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의거사

                                                                

                                                              퇴 임 사

 

지난 1월 1일 새벽 대법원장님을 모시고 법원산악회에서 대관령 능경봉으로 신년 일출산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체감온도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 속에서 동해바다 위로 떠오르는 붉은 해를 바라보면서 천지신명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제가 9월 16일까지 대법관으로서 남은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영광스럽게 퇴임할 수 있게 하여 달라고 말입니다. 그 기도 덕분인지 모르겠으나 오늘 저는 지난 32년간의 법관생활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러한 영광스럽고 귀한 자리를 마련하고 참석해 주신 존경하는 대법원장님과 여러 대법관님을 비롯한 법원 가족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진심 어린 도움이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제가 6년간 대법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지근거리에서 저의 머리와 손과 발이 되어 충심으로 저를 도와주신 신동훈 부장판사님을 비롯한 전속조와 공동조의 재판연구관님들, 김인숙 비서관님을 비롯한 비서실 식구들의 헌신적인 노고에 각별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과 함께 일할 수 있어 즐겁고 행복하였습니다.

아울러, 처음 법관으로 임용된 이래 지금까지 오랜 기간 묵묵히 저를 믿고 따라준 가족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진정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가족들의 후원이야말로 저의 법관생활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목이었습니다.

저는 6년 전인 2009. 9. 17. 대법관으로 취임하면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송사를 처리함에 있어 근본은 성의를 다하는 데 있다(聽訟之本 在於誠意)’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국민이 대법관에게 부여한 소명과 책무를 열과 성을 다하여 수행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취임 당시의 약속을 잘 지켰냐고 스스로에게 자문할 때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람풍(風)자를 놓고 나이 든 훈장님은 ‘바담풍’이라고 읽더라도 어린 학동은 ‘바람풍’이라고 읽어야 하듯이, 저는 후배 법조인들에게 ‘청송지본은 재어성의’라는 다산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드리고자 합니다.

무릇 재판은 당사자의 말을 듣는 것이 핵심이어서 청송(聽訟)이라고 하였고, 그 청송을 함에 있어서는 성심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사자의 말을 성심을 다하여 들을 때 비로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신(神)이 아닌 이상 설사 100% 적중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답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心誠求之 雖不中 不遠矣).

이처럼 성심을 다하여 들은 후 판단을 옳게 함에 있어서는 ‘공자명강(公慈明剛)’이 요구됩니다. 공정함, 자애로움, 명백함, 그리고 굳셈이 그것입니다. 공정하면 치우치지 않고, 자애로우면 모질지 않으며, 명백하면 능히 환히 밝힐 수 있고, 굳세면 단안을 내릴 수 있습니다(公則不偏  慈則不刻  明則能照  剛則能斷). 공정을 잃은 자애는 봐주기나 편들기가 되고, 명백하지도 않은 채 굳세기만 하면 독선과 아집으로 흐르게 됩니다. 실로 법을 다스리는 사람에게 필수적인 덕목이라고 할 것입니다.

근래 우리 사법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를 둘러싸고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법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위해서는 사법부의 종사자들뿐만 아니라 정치권을 비롯하여 모든 국민이 함께 노력하여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일선에서 재판에 임하는 법관들이 성의를 다하여 당사자의 말에 귀 기울이고 이를 토대로 올바른 결론을 내린 후, 어법에 맞고 알기 쉽게 작성한 판결문으로 판결을 선고함으로써 당사자로 하여금 승복케 하는 것이 사법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지름길이 아닐까 합니다.

당사자들이 재판을 받기 위하여 법정에 들어서서 재판장을 처음 보았을 때 풍기는 엄숙한 분위기, 법대 앞에서 재판장을 마주하였을 때 피부로 느끼는 온화함, 논리정연한 진행 후에 내리는 합리적인 결론(望之儼然, 卽之也溫, 聽其言也慮), 무릇 법대 위에 앉은 판관은 이 세 가지 덕목을 갖추고 법정을 이끌어가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덕목을 갖춤으로써 모름지기 ‘선배에게는 편안함을 주고, 동료에게는 믿음을 주고, 후배에게는 본보기가 되는(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법조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법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위하여 이처럼 법관들이 노력을 기울이는 것 못지 않게 사법제도 또한 이를 뒷받침하여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대법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하급심 심리강화방안은 시의적절한 조치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법원은 어떻습니까.

현재의 사건 증가추세라면 올 연말까지 대법원에 대략 42,000건의 사건이 접수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는 대법관 12인이 처리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수치입니다. 가히 살인적입니다. 대법관들과 재판연구관들이 아무리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일해도 이미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사법 신뢰를 운위하는 것 자체가 사치스러울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최고법원으로서의 대법원의 기능을 제대로 구현하고 국민의 권리를 적정하게 구제하기 위하여는 선진 외국의 예에서 보듯이 상고제한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우리의 딱한 현실에서는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상고법원안’만이라도 하루빨리 통과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부에서 제기하듯이 직역이기주의를 내세워 반대할 때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한가로운 상황이 아닙니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길을 찾아야 합니다.

 

존경하는 법원가족 여러분, 

‘법조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의 하나가 ‘무미건조함’이 아닐까 합니다. 출근해서는 하루 종일 사건기록과 씨름하고 늦게 퇴근해서는 TV나 보다가 잠을 청하는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무미건조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후배 법조인들에게 취미생활을 할 것을 권해 왔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도 다시 한 번 그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등산도 하고, 판소리도 배우고, 서예도 배우고 하였지만, 이런 것에 국한할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창극, 오페라, 뮤지컬, 음악회, 발레, 전시회, 영화, 연극, 박물관 탐방, 여행... 등등 우리 주변에는 무미건조한 법조인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널려 있습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1주일에 두 시간만 투자를 하십시오.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다’는 것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취미생활과 아울러, 우리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눈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가 나날이 각박해지면서 여러분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대접을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조금이나마 베풀 줄도 아는 훈훈함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과거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가 현재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과거는 바뀐다고 합니다. 그래서 과거는 현재의 위치에서 재발견되고 재해석되며 재창조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돌이켜 본 저의 지난 32년은, 법정 안에서는 헌법따라 법률따라 양심따라, 법정 밖에서는 산따라 길따라 마음따라 지내온 여정으로 떠오릅니다. 저의 지나온 법원생활이 보람 있고 아름다웠던 것으로 재해석되고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리워지기까지 하는 것은 제가 법관으로서 최고의 영예로운 지위인 대법관이라는 자리에서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그동안 두 어깨에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벗어놓고 홀가분하게 법원 문을 나서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노래하고 싶습니다.

자, 이제 돌아가자.
고향 전원이 풀에 덮여 무성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그동안 저를 아껴 주신 법원 가족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무궁한 발전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5. 9. 16.


                                                                                                대법관 민 일 영