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전(雨前)과 망징(亡徵)

2019.04.21 00:07

우민거사 조회 수:129


어제가 24절기 중 곡우(穀雨)였다.
봄비(雨)가 내려 백곡(穀)을 기름지게 한다는 뜻이다.

이제부터 농촌에서는 못자리를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농사철이 시작되어 바쁘게 돌아간다.

그런데 어제는 아쉽게도 봄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곡우穀雨)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리라.


논.jpg

 

절기상 곡우 전에 딴 어린 잎으로 만들었다 하여 ‘우전(雨前)’으로 불리는 작설차가 이제 나오게 된다.

그런데 이는 사실 우리나라보다 기후가 따뜻한 중국 남부지방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

우리나라에서는 적어도 앞으로 한 달 내에 딴 잎으로 만든 차라면 ‘우전(雨前)’으로 불러도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그리 되면 이름과는 맞지 않는 ‘우전(雨前)’이 되어 ‘명실상부(名實相符)’는 아닌 셈이 된다.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선사(草衣禪師)도 일찍이 동다송(東茶頌)에서,

 
“중국의 다서(茶書)는 곡우 5일 전이 가장 좋고, 5일 뒤가 다음으로 좋으며, 그 5일 뒤가 그 다음으로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험에 따르면 한국차의 경우 곡우 전후는 너무 빠르고 입하 전후가 적당하다

(以穀雨前五日爲上 後五日次之 再五日又次之, 然驗之 東茶 穀雨前後 太早 當以立夏前後 爲及時也)”


고 하였다.

 

이제는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한반도의 아열대화가 진행되는 마당이니,

어찌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우전(雨前)이 정말 우전(雨前)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본질은 사실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우전(雨前)이라는 차가 지니는 속성,

즉 ‘엄동설한을 이겨낸 차나무에서 새싹이 나와 이제 겨우 참새 혓바닥만한 크기가 된 어린 찻잎으로 만들어 은은하고 순한 맛을 내는 차’라는 데 의미를 둔다면,

달력상의 날짜에 집착하여 우전(雨前)이니 아니니 운운할 일은 아니다.

결국 시대와 상황에 맞게 우전(雨前)을 해석하면 되지 않을까.     

 

이렇듯 세상이 변함에 따라 말도 그에 맞추어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여야 하는 것은 우전(雨前)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전임자들의 임기가 끝남에 따라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새로 임명하는 문제를 놓고 계속 논란이 분분하다. 참으로 조용할 날이 없다.

얼마 전에 어느 일간신문에 실린 칼럼이 생각난다. 아래에 일부를 인용하여 본다.
(전문은 (https://news.joins.com/article/23431168 참조)

 

망징(亡徵)은 나라가 망할 징조를 뜻하는 말이다.

한비자(韓非子)라는 중국 고대의 정치가가 44가지 망징을 예시하였다.

오늘날 눈여겨 볼 만한 대목 몇 가지를 뽑아봤다.

망징.jpg

인사, 외교, 사법, 국방, 상벌, 보훈, 산업 등 국가의 여러 영역에서 생길 수 있는 병증이 실무적으로 제시됐다. 한비자가 살던 시대는 약육강식의 패권적 국제질서가 지배한 1인 군주의 왕국 체제였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와 수평적으로 비교할 수 없겠다. 그렇지만 사람의 본성과 정치의 생리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비자한테 한 수 가르침을 받는다 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위 칼럼은 한비자의 망징(亡徵)을 우리나라의 현 상황에 대비하여 세밀하게 분석한 후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맺는다.

 

한비자는 망징의 마무리를 다음과 같이 장식한다.  “원래 망징이라 함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멸망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 나무가 부러지는 것은 좀벌레가 속을 갉아 먹었기 때문이고, 제방이 무너지는 것은 어딘가 틈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벌레가 먹었더라도 강풍이 불지 않으면 나무는 부러지지 않을 것이며, 둑에 틈새가 있다 해도 큰 비만 내리지 않으면 무너지지 않는다.” (중략) 좀벌레를 찾아 처리하고 틈새를 찾아 메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강풍과 큰 비가 와도 나라는 끄떡없을 것이다.

 

위 칼럼의 글쓴 이의 말대로 한비자가 살던 시대와 지금의 시대는 다르다.

따라서 한비자가 말한 망징(亡徵)과 위 글쓴 이가 생각하는 망징(亡徵)이 같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일갈하고 있는 망징(亡徵)의 저변에 깔려 있는 근본적인 충정만큼은 같지 않을까 싶다.

한낱 무지렁이 촌부는

우전(雨前)은 우전(雨前)이 되더라도 망징(亡徵)은 망징(亡徵)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괜한 노파심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