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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無所見無分別(묵무소견무분별)

耳聽無聲絶是非(이청무성절시비)

分別是非都放下(분별시비도방하)

但看心彿自歸依(다간심불자귀의)

 

    눈으로 보는 게 없으니 분별할 일이 없고

    귀로 듣는 게 없으니 시비 또한 끊어지네

    분별과 시비는 다 놓아 버리고

    단지 내 마음의 부처에게 귀의하리라

 

    八竹詩(팔죽시)로 유명한 浮雪居士(부설거사)偈頌(게송)이다.

    글씨체는 예서(隸書) 죽간체(竹簡體).


    이 게송에는 새길 만한 일화가 있다.

 

    전북 부안 변산 반도에 있는 월명암의 창건주인 부설거사는 애초 출가한 스님이었다. 경주에서 태어나 출가했던 그는 도반인 영조, 영희 스님과 함께 장흥 천관산 등 남해와 지리산을 거쳐 오대산으로 도를 닦으러 가는 길에 백제 땅인 만경평야를 지나다가, 독실한 불자였던 구무원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구무원에겐 묘화라는 무남독녀 외동딸이 있었다. 꿈에 연꽃을 보고 잉태해 태어난 묘화는 선녀 같은 용모에 착한 마음씨와 절조까지 지녔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못하는 벙어리였다.

    그런데 20년 동안 입 한번 벙긋하지 않던 묘화가 부설스님을 보자 말문이 트였다. 그러면서 부설 스님과 자신은 3생에 걸친 인연이 있으니 천생의 배필이라고 했다. 그래도 도반들과 맺은 언약이 있었던지라 부설이 걸망을 메고 집을 나서려 하자, 묘화가 칼을 들고 서서

 

    "만약 스님께서 문지방을 넘으면 이 자리에서 자살을 하겠습니다. 上求菩利下華衆生(상구보리 하화중생 :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들을 구제함)을 하기 전에 눈 앞의 나부터 구하십시오"

 

라고 소리쳤다.


    묘화와의 인연 또한 거스를 수 없다고 여긴 부설은 두 도반에게 부디 도를 이뤄 자신을 가르쳐 줄 것을 당부하면서 헤어졌다. 그렇게 15년이 지난 뒤 영조, 영희 스님이 오대산에서 불도를 닦고, 돌아왔을 때 마을 앞에서 놀고 있던 부설의 아들 등운을 만났다. 부설의 안부를 묻는 두 스님에게 등운은 "우리 아버지는 10년 넘게 앓고 있어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두 도반이 왔다는 소리를 들은 부설은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후세 사람들은 아마도 부설이 평소엔 병자 시늉을 내고, 모두 잠든 밤에 일어나 수행 정진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다시 만난 세 도반은 도력을 겨루기 위해 도자기에 물을 담아 대들보에 걸어 놓고 각자의 도자기를 쳤다. 그러자 영희와 영조의 도자기는 깨어져 물이 흘러 버렸다. 그러나 부설의 도자기는 깨어졌지만 물은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이 때 부설거사가 읊은 게송이 바로 위의 시이다.

    

   부설이 열반한 뒤 자녀인 등운과 월명도 머리를 깎았다. 모든 분별을 넘고 생사를 뛰어넘어 해탈자재한 이는 부설만이 아니었다. 부설의 부인 묘화는 110살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환한 대낮에 바람과 구름으로 조화를 부려 비와 눈을 내리게 하는가 하면, 그 비와 눈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신묘한 도술을 부렸다고 전하며,  아들 등운은 충청도 계룡산으로 가서 선풍을 드날려 '등운조사'로 알려졌고, 월명은 월명암에서 육신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월명암은 바로 부설의 딸 월명의 이름을 딴 절이다.    


   부설거사의 팔죽시(八竹詩)는 다음과 같다.

  

此竹彼竹化去竹(차죽피죽화거죽)

風打之竹浪打竹(풍타지죽낭타죽)
飯飯粥粥生此竹(반반죽죽생차죽)
是是非非付彼竹(시시비비부피죽)
賓客接待家勢竹(빈객접대가세죽)
市井賣買歲月竹(시정매매세월죽)
萬事不如吾心竹(만사불여오심죽)
然然然世過然竹(연연연세과연죽)
 
       이런 대로 저런 대로 되어가는 대로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런대로 살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려니 그런 대로 아세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하고

       장터에서 사고파는 것은 시세대로 하네  

       세상만사 내 맘대로 안 되니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 대로 살아갈거나


*2015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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