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白露)와 백로(白鷺)

2021.09.05 20:02

우민거사 조회 수:133

 

모레(9. 7.)가 백로(白露).

 

한마디로 말해 흰 이슬이 내리는 시절이니, 가을의 문턱을 넘어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문 밖으로 나서자 시원함을 넘어 다소 쌀쌀하다는 느낌이다.

기온을 보니 영상 14.

올 여름 유례없는 더위가 이어져 허덕이던 것이 어느새 먼 옛날의 일처럼 여겨진다.

자연계에서 인간만큼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고, 또 잘 적응하는 존재가 더 있을까.

 

그 가을을 느끼며 늙은 호박을 세 통 거두어 들였다.

촌부가 한 일이라곤 봄에 씨 심은 것밖에 없는데,

여름 내내 애호박으로 된장찌개와 부침개의 재료가 되어 노부(老夫)의 입을 즐겁게 해 주더니,

이제 마지막으로 늙어서는 호박죽으로 헌신할 요량이다.

한겨울에 늙은 호박으로 만든 호박죽이 선사하는 즐거움은 먹어본 사람만이 안다.

그것도 내 손으로 키운 것으로 만드니 더 말해 무엇하랴.

벽촌에 사는 촌자(村者)의 특혜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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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금당천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시절에 걸맞게 과연 백로(白露. 찬 이슬)가 촌부를 반긴다.

아침 햇살에 영롱하게 빛나는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황금빛 옷으로 갈아입은 벌판 옆으로 난 농로도 정답다.

그 길에 핀 꽃들은 수줍은 듯한 미소를 머금고 늘 한쪽 옆으로 비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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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건 뭔가.

백로(白露)를 코앞에 두고도 아직 남쪽으로 날아가지 않은 백로(白鷺)라니!

올벼를 베어낸 자리에 지난 며칠 동안 내린 비가 고여 있는 논에서

백로가 오리와 함께 놀고 있다.

백로가 있는 곳에 오리가 온 걸까, 오리가 노는 곳에 백로가 찾아간 걸까.

저 흰 백로는 오리들을 보고 검다고 웃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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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시조 한 수를 흉내내본다.

 

오리들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을손 너뿐인가 하노라.

 

작금에 언론중재법 개정을 둘러싸고 전 세계의 이목을 끌 정도로 요란하다.

그런데 가짜뉴스를 근절하기 위해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정작 무엇이 가짜뉴스이고 무엇이 진짜뉴스인지 헷갈린다.

나한테 유리하면 진짜뉴스이고, 불리하면 가짜뉴스라는 

내로남불의 장이 펼쳐질 뿐이다. 

더구나 가짜뉴스의 온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유튜브 등 

인터넷 매체는 규제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결국 저마다 겉 희고 속 검은 건 백로를 닮아가는 모양새이다.

  

이렇듯 그야말로 옳고 그름이 뒤죽박죽으로 되어 버린 세태를

촌부 같은 무지렁이들은 어떻게 헤쳐 나갈거나.

 

다시 옛시조를 한 수 떠올린다.

 

가마귀 검으나 따나 해오라비 희나 따나

황새 다리 기나 따나 오리 다리 져르나 따나

평생에 흑백 장단을 나는 몰라 하노라.

 

시비를 위한 시비를 일삼는 흑백논리에 매몰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게 가붕개(가재, 붕어, 개구리)의 현명한 처사이려나...

 

가을밤이 소리없이 깊어가고 있다.

 

 

가을사랑-신계행.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