포를 구경하고 돌아오면서 부친 짐 중 가방 하나가 공항의 짐 찾는 곳에서 30분이 넘도록 안 나오더니, 뒤늦게 나온 가방의 자물쇠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고, 지퍼가 강제로 열린 상태였다. 아차 싶어 살펴보니 그 안에 있어야 할 휴대폰이 없어졌다.
  공항의 남아공항공카운터에 가서 항의해 보았으나 자기네는 늘 있는 일이라며 찾을 생각을 말란다. 오히려 그런 귀중품(휴대폰이 이곳에서는 귀중품이다)을 짐으로 부친 내가 잘못이란다. 공항에 나와 있는 경찰에 가서 신고했을 때도 마찬가지 대답을 들었다. 대신 확인서를 써줄 테니 한국에 돌아가 보험처리를 하라는 친절 아닌 친절을 베풀어 주는 것을 씁쓸하게 받았다(귀국 후에 보험회사로부터 19만원의 보험금을 수령하였다).
  
  그러면 남아공의 치안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현지에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여 보면, 남아공은 아프리카에서는 그나마 선진국에 속하는바, 1994년 백인통치에서 벗어나 만델라가 집권한 후 포용정책을 써서 이웃나라들로부터 몰려드는 가난한 흑인들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는 바람에(수천 Km가 되는 국경을 봉쇄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숫자가 무려 1,000만 명에 이르렀고(남아공의 인구는 2006년 현재 4,700만 명), 오갈 데 없는 그들이 요하네스버그, 케이프타운, 더어반 등 대도시로 몰려들어 거지, 부랑아, 강도로 변하면서 치안이 붕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유입에 비례하여 돈 많은 부자들(주로 백인)은 속속 남아공을 떠나고 있다고 한다. 백인통치시절에는 길거리에 나다니는 흑인을 총으로 쏘아 죽여도 죄가 안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유지한 치안도 어불성설이지만, 지금의 엉망인 치안은 과거에 대한 반작용으로 치부하기에는 병이 너무 깊은 듯하다. 2010년 열릴 예정인 월드컵 축구대회가 과연 제대로 치러질 수 있으려는지...

  아무튼 남아공의 엉망인 치안 덕분(?)에 서울이 반사적으로 훌륭한 도시로 부각되었다. 세계도서관대회에 참가한 많은 외국인들이 작년에 서울에서 열린 도서관대회에도 참가한 사람들인지라, 그들은 내가 서울에서 왔다고 하면 하나같이 서울이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낮이고 밤이고 혼자서 아무데나 쏘다닐 수 있는 도시가 어디 그리 흔한가. 내년에 도서관대회를 개최하는 퀘벡 역시 ‘퀘벡은 안전한 도시’라는 것을 내내 홍보하고 있었다. 지구촌이라는 말처럼 교통수단의 발달로 전 세계가 계속 가까워지고 있는 마당에, 한 번 위험지역으로 낙인찍히면 재기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도서관정보대회(World Library and Information Congress)

  세계도서관정보대회는 국제도서관협회(International Federation of Library Associations and Institutions)가 전 세계 도서관 활동과 도서관 관련 산업 및 학문 전반에 걸친 국제적인 연구, 조사, 개발, 협력 등의 성과를 공유하고 전 세계 도서관인들의 이해 증민 및 문화교류를 위하여 매년 개최하는 문화올림픽이다.
  이 대회는 전 세계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개최되는데, 작년에는 서울에서 열렸고 이번에 더어반에서 열린 것이다. 내년에는 캐나다의 퀘벡에서 열릴 예정이다. 작년 서울대회에는 전 세계에서 5,000 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룬 반면, 올해는 3,500 명 정도가 참가하여 다소 축소된 감이 있다.

  8월 19일 오전 9시 30분 개막식행사와 더불어 시작된 대회 기간에는 분과별로 각종 세미나가 열리고, 도서관 견학, 민속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다. 개막식에서 남아공의 헌법재판소 재판관인 삭스(Albie Sachs)가 기조연설을 하였는데, 도서관을 통한 정보 교류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남아공의 인권운동가 출신으로 해외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하였고, 폭탄테러를 당해 오른 팔과 눈 한쪽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와는 도서관대회가 끝난 후 요하네스버그의 헌법재판소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분과별로 열린 각종 세미나 중에서 법률도서관 분과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공개접근법과 자유로운 법률정보(Open Access Law and Free Legal Information for Democracy and Human Rights)"가 특히 관심을 끌었다. 주제발표자나 토론자 모두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위하여 도서관을 통한 법률정보의 자유로운 접근을 강조하였다.
  그 밖에도 “전통적인 지식은 무엇인가? 누가 그것을 소유하는가?(What is traditional Knowledge? Who owns it?)”, “다문화세계에서 정보전달을 촉진하기 위한 지시관리방법(Using knowledge management to facilitate information transfers in our multicultural world)" 등이 관심을 끌었다.

   주제발표 내용들은 주최측에서 종이자료가 아닌 CD에 담아 배포하였는데, 세계 각지에서 모인 참가자들을 위해서는 종이자료로 배포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참가자들이 노트북컴퓨터를 가지고 간 것도 아니고, 대회장에 고작 몇 대 비치되어 있는 PC로는 CD에 담긴 내용을 읽어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영어사용권 국가에서 온 사람들 외에 즉석 영어 연설이나 강연을 듣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도서관 방문

  세계도서관대회 기간 중에는 도서관대회조직위원회가 주관하는 도서관견학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대회 개최지에 있는 각종 도서관 중 희망에 따라 선택하여 견학하는 것이다.
  나는 서울에서 도서관대회 참가신청을 할 때 콰줄루 나탈(KwaZulu-Natal) 대학 법률도서관을 신청했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견학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막상 현지에 도착하여 확인해 보니 신청이 안 되어 있다고 한다. 당황해서 신청을 대행한 한국도서관협회의 담당자 김태경씨한테 물어보았더니 신청자가 몰려 신청이 일부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당일(8월 23일 아침)에 혹시 빈 자리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작정 도서관 견학용 버스가 떠나는 대회장 앞으로 갔다. 다행히 내 예상이 적중하여 빈 자리가 의외로 많았다. 그러고 보면 사전 예약이 안 되었다고 지레 포기할 일이 아니다. 이는 뒤에 보는 사니 패스(Sani Pass) 관광도 마찬가지였다. 이 관광프로그램은 도서관대회조직위원회가 주관하는 관광프로그램 중 가장 인기 있는 것 중 하나로, 대회가 시작되기 한참 전에 일찌감치 마감되었다고 대회조직위원회 홈페이지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막상 더어반에 도착하여 관광안내데스크에 가서 확인해 보니 여유 자리가 많았다.
  결국 사전예약이 된 여부를 떠나 현지에 도착하여 부딪쳐 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하긴 전 세계에서 3,500 여 명이 참가하는 대회인데, 사전예약제를 실시한들 그게 그리 제대로 지켜질 리가 없지 않은가. 아무튼 다음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도 참고할 만한 사항이다.

  콰줄루 나탈 대학교는 학생 수가 무려 37,000 명이나 되는 큰 대학이다. 캠퍼스가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데, 그 중 대학본부, 법대, 공대, 음대 등이 더어반 시내 한 복판의 야트막한 산 위에 있는 하워드 칼리지 교정(Howard College Campus)에 있다. 법대생의 숫자는 약 2,000명. 더어반의 악명 높은 치안문제 때문에 대학당국이 자체적으로 경비를 세워 대학 구내는 비교적 안전하다는 게 안내자의 설명이었다. 그래서일까, 눈에 띄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흑인이었지만 대학구내만큼은 활기가 넘치고 있어, 다른 나라의 여느 대학과 분위기가 다를 바 없다.  

  대학측에서 나온 안내자가 도서관 견학을 인도하였다. 음악도서관(1972년 건립), 건축도서관(1969년 건립), 법률도서관(1972년 건립) 및 본부도서관을 차례로 보여 주었다.
  음악도서관에는 1,800년대의 고전적인 음악책, 음반도 눈에 많이 띄었다. 원하면 그 음반들을 재생하여 들을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레코드판, CD, 테이프, 마이크로필름 등 총 32,000 점 정도의 음악자료를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건축도서관에는 PC가 있는 컴퓨터실이 학생들로 꽉 차 있었다. PC는 델(Dell)과 휴렛패커드(HP) 제품의 구형 사양들이었다.
  고색창연한 법대 건물 안에 자리한 법률도서관(유명한 법대교수 이름을 따 Sweeny Law Library라고 부른다)은 장서가 20,000권정도 된다. 2,000명이 되는 학생들이 사용하기에는 도서관이 다소 비좁은 느낌이다.
  본부도서관은 6층짜리 현대식 건물인데, 열람실의 창가에서 더어반 시내가 한 눈에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다. 그 밖에 별다른 특징은 없었다.

  대학도서관과는 달리 시청건물 1층에 있는 시립도서관은 아무 때나 가 볼 수 있다. 더구나 내가 묵은 로얄호텔의 길 건너가 바로 시청인지라 지척에 있었건만, 시청 앞에서 서성거리는 흑인부랑인들(적어도 내게는 부랑인으로 보였다)을 보고는 감히 엄두를 못 냈다. 다행히 8월 20일 오후에 단체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오래된 석조건물인 시청의 1층 일부를 시립도서관으로 사용한다는 것부터 놀라웠지만, 그 역사가 무려 160년이나 된다는 말에 남아공의 풍부한 사회기반시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공공도서관인 까닭에 책들은 일반 교양도서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바깥 복도 한 곁에 콘돔을 쌓아놓고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게 해 놓은 것이 이채롭다. 시립도서관에 웬 콘돔? 남아공은 지금 창궐하는 에이즈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보균자가 전체 인구의 48%에 달한다고 한다). 오죽하면 여자가 남아공에서 강간을 당하면 100% 에이즈에 걸린다는 말이 나올까.

  일찍이 남아공에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독립 후에도 통치를 계속해 온 네덜란드인과 그 뒤를 이은 영국인들이 갖추어 놓은 사회기반시설들(도로, 전기, 수도 등 사회간접자본뿐만 아니라 도서관 같은 문화시설까지), 거기에 더하여 풍부한 지하자원, 드넓은 국토(122만㎢. 한반도 전체의 5.5배),,,, 사회가 안정되어 이 모든 것을 잘 활용한다면 남아공도 세계에 내로라하는 강국이 될 텐데. 저 멀리 지구 반대편에서 온 나그네가 느끼는 아쉬움이었다.

더어반 법원과 간디 기념관

  더어반 법원(Durban High Court. Pietermaritzburg High Court의 지부이다)은 로얄호텔에서 그야말로 지척이다. 그러나 그 법원을 가기 위해서 서울에서부터 수없이 연락을 취하여야 했고(그 모든 수고를 한 조의연판사한테 깊은 감사를 드린다), 현지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8월 21일 방문할 수 있었다. 반갑게 맞아주는 법원장(‘아프리칸스 Afrikaans’이다. 남아공에서는 네덜란드계 백인을 이렇게 부른다)실에서 인사를 하고, 가지고 간 선물들(대법원과 법원도서관 안내 책자 및 DVD 그리고 영문판례집)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영문판례집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였다. 앞으로 가능하다면 계속 보내달라고 해서 선뜻 그러마고 했다. 전 세계에 우리의 법을 널리 알리는 게 현재 법원도서관의 과제인 마당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법원장 비서의 안내로 도서실을 둘러보았는데 매우 협소했다. 그래도 19세기 때부터 내려오는 고풍스런 판례집들이 눈길을 끌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영미법계 국가답게 판례집 하나는 오래 전부터 잘 정리하여 온 듯하다. 법정에 가서 재판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마침 가사재판을 하고 있는 법정으로 안내했다.
  법정의 모습은 옛날 유럽영화를 보는 듯했다. 그야말로 높은 법대에 앉은 판사, 방청석도 마치 극장처럼 높게 위치했다. 그 바닥에 소송당사자와 변호사들의 좌석이 있다. 판사는 물론이거니와 변호사들도 모두 검은 색 법복을 입는다.

  당초 방청석에 앉아 조용히 방청하다 나갈 요량이었는데, 나를 안내한 법원장 비서가 판사에게 나의 방청사실을 알리자 재판장이 갑자기 휴정을 선언하고 나더러 법대로 올라오란다. 직원을 시켜 급히 의자 하나를 가져 오게 하여 자기 자리 옆에 놓고는 나더러 앉으란다. 이왕 방청을 하려면 판사답게 법대에서 보라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법정에서 재판 모습을 촬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생각지도 않은 환대를 받은 것은 좋았는데, 그 바람에 재판이 다 끝날 때까지 1시간 30분 동안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
  이 재판장은 초로의 금발신사로 복잡한 사건은 심리 시작 전에 나에게 미리 내용을 설명해 주는 등 매우 친절했다. 자기 아들이 업무관계로 서울에서 근무한 적도 있다고 한다.

  재판하는 모습은 우리와 별 차이가 없었다. 과거 시행되었던 배심제는 1969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증인신문도 “예, 아니오” 식으로 진행되었다. 다만, 증인 선서의 방식이 서기가 거짓말 안 하겠다고 선서하느냐고 물으면 증인이 “예”하고 대답하는 것이 증인이 선서서를 직접 낭독하는 우리와 다르다.
  남아공은 공용어가 11개나 된다(사용인구별로 보면 줄루어 사용자가 24%, 아프리칸스어 사용자가 13%, 영어 사용자가 8%). 그런데 법정에서는 대개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증인이 다른 공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일 경우 통역이 필요하다.
  법정에서 재판장이나 당사자 및 변호사들이 주고받는 말은 전부 디지털녹음을 하고 있었다.

  법정에서 나오자 법원장이 8명의 판사들과 함께 다과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더어반 법원의 판사는 총 27명이고, 그 중 4명이 여자이다. 그 자리에 모인 판사들의 출신이 가지각색이다. 영국계 백인, 네덜란드계 백인(아프리칸스), 흑인, 혼혈, 인도계 등. 법원장이 인종 화합의 장이라며 웃는다(남아공의 인구는 흑인이 79.5%, 백인이 9%, 혼혈이 9%, 인도 등 아시아계가 2.5%이다). 그러면서 그는 White, Black, Colored, Indian 등의 단어를 서슴없이 사용한다. 흑백차별이 종식된 지 13년밖에 안 된 까닭에 그런 단어를 사용하는 게 조심스러울 것 같았는데, 나만의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이곳에는 인도계의 판사가 있을 정도로 인도인이 많이 산다. 과거 영국 식민지 시절에 사탕수수 농장의 인력이 달려 인도인들을 데려 왔다고 한다. 대한제국 말기 멕시코와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에 노예이민으로 팔려갔던 ‘애니깽’들이 생각났다. 위정자의 무능으로 국력이 쇠약해지면 애꿎은 백성들만 고생하는 법이다.

  인디라 간디가 영국에서 변호사자격을 획득한 후 초기에 변호사로 활동한 무대가 바로 남아공의 더어반이다. 이곳에서 20여년(1983년-1914년) 변호사 활동을 하다가 인도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곳 영국 식민지(남아공이 독립국이 된 것은 1961년이다)에서 사는 인도인들의 비참한 삶(인도인들도 인종차별에 시달렸다)이 조국 인도에 있는 국민들의 삶으로 연결되어 영국 식민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닐는지...  

  그런 간디를 기념하는 기념관(Phoenix Settlement. 간디가 살던 곳을 기념관으로 만든 것이다)이 더어반 교외에 있어 가보고 싶었는데, 그곳이 흑인거주지역이라 모두들 위험하다고 말리는 통에 못 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흑인거주지역은 곧 빈민가이자 우범지대를 뜻한다. 우리 교민 중에 바로 이 흑인거주지역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활동을 하는 선교사가 한 분 있는데, 그가 안내를 해 주겠다고 했다가 우리 일행의 인솔자로부터 질책을 받고 그만두기도 하였다.
   그러던 차에 더어반 법원에서 판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간디기념관이 보고 싶다고 하자, 인도계의 판사인 모스(Moos)가 자기가 안내하겠다고 나서는 게 아닌가. 사실 자기도 가보고 싶었는데 그 동안 못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차를 타고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흑인 여판사 한 명이 자기도 가겠다며 따라나섰다. 그 여판사가 동승한다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 것을 보면 간사한 게 사람의 마음이다. 가보고 싶다고 노래를 하긴 했지만, 막상 흑인거주지역에 가는 것에 대하여 나 역시 그만큼 속으로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간디기념관은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있다. 그야말로 1950-60년대의 우리나라 달동네 판자촌을 연상케 하는 흑인거주지역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우리 일행이 갔을 때 건물의 바깥문을 잠가 놓았던 것으로 보아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모양이다. 1985년 극우의 인종차별주의자들에 의하여 파괴되었다가 2000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기념관 안에는 간디의 일생을 담은 사진들과 신문스크랩, 간디가 신문을 찍어내던 기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안내인은 웬 사람들이 찾아와 귀찮게 하냐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모스판사와 흑인 여판사 덕분에 구경은 잘했는데, 시계가 어느 새 점심시간을 훌쩍 넘고 있었다. 감사의 뜻으로 두 사람을 점심에 초대하겠다고 했더니 정중히 사양한다. 법원에 들어가야 한단다. 자기들은 Acting Judge(정식 판사로 임명되기 전에 판사로서의 능력과 소양 등을 구비한 여부를 알아보기 위하여 일정기간 동안 근무하는 임시판사)이기 때문에 너무 늦게 들어가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를 호텔까지 데려다 주는 배려를 잊지 않았다. 아마도 이들은 이 날 점심을 굶었을 가능성이 크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이다. 남아공 사람들이 다 이들만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날 저녁에 교민인 제임스 정(James 정)의 집에서 도서관협회 부회장의 초청으로 만찬이 예정되어 있어 그 때까지 시간이 어정쩡하게 남았기 때문에, 용기를 내 택시를 타고 해양레저타운인 우샤카 마린 월드(uShaka Marine World)에 갔다. 이곳에서는 상어, 돌고래 등 1,000 여 종의 물고기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오후 4시가 겨우 지난 시각이건만 벌써 문을 닫았다. 세계도서관대회가 열려 지구촌 곳곳에서 사람들이 몰린 이 황금시즌에 이렇게 일찍 문을 닫다니... 자본주의적 동기 부여가 아직은 곳곳에 스며들지 않은 모양이다.

  남아공에서 자수성가한 교민인 제임스 정의 집에서 열린 만찬에서 남아공의 전통음식인 브라이를 맛볼 수 있었다. 브라이는 쉽게 말해 숯불구이 바베큐를 연상하면 된다. 집 안의 뜰에다 화덕을 설치해 놓고 소고기나 양고기를 구워서 먹는 것인데, 남아공의 전통적인 손님접대방식이란다. 쌀밥, 김치, 모듬전, 오징어볶음 등이 곁들여진 이날 만찬으로 모처럼 포식을 했다.
  제임스 정은 자동차정비공장을 경영하면서 민박도 하고 한국인을 상대로 관광가이드도 한다. 자녀로 두 딸이 있는데, 큰 딸은 의대를, 작은 딸은 법대를 다닌다며 자랑한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백인주택가에 자리한 그의 집은 참으로 예뻤다. 마당에 수영장까지 있는 3층짜리 고급주택이었다. 근래 몇 년 사이에 집값이 많이 올라 현지 돈으로 500만 란드(Rand), 우리 돈으로 대략 6억5천만 원 정도 한다고 한다.  

줄루족 민속촌---Shakaland

  더어반에서 고속도로(N2)를 이용하여 북쪽으로 2시간 정도(더어반에서 160km 거리) 가면 샤카랜드(Shakaland)라는 줄루족 민속촌이 있다. 8월 20일 한국에서 온 사람들만으로 팀을 이뤄 이곳을 찾았다.
  줄루족은 남아공의 여러 종족 중 그 숫자가 많은 편에 속한다. 그래서 앞서 말한 대로 줄루어도 공용어의 하나이다. 샤카는 줄루족의 왕으로 18세기에 줄루왕국을 건설하여 줄루족을 이 지방의 지배민족으로 만든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더어반에서 샤카랜드로 가는 고속도로변에는 사탕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지고, 이따금 백인이 거주하는 부촌과 흑인이 거주하는 빈촌이 교차하여 나타난다. 그 차이가 너무 커 여기서도 빈부격차를 실감케 한다.

  줄루족이 옛날 살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여 놓은 샤카랜드에서는 론다벨(Rondavel)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론다벨은 줄루족 등 아프리카 부족들의 전통적인 돔 형태 주거지이다. 샤캬랜드의 집들은 모두 론다벨이었는데, 샤카랜드 외에도 흑인주거지역에서는 종종 볼 수 있다.
  샤카랜드에서는 론다벨 외에 용맹한 줄루족이 사냥하는 모습, 전통춤, 물소나 사슴 등의 동물가죽으로 옷이나 방패를 만드는 모습, 유리구슬(beads)공예 등을 볼 수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에 기온이 30도 가량 되는 더운 날씨였는데, 역시 론다벨 형태를 한 비디오 상영관엘 들어가니 천장에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비록 전통 민속촌이기는 하지만, 계속 밀려오는 관광객을 위한 배려로 보였다.
  전통춤은 계속되는 북소리에 장단을 맞추어 맨손 또는 칼이나 창을 들고 추는데, 그 율동감이 엄청나다.

  줄루족은 처녀는 젖가슴을 드러내고,   정혼을 하면 살짝 가리고, 정식으로 결혼을 하면 완전히 가리는 것이 풍습이라고 한다. 아줌마가 되어 갈수록 부끄러움을 더 타는 모양이다. 줄루족이 만든 맥주를 시음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겉모양이 걸쭉할 뿐만 아니라 일행 중 마셔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 맛도 우리나라의 막걸리 같다고 한다.

  멀리 괴데트로우(Goedetrou) 댐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한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줄루족의 전통음식을 기대하였으나, 도시의 일반 음식이 뷔페식으로 차려져 있어 실망하였다. 딱 한 가지 줄루족의 전통음식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는데, 마치 백설기를 부숴 놓은 듯하였다. 우리 입맛에는 당연히 맞지 않았다.

오르막만 있는 고개---Sani Pass

  앞서 말한 대로 대회조직위원회에서 마련한 관광프로그램에 따라 8월 22일 사니 패스(Sani Pass)를 다녀왔다. 사니 패스는 남아공에서 레소토왕국으로 들어가는 고갯길을 일컫는다.
  레소토 왕국(Kingdom of Lesotho)은 남아공 속에 들어 있는 조그만 나라이다(면적 3만㎢. 지정학적으로 보면 마치 한국의 충청북도와 비슷하다). 국토의 80%가 해발 1,800m가 넘는 고원지대에 위치한 이 나라의 인구는 약 210만 명 정도이다. 한 때 부시맨들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야생밀로 만든 빵과 맥주(이 역시 줄루족의 그것처럼 막걸리 비슷하다)가 주식이고, 높은 산의 눈 녹은 물을 남아공으로 수출하나 돈거래가 아닌 물물거래가 주종을 이룬다. 양털과 앙고라도 주요 수출품목 중의 하나이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호텔 리셉션에 갔더니 전날 주문한 아침식사를 포장하여 내준다. 호텔에서 아침을 못 먹고 나가야 할 경우에는 미리 그 사정을 말하고 주문하면 이처럼 준비하여 준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호텔숙박비에 어차피 아침 식대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그 준비하여 준 아침식사가 거창하다. 빵, 샌드위치, 요구르트, 과자, 과일... 이곳 사람들이 평소에 워낙 많이 먹는지라 자기네 기준으로 준비한 것이다. 두 사람이 먹어도 남을 분량이라 집사람 몫은 아침을 챙겨오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다. 같이 가기로 했던 방송통신대의 김외숙 교수(박홍우부장님 사모님)가 복통으로 빠진 게 아쉬웠다.

  대회조직위원회에서 마련한 버스가 대회장 앞에서 출발한 게 아침 6시 35분. 2시간 40분 걸려 드라켄스버그(Drakensberg) 지방의 언더버그(Underberg)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짙은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는가 하면, 해가 쨍하고 났다가 비가 오기도 하는 등 날씨가 조화를 부렸다.
  사니 패스로 레소토왕국에 간다는 것은 어떻든 남아공을 떠나는 것이 되므로 출국심사가 필요하다. 그 심사를 하는 곳이 바로 언더버그(Underberg)의 출입국관리소이다. 심사를 위해 차에서 내리니 날씨가 쌀쌀하다. 상점에 들러 두꺼운 털점퍼를 사 입는 사람들도 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라 날씨 예측이 서툴 수밖에.
  출국심사래야 여권에 도장 하나 찍는 것인데, 무슨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는지 버스 한 대로 온 사람들 출국심사에 1시간이 소요되었다. 급할 게 없는 사람들의 만만디에 두 손을 들었다.

  여기서부터는 버스로 못 가고 사륜구동지프를 타야 한다. 사니 패스는 비포장의 꼬불꼬불 산골길이기 때문이다. 오전 11시에 레소토공화국 국경의 입국심사소에 도착했다. 국경이래야 산골길에 바리케이드 하나 쳐 놓은 게 전부다. 사륜구동차만 통행할 수 있다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해발 2,873m의 사니 패스 정상까지 가는 12km 고갯길의 좌우는 미국의 그랜드캐년을 연상케 한다. 정상부근에는 눈과 얼음이 있고, 깎아지른 낭떠러지 아래로 눈 녹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다. 다만 그랜드캐년은 위에서 접근하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콜로라도강을 보려면 밑으로 내려가야 하는 데 비하여, 사니 패스는 반대로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게 다르다. 계곡물은 강이라고 할 수는 없고 시냇물 정도이다. 워낙 건조한 지대인지라 그 이상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관령이나 한계령의 굽이굽이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만, 사니 패스의 그것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포장이라도 되어 있으면 그나마 나으련만, 비포장의 울퉁불퉁한 고갯길을 이리 꼬불 저리 꼬불 올라간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이다. 정말로 “숙달된 조교”만이 운전할 수 있는 길이다.
  그런 길을 땡볕 아래 나뭇짐을 짊어지고 올라가는 저 원주민은 어디에 사는 누구일까?
  내가 탄 차의 운전사 윌슨(Wilson)은 운전만 잘하는 게 아니라 안내원 노릇도 잘하여 중간 중간에 차를 세우고 희귀식물이나 야생 바분(Baboon, 원숭이의 일종)을 보여 주었다. 그와 찍은 사진을 전자우편으로 보내주기로 약속했는데, 그가 주소를 보내오지 않아 아직도 못 보내고 있는 게 안타깝다.

  12시 30분,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더어반에서 출발하여 6시간 걸린 셈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갯마루는 그곳에 올라서면 다시 내리막이 시작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사니 패스는 그렇지 않다. 고생고생해서 정상에 서면 눈앞에 광활한 고원지대가 펼쳐진다. 그 광활한 고원지대 속에 레소토 왕국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오르막만 있고 내리막은 없는 고개가 바로 사니 패스인 것이다.

  도대체 오염원이 있을 수 없는지라 하늘색이 푸르름 그 자체인 이 고원지대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그 사람들의 생활은 빈한하기 짝이 없다. 흙이나 돌로 벽을 쌓고 갈대로 지붕을 덮어 만든 전통적인 원추형 가옥 내부에는 침대 하나와 물통 몇 개가 놓여 있다. 그것이 가구의 전부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신을 신은 사람이 드물다. 같이 사진을 찍고 1란드(우리 돈으로 135원 정도)를 주니까(가이드가 그 이상은 주지 말란다) 무척 좋아한다. 그 돈을 어디에 쓰려나... 과자나 사탕을 준비하여 갈 것을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하얀 토종닭(?) 한 마리가 뒤뚱거리고 걸어가는 게 재미있어 한참을 쳐다보았다.

  이곳에 있는 유일한 문명시설인 샬레(Chalet)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 샬레 벽에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샬레라고 씌어 있다. 메뉴는 서양식 뷔페. 현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관광객을 위한 시설이다.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던 폴란드여자가 내가 한국에서 왔다니까 자기는 인터넷에서 김치 만드는 방법을 배워 집에서 자주 해먹는다고 하여 놀랐다. 말 그대로 국제화시대이다.

  언제부터인가 골이 아파서 처음에는 흔들리는 차를 오래 타 멀미를 해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해발 3,000미터 가까이 되는 곳이다 보니 산소 부족으로 인한 고산병 때문에 그랬다는 것을 사니 패스에서 내려와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케이프타운(Cape Town)

  콰줄루 나탈 대학교 도서관 견학을 하고 돌아온 날(8월 23일) 오후 5시에 남아공항공 비행기편으로 케이프타운으로 이동했다. 비행시간은 대략 2시간. 드디어 더어반을 벗어난 것이다. 저녁 7시에 케이프타운 공항에 도착하여 바로 고려정이라는 한식집으로 이동, 그곳에서 쌀밥, 김치, 된장국, 생선회, 갈비로 배를 불리고 쉐라톤 호텔(Arabella Sheraton Grand Hotel)로 가 투숙하였다. 가는 길에 시내 한 복판에 LG의 광고네온사인이 눈에 들어와 반가웠다. 그런가 하면 호텔의 객실에는 삼성텔레비전이 설치되어 있어 반가움을 더했다.

  쉐라톤 호텔은 더어반의 로얄 호텔과는 달리 그 명성에 맞는 이름값을 했다. 체크인을 하는 동안 사과쥬스 서비스가 제공되었고, 로비에는 인터넷이 설치되어 있었고, 집들도 각 방으로 가져다 주었다.
  특이한 것은 각 층마다 중앙에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어 객실로 가려면 열쇠로 먼저 이 문을 열고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2중의 잠금장치를 한 이유가 투숙객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때문에 동숙자가 방에 있다고 열쇠 없이 방을 나섰다가는 못 돌아가기 십상이다. 방마다 금고가 설치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이날 밤 처음으로 말라리아약(말라론)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11일 동안 하루에 한 알씩 거르지 않고 먹어야 한다. 다만 남아공만 여행할 경우에는 먹을 필요가 없다. 나중에 보듯이 빅토리아 폭포를 가기 때문에 먹은 것이다.
    
  8월 24일, 호텔에서 근사한 아침식사를 한 후 8시에 길을 나섰다. 하루 종일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날이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1652년 남아공에 처음으로 식민지를 건설한 도시인 케이프타운은 현재 남아공의 입법수도(행정수도는 프리토리아, 사법수도는 블룸폰테인)로 더어반과 달리 날씨가 쌀쌀했다.

  첫 행선지로 유명한 테이블 마운틴(Table Mountain)을 보러 가는데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전날 밤 도착했을 때도 비가 내렸건만, 밤새 오고도 부족한 모양이다. 이 날 안내를 맡은 현지교민 가이드인 박정민씨의 말에 의하면, 케이프타운은 하루에 4계절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란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찬바람과 대륙의 더운 공기가 부딪치다 보니 툭하면 구름이 끼고 비가 온단다. 햇볕이 날 때는 반팔을 입어도 더운데, 밤이 되면 털옷을 입어야 할 정도이다.

  테이블 마운틴은 해발 1,086m되는 높은 산이다. 그런데 산 이름에 테이블(Table)이 붙은 이유는 산 위가 탁자처럼 평평하기 때문이다. 마치 잘 드는 칼로 산의 위를 잘라낸 모습이다. 사실 남아공에는 이런 형태의 산이 많다(앞서 말한 사니 패스 주위의 산들도 대개 이런 모습이다). 산 위의 평평한 고원지대가 원래의 모습인데 다른 부분이 아래로 꺼지고 고원만 남은 것인지, 아니면 평지에서 그 부분만 돌출되어 올라간 것인지 모르겠으나(정설은 테이블 마운틴은 지각변동으로 바다가 융기한 것이라고 한다), 유독 이 나라에 이런 형태의 산이 많은 이유가 무엇인지 무척 궁금했다. 하지만 떠날 때까지 그 이유를 끝내 알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테이블 마운틴에 오르려면 해발 302m 지점에서 케이블카를 타야 한다. 설치된 지 70년이 넘는 이 케이블카는 65인승의 대형으로 시속 10km로 움직이는데, 비바람이 세차면 가동을 안 하는지라 가슴을 졸여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날 내리는 비 정도에는 가동을 하였다. 올라가는 도중에 케이블카가 천천히 360도 회전을 한다. 주위 경치를 잘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관광지에 있는 케이블카들도 배울 만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해발 1,067m 지점에서 내리니 비와 안개가 겹쳐 앞이 안 보인다. 이곳의 전설에 의하면 테이블 마운틴의 양쪽에 있는 봉우리인 ‘사자의 머리’(Lion's Head, 해발 1,000m)와 ‘악마의 봉우리’(Devil's Peak, 해발 669m)가 담배피우기 시합을 하는 바람에 구름이 많이 끼며, 시합에 이긴 쪽으로 구름이 더 낀다고 한다. 아무튼 이쯤 되면 볼 게 없으니 그냥 내려가야 할 판인데, 천변만화하는 케이프타운의 날씨를 기대하여 보자는 말에 고원지대 탐사에 나섰다.

  길은 돌길이지만 관광지답게 잘 다듬어 놓아 걷기가 좋다. 길옆의 각종 야생화(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식물이 부지기수여서 유네스코가 세계천연자원보호지역으로 지정하였다)를 구경하며 20여분 걸어가는데, 과연 케이프타운의 날씨답게 갑자기 해가 쨍하고 모습을 드러낸다.
  그 순간 저 발아래로 항구도시인 케이프타운의 전모가 한눈에 들어온다. 대서양의 부서지는 파도가 뿜어내는 포말,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고급주택가의 하얀 집들이 한 폭의 그림이다(공항 부근에서 본 깡통집들-흑인 집단거주지역의 양철판이나 마분지 등으로 사방을 가리고 지붕을 덮은 집들-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백인들이 이 모습에 반하여 이곳에 정착한 것일까.
  가이드가 그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 하나를 가리킨다. 로벤 섬 (Robben Island)이다. 만델라가 18년 동안 갇혀 있던 감옥이 바로 그곳에 있단다.  

  그 섬을 보고 있는 사이 다시 구름이 몰려오고 빗방울이 떨어진다. 아침 10시, 테이블 마운틴에서 내려와 시내에 있는 남아공 국립도서관(The National Library of South Africa Cape Town Campus. 처음 출발은 1818년이었는데, 당시 이름은 The South African Public Library였다)으로 갔다(국립도서관은 케이프타운 외에 프리토리아에도 있다).
  남아공 식민지를 개척한 동인도 회사 사장이 지어 기증하였다는 건물(1860년 건립)은 고풍스럽기 그지없다. 이 사람은 도서관 주위에 공원까지 조성하였는데, 그래서 그 공원 이름이 아예 ‘컴퍼니 가든’(Company Garden)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게이츠가 번 돈으로 자선사업을 많이 하는 것도 거슬러 올라가면 백인 사회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런 전통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는지...
  도서관 안에는 희귀한 책들이 많았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전집 초판본이 전부 보관되어 있는 서가는 유리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도난에 대비한 것이리라. 사서가 펼쳐 보여주는 시가 600만불짜리 책은 겉은 표지가 양가죽이었고, 안의 내용은 펜으로 직접 쓴 라틴어로 되어 있었다(9세기에 씌어진 성경 같았다).

  국립도서관 견학을 마치고 버스로 Fish Hoek Bay(‘하우트만’이라고도 한다)로 이동했다. 물개섬(Seal Island)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이다. 다시 비가 내린다. 물개섬까지는 전용유람선으로 30분 정도의 거리. 작은 바위섬에 물개들이 득실거린다. 섬 전체를 물개로 덮었다고 해도 될 판이다. 배에서 내리지는 못하고 그냥 뱃전에서 구경해야 한다. 유람선의 바닥으로 내려가면 유리창으로 바다 속의 물개들이 보인다. 자연적인 수족관인 셈인데, 수족관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물개인가, 사람인가? 항구로 되돌아오는데 빗방울이 굵어지고 바람이 불어 파도가 높아지는 통에 멀미를 했다.

  배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바닷가 길을 따라 1시간 정도 이동하여 볼더스 해안(Boulders Beach)의 펭귄서식지로 갔다. 이동 중에 그쳤던 비가 바닷가의 대형음식점(Seaforth Restaurant, 바다가재, 새우 등 해산물요리가 전문이다)에서 먼저 점심식사를 하는 동안 다시 내리더니, 식당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갠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날씨다.
  한국에서 도서관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크게 두 팀으로 나뉘어 움직였는데, 다른 팀은 밥 먹을 때나 이동 중에는 비가 안 오고 관광을 하려면 비가 오는 통에 낭패를 보았다고 한다.
  우리 팀은 그 반대였는데, 우리 팀에는 앞서 말한 도서관정보정책위위원회의 한상완 위원장님이 계셨기 때문에 영도자를 잘 만나 그런 것이라고 하여 한바탕 웃었다.

   펭귄서식지는 음식점 바로 옆의 해안가이다. 1982년 암수 2쌍을 가져다 놓았는데, 그것이 번식을 거듭하여 현재는 3,000마리가 넘는다고 한다. 남극의 펭귄과는 달리 키가 작다(60-70cm). 이름하여 아프리칸 펭귄(African Penguin). 마침 털갈이를 하는 때라 그런지 동화책에서 보던 예쁜 모습은 아니다.  
        
  이 날의 마지막 행선지인 희망봉(Cape of  Good Hope)으로 출발하면서 보니 시계바늘이 어느 새 오후 3시를 넘고 있다. 희망봉까지는 해안선을 따라 난 길로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간다. 그런데 이 해안선에 둘러싸인 만(灣)의 이름이 재미있다.
  이름하여 “False Bay”.

  그 옛날 유럽을 떠난 무역선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으로 가기 위해 희망봉을 돌았을 때 나타난 넓은 바다를 보고 “아, 드디어 인도양이구나” 하고 갔는데, 한참 해안선을 따라 가다 보니 북쪽으로 향하던 뱃길이 어느 순간 동쪽으로 바뀌고, 동쪽에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여전히 대서양에 머물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고는—결국 만(灣) 속에 들어가 한 바퀴 돈 셈이다—크게 실망한 선원들이 속았다며 ‘False Bay’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희망봉은 아프리카의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위치한 반도의 끝에 있는 것에 불과하다. 바다를 향해 돌출해 있는 이 반도는 그 생김새가 꼭 사람의 맹장과 같다. 1488년 이 곳을 처음 발견한 바르돌로뮤 디아스(1450-1500. 포르투갈의 항해가)는 거친 파도 때문에 ‘폭풍의 곶’(Cape of Storm)이라고 이름지었으나, 훗날 포르투갈 국왕 주앙2세(1455-1495)가 선원들의 공포심을 덜어주려고 ‘희망의 곶’(Cape of  Good Hope), 즉 희망봉으로 개명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곳을 기반으로 해서 인도항로를 개척하겠다는 희망이 서린 이름인 셈이다. 그 희망은 바스코 다 가마(1469-1524. 포르투갈의 항해가)가 1498년 마침내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함으로써 달성된다.
  
  희망봉은 테이블 마운틴 국립공원(테이블 마운틴은 북쪽에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곳에서부터 이곳까지가 전부 테이블 마운틴 국립공원 구역이다) 안에 있다. 이 공원 안에서는 야생 사슴(Small Bucks)이나 이랜드(Eland. 몸집은 소와 비슷하고 머리는 사슴 비슷하게 생겼다. 영양의 일종이다), 원숭이(Baboon) 등을 쉽게 볼 수 있다. 바닷가에는 다시마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그 굵기가 동아줄만하다. 채취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육지가 대서양을 향해 돌출해 있는 희망봉(Cape of  Good Hope)은 아프리카의 최남단이 아니다. 최남단은 이곳에서도 161km나 더 남동쪽으로 내려간 곳인 ‘케이프 아굴라스’(Cape Agulhas)이다.

  희망봉 옆에 있는 높은 봉우리가 케이프 포인트(Cape Point)이다. 걸어서 올라갈 수도 있지만 궤도열차를 타는 재미도 쏠쏠하다. 열차의 이름은 “날아다니는 화란인”(Flying Dutchman). 아마도 이 열차를 부설한 네덜란드인이 날아다닌 모양이다.

  케이프 포인트의 정상에는 1857년에 설치된 등대가 있고(현재는 시설이 낡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까닭에 중턱에 새로운 등대를 하나 더 설치하였다), 세계 주요도시까지의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서울이 있나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헛된 꿈이다.  희망봉에 머무는 동안에는 계속 햇볕이 쨍쨍했다. 역시 위대한 영도자 덕분이다.

   오후 5시 40분. 대략 30분 정도 더 머무르면 대서양으로 지는 일몰을 구경할 수 있으련만 가이드가 야속하게도 갈 길을 재촉한다. 버스는 케이프타운쪽으로 달리는데 내 눈길은 희망봉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빅토리아폭포와 잠베지강

  8월 25일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했다. 아침 6시에 케이프타운을 떠나 요하네스버그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오전 8시에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하여 9시 15분에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남아공항공 SA40) 짐바브웨의 빅토리아폴 공항에 내리니 오전 11시다. 요하네스버그에서 수화물 환승에 또 문제가 생겨 일행의 짐이 몇 개 안 왔다. 요하네스버그 공항은 참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공항이다. 2010년 월드컵의 개막식과 결승전이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다는데 무사히 치러지기를 바랄 뿐이다.

  빅토리아폴은 인구 6만의 소도시로 오로지 빅토리아폭포 때문에 생겨난 도시 같다. 공항의 모습도 전형적인 시골공항이다. 30달러를 내면 공항에서 입국비자를 발급한다. 이 공항 내부의 벽에 광고판이 하나 붙어 있는데, 자랑스럽게도(?) 한글로 씌어진 “빅토리아 폭포 여행사”!
   빅토리아폭포의 관광객 중 한국, 중국, 일본의 동양3국인의 비율이 제일 높다고 한다.
  비자 받는 줄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니, 일단의 사람들이 귀에 익은 말로 왁자지껄한다. 대부분이 아줌마인 한국인들이다. 농협여행사에서 온 남미팀이란다.
  원 세상에, 빅토리아 폭포를 구경하고 남미로 가서 이과수폭포를 구경할 예정이란다. 서울에서 이곳까지도 힘든데, 여기서 다시 남미로, 그리고 서울로...철녀(鐵女)들이다. 언젠가 글에 썼던 대로 과연 “대한민국은 아줌마공화국이다.”

  짐바브웨(짐바브웨는 ‘돌의 나라 Country of Stone’라는 뜻이다. 영국식민지 시절에는 잠비아와 합쳐 ‘로데시아’라고 불렸다가 각각 따로 독립한 것이다)는 남아공에 비해 후진국일망정 그와 달리 치안이 잘 되어 있는 나라이다. 그런데 여기도 문제가 있다. 사람 치안은 걱정이 없는데, 동물 치안이 걱정이다. 빅토리아폴 공항 인근이 바로 국립공원으로 동물들이 수시로 출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간에는 가급적 나다니지 말라고 현지 가이드가 주의를 준다.

  이름이 프레셔스(Precious)인 이 여자 가이드는 발음이 똑똑 떨어지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 다음날까지 계속 안내를 맡았는데, 늘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설명을 하는 그야말로 프레셔스(precious)한 가이드였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짐바브웨에는 민족 고유의 언어도 있지만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영어를 공용어로 배우고 쓰기 때문에 누구나 영어를 할 줄 안다고 한다. 식민통치를 한 영국인들이 영어 하나는 확실하게 남겨 놓고 간 모양이다.  

  숙소인 킹덤호텔(Kingdom Hotel)에 짐을 풀고 점심을 먹은 후 오후 2시에 빅토리아 폭포를 보러 나섰다. 빅토리아 폭포는 짐바브웨와 잠비아의 국경에 걸쳐 있기 때문에 첫째날은 잠비아 쪽으로 넘어갔다. 국경선까지는 차로 20여분 거리이다.
  국경을 넘어야 하니까 짐바브웨쪽에서 여권에 출국도장을 받고, 잠비아쪽에서 입국비자를 받아야 한다. 입국비자료는 역시 30불이다. 출입국장에는 남루한 차림의 흑인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일터를 찾아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들이란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잠베지강의 깊은 계곡 위로 세워져 있는 멋진 리빙스턴교(우리는 이를 “콰이강의 다리”라고 불렀다)를 지나자 곧 빅토리아 폭포가 나왔다. 1855년 이 폭포를 발견하고 자기네 나라 여왕 이름을 따 빅토리아폭포라고 이름 지은 영국의 탐험가 리빙스턴의 동상이 먼저 관광객을 맞이한다.
  안내인을 따라 숲속으로 발을 들여놓자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어서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 빅토리아 폭포는 폭이 2km에 달하는데 그 중 잠비아쪽은 200m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전체의 1/10밖에 안 되는 부분을 보았는데도 입이 벌어진다.
  지금이 건기라서 물의 양이 적다는데(오히려 그래서 폭포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우기에는 폭포의 모습은 볼 수 없고 그저 물안개만 보인다고 한다) 이제껏 보아온 그 어느 폭포보다 웅장하다. 그 폭포가 빚어내는 물안개 위로 피어오르는 쌍무지개는 환상 그 자체이다.

  한 시간 가량 폭포를 구경을 한 후, 비록 다음날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잠베지강의 일몰유람(Sunset Cruise)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도중에 1,700년 된 커다란 바오밥나무를 보았다. 나뭇가지가 마치 뿌리처럼 생겨서 위아래가 바뀐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이 나무는 생떽쥐베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도 등장한다. 아니 그 바람에 유명세를 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 멀리 한국에서 온 사람들까지도 그 이름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잠베지강(Zambezi River)은 총 2,740km에 달하는 긴 강이다(잠비아에서 시작해 짐바브웨, 모잠비크를 거쳐 인도양으로 흘러들어 간다). 아프리카에서는 4번째로 긴 강이다.
  그 강 상류에 유람선을 띄우고 일몰을 감상하는 관광코스가 인기를 끈다. 강의 좌우 초원지대에는 코끼리, 사슴 등이 한가롭게 놀고 있고, 강가에서는 악어가 낮잠을 자고 있다. 마냥 평화로운 풍경이다. 적어도 이곳에는 이념의 대립도, 전쟁도 없다.

  배 안에서는 맥주나 탄산음료, 빵, 소세지 등 간단한 먹거리를 제공한다. 종업원의 친절도가 남아공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짐바브웨도 그렇고 잠비아도 그렇듯이 가난한 나라의 국민이 더 친절하다는 게 아이러니다. 그들에게서는 때 묻지 않은 순박함이 느껴진다. 도시사람과과 시골사람의 차이인가.
   3년 전 같은 재판부의 판사들과 잠실에서 여의도로 가는 한강유람선을 타고 일몰을 구경한 적이 있는데, 이 날 잠베지 강에서 느끼는 감상은 영판 다르다.
  대도시의 빌딩 숲으로 지는 해와 대자연의 한 가운데로 지는 해가 어찌 같으랴. 아니 그 해가 그 해일지라도 그 해를 바라보는 그 마음은 같은 마음이 아니잖은가.

  주위가 깜깜해진 후에 차를 타고 저녁식사를 하러 갔기에 동서남북을 알 수 없는 현지식당에는 먹거리가 풍부하게 놓여 있었다.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로 이미 붐빈다.
  소안심, 멧돼지, 악어, 이랜드 등으로 즉석 숯불구이 바베큐를 해주는데, 호기심에 이것저것 먹어보았으나 멧돼지고기만 입에 맞았다.
  식사하는 동안에 종업원들이 돌아다니며 손님마다 일일이 현지인들이 입는 망토를  둘러준다. 또한 식당 한복판에서는 민속공연도 보여준다. 아프리카에 와서 모처럼 흥겹고 여유로운 저녁식사를 하였다.

  다음날인 8월 26일, 일찌감치 일어나 호텔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통나무집과 서구식 호텔을 반반씩 섞었다고 할 이 호텔은 부지가 넓어 경내에 정원이 있고 그리로 시내가 흐른다. 이 쪽 건물에서 저쪽 건물로 가려면 그 위에 놓은 나무다리를 건너야 한다. 물줄기를 따라 온 악어가 가끔 출몰하니 조심하라는 안내판도 보인다. 이 초원지대에서는 콘크리트로 된 고층의 서구식 호텔보다 훨씬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 폭포탐방에 나섰다. 짐바브웨쪽 빅토리아 폭포(1.8km)에는 다섯군데의 관람대(View Point)가 있다. 모두 폭포를 가장 멋지게 볼 수 있는 곳이다.
  그 중 마지막인 데인저 포인트(Danger Point)는 까마득한 절벽 위에 있는데, 난간조차 없어 이름 그대로 위험한 곳이지만, 그만큼 경치가 장관이다. 수량이 적은 건기임에도 쏟아지는 물줄기로부터 튀어나오는 물방울로 옷이 금방 젖어버렸다. 최고 낙차가 108m 되는 지점에서는 쌍무지개와 조화를 이룬 폭포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정말이지 우기에는 굉장할 것 같다.

  제한된 시간에 하나라도 더 잘 보려고 서두르다가, 물에 젖어 미끄러운 바위를 잘못 디디는 바람에 넘어져 급기야 발목에 부상을 입었다. 오른 쪽 발목의 복숭아뼈 안쪽에 찰과상을 입었는데, 별 것 아니려니 하고 지나쳤으나, 그 후 20여일이 지나서야 아무는 통에 큰 불편을 겪었다. 반면 넘어지면서 손에 들었던 삼성디지탈카메라(VLUU NV10)는 바위에 세게 부딪혔으나 겉에만 약간 흠집이 났을 뿐 멀쩡하다.

   폭포 구경을 마치고 공항으로 이동하여 12시에 요하네스버그행 비행기에 올랐다. 다시 남아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1시간 40분 걸려 요하네스버그공항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수화물로 부친 휴대폰을 도난당한 것은 앞서 말한 대로이다.

벨라벨라의 마불라게임롯지

  요하네스버그 공항에서 나와 대기중이던 현지여행사 UTC(United Touring Company South Africa)의 차를 타고 광대한 초원지대를 시속 100-140km로 2시간 동안 달려, 요하네스버그 북서쪽의 벨라벨라에 있는 마불라게임롯지(Mabula Game Lodge)에 도착하였다. 운전사 저스틴(Justin)이 사용하는 휴대폰이 LG제품인 것이 눈길을 끌면서 케이프타운 시내 한복판에 있던 LG광고 대형 전광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데 남아공의 11개 공용어를 다 구사할 정도로 유능한 이 운전사는 정작 LG가 일본회사인 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삼성까지도. 그게 다 한국의 회사라고 하니 놀라면서도 쉽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마불라게임롯지는 비수기(8월 하순은 이곳에서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때이다)라서 그런지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등록창구에서 일하는 직원도 심드렁하기 그지없다. 오전의 친절했던 짐바브웨 사람들과 너무 대조적이다.
  마불라게임롯지는 한 마디로 사설 사파리이다. 규모가 약 900만평 정도 된다. 900만평 되는 초원의 둘레에 철조망을 친 후 안에다 각종 동물들을 방사하여 야생으로 살아가게 한다. 그리고 곳곳에 길을 내 지프를 타고 다니면서 그 동물을 구경하는 것이다.
  관광객들은 그 안에 있는 숙박시설(갈대로 지붕을 한 초가집이 수십 채 있고, 식당, 간이주점, 수영장, 테니스장 등 부대시설이 갖추어져 있다)에서 묵는다. 이런 사설 사파리를 통칭 게임롯지(Game Lodge)라고 부르며, 벨라벨라 지역에만 이런 규모의 사설 사파리가 18개이다. 전국적으로는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숙소의 시설은 볼품이 없다. 그 흔한 TV조차 없다. 아무렴, 시골구석의 초가집 아니던가. 그럼에도 등록창구 옆에 있는 인터넷(한 번 연결하려면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하다)의 모니터가 삼성제품인 것을 보고 반가워함은 한국인의 피를 속일 수 없음이리라.
  식당에서 먹은 저녁식사는 한 마디로 빵점이다. 타조고기만 그런 대로 먹을 만했을 뿐, 티본스테이크는 질겨서 씹을 수가 없고, 야채볶음을 얹은 밥은 짜서 목구멍을 잘 안 넘어간다.
  
  8월 27일 아침 6시 30분, 아직 동이 트기도 전에 랜드로버 지프(landrover jeep)를 타고 사파리관광(이를 Game Drive라고 한다)에 나섰다. 지프 안에는 사자와 같은 사나운 동물의 습격에 대비하여 라이플총을 비치하고 있는데, 실제 상황이 벌어지면 별 쓸모가 없을 거라고 한다. 그 총을 들어 쏘려고 하는 동안에 이미 사자의 먹이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말에 오금이 저렸다.
  날씨가 쌀쌀하여 목도리까지 했지만, 지프가 지붕이 없는 무개차이기 때문에 찬 바람을 그대로 맞아야 했다. 같이 탄 백인들은 털모자도 썼다.

  레인저(Ranger. 지프를 운전하면서 사파리를 안내하는 사람을 레인저라고 부른다. 복장이 레인저부대원 같아서 그렇게 부르는지는 모르겠다)인 쌤(Sam)은 이곳에서는 보기 드물게 친절한 흑인이다.
  그의 노련한 안내로 기린, 얼룩말, 들소, 코뿔소, 원숭이, 각종 사슴(bushbuck, reedbuck, springbuck, waterbuck 등 다양하다), 이랜드, 멧돼지, 타조, 사자 등을 볼 수 있었다.
  길에 있는 발자국과 똥을 보고는 무슨 동물이 어디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내는 쌤의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동도 트기 전부터 서둘러 사파리 관광에 나선 것은 사자를 보기 위함이었다. 사자들은 그만큼 아침 일찍 거동한다고 한다. 반대로 코끼리를 보기 위해서는 오후에 나갔는데, 이 역시 오후 늦게야 움직이는 코끼리들의 생리 때문이다.

   어느 순간 쌤이 차의 엔진을 끄고 가리키는 쪽을 보니 사자가 두 마리 보인다. 둘 다 갈기가 멋진 숫놈이다. 이미 아침식사를 끝냈는지 길게 하품을 하며 엎드려 있다. 우리 쪽을 담시 두리번거리다가 관심이 없는 듯 고개를 돌린다. 좀 더 잘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니까 쌤이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주의를 준다. 사자를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자에만 집중했던 눈을 주위로 돌리자 각종 동물뼈들이 보인다. 사자의 밥이 된 동물들의 잔해인 것이다. 약육강식의 현장이다. 이 사파리 안에는 이런 사자들이 6마리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비록 지프를 타고 다닌다지만 사파리관광은 일종의 모험인 셈이다.

   관광이 끝나고 차에서 내릴 때 쌤에게 팁으로 10불(본래 5불을 줄 생각이었는데, 마침 10불짜리밖에 없었다)을 주었더니 감사하다는 말을 코가 깨지게 한다. 같이 탔던 백인들은 단돈 1불도 팁을 줄 생각을 안 한다. 어느 문화가 맞는 것인지 잠시 헷갈렸지만, 새벽부터 수고한 쌤의 노고에 비하면 10불이 결코 아깝지 않았다.  

  2시간 30분 동안의 오전 사파리 관광을 마치고 돌아와 식사 후 쉬는 시간에 집사람이랑 둘이서만 사파리산책을 1시간 하였다. 이곳에는 야생동물들이 없는 구역에 산책용 오솔길(Walking Trail)을 따로 만들어 놓았다.
  호젓한 길을 따라 가면서 광대한 초원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었고, 바위만을 감싸고 자라는 희한한 나무를 관찰하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워낙 인적이 없는지라 다소 겁이 나 예정코스를 다 돌지 못하고 서둘러 돌아왔다.

  오후 3시 30분부터 시작된 사파리 관광에서는 기린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고, 몇 십 마리의 들소떼가 이동하는 멋진 장면도 만났다. 오후의 안내를 맡은 다른 레인저 스테판(Stephan)은 백인으로 다소 무뚝뚝하기는 해도 더 노련했다. 그가 악어를 보여주겠다고 계속 찾아다녔으나 끝내 실패하고, 그 과정에서 대신 홍학과 하마, 그리고 아무데서나 불쑥 나타나는 멧돼지를 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코끼리를 찾아 나섰는데, 이 또한 쉽지 않았다. 그래도 스테판이 악어를 찾지 못해 자존심이 상했는지 코끼리는 꼭 찾고 말겠다며 산 넘고 물 건너 구석구석을 다 돌아다니다가 해가 거의 질 무렵에 결국 찾아냈다. 한 가족 10마리가 떼를 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다른 레인저들에게 무전으로 코끼리 찾았으니 빨리 오라고 연락하는 것으로 보아 코끼리 찾기가 실로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코끼리 덕에 시간이 지체되어 돌아오는 하늘에는 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코끼리를 끝까지 추적하여 찾아낸 정성이 갸륵하여 스테판에게도 10불의 팁을 주었는데, 쌤과는 달리 건성으로 고맙다고 한다. 그러나 그 10불이 다음날 위력을 발하였으니...
      
   8월 28일 아침, 본래 지프를 타고 다시 전날 아침과 동일하게 사파리 관광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스테판이 어제 한 것을 동일하게 반복할 게 아니라 말을 타고 동물구경을 나서면 어떻겠냐고 한다(이를 ‘Horse Trail’이라고 하며 별도로 돈을 내고 신청을 해야 한다). 자기가 레인저 대장인데 별도로 돈을 더 받지 않고 서비스하겠다고 한다. 전날 준 10불 팁의 위력이 아닐 수 없다. 불감청이어든 고소원이라(不敢請固所願) 즉석에서 그 제의를 수락했다.
  
   제주도의 조랑말 정도밖에 안 타 본지라 처음에는 겁이 났으나, 숙달된 레인저(Horse Trail을 담당하는 레인저가 따로 있다)가 조련이 잘된 말을 골라 주고 인도를 잘해 이내 익숙해졌다.
  초원지대에서 천천히 걷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는 말타기 자체도 하나의 즐거움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지프와 달리 말을 타고 가니까 동물들이 가까이 가도 도망을 안 가 전날보다 잘 관찰할 수 있었다. 타조, 얼룩말, 이랜드, 작은 사슴 등등을 보며 돌아다니려니 어느새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선시티(Sun City)

  마불라게임로지에서 선시티까지는 자동차로 2시간 거리이다. 선시티는 한 마디로 남아공의 에버랜드이다. 에버랜드와 마찬가지로 개인기업(Sun 그룹)에서 만든 리조트단지이다. 인공해안과 파도풀장, 대형 오락실 등 가족단위나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각종 위락시설이 있다. 에버랜드와 차이가 있다면 규모가 더 크다는 것과, 호텔(모두 4개)마다 안에 미국의 라스베가스처럼 대형 도박장(카지노)을 개설하여 놓고 있다는 것이다.

  선시티 내부에서 이동할 때는 셔틀버스나 하늘기차(Sky Train)를 이용한다(하늘기차는 주말에만 운행한다). 원할 경우에는 택시를 불러 탈 수 있는데 무료이다. 다만 그 택시가 오기까지 20분은 기다려야 한다.
  선시티 안에는 골프장이 두개 있는데(Lost City GC, Gary Player CC), 그 중 Gary Player CC는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남아공 골프선수 게리 플레이어(Gary Player)가 설계하고 그의 이름을 딴 것으로서, 클럽하우스에서 점심을 먹으며 내다보니 일견 훌륭한 골프장으로 보였다. 다만 본래 그런 건지, 아니면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시간이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으나 골프 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규모가 제법 큰 악어농장으로 악어구경을 갔다. 수많은 악어들이 하나같이 낮잠을 자는지 꼼짝을 안 하고 엎드려 있었다.
  입을 벌린 채 있는 놈, 고개를 쳐들고 있는 놈, 눈을 뜬 놈, 눈을 감은 놈 할 것 없이, 큰 놈이건 작은 놈이건 한 번 자세를 취하면(내가 보기에는 자세가 무척 불편해 보이는데도) 그걸 바꾸지 않고 미동도 안 하여 박제를 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벌린 입을 다무는 것조차 귀찮아하니 이 세상에서 악어가 제일 게으른 동물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하다. 악어새가 악어의 이빨 사이에 끼어 있는 음식을 쪼아 먹고 산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나일강에서 잡아 왔다는 악어는 길이가 족히 몇 미터는 되어 보였다.

  4개의 호텔 중 특히 팰리스 호텔(Palace Hotel)이 눈길을 끈다. 선시티 안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한 최고급의 이 호텔은 그 입구까지 가는 길이 동화속의 궁전 가는 길 같기도 하고, 영화 인디아나존스에 나오는 고성의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지진으로 사라진 전설 속의 옛 아프리카왕국을 재현하였다고 하는 건물의 내부도 또 다른 맛을 낼 것 같아 궁금했는데,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라고 해서 그만두었다. 세상에 호텔에 들어가는데 입장료 내라고 하는 곳이 여기 말고 이 세상에 또 있으려나...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내가 투숙한 메인 호텔(Main Hotel)은 명색이 일급호텔이건만 저녁 먹으러 간 식당(Galabash Restaurant)의 종업원들이 너무 불친절하여 남아공에 대한 썩 좋지만은 않은 인상을 더욱 구기게 했다. 오랜(?) 여행의 끝을 리조트에서 하루 편히 쉬며 보내겠다고 선택한 일정이 결국 모양새를 구긴 셈이다.

헌법재판소

  8월 29일 오전 10시. 남아공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요하네스버그의 헌법재판소를 방문하였다. 선시티에서 요하네스버그의 헌법재판소까지는 2시간이 걸렸다. 인종차별의 악명 높은 교도소가 있던 자리인 헌법의 언덕(Constitution Hill)에 자리한 헌법재판소의 정문 벽에는 남아공의 11개 공용어로 헌법재판소라고 씌어 있다. 1994년 설립된 남아공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은 총 9명이고, 임기는 12년, 정년은 70세이다.

  헌법재판소의 사무처장 마티 스탠더(Martie Stander)와 도서관장 쉐릴 루툴리(Sheryl Luthuli)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서울에서 진작부터 연락을 취한 덕분이다(이 또한 조의연판사가 수고하였다).
  헌법재판소를 소개하는 책자를 선물로 받고, 나도 준비하여 간 대법원과 법원도서관 소개책자, DVD, 영문판례집을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자료를 주고받기로 했다.
  중년의 전형적인 백인 여자인 마티 스탠더는 오랜 연락 끝에 힘들게 만났는데 금방 헤어지는 게 너무 섭섭하다면서, 나와 끌어안고 볼을 마주 대는 작별인사를 하였다. TV에서나 보던 이런 인사를 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도서관장 쉐릴 루툴리의 안내로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이곳 역시 잘 정리된 판례집이 제일 눈길을 끌었다.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에서 발간된 판례집들도 있다. 내가 선물한 영문판례집도 이곳에 잘 보관하겠다고 한다.
  먼 훗날에는 그 영문판례집들이 서가에 일렬로 멋지게 배열된 때가 올 것이다.

  도서관에서 나와 앞서 말한 삭스(Albie Sachs) 재판관의 방으로 그를 찾아갔는데, 그가 막 방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나를 기다리다 회의시간이 임박하여 회의장으로 가려던 참이라고 한다. 하마터면 못 볼 뻔했다고 하며 웃는다.
  더어반의 세계도서관대회장에서는 먼발치에서 연설하는 것만 보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인상 좋은 시골할아버지 분위기를 풍긴다.
  그가 귀한 손님이 멀리서 오셨는데 회의 때문에 가야 한다면서 미안하다고 그 대신 점심식사에 초대하겠다고 했으나, 이번에는 내가 서울행 비행기를 타야 해서 초대에 응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게 아쉬운 작별을 했다.

  삭스 재판관과 헤어진 후 그의 연구관(law clerk)이 안내하여 법정을 구경하였다. 법정에는 인종간의 화합을 상징하는 남아공의 대형 국기를 벽에 붙여놓았을 뿐만 아니라, 구석구석 인종화합을 의식한 실내장식을 하였다.
  법대 앞에는 당사자 등 소송관계인이 진술할 수 있는 대(臺)가 설치되어 있는데, 진술인의 키에 맞추어, 심지어는 휠체어를 탄 사람도 이용할 수 있게, 대(臺)를 위아래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해 놓은 것이 이색적이다.
  마침 일단의 견학자들을 안내하여 온 헌법재판소의 직원이 아마도 전 세계 법정 중에서 남아공 헌법재판소에 유일하게 설치되어 있을 거라고 자랑한다(나중에 안 일인데 유럽의 인권재판소에도 그런 시설이 되어 있다고 한다).

  헌법재판소에서 나와 점심을 간단히 먹고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운전사 저스틴(Justin)의 안내로 남아공 민속공예품을 파는 곳에 들렀는데, 총을 찬 경비원이 신분을 확인한 후에 철문을 열어 주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나로서는 이래서야 장사가 되겠나 싶었지만, 물건을 많이 파는 것도 좋으나 그보다는 안전이 더 중요하다는 게 아마도 상점 주인의 생각이 아닐는지.

   참으로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는 험한 나라, 그게 바로 남아공의 현주소가 아닌가 싶다. 오후 4시 35분 홍콩행 비행기(남아공항공 SA286)에 탑승하는 순간 맥이 탁 풀림은 드디어 사지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 때문이런가.  
  이 글을 마치면서 문득 論語의 泰伯篇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이 떠오른다. “위방불입(危邦不入)이요 난방불거(亂邦不居)라”(위험한 나라에는 가지 말고, 위험한 곳에는 거처하지 마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