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심전전야(憂心輾轉夜)

2020.09.27 10:36

우민거사 조회 수:523


닷새 전에 추분(秋分)이 지나고 완연한 가을이다.

아침 기온이 15도 밑으로 내려가고,

해가 눈에 띄게 짧아지더니 이젠 오후 6시가 조금 넘으면 이내 사위(四圍)에 어둠이 짙게 깔린다.

‘秋月揚明輝(추월양명휘. 가을은 달이 높이 떠 밝게 비춘다)’라고 했던가,

맑은 날씨가 이어지는 덕분에 달이 밝게 빛나건만,

그 달에서 온기를 느끼지는 못한다.

봄에 모내기를 한 논을 보며 설레었던 벌판은 황금빛으로 변하고,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가 정겹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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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기운이 여실하게 도는 금당천에 아직 남은 백로가 외로이 서 있다.

왠지 쓸쓸해 보이는 것은 촌부만의 생각일까.

동료들은 다 따뜻한 곳을 찾아 남쪽으로 날아갔건만

저 백로는 왜 홀로 남아 개울가를 맴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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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백로를 바라보면서 이순신 장군의 시를 한 수 차용해 어쭙잖은 흉내를 내본다.   

 

金堂秋光暮(금당추광모)
驚寒白鷺孤(경한백로고) 
憂心輾轉夜(우심전전야)
殘月照茅屋(잔월조모옥)

 

금당천에 가을빛이 저무니
찬 기운에 놀란 백로 외로이 서 있고
이런저런 걱정에 잠 못 이루는 밤
아직 남은 새벽달이 누옥을 비추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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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자기도 법관이었고,

지금은 명색이 한 나라의 법무부 장관 직책에 있는 사람이,

법원, 검찰을 정권에 순종하는 기관으로 만드는 것을 사법개혁, 검찰개혁이라고 우기는 것을

멀쩡한 눈으로 바라만 보아야 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어찌 ‘우심전전야(憂心輾轉夜)’가 아니랴.

 

그런데 이보다 더한 일이 발생했다.
북한 해역에서 표류하던 해양수산부 소속 어업지도원인 우리 국민을

북한군이 사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천인공노할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긴급 소집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은 없었다.

그 시각에 아카펠라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국정 최고책임자가 어디 있었냐고 난리 치던 모습이 겹쳐진다.


청와대, 국방부, 통일부, 국회...

관련된 곳이라면 모두 나서서 북한을 규탄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미안하게 됐다’는 김정은의 말 한마디에 언제 그랬냐는 듯 꼬리를 내린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김정은을 ‘계몽군주’라고 치켜세우기까지 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참담하다.
금당천변에 사는 일개 촌부조차 계속 ‘우심전전야(憂心輾轉夜)’를 해야 하는 걸까.
문득 득통(得通. 1376-1433년) 선사의 시가 떠오른다.

 

步月仰看山疊疊(보월앙간산첩첩)
乘風俯耳水冷冷(승풍부이수냉냉)
道人活計只如此(도인활계지여차)
何用區區順世情(하용구구순세정)

 

달빛 따라 걷다가 고개 들어 첩첩산중 바라보고
바람 타고 가다가 귀 기울여 졸졸 물소리를 듣는다
도인의 사는 이치 이와 같으니
어찌 구구하게 세상사에 매이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온갖 상념에서 벗어나려고,
도인의 흉내라도 내보려고,
뜨락으로 나서니 가을꽃이 만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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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점봉산 곰배령 천상의 화원에서 보았던 온갖 종류의 야생화가 참으로 아름다웠는데,
지금 뜨락에서 보는 이 꽃들이 훨씬 더 예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일찍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 그 답을 가르쳐 주었다.

 

折取百花看(절취백화간)
不如吾家花(불여오가화)
也非花品別(야비화품별)
祗是在吾家(지시재오가)

 

백 가지 꽃을 다 꺾어 와 보아도
내 집에 있는 꽃만 못하네
이는 꽃이 달라서가 아니라
단지 내 집에 있기 때문일세      

 

그나저나 저 꽃들은 어지러운 세상사를 알까.

촌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듯,

꽃들이 한마디 하는 것 같다.

 

不義而富且貴(불의이부차귀)於我(어아)如浮雲(여부운)이라.

(의롭지 못한 부귀와 권세는 나에게는 한낱 뜬구름일 뿐이다)

 

환청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